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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너에게 가는 길
작가 : 사파이어
작품등록일 : 2019.11.10

우주에는 ‘넵툰’이라는 청록색의 신비로운 행성이 있다. 그 곳에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그의 딸 ‘라미아’가 거대한 왕국을 이루며 살고 있다.
우주에서는 삶이 무한하고, 아름다움도 사그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반복되는 삶에 우울증에 빠진 ‘라미아’가 아버지에게 ‘지구’로 보내달라고 간청하는데, 아버지는 심하게 반대를 하다 결국 3년 안에 돌아오라는 약속을 하며 허락한다.
‘라미아’는 한 남자를 만나게 되면서 어떤 범상치 않는 기억을 떠올리게 되는데...

 
9회
작성일 : 19-11-10 23:13     조회 : 194     추천 : 0     분량 : 12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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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미아.”

 라미아는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놀라서 잠에서 깼다. 다친 곳은 아무데도 없었지만, 여전히 꿈이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심장이 뛰는 소리가 마치 그녀의 귓가에서 울리는 듯 강하게 느껴졌다.

 라미아는 그녀가 깨어나는 순간, 김정기가 침대 옆에서 마치 아주 가까운 사람처럼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밤새 라미아 곁을 지켰던 김정기의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리고 옆에는 늘 그렇듯이 별 일 아니라는 듯한 표정으로 라미아를 바라보고 있는 창백한 얼굴의 삼라바가 서있었다. 삼라바는 당장이라도 라미아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참고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라미아는 꿈 같이 나타났다 사라진 이야기가 자신이 그토록 알고 싶어 했던 잊혀진 기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앞에 있는 두 남자가 다르게 보였다. 삼라바는 진작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삼라바는 라미아가 모든 것을 아는 것이 라미아 자신을 위해 좋은 선택이 아니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삼라바는 그녀의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라미아에게 그가 정말 좋은 친구인지 아닌지 갑자기 헷갈리기 시작했다.

 “따뜻한 물 좀 가져올게요.”

 김정기는 라미아와 삼라바의 눈빛을 보고는 그들이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다는 것을 눈치 채고 잠시 둘 만의 시간을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라미아, 레우키포스가 너에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나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이제 괜찮아.”

 라미아는 힘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앉았다.

 “라미아, 너는 강한 아이니까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레우키포스한테 죽을 수도 있었어.”

 “삼라바도 알고 있었어?”

 “뭘?”

 “김정기가…… 그 아카마스라는 거.”

 “아니, 나에게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어. 어찌된 일인지 그가 태어난 시간도 맞지 않았으니까. 나도 포세이돈을 만나고 오면서 알게 됐어.

 라미아, 레우키포스는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너에게 접근했어. 네가 지워버린 과거를 기억하게 만든 것도 분명히 어떤 목적이 있어서 일거야. 그 목적이 뭔지 반드시 알아내야 해.”

 “지금 그건 나에게 중요하지 않아. 삼라바, 왜 나에게 아무 말도 안 했어? 삼라바라면 나에게 귀띔이라도 해줄 수 있었잖아.”

 “내가 미리 말했다면 네가 지금보다 더 행복했을까?”

 라미아는 스스로에게 물어봐도 쉽게 답을 할 수 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 먼저 사실을 이야기해줬다면 라미아는 정말 지금보다 더 많이 행복했을까?

 “라미아, 넵툰에서 봤던 레우키포스의 모습, 기억 나?”

 “글쎄…… 잘 기억은 안 나. 그런데 레우키포스는 항상 화를 내고 있었지. 그러다 갑자기 떠났고. 레우키포스가 왜 넵툰을 떠났는지 알아? 그리고 왜 이제서야 나를 찾아왔는지.”

 “그건 나도 잘 몰라. 하지만 포세이돈이 억울한 모습으로 죽어 있는 레우키포스를 살려 넵툰으로 데리고 오게 되었다는 건 알아. 그렇게 다시 살게 된 자가 왜 그토록 분노에 차있었을까?”

 라미아는 대답 없이 삼라바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봤다.

 “그 자가 두 번째 기회에 감사하지 못하고 넵툰을 떠날 거라는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포세이돈도 그를 다시 살리지 않았겠지. 하지만 레우키포스는 다시 새 생명을 얻었다는 사실보다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 모든 것을 기억하고 분노했어. 그 자의 생각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레우키포스는 분명 넵툰을 떠나 지금껏 자신을 죽인 자를 찾아 헤매고 다녔을 거야.

 그렇다면 누군가는 절실하게 바라 마지않았을 새 삶이 그에게도 축복 같은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레우키포스가 심지어 자신이 죽던 순간까지 모든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는 게 그를 위한 선택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어. 그렇기 때문에 레우키포스가 지금까지 어떤 형태로든 포세이돈이나 넵툰에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을 지도 몰라.

 라미아, 지금이라도 너무 기억을 되살리려고 애쓰지마. 그 때의 내가 선택이 너 자신에게만큼은 최선이었다고 생각해.”

 라미아는 어린 시절 한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넵툰에서 있었던 전투 훈련에서 라미아가 몇 번을 시도해도 그녀가 만들어낸 물보라가 표적에 정확하게 맞지 않았다. 다른 형제들은 대게 의연한 표정으로 서서 한 손으로 연습을 하곤 하는데, 다급해진 라미아가 왼 손과 오른 손을 번갈아 가며 마구 휘둘러도 물보라는 힘을 쓰지 못했다. 그런 라미아의 모습이 우스웠는지 형제들은 웃기 시작했고, 그 중에도 늘 라미아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타피오스가 큰 소리로 비웃으며 말했다.

 “어디 가서 아버지 이름을 함부로 이야기하지 마라. 적을 상대할 자격조차 없는 라미아.”

 라미아는 얼굴이 시뻘개져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라미아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특히 누군가와 맞서야만 할 때, 자신도 모르게 망설이는 순간이 왔을 때 희한하게 그 때가 자주 떠올랐다. 잊고 싶지만 잊을 수 없는 기억이기도 했다. 잊으려 할수록 더 많이 기억났다. 그리고 라미아가 정말 화가 나는 것은 그 때 어리고 능력이 부족했던 자신이 아니라, 수많은 말들이 떠올랐음에도 끝내 그의 말을 반박하지 못했던 그녀 자신의 모습 때문이었다.

 그런데 라미아가 애타게 찾아 헤맸던 기억은 라미아에게 분명히 좋은 기억이었다. 잊고 싶지 않은 행복한 기억, 눈물이 날 정도로 가슴 벅차 오르는 기억, 그런데 왜 라미아가 그 기억을 지우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삼라바는 말하는 걸까?

 “그건 내 선택이 아니었어.”

 “아니, 라미아 그건 네 선택이었어.”

 “아버지 포세이돈이 나를 몰아세웠어. 나는 더 이상 그의 뜻을 거스를 수가 없었어.”

 “라미아, 너도 알고 있었잖아. 네가 많이 지쳐 있었다는 것을.”

 아카마스가 없는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은 지독한 고문처럼 느껴졌다. 400년이라는 시간 동안 라미아는 혼자였다. 낮에는 넵툰의 많은 형제, 자매들, 그리고 넵툰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들이 라미아와 함께였지만, 밤에 모든 이들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나면 라미아는 철저하게 혼자라는 걸 느꼈다. 라미아의 자리에는 그녀 자신 밖에 없었다. 그러면 라미아는 잠자리에 누워 그와 다시 만날 날을 생각했다. 그녀는 상상 속에서 잠시나마 웃었고, 그제서야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이면 현실이 그녀를 잠에서 깨게 만들었다. 라미아는 여전히 혼자이고, 항상 기다리는 것은 그녀이고, 어쩌면 이번에는 그가 영영 나타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번에는 엄청 늦는 것일 수도, 아니면 그가 아예 소멸해버렸다고 누군가 이야기해줄 수도 있었다. 그러면 라미아는 어떻게 해야 할까? 누가 라미아의 길고 길었던 기다림을 보상해준단 말인가?

 라미아에게 아카마스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아카마스가 없는 세상에 그녀를 묶어 버렸다. 아카마스는 라미아에게 행복을 주는 존재일까, 있던 행복조차 빼앗아가는 존재일까? 라미아의 상상 속에서조차 라미아에게 행복을 주는 일이란 아카마스가 400년 후에 나타나서 그의 반의 반도 안 되는 시간을 라미아와 함께 보내고, 또다시 사라지는 것일 뿐이었다. 아카마스가 갑자기 신이 되어 넵툰에 나타나거나 영생의 삶을 살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은 꿈조차 꿔보지 못한 불가능일 뿐이었다.

 라미아는 어린 시절부터 그녀의 형제, 자매들과 주로 사냥을 다녔다. 라미아는 자신의 거침없는 기개와 능력을 아버지 포세이돈에게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아버지로부터 온전한 사랑과 관심을 받기에는 포세이돈의 아내나 자식의 수가 너무나 많았다. 그리고 라미아의 형제, 자매들 또한 포세이돈을 닮아 저마다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을 모두 뛰어 넘으려면 월등한 무언가가 반드시 필요했다.

 온 우주 곳곳에는 신의 형벌이나 저주를 받아 끔찍한 모습으로 변하여 다른 생명을 괴롭히거나 공격하는 괴물들이 살고 있었다. 어느 가을 날, 라미아는 지중해 동부, 에게 해 남부에 있는 크레타 섬에 도착했다. 라미아와 형제들은 섬의 외곽에 있는 거대한 동굴 속에서 걸어 나오는 괴물을 보자마자 그의 정체를 한 눈에 알아차렸다.

 “미노타우로스다.”

 괴물은 그야말로 기골이 장대했다. 양 옆으로 떡 벌어진 근육질의 상체는 탄탄해 보였고, 그의 신체는 사람의 몸과 닮아 있었지만, 훨씬 더 거대하고 온 몸이 울퉁불퉁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정말 끔찍했다. 온 얼굴을 덮고 있는 진한 갈색 빛의 털들 사이로 우뚝 솟아 있는 거대한 두 개의 뿔은 과히 위협적이었다. 그는 라미아와 그의 형제들을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부리부리한 눈은 한껏 위로 올라가 있었고, 지저분하게 엉켜 있는 털들 아래로 침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포세이돈이 보내서 온 자들인가?”

 “아니, 우리는 포세이돈의 이름으로 너를 없애러 왔다.”

 가장 앞장 서 있던 라미아의 목소리에는 두려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아니, 라미아는 지금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노타우로스는 인간과 수소 사이에서 태어난 괴물로 습관적으로 인간을 잡아 먹는 것으로 유명했다. 라미아는 외모뿐만 아니라 행동도 괴물인 이 자를 반드시 죽이고 넵툰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다짐했다.

 하늘에서는 비가 내리고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쳤다. 미노타우로스의 얼굴을 덮고 있는 털이 흠뻑 젖어 그의 몰골이 더욱 사납게 변했다.

 “하하하 우습군. 저주 받은 몸으로 세상에 탄생하게 해놓고서는 이제는 나를 마음대로 없애겠다?”

 “그것은 네 업보지. 이제 저주는 끝났다. 이 세상에서 영영 사라져라.”

 “업보? 내가 뭘 잘못했지? 내가 태어날 어미를 잘못 선택한 것이 나의 잘못이라고 말하려는 것인 가? 그렇다면 너희는 잘난 네 부모를 보고 태어난 것이냐?”

 “그것도 잘못이라면 잘못이겠지. 너는 누구에게 잘못이 있다고 탓하고 싶은 거지?”

 “포세이돈.”

 “그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마라.”

 라미아는 그의 입에서 갑자기 포세이돈의 이름이 나와 깜짝 놀랐다. 이 자는 아버지 포세이돈을 만난 적이 있기라도 한 것일까?

 “포세이돈이 내 어미에게 저주를 내리지만 않았다면 내가 이런 괴물로 태어나지 않았겠지. 운명에 의해 태어난 나를 원망하지 말고, 끔찍한 괴물을 이 세상에 만들어 낸 포세이돈에게 가서 따지거라. 그가 직접 내 운명을 거두어 간다면 내 기꺼이 따르겠다.”

 “닥쳐라.”

 그의 말을 듣고 갑자기 머릿속이 뒤엉켜버린 라미아의 뒤에서 불현듯 나타난 것은 타피오스였다. 그는 기다란 창으로 그의 가슴을 향해 돌진했다. 마치 갑옷과 같은 그의 피부는 날카로운 창을 튕겨냈고, 타피오스는 그대로 뒤로 고꾸라졌다. 그 모습을 보면서 미노타우로스는 큰 소리로 비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나를 평범한 인간이라고 라도 생각했던 거냐? 오만한 것들.

 신의 자식이라고 해서 마치 자신도 똑같은 능력이라도 가진 것처럼 생각하는 것을 보니 너희들은 영원히 나를 이길 수 없으리라.”

 미노타우로스는 거세게 내리는 비를 뚫고 껑충껑충 뛰어 멀리 사라져 버렸다.

 라미아는 상기된 표정으로 쓰러진 타피오스에게 가서 손을 내밀었다. 타피오스는 라미아의 손을 뿌리쳤다. 라미아는 그 자리에 힘없이 털썩 주저 앉았다.

 “뭐야? 왜 저 괴물을 따라 가지 않은 거지?”

 “저 자가 말하는 거 못 들었어? 끔찍한 괴물을 만든 것이 아버지 포세이돈이라니.”

 “이유 따위는 상관 없다. 우리는 괴물을 죽여 버리기만 해.”

 타피오스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벌떡 일어나 형제들을 데리고 미노타우로스가 사라진 안개 속으로 달려갔다.

 그 때 누군가 라미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라미아가 얼굴을 들자 안개 사이로 나타난 햇빛에 눈이 부셔 남자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장골의 사나이가 그녀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그의 몸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라미아는 남자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 보았다. 그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군데군데 어둡게 그을려 있었지만, 처음 본 사람도 호감을 느끼게 만들 정도로 아주 잘생긴 얼굴이었다. 무엇보다 그의 웃는 얼굴은 라미아에게 지금까지의 모든 일을 잊은 채 미소 짓게 만들었다.

 아카마스는 눈 중간까지 오는 투구를 애써 올린 상태로 라미아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커다란 투구 때문인지 그의 얼굴이 더욱 작아 보였다. 아카마스의 반짝이는 몸은 사실 황금빛을 띠는 철갑으로 된 갑옷이었다. 아카마스는 황금색 투구와 갑옷을 입고 황금색 장화를 신고 있었고, 투구에는 앞쪽부터 뒤까지 길게 붉은 색의 수술이 풍성하게 달려 있었다. 그리고 한 쪽 팔에 든 둥글고 커다란 방패가 유난히 번쩍거렸다.

 “괜찮아요?”

 “네, 고마워요. 그런데 당신……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죠?”

 “근처 숲에서 훈련을 하다 잠시 나왔는데 당신 일행이 괴물과 싸우려고 하는 걸 봤어요. 혹시 몰라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겁니다.”

 “큰 일 날 뻔 했네요. 여기는 위험해요. 빨리 다른 데로 가세요. 저 괴물은 사람을 잡아 먹는 괴물이라고요.”

 “그럼 당신도 위험한 거잖아요. 어서 내 손을 잡아요. 우리 같이 이 숲을 벗어나요.”

 라미아는 당황했다. 라미아는 인간과 손을 한 번도 잡아본 적이 없었다. 라미아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라미아의 정체를 조금도 알지 못하는 인간과 손을 잡으면 그녀의 정체를 들켜 버리지 않을까? 평범한 인간이라면 라미아가 이미 죽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지도 몰랐다. 찰나의 시간 동안 수많은 생각들이 라미아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같이 여기만 도망치자는 거니까.”

 아카마스는 또다시 어린아이 같이 마냥 순수한 표정으로 라미아를 향해 웃고 있었다. 라미아는 마지못해 그에게 왼쪽 손을 내밀었다. 아카마스는 거리낌 없이 라미아의 손을 잡았다. 아카마스의 손의 온기가 라미아에게 그대로 전달되었다. 아카마스는 라미아의 손을 잡고서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더욱 그녀의 손을 꼬옥 잡았다. 두 손을 마주 잡은 채 둘은 마구 달려 숲을 벗어났다. 달리는 순간은 찰나였지만, 그들에게는 영원처럼 느껴졌다. 그를 따라 한참을 수풀을 헤치고 나오자 키가 큰 나무들이 서 있는 넓은 흙길이 나왔다.

 “이 길을 따라 가면 마을이 나와요.”

 “그럼 우리 여기서……”

 “저 길 끝까지 같이 가줄까요?”

 아카마스는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 둘은 서로의 눈을 마주 보고서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라미아는 얼떨결에 그를 따라 숲을 벗어났지만, 다시 숲으로 돌아가 형제들을 찾아 나서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이 사람과 같이 있고 싶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었다. 라미아는 아카마스의 눈을 보면서 군인이나 전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해맑은 표정을 하고 있는 자가 누구를 죽인다는 것이 상상이 되지 않았다.

 “라미아.”

 그 때 멀리서 오토스가 라미아의 이름을 부르며 헐레벌떡 뛰어 왔다. 오토스는 크레타 섬에 함께 온 그녀의 형제 중의 한 명이었다. 오토스는 인간의 몇 배나 되는 거대한 몸집으로 땅을 쿵쿵 울리며 그들에게 다가 왔다. 옆에 있던 아카마스가 그를 보고 깜짝 놀란 것 같은 눈치였다.

 “오토스, 무슨 일이야? 미노타우로스는 찾았어?”

 “타피오스가…… 타피오스가 죽었어.”

 “뭐라고?”

 “라미아, 어서 빨리 와. 이 쪽이야.”

 라미아, 오토스, 아카마스는 다시 함께 숲을 향해 뛰었다. 타피오스는 절벽 근처에 힘 없이 쓰러져 있었다. 라미아는 이 순간이 믿기지가 않았다. 라미아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어느새 맑게 갰던 하늘이 한순간에 깜깜해지고 아까보다 더 세찬 비가 하늘에서 쏟아지기 시작했다.

 라미아는 이 모든 일이 자신 때문에 벌어지게 되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미노타우로스를 처음 봤을 때 그 자는 그들을 오만하다고 비웃었었다. 헛소리라고 생각했던 그 자의 말이 어쩌면 사실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는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닌데, 라미아의 욕심과 잘못된 판단으로 자신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 중의 한 명인, 그리고 포세이돈의 소중한 아들이 죽었다.

 라미아는 어린 시절 타피오스가 그녀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 이유로 훈련에 매진했었다. 라미아는 물을 가지고 놀았고, 바람을 다스렸다. 물은 라미아의 손에 의해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변했다가 그녀의 작은 손짓 한 번에 사방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물은 꽃이 되기도 하고, 돌고래가 되기도 했다가, 라미아 자신의 얼굴이 되었다가, 갑자기 독수리로 변해 멀리 날라갔다.

 하지만 이상하리만큼 물보라는 타피오스나 어떤 표적에도 맞지 못했다. 라미아는 고민하다 삼라바를 찾아갔다.

 “라미아, 네가 네 앞의 상대방이나 표적을 맞추지 못하는 것은 네가 그것들을 헤치고 싶은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 나는 그 상대를 맞추기 위해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데 내가 도대체 뭘 잘못했다는 거야?”

 “타피오스 말이냐? 너는 타피오스를 너무 잘 알고 있다. 그가 유독 너의 앞에서는 강한 척 하지만, 어느 형제보다 약하다는 걸 네가 가장 잘 알고 있지. 그래서 네가 자칫 잘못해서 그를 공격하기라도 한다면 그가 죽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단 한 번도 그를 제대로 공격한 적이 없었던 거야.”

 “무슨 소리야? 나는 티피오스를 증오해. 티피오스가 너무 밉다고.”

 “너는 아직 증오를 제대로 모른다. 앞으로 자라면서 네가 더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진짜 증오라는 것을 알게 되면 너는 그 자리에서 그 상대를 파멸시켜 버리고 말 것이야. 그러니까 네가 그 증오라는 것을 배우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네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정의감과 용기 또한 아주 사라져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삼라바의 목소리가 그녀의 기억 속에서 또렷하게 살아났다. 라미아는 삼라바가 말했던 때가 바로 지금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녀의 가슴 속에 그 언제보다도 강렬한 증오가 밀려 올라 왔고, 이제 더 이상 그녀의 가슴을 울리는 정의나 동정 따위는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말겠어.”

 라미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토스가 그녀를 붙잡았다.

 “라미아, 안 돼. 그 괴물은 라비린토스로 들어갔어.”

 “라비린토스? 그게 뭔데?”

 “한 번 들어가면 절대 다시는 빠져 나올 수 없다는 미로.”

 “상관 없어. 난 어떻게든 상관 없어. 그 괴물을 당장 붙잡아 죽여 버리고 말 거야.”

 그 순간 갑자기 라미아의 손을 잡은 것은 아카마스였다. 더욱 차가워진 라미아의 손을 아카마스는 다시 한 번 따뜻하게 감쌌다. 쉴 틈 없이 거세게 몰아치기만 하던 파도 같았던 그녀의 마음이 다시 잔잔해지는 느낌이었다.

 “라미아, 괴물이 그 미궁에 들어간 게 확실하다면 한동안 밖으로 나오지 못할 거에요.

 우선 동생을 병원에 데리고 가봐야 하지 않을까요? 내가 당신을 도와줄게요.”

 그것이 아카마스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 때의 라미아도 선택의 기로에 서있었다. 아카마스는 그녀가 평소와는 다른 선택을 하게 만들었다. 라미아는 감정 기복이 심했다. 포세이돈의 딸이었지만, 라미아는 늘 뭔가에 쫓기듯 불안했고, 많은 형제들과 경쟁을 해야 했다.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는다고 느꼈던 라미아에게 처음으로 조건 없는 사랑과 안정감을 느끼게 해준 존재가 바로 아카마스였다.

 아카마스가 있어 라미아는 죽은 줄 알았던 타피오스를 비롯하여 그녀의 형제들을 지금까지 닥쳐왔던 숱한 위험에서부터 지킬 수 있었다. 그리고 맹목적으로 쫓아 다녔던 괴물 사냥도 멈출 수 있었다. 라미아는 실체가 없는 허상을 찾는 것을 멈추고, 삶의 본질에 대해 깊숙이 접근하는 방법을 배웠다.

 라미아의 외로웠던 바다에 등대 같았던 아카마스가 지금은 아주 평범한 옷을 갈아입고 나타나 따뜻한 물을 들고 방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라미아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오랜 기억 속에서도 처음 봤던 아카마스의 얼굴 그대로였다. 그는 처음 만났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었다. 그의 눈빛은 따뜻했고 더없이 자상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라미아, 레우키포스가 나타나면 바로 불러. 잠깐 나갔다 올게.”

 “또 친구 만나러 가는 거야?”

 “밤이 되기 전에 꼭 돌아올게.”

 삼라바는 문 밖을 나서자마자 안개처럼 사라졌다. 삼라바는 자신의 정체에 대해 일부로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김정기가 이미 어느 정도는, 아니 어쩌면 그들에 대한 대부분을 눈치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라미아,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내가 해줄게요.”

 “아니요, 지금은 아무 생각이 없어요.”

 “그래요? 그럼 좀 쉬게 내가 나가 있는 것이 낫겠죠?”

 “저기, 김정기씨.”

 “네?”

 “혹시 기억나요?”

 “뭐가요?”

 “나를 아주 오래 전에 봤다거나 그런 기억이요.”

 라미아는 아까부터 마치 김정기를 처음 본 사람처럼 자세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김정기는 당황한 표정이었지만, 여전히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당신을 만나게 된 건 얼마 안 됐죠. 하지만 아주 오랫동안 본 것처럼 친근하기도 하고, 지켜주고 싶기도 하고, 뭔가......”

 “뭐요?”

 김정기는 갑자기 뜸을 들이더니 대답했다.

 “왠지 안쓰러워요.”

 “네?”

 “겉은 강하고 화려해 보이지만 깊은 외로움이 느껴졌어요. 그래서 내가 친구가 되어 주고 싶었어요.”

 라미아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하지만 김정기가 아주 오랜 시간, 누구도 쉽게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오랜 시간 동안 라미아를 본 사람처럼 그녀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지는 순간이었다. 단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 그게 무엇인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뿐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라미아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 내가 죽이라도 끓여올게요. 잠깐만 기다려요.”

 라미아는 당장이라도 그들의 오랜 역사에 대해 그에게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가 없었던 동안의 힘들었던 이야기들을 그에게 모두 털어놓고, 지금이라도 그에게 기대고 위로 받고 싶었다. 이제는 언제 끝날 지 모르는 타이머가 불안하게 울리고 있는 폭탄이 있다고 해도 결코 먼저 뛰어 내리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이 먼지처럼 폭발하는 순간까지 그를 붙잡고 두고 싶었다. 시간은 너무나 짧았고, 황무지 같이 느껴지는 미래라고 해도 그들의 이야기는 계속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때, 라미아의 긴 머릿결이 불길하게 흩날렸다. 라미아가 앉아 있던 침대 옆으로 난 넓은 창문의 한쪽 끝이 살짝 열려 있어 그 틈을 통해 바람이 불어왔다. 라미아의 오른 뺨이 바람에 베여 살짝 피가 났다. 라미아는 얼굴을 어루만졌다.

 라미아는 얼른 고개를 들어 창문 밖을 바라봤다. 바다를 등진 채로 멀리서 길게 늘어진 어둠의 그림자가 라미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레우키포스가 돌아왔다.’

 라미아는 창문으로 통하는 바람을 타고 순식간에 레우키포스 앞에 섰다. 그의 머리를 감싸는 커다란 망토 탓인지, 이미 어두워진 하늘 탓인지 레우키포스의 얼굴이 좀처럼 보이지가 않았다. 라미아의 온 몸에 다시 한 번 소름이 돋았다.

 “라미아, 내가 경고했는데도 역시 떠나지 않았군.”

 “레우키포스,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네가 나를 찾아온 진짜 목적이 뭐야?”

 “워워 라미아, 진정해. 우리 넵툰해서 같이 지냈던 친구 같은 사이잖아. 나는 순수하게 너를 도와주고 싶어서 온 거야. 너의 얼어버린 심장을 깨지게 만든 것도 나야. 네가 다시 현실을 똑바로 볼 수 있게 만들어준 게 나라고. 삼라바는 너의 눈과 귀를 멀게 하고 자신의 꼭두각시처럼 만들려고 했지, 정말 너를 위해준 진짜 친구는 바로 나라고. 잘 생각해봐.”

 “헛소리 하지마. 네가 우리 사이를 이간질 시키려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아? 넌 넵툰에서부터 삼라바를 싫어했잖아.”

 “이것 봐. 나에 대해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군. 나는 삼라바를 싫어하지 않았어.

 그저 좋아하지 않을 뿐이지.”

 “그래, 그게 바로 너 같은 놈들이 뻔히 쓰는 수법이지. 결국 똑같은 말인데 마치 다른 말처럼 사람을 헷갈리게 만들어.”

 레우키포스는 포세이돈의 딸, 라미아가 역시나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듯 크게 웃었다. 하지만 그의 웃음은 진짜 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

 “왜 포세이돈과 삼라바는 너와 아카마스를 떼어 놓으려 했을까? 그게 진정 너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나?”

 레우키포스는 라미아의 뒤에서 그녀의 오른쪽 어깨에 손을 올려 그녀를 감싸 안는 듯한 자세로 그에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녀의 살을 파고 들 것만 같은 그의 날카로운 손톱이 서로 부딪히며 소름 끼치는 소리를 냈다.

 “그래. 난 그렇게 생각해. 난 내 가족을 믿어. 나도 지쳤었으니까. 내가 너무 힘들었어. 그리고 그건 전적으로 내 선택이었어. 나는 내 결정에 내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 다른 변명을 하고 싶지 않아.”

 “그러면 다른 방법을 찾으면 되잖아. 아카마스를 넵툰에서 살게 한다던가.

 포세이돈에게 불가능한 일이란 없다는 걸 네가 가장 잘 알고 있잖아. 그런데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다고?”

 “그건……”

 라미아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버지 포세이돈이 신의 능력을 남용하거나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는 결정을 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레우키포스는 왜 죽음으로부터 살려 냈던 것일까? 그리고 만물에게 해를 끼치는 괴물을 왜 세상에 창조해냈단 말인가?

 “참 우습지. 나를 가장 사랑한다고 말하는 자들이 오히려 가장 사랑하는 존재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하는 순간을 못마땅해하지. 그게 왜인 줄 아나?

 사랑하는 자가 떠나는 게 두려워서야. 나보다 더 좋아하는 게 생겨서 조금이라도 나에 대한 마음이 작아지는 게 두려운 거라고. 나를 위해 그 자리에 계속 남아 있도록 만들려면 자신의 행복을 포기하는 것이 좋거든. 참 이기적이지 않나?”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구나.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내가 도와줄게.”

 “뭘 도와준다는 거야?”

 “네가 넵툰을 떠나서 독립할 수 있도록 말이야. 아카마스와 영원히 살 수 있어.”

 라미아의 눈빛이 흔들렸다. 레우키포스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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