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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안락한 게 아니고
작가 : 수요일
작품등록일 : 2019.11.9

"저 물어주세요."
안락사 시술소를 찾은 남자와 뱀파이어 여자의 차갑지만 뜨거운 동거.

 
14화
작성일 : 19-11-10 00:29     조회 : 235     추천 : 2     분량 : 9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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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화

 

 여섯 살 때. 옆집 여자애가 동네 짱을 먹겠답시고 윤오를 찾았던 적이 있었다. 알록달록한 색종이에 온갖 스티커를 붙여 만든, 1999년 9월 8일 2시에 놀이터로 나오라 적힌 결투장을 받은 윤오는 그 자리에서 엉엉 울었다. 무서워서. 그리고 도망쳤다. 1999년 9월 8일, 혹시라도 여자애가 따라오진 않았을까 걱정하며 부모님을 졸라 서울에서 한참을 떨어진 강릉에서 하루를 보냈다. 윤오는 다치는 것도 아픈 것도 참 싫었다.

 그리고 스무 살 때, 처음으로 사귄 여자친구가 마음이 떠 같은 과 선배와 영화를 보러 갔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을 때도 윤오는 모르는 척 도망쳤다.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생각해보면 윤오는 선민을 만나기 전까지 겁쟁이로 살았다. 들이받는 것과 도망치는 것 사이에서 항상 도망치길 선택했다.

 

 “이 새끼야, 이딴 기사 내면 무사할 거 같애?”

 “무사하고 나발이고 세상에 알려야 하는 건 맞는데요, 이 새끼야?”

 선민을 처음 본 날, 윤오는 기함을 했다. 저 여자가 쏘아 대고 있는 상대방 남자는 데스크임이 분명한데. 부장급이 분명한데. 어째서 이 새끼, 하는 거지? 윤오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알기 위해 주변을 둘러봤으나 그 어느 누구도 데스크와 선민의 싸움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늘상 있는 일이라는 듯 익숙하고도 편한 얼굴로 각자 할 일을 하는 사람들에 윤오 역시 그대로 서 있길 택했다. 그리곤 선민을 관찰했다. 어느 언론에서도 보도하지 않는 고공농성자들을 팔로업했다는 그녀를.

 한참을 왕왕대던 둘의 싸움은 선민의 승으로 끝이 난 듯 보였다. 덕분에 기사는 지면에 실렸고 세상은 관심을 가지는 듯 다른 언론사에서도 후속 취재에 매달렸으며 농성자들은 130일만에 땅을 밟았다.

 

 알고 보니 선민은 유명했다. 데스크와 세상 모든 개자식들을 들이받는 사람으로. 이새끼 저새끼 하는 데스크를 향해 받은 만큼 이새끼 저새끼 하는 유일한 인물로. 윤오는 사회부 막내 기자 일을 하며 그런 선민을 지켜봤다. 남몰래 선민을 동경했다. 도망치지 않는 이에 대한 경외심 같은 것이었을까. 아, 나도 정의롭고 싶다. 선민은 윤오를 꿈꾸게 했다.

 “야, 너 글 좀 쓴다며? 이제 나랑 다녀. 우리 오늘부터 팀이야.”

 그랬기에 어느 날 다가온 선민의 제안은 달콤하기 그지없었고 윤오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선민이 내민 손을 잡았다.

 

 그후로 둘은 매사 들이받았다. 경찰력의 무능을 보도하기 위해 전국의 경찰서를 돌고 돌아 조사를 했고 경찰처장의 인터뷰를 따기 위해 무작정 경찰청에 들어갔다 철창신세를 지기도 했지만 결국은 기사를 완성해 경찰청장을 머리 숙이게 만들었다. 데스크는 윤오와 선민이 콧바람을 씩씩대며 사무실로 들어올 때면, “이번엔 또 뭐!! 니네 둘이 붙어 다니지 좀 마! 니들이 무슨 투우 소야? 내사 다 받아버리면 그만이냐고!” 소리지르면서도 윤오와 선민의 합을 인정하는 듯 둘이 취재해 온 내용을 크로스체크한 후 고심해 지면을 내주었다.

 

 윤오는 몇 년을 선민과 함께했다. 선민을 존경하며, 존중하며, 선민처럼 살기를 다짐했는데. 마지막에 와선 또 옛날의 남윤오처럼 도망치고 말았다. 윤오는 흐리멍텅한 꿈결을 헤매며 생각했다.

 내가 또 도망쳐서 이런 일이 벌어졌나 보다.

 

 *

 단야는 잔뜩 굳은 얼굴로 방에 쏙 들어가 나오지 않는 윤오가 걱정돼 방 문 앞을 서성였다. 시간이 흘러 윤오가 방에 틀어박힌 지 네 시간쯤 됐을 때 단야는 방문을 살짝 열었다. 윤오는 잠에 빠져 있었다. 단야는 윤오의 곁에 가까이 갔다. 고른 숨소리에 간혹 괴로운 신음이 섞였다. 등을 돌리고 누워 반쪽 얼굴이 묻힌 베개는 잔뜩 젖어 있었다.

 “이거는 맨날 울어….”

 단야는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윤오의 곁에 전처럼 가만 자리를 잡았다. 윤오가 돌아누워 공간이 생긴 곳에 턱을 괴고 윤오의 얼굴을 바라봤다. 검지 손가락으로 윤오의 콧날을 따라 내려 그렸다. 콧날 끝에 다다라서는 입가를 매만지다 입꼬리를 살짝 올려봤다. 너는 웃는 게 어울리는데 왜 매번 울까. 조용히 읊조렸다.

 단야는 동이 틀 때까지 윤오의 곁에 앉아 윤오를 보고 또 봤다. 눈을 감고 윤오의 얼굴을 그려보다 눈매가 어떻게 생겼더라, 한번에 그려지지 않아 눈을 떠 다시금 윤오의 잠든 얼굴을 보길 반복했다.

 

 *

 윤오는 눈을 떴다. 해가 들어 밝은 빛이 눈가를 콕콕 찔러 잠에서 깨지 않을 수 없었다. 윤오는 멍하고 가라앉은 기분으로 또다른 하루를 맞이했단 사실에 한숨을 내쉬었다. 축축한 베개에서 얼굴을 떼 반대쪽으로 돌아 누웠다. 그러자 눈 앞에 자신을 보며 앉아 있는 단야가 있었다. 윤오는 머리를 굴렸다.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깨지 않은 것 같긴 한데, 설마 꿈인가. 왜 단야 씨 얼굴이 보이지? 전에 단야 씨 등을 본 적은 있었는데 왜 오늘은 얼굴이지? 나는 잠에서 막 깼는데? 설마…. 단야 씨는 밤새 여기서 날 지킨 건가…?

 “단야 씨…! 왜 여기에….”

 “그냥.”

 윤오가 잠긴 목소리로 단야를 불렀고 단야는 여느 때와 같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허억, 저 지금 못생겼죠. 지금 눈 다 뜬 건데 뻑뻑한 거 보면 엄청 부었을 거 같은데.”

 “그러게 울긴 왜 울어. 맨날 우냐.”

 “…잠버릇이에요, 잠버릇….”

 웅얼거리는 윤오를 조금 더 보던 단야는 일어났으니 됐다는 듯 몸을 돌려 나갈 채비를 했다. 윤오가 그런 단야의 손목을 잡았다.

 “1분은…. 이렇게 있어도 되죠, 단야 씨?”

 단야는 잡힌 손목께를 한 번 올망졸망한 윤오의 눈을 한 번 본 후 작게 말했다.

 “응. 뭐, 손도 괜찮았으니까….”

 윤오는 단야의 손목을 쥔 손에 힘을 조금 더 줬다. 찬 몸이 윤오의 마음을 식히는 것 같았다. 윤오는 생각했다. 나를 내려다보는 깊은 검은색의 눈동자가 쭉 나를 향했으면 좋겠다고. 이 단단한 사람 옆에, 겁 많은 내 곁을 지켜주는 단야 씨 옆에 오래도록 있고 싶다고. .

 “꿈을 꿨어요. 옛날 일들이 막 나왔는데, 저는 맨날 도망치는 놈이었는데, 선민이를 만나서 바뀌었어요. 선민이 덕에 바른 일을 모른 척 않는 법을 배웠거든요. 근데 제가 또 도망쳤어요. 선민이가 죽고 나서 너무 무서웠거든요, 외롭고.”

 단야는 한없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윤오의 말을 신경 써 들었다. 처음으로 솔직하게 제 이야기를 하는 이 사내에게 잡힌 손목이 뜨거워 아릿했다.

 “나는 도망쳤고, 도망치면 다 끝일 줄 알았는데 어제 온 간호사님을 만나고야 알았어요. 아, 내가 도망쳐서 일이 이렇게까지 됐구나. 언제까지고 겁쟁이로 살면 된다는 게 되게 안일한 생각이구나.”

 “…그래서?”

 “그래서 도망 안치려구요. 취재 다시 하려구요. 그래야 나 이제 자면서도 안 울 것 같아요. 좀 살 수 있을 거 같아요.”

 “왜 나한테 이런 얘기를 해….”

 단야가 점점 더 아릿한 손목을 빼내 다른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윤오가 자신의 머리를 매만져 정돈하고 목소리로 가다듬은 후 단야의 검지 손가락을 잡고 입을 열었다.

 “단야 씨, 좋아해요.”

 단야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가득했다. 얘가 지금 무슨 소릴, 이 인간이 지금. 자기가 가진 모든 힘을 써 사랑을 주는 이를 곁에 두려는 듯 윤오가 단야의 검지 손가락을 꾹 잡고 다시 한번 말했다.

 “단야 씨, 좋아해요, 정말로. 저 하루이틀 생각하고 이러는 거 아니에요. 치기에 이러는 거 아니에요.”

 “잠깐 지나가는 감정일 거야, 시간이 지나고 이 집을 나가면 나 같은 건 있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 존재가 될 거야.”

 “그건 모를 일이구요. 저는 단야 씨 평생 기억할 거예요, 평생 좋아할 거예요, 사랑할 거에요.”

 “진짜 왜 이래”

 단야가 검지 손가락을 빼내려 애썼다. 윤오가 단야의 손가락을 놨다. 1분. 윤오와 단야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도 짧았다.

 “…저 취재 재개하면 진짜 죽을지도 몰라요.”

 윤오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매사 겁도 많은 놈이 죽을 결심을 했다는 게 단야를 두렵게 했다. 죽여 달라고 왔다가도 무섭다고 망설이던 니가 대체 얼마나 큰 일을 앞뒀길래.

 “죽을지도 모를 일을 왜 해.”

 “나쁜 놈들 벌 받게 해야 하니까요.”

 “그렇게 하면 나쁜 놈들이 다 사라질 것 같아? 아니야. 그냥 이 나쁜 놈에서 저 나쁜 놈으로 힘이 이동하는 것뿐이지. 내가 오래 살면서 얻은 깨달음이라고. 그걸 위해서 니가 왜 목숨을 내놓아야 해.”

 “그래야 선민이 보기 떳떳하죠.”

 단야는 또다시 등장한 선민의 이름이 거슬렸다. 선민이 누구길래 이렇게까지 애쓰는 거지. 고백하면서 다른 여자 이름을 들먹이는 윤오가 조금 미웠다. 윤오가 다시금 단야의 손을 잡았다. 아주 꼬옥 잡았다.

 “그리고…. 단야 씨가 더는 저 자는 동안 우는 거 보면서 맘 졸이지 않아도 되고요.”

 “뜨거워, 손 놔”

 단야의 말에 윤오가 손을 놨다. 다시 한번, 다갈색 눈동자로 단야를 올려보며 말했다.

 “좋아해요, 단야 씨. 단야 씨도 나 좋아해주면 안돼요?”

 단야는 귀 끝이 빨개진 채로 돌아서 방을 나왔다. 문을 쾅 닫고 등지고 서 심호흡을 했다. 대체 좋아한다고 몇 번을 말한 거야. 뭐야. 이거 뭔데, 남윤오.

 단야는 계속해서 쿵쿵거리는 제 심장소리가 행여나 밖으로 들릴까 두 손을 가슴팍에 모아 얹었다. 답을 하지 못했다. 저를 좋아해주면 안되냐 묻는 윤오의 물음에. 답을 할 수 없었다. 끝을 안고 사는 인간을 사랑하기가 망설여졌다. 마음을 내주겠노라 한마디면 될 일이 단야에겐 사무치게 어려웠다.

 

 *

 단야는 오프임에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 출근해 병원 옥상 벤치에 눌러 앉았다. 하루 종일 구름이 흘러가는 모양을 보다 무슨 일이 떠오른 듯 눈을 꾹 감았다가 도리질을 하며 다시 구름을 찾았다.

 “야, 사람들이 너 이러고 있는 거 무섭대. 그만해. 빨리 정신 잡으라고.”

 제보를 받은 해열이 점심 시간을 틈타 단야를 찾아왔다. 단야는 고민했다. 누가 날 봤다고. 잠시 생각해 보니 옥상 문이 열리고 ‘어머’, ‘앗씨’, ‘헐’하는 작은 소리가 들렸던 것 같기도. 단야의 볼에 차가운 캔을 대는 해열에 다시 현실로 돌아온 단야가 해열 쪽으로 돌아 앉았다.

 “김해열아.”

 “왜, 정단야야.”

 “’좋아해요’를 세 번 말하면 그건 진짜일까?”

 “숫자가 뭐가 중요해. 뭐, 다섯 번 말하면 완전 진심인 거고, 열 번 말하면 완전완전 진심인 거야? 그런 건 눈을 보고 판단해야지. 아우, 진짜 정단야. 대학 내내 솔로더니 이런 것도 다 물어봐야 성에 차니?”

 단야는 해열을 한 대 쥐어박았다.

 “아악! 나 지금 머리 구멍 난 거 아니지? 나 빨리, 빨리 응급실 콜 해줘. 여기 뜨거운데 지금 혹시 피 나니? 세상에.”

 해열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단야는 알았다. 윤오가 진심이었던 것쯤은.

 “눈은 이미 봤지…. 이미 너무 진심이었고.”

 “뭐야, 누가 너한테 좋아한대?”

 해열이 단야에게 맞은 부위를 연거푸 문지르며 물었다.

 “응. 누가 나 좋대. 근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너도 좋음 받아주면 그만이지. 뭘 고민해. 누가 나한테 좋아해요, 좋아해요, 좋아해요 하고 나도 그 사람이 좋으면 김해열 인생 다 걸고 사랑할 거야. 난 그래.”

 단야는 잠자코 듣고만 있다가 해열의 얼굴 뚫어져라 봤다. 맨날 실없이 사는 놈인줄로만 알았는데 꽤나 고민상담하기 좋은 캐릭터네 속으로 생각했다. 입 열어 소리 내 말해주면 분명 칭찬했다고 하루 종일 소문 내고 다닐 놈이니까. 생각만 해야지.

 “김해열 인생이 뭐 있다고 걸어? 담보가 돼? 그게?”

 “와! 너 말 진짜 심하게 하네!! 내 인생이 뭐! 김해열이 뭐!”

 해열이 쉬지 않고 따지기 시작하자 단야는 먼저 자리를 피했다. 옥상에서 내려오는 계단을 하나 하나 밟으며 고민했다. 계단 하나에 집에 가면 남윤오가 있을 테고, 계단 둘에 마주치면 어제 일이 생각날 테고, 계단 셋에 그럼 나는 어떤 말을 해줘야 할까. 그리고 마지막 계단에 다시 사랑을 해도 되는 걸까. 그것도 인간을.

 

 *

 옥상에 남아 아까의 단야와 같은 자세로 구름을 보며 해열은 고민했다. 단야에게 누군가 고백을 했다. 직감상 그게 선은 아닐 것 같았다. 선은 해열에게 단야의 모든 것을 알려주길 부탁했다. 선이 단야를 마음에 두고 있음은 진작에 알았던 것이었고 이제 문제는 선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하는가인데….

 해열의 머리 속이 복잡했다. 아니, 사실은 단순했는데 자꾸만 못된 마음이 올라올 뿐이었다. 단야와 누군가가 이어지면 혹시나 나에게도 기회가 오는 게 아닌가 하는. 해열은 소아과에서 일하기 시작한 후 끊었던 담배 생각이 절절했다. 주머니를 뒤졌다. 잡히는 건 아이들을 위한 사탕이 다였다. 해열은 하나를 꺼내 사탕을 까 입에 넣었다. 단 맛이 돌았다. 해열은 휴대폰을 꺼내 들고 선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 씨, 단야 마음에 누가 든 것 같아요.”

 선이 알았다는 대답과 함께 전화를 끊었을 때, 해열의 입에 든 사탕은 다 녹아 없어져 있었다. 단 맛이 끝났다. 선과 단야가 이어져 내가 괴로운 것보다 단야와 누군가가 이어져 선이 괴로운 게 더 마음이 아프니까. 해열은 씩씩하게 일어나 옥상을 벗어났다.

 

 *

 해열의 전화를 받은 선은 바로 집으로 향했다. 이사하고 며칠 집을 비웠던 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이 작은 인간이 단야를 움직이게 했다는 사실에 선은 불편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빠르게 도어락 비밀번호를 눌렀다. 530112. 단야야, 60년이 넘게 흘렀는데도 이 비밀번호면서. 어째서 남윤오야. 선은 가쁜 숨을 내쉬며 집 안으로 들어가 온 공간을 돌며 단야가 있는지, 윤오가 있는지 살펴봤다. 집은 선의 발소리와 숨소리가 울릴 만큼 고요했다.

 선은 단야가 늘 누워 있는 소파에 자리를 잡고 생각을 정리했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할까. 시간이 얼마쯤 흘렀을 때, 비밀번호가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단야였다. 단야는 들어오자 마자 어스름이 가득한 집에 불을 켰다. 그리고 덩그러니 앉아 있는 선을 발견했다.

 “언제 왔어? 불도 안 켜고. 며칠 일 있다더니 빨리 왔네?”

 단야가 그런 선에게 가볍게 말을 걸었다. 여느 때와 같았다면 이쯤에서 능글맞은 목소리로 뭔가 답을 해왔을 선이 잠자코 앉아 단야를 보고만 있었다. 단야는 이상함을 느껴 선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순간, 선이 입을 열었다.

 “민호는 니 마음에서 다 비워낸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선의 입에서 나오는 두 글자의 이름에 단야가 굳었다. 가까이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되물었다.

  “그리고 새로운 사람이 든 거고?”

  그런 단야를 향해 선이 다시금 말을 건넸다. 단야는 멍하니 서 있다 멈췄던 발을 움직여 선의 곁으로 갔다. 선은 그런 단야를 앉은 채로 올려다보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한번 물었다가 작게 이야기했다.

  “나한테도 좀 알려주지 그랬어, 이제 니 마음에 자리 났다고.”

 말해주지 그랬어. 너의 그 내가 어쩌지도 못했던 그 사랑 이제 끝났다고 말해주지.

 “선아….”

  단야는 언제나 맑고 즐거운 기운을 내뿜던 선이 잔뜩 상처입은 모양새로 구는 지금이 마음 아팠다. 시간이 많이 흘러서 이제는 어른이 되어버린 줄 알았는데 지금 눈 앞의 선은 오래전 자신이 보듬어야만 했던 어리고 여린 시절의 모습과 같았다. 단야가 대답않는 선을 다시금 불렀다.

 “선아..”

  나는 네가 부르는 이름 한 번에 아직도 이렇게 떨려. 선은 단야의 목소리를 읽을 수 없었다. 나는 너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 긴 세월을 함께 하면서도 너는 어느샌가 멀어져 있고, 또 멀어져 있고. 나는 또 따라가고. 그 마음에 자리가 나길 기다렸는데, 또 누군가 그 자리에 들어서 있고. 그럼 나는, 나는.

  “선아. 우리...”

  “내가 너 사랑하는 거. 알잖아.”

  생채기 가득한 고백이었다. 단야가 알아주길 바라고 낸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자연스레 나온 마음이었다. 부담 주지 않으려 애써 아닌 척 했던 마음들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너는 내가 이제는 어른이 된 줄 알았겠지. 그 긴 세월 동안 이제는 좀 단단해진 마음이겠다 싶었겠지. 그렇지만 단야야.

  “알아.”

  나는 네 조각같은 진심에도 크게 아파.

  “근데 나는 아니라는 거, 너도 알잖아.”

  “평생?”

  가라앉아 땅을 긁는 듯한 목소리로, 선이 진심을 고백했다.

  “인간은 언젠가 죽어.”

  “성선.”

  “그럼 넌 또 외로워질 거야.”

  선이라고 모진 말을 하는 게 쉬운 건 아니었다. 좋아하는 사람의 굳은 얼굴을 보는 게 유쾌한 일은 결코 아니었다. 그렇지만 제 마음을 숨기는 것도, 이렇게 오래 저 혼자 품고 있는 마음이 그보다 쉽다 할 순 없었다.

  “선아.”

  단야가 손을 내밀어 선의 어깨를 끌어 안았다. 저보다 한참 큰 선이 금세 제게 안겨 왔다.

  “그만. 그만해.”

  “나는 네 옆에 있을 거야. 항상. 지금까지 그래 왔듯. 그러니까 나한테 기회를 줘. 더는 숨기지 않고, 기다리지 않고 너를 사랑할 기회. 남윤오한테 줬던 그 기회, 나한테도 한번만.”

 “평생 곁에 있는 게 중요한 게 아니야.”

  단호한 말이었다. 선이 숨을 잠시 멈췄다. 그것 하나만 보고 온 삶이다. 단야의 평생에는 내가 있을 거라는 거. 그렇게 살다 보면 어쩌면, 나도 단야의 처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것 하나로 눈을 뜨고 감는 삶이었다.

  “네 말이 맞아. 외로워. 그리고 너는 내 옆에 항상 있겠지. 얼굴 보고 싶다 하면 달려오고, 목소리 듣고 싶다 하면 전화하겠지. 잠들지 못하는 밤에 너 홀로 나와 함께 깨어 있어주겠지.”

  선은 단야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 품에 안겨 단야의 어깨에 턱을 묻을 뿐이었다. 분명히 단호할 그 표정을 보고 아무렇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선은 아무 말도 못하고 제 등을 쓰는 단야의 손을 느꼈다. 단야가 그 밤을 만든 이가 정말 누구인지 안다면, 그때도 등을 이렇게 쓸어줄 지 궁금했다.

  “그렇지만 곁에 있는다는 이유로 사랑할 순 없어.”

  “내가 평생 있겠다면.”

  “그래도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

  지나온 세월을 오래 달려 날아든 화살 같았다. 아주 세고, 아주 깊게 박히는 화살.

  “내게 바라는 게 그거라면, 나는 평생 해줄 수 없을 거야.”

  다정하게 잔인했다. 선이 평생의 평생이 지나도록 단야에게 바라는 것은 단 한 가지일 거였다. 그런데 그 하나만은 안 된다고, 항상 저에게 닿고 싶어하는 마음까지 알면서, 이렇게 나를 끌어 안고서는 말한다. 평생 그 하나만은 안 된다고. 아주 오랜 시간을 지나 삐죽이듯 터져나온 진심이었다. 선은 그 진심을 항상 말하고 싶었다. 왜 안 되느냐고 어린 날처럼 엉엉 울며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 바랜 진심이, 갈 곳 없는 진심이 서러워서 울지도 못했다.

 

 *

 선은 씻겠다며 2층으로 올라갔다. 홀로 남겨진 단야는 정원으로 몸을 돌렸다. 윤오가 말없이 돌봐 온 건지 전보다 훨씬 예쁘게 핀 과꽃 밭이 단야를 반겼다.

 “왜 다 과꽃이야? 이것저것 심으면 더 예쁘잖아.”

 “과꽃 꽃말이 뭔 줄 알아?”

 “그런 걸 어떻게 아니.”

 “나의 사랑은 당신의 사랑보다도 믿음직하고 깊다.

 “갑자기 사랑타령?”

 “그게 꽃말이야. 나의 사랑은 당신의 사랑보다도 믿음직하고 깊다. 박민호의 사랑은 정단야의 사랑보다 믿음직하고 깊어. 그래서 과꽃으로 가득한 거야. 우리 마당은.”

 “정단야의 사랑도 깊어. 믿음직하고. 잊지 마.”

 “그럼. 내가 어떻게 잊겠어.”

 

 단야는 이제는 흐릿하게만 기억나는 민호의 목소리를 떠올리다 중얼거렸다.

 “미안해. 그거 거짓말이었나 보다. 내 사랑이 너만큼 깊질 못했나 봐. 미안해. 민호야.”

 그때, 비밀번호 여섯 자리를 누르는 띠띠띠띠띠띠-. 소리가 들려왔다. 윤오였다. 집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다 정원에 있는 단야를 발견하곤 밝게 웃으며 곧장 정원 쪽으로 몸을 돌리는 윤오의 낯익은 종이봉투가 들려 있었다.

 “단야 씨, 오늘 월요일이라,”

 “월요일은 바나나푸딩 먹는 날이야. 사 왔어?”

 단야의 물음에 아까보다 훨씬 크게 웃음을 지으며 윤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하고 있었네요! 기다렸어요?”

 윤오가 베란다 문을 열어주자 집 안으로 몸을 들인 단야가 윤오의 앞으로 한걸음 다가섰다. 아무것도 들지 않은 손을 맞잡으며 단야가 말했다.

 “응. 니가 날 자꾸 기억하게 만들어.”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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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8화 2019 / 11 / 10 222 2 6053   
7 7화 2019 / 11 / 10 242 2 6146   
6 6화 2019 / 11 / 10 232 2 8113   
5 5화 2019 / 11 / 10 242 2 7641   
4 4화 2019 / 11 / 10 240 2 7060   
3 3화 2019 / 11 / 10 230 3 10231   
2 2화 2019 / 11 / 9 261 3 6228   
1 1화 2019 / 11 / 9 427 2 76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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