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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저수지의 개들
작가 : Hotsan
작품등록일 : 2019.11.9

복학한 장무영이 이협이라는 사람을 만나고 벌어지는 일들.

 
모든 일에 이유가 있진 않다.
작성일 : 19-11-10 14:28     조회 : 191     추천 : 0     분량 : 9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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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영은 주위를 둘러 보며 말했다. 방보다 더 엉망인 건 수훈과 하영 같았다. 그들은 너무나도 참담한 얼굴이었고, 수훈의 눈은 빨개져 있었다. 그는 목소리를 더듬으며 말하기 시작했다.

 “ 학교 측에서 신고가 들어왔대. 학생들이 학교 부지를 무단 점거로 사용하고 있고, 그 사용 목적이 굉장히 불순하다고 ”

 “ 불순?”

 하영은 울먹이는 수훈을 대신해 말을 이었다.

 “조금 전에 학교 측 사람들 들어와서 한바탕 다 뒤져놓고 갔어. 우리 징계받을 수도 있대 ”

 “ 무슨 말이야 그게 ”

 “ 우리 창업 동아리 구라친 거 들켰다고 ”

 그는 하영의 말을 의심했다. 그들은 꼭 사복경찰들에게 동료를 잃은 80년대 학생들 같았다. 하지만 누가 프락치인지, 어디로 가서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야 할지 감이 안 왔다. 그는 발에 힘이 풀리는 걸 느꼈다. 아주 잠시 시간이 멈추는 것 같았다. 그들이 오랫동안 쌓은 성은 한순간에, 기미도 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는 협이 생각났다.

 “협은? ”

 “몰라 전화가 안 돼. 그리고 이것 좀 봐 ”

 하영은 손을 떨며 그에게 휴대폰을 건넸다. 화면에는 중앙대 커뮤니티 게시판이 띄워져 있었다.

 “ -여러분들은 창업 동아리 누벨바그를 아십니까?- ”

 무영은 그녀의 휴대폰을 잠시 읽고는 다시 돌려주었다.

 “ 얘들아 여기 닫고 바로 집으로 가. 알았지 ? ”

 “ 무슨 소리야 ”

 “ 그냥 들어가. 내가 밖에 있는 사람들 밖으로 몰아낼 테니까 집으로 가라고 ”

 “ 야. ”

 “ 내 말 좀 들어! ”

 무영은 크게 소리를 질렀다. 하영은 놀란 듯이 그를 보았다.

 “ 수훈아. 하영이 데리고 바로 집 가 알았지? ”

 그러고는 무영은 문을 열었다. 아까보다 사람들이 더 많이 서 있었다. 모두 같은 층 기독교 동아리 같았다.

 “ 저기요. 다들 방으로 들어가시죠? ”

 그는 무턱대고 사람들을 밀쳤다. 욕지거리하며 미친 사람처럼 그들을 문 앞에서 치웠다. 수훈과 하영이 계단 아래로 사라질 때까지 그는 크게 소리 지르며 과장되게 팔을 흔들었다. 그리고는 그도 뒤따라 학생회관을 뛰어 내려갔다.

 

 *

 

 무영은 급하게 뛰어나와 경영대 건물로 향했다. 어두워진 교내에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그는 심장이 뛰는 걸 느꼈다. 아주 강하게 뛰어서 멈춰 버릴 것 같았지만, 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과방에 도착해서는 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모르는 후배들이 눈을 껌뻑이며 그를 보았다.

 학생회관을 나오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오늘 혜인의 모습이었다. 이상한 눈빛으로 협 이야기를 하던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래서 아주 조금의 가능성을 이곳에 두고 달려왔던 것이었다. 몇 사람에게 물어보았지만 혜인이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인동과 정욱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는 목적지를 잃은 말처럼 속도를 늦추고 과실을 나왔다. 어두운 복도를 천천히 걸어가며 생각했다. 무엇이 잘 못 되었는지, 어디서부터 잘 못 되었는지. 하지만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비틀거리며 걷던 무영의 발이 멈춘 것은, 강의실 문 옆에 붙어져 있는 큰 종이었다.

 - 17학번 이협은 무슨 이유로 동아리의 목적을 숨겼나-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몇 년 전, 대통령의 탄핵을 외치며 학교에 많은 성명서가 온 벽을 뒤덮었던 것이 생각났다. 그의 눈앞에는 이협이란 이름이 박힌 대자보가 떡 하니 걸려 있었다. 어딘가 현실성이 부족해 보였다. 띄엄띄엄 글을 읽어 내려갔다. 전체적으로 몇 가지 의혹을 제시하고 있었는데, 모두 협에게만 책임을 묻고 있었다. 동아리에서도 실명이 공개 된 건 이협뿐이었다. 오늘 전체가 괴로운 악몽을 꾸는 듯했다.

 “ 선배. ”

 무영은 울려온 휴대폰을 받았다. 혜인이었다.

 “ 너 아까 왜 이협 말한 거야. 무슨 일이야. 이거 누가 한 거야. ”

 방향을 잃었던 질문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하지만 혜인은 어떤 것에도 답을 하지 못했다.

 “ 미안해요 ”

 “ 뭐가 미안하냐고. 대자보는 또 뭐고. 이거 누가 한 거야 빨리 말해. ”

 그의 목소리는 과격해졌다.

 “ 우리 기성항공 간 날, 선배 그렇게 가고 인동선배가 그랬어요. 저 새끼도 그냥 보내야겠다고. 저도 그 거밖에 못 들었어요. 이렇게 될지 몰랐어요….”

 “ 김인동 어딨어 ”

 혜인은 당황한 듯이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 김인동 어딨냐고! ”

 “ 선배..”

 혜인은 머뭇거렸다. 그녀는 자신의 태도가 그를 더 자극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절규의 가까운 목소리는 긴 복도를 가득 채웠다.

 “ 제발. 어디 있냐고. 혜인아 ”

 “ 어.. 어 한 시간 전에 톡 방에서 후배들 만난다고 했으니까. 아마도..”

 무영은 전화를 거칠게 끊고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강의실 입구로 돌아왔다. 그는 입구에서 머뭇거렸다. 하지만 그 다음에 나온 행동들은 한 치에 망설임이 없었다. 무영은 대자보를 거칠게 잡아 뜯었고, 가방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는 어둠 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벽에는 덜 뜯긴 테이프 부분이 붙어 달랑거렸다.

 

 *

 

 “ 아니 너 그렇게 오빠 놀리지는 말고 ”

 2층 카페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커피를 다 마시고 놔둔 컵에는 오늘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 석양이 바닥을 보였다. 포근한 압도 감은 조금씩 창틀로 밀려 들어왔다. 인동은 몇 명의 후배들과 인턴 했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후배들은 완전히 그의 후일담에 빠져 있었다.

 “ 아니 그래서 오빠. 어떻게 됐는데요? ”

 여자는 갑자기 말을 끊고 가만히 있는 인동을 재촉했다. 워낙 드라마처럼 이야기하는 사람이었기에 클라이막스를 준비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상했다. 인동은 여자를 보는 것이 아니라 여자 뒤를 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따라 2층으로 올라오는 계단을 보았다. 마지막 붉은빛이 들어오는 창문 앞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온몸에 샛빨간 노을이 뚝뚝 떨어졌다. 무영은 성큼성큼 그들을 향해 걸어 왔다.

 “ 너 뭐야 ”

 인동의 말은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무영은 아무런 말도 없이 그를 응시했다. 참다못한 인동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 뭐하냐고 ”

 “ 언제 안 거야. 누벨바그 ”

 인동은 그 말을 듣고 냉소를 흘렸다.

 “누벨바그? 저수지의 개들이겠지 ”

 “ 언제 알았냐고 ”

 “ 너네 사기 친 거? 아니 너도 이협한테 사기 당한건가? 근데 너희 거기서 존나 더러운 짓은 다 했다면서. 여기서 말하기도 부끄럽다야.”

 무영은 미동도 없이, 표정의 변화도 없이 그를 지켜보았다.

 “ 우리가 뭘 했는데? ”

 “ 글쎄. 그건 학교 측에서 알아보겠지? 근데 말이야. 술집에서 일하는 년이랑 그 좁은 데서 뭘 그렇게 애쓰고 다녔대 ”

 그 순간 무영은 달려들었다. 말릴 새 없이 테이블에 있는 잔들은 떨어지고 음료가 소파와 바닥을 적셨다. 몇 사람이 그를 말리려 했지만, 이성을 잃은 성인 남자를 잡아 세우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었다. 그들은 완전히 뒤엉켜 있었다.

 “ 넌 끝까지 그렇게 뒤통수만 맞고 끝나는 거야 알아? 나는 애초에 너 새끼 동아리 하는지도 몰랐어. ”

 “ 사과해. 당장 이협한테 한 말 사과해 ”

 무영은 어느새 위에 올라타 주먹을 그에게 꽂아 넣고 있었다. 2층에 있는 다른 사람들까지 와서 무영을 말렸지만, 그의 팔이 인동에게로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한 번이라도 얼굴을 때리는 소리를 들은 사람이라면 쉽게 잊지 못했다. 질퍽한 소리가 비명과 함께 가득 찼다.

 “ 그만. 그만해. 그만해. 그만. ”

 인동은 맞선다는 생각은 더 이상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겁에 질린 듯이 똑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팔을 얼굴 위로 가리고 흐느꼈다. 들썩이는 얼굴을 타고 코피가 흘러내렸다.

 “ 시발 새꺄. 김정욱이 다 들고 왔다고. 녹음 한 거랑. 너네 동아리 문 비밀번호까지 다 알아 와서 학교에 신고 한 거라고.”

 무영은 그때야 사람들의 힘에 끌려 인동과 떨어졌다. 그 또한 바닥에 몸을 뉘였다. 아직 아물지 않은 오른손은 실밥이 터져 피가 흘렀다. 무영은 얼빠진 듯한 얼굴로 천장을 보고 있었다. 분노도, 후회도, 집착도 없었다. 그저 텅 비어버린 눈이었다. 그는 곧 몸을 일으켰다. 사람들은 움찔거리며 자리를 비켰다. 통유리의 2층 카페는 곤암동의 더러운 골목이 그대로 보였다. 이제 가로등이 완전히 켜졌다. 뒤늦게 밑에서 알바들이 올라왔을 때는 신음하는 인동만 바닥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

 

 학생들은 저마다 인쇄물들을 들고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정욱이 이상한 웅성거림을 느낀 것은 가방에서 필통을 꺼낼 때였다. 그의 책상으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앞에는 무영이 서 있었다.

 “김정욱. 나와 ”

 그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잠을 못 잔 듯 검은 부분이 눈 아래를 가득 차지했다. 또한, 얼굴에도 반창고가 얼기설기 붙어 있어 어설픈 느낌마저 들었다.

 “ 내가? 왜? ”

 “ 그럼 너도 사람들 보는 앞에서 개망신 당해볼래?”

 그는 자신을 살피는 사람들의 눈빛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지 않은 척했지만 다들 그와 정욱을 보고 있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 망신은 너가 이미 자처한 거고 ”

 학교 커뮤니티들에는 경영학과 학생의 불법 동아리 사용에 관해 수많은 소문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 여파는 경영학과 내부까지 강렬히 전해졌다. 어제 인동과의 몸 다툼으로 무영 또한 그 동아리의 일원이었다는 것이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갔다. 이협과 철수. 이협과 술집. 이협과 무영. 사람들은 레고를 가지고 노는 것 같았다. 자극적인 파츠만이 놓여 있었다. 인간들은 상상할 수 없는 창의성으로 조합하고, 분해하고, 괴물을 만들어 냈다.

 무영은 아침 일찍 학교에 도착했다. 그는 1교시인 문예사 수업이 시작하기 30분 전부터 이협을 기다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끝날 때까지 그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협은 어제부터 휴대폰이 꺼져 있었다. 그는 마케팅의 이해가 시작하기 전까지 담배를 끊임없이 태웠다. 자신이 점점 단순해지는 것 같았다. 사건의 진상을 알고 싶었지만 당장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뒤꽁무니들 뿐이었다. 소문도 그러했고, 협도 그러했다. 설명할 수 없는 피로함이 덮쳐오는 걸 느꼈다. 하지만 이곳에 머물 수 없었다. 무영은 정욱을 보아야 했다.

 “ 너가 커뮤니티에 글 썼지”

 둘은 복도에 섰다.

 “ 그래서? ”

 “ 당장 내려. ”

 “ 왜?”

 “ 사실무근이니까. 너가 만든 개 같은 소문들이 지금 사람 하나 죽이고 있으니깐 ”

 정욱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계속 웃기 시작했다.

 “ 왜 동아리 창설 목적을 숨겼을까. 왜 좆같은 컨셉질까지 하면서 김소연같은 사람들 인터뷰 따고 사진을 찍고 다녔을까. 왜 방에 온통 방음장치가 되어 있을까. 카메라랑 이상한 만화가 그려진 스케치북들이 왜 그렇게 많이 쌓여 있을까. 매주 금요일마다 거기서는 뭘 할까 ”

 “ 우리 잡지 만들었어. ”

 “ 잡지? 맥심 같은 거?”

 무영은 말과 동시에 정욱의 멱살을 잡았다. 복도에 있는 사람들이 그들을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 무영아. 나는 그냥 사실만을 던진 거고. 소문이 만들어진 건 이협이 원래 자기 처신 잘 못 하고 다녀서 저절로 생긴 것뿐이야. 너 철수 기억하지? ”

 “ 뭐? ”

 “ 사람도 죽인 년이라잖아. 너 도대체 시발 뭘 믿고 그렇게 쉴드 치는 건데? 내가 너 정신 차리라고 이런 말 하는 거야. ”

 정욱은 풀린 눈으로 웃었다. 무영은 처음 친구의 낯선 얼굴을 보았다. 도저히 자신이 알고 있던 사람이 아니었다. 멱살을 잡은 손은 서서히 풀렸다. 정욱은 목을 켁켁거리며 숨을 크게 쉬었다. 하지만 그래도 미소는 떠나지 않았다.

 “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

 무영은 완전히 그를 놓고 물었다.

 “ 이유는 무슨. 존나 유치한 새끼. 아 이것 봐. 이것 보라고 ”

 정욱은 고개를 치켜들고 손으로 무영의 이마를 툭툭 쳤다.

 “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는데 말이야. 꼭 이협처럼 날 보더라. 좆같은 눈빛으로 말이야”

 그는 친구를 지긋이 보았다. 슬픈 눈이었다. 무영은 몸을 돌려 복도를 빠져나갔다.

 

 *

 

 “어서오세요”

 운향은 재봉선을 자르던 바지를 내려놓고 인기척이 들린 곳을 보았다.

 “ 이거 돌려드리려고 왔습니다.”

 전에 보았던 남자가 비닐이 씌워진 양복을 들고 있었다.

 “ 거기 올려 두고 가세요 ”

 운향은 그 말을 하고 다시 바지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남자는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었다.

 “ 볼일 있어요? ”

 “ 협이 집 안 왔나요? ”

 운향은 고개를 저었다.

 “ 몰라요. 오든지 안 오든지 신경 안 써서. 며칠 동안 집에 안 들어올 때도 있던데 ”

 “ 그럼 어디 갈 곳은 모르시나요? ”

 옥향은 짜증이 나는 듯 그를 째려보았다.

 “ 내가 왜 말해야 하죠? 더 이상 할 말 없으니까 돌아가세요. ”

 하지만 축객령에도 그는 자신을 향해 다가왔다. 옥향은 순간적으로 몸을 움찔했다. 가까이에서 보았을 때 그의 눈은 상당히 퀭하게 어두워져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었다. 남자는 자신 뒤에 있는 계단으로 돌진했다.

 “ 당신 뭐 하는 거야 ”

 옥향은 바락바락 악을 쓰며 소리를 질렀지만, 이미 무영은 보이지 않았다.

 2층은 한낮에도 어두웠다. 하나를 제외한 모든 창문들이 나무틀로 막혀 있었다. 그는 협의 방으로 곧장 들어갔다. 하지만 그곳에도 없었다. 오직 공허한 어둠만이 그를 맞이했다.

 방의 모습은 똑같았지만, 그녀의 옷이나 가방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망망대해에서 자신의 배를 놓쳐버린 것 같이 어둠에서 허우적거렸다. 도저히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지도 확신하지 못했다.

 하영은 이제 웹툰 연재를 앞두고 있고, 수훈에게는 소연이 연결되어 있었다. 무영은 점점 힘이 빠졌다. 방에는 온기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지만, 그녀의 향기가 났다. 무거운 비누향. 땀이 섞여 있는 그녀만의 향기가 구석에서 풍겼다. 무영은 미닫이문을 열어젖히고 방을 나왔다. 앞에는 협의 고모가 근엄한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 당장 나가. 이협 때문에 경찰 안 부른 거야. 지금 당장 안 나가면 ”

 무영은 순간, 협과 함께 2층에 오른 날을 떠올렸다.

 “ 고모님. 죄송합니다. ”

 말과 동시에 무영은 협의 맞은 편 방, 즉 그가 들어가 보지 못한 방의 문을 밀어젖혔다. 고모는 그를 따라 들어갔다. 그녀는 그를 끌어내려고 했지만 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어둠을 응시했다. 방에는 아주 희미한 빛줄기들만이 들어오고 있었다. 낡은 잡동사니에서 나는 곰팡이 냄새와 목을 매는 약냄새가 풍겼다. 좁은 방에는 수많은 것들이 쌓여 있었다. 무영은 벽을 더듬어 등을 켰다.

 “ 이게 뭐야. ”

 운향은 짧게 소리를 질렀다. 방 전체에 캔버스와 이젤이 쌓여 있었다. 몇 개의 물통과 짜다가 굳어버린 물감들이 이곳저곳에 흩뿌려져 있었고, 미완성된 그림들은 하나의 간이 의자를 중심으로 둥글게 놓여 있었다. 우연히 발견된 고대 유적같이 그들은 비밀스런 형태를 유지한 채 어지럽게 둘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무영은 즉시 남은 방들의 문을 모조리 열어젖혔다. 2층에 있는 전등을 다 켰을 때 그는 알아챘다. 이곳이 그녀의 작업장이었다. 각 방마다 족히 10점의 캔버스들이 어지러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작은 간이 의자만이 하나씩 남아 있었는데, 그녀의 흔적은 그것뿐이었다. 대게 그림들은 풍경화거나 자화상이었다. 그는 당황스러웠다. 책에서 보던 풍경화들은 모두 자연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그림에는 서울의 거리가 담겨 있었다. 밤에 취해 쓰러져 있는 남자, 싸우고 있는 뒷골목, 유혹하는 사람들. 풍경화라고 하기엔 그 분위기가 너무나 독하고 어두운 것이라 그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림들을 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곧 무영은 우당탕 쓰러지는 소리에 급하게 달려나갔다.

 “ 썅년. 머리 검은 거 거두지 말라고 했는데 ”

 언제나 침착을 지키던 옥향은 이성을 잃고 손에 잡히는 대로 던지거나 부수고 있었다. 그는 겨우 그녀를 잡아 세웠다.

 “ 저주 받은 년이야. 알아? 걔 때문에 내 동생이 죽었어. 재능? 아니 그건 그냥 저주야. 이 그림들 좀 봐. 넌 이걸 보고도 기분이 좋니? 난 온 몸이 께름칙한데 말이야. ”

 “ 진정하세요 ”

 옥향은 잔뜩 헝클어진 머리를 뒤로 넘기려고 했지만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녀는 악을 쓰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 할 줄 아는 건 남자 후리는 것밖에 없지. 매일 몸에 술 냄새 잔뜩 풍기면서 밤에 돌아와. 예술? 그림? 그거 뒷바라지 하느라 내 동생이 죽었어. 그 애미도 똑같지. 그 더러운 피가 그대로 흐른 거야. 우리 준하. 처음에 꼬여서 대구로 데려간 그 년. 다 그게 시작이었다고 ”

 그녀는 다시 부러진 붓으로 캔버스를 마구 찌르고 찢어버리기 시작했다. 무영은 그녀를 말릴 수 없음을 깨달았다. 더 이상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그 방에서 빠져나와 다른 방에 있는 완성작들을 마구잡이로 챙겼다. 그리고 그곳에서 도망쳐 나왔다.

 

 *

 

 인하는 마지막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김훈 작가 개인전은 나름 성공적이었다. 내일이 마지막이었기에 그녀는 사람들이 없는 회랑을 돌면서 남겨진 그림들을 찬찬히 다시 보았다. 그때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들렸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관람 시간이 끝났….”

 인하는 그녀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양손에 종이를 잔뜩 들고 있었다. 땀범벅이 된 얼굴에는 떨어질 듯 붙어 있는 반창고가 나풀거렸다.

 “ 진짜 거간꾼처럼 오셨네요. 무영씨 ”

 “ 저 이것들 좀 맡아 주세요 ”

 무영은 그러고는 조심스레 종이뭉치들을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인하는 언뜻 비치는 뒷면을 보고 그림임을 알아챘다.

 “ 이게 뭐죠?”

 인하는 사무실의 불을 켜고 종이들을 한 점씩 펼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의 질문에 답을 들을 필요가 없다는 듯이 그림에 집중했다.

 “ 이거 누가 그린 거에요? ”

 “ 협이요. ”

 무영은 땀을 손으로 닦아내며 소파에 걸터앉았다. 인하는 말없이 그림들을 보았다. 그는 어떻게 그림을 운반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저 알을 품은 듯 조심스레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많이 지쳐 있었다.

 “ 협이 어디 있나요. ”

 “ 그건 제가 물으려고 왔는데요. ”

 인하는 무영의 참담한 표정을 보고 그의 앞에 앉았다. 무영은 그녀가 권하는 담배를 물었다. 그리고 있었던 일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둘은 앉아 담배를 오랫동안 피웠다.

 “ 협이가 고등학교로 간 이후로 연락이 잘 안 됐어요. 공교롭게도 저도 그때 일정이 생겨서 프랑스에 가게 되었죠. 2년 뒤에 한국으로 와 연락이 닿았을 때는, 이미 협이 고등학교를 옮긴 뒤였어요. 예고에서 일반고로 진학한 거죠. 그림도 안 그린 지 오래 됐고요. ”

 협은 급격하게 안 좋아진 가정형편으로 인해 더 이상 미술을 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으로 자신이 미대를 간다면, 밑에 있는 동생은 너무도 많은 제약이 걸리는 상황이었다. 아주 뻔하고도 지루한 이야기였지만 무영은 한 단어도 놓치지 않으려 집중했다. 그는 잠시 놔두었던 욕심, 바닥부터 모든 걸 알고 싶어 하는 인간의 저열한 욕망이 고개를 쳐드는 것을 느꼈다.

 “ 그 이후로 저는 협이 더 이상 붓을 들지 않는 줄 알았어요. 겨우 대학에 진학했어도 자기가 버는 돈은 거의 다 집으로 보낸 걸로 알거든요. ”

 무영은 협과 여기 온 것을 떠올렸다. 그는 처음으로 협의 눈이 그렇게나 빛날 수 있음을 알았다.

 “ 여기에도 안 왔다면, 집으로 가지 않았을까요. 혹시 주소 아세요?”

 인하는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는 몇 개의 책상 서랍을 열었다. 온갖 잡동사니들을 꺼내고 넣는 것을 반복한 후 그녀는, 오래된 노트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그 노트의 한 부분을 찢어서 그에게 건넸다.

 “ 협에게 18살 때 간 이후로 한 번도 가보지 않았습니다. 이사했을지도 모르겠네요. ”

 “ 감사합니다. ”

 “ 협이 꼭 데려와 주세요….”

 무영은 인하의 마지막 말을 가슴 깊이 삼켰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무실을 나섰다.

 “ 잠깐만요 ”

 인하는 급하게 그를 불러 세웠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종이가 들려 있었다. 그가 가져온 그림이 아니었다.

 “ 이거 들고 가세요 ”

 무영은 일반 노트 크기의 종이를 받았다. 그곳엔 누군가의 초상이 콩테로 스케치 되어 있었다. 20대 초반의 여자. 넓지 않은 단단한 이마와 말쑥한 입. 높진 않지만, 정확히 중심을 잡고 있는 코. 그리고 아름다운 무쌍의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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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연은 의외로 많다. 2019 / 11 / 9 301 0 1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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