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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저수지의 개들
작가 : Hotsan
작품등록일 : 2019.11.9

복학한 장무영이 이협이라는 사람을 만나고 벌어지는 일들.

 
연신내에는 설산선녀가 있다.1
작성일 : 19-11-10 12:18     조회 : 174     추천 : 0     분량 : 9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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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영이 6시가 되어 문을 열었을 때, 하영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녀는 피곤해 보였다. 큰 타블렛으로 모니터를 보며 선을 긋는 것에 열중이었다. 회색 후드티를 뒤로 나온 머리는 미동조차 없었다. 누군가의 인기척을 느낀 하영은 뒤를 돌아보았다.

 “ 협은 갑자기 일이 생겼다고 그랬고, 수훈이는 뭐. 집에서 안 나올 것 같은데 ”

 하영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녀는 펜을 다시 잡았지만 그림은 그리지 않았다. 무영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 나는 쌍꺼풀 없는 협이 더 좋은데. ”

 둘은 아무 말 없이 화면만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그리고 있는 컷은 아직 미완성인 채로 있었다. 화면에 있는 여주인공은 그들을 보며 비웃고 있었다.

 “ 나도. ”

 무영은 매트릭스를 펴기 시작했다. 하영은 그가 문을 닫고 집으로 갈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그는 눌러앉을 생각같아 보였다.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보았지만, 변하는 것은 없었다. 하영은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 거기서 하지 말고 옆 컴퓨터 써 ”

 “ 거기 수훈이형 거잖아”

 “ 여기서는 모두 반말. 그리고 괜찮아 써도”

 조금 오른쪽으로 굽어진 자세로 그녀는 선을 그렸다. 오른손으로는 타블렛에 무언가를 그려 넣고, 왼손으로는 포토샵을 만졌다. 무영은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녹음파일과 노트를 꺼내 정리하기 시작했다. 둘은 각자 이어폰을 끼고 자기 일에 열중했다. 무영은 여유로운 오후의 시간이 꽤 맘에 들었다. 아무도 자신들을 보고 있지 않다는 은밀한 감정이었다. 그리고 아주 어릴 때, 이불로 만들어진 동굴에서 느꼈던 안정감을 떠올렸다.

 “ 내가 늦었네 ”

 둘은 동시에 문이 열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문에는 수훈이 서 있었다. 벙거지 모자를 쓰고 있어 눈썹까지 간당하게 그의 얼굴이 보였다. 언제나 통통한 광대는 오늘은 힘이 없어 보였다. 그는 문을 열고 들어와 빙긋이 웃으며 둘을 보았다.

 “ 둘 다 바쁘구나. 오늘 협도 없고. 나 먼저 가 볼게 ”

 수훈은 머쓱한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 나 진짜 바쁜데 ”

 하영은 갑자기 일어나 컴퓨터와 타블렛을 껐다. 그리고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 너 뭐해? ”

 수훈은 이해가 가지 않는 듯 그녀를 보았다.

 “ 장무영 너는 뭘 잘했다고 그렇게 비리비리하냐. 따라 나와. 날씨도 좋은데 어디 좀 가자 ”

 하영은 그 말과 함께 거칠게 짐을 쌌다.

 “ 아니 어디 가는지는 알려줘야지 ”

 “ 우리는 원래 특별한 일 없으면 어디 안가. 근데 오늘 협이 일 있다고 그러고, 나도 갑갑해서 ”

 무영은 그녀가 어떻게든 분위기를 풀기 위해 노력하는 것 같았다.

 “ 이상하게 보지마. 애들 다 있었으면 오늘 발표는 내 차례였어. 원래 내 다음 연재 내용 피드백 받고 싶었거든 ”

 그녀는 마지막으로 가방에 펜과 연습장을 넣었다. 무영은 수훈과 어색하게 서서 그녀를 보았다. 그들은 아직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했다. 어색한 분위기 속 키를 잡고 있는 사람이 몇 일전에 싸웠던 하영이라는 사실이 애처로웠다.

 “ 만화방 가자”

 그들은 학교 밖으로 나왔다. 무영은 근처에 있는 카페만화방으로 갈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녀는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 곤암동 벗어나? “

 “ 응. 시간 많잖아. 금요일인데“

 하영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쉽게 감정을 드러낼 때도 많았으며, 마음 먹은 대로 되지 않으면 화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직선적인 성격에는 음울하거나 계획적인 부분이 전혀 없었기에, 한 번 그녀를 알게 된다면 쉽게 싫어할 수 없었다. 또한, 그녀는 의견 주장과 공격적인 감정뿐만 아니라 사랑, 고마움과 같이 민망하게 여겨지는 것들도 쉽게 보여 주었다. 직선적이지만 뻣뻣하지 않은 사람이었으며, 불같지만 위험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무영과 수훈은 조용히 그녀의 뒤를 쫓았다. 휴대폰으로 검색을 하지 않는 걸 보아 해서 익숙한 곳으로 가는 것 같았다. 지하철은 꽤 멀리 그들을 싣고 움직였다. 점점 무료해질 때 하영은 그들을 이끌고 내렸다. 도착한 곳은 연신내였다. 무영은 연신내가 처음이었다. 전반적으로 조용한 곳이었다. 낮은 건물들과 낮은 사람들. 그는 자신이 사는 성북동을 떠올렸지만, 색이 달랐다. 볼링장, 나이트, 호프집 들은 옛 시대의 세련됨을 간직하고 있었다. 적어도 20년 전, 약동하는 젊음들이 마구 찍어댄 발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만들어진 레트로가 아닌 향수鄕愁 그 자체였다.

 “ 여기 불광초, 공원, 사우나, 다 내가 다녔던 곳이야. 아. 이거 타야 해. “

 무영은 하영의 손에 이끌려 마을버스를 탔다. 마을버스엔 주민들이 몇 명 타 있었다. 그는 서울에서 오랜만에 진짜 주민을 본 것 같았다. 자리가 없는 탓에 셋은 서로의 몸을 맞댄 채 손잡이를 잡았다. 마을버스는 번화가를 벗어나 구불구불하게 올라갔다. 나이트라는 간판을 지나 떡볶이 포장마차가 서 있는 곳에 다가왔을 때, 그녀는 내렸다. 하영은 말없이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무영은 다른 사람의 세상에 온 걸 실감했다. 그녀의 눈에는 추억보다 많은 것들이 서려 있었다.

 “ 저기야. 칠광만화방 “

 무영은 그녀를 따라오며 손때가 찌든 만화방을 생각했다. 세월을 숨기려 하지 않는 물건들투성이인 장소를 상상했다. 하지만 무영이 본 것은, 낮은 상가 건물들 사이에 껴 있는 흰 건물이었다. 새로 페인트칠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였다. 문 앞에는 오늘 들어온 신작 만화 이름이 작은 화이트보드에 적혀 있었다. 무영은 하영의 밝은 표정을 보았다. 그녀가 저장한 감정 중에 가장 행복한 것을 보여주는 듯했다.

 “ 사장님 저 왔어요. “

 손님이 들어와도 조용히 책을 읽고 있던 남자가 카운터에 앉아 있었다. 각진 철제 안경을 끼고 열중하던 사람은 말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불균형하게 몸이 마른 중년의 남자였다. 그는 하영을 보더니 책을 내려놓고 화답의 미소를 보였다. 그 둘은 아주 오랜만에 만난 친우를 보듯 궁금한 점을 조금씩 아껴가며 만남을 조심스레 소비 했다. 무영과 수훈은 옆에 둥그러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몇 분간 이야기하던 남자는 그제야 무영과 수훈을 발견한 듯 말했다.

 “친구들이구나 ”

 하영은 멋쩍게 웃었다. 그리고 물었다.

 “ 아. 아키라 누가 안 빌려 갔죠? 그거 보러 왔는데 “

 “ 그거 안 지겨워? 누가 4권 빌려 갔을 텐데 “

 사장이라 불리는 사람은 컴퓨터로 검색하고서는 하영을 봤다. 좋은 손님이 왔지만 대접할 것이 없는 요리사의 눈이었다. 그리고는 고민하다 카운터 옆에 있던 작은 문을 열었다. 그는 불도 들어가지 않는 작은 방으로 몸을 구기고 들어갔다. 몇 분 있다가 나온 사장의 손엔, 영어로 AKIRA라고 적힌 만화책이 있었다.

 “ 이거 내 건데. 조심하게 봐. 이거 볼 때는 배달 시키면 안 돼 “

 팔자주름으로 어린아이의 동심이 슬쩍 배어 나왔다. 그의 간절함, 간직하고 있는 순수함이 무영에게까지 전해져 왔다. 하영은 미소를 지으며 책을 받았다.

 “ 감사해요. 고이 읽고 돌려드릴게요 “

 하영은 그를 데리고 의자가 있는 곳으로 갔다. 오래된 민트색 소파들이 줄 지어 놓여 있었다. 건물은 오래된 모습이었다. 책들도 신간이 아니라면 누렇게 뜨거나 손때 묻은 것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 외의 테이블과 책꽂이, 소파는 깔끔히 정돈된 모습이었다.

 “ 내가 처음으로 그림 열심히 그려야겠다 생각하게 한 거. 아키라. 내용이 좀 많은데 열심히 읽어봐. 수훈아 너는 다른 거 읽어도 돼. 이거 이미 봤을 거 아니야. “

 수훈은 그 말로 무협 코너로 가, 책을 골랐다. 무영은 그 말을 끝으로 자기의 노트를 끄적이는 하영을 봤다. 아직 이른 시간이여 그런지,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무영은 그녀가 자신에게 더는 할 말이 없음을 알아챘다. 그는 조심스레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

 

 날은 어두워지고 많은 손님이 앉았다가 자리를 떴다.

 “그런데 너 만화책은 안 사? 이런 책은 비싼가?”

 무영은 만화책을 읽다 덮으며 말했다. 아직 만화방은 한산했다. 하영은 그가 책을 읽는 동안 공책에 글을 썼다. 간단한 줄거리와 대사같이 보였다.

 “이사할 때 다 버렸어. 너무 무거워서 ”

 그녀는 공책에 시선을 쏟으며 답했다. 무영은 의뭉스런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하영은 한참 동안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시계를 보았다. 벌써 8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그때 진동 소리가 들렸다. 하영은 전화가 온 휴대폰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 나 집 들어가야겠다. 너희는 이거 좀 더 보고 가도 돼. ”

 다시 돌아온 그녀는 짐을 챙기며 말했다. 무영은 그녀가 서두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묵묵히 노트와 펜을 가방에 집어넣고 있었다. 조금만 있으면 홀연히 사라질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갑자기 연신내가 자신에게 너무 낯설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 그러면 하나만 더 소개해줘. 나 오늘 모임 있다고 아무것도 안 먹고 왔네 ”

 수훈은 그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셋은 결국 밖으로 같이 나왔다. 그리고 하영은 둘을 이끌고 오르막 길로 향했다. 마을 버스를 타고 올 때도 언덕이었지만, 만화방을 조금 지나치자 더욱 좁고, 가파른 길이 나타났다. 오르막은 끊길 듯 끊기지 않으며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상가가 끝나자 완전한 주택가였다. 오래된 빨간색 건물, 깨진 창문이 덜렁거리며 달려 있는 원룸 빌라가 뒤죽 박죽 섞여 있었다. 꼭 바닥에 부서진 레고 조각들이 흩어져 있는 것처럼 일관성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저녁 시간이 되자 하늘에는 달이 조금씩 선명해 지고 있었기에 무영은 그것을 위안으로 삼으며 걸어 올라갔다.

 “ 너 여기 살아? ”

 하영은 조용히 걷기만 했다. 무영은 답이 없는 그녀를 보았다. 자신과 같이 이제 하영도 숨이 차오르는 듯 입술이 살짝 벌려져 있었다. 수훈은 벌써 땀이 흐르는지 연신 손으로 얼굴을 훔쳤다.

 “아니. 나는 여기 말고 옆 동네에 살아 ”

 “ 완전 반대쪽 아니야?

 “ 괜찮아. 별로 안 멀어. 옛날에 여기 살았었거든. 진짜 오랜만에 온다. ”

 하영은 자신만이 아는 시절을 공유하고 있는 벽돌, 나무들에 잡혀버린 것 같았다. 같이 있었지만, 그녀는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 이 위에 뭐가 있긴 한 거고? ”

 “응. 조금만 더 가면 나와 ”

 그들은 조금씩 길을 올라갔다. 이 곳은 한 건물 다음에 무엇이 나올지 전혀 예상되지 않았다. 다들 비슷한 모양이었지만, 어딘가 이상한 계단이 붙어 있거나, 크기가 너무 큰 창문이 걸린 건물들이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괴팍한 성격의 예술가들의 무덤만이 있는 묘지가 이럴 것 같았다. 미로 같은 곳을 헤쳐 가다 하영은 그제야 발걸음을 멈췄다. 언덕 한가운데 그나마 수평이 맞는 곳이었다. 그곳엔 나지막한 벽담이 둘러져 있는 이층집이 서 있었다. 벽담은 회칠이 덕지덕지 칠해져 있었다. 이층집 다른 건물들과 달리 나무로 틀이 짜여 있었고 기와로 지붕이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꼭대기에는 오방기가 바람에 휘날렸다.

 “ 여기 무당집 아니야? ”

 “ 말조심해. 너 급살 맞는다. 우리가 갈 곳은 이쪽 뒤야 ”

 수훈은 급살이라는 말에 몸을 움찔했다. 무영은 먼저 그녀를 뒤따랐다. 대문에는 雪山仙女 라는 푯말이 붙어 있었다. 집은 거리 쪽을 정면으로 보고 있어 더욱 기세 있어 보였다. 긴 돌담은 이층집을 둘러 나와 옆집이 시작되는 곳에서 기묘하게 뒤쪽으로 꺾여 들어갔다. 하영은 옆집과 돌담 사이에 있는 좁은 길로 향했다. 골목은 꽤 길었다. 그 끝에는 한 그루 나무와 함께 오래된 가정집이 있었다.

 “설화당”

 벽돌건물이 아니라 오래된 시골집 같은 느낌이었다. 하영은 둘을 이끌고 자연스레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안은 원목 테이블들이 놓여 있었다. 벽지는 새로 붙였는지 나름 흰색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천장과 바닥은 오래된 황토색이었다.

 “ 칼국수 세 개 주세요 ”

 하영은 자리에 앉자마자 주문을 했다.

 “ 아. 미안. 여기 칼국수랑 전밖에 안 팔아서 ”

 “ 아니야. 나 칼국수 좋아해 ”

 하영은 그에게 미안한 듯이 말한 뒤 두리번거렸다. 그녀는 음식이 나오기 전에 이미 눈으로 보이는 모든 걸 닥치는 대로 삼키고 있었다. 가게 안은 따뜻한 밀가루 냄새가 풍겼다. 셋은 숨을 고르고 불투명한 플라스틱 컵에 물을 따라 마셨다.

 “ 왜 10시까지 가야 하는 거야? 집이 많이 엄격해? ”

 “ 가족의 평화를 깰 정도로 더는 이기적이지 않거든. ”

 “ 부모님이 걱정이 많으셔? ”

 “응. 아버지가 특히나 ”

 무영은 어떻게든 대화를 끌어내기 위해 어색한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그 끝이 이어지진 않았다. 셋은 자리에 앉아 서로를 보지 못한 채 테이블을 보거나 사람들을 보았다. 그녀는 문 쪽으로 나 있는 창문을 계속 보고 있었다.

 “왜 설화당이야. 칼국숫집인데. 이름 엄청 특이하네 ”

 하영은 테이블을 토도독 두드리며 그를 보았다. 어릴 적 이곳에서만 짓던 편안한 미소 같았다. 무영은 지금보다 더 키가 작은 어린 하영을 상상했다. 그녀는 칼국수가 나오기 전까지 설렘을 참지 못했으리라. 어느새 한 무리가 들어와 그들 옆에 자리 잡았다. 다들 주민인 듯 편안한 옷차림이었다.

 “ 앞 집 무당 아줌마 이름이 설산선녀야. 그리고 저기 창문 앞에 있는 나무가 라일락 나무거든. 꽃이 피면 꽤 예뻐. 그래서 설화당아닐까”

 수훈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때 흰머리가 지긋한 중년의 여인이 쟁반을 들고 그들 옆에 왔다. 그녀는 김이 나는 그릇을 테이블에 쏟아내었다.

 “ 어. 너 용석이네 딸 아니냐? 맞네 맞어 ”

 앞치마를 두른 그 여자의 손에는 떨어지지 않은 쪽파 한 조각이 붙어 있었다. 입이 유난히 큰 사람이었다. 수더분한 눈이 하영에게 떨어지지 않은 채 멈춰있었다. 마음을 놓게 하는 눈이었다.

 “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오랜만이에요. ”

 그녀는 예상치 못한 연락을 받은 듯한 표정이었다. 웃고 있었지만 그리 깔끔한 웃음이 아닌 것 같았다. 두 명의 여자는 짧은 안부를 묻고 답했다. 그리고는 중년의 여인은 쟁반을 들고 돌아섰다.

 “ 저희 소주 한 병만 주세요 ”

 그녀를 다시 잡은 것은 하영이었다.

 셋은 칼국수를 먹으며 술을 마셨다. 그리고 어느새 그들의 테이블엔 잘 부쳐진 부추전도 하나 놓여 있었다. 중년 여자의 손과 똑 닮은 전이었다. 수훈은 배가 고팠는지 누구보다 맛있게 전을 잘 찢어서 술과 함께 소중히 입에 넣었다.

 “ 나 너 웹툰 다 봤다. 경주마 ”

 무영은 생각난 듯 그녀에게 말했다.

 “ 진짜 재밌지? ”

 수훈의 질문에 무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장난 아니던데. 너가 잡지 제일 첫 인터뷰이인게 이해가 가”

 무영은 지금이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다가갈 수 있는 때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느낀 점을 천천히 말했다. 그녀의 만화는 굉장히 정교히 짜여진 조각 같았다. 컷과 컷, 대사와 대사가 허투루 넘어가는 것이 없었고, 특유의 어두운 분위기는 전반적인 만화의 주제에 큰 시너지를 더 했다. 그는 말을 하다 수훈이 자신을 조용히 쳐다보고 있음을 느끼고 말을 멈췄다. 자신도 모르게 주절주절 작가 앞에서 ‘리뷰’를 하고 있었다.

 “ 왜 봤어? ”

 하영의 또랑또랑한 눈은 좌우가 들어맞지 않았다. 불균형은 시비조에서 나온 그녀의 목소리로 인해 더 심해졌다.

 “아 협이가 너 공모전 했다고 알려줬거든. ”

 하영은 잔에 있던 술을 입에 넣고 그를 조용히 봤다.

 “ 그거 알어? 너도 그랬지만, 우리도 협이 시작이었거든 ”

 하영은 이제 선명한 분노를 흘리고 있었다. 무영은 그녀의 말에 놀라 눈치를 보았다.

 “ 협이처럼 완벽한 사람만 안 나타났으면 그랬다면…. 내가 하는 걸 경멸스럽게 봐주었다면….난 다시 생각도 못 했을 텐데 “

 “ 어떻게 협이랑 만난거야? ”

 무영은 그리 좋지 않은 질문이라는 것을 느꼈지만, 이미 입 밖으로 튀어나온 뒤였다. 하영은 술기운이 갑자기 몰려오는 듯했다. 하지만 무영의 질문을 받자 잠시, 취기가 그득하던 눈에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 내 닉네임은 핫산이었어. 처음 펜팔 한 또래 이름이었는데”

 

 하영은 만창과 진학을 포기하고 이석대 컴공과로 진학했다. 더는 만화를 그리지 않으리라 다짐했었기에 할 수 있었던 결정이었다. 많은 것을 정리한 뒤 남아 있던 것은 낡은 태블릿뿐이었다. 중학생이 되자마자 샀던 태블릿이었다. 그녀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자신을 숨기고 학교 커뮤니티에 만화를 올렸다. 처음은 아무 생각 없이, 욕심도 없이 올리던 작품이었다. 나름 폭발적인 인기가 생겼지만, 그녀에겐 아무런 감흥도 감정도 없었다. 자신이 그리는 모든 그림과 캐릭터를 사랑했고, 연습작은 없다라는 생각으로 임해왔다. 하지만 이제 그녀에게 그런 열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날은 날씨가 좋았다. 아주 우연히, 칙칙한 공대 건물을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든 하영은 노트를 들고 학교를 걸었다. 그리고 한적한 학생회관까지 발걸음이 닿아 근처 벤치에 앉아 스토리를 짜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하영은 수업 시작 까지 얼마 남지 않음을 알고 급히 책과 노트를 가방에 넣고 일어섰다. 그렇게 몇 걸음 옮겼을 때였다.

 “저기요. 노트 놔두고 가셨어요 ”

 하영이 급히 뒤돌아섰을 때는 이미 한 여자가 자신의 노트를 들고 서 있었다. 그녀는 그 누구에게도 자신이 그림을 그린다는 걸 들키기 싫었다. 자신의 꼴이 우스운 줄 알았지만 달려갔다. 그러고 나서 거칠게 손에서 공책을 뺐었다. 그런데도 그 여자는 웃고 있었다. 머리를 바짝 묶은 여자는 꼭 검은 옷을 수녀 같았다.

 “ 핫산님. 저 팬인데 사인 좀 해주세요 ”

 “ 죄송합니다. 잘 못 보셨나 봐요. 제가 지금 바빠서요 ”

 “컴공과 16학번 김하영씨. 제가 진짜 팬이어서 그런데 혹시 밥 하나 사드려도 될까요? ”

 하영은 꼭 책에다가 자신의 이름과 학번을 적어두곤 했다. 그녀는 위태하게 그녀를 보았지만, 협은 빙그레 웃으며 그녀에게 조금 더 가까이 와 있었다. 결국, 둘은 같이 길을 내려갔다. 하영은 자신의 낯가림과. 자신의 가시 돋친 말이 이 사람 앞에서는 의미가 없다는 걸 느꼈다. 이상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만화를 누구보다 이해하고 있었다.

 이해 였다. 분석이 아니라 공감이었다. 이협은 오랜만에 만난 고향 친구 같았다. 그리고 그녀는 ‘곤암동 살인사건’에 대해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 디테일이 대단하던데요. 거의 집착이라고 할 정도로 ”

 하영은 자신 앞에 불쑥 나온 사람이 자신의 작품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걸 잠자코 듣고 있었다. 그녀의 말은 틀린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말을 듣는 순간 화가 일기 시작했다.

 “ 그래서요? ”

 “ 왜 부끄러워하세요. 자신의 작품에 ”

 “ 왜 치켜세우는지 모르겠네요. 진짜 그만 가 보겠습니다 ”

 하영은 일부러 반대 방향으로 몸을 틀어 발걸음을 움직였다. 하지만 그녀는 멀리 가지 못했다. 협은 아름다운 미소로 그녀를 뒤에서 잡았다.

 “ 그럼 제대로 된 작품 하나 하시죠. 제가 도와드릴게요”

 

 수훈은 이야기를 듣고 입꼬리를 씰룩였다.

 “ 나는 협이 웃으면 뭘 하지 못하겠더라 ”

 하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점점 그녀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그들은 달콤한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서로의 시선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영락없는 포로들의 모습이었다. 시간은 벌써 10시가 가까이 되고 있었다. 둘은 애초에 계획과는 달리 꽤 취해 있었고. 무영은 지금이 가야할 때라는 걸 느꼈다. 마지막 잔을 비운 하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을 하고는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했다.

 “벌써 가려고? 어린 애가 완전히 다 커버렸네. 완전히 다른 곳으로 이사 간거야? ”

 “아니에요. 여기서 많이 멀지 않아요 ”

 무영은 그 모습을 보고 먼저 밖으로 나왔다. 시원한 밤공기가 몸을 훑고 지나갔다. 설산선녀의 큰 집은 달과 함께 크게 서 있었다. 무영은 가게 앞에서 담배를 물었다.

 “ 여기서 피면 안 돼. 여기서는 아저씨들 주정도 안 부려. 저기 엄청 영험하거든 ”

 셋은 조용히 골목을 빠져나왔다. 그녀는 연신 휴대폰으로 시간을 보고 있었다. 무영은 하영이 안타까웠다. 고향 같은 곳에서도 그녀는 쫓기는 것 같았다. 빠른 걸음으로 내리막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들은 예술가의 무덤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 이봐요. 형 누나들.”

 

 *

 

 하영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녀는 취해서 상황 파악이 잘 안 되는지 계속해서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경찰서 안은 술에 취해 연신 보내주세요.를 중얼거리는 사람과 욕지거리를 내뱉는 무리가 한 데 엉켜 있었다. 무영과 수훈은 하영 옆에 앉아 담당 경찰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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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연은 의외로 많다. 2019 / 11 / 9 301 0 1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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