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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너에게 가는 길
작가 : 사파이어
작품등록일 : 2019.11.10

우주에는 ‘넵툰’이라는 청록색의 신비로운 행성이 있다. 그 곳에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그의 딸 ‘라미아’가 거대한 왕국을 이루며 살고 있다.
우주에서는 삶이 무한하고, 아름다움도 사그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반복되는 삶에 우울증에 빠진 ‘라미아’가 아버지에게 ‘지구’로 보내달라고 간청하는데, 아버지는 심하게 반대를 하다 결국 3년 안에 돌아오라는 약속을 하며 허락한다.
‘라미아’는 한 남자를 만나게 되면서 어떤 범상치 않는 기억을 떠올리게 되는데...

 
11회
작성일 : 19-11-10 23:14     조회 : 200     추천 : 0     분량 : 9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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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젯밤, 레우키포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모두가 믿었던 그 순간, 사실 그는 숲 속에 있었다. 숲 속은 어둡고 침침했다. 한밤중에 누가 숲 속에 나타나지도 않겠거니와 아무도 그를 발견하지 못할 정도로 어둠은 깊게 내리 깔려 있었다. 숲 속의 나뭇잎들이 모두 까맣게 변해 축 늘어져 버렸다.

 밤새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레우키포스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어 있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고작 그 정도의 일이 그의 기분을 더 좋게 하거나 더 나쁘게 만들리 없었다. 레우키포스의 마음은 가차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레우키포스도 자연의 섭리를 오랫동안 신봉해왔다. 레우키포스는 특히 자연에 깃들여 있는 정령의 존재에 매료되었다. 아름다운 자연은 그 자체보다 더 아름다운 정령들을 저마다 품고 있었다. 날씨가 아주 화창한 날에 숲이나 들판에 가면 정말 운이 좋은 날에는 정령들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새들이 소리 높여 울다가 갑자기 조용해지는 순간이 오면 나지막이 정령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들렸다.

 어린 레우키포스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숲을 찾아 다니며 자신에게도 운이 좋은 날이 오기만을 소원했다. 특별한 레우키포스만의 날이 밝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치 꿈처럼 처음으로 마주 하게 된 정령이 바로 숲의 요정, 다프네였다. 숲의 정령은 들판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된 토끼처럼 갑자기 그의 앞에 튀어 나왔다. 다프네는 하얗고 작은 얼굴에 대조적으로 육감적인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다프네의 머리는 진한 갈색이었지만 햇빛에 반사되어 오묘한 보라 빛을 띠었는데, 매우 길고 풍성해서 온 몸을 다 가릴 정도였다.

 다프네가 나타나면 멀리서도 그녀만의 강한 향기가 풍겼다. 다프네의 향기를 맡으면 레우키포스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다프네의 진한 향기는 멀리멀리 퍼져 나갔다. 숲의 일대에서 다프네를 모르는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 다프네가 지키고 있던 숲으로 수많은 남자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기 시작했다. 신은 물론이고, 요정, 동물, 사람까지 북적이며 숲은 조용할 날이 없었다. 레우키포스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레우키포스는 다프네에게 하루빨리 고백을 하고 그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프네, 나는 엘레이아의 왕 오이노마오스의 아들 레우키포스요.”

 “그래서요?”

 처음 만난 다프네의 말투는 차가웠다. 심지어 다프네는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녀 곁으로 다가오는 누군가를 그저 슬쩍 곁눈질 해볼 뿐이었다.

 “아름답고 고귀한 다프네, 나는 당신에게 첫 눈에 반했습니다. 나와 결혼해주겠어요? 내가 온 몸과 마음을 바쳐서 당신을 영원히 사랑하겠습니다. 그리고 나의 왕국인 엘레이아로 함께 갑시다. 그 곳에서 나와 함께 한다면 당신은 영원히 행복할 거에요.”

 “싫어요.”

 “뭐라고요?”

 “싫어요. 당신과 결혼하기 싫다고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 내 숲에서 나가주겠어요?”

 다프네는 일말의 고민조차 하지 않고 바로 레우키포스의 말을 단칼에 거절해버렸다. 더 정확하게는 그의 얼굴조차 쳐다보지 않고 말했다. 레우키포스는 자존심이 상했다. 그 자리에서 그를 받아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다프네는 레우키포스의 영혼까지 짓밟아버렸다. 천하의 레우키포스에게서도 쉽게 나올 수 있는 흔하디 흔한 고백이 아니었지만, 그는 흔하디 흔한 존재라는 듯한 취급을 받았다.

 레우키포스는 고개를 푹 숙이고 돌아섰다. 여전히 많은 남자의 시선이 다프네를 향하고 있었다. 레우키포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 날, 레우키포스는 다시 다프네의 숲을 찾았다.

 “사랑하는 다프네, 당신을 향한 내 마음은 진심입니다. 제발 내 마음을 받아주세요. 지금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언제든지 기다리겠습니다.”

 “당신은 누구죠?”

 “나는 엘레이아에서 온 레우키포스요.”

 “나는 관심 없으니 당장 숲에서 나가세요.”

 레우키포스는 다시 한 번 좌절했다. 다프네는 바로 어제 온 자신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다프네에게 그의 진심을 보여준다면 달라질 줄 알았는데, 레우키포스의 진심은 다프네에게 숲 속의 벌레만도 못한 것이었다. 레우키포스는 다프네가 무슨 약이라도 잘못 먹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남자에게 전혀 관심이 생기지 않는 끔찍한 병에 걸린 것일 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엘레이아의 후계자인 레우키포스를 보고 어떻게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것일까? 레우키포스는 이를 갈았다.

 다음 날은 사냥꾼들 한 무리가 다프네 앞에 나타났다. 사냥꾼들은 숲을 빈번하게 드나들었다. 그들은 그 곳을 지키는 정령들에게 허락을 받고 숲을 출입했으며, 숲에서 나는 아주 사소하고 작은 생명체라도 그들의 마음대로 거두어 갈 수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사냥꾼들도 숲의 정령에게 큰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포악한 동물들이 숲을 마구잡이로 헤집고 다니는 날에는 숲의 정령도 사냥꾼들의 도움이 절실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 사냥꾼 무리에는 숲의 정령도 이전에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낯선 자가 한 명 섞여 있었다. 덩치가 크고 험상궂게 생긴 남자들 사이에서 자기 몸집보다 커다란 짐을 든 어린 소녀에게 저절로 시선이 갔다. 다프네는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굉장히 앳된 얼굴의 소녀에게 호기심이 생겼다. 다프네는 소녀에게 다가갔다.

 “이 숲에는 처음 왔나 보네. 이름이 뭐야? 나는 다프네라고 해.”

 “다프네? 나는 음 저기…… 글, 글라우키아라고 해.”

 “글라우키아? 예쁜 이름이네. 나는 파르나소스 숲을 지키는 숲의 정령이야.

 마을 사람들 심부름하러 따라 나온 거니?”

 “응.”

 “그렇다면 사냥은 지루할 테니까 얼른 짐만 내려놓고 와. 내가 숲 속을 구경 시켜줄게.”

 “정말이야?”

 “그럼 정말이고 말고.”

 글라우키아는 신이 나서 짐을 내려놓고 라미아에게 금세 달려 왔다.

 “아, 그런데 한가지, 이 숲에서는 조심할 게 있어.”

 다프네는 갑자기 아주 심각한 얼굴로 글라우키아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게 뭔데?”

 “남자들.”

 “남자들?”

 “응, 남자들. 이 주변에는 할 일 없는 남자들이 가득해. 그러니까 몸을 조심해야 돼. 남자들이 함부로 숲에 들어와서 꽃과 나무들을 다 망쳐 놓는 바람에 아주 넌더리가 나.”

 “그렇구나. 그럼 어떻게 해야 돼?”

 “우리가 이렇게 함께 다니는 거야.”

 다프네는 방그레 미소를 지으며 글라우키아의 손을 꼭 잡았다. 글라우키아는 기분이 좋아 활짝 웃었다. 깊게 패인 소녀의 눈이 반짝거렸다.

 다프네는 옆에서 다정히 손을 맞잡은 글라우키아의 뒤를 따라오는 길고 어두운 그림자를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레우키포스는 다프네와 비슷한 나이대의 소녀로 변장한 것이 아주 잘 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했다. 다프네는 글라우키아로 변장한 레우키포스에게 천사 같이 다정했고, 영원히 그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레우키포스는 월계수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난 수풀 근처에서 오래 전부터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날카로운 눈빛을 발견했다. 숲 속에 단단히 몸을 숨기고 있었지만, 그의 정체는 쉽게 숨겨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올림포스 열 두 신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이름은 아폴론이었다.

 아폴론이 다프네에게 사랑을 고백했지만 끝내 거절당했다는 사실은 일대에 모르는 이가 없었다. 거절 당했으면 그만이지, 왜 다프네 주변을 서성이며 떠나지 않는 것인지, 레우키포스는 짜증이 났다.

 “글라우키아, 우리 목욕하러 갈래?”

 “목욕? 난 싫어. 난 정말 싫어.”

 레우키포스는 다프네에게 두 손을 모두 들어 보이며 완강한 거부 의사를 내비쳤다.

 “숲의 정령들이 모두 같이 가기로 했어. 너만 빠지면 너무 서운할 거야.”

 “아니, 나는 절대 안 갈 거야.”

 “그 이유가 뭔데?”

 “이유는 없어. 그냥 싫다고. 그러니까 목욕은 너희들끼리 해.”

 레우키포스는 다프네 앞에서 절대 옷을 벗을 수 없었다. 레우키포스는 아예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감쪽같이 변장을 했지만, 그렇다고 근본적인 모습까지 모두 바꿀 수는 없는 것이 자연의 이치였다. 만약 레우키포스의 속살이 아주 살짝이라도 드러나게 된다면, 그는 정체가 들통 나는 것은 물론 온 세상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었다.

 다프네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계곡까지는 같이 갈 거지?”

 “그래.”

 레우키포스는 마지못해 다프네를 따라 계곡까지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리고 계곡에 도착하자마자 커다란 바위를 끌어안고 앉았다. 절대 물 속에는 들어가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다프네와 친구들은 절대 목욕을 할 수 없다는 레우키포스의 태도가 아무래도 이상했다. 그리고 장난기가 발동했다. 레우키포스는 다프네와 친구들이 소곤거리는 소리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그저 소녀들이 옷을 홀딱 벗고 즐겁게 목욕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한 숨을 돌리고 있었던 찰나였다.

 숲의 정령들이 물에 흠뻑 젖은 채로 레우키포스에게 마구 달려 들었다. 레우키포스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속수무책이었다. 순식간에 레우키포스의 옷이 거의 찢겨지다시피 한 쪽으로 벗겨졌다. 놀란 것은 레우키포스만이 아니었다. 다프네는 극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다프네, 사랑하는 다프네. 당신을 너무, 너무 사랑해서 그랬어요. 나를 용서해줘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 사랑을 증오하게 만드는 행동을 거침 없이 하는 남자들 때문에 괴로움과 외로움을 동시에 느끼던 다프네에게 어느 날 나타난 글라우키아는 영혼의 단짝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그런 그가 사실은 남자라니, 그것도 그녀가 경멸해 마지 않는 거짓말로 사랑을 속삭이려 하다니. 다프네는 품 속에 감추고 다녔던 칼을 뽑았다. 그리고 거침없이 그의 심장을 찔렀다. 레우키포스의 심장에서 피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레우키포스는 끔찍한 고통을 느꼈다.

 “으악.”

 파르나소스 숲에서 피를 흘리며 무참히 죽고 말았던 레우키포스는 넵툰에서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다시 살아났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 의해 다시 깨어나던 순간, 레우키포스에게 가장 먼저 떠오른 기억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죽던 마지막 순간이었다. 죽음의 순간이 그의 기억 속에 아주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상처에 대한 고통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와 레우키포스를 덮칠 때, 태연하고 냉정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던 너무나 아름다운 다프네의 모습이었다.

 레우키포스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렀다. 자신의 죄는 한 여자를 너무 사랑했던 죄뿐이었고, 다프네는 비정상적으로 레우키포스를 경멸하고 무시했다. 심지어 이 고통을 다시 한 번 겪게 되다니, 이 모든 것이 다프네 때문이었다. 레우키포스는 다프네를 용서할 수 없었다. 레우키포스는 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다프네를 죽여 버리겠노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레우키포스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방황했다. 포세이돈은 참다 못해 결국 그를 넵툰에서 추방해버리고 말았다.

 넵툰에서 추방되어 수천 년 동안 온 우주를 방황하던 레우키포스가 결국 아주 작은 행성에서 다프네를 발견했다. 순간, 온 세상의 불이 꺼지고 유일하게 보이는 것은 그녀와 그, 둘뿐이었다.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 무뎌지고 녹슬어 버렸다고 생각했던 오래된 장난감 악기가 갑자기 다시 연주를 시작했다. 눈물 날 정도로 감동적인 음악이 온 세상으로 울려 퍼졌다.

 우주가 멈추고, 그의 심장도 멈춰 버렸다. 라미아와 삼라바의 등 뒤에 서있는 다프네를 발견했을 때, 레우키포스는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 붙고 말았다.

 어쩌면 다프네를 다시 못 볼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었다. 예상보다 길어진 시간 동안 다프네에 대한 그의 결심은 그대로일까? 겨우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숲으로 몸을 숨긴 레우키포스는 밤이 새도록 스스로에게 물었다. 다프네에 대한 지금 그의 감정은 무엇이란 말인가? 아니다, 레우키포스는 다프네를 용서하겠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마치 파르나소스 숲에 가득했던 다프네의 향기가 코 끝에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레우키포스는 생각의 끝을 붙잡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의 복잡한 마음은 좀처럼 매듭 지어지지 않았고, 무작정 다프네를 찾아 바닷가로 나왔다.

 한낮이 되도록 날씨는 흐렸다. 레우키포스는 이번에는 김정기의 집 뒤쪽으로 난 좁은 길에 서서 그의 집과 해변을 한꺼번에 주시하고 있었다. 레우키포스는 일부로 길 모퉁이의 나무 그늘 안에 숨어 있었다. 한적한 시골길은 오고 가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정오가 되고 드디어 홍채현이 집 밖으로 혼자 나왔을 때, 레우키포스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와 함께 걸으니 수천 년 전의 그 때로 되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까마득한 옛날에도 레우키포스는 지금처럼 하염없이 그녀를 바라보곤 했었다. 그녀가 가는 길을 따라 그의 눈동자가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녀를 보며 찬란한 미래를 꿈꾸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자 한 번 죽고 없어졌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영혼이 진짜로 되살아 나는 듯 했다.

 “지나야.”

 뒤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홍채현과 레우키포스가 함께 뒤를 돌아봤다. 아침 일찍 먼저 집을 나섰던 김정기였다. 레우키포스는 중요한 순간에 나타나 그들을 훼방하는 존재가 마냥 반갑지 않게 느껴졌다.

 “지나야, 너 요즘 왜 자꾸 우리 동네에 오는 거야?”

 채지나의 모습을 한 레우키포스가 반갑지 않은 것은 김정기도 마찬가지였다. 김정기의 말투는 평소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날카로웠다. 아무래도 최근에 채지나와 라미아 사이에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 때문에 김정기는 매우 예민해져 있었다. 더구나 평소에 그리 친한 사이도 아니었던 채지나는 불현듯 단기 사무직을 알아봐주겠다고 연락해오더니, 이제는 그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채지나가 가지고 있는 이 불순한 의도가 김정기를 향한 것인지, 아니면 오히려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이라고 생각했던 라미아를 향하고 있는 것인지, 그는 알아야만 했다.

 “정기씨, 너무 몰아붙이지는 말아요. 지나씨도 사정이 있는 것 같은데.”

 레우키포스가 대답하기 전에 홍채현이 먼저 김정기ㄹ를 타이르듯 말을 건넸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채현씨도 혹시 아는 거 있어요?”

 “아니요, 저는 잘 몰라요. 그럼 저는 먼저 들어갈게요.”

 홍채현은 황급히 자리를 피해 집으로 향했다. 레우키포스는 홍채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홍채현과 더 오래 함께 하고 싶었지만 결국 마땅한 핑계거리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리고 속도 없이 불쑥 나타난 김정기를 보니, 미간에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뒤를 돌아 김정기를 보는 순간, 채지나의 얼굴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그냥 나는 네가 걱정돼서.”

 “무슨 걱정? 아니, 그것보다…… 밖에서 라미아와 단 둘이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한 거야? 둘 사이에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기라도 한 거야?”

 “내 말이 바로 그거야. 너를 대하는 라미아의 태도가 아무래도 좀 이상한 것 같아.”

 “라미아가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도대체 너 왜 그래?”

 “라미아가 우리랑 똑같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지?”

 “너…… 어떻게 알았어?”

 김정기는 처음부터 라미아와 삼라바가 범상치 않게 느껴졌었다.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볼 수가 없는 신비로운 기운이 있었다. 둘이 남해에서 다시 만나게 됐을 때도 그건 우연이 아닐 거라고 직감했다. 하지만 김정기는 그것을 운명이라고 정의하고 싶었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유난히 라미아가 그의 눈에 띈 것도, 거짓말처럼 그가 가는 길에서 라미아를 다시 만나게 된 것도.

 그런데 점점 커져가는 이상한 느낌을 애써 누르고 있었던 김정기는 그의 눈을 의심했다. 비가 몹시도 요란하게 퍼붓던 어느 날, 밖에 나갔다 돌아온 라미아와 삼라바의 몸이 하나도 젖지 않고 깨끗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둘은 그것을 전혀 이상하다고 여기지도 않는 눈치였다. 사실이 아니길 바랬던 슬픈 현실은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사실 라미아와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있던 사이야.”

 “그게 정말이야? 어떻게 아는 사이야?”

 “어린 시절에 한 동네에 살았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정말 라미아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거야?”

 김정기는 채지나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고 싶지 않았지만, 둘이 정말 어린 시절부터 아는 사이였다면 라미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라미아는 네가 상상하지 못할 만큼 아주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 그래서 너와 함께 할 수가 없대. 라미아는 정말 너를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 그런데……”

 “그런데……”

 “라미아는 한 곳에 정착해서 살지 못하는 운명을 타고 났어. 만약 라미아가 사랑하는 누군가를 만나서 한 곳에 정착해서 살게 되면 라미아의 특별한 능력이 한순간에 소멸돼버리고 말 거야.

 만약 나라면, 난 내 모든 걸 버리고 사랑을 선택할 거 같아. 그런데 라미아는 그렇지 않은 가봐. 라미아는 자신이 가진 능력을 지키기 위해 널 떠나려고 한다고.”

 김정기는 채지나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그저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이었다.

 ‘똑똑’

 어젯밤 늦은 시간에 라미아는 김정기의 방문을 두드렸다. 라미아는 슬퍼 보였다.

 “내가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나를 믿고 따라와줄 수 있어요?”

 “네…… 그럴게요.”

 “진심이에요? 아니, 이해가 안돼요. 당신은 어떻게 내가 하는 말이 뭐든 다 좋다고만 하죠?”

 “글쎄요. 당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는 것보다 당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뭐든 있는 게 좋은 거 아니에요? 그냥…… 당신에게만큼은 뭐든 다 해주고 싶어요.

 그러니까 이제 울지 말아요. 당신만 보면, 당신만 보면 이상하게 내 마음이 아파요. 이제 내가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게요. 당신을 웃게 해줄게요.”

 어젯밤에 희미하게 웃던 라미아의 미소가 떠올랐다. 라미아는 정말 떠나려고 마지막으로 김정기를 찾아왔던 것이었을까? 그런데도 김정기는 라미아가 자신과 함께 하기를 원한다고 생각했었다니. 그는 길을 잃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언젠가부터 혼자 걷는 게 더 익숙했던 길인데, 왜 갑자기 외롭게 느껴지는 지 모르겠다. 왜 갑자기 그녀가 없이 혼자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지 모르겠다.

 “김정기,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내가 도와줄게.”

 “도와준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무슨 방법이라도 있다는 거야?”

 “방법이 없어도 찾아야지.”

 “하지만 나…… 나는 라미아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나는 어떻게 되든 상관 없어.”

 “라미아에게 있는 특별한 능력을 당장 없애라고 설득해. 그러면 영원히 함께 할 수 있어.”

 “뭐라고? 아무리 그래도 능력을 없앤다니……”

 “라미아의 능력이 없어지면 불행해질 것 같아? 천만에. 오히려 라미아는 어릴 적부터 가지고 있었던 자신의 능력 때문에 늘 괴로웠어. 그러니까 네가 라미아를 정말 사랑한다면 이제부터는 그녀를 자유롭게 살게 해줘. 그럼 너도 좋고 라미아도 좋은 거잖아.”

 김정기는 친구인 채지나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 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요즘 들어 채지나의 행동은 아무래도 좀 미심쩍었다. 게다가 그는 채지나에게서 이상한 모습을 보았다. 그것은 마치 영혼이라도 빼앗아갈 것 같은 악마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도 라미아가 떠난다는 말에 김정기는 흔들렸다. 채지나의 진짜 모습이 악마일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할 수만 있다면 모른 척 하고 싶어졌다. 김정기에게 라미아가 누구인지, 라미아가 어떤 모습인지, 라미아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채지나가 말하는 라미아의 능력이 정말로 있든 없든 김정기에게는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라미아는 어떨까? 김정기의 일방적인 생각이 사랑을 앞세운 이기적인 선택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 거야?”

 “라미아를 설득해서 나에게 데리고 와. 그러면 내가 바로 라미아의 능력을 없애줄 테니까.”

 “뭐라고? 채지나, 네가 어떻게……

 그, 그럼 만약에 뭔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네가 다시 되돌릴 수도 있는 거야?”

 “그럼, 난 모든 걸 다시 되돌릴 수도 있지.

 일단 라미아의 능력을 없앤 다음에...... 그 때 다시 생각해보는 거야. 어때?”

 김정기는 채지나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 봤다. 채지나의 입이 까맣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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