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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너에게 가는 길
작가 : 사파이어
작품등록일 : 2019.11.10

우주에는 ‘넵툰’이라는 청록색의 신비로운 행성이 있다. 그 곳에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그의 딸 ‘라미아’가 거대한 왕국을 이루며 살고 있다.
우주에서는 삶이 무한하고, 아름다움도 사그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반복되는 삶에 우울증에 빠진 ‘라미아’가 아버지에게 ‘지구’로 보내달라고 간청하는데, 아버지는 심하게 반대를 하다 결국 3년 안에 돌아오라는 약속을 하며 허락한다.
‘라미아’는 한 남자를 만나게 되면서 어떤 범상치 않는 기억을 떠올리게 되는데...

 
5회
작성일 : 19-11-10 23:10     조회 : 180     추천 : 0     분량 : 1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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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미아는 삼라바에게 심상치 않은 변화가 생겼음을 느꼈다. 항상 라미아를 지켜보던 그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어떤 장소를 갈 때도, 어떤 물건을 살 때도, 어떤 사람을 만나도 부정적이기만 했던 그의 얼굴에 아주 미세하게 표정의 변화가 생겼다. 그의 온 몸을 단단히 조이고 있던 나사 하나가 덜컥 풀린 느낌이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라미아는 그에게 일어난 변화에 대해, 아니 사실은 늘 알고 싶었던 삼라바라는 존재 그 본질에 대해 다시금 궁금해졌다. 그의 진짜 정체는 그들이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미스터리다.

 넵툰에서의 어린 시절, 삼라바는 라미아에게 바쁜 아빠나 엄마를 대신하는 존재이자 스승 같은 존재였다. 그는 40명이 넘는 포세이돈의 자녀들, 즉 라미아의 형제, 자매들을 어렸을 때부터 교육해왔다. 그는 냉철하고 사리 분별이 뛰어났으며 모르는 것이 없었고, 그들에게 온 세상의 만물을 다스리는 법을 가르쳤다.

 그의 외모는 눈에 띄게 잘생겼지만, 강렬하고 차가운 눈빛은 사람들을 그에게서 뒷걸음치게 만들었다. 에메랄드 빛으로 유난히 옅은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면 마치 눈 속에 얼음 조각이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에게서 감정이란 것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웃는 일이 없었지만, 그만큼 화내거나 슬퍼하는 일도 없었다. 라미아와 이복 자매였던 헤로필로스는 그가 언젠가 눈물을 흘리게 되는 순간이 와도 그건 보통의 눈물이 아닌 얼음 조각이 눈에서 떨어질 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덕분인지 그에게서는 삶에 대한 달관과 초월의 경지가 느껴졌다. 그것은 신이지만 아주 많은 것을 이뤄놓은 포세이돈도 다다르지 못한 경지일지도 몰랐다.

 포세이돈의 수많은 자녀들에게는 삼라바 외에도 다양한 종류의 선생님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중 라미아와 삼라바는 서로에게 각별한 존재였고,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다. 라미아는 포세이돈의 자녀들 중 아버지와 가장 많이 닮아 있었다. 가녀린 외모와는 다르게 용맹했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다.

 그녀는 모든 존재를 어떤 잣대로도 가르지 않고 공평하게 대했다. 그녀는 포세이돈 앞에서도 세상 만물이 누가 더 높고 낮다는 계층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저 각각의 존재가 강하고 약한 부분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삼라바의 기억 속에 무지개 색으로 빛나던 거대한 산호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근처에서 한쪽 팔을 괴고 누운 포세이돈의 옆에서 아버지의 팔을 베개 삼아 나란히 누워 있던 어린 라미아가 벌떡 일어나 앉아 반짝이는 눈으로 그녀의 아버지를 바라보며 그 말을 했었다. 그리고 그 때, 삼라바는 왠지 모르게 라미아가 자신의 가장 약한 부분을 알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라미아는 정말이지 포세이돈과 똑 닮아있는 것이 분명했다.

 삼라바는 분명 라미아와 가장 가까운 존재였지만, 라미아도 그녀의 형제나 자매들처럼 삼라바에 대해 완벽하게 알지는 못했다. 그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넵툰으로 왔는지, 우주 어딘가에 부모나 형제는 있는지, 그가 어떻게 살아왔고, 그와 포세이돈의 관계가 도대체 무엇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녀 또한 삼라바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고작 진짜 그의 모습을 감추고 있는 껍데기일지도 모르는 외면으로 드러나는 모습뿐이었다.

 하지만 라미아는 그를 속속들이 알지 못해도 한 번도 냉정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모두가 삼라바를 냉정하다, 냉혹하다, 무섭다, 잔인하다는 식으로 표현했지만, 라미아는 그의 껍데기가 남보다 더 단단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두꺼운 껍데기를 지게 된 것은 분명히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슬픈 사연이 있으리라 짐작했다.

 라미아는 삼라바가 자신의 이야기를 해줄 때까지 옆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삼라바는 그녀가 거의 유일하게 믿고 따르는 존재였고, 라미아가 성인이 되었을 때 그녀에게 가장 편한 친구가 되었다.

 사실 라미아는 어렴풋이 삼라바가 포세이돈 앞에서 울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어쩌면 꿈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게 언제인지,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그녀도 또렷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울던 그의 얼굴과 그녀 자신의 얼굴이 교차되어 반복적으로 떠오를 뿐이었다.

 이제는 좀 더 편안해 보이는 삼라바의 얼굴을 보며, 라미아는 그 동안 몹시도 궁금했던 것들을 들을 수 있는 때가 온 것이 아닐까 하는 기대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가 더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늘 나가지 않고 집에 있을 거지?”

 “삼라바, 또 어디 가는 거야?”

 “난 잠깐 나갔다 올게.”

 잔잔하게 물이 흐르듯 시작된 하루가 나른하게 변해버리는 정오의 시간, 거실에 누워 있던 라미아는 삼라바가 불현듯 방에서 나와 곧바로 밖으로 향하자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켜 세웠다. 삼라바는 그녀의 시선을 피한 채 거침없이 문을 향해 걸어갔다. 라미아는 재빠르게 움직여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누구 만나? 삼라바한테 친구라도 생긴 거야?”

 삼라바는 지구에 온 뒤 에메랄드 빛의 파란 눈을 숨겼다. 투명한 그의 눈을 보면 단번에 그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이 들통나고 말 것이다. 하지만 아주 가까이에서 보면 그의 눈동자가 다른 빛깔로 빛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치 눈을 통해 그의 내면까지 들여다볼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친구? 친구라고 하기는 좀 그렇고…… 오래 전에 알던 사람이야.”

 “오래 전에 알던 사람이라니? 그럼 지구인이 아닌 우리 같은 존재를 만난 거야?”

 “엄청 복잡한 이야기야. 갔다 와서 이야기해줄게.”

 현관문이 닫히자 삼라바는 잠시 서서 마치 위기를 모면한 사람처럼 안도의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문 틈으로 아직 할 말을 다 끝내지 못한 라미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진짜야. 돌아오면 꼭 이야기해줘.”

 삼라바는 약속 장소를 향해 걸으면서 라미아에게 돌아가서 해 줄 이야기를 생각해보았다. 까마득히 오래 전에 있었던 일, 평범한 인간이 제 명에 죽어서 쉬지 않고 환생했다면 참으로 무궁무진한 인생을 40번은 경험했을 그렇게 긴 시간 전부터 있었던 일을 어떻게 그녀에게 다 설명해줄 수 있을까. 삼라바의 긴 생을 통틀어 좋았던 시간은 부질없이 짧았다. 나머지는 전부 고난의 기억을 안고 좋았던 시절에 기댄 채 버텨온 시간이었다.

 삼라바는 아버지를 존경했다. 아버지에게 붙여진 수식어 중에는 불명예스러운 몇몇 호칭도 있긴 하지만, 사람들은 가장 먼저 아름다운 시와 음악으로 사람들을 치유하는 의술의 상징으로 그를 기억할 것이다. 그런 아버지의 역할을 계승하기로 받아 들였던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한때 자만하여 실수를 범하기는 했지만, 사실 그것은 신들의 영역에서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삼라바는 걸음을 멈추고 좁은 골목길로 난 한 카페의 창문을 바라보았다. 작은 가게의 한쪽 벽면 전체가 통 유리로 된 창으로 되어 있었다. 보통의 카페라면 테이블이 놓여 있을 법한 넓은 창가에 테이블 대신 월계수 나무 화분이 가지런히 줄 지어 있었다. 지중해 연안에서만 자란다는 월계수는 이제 지구 구석구석까지 침투해 생명력을 키우고 있다. 짙은 녹색으로 가장자리가 울퉁불퉁하게 생긴 두툼한 잎에서 나는 진한 향기가 투명한 창을 뚫고 삼라바의 코 끝까지 느껴졌다.

 월계수가 되었던 다프네의 마음을 상상해보았다. 그녀가 지금 아무렇지 않게 월계수 나무 뒤편에 앉아 있다. 삼라바는 문을 열고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홍채현씨.”

 삼라바는 딱딱한 말투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가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그냥 채현이라고 부르세요.”

 “채현? 그게 더 이상하지 않아요?

 “이상하다니 뭐가요?”

 삼라바는 지구에 온 후로 라미아가 아닌 다른 누군가와 단 둘이 이렇게 가까이 앉아 대화를 나눈 적이 처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꼭 말로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기본적인 몇 마디 외 사람들과 일절 대화를 하지 않았다. 사람들을 피했다는 표현이 맞을 수도 있다. 사람들은 불쑥 그에게 다가왔다. 길을 물어보기도 하고, 무슨 일인지 시간이 있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삼라바는 라미아 손을 잡고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면 어떤 과격한 사람들은 뒤에서 그들을 향해 욕을 퍼붓기도 했다.

 “이름이 세 글자인데 왜 두 글자만 부르라는 거죠?”

 “이름은 두 글자잖아요. 성까지 부르면 너무 딱딱하게 느껴져서요.

 뭐, 그럼 편한 대로 하세요.”

 예상 외의 삼라바의 반응에 홍채현은 말꼬리를 흐렸다.

 삼라바는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홍채현은 어쩐지 다른 세상에서 온 것 같은 알 수 없는 이 남자를 설득하는 일을 포기하고 정말 궁금한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제가 진짜 누구인지 알고 있다는 말, 그 의미가 뭐죠?

 아, 그 전에, 저한테 사기 칠 생각은 하지 마세요. 저는 사기 당할 돈도 능력도 없는 사람이에요.”

 “그렇네요. 홍채현씨는 내 정체가 뭔지 알고 이 자리에 나왔죠?”

 “그게 그러니까…… 그냥 듣고 싶었어요. 내가 모르는 내가 있다고 해서요. 그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요.”

 “그 이야기라면 사실 별 거 아닐 수도 있는데.”

 삼라바의 대답에 홍채현은 새로 쌓아 올렸던 기대감이 또다시 무너짐을 느끼며, 작게 한숨을 쉬더니 계속 말을 이어갔다.

 “요즘 내가 너무 싫어요. 내가 아는 내가 아니라 다른 내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거울 속에 보이는 못난이 같은 내가 아니라고,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 정말 대단한 것이 여기 숨어 있었다고 말해주는 사기꾼 같은 사람의 이야기를 한 번쯤은 듣고 싶어서요.”

 담담하게 자기 이야기를 쏟아내는 홍채현은 차분한 말투와는 달리 마치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잠시 후 고개를 살짝 들더니, 삼라바를 향해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때마침 창가에서 쏟아지는 햇살이 홍채현의 뒤에서 진한 갈색의 머리카락 절반쯤과 얼굴을 환하게 비추었다. 회전하고 있는 선풍기 바람에 그녀의 옆 머리가 살짝 날리고 있었다.

 삼라바는 이제야 비로소 홍채현이 반복적으로 했던 말들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홍채현의 오른쪽 귀부터 시작된 흉터는 가까스로 눈 아래로 비켜나가 한 쪽 뺨과 입술 절반을 덮고 있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녀의 눈 밑 오른쪽 뺨 전체가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제법 두껍게 칠해진 화장 덕분인지 그녀의 얼굴을 정면으로 봤을 때는 눈에 쉽게 들어오지 않았지만, 살짝이라도 고개를 옆으로 틀어서 본다면 아주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그녀를 덮쳤을 그 때의 상처는 그녀의 눈썹의 가장자리까지 날카롭게 베어 갔을 것이다. 홍채현의 오른쪽 눈썹 한 쪽 끝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치 무언가를 덧댄 것처럼 뭉뚝하게 그려져 있다. 왜 이제서야 상처의 존재를 알게 됐는지 삼라바 자신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제야 홍채현씨가 말한 당신의 못난 모습이 나에게도 보이는군요.”

 갑작스러운 삼라바의 말에 홍채현은 당황했지만, 이내 자신의 머리카락이 얼굴 뒤쪽으로 넘겨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홍채현은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에 가면 항상 버릇처럼 오른 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끊임없이 만지작거렸다. 머리카락이 뒤쪽으로 넘어가 조금이라도 흉터가 보이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삼라바 앞에서는 머리카락을 한 번도 만지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아차 싶어 황급히 고개를 푹 숙였다. 순식간에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그녀의 얼굴 전체를 가려버렸다.

 “당신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줄 알고. 그러니까 다리 난간에서 나를 붙잡을 때 내 얼굴을 다 봤으니까 신경 쓰지 않는 줄 알았어요.”

 “맞아요. 전혀 신경 쓰지 않았어요. 아무것도 아니니까.”

 홍채현은 그제서야 고개를 들고 삼라바를 쳐다 봤다. 그는 아무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 때는 잘 몰랐는데 지금 알게 돼서 실망했어요?”

 “아니요. 난 그렇게 말한 적이 없는데 도대체 왜 그렇게 생각하죠?”

 “당신이 아까 말했잖아요. 내 못난 모습을 알게 되었다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당신이 못났다고 생각한 적 없었어요.”

 삼라바는 이번에는 힘을 주어 말했다. 아주 짧은 순간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던 홍채현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홍채현씨가 왜 자꾸 자신이 결점투성이라느니 하는 이상한 말을 하는 건지 그게 이해가 안 됐는데…… 난 오늘 처음으로 당신의 흉터를 봤어요. 별 것도 아닌 그 흉터요.

 그리고 당신에게 실망하게 된 거에요. 고작 이 작은 흉터 하나로 스스로를 비하하고 있었던 거라니.”

 “비하라니,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저……”

 “그렇다면 결점이 없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죠? 그런 사람이 있기는 한 거에요?”

 홍채현은 그의 질문이 이해가 되지 않는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삼라바의 얼굴만 계속 쳐다봤다. 그들은 좀처럼 서로의 말이 이해 되지 않았다.

 “이 카페로 한정 지어 봅시다. 여기에서 당신이 생각하는 완벽한 사람이 있나요?”

 “완벽한 건 아니더라도 저보다 나은 사람들이야 얼마든지 있죠. 음…… 저기 저 카페 사장님이요. 얼굴도 잘생기고 카페도 운영하고 있으니까.”

 홍채현은 갑자기 고개를 낮추더니 작은 목소리로 그에게 속삭였다. 삼라바는 몸을 반쯤 돌려 홍채현이 가리키는 남자를 확인했다. 그녀는 이미 카페와 이곳의 사람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홍채현은 카페를 방문할 때마다 지금 지목한 카페 사장을 상당히 신경 쓰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녀의 얼굴이 한동안 발그레했다.

 “저 카페 사장 왼쪽 다리에 의족은요? 당신의 상처보다 덜한 건가요?”

 “다리가 의족이라고요?”

 홍채현은 삼라바의 말에 깜짝 놀라 계산대 뒤에 서있는 카페 사장을 위, 아래로 몇 번이고 계속 쳐다봤다. 남자는 무늬 없는 하얀색 반 팔 티셔츠에 검정색 일자로 된 데님 바지를 입고 있었다. 바지는 통이 넓은 편이긴 했지만, 그의 다리는 삼라바의 말과는 달리 군더더기 없이 아주 슬림 해 보였다. 더구나 남자가 걸을 때 그의 다리를 거슬리게 하는 것이나 어색한 부분이 전혀 없어 보였다.

 오히려 그를 계속 보고 있으니 정말이지 잘 생기고 훤칠한 외모라는 생각이 더욱 강하게 들었다. 남자는 계산을 마친 손님을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지금까지 이 남자에게 관심이 없었던 사람도 금방 사랑에 빠지게 만들어버릴 것 같은 예쁜 미소였다.

 그 때, 누군가 자신을 계속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한 듯 카페 사장이 고개를 내밀어 그녀 쪽을 쳐다봤다. 홍채현은 멀리서도 자신의 상처가 난 오른쪽 얼굴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흠칫 놀랐다.

 “돈이 많긴 한가 보네요. 걸을 때 거의 티가 나지 않는 걸 보니.”

 삼라바는 이미 몸을 제자리로 돌린 상태에서 냉소적으로 말했다.

 “홍채현씨는 저 남자의 다리 하나가 의족이라고 해도 상관 없나요?

 카페 사장은 오래 전부터 홍채현씨를 알고 있었을 거에요. 하지만 자신의 다리 때문에 섣불리 당신에게 다가올 수 없었죠. 그리고 당신은 얼굴 한 쪽의 흉터 때문에 망설였을 거고요.

 자, 그럼 이제 서로가 동등한 입장이네요. 그렇다면 저 남자를 받아줄 수 있겠죠?”

 “글쎄요. 그건 좀 다른 문제인 것 같은데…….”

 홍채현은 말끝을 흐렸다. 홍채현은 섣불리 대답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정말이지 남자의 다리가 의족이든 아니든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그를 봤을 때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도 않으니까. 하지만 실제로 남자의 아픈 다리를 보게 되면 기분이 어떨까? 여름에 반바지를 입어야 할 때는? 수영장이나 바닷가로 놀러 갈 때는?

 삼라바의 말대로 홍채현의 흉터에 비해 남자가 가진 것이 훨씬 더 제약이 많게 느껴졌다. 그리고 남자가 지금까지 겪었을 상처들은 그녀가 결코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삼라바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홍채현보다 못한 사람이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걸까?

 “그런데 어쩌죠? 저 남자는 홍채현씨와 같은 생각을 가진 상대를 받아들일 마음이 없다는 군요. 저 사람이야말로 누군가 자신의 다리를 약점으로 삼아 공격하면 맞서 싸우고, 그 오기로 다친 다리의 재활훈련을 아주 열심히 해서 지금의 일상을 누리고 있는 사람이니까요.

 다리가 아프니까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하죠? 천만에요. 축구도, 야구도, 심지어 수영도 못하는 게 없어요. 부단한 노력 끝에 성공한 카페 사장이 되었고, 외모며, 능력이며, 자기 관리가 출중하고 멋있는 사람이니 홍채현씨보다 훨씬 더 대단한 사람이 맞기 맞네요.”

 홍채현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뒤통수를 강하게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거짓말처럼 자신이 속으로만 생각했던 한심한 생각들이 삼라바의 입에서 그대로 흘러 나왔다.

 “또 다른 사람은요?”

 “네?”

 “이 카페에서 당신보다 더 대단하게 느껴지는 사람이 또 누가 있죠?”

 “글쎄요…… 이제는 정말 잘 모르겠는데. 저기 구석에서 노트북 펴놓고 공부하는 여자요? 예쁜데다가 일상이 여유로워 보여요.”

 “저 여자 백수 생활 10년 째예요.”

 삼라바는 그녀를 힐끔 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홍채현은 어이가 없어 실소가 나왔다.

 “거짓말하는 거죠? 사람을 잠깐 보고는 어떻게 알아요?”

 “저 컴퓨터가 국내에서 파는 가장 저렴한 브랜드 중 하나인데, 저거 몰라요? 특히 저 모델은 아마도 10년 전쯤에 나왔을걸요. 그런데 여윳돈이 없어 한 번도 바꾸질 못하고 계속 사용하고 있잖아요. 지금 인터넷 검색만 간신히 할 수 있을 정도가 된 것 같은데.

 그래도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어 옷이랑 구두를 사고, 도도한 표정으로 커피를 마시러 왔네요. 아버지는 병으로 삼 년 전쯤 죽고 어머니는 나이가 꽤 많은 것 같은데도 폐지를 줍고 다니는데도 딸이 아직도 저러고 있으니 어머니 걱정이 크겠어요.”

 홍채현은 삼라바가 괜히 너스레를 부리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말을 듣고 다시 여자를 보자 어쩐지 이번에는 그의 말이 사실처럼 느껴졌다. 여자는 카페에 온 지 반나절 정도가 지난 것 같아 보였지만, 여자의 테이블 위에는 커피 자국이 말라 붙은 지 오래 되어 보이는 빈 머그잔 하나만이 올려져 있을 뿐이었다. 테이블 위에 펼쳐진 책은 들여다보지도 않는 지 아까 본 페이지 그대로인 것 같았고, 자세히 보니 여자는 카페 사장을 비롯해서 주변 사람들을 힐끔힐끔 관찰하며 애꿎은 손톱만 물어뜯고 있었다. 화려하게 빛나던 여자의 옷과 신발을 비추던 형광등이 갑자기 푹 커져 버린 느낌이었다.

 “또 누구요?”

 삼라바는 마치 카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홍채현의 생각처럼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내기 전까지 절대 멈추지 않을 사람처럼 계속 질문을 했다. 이제 홍채현도 오기가 생겼다. 홍채현이 지목한 사람들이 우연히도 모두 특별한 사연이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정말 모든 사람들에게 크고 작은 상처가 있는 것인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자기보다 잘난 사람이 훨씬 더 많았다.

 “그럼 저기 부모님과 함께 앉아 있는 학생이요. 어리다는 게, 앞으로 창창한 미래가 있다는 게 저에게는 없는 거니까요.”

 “저기 맞은 편에 앉아 있는 사람은 학생의 친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의 여자친구예요. 뭐 그래도 홍채현씨 말대로 저 학생의 나이가 어리다는 것은 사실이죠.”

 홍채현은 삼라바가 어떻게 모든 사람들의 사정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이번에는 삼라바가 쉽게 넘어가지 못 할 사람을 제대로 고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나가 새로운 여자와 살림을 차렸고, 학생의 어머니는 몇 년 전에 죽었죠. 그리고 이제서야 아버지가 새로운 부인을 데리고 다시 아들 앞에 나타난 겁니다. 사실은 저 아버지도 죽을 병에 걸렸죠. 간경변.”

 “저 학생도 참 안됐네요. 어린 나이에 벌써 어머니에 아버지까지. 하지만 불우한 환경에서도 성공한 사람도 많으니, 가정 환경이 이제 더 이상 큰 흠이 되지 않을 수도 있죠.”

 “아버지는 아들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아무것도 준 것이 없어요. 그런데 이제는 아들이 온전히 가지고 있던 것마저 빼앗아가려고 하고 있죠. 아들의 창창한 미래를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저 학생은 졸지에 자신의 간마저 빼앗기고 또다시 부모도 없이 외롭게 살아갈 겁니다. 어쩌면 건장한 청년으로 자라면서 잘려졌던 간은 어느 정도 회복이 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자신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두 번 버림 받은 상처는 회복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저 학생은 남들보다 훨씬 더 뒤쳐진 출발선에서 인생을 시작하는 걸 수도 있어요. 아니 어쩌면 아예 거꾸로 된 방향으로 돌려진 표지판을 보고 무작정 달려 나가는 인생일 수도 있겠죠.”

 “어떻게 그런 일이……”

 홍채현은 이번에야말로 삼라바의 이야기가 지어낸 것이기를 바랬다. 그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홍채현은 저 어린 학생의 손을 잡고 당장 이 카페를 나가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또 누구요?”

 “아니요. 이제 안 할래요.”

 “저기 앉은 중년 여성이요. 저 사람은 진짜 부자 맞아요.”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학생의 숨겨진 이야기에 충격을 받고 급격히 어두워진 홍채현의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삼라바가 이번에는 먼저 한 여성을 가리켰다.

 “저 중년 여성은 이미 오래 전에 진정으로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도 했죠. 심지어 그 남자가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와 이미 결혼을 했는데, 각고의 노력 끝에 그 남자를 뺏는데 성공했어요. 그런데 남편은 결혼한지 얼마 되지 않아 후회를 하기 시작했죠. 자신이 정말 사랑했던 전 부인을 그리워하면서요. 그래서 남편은 지금의 아내를 원망하며 매일 집에서 술만 마셔요.

 그래도 다행인 건 주변 사람들은 여전히 그 부부가 행복하다고 생각해요. 집에서는 각방을 쓴 지 오래지만, 밖에서는 남편이 아내를 아주 다정하게 대하거든요. 성공한 부유한 삶에다 단란한 가정까지 모두가 부러워하는 삶을 살고 있으니 정말 행복해 보이긴 하죠.

 아직도 당신보다 훨씬 더 특별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나요?”

 “그래요. 당신 말이 맞아요. 모두가 저마다의 상처를 가지고 있죠. 저보다 훨씬 더 끔찍한 사람도 있다는 거 나도 알아요.

 하지만 그래서 뭐가요? 도대체 당신이 나에 대해 뭘 알죠? 당신은 아무 것도 모르잖아요. 당신이 내 인생을 아나요? 내 인생을 들여다봤어요? 당신에게, 그리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고작 아무것도 아닌 이 흉터가 나에게는 평생의 끔찍한 상처였다고요.”

 홍채현은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카페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상처가 자신에게 위로가 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상처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이 싫었다. 아예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라고 등 돌려 버리고 말았다면 좋았을 누군가의 상처가 자신에게까지 온전하게 전달되어 그녀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홍채현씨, 믿지 못하겠지만 난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아주 잘 알아요. 그리고 그 흉터는 당신이 짊어지고 가야 할 업보 같은 것일 수도 있어.”

 “업보요? 무슨 운명이나 팔자 같은 거를 말하고 싶은 건가요? 그래서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변할 수 없다고요? 시작도 해보지 않고 포기하게 만드는 그 말이 난 제일 싫어요.”

 “당신은 천부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죠. 모든 사람들이 당신만 바라보고 당신을 따라오죠. 하지만 당신은 아주 오래 전부터 그게 싫었어요. 그게 너무 싫어서 단단한 껍질 속에 들어가 나무가 된 존재가 있다면, 당신은 그 선택을 이해할 수 있나요?”

 홍채현은 삼라바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 표정 변화도 없이 진지하게 말하는 그에게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이 느껴졌다. 그렇게 한동안 둘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은 내가 아는 어떤 사람보다 특별한 존재에요. 당신이 수천 년 동안 잊고 있었을 뿐. 그래서 당신이 가져가야 하는 티끌 같은 대가가 있다고 생각하라는 말이에요.”

 홍채현 문득 진한 커피 향에 섞여 이 카페에서만 느껴지는 특유의 향기를 맡았다. 거짓말 같이 마음의 편안해짐을 느꼈다. 삼라바는 그런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문득 문 쪽을 힐끔 쳐다봤다. 삼라바와 홍채현은 동시에 깨달았다. 그녀의 기분 좋은 들숨에 가득한 향기가 통 유리창 바로 앞에 줄지어 있는 월계수 나무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저 학생의 외할머니가 지금 여기로 오고 있어요. 그리고 아이 아버지로부터 친권을 박탈 시키고 정식 후견인이 되면 저 학생은 아버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홍채현은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늘 무표정하고 있던 삼라바가 왠지 모르게 마냥 따뜻하게 느껴졌던 그녀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삼라바에게서 아주 희미하게나마 느껴지는 미소를 발견했다. 처음으로 보는 그의 표정 변화였다. 그리고 그 미소는 홍채현이 지금까지 봤던 어떤 남자의 미소보다 훨씬 더 예쁜 미소임에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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