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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너에게 가는 길
작가 : 사파이어
작품등록일 : 2019.11.10

우주에는 ‘넵툰’이라는 청록색의 신비로운 행성이 있다. 그 곳에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그의 딸 ‘라미아’가 거대한 왕국을 이루며 살고 있다.
우주에서는 삶이 무한하고, 아름다움도 사그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반복되는 삶에 우울증에 빠진 ‘라미아’가 아버지에게 ‘지구’로 보내달라고 간청하는데, 아버지는 심하게 반대를 하다 결국 3년 안에 돌아오라는 약속을 하며 허락한다.
‘라미아’는 한 남자를 만나게 되면서 어떤 범상치 않는 기억을 떠올리게 되는데...

 
2회
작성일 : 19-11-10 23:08     조회 : 196     추천 : 0     분량 : 10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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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미아가 삼라바와 함께 지구에 온 지 어느덧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들은 어느새 지구인들과 다를 것 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라미아와 삼라바는 넵툰에서 포세이돈만큼은 아니더라도 인간의 몇 배쯤 되는 커다란 몸집을 가지고 있었지만, 감쪽같이 외형을 숨기고 지구로 들어왔다. 그리고 지구에서 만난 사람들이 입은 옷과 머리 스타일을 보고 금세 가장 비슷한 느낌을 찾아냈다. 처음에는 바닷가 어부와 같은 차림새로 다니다가 마을 주민들을 한 명 두 명 만나기 시작했고, 다음에는 시장 상인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을 만나다가 우연히 고향을 방문한 젊은 남성을 따라 이동하면서 마침내 도시에 정착하게 되었다.

 삼라바는 도시로 올라오자마자 라미아를 위한 집을 지었다. 그는 한강이 아주 잘 보이는 높은 지대를 선택했다. 라미아는 해가 저물면 강을 통해 바다로, 아주 깊은 바다로 들어갔다. 우주에서 오랜 시간 떠돌이 삶을 살았던 삼라바에게 집이라는 장소는 그다지 큰 의미가 없었지만, 라미아는 다른 것 같았다.

 라미아는 지구에서 유난히 빠르게 자주 찾아오는 혼자만의 시간에 고향과 같은 집이 필요했다. 하지만 깜깜한 밤이라도 누군가 그녀가 물 속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걸 보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 했다. 그래서 삼라바는 마치 평범한 사람들의 그것처럼 그녀에게 통로 역할을 해 줄 집을 마련해준 것이다.

 “삼라바. 지구는 정말 다채로운 곳이야.”

 “너 정말 아무 기억도 안 나는 거니?”

 “삼라바, 내가 언제쯤 지구에 왔던 건지 알아?”

 라미아의 질문에 삼라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긴 삼라바도 같이 왔겠구나. 하지만 나는 너무 어렸을 적 일이라 그런지 기억이 하나도 안 나. 그 덕분에 더 재미있는 여정이 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네가 좋다니 다행이야.”

 “삼라바, 함께 해줘서 정말 고마워.”

 삼라바는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지금은 하지 않기로 했다. 안 그래도 삼라바는 라미아에게 잔소리처럼 들릴만한 이야기들을 수도 없이 하고 있었다.

 “지구에는 다양한 얼굴이 있다는 게 참 좋아.”

 “다양한 얼굴이 있어?”

 “사람들의 얼굴도 빠르게 바뀌고, 지구에 있는 식물들도 어제는 초록색이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새빨갛게 변하잖아. 넵툰에도 색깔을 입히면 더 아름답지 않을까?”

 “모든 것은 자신의 색깔이 있는 거야, 라미아. 우리가 늘 보고 있었던 공간이니까 모든 색깔이나 감각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뿐, 사실은 늘 총천연색으로 빛나고 있어. 우리가 사는 삶도, 세상도, 그리고 우리 자신도.

 그리고 다채로운 색깔이 있다는 건 그만큼 지구가 빠르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

 우리는 지구와는 다른 초월적인 시간 속에 살기 때문에 나이를 먹지 않지만, 지구의 시간 영역에 너무 오랜 시간 노출되면 더 이상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게 못하게 되는 순간이 오게 되고, 그러면 상충되는 세계에서 우리는 점점 조각나고 깨져 소멸돼버리고 말 거야.

 그러니까 라미아, 포세이돈이 무엇을 그토록 걱정했는지 알겠니?”

 아버지 포세이돈은 지구로 떠나기 전 라미아에게 위험이 꼭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포세이돈이 걱정했던 일이 정말 이런 것이었을까?

 “그래, 나도 더 오래 머무르고 싶다는 생각은 없어. 지구에서의 시간이 빠르니까 시시각각 변하는 모든 것이 신기할 따름이야.

 그러면 삼라바는 아주 조금씩 천천히 변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

 “글쎄…… 지금으로선. 넌 어떤데?”

 “나는 천천히 사는 것에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빠르게 변하는 삶도 괜찮을 거 같아.

 즐겁고 행복한 일은 오랫동안, 아프고 슬픈 일은 빨리 내 기억에서 사라졌으면 좋겠으니까.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어떨 때는 빠른 삶을 살고 싶어. 기쁨보다 슬픔이 나를 더 많이 무너지게 만들거든.”

 “어쨌든 두 가지 다 같은 전제를 하고 있구나.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변하지 않는 거? 정말 아무것도 없겠지……”

 삼라바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이미 다 알고 하는 말인지, 아니 어쩌면 그녀도 모르게 오랜 시간 그녀의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있던 것을 이제 정말 놓을 준비가 된 것인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라미아는 지구에서 무언가를 꼭 가지고 가고 싶은 사람처럼 많은 보석과 액세서리를 사기 시작했다. 몸에 착용하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주로 장식용으로 파는 물건들이었다. 라미아는 하나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닥치는 대로 반짝거리는 물건들을 사서 모았다. 그리고 은밀하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유리 장식과 일일이 비교해보았다. 하지만 그녀가 가지고 있는 장식과 비슷한 재질이나 형태를 가진 물건은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라미아는 구입한 물건을 몇 번 들여다보고는 자신이 찾던 물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가차없이 갖다 버리기를 반복했다. 사실 그녀가 지구에서 무언가를 소유한다는 것은 아무 의미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녀가 지구에 머무르는 시간은 딱 3년이었고, 지구에서 아무리 소중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넵툰의 바다에서는 결코 버티지 못할 것이다.

 오늘도 쇼핑을 마친 라미아의 손에는 여러 개의 쇼핑백들이 들려 있었다. 삼라바는 별로 관심이 없는 척 그녀를 따라 나섰지만 어느새 그의 손에도 적지 않은 물건들이 들려 있었다.

 포세이돈이 지배하는 넵툰에서 라미아는 옷이나 액세서리로 자신을 꾸며본 적이 없었다. 라미아의 하얗고 투명한 피부는 치장하지 않아도 빛이 났고, 반짝거리는 옷이나 장신구가 없어도 그녀의 깊은 눈을 보면 모두가 매혹됐다. 유일하게 그녀가 입고 있는 아무 무늬 없는 새파란 가운만이 그녀가 가진 특별한 물건이었는데, 멀리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오묘한 파랑은 누가 봐도 라미아가 포세이돈 가문임을 알게 해줬다. 누구도 쉽게 그녀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그런 라미아와 삼라바는 지구에서도 눈에 띄는 외모임이 분명했다. 나란히 걷고 있는 그들 곁을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가 그들을 몇 번씩 쳐다봤다. 사실은 실체 없는 그들의 화려한 물건들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더욱 끌어 당기고 있는 지도 모른다.

 삼라바는 발레파킹 창구로 가서 카드를 내밀었다. 라미아는 그 사이 거침없이 발레파킹 고객용 휴게실로 들어가 의자에 앉았다. 작은 공간에서도 그녀의 걸음을 따라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시선을 라미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라미아를 따라 들어가려다가 무언가에 이끌리듯이 삼라바는 바깥 쪽으로 나와 도로 반대편 벽 쪽에 가만히 섰다.

 도로에 길게 늘어선 자동차들이 끊임없이 백화점으로 들어왔다. 고층의 백화점 본관 건물 앞에는 차도가 이어지는 광장 같은 널찍한 공간이 있었는데, 백화점 입구 쪽에서 도로는 손님이 차에서 내리는 구역과 다시 타는 구역으로 정확하게 나눠져 있는 모양새다. 삼라바의 눈에도 제법 어려 보이는 남자들이 백화점 광장과 차도를 구분 없이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앳돼 보이는 남자 직원들이 정신 없이 들어오고 나가는 많은 차들 사이를 뛰어 다니는 모습이 아슬아슬해 보였지만, 그들만이 정한 어떤 질서가 있는 듯 했다.

 ‘어린 시절 밖에 보이지 않는 걸 보니, 성인이 되지 못하고 죽었구나.’

 삼라바는 무의식적으로 남자 무리들 한 명 한 명의 전생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긴 전생을 속속들이 파악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삼라바에게 고작 한순간이었다. 아주 짧은 그 순간, 삼라바의 눈 전체가 까맣게 변했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고 있었다.

 ‘저 사람은…...’

 별 생각 없이 서 있는 직원들을 순서대로 살펴보던 삼라바의 시선이 한 남자에게 멈췄다. 얼굴이 유난히 작아 넓은 어깨가 더 넓어 보였고, 키가 더 크게 느껴지는 체형이었다. 까무잡잡한 피부 때문인지 약간은 왜소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무리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인물임에 분명했다. 그리고 어쩐지 삼라바의 눈에 낯익은 얼굴이었다.

 ‘어디서 봤지?’

 하지만 그가 삼라바의 눈에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던 것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삼라바의 날카로운 눈에도 그의 전생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전생이 없는 사람? 처음으로 이승에 태어났다? 그건 말이 되지 않는데.’

 삼라바가 이번에는 제대로 그를 들여다보려고 하던 그 찰나에 저만치 앞에서 라미아가 그를 불렀다.

 “삼라바, 뭐 하고 있는 거야?”

 삼라바가 아주 잠깐이었다고 느꼈던 시간이 실제로 꽤 길었던 것 같다. 예상 대기 시간을 조금 지나 그들의 차가 정확히 출차 위치에 대기 중이었다. 삼라바는 그제서야 인간의 전생을 들여다보지 않으려고 했던 자신의 결심이 떠올랐다. 인간의 삶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주거나 혹시라도 그로 인해 그들과 엮이는 일이 발생하는 것은 그가 절대로 원치 않는 일이었다.

 “아, 미안. 잠시 바람 쐬고 있었는데.”

 라미아는 삼라바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계속 빠른 걸음으로 그를 등지고 앞장 서 걸었다. 그러다 살짝 걸음을 늦추더니 누가 듣지 않도록 속삭이는 말투로 투덜거리듯 말했다.

 “수호신이 이러면 안되지. 수호신은 무슨 일이든 나보다 앞장 서야 하는 거라고.”

 하지만 삼라바는 별 일 아닌 일이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맞받아쳤다.

 “나는 라미아를 지키는 수호신이지, 비서가 아니라고.”

 라미아도 삼라바도 그들의 차를 담당하는 직원이 누구인지는 안중에도 없었다. 라미아는 여전히 뒤에서 걸어오는 삼라바를 향해 눈을 흘기며 자신의 차 근처에서 열쇠를 들고 다가오는 직원에게 마지못해 손을 내밀 뿐이었다.

 “차 키 여기 있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항상 삼라바가 운전석에 앉았지만, 잠시 떨어져 있었다는 이유로 괜히 심통이 난 라미아는 보란 듯이 상황을 주도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때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났다. 라미아는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져버리고 말았다.

 삼라바의 눈에는 그 순간이 슬로우 모션으로 아주 느리게, 그리고 아주 명확하게 보였다.

 빠른 걸음으로 다가서는 라미아에게 차 키를 주는 사람이 하필이면 삼라바의 눈에도 정체를 가늠할 수 없었던 바로 그 청년이었다. 삼라바가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미 남자 직원의 손 끝에서 떨어진 차 키가 아주 천천히 라미아의 손에 닿고 있었다. 바로 그 찰나, 라미아도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그녀의 별 의미 없는 시선이 그에게 가 머무른 시간은 고작 잠시뿐이었다.

 하지만 라미아가 가슴을 움켜쥐며 쓰러지는 찰나, 이번에는 그녀가 바로 앞에 서있는 남자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원망이 가득 담긴 눈빛이었다. 남자 직원은 깜짝 놀라 급히 손을 뻗었지만, 그에게 닿지 못한 채 그녀는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져 버렸다.

 “라미아.”

 삼라바는 깜짝 놀라 소리치며 라미아에게 달려가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주변에 서있던 사람들이 그저 눈을 한 번 깜박였을,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삼라바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삼라바의 품에서 힘없이 축 늘어졌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보자 삼라바는 몹시 끔찍한 두려움을 느꼈다. 그가 바라보는 라미아의 얼굴에서 포세이돈의 얼굴이 겹쳐 보이는 듯 했다. 라미아가 쓰러지던 바로 그 순간 삼라바는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하늘 정가운데로 소리 없이 내리치는 한줄기 굵은 번개를 보았던 것이었다. 삼라바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는 라미아가 가슴을 움켜 잡은 손에 그의 손을 포개어 꼭 쥔 채 그녀를 품에 안고 벌떡 일어섰다. 그녀의 가슴 주변에 얼음 꽃 모양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삼라바의 손에 그녀의 심장 한 모퉁이가 아주 차갑고 딱딱하게 만져졌다. 마치 심장의 한 부분이 죽어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심장에 무언가 박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삼라바는 아까 봤던 번개가 어쩌면 하늘이 아니라 라미아의 가슴에서부터 솟구쳐 오른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라미아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이내 그녀의 심장이 힘겹게나마 뛰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어느새 주차장 주변에 있던 모든 직원들이 그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창문을 통해 바깥을 구경하고 있던 건물 내 사람들도 밖으로 나와 삼삼오오 모여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이 모든 사건의 주범처럼 느껴지는 앳된 얼굴의 남자 직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주변의 직원들도 모두가 당황해서 아무 것도 못하고 있는 사이, 백화점 안에서 검정색 정장을 입은 두 남자가 때마침 걸어 나왔다. 두 남자는 중후한 얼굴에 더욱 심각한 표정이었으나,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라는 듯 상대적으로 차분한 느낌을 주었다.

 “손님, 괜찮으세요? 빨리 병원으로 가시죠”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뒤늦게 나온 나이 든 직원이 먼저 나서 상황을 정리하자 그 때서야 어린 직원도 정신이 좀 들었는지 연신 고개를 숙이며 마치 울 것 같은 말투로 말했다. 남자는 자신이 정말 무엇을 잘못해서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인지 아직도 어안이 벙벙했지만, 검정색 정장을 입은 중년의 남자는 마치 질책이라도 하듯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빨리 119에 전화하게.”

 “아…… 네, 알겠습니다.”

 어린 직원은 허둥지둥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그는 핸드폰 버튼조차 제대로 누르지 못하고 허둥댔다.

 정작 라미아를 안고 있는 삼라바에게는 어떤 말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삼라바는 구경하려고 모여든 사람들로 난장판이 된 백화점 광장 앞에서 가장 침착하고 냉정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는 라미아를 안고 홀연히 차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들의 차는 바람 같이 사라져버렸다.

 삼라바에게 먼저 성큼 다가섰던 직원 뒤에서 또 다른 남자가 차가 사라진 방향을 계속 바라보며 말했다.

 “점장님, 괜찮을까요? 우리가 무슨 조치라도 해야 되지 않을까요?”

 “박팀장, 일단 저 손님의 이름이랑 연락처를 파악해놓게.”

 “네, 알겠습니다.”

 점장은 여전히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어린 직원에게 고개를 돌렸다.

 “일단 자네는 사무실로 따라와.”

 여전히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남자 직원은 힘없이 점장 뒤를 따랐다. 하지만 그는 뭔가 께름칙한 표정으로 자꾸 뒤를 돌아봤다. 그녀가 쓰러질 때 자신을 바라보며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었다는 느낌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그녀가 하려고 했던 이야기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녀는 누구일까?

 사실 남자는 여자를 기억했다. 그녀는 백화점에 자주 오던 손님 중에 한 명이었다. 남자는 일하는 중간중간 그녀를 종종 봤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그는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녀를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을 원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직원들이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자 모여 있던 사람들도 순식간에 절반 정도가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잠시 후 남아있던 사람들도 모두 제각각 흩어졌다.

 더운 바깥 공기와 다르게 사무실은 시원했다. 남자 직원은 땀이 마르면서 느껴지는 개운함을 느낄 틈도 없이 동시에 입 안이 바짝 말라감을 느꼈다.

 “김정기.”

 “네, 점장님.”

 “자네, 여기서 일한 지 얼마나 됐지?”

 “이제 막 3개월 되었습니다.”

 “그래? 여태까지 쳤던 사고는?”

 “사고요? 무슨 말씀이신지?”

 “없다는 말인가? 일단 알겠네. 그럼 오늘 일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해봐.”

 “아무 일도, 아니 특별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 여자…… 그 여자 손님이 지병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저는 그냥 포르쉐를 끌고 나와서 출차 라인에 세우고, 손님이 다가오길래 얼른 차 키를 주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갑자기 그 여자가 혼자 쓰러진 거다?”

 “네, 맞아요.”

 김정기는 힘을 주어 대답했지만 점장은 여전히 무언가 성에 차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일단 알겠네.

 그 사람들이 아무 말도 안 하고 간 걸 보면 일단은 나도 그렇게 알고 있겠지만, 손님들이 무슨 일이든지 걸고 넘어진다면 자네가 1차 책임자가 되는 걸세.”

 “1차 책임자요?”

 “그래. 바쁘니까 어서 나가서 일해.”

 “아…… 네, 알겠습니다.”

 점장의 날이 선 말에 김정기는 아찔해졌다.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자신이 정말 잘못한 게 있기라도 하다는 것인지, 김정기는 점장에게 무슨 말이냐고 따져 물어야 할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정말 무슨 일이 생기고 나면 그 때 지금 하고 싶었던 말을 해도 늦지 않겠지, 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것이 마음이 편했다.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김정기는 막 사무실로 들어오는 박팀장과 마주쳤다. 박팀장은 김정기를 한 번 쳐다보더니 그대로 점장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점장이 앉아 있는 의자와 직각으로 놓여있는 다른 쪽 의자에 자연스레 앉으며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점장님, 이거 참 이상한 게 있는데요.”

 사무실 밖으로 향하는 김정기의 걸음이 느려졌다. 그들도 아직 사무실 안에 있는 김정기를 의식하는 듯도 했지만, 박팀장은 개의치 않고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아무리 조회를 해도 아까 그 차와 차 주인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야?”

 “발레파킹을 맡기는 손님이라면 회원 목록에 없을 수가 없는데……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그 시간대에 동일한 번호판과 차종이 확인이 안돼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 차주를 찾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CCTV는? 다시 한 번 확인해봤어?”

 김정기는 더 이상은 지체하지 못하고 밖으로 나왔다. 아까부터 그의 머릿속에는 같은 숫자가 계속 맴돌았다. ‘1323’. 김정기는 이제 자신이 직접 그 여자를 찾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라미아는 예상보다 빠르게 회복했다. 의식을 찾은 라미아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여러 번 구토를 했다. 그녀가 몸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다량의 물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라미아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자 삼라바는 따뜻한 물을 가져다 주었다.

 “삼라바.”

 “라미아, 오늘은 여기에 있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내가 옆에 있는 게 좋겠어.”

 “삼라바,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 사람…… 도대체 누구야?”

 “나도 모르겠어. 우선 몸을 좀 회복하려면 지금은 아무 생각도 하지 마.”

 삼라바는 라미아를 타이르듯 말했지만, 라미아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삼라바라면 그녀가 풀지 못하는 문제의 정답을 이미 알고 있는 지도 모른다.

 “아까 그 남자를 보면서 어떤 기억이 떠올랐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려고 해도 그게 뭔지 전혀 생각이 안 나. 그리고 가슴이 부서질 것처럼 아팠는데, 그 남자가 나에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라미아, 그 문제는 일단 나에게 맡기고 지금은 좀 쉬어.”

 삼라바는 남자에 대한 기억이 뒤늦게 떠올랐다는 사실을 라미아에게 차마 이야기하지 못했다. 김정기가 삼라바의 눈에 유난히 낯이 익었던 것은 그 때가 그들의 첫 만남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백화점 로비에서 라미아를 넘어지게 만들 뻔한 사람도, 라미아를 회전문에 갇히게 만들 뻔한 사람도, 라미아가 떨어뜨린 가방을 주워 주겠다고 멀리서부터 바보 같이 뛰어오던 사람도 사실은 모두 한 사람이었다. 삼라바는 아주 사소한 위험에도 철저하게 방어를 하고도 그의 존재를 기억해내지 못했다는 사실에 좌절했다.

 그리고 그 자가 또다시 라미아를 위험에 빠뜨리기 전에, 라미아가 무언가 눈치 채기 전에 그의 정체를 밝히고 은밀하게 처리하리라 다짐했다. 삼라바는 라미아가 누워 있는 침실 방의 불을 끄고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라미아는 잠이 오지 않았다. 눈을 감고 있으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 자꾸 반복되어서 괴로웠다. 다시 눈을 뜨고 가만히 방 안의 천장을 바라보다 다시 눈을 감는 행동을 몇 번을 반복했다.

 라미아가 또다시 가만히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바다에 와있었다. 그 곳은 넵툰이 아니라 지구였다.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서는 세차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라미아는 아주 커다란 배의 갑판 위에 서있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저 어둡고 황량하기만 했다.

 그녀는 한참 동안 주변을 살펴보다 저만치 앞에 쓰러져 있는 한 남자를 발견했다. 그의 몸 아래로 피가 가득했다. 라미아는 너무 놀라 남자에게 달려갔다. 그의 몸에서 도저히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피가 계속해서 흘러나왔고, 남자는 괴로워하고 있었다.

 “여보세요? 저기요?”

 라미아는 남자의 얼굴을 쳐다봤다. 하지만 아무리 남자의 몸을 돌려 봐도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라미아는 계속해서 남자의 몸을 돌려 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그녀가 볼 수 있는 것은 여전히 남자의 등뿐이었다. 가슴을 정통으로 통과한 총알이 그의 등 뒤를 뚫고 나갔다.

 라미아는 괴로웠다. 죽어가는 남자가 누군지 알 수 없었지만, 계속 눈물이 흘렀다. 단지 어떤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이 슬프고 안타까운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고통이 라미아를 지배했다. 이 비정상적인 고통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 실체가 무엇인지 그녀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저 이 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어서 빨리 도망치고 싶었다.

 “하아.”

 그녀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꿈이었다. 삼라바가 비명 소리를 듣고 놀라서 달려올 만큼 크게 소리 지른 것은 아니었던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도대체 누구일까? 낮에 있었던 일 때문에 이상한 꿈까지 꾸게 된 것일까? 왜 뜻도 알 수 없는 일이 연달아 라미아에게 일어나는 것일까?

 라미아는 답답했다. 가슴이 또다시 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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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3회 2019 / 11 / 10 173 0 10052   
2 2회 2019 / 11 / 10 197 0 10243   
1 1회 2019 / 11 / 10 343 0 8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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