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 나야.”
[하나. 지금 어디야?]
“여기 회사 근처 카페인데 왜?”
[오늘 볼 수 있을까 해서.]
“지금?”
[저번에 약속 파투 난 뒤로 따로 만난 적 없잖아.]
“그렇긴 하지만…….”
[다른 약속이라도 있는 거야?]
그녀는 전화를 하면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재필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심장이 아래로 하강하는 느낌이 들었다. 꼭 자신이 나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처럼.
“일단 내가 다시 금방 연락 줄게.”
[응, 기다릴게.]
그가 잠깐 할 얘기가 있다며 그녀를 붙잡은 것이긴 했지만 아직 그와의 자리가 파한 것이 아니었기에 하나는 섣불리 성수와 약속을 잡을 수 없었다. 그녀가 전화를 끊자 조용히 있던 재필은 입을 열었다.
“가봐야 하는 거야?”
“어……딱히 그런 건 아닌데.”
“어차피 이제 우리도 헤어져야지.”
“……그렇네요.”
“너랑 나랑 여기 남아서 뭘 하겠냐.”
재필은 그 말을 끝으로 앉아있던 몸을 일으켰다. 하나는 입을 꾹 닫으며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가겠다는 말도, 잘 가라는 말도 없이 카페를 나서자마자 자신의 집 쪽으로 향했다.
인사도 안 해주는 거야? 하나는 서운한 마음에 그 자리에 서서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성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하나야.]
“나 지금 갈 수 있어. 어디서 볼래?”
아무래도 오늘은 술을 진탕 마셔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녀는 성수를 만나기 위해, 반대편으로 발을 내디뎠다.
*
성수는 가게에 들어와 하나와 인사를 나눈 뒤로 그녀와 말 한마디를 섞지 못했다. 그녀의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아 보였기에.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걸 물어봤다간 화라도 낼 거 같아 참기로 했다.
“성수야.”
“어?”
“남자들은 원래 그래? 막 편하게 말 걸어주고 말도 막 놓고 그런 사람이 좋아?”
“음……편하게 말 걸어주면 좋겠지. 근데 그게 갑자기 왜 궁금해?”
“막 나처럼 편하게 입고 다니는 스타일보다는 정장 같은 거 입고 똑 부러지는 스타일이 좋은 거야?”
“그건 사람마다 다르지 않을까. 취향이라는 게 있잖아.”
“대부분의 남자 취향은 어떤데?”
한동안 말이 없다가도 그녀가 처음 내뱉은 말은 의미를 알 수 없는 이야기들뿐이었다. 갑자기 왜 그런 주제가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성수는 그녀의 물음에 성실하게 답변을 해주었다.
“내가 대부분의 남성의 취향을 알 순 없잖아.”
“그럼 너는? 너는 어때?”
“나?”
“응.”
“나는 귀여운 쪽이 좋네.”
“귀여운 거? 너가 보기엔 나는 어떤 타입이야?”
그는 그녀의 물음에 입에 머금고 있던 물을 뿜을 뻔했다. 아까부터 얘는 무슨 질문을 하는 거야?
“난 어떻냐고.”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내 주위에 남자가 너 아니면 누가 있는데!”
“답해주기 전에, 내가 먼저 답을 듣고 싶은데.”
“뭔 답?”
“뜬금없이 이런 건 왜 물어보는 거야?”
쫑알쫑알 그에게 여러 질문을 하던 그녀는 오히려 자신이 질문을 받자 입이 닫혀버렸다. 성수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하나가 대답을 할 때까지 조용히 기다릴 뿐이었다.
“그야……갑자기 궁금해졌으니까.”
“갑자기?”
“그 회사 선배들이랑 퇴근 전에 그런 얘기를 했거든!”
“그래?”
“너는 어떻게 생각하나 궁금해져서.”
하나는 재빠르게 말을 생각해냈지만 아무리 그래도 7년 이상을 붙어있었던 성수는 속일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가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넘어가기로 하였다. 굳이 캐내어서 알고 싶지 않기도 했고.
“아, 프로젝트는 잘 되는 거 같더라.”
“오늘 조세희 감독이랑 고재필 감독, 처음 만나는 날이라고 들었는데.”
“응. 오늘 만났어.”
“너도 만났어?”
“아주 잠깐.”
개인적으로 그는 둘이 만나서 어떨까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녀에게 분위기가 어땠는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왠지 그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 듯, 앞에 있는 맥주를 벌컥 들이켤 뿐이었다.
“별로 분위기 안 좋아 보였어?”
“아니, 좋았어.”
“좋았다고?”
“둘이 동갑이라고 말도 놨더라.”
“고재필 작가, 까칠한 사람이라고 들어서 걱정했는데 그렇지도 않나 봐?”
”그러게. 나도 그런 사람인 줄 알았지.”
끝을 흐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그는 불안함을 느꼈다. 혹시나, 설마 등과 같은 단어가 머리 안을 뱅뱅 맴돌 뿐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갑작스럽게 꺼낸 말의 의미가 다 고재필에게 있는 것만 같아서.
“일 얘기는 그만하자. 우리 최근에 너무 일 얘기만 하지 않아?”
“강하나.”
“응?”
입을 억지로 끌어올린 하나가 성수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자 불안이 크게 증폭되어 자신의 몸을 감싸오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자신이 아닌 재필이 담겨있는 거 같았으니까.
“왜 불러놓고 대답을 안 해….”
물어보고 싶지 않았다. 다른 이야기로 주제를 돌려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좋아해?”
“뭐를?”
“고재필.”
“……야. 내가 고재필을 좋아할 리가 없잖아.”
“내 눈엔 그렇게 보여.”
“너 요즘 피곤한가 보다. 이상한 소리 하는 걸 보니까.”
하나의 입에서 아니라는 대답이 나오길 바랐다. 그 대답만 들으면 이 불안이 없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입에서는 부정의 답이 나왔지만 성수는 무언가 날카로운 것에 찔리기라도 한 듯 가슴 부근이 아파졌다.
6년, 아니 7년을 참았다. 처음 그녀를 마주했을 때부터 그녀를 좋아했다. 동글동글한 귀여운 눈에, 앙증맞은 코와 앙 다문 입술. 소심한 성격을 숨기지 못하고 낯을 가리며 주위를 많이 경계하던 그녀의 모습은 아직도 선명했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묶여있어 여태까지 한 번도 표현하지 못하고 억눌렀던 마음이, 어느 순간부터 줄줄 새어 나오더니 이번엔 터지기 직전이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이 감정을 터트리면 친구로도 못 지내게 된다는 걸 알면서도 도저히 자신의 마음을 막을 수 없었던 성수는 결국 오랫동안 숨겨왔던 감정을 터트려버리고 말았다.
“난 좋아해.”
“…….”
“강하나, 너 좋아한다고.”
이미 후회를 해도 늦었다. 다 쏟아내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으니까.
“한성수.”
“…….”
“넌, 넌 무슨 장난을 그렇게 진지하게 하냐. 놀랐잖아.”
하나가 웃으며 앞에 있는 물 잔을 잡았다. 미세하게 떨리는 그녀의 손을 보았지만 성수는 이제 변명하거나 숨기고 싶지 않았다. 이미 한 번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으니까.
“장난 아니야.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했으니까.”
“…….”
“그래서 여태까지 아무도 만나지 않았던 거고.”
그녀는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여태까지 성수와 지냈던 5년을 되짚어보며 그래서 그렇게 행동했구나와 같은 회고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하나하나 되짚어볼수록 그의 마음을 깊게 알게 될까 봐 무서웠다.
7년이라는 꽤 긴 시간 동안 한성수라는 사람은 하나의 유일한 친구였다. 싸울 때도 많았고 서로에게 짜증을 부릴 때도 있었지만 그녀에게 있어서 그만큼은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나중에 서로에게 애인이 생기고 결혼을 하고 나서도 쭉 만나며 교류하게 될 친구라고 생각했다.
“이기적이어서 미안해.”
“……한성수, 너….”
“천천히 대답해줘도 돼. 너도 많이 혼란스러울 테니까.”
“…….”
“나를 선택하지 않아도 되지만, 내가 하나 말해주고 싶은 건 고재필은 아니라는 거야.”
너를 힘들게 만들 사람이니까. 덧붙여진 성수의 말은 더 이상 하나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미안, 나 가봐야 할 거 같아.”
“하나야.”
“나중에. 내가 나중에 연락할게.”
“잠깐만. 데려다줄 테니까 잠깐 기다려.”
“싫어.”
“…….”
“지금은 네 얼굴 보고 싶지 않아.”
급하게 하나는 자신의 가방을 챙겨서 일어섰다. 성수의 시선은 그녀가 움직이는 대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녀는 마지막 내뱉은 말과 같이 그의 얼굴이 보고 싶지 않은 건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녀가 가게를 빠져나갈 때까지.
가게를 빠져나오자마자 더운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속 깊숙이 자리하고 있던 깊은숨을 모아 토해내며 그녀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별 하나 보이지 않는 새까만 하늘에서 유일하게 그녀를 위로해주는 건 동그랗게 떠있는 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