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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저수지의 개들
작가 : Hotsan
작품등록일 : 2019.11.9

복학한 장무영이 이협이라는 사람을 만나고 벌어지는 일들.

 
그럼에도 나아간다.
작성일 : 19-11-10 14:42     조회 : 174     추천 : 0     분량 : 15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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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 걱정하지 마. 꼭 데리고 올게. 나 조금만 더 믿어줘. 부탁이야”

 무영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배터리는 벌써 40프로 아래로 떨어져 있었다. 날씨가 좋은 토요일이었다. 무영은 연신 다리를 굽혔다 폈다를 반복했다. 사람들은 매점 칸에도 가득 차 있었기에 그는 자유롭게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창 밖에 풍경들은 서로 섞여 끊임없이 뒤로 밀려 나갔다. 사람들은 모두 이어폰을 낀 채 어떤 것을 보거나 들었다. 그는 노트를 들고 검은 만년필로 뭔가를 그리고 있었다. 이따금 터널을 지날 때면 기차는 심히 덜컹거렸는데 그럴 때면 잠시 손을 멈추었다가 다시 시작하고는 했다.

 그는 서울에서 대구로 가는 기차를 처음 타 보았다. 그리고 자리가 없다는 말에 입석하겠다는 선택을 해버리고 말았다. 그는 서두르면 항상 손해를 보는 타입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손해에도 신경을 쓰지 않는 타입이었다. 무영은 느긋하게 그림과 풍경을 뒤바꿔 보며 시간을 죽였다.

 대구는 그도 생소한 도시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구로 진학한 친구를 보러 한 번 간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었다. 그는 인터넷과 사람들의 안내로 더듬더듬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움직였다. 찢어진 종이에는 조야동이라는 곳이 목적지로 적혀 있었다. 대구의 북구는 공단이 많은 곳이었다. 그 중 조야동은 이제는 하락의 길을 걷고 있는 섬유 공단들 둥글게 감싸고 있었다. 당연히 많은 노동자가 살았고, 염색 과정에서 나오는 증기가 끊임없이 굴뚝 아래로 흘러 내렸다.

 입석까지 선택하여 타고 일찍 온 기차였지만, 주소 근처 마을버스에서 내렸을 때는 이미 3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지친 모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긴장과 약간의 흥분을 얼굴에 띄고 있었다.

 처음 본 조야동의 이미지는 조용한 곳이었다. 많은 술집은 아직 문도 열지 않은 상태였고, 몇 개 있는 오래된 학원들에만 어린아이들이 모습을 보일 뿐이었다. 무영은 계속해서 같은 곳을 돌았다. 애초에 인하에게 받은 주소는 옛 주소였고, 워낙 건물과 건물이 복잡하게 뒤 섞여 있는 곳이었다. 중간 중간 있는 아주 작은 공원에는 어린아이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 대구 북구 조야동 38-10 203호 ”

 그는 땀을 닦으며 3층 정도 되는 작은 빌라에 도착했다. 복도식 건물이었고, 한 층에 세 가구가 있었다. 특이하게 벽돌이 검보라색이었는데, 아주 오래되어 그런지 이곳저곳 벽돌이 부서지거나 파인 부분이 많았다. 이가 빠진 사기그릇처럼 건물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203호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몇 번의 노크를 해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 4시가 되지 않은 시각이었기에 그는 잠시 문 앞에 쪼그려 앉았다.

 

 *

 

 무영이 눈을 떴을 때 본 것은, 한 아이가 자전거를 끌고 가는 모습이었다. 자전거 바퀴가 자신의 발을 밟았는지 그의 흰 신발에는 선명하게 바퀴 자국이 있었다. 밖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무영은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려고 했지만, 이미 전원이 나가버린 듯 켜지지 않았다. 복도식 아파트는 시간과 날씨가 그대로 쏟아지는 곳이었다. 금이 가거나 빈틈이 생겨버린 창문 사이로 지는 해가 보였다. 그때였다.

 “ 누구세요 ”

 언제 왔는지 머리가 짧은 남자가 서 있었다. 발목이 드러난 교복 바지는 갑자기 커 버린 사춘기의 남자아이임을 보여주었다. 목덜미와 팔뚝 부분은 검게 타 있었다.

 “ 혹시. 이협 아시나요?”

 “ 누구시냐고요 ”

 “ 협이 친구입니다. 대학친구 ”

 “ 누나 친구 없는데요 ”

 “ 남자친구예요 ”

 남자는 그를 빤히 보았다. 무쌍인 눈은 의심할 때면 좀 더 날카롭게 변했다. 무영은 동생이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 거기서 계속 기다리실 거에요? 아직 두 시간 더 있다 오는데 ”

 “ 아. 제가 휴대폰이 꺼져서. ”

 “ 밥은 드셨어요? ”

 “ 아니요 ”

 남자는 문 앞 화분 사이에서 꺼낸 열쇠로 집을 열었다. 무영은 그런 그를 보고만 있었다. 하지만 남자는 신발을 벗으며 문을 닫지 않았다. 그리고 뒤 돌아 보았다.

 “ 거기서 기다리실 거에요? ”

 무영은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어둠을 피해, 칠흑같은 그녀의 집으로 들어갔다.

 

 집은 단출했다. 거실과 작은 방 두 개가 끝이었다. 벽지는 노래져 있었고, 가구도 그리 많지 않았다. 티비도 없었으며 낡은 체리 색 소파만 덩그러니 거실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집이 좁아 그리 쓸쓸해 보이지 않았다. 나무 식탁에 앉은 무영은 찌개를 끓이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았다.

 “ 저는 장무영입니다. 혹시 협이 동생이세요? ”

 “ 이훈. 이훈입니다. ”

 남자는 익숙한 듯 찬장과 싱크대 밑을 훑으며 부지런히 움직였다. 찌개가 끓고 식탁에는 몇 가지의 반찬과 밥이 차려졌다.

 “ 혼자 드시나 봐요 ”

 “ 네. 보통은 ”

 훈은 마지막 김이 나는 냄비를 중앙에 놓고 식탁에 앉았다. 무영은 그에게 감사인사를 하고 숟가락을 들었다. 하지만 곧 손을 멈추었다. 훈은 까맣게 타버린 손으로 기도하고 있었다. 무엇을 빌고 있는지 아랫입술엔 간절히 힘이 들어가 있었다. 짧은 기도가 끝나고 둘은 허기를 채우기 시작했다. 따뜻한 국물이 한 술 들어가자, 억눌러져 있던 배고픔은 순식간에 그를 집어삼켰다. 기차를 타기 전에 먹었던 편의점 샌드위치가 마지막 끼니였다. 무영은 처음 보는 사람과, 처음 온 곳에서 게걸스럽게 국과 밥을 떴다. 이훈은 밥을 먹다가 냉장고에서 보리차를 꺼내 그에게 주었다. 둘은 그렇게 다시 자신의 그릇에 집중했다.

 식사는 순식간에 끝났다. 설거지하겠다고 일어난 무영은 훈의 고갯짓 하나에 몸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잘 발달한 어깨였지만 아직 어린 학생이었다. 그래도 그의 거절에는 어떤 법칙이 깃든 것 마냥, 거부할 수 없었다. 훈은 그가 멈춘 걸 보고 바로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아주 짧은 순간에 이뤄진 일이었다. 무영은 그에게서 협을 느꼈다.

 “ 드르륵 ”

 무영이 뭐라도 하기 위해 행주를 들고 식탁을 닦을 때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 엄마인가 봐요 ”

 무영은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협의 어머니를 처음 마주쳐야할지 고민했다. 그리고 순간 남자친구라고 소개한 게 떠올랐다.

 하지만 눈이 마주친 건, 며칠을 꿈꿔왔던 사람이었다.

 

 밝은 달이 조야동을 비추고 있었다. 깜빡이는 가로등 아래 둘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담배를 피웠다.

 “ 너 왜 여기 있어 ”

 “ 너는 왜 여기 있는데 ”

 무영은 그녀의 차가운 말에 하마 타면 자신의 목적을 잃을 뻔했다.

 “ 다시 올라가자 ”

 “ 내가 왜? ”

 “ 저수지의 개들 마무리 지어야지 ”

 “ 그거 끝났어. ”

 “ 끝나지 않았어. ”

 “ 그만하자 ”

 “ 뭘 그만해? 나 너 때문에 여기까지 왔어. 하영이 수훈이 모두 너 때문에 거기 모인 거 아니야? 너 없었으면 아무 것도 안됐어. ”

 “ 그래. 다들 됐잖아. 하영이도 계약 했고. 수훈이 소연이랑 사이좋고. 너는 애초에 저수지의 개들이 아니었으니까 없던 일 하면 되잖아. 너희 나 없어도 되잖아 ”

 “ 그게 무슨..”

 “ 지겨워 ”

 그녀는 차갑게 말했다. 그녀의 눈은 아물지도 않은 흉터에 맺힌 핏방울로 번뜩였다. 무영은 오른손에서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 내가 안 지겹게 만들어 줄게. ”

 “ 소영이랑 수훈이도 잡지에 든 돈이 어디에서 왔는지 궁금해할걸? 심지어 다른 학교 학생들 소개해주거나 인터뷰 따 온 것도 어떻게 했을까 의심할 거야. 내가 번 돈의 유일한 사유 공간은 저수지의 개들과 화집 몇 권이었는데 말이야. 대부분을 이 조야동으로 송금해도 내 동생은 공부를 겨우 해. 사실 내가 이때까지 서울에서 버틴 건 욕심이었..”

 협은 더는 말하지 못 했다. 그녀의 손은 나무뿌리같이 거친 무영에게 휘감겨 있었다. 뼈에는 멍이 들어 있었고 작은 생채기가 이리저리 나 있었다. 하지만 따뜻했다.

 “ 너가 날 데리고 갔잖아. 저수지에. 물가에. 너가 데려갔잖아. ”

 협은 붉어진 눈으로 그의 손을 천천히 살폈다.

 “ 그럼 끝까지 책임져. 같이 올라가자. 엿 먹여줘야지”

 “ 시간이 늦었네. 내 방에서 자고 일찍 서울 올라가. ”

 협은 그 말과 함께 집으로 올라갔다. 무영은 그녀가 완전히 마음을 닫았음을 느꼈다. 문 앞에는 동생이 서 있었다. 어린 감시자는 둘을 지켜보고 있었다.

 “ 너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모르는 사람 들이고 다니는 거야. 정신없어? ”

 “ 남자친구라고 해서 ”

 무영은 갑자기 들어온 동생의 증언에 얼어버렸다.

 “ 이훈 진짜 너가 미쳤구나 ”

 “ 구라면 때려서 보내면 되니까 ”

 동생은 그렇게 무뚝뚝한 어깻짓을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

 

 무영은 거실에서 잠을 잤다. 밤에도 사람들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이제는 조야동이 그리 낯설지 않았다. 그는 많은 사람을 생각했다. 수훈과 하영에게 돌아가겠다던 그의 호언장담이 생각났다. 그는 확신을 하고 이곳에 왔다. 하지만 오늘 본 협은 조금의 빈틈도 보이지 않았다. 쉽게 그녀를 데리고 갈 수 있겠다고 생각한 자신이 한심했다. 무영은 쉽게 잠에 들지 못했다.

 그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누군가 방문을 열고 현관으로 나가고 있었다. 등이 켜지고 밝혀진 뒷모습은 협이었다. 무영은 서둘러 이부자리를 걷고 일어섰다. 새벽의 조야동은 불콰하게 취한 몇 사람들의 고성이 간간히 들려왔다. 협은 뒤 따라 나온 무영을 보았다. 그의 손엔 몇 장의 종이가 걸려 있었다.

 “ 이 것만 주고 서울 갈게 ”

 무영이 치켜든 종이에는 웬 여자가 삐뚤빼뚤하게 그려져 있었다. 흔들리는 곳에서 그린 듯 선이 엉망이었다. 협은 낙서와 같은 그림을 한 번 보고는 그를 째려보았다.

 “ 뭔데 이게 ”

 “ 초상화. 이협의 초상화 ”

 “ 장난 그만하자.”

 “ 나는 프란시스코 고야처럼 대상의 인성까지 화폭에 담으려 노력한다고 ”

 협은 얼굴에 짜증을 잔뜩 담았다. 이른 새벽의 달빛 아래 지워지지 않는 피곤이 슬쩍 나타났다. 그녀는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는 그에게 말 했다.

 “ 그만하고 올라...”

 협은 말을 더는 잇지 못했다. 무영은 다른 종이를 들고 있었다. 노트의 종이가 아니라 좋은 재질의 화지畵紙였다. 그녀는 눈을 떼지 못했다.

 “ 철수가 인하선생님한테 맡긴 거래. 그리고 너한테 전해달라고 했대. 다시 그림 시작하게 해줘서 고맙다고 ”

 무영은 얼어 있는 하영의 왼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펼치고는 그림을 쥐여주었다. 협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그림을 눈 높이에 맞췄다. 무영은 몇 번이고 철수의 그림을 보며 대구를 왔다. 볼 때마다 사진이라고 착각할 만큼, 협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가 그림을 들어 올리는 순간 큰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둘은 달랐다. 협은 깊이 머금은 연기를 천천히 그림에다 뱉었다. 작은 종이는 연기에 휘감겼다.

 “ 이게 나야. 병신아. 어쩔 수 없다고 ”

 하지만 담배 연기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림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두 명의 이협은 다른 사람이었다. 그림 속에 있는 이는 자신의 능력을 한껏 드러낸 사람이었다. 모든 것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노력을 바치는 사람이었다. ‘재능’이라는 단어에 침몰되지 않은 채,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고뇌하는 존재였다. 철수가 그린 것은 존경하는 친구가 자신의 꿈을 완전히 펼친 순간이었다. 그는 그토록 바라고 있었다. 많은 사랑을 받고, 세상을 따뜻하게 안을 수 있는 화가畵家 이협을.

 협은 그림을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스러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담배를 겨우 깨물고 있었다. 어금니부터 떨리는 균열은 곧 그녀 전체에 구멍을 내었다. 협은 휘청거렸다. 그리고 그림을 떨어트렸다. 겨우 자신의 몸을 지탱하기 위해 손으로 무릎을 잡고 있었다. 그녀는 소리 없이 새벽의 공기 위에 흐느꼈다. 직접 보지 않으면 그 누구도 몰랐으리라. 그녀는 눈물 없이 눈물을 흘렸다, 셀 수 없는 추억과 후회를, 그리고 자신을 이해해 준 친우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무영은 그녀의 한쪽 팔을 잡았다. 협은 그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 고개를 돌렸다. 둘은 잠시 의지하며 서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협은 종이를 다시 주웠다. 그리고 거침없이 두 번 접어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무영은 놀랐다. 종이에 선명하게 찍힐 네 등분된 주름이 생길 게 뻔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 기다려 ”

 그녀는 그 말과 함께 집으로 올라갔다. 무영은 그녀가 움직이는 궤도를 빤히 지켜볼 뿐이었다. 협은 금방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손에 든 차 열쇠로 낡은 트럭에 시동을 걸었다. 무영은 말없이 차량에 올라탔다. 그리고 차는 오래된 배기음을 뱉으며 구불거리는 골목을 빠져 나갔다.

 협은 아무 말 없이 운전했다. 무영은 짐짓 겁이 나긴 했지만, 그녀는 빠르게 자신의 감정을 되돌리려 애쓰는 것 같았다. 몇 개의 아파트 단지를 넘고, 공장을 가로질러 그들은 나지막한 언덕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몇 개의 건물들이 사라지자 긴 벽돌 담장이 나타났다. 담장의 끝이자 시작점에는 입구가 있었다. 협은 그곳에 차를 세웠다.

 - 조야중학교

 특이하게 학교 입구에는 어떤 철문도 철책도 있지 않았다. 깊은 새벽 주위에는 어떤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기에 그들은 유령같이 학교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평범한 중학교의 모습이었다. 협은 잔디도 깔리지 않은 큰 운동장을 가로질러 비척비척 걸었다. 그리고 입구에 정 반대편에 있는 큰 나무에 도착했다. 큰 참나무 아래에 두 개의 벤치가 한 쪽은 운동장을 한쪽은 담장을 보고 있었다. 등을 마주한 벤치였다. 협은 운동장을 향한 곳에 앉았다. 무영은 서서 그녀를 내려 보았다.

 “ 나랑 철수는 조야중 미술부에서 처음 만났어. 내가 미술 영재로 소문나기 전부터 들어가 있던 곳이었지. 티비에 나오고 난 뒤부터 나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정반대로 변 했어. 내가 좀 싸가지 없었거든. 그런데 항상 칭찬만 해 주는거야. 무슨 일을 해도. 캔버스에 침을 뱉어도 칭찬 받았을걸? ”

 “ 티비가 널 망쳤구나. 조금 더 상냥해질 수 있었는데….”

 협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녀는 다시 말을 해 나갔다.

 “한 날은 너무 그림이 그리기 싫어서, 스케치도 안 하고 물감을 대충 슥슥 바르고 있었어. 그런데 그림은 아무 것도 모르는 교장이 그걸 보고선, 해체주의다, 다다이즘이다, 신인상주의다 이런 말을 지껄인 거지. 미술부 선생님은 아무 말도 못 한 채 그저 맞장구만 쳤어.

 

 그런데 말도 안 섞어본 안경 잽이 남자애가 내 쪽으로 걸어오는 거야.

 ‘ 교장 선생님. 그냥 이거는 귀찮아서 대충 발라댄 건데요 ’

 난리가 났지. 교장은 얼굴을 붉힌 채 15살짜리 아이를 혼내고, 미술부 선생님에게 제대로 하라는 둥 면책을 주고 급히 자리를 떠났어.

 동아리 시간이 끝날 때까지 걔는 미술부 선생님한테 혼났어. 그리고 그 날 뒷정리랑 물통 설거지도 다 혼자 하게 됐지. 다른 사람들이 다 갈 때 나는 몰래 창문 뒤에서 걔를 쳐다봤어. 바보같이 묵묵히 혼자 일을 하더라고. 물통을 깨끗이 씻어서 걸어두고, 걸레도 짜서 널고.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이젤을 정리하고. 그리고 자기가 그리던 그림 앞에 다시 앉는 거야. 그런데 그 그림 좀 형편 없었어. 내가 다시 들어가서 한마디 했지.

 ‘ 너 그림 못 그린다. 그런데 내가 그린 거 뭐라고 한거야? ’

 그렇게 말해도 대꾸 없이 자기 거를 하더라고. 나한테 눈 하나 안주고 말이야. 너무 화가 났어. 그래서 더 못된 말도 계속 했지. 그런데도 나는 걔를 멈추지 못 하는 거야. 그래서 걔 팔레트를 휙 하고 뺐었어. 그때야 날 보더라고. 그리고 이렇게 말했어.

 ‘ 너는 너가 하는 거에 진지하지 않아. 난 그림 그리는 게 너무 좋아. 그래서 최선을 다 하는 거야 “

 6월의 깊은 새벽은 꽤 쌀쌀했다. 곧 있으면 동이 틀 것 같았다. 협은 담배를 꺼냈다. 입김과 함께 연기가 천천히 뿜어져 나왔다.

 “ 너는 그때 싸가지가 더 없었구나 ”

 무영이 말했다. 협은 더 크게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다시 이야기를 이어 갔다.

 “ 그 이후로 걔랑은 사사건건 부딪쳤어. 잘하지도 못하는 실력으로 진지하게 임하는 꼴이 너무 보기 싫었거든. 보통 내가 시비를 걸어댔지. 근데 이 새끼가 항상 정공법으로 나를 상대하는 거야.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천천히 말하면서 나를 지긋이 쳐다보곤 했어.

 그렇게 친해졌어. 미술사 배우면서 싸울 일이 너무나 많았거든. 매일 서로 의견이 갈렸어. 이 건 아니다. 이건 구리다. 내가 했어도 이 것 보단 잘했다. 귀족들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재산의 역할밖에 하지 못한 그림이다. 이 건 에로시즘으로 돈 벌려고 한 것뿐이다. 등등 수도 없었지.

 방과 후엔 대부분 여기에서 시간을 보냈어. 등을 맞대고 말이야. “

 담장 밖에 있는 몇 개의 가로등으로 들어오는 빛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서 벤치에서 반대 편 학교 측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무영은 오로지 협만 보았다.

 “ 우리 집이 폭삭 망하고 나는 모든 걸 포기했어. 예고도 그중 하나였고. 그냥 일반고나 갔지. 그런데 그 새끼가 따라오더라고. 걔는 입시미술 계속했었어. 근데 부모님 반대로 그만뒀지. ”

 무영은 그녀 또한 어둠에 물들어 가는 것 같았다. 별같이 동이 트면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 과는 우연히 같은 과 가게 된 거거든. 그런데 그 새끼 아직도 그림 그리고 있더라고. 조금씩. 놀라웠어. 솔직히. 걔가 그렇게까지 잘 그릴지 몰랐어. 그래서 내가 계속 부추겼어. 원래 예술은 가난하게 시작하는 거라고 ”

 협은 마지막 한 모금을 깊게 내 쉬었다.

 “ 그 둔한 몸으로 오토바이 배달은 무슨. 존나 안 어울려 김철수 ”

 그리고는 땅에 꽁초를 수직으로 박아 넣었다. 협은 운동장을 천천히 눈에 쓸어 담았다. 한 점에 색도 놓치려 하지 않는 듯했다. 무영은 그녀 옆에 앉았다. 그리고 동참했다. 둘은 아무 말 없이 넓은 운동장을 보기 시작했다.

 

 *

 

 일요일에는 보통 손님이 없었지만, 오늘은 꽤 많은 사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9시가 되어서야 온도가 내려가기 시작했다. 무영은 땀이 묻은 이마를 훔쳤다.

 서울은 늘 그렇듯 자신의 거대한 몸을 조금씩 꿈틀거리며 소리를 냈다. 희생양같이 창백한 얼굴로 하루를 지내던 사람들은 밤이 되어서야 자유를 만끽했다. 끊임없이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고기를 뜯었다. 무영은 금요일이 다가오는 것이 두려웠다. 호언장담하고 떠난 대구행은 어떤 결말도, 어떤 약속도 얻지 못하고 끝났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더는 없다는 사실이 그를 자꾸만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수훈과 하영을 어떤 얼굴로 다시 봐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다시금 저 수 많은 사람 중에 일원이 되었다는 것, 하나의 모래알이 된 것 같았다.

 그럼에도 다행히 그에게는 할 일이 있었다. 적절한 노동, 적절한 공부, 적절한 사회생활. 그 것이 무영을 질질 이끌고 갔다. 그리고 학교에서의 징계는 아직 토의 중이었다. 가끔씩 진술을 위해 무영은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사무실에 들어가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들의 잡지는 말하지 못 했다. 왜 잡지를 의도했나, 목적이 무엇이었느냐에 대한 답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영은 솔직히 저수지의 개들이 창작자들의 새로운 커뮤니티가 되기 위해 출발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자꾸 자신의 확신이 희미해지는 것 같았다. 그저 셋은 자신들의 임시 피난처가 필요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빠지고는 했다.

 “ 여기 후라이드 한 마리만 해주세요. 맥주도 한 잔 주시고 ”

 “ 여기도….”

 무영은 치우던 테이블을 행주로 한 번 더 훔치고는 뒤를 돌아 달려갔다. 야외 테이블에는 아직 사람들이 꽤 앉아 있었다. 그는 앞치마에서 꺼낸 작은 메모지에 하나씩 메뉴를 확인하며 적었다.

 “ 여기는 맥주 한 잔만 ”

 “ 손님. 죄송하지만 술만 시킬 순….”

 그는 바로 주방으로 들어가 인수에게 추가 주문을 알려 줄 수 없었다. 아르바이트생을 부른 마지막 손님은 아주 강렬히 웃으며 그를 보고 있었다. 검은 반팔 셔츠와 검은 슬랙스를 입은 사람은 검은 뱀처럼 앞에 먹잇감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비릿한 서울의 밤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

 

 이석대는 저수지의 개들이라는 단어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어떤 사실도 제대로 밝혀진 것이 없었지만, 의혹들만 수면으로 떠올랐다. 유일하게 실체가 있는 것은 경영학과 17학번 이협 이라는 이름뿐이었다. 그러하였기에 더욱 그녀는 파헤쳐지고 다시 태어나고, 끝도 없이 추락하는 것을 반복했다.

 대학은 존재와 이미지의 괴리가 큰 곳 중에 하나였다. 고립에 가까운 고등학교생활 이후, 미성년들에게 주어지는 학자와 위인들의 모습은 새로운 자아의 목표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아주 좁고 편향된 관계들이지만, 하나의 사회생활이라는 점이 사람들을 흥분시켰다. 꿈과 목표, 새로운 규범, 상대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이면 좋을지에 대한 사회적 자아가 끊임없이 잉태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존재와 소망하는 이미지는 물과 기름 같아서 잘 섞이지 않는다. 특히나 이성을 가진 성인이라면 필히 가져야 할 소양같이 느껴지는 정의, 합리, 이성은 쉽게 체득되지 않는 것들이다. 공명정대한 지식인의 모습은 피나는 자기비판과 투쟁 끝에 만들어졌다. 일부는 그 사실을 쉽게 망각하고 그저 훌륭한 연기를 펼쳤다.

 그런 이들에게 불공평과 불합리는 자극적인 주제였다. 그리고 훌륭한 무대였다. 저수지의 개들과 이협 사건은 아주 손쉽게 원인과 결과가 분석 되었다. 나쁘고 좋은 점이 딱딱 나왔다. 학교와 학생들을 기만했다는 점, 특히나 학교 공간 사용에 대해서 거짓말을 통해 불공평한 위치에 서 있었다는 점은 쉽게 사람들을 화나게 했다. 몇몇은 정의봉을 내려치며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징계에 대해 말했다. 어떤 이들은 구조적인 변화가 필요함을 외치며 동아리 신설과 공간 대여에 대한 기준과 규례를 뜯어고쳐야 한다고 외쳤다.

 물론 해가 떨어지고 밤이 되면 상황은 달라졌다. 사람들은 의혹과 비밀에 눈을 돌렸다. 신은 아담이 고작 과일 하나 먹었다고 분노했다. 하지만 우리는 신을 측은지심으로 공감해주어야 한다. 선악과를 먹고 망망대해 같은 호기심이 생겨나고, 끊임없이 파헤쳐도 만족 되지 않는 의심증이 일었다. 그와 동시에 인간들은 도박과 약물, 사랑같은 것들도 은밀히 탐닉했다. 나중에는 신존재를 자신들의 논리로 따지는 큰 반역을 저지르기도 했다. 사실상 인간의 첫 번째 죄악은 호기심이었다. 선악과는 과일이 아니라 씨앗이었던 것이었다.

 한 번 상대의 비밀을 손에 쥔 사람들은 너무나도 쉽게 도취되었다. 저수지의 개들과 이협은 낮에는 비이성적인 행동으로 비판받았고, 밤에는 끝도 없는 소문으로 비난받았다. 그들의 입에선 그녀는 강남의 유흥가 한복판에 나타나기도 했고, 자신의 단골 술집에서 나타나기도 했다. 그리고 곤암동 으슥한 골목에서 누군가를 죽이기도 했고, 좁은 동아리 방에서 피해자를 천천히 고르기도 했다.

 그렇지만 실체가 없었기에 무게 또한 없었다. 저수지의 개들 중 그 누구도 제대로 된 반박을 하며 정면에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연속된 사실들도 더는 밝혀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저 낄낄대며 소문을 열심히 나를 뿐이었다. 이석대학교라는 거대하고도 좁은 커뮤니티는 더 확실한 비판을 할 수 없었다. 2주가 채 되기 전에 사건은 시들해져 갔다. 시간이라는 바람은 그들을 사람들에 관심사에서 조금씩 날려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저수지의 개들’이라는 이름은 뜬금없는 구석에서 발견되었다. 첫 시작은 각 과에 배달된 한 권의 잡지였다.

 “ 이게 뭐야 ”

 긴 공강이 생겨버린 한 신입생은 과실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공용 테이블에는 언제나 그렇듯이 주인 모를 전공책과 충전기가 어지러이 섞여 있었다. 한가운데는 음식점 광고지가 수북이 있었는데, 그사이에 두꺼운 책이 보였다. 그녀는 아주 우연히 쓰레기 더미에서 쓸만한 물건을 발견한 듯이 그 책을 꺼냈고, 곧 ‘잡지’의 형태라는 걸 알게 되었다.

 예외는 없었다. 모든 과에 한 권의 잡지가 배달되었다.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곳도 있었지만, 한 번 표지를 본 사람들은 쉽게 지나치지 못했다. 시작은 파란 눈을 가진 검은 짐승이었다. 그저 아주 천천히 다음 장을, 다음 장을 넘길 뿐이었다. 특이한 형태였다. 어떠한 광고도 보이지 않았고, 주제도 딱히 정해져 있지 않았다. 저자나 투고한 이들이 다 이석대 학생들도 아니었다. 대학을 나오지 않은 만화가, 벌써 나이가 많은 화가도 있었다. 책의 질도 좋지 않았다. 재생지를 사용한 듯 종이의 표면은 조잡하고 거칠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쉽게 책을 놓지 못했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들이 욕했던 동아리의 이름과 동명인 잡지는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편집자 중 올라 있는 ‘ 이협’ 이름을 발견하고는 우연이 아님을 확신했다.

 그 다음은 한 교양 수업 도중이었다. 정해진 책으로 정석같이 딱딱히 굳어버린 논리체계를 배우는 수업이었다. 머리가 벗겨진 교수는 시험 범위를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한 시간 반 동안 말을 했다. 이 수업에서 가장 슬픈 것은, 그 누구도 불만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교수는 말하고. 학생들은 들었다.

 졸업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마지막 남은 필수 교양을 듣던 27살의 남자는 그 날도 맨 뒤에 앉아 볼펜을 돌리고 있었다. 꾸역꾸역 내용을 몸 밑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던 와중 책의 내용과 완전히 동떨어진 슬라이드 하나가 툭 떨어져 스크린에 투사 되었다. 언제나 보던 회색 사각형의 파워포인트 템플릿이 아니었다. 어디선가 보았던 화려한 명화였다. 키스. 그래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였다. 그런데 정작 키스하는 장면은 빨간색 페인트로 칠해져 있었다.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은 온통 지워진 채, 글씨와 숫자가 적혀 있었다. 교수와 학생들은 모두 당황해서 그 슬라이드를 아무 말 없이 보았다.

 “ 저수지의 개들. 나무광장. 7월 11일. 4시 ”

 장소와 날짜. 그것 밖에 없었다. 다른 정보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음은 지하 식당이었다. 한 끼에 삼 천원 하는 학식을 파는 곳이었다. 지하에 있었는데, 지면에 얼굴을 내미는 창가로, 음식 냄새가 쏟아져 나왔다. 사람들은 점심 저녁 할 것 없이 그곳에서 주린 배를 채웠다. 지하 식당의 벽은 온통 연두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꼭 이곳이 반지하가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 애쓰는 것 같았다. 체리 색 몰딩과 연두색 벽은 촌스러운 보색대비로 오래된 연식을 뽐냈다.

 24살의 여자는 수업이 끝나자 말자 식당을 찾았다. 아주 멀리서 통학했기에 이 날이면 밥을 거르는 일이 태반이었다. 점심시간은 2시까지였기에 겨우 달려와 학식을 받았다. 허여멀건 배춧국이 김을 내고 있었다. 여자는 부지런히 숟가락을 떴다. 그녀의 안경에는 김이 샜다. 너무 열심히 먹었나 하는 생각에 그녀는 잠시 고개를 올려 김을 지웠다. 그때 그는 연두색 벽에 검은색 종이가 있는 걸 보았다. 꽤 큰 포스터였다. 자신이 먹고 있는 식판을 연달아 세 개 정도 붙여 놓은 크기였다. 그녀는 안경을 닦고 자세히 보았다. 여자는 익숙한 그림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밀레의 이삭줍기였다. 하지만 배경은 밤이었고, 이삭도 흑미같이 까맸다. 그리고 그녀들이 머리에 두르고 있는 두건은 폭주족이 쓸 것 같은 검은색 반다나였다. 밤하늘에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저수지의 개들. 나무광장. 7.11. 4시 ”

 

 *

 

 “아. 오늘 약속 있는데. 빨리 끝내고 갈게요 ”

 혜인은 수업이 끝나고 발걸음을 바쁘게 움직였다. 그녀를 잡는 정욱에게 혜인은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교실을 빠져나왔다. 기성항공 공모전은 3위라는 훌륭한 성적을 얻으며 끝이 났다. 그들은 나름 행복한 시간을 보냈고, 금요일이라는 이유로 오늘도 정욱과 인동은 술을 먹으려 했다. 하지만 혜인은 건물을 빠져나왔다. 시간은 4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혜인은 경영대에서 사회과학대로 올라갔다. 올라가는 방법과 길은 많았지만, 그녀는 땀을 흘리며 언덕에 있는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혜인은 땀을 닦으며 마지막 계단을 넘었다. 그곳엔 자그마한 개활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거칠게 시멘트로 바닥을 만들고 테두리까지 쌓은 곳이었다. 이석대 중앙에 있는 이 언덕은 학교에서 가장 높은 곳이었고, 사실상 숲이라고 할 만큼 많은 나무가 심겨져 있었다. 하지만 그 꼭대기에는 거친 시멘트 바닥이 있었고 중간중간 철근이 보였다. 산속에 있는 작은 콜로세움, 투기장처럼 보이는 이곳의 이름은 나무공원이었다.

 나뭇가지들로 인해 하늘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주변이었지만 그곳에서만큼은 깨끗하게 하늘을 볼 수 있었다. 벌써 사람들은 투박한 테두리에 걸쳐 앉아 있었다. 혼자 온 학생도 있었고, 카메라를 들고 온 교내언론도 보였다. 오늘 아침에 본 미화원도 있었으며, 어디선가 본 교수도 있었다. 불특정한 다수들은 모두 앉아 중앙을 쳐다보고 있었다.

 둥근 공간 중앙에는 이협이 여자 한 명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혜인은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오늘 이협은 그녀가 아는 모습과는 달랐다. 언제나 묶던 머리는 길게 어깨 아래로 내려와 있었고, 전반적으로 짙은 메이크업을 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혜인은 처음으로 그녀가 바지가 아닌 치마를 입었다는 사실에 내심 놀랐다. 하지만 그 모든 모습은 매우 잘 어울렸다. 협의 매력은 옷에서 나오는 것이 아님에도, 오늘의 모습은 굉장히 인상적인 것이었다.

 “ 그림을 그릴 때 놓치지 않고 표현하려는 게 있으신가요?”

 “그때마다 다릅니다. 이번에 가져온 그림들은 모두 제 어릴 적 풍경을 테마라 잡고 작업을 했는데요….”

 협은 옆에 있는 사람에게 질문하고 답을 얻고 있었다. 일종의 인터뷰처럴 보였다. 혜인은 옆에 서 있는 여자를 자세히 보았다. 그녀는 과실에서 본 잡지를 떠올렸다. 저수지의 개들에 실린 젊은 작가였다.

 “그럼. 본격적으로 그림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

 협의 말에 양 쪽 계단으로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올라왔다. 그들 어깨와 손에는 이젤과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모두 검은 반팔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두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로 이루어져 있었다. 혜인은 어떻게 전문 인원까지 고용했는지 궁금했다. 그때 남자 한 명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어수룩한 눈으로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중앙에는 둥글게 열 개 남짓한 작품들이 놓였고, 사람들은 자유로이 나와 그림을 관람하기 시작했다. 혜인도 그 사람들에 섞여 이리저리 그림을 보았다. 나이와 직업, 출신이 다 달랐지만, 관람객들은 모두 이석대에 연관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이유로 사람들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모르는 사람들과 통성명을 하기도 했다. 혜인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분위기에 이끌려 있었다. 묘한 떨림과 동질감. 그 누구보다 안전히 속해 있는 기분. 동시에 축제와 같은 흥분 상태. 사람들은 모두 비슷한 주파수의 감정을 맞추고 이야기를 나누고 그림을 보았다.

 적절한 시간이 흐르자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다시금 등장했다. 그들은 이젤을 치우고,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관객 중에 한 사람이 걸어 나와 협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혜인은 이것이 두 번째 막幕임을 어렴풋이 유추했다. 두 번째 작가는 머리가 반삭인 남자였다. 그는 무뚝뚝하게 답을 이어 나갔고 곧이어 그림들이 중앙에 채워지기 시작했다.

 혜인은 누가 관객인지 작가인지, 교수인지 학생들인지 구분을 못 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옆 사람에게 말했고,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쇼케이스같기도 했고, 전시회같기도 했으며, 연극 같기도 했다. 확실한 것은 저수지의 개들의 데뷔 무대였다. 학예회의 규모와 전문성이었지만, 작가들은 하나같이 긴장이 역력하고 자신의 자부심을 조심스레 보이고 있었다. 그들의 설익은 노력과 재능은 사람들에게 충분히 전해지고 있었다. 어떤 연관도 없이 젊은 창작자라는 공통점으로 소개되는 이들과 작품들의 구성은 떫은 과일의 맛이 났다. 하지만 항상 끝에는 옅은 단맛이 남아 있었다. 사람들은 작가들에게 어서 가을이 오기를 바랐다. 그리고 묘한 기대감을 가졌다. 여기에 모인 이들은 30명을 겨우 넘긴 수였다. 그들은 꼭 후원자가 된 것 같기도 했다. 혜인은 문득 이곳에 저수지의 개들을 욕한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궁금해졌다.

 시간이 흐르고 해는 저물어 갔다. 여름의 붉은 노을은 이석대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나무 광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림과 나무, 시멘트와 검은색 셔츠의 사람들은 모두 같은 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적절한 더위와 곧 다가올 어둠, 점점 짙어가는 노을은 모든 것을 한 데 섞어 놓았다.

 혜인은 사람들과 동떨어져 나무의 그림자 밑에 있는 협과 남자를 보았다. 협은 앉아서 사람들을 보고 있는 반면에 남자는 서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벌써 머리가 많이 길었는지 그는 복학한 지 처음으로 포마드로 머리를 뒤로 완전히 넘긴 모습이었다. 어두운 그림자에 가려 그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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