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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저수지의 개들
작가 : Hotsan
작품등록일 : 2019.11.9

복학한 장무영이 이협이라는 사람을 만나고 벌어지는 일들.

 
저수지의 개들
작성일 : 19-11-09 23:58     조회 : 167     추천 : 0     분량 : 146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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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년 5월 1일 경영학과 45기 김철수님이 별세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광고성 메시지나 설문조사 따위가 올라오던 곳이었다. 노란색 바탕에 적힌 검은색 글자는 부고 메시지 같지 않았다. 새로운 형태의 게임 초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그는 현실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장례식장은 노원 강북병원입니다.”

 무영은 메신저에 올라온 이질적인 카톡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잘 못 전달된 메시지 같았다. 60명 가까이 되는 사람 중 적어도 경영학과 40명은 같은 걸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격앙된 감정이 흘러나오는 소리는 없었다. 아주 조용히, 사람들은 숨죽여 서로를 쳐다보기만 했다. 눈이 깜빡거리는 소리는 끔찍하게 반복되었다. 무영은 조심스레 머릿속을 더듬어 보았다. 45기, 김철수는 16학번 자신과 동기였다. 그리고 3년 전, 1학년 1학기에 같이 팀별 과제를 했던 남자가 생각났다. 그리고 분명히 마케팅의 이해 수업 명단에 이름이 올려져 있었다.

 “ 너 철수 알지”

 무영은 정욱에게 물었다. 정욱은 한참을 생각하다 답했다.

 “ 매일 이어폰 끼고 다니던 애 아닌가. 키 작고.”

 “ 그 이협이랑 친했던 선배 아니에요?“

 혜인은 혼자 중얼거렸다. 무영은 똑똑히 철수를 기억했다. 그 누구보다 자신이 맡은 일을 열심히 하던 사람이었다. 말 한마디 하려고 골똘히 고민하는 그의 표정이 기억났다. 그리고 큰 키와 마른 몸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석대의 경영학과는 한 학년의 총원이 80명 가까이 됐다. 80명. 단 5명만 있어도 기억 속에 잘 남지 않는 사람이 생기는 법이었다. 강의실의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 야 너 오늘 영어학원 좀 빼라. 응? 사진 봤는데 다들 장난 아니더라.”

 무영은 가방을 메고 자리에 서 있었다. 사람들은 점점 교실을 빠져나갔다. 옆에 있던 협도 어느 순간 사라지고 저 멀리 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다들 어디를 가는 것일까. 조의를 표하러 가는 사람들치고는 들뜬 모습에 무영은 입을 다물었다.

 “아 정욱아. 미안하다. 나 오늘 아르바이트 대타해달라고 해서 조금 전에 한다고 했거든.”

 무영은 두서없이 말했다. 그의 횡설수설에 정욱은 짜증이 난 듯했다. 무영은 대타를 찾아준다는 말로 그를 겨우 얼렀다. 그리고는 조용히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대로 영어학원을 가기 위해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그는 역에 도착해 의자에 앉아 지하철을 기다렸다. 노원. 그는 노원을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순수히 노원이 어디 있는 곳일까 하는 호기심에 휴대폰으로 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집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영어학원을 가려면 시간이 촉박했지만, 조금만 서두른다면 충분히 가능한 거리였다.

 

 *

 

 도착한 노원 강북병원은 역에서도 한참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그는 장례식장이 익숙하지 않았다. 어릴 때 오촌 고모의 장례식에 참석한 이유로 처음이었다. 오는 길에 급하게 장례식장 예절에 대해 검색했다. 그에겐 마땅히 입을 검은색 옷이 없었다. 그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단정한 옷을 입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그런지 꼴이 엉망이었다. 즐겨 입는 통이 넓은 청바지와 맨투맨을 넣어두고, 길이가 애매한 슬랙스를 입었다. 그리고 색이 살짝 바랜 흰 셔츠를 입었다. 모두 대학교에 처음 갈 때, 남친룩 이라고 검색해 멋모르고 샀던 옷들이었다.

 입구로 들어가자 장례식장 위치를 알리는 글이 모니터에 띄워져 있었다. 지하 1층 첫 번째 방이었다. 그는 조심스레 지하로 내려가 안으로 들어갔다. 막상 도착하니 긴장이 향냄새와 함께 몰려왔다. 몇 개에 화환이 서 있는 복도를 지나 입구에 들어서자, 초췌한 모습에 남자가 보였다. 4시밖에 되지 않았지만 많은 테이블은 단 두 개만 채워져 있었다. 나이가 많은 몇 사람들과 아주 어린 아이들. 그의 또래 사람은 없었다. 장례식장에서 갖춰야 할 태도를 따라 할 상대가 없었기에 무영은 더욱 난감했다.

 “ 어떻게 오셨죠?”

 그는 남자가 하는 말에 무슨 답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꽉 물었다. 짧은 순간에 더는 망설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 대학 동기입니다. ”

 그 말과 함께 그는 바지춤에서 봉투를 꺼냈다. 이석대학교 45기 장무영 이라고 쓴 글씨는 삐뚤빼뚤한 모습이었다. 오늘 따라 자신의 이름 석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봉투를 받은 남자는 방명록에 이름을 쓰더니 허둥거리는 무영을 보고 안쪽으로 들어가라는 듯이 눈짓을 했다.

 무영의 등장에 부모님으로 보이는 두 명의 중년인들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척추를 기립하고 고개를 들어 상대를 바라보는 무의식적인 행동은, 그들에게 아주 큰 도전처럼 보였다. 무영은 조용히 그들과 눈을 마주쳤다. 그들의 눈과 시선은 팽팽한 줄이 끊긴 것처럼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무영은 두 번의 절을 했다. 그리고 그들의 물음에 똑같은 답으로 자신을 설명했다.

 “아. 대학 동기입니다. ”

 “적어도 한 명은 있었네요.”

 중년의 여인은 그를 보며 겨우 웃음을 만들어 냈다. 무영은 껄끔거리는 시선을 그대로 받아내었다. 바로 돌아가려던 그였지만, 어느새 테이블에 앉게 되었다. 이미 상은 차림이 되어 있었다. 그의 앞에는 빨간 고기 기름에 젖은 수저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는 누군가가 있던 자리였음을 알아챘다. 왜 이곳으로 자신을 안내했는지 어리둥절하게 보았을 때는, 벌써 쟁반에 반찬들을 가지고 와 툭툭 내려놓고 있었다. 딱 봐도 그가 먹기엔 너무 많은 떡과 고기, 국과 밥이었다. 하지만 김철수의 어머니는 개의치 않아 보였다. 그는 학원 때문에 서둘러 일어서야 한다는 말을 하지 못한 채 어색하게 앉아 있었다. 그렇게 옆에 있는 어린아이들의 시선을 받아내고 있을 때, 한 사람이 입구로 들어섰다. 위협이었다. 그녀는 아까 학교에서 입은 복장 그대로였다.

 “ 언제 왔어”

 “ 오늘이 마지막 날이야. 그런데 이 좆 같은 과는 이제 메시지 하나 딸랑 남겨. “

 협은 자리에 무영 앞에 털썩 앉고는 자신의 수저를 들었다. 먼저 와 밥을 먹던 이는 그녀였다. 그녀는 남은 밥을 마저 국에 말면서 무영에게 말을 건넸다.

 “철수랑 알고 있었나 봐.”

 “아니 잘 몰라. 딱 한 번 같이 과제 했어. ”

 그는 협을 따라 국에 밥을 넣었다. 첨벙하며 국물이 튀었다. 협은 국을 입에 넣고선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술을 꺼내 왔다.

 “ 나 학원 가야 하는데 “

 “ 그럼 먹지 말던가 “

 그녀는 그 말과 함께 자신의 잔에 술을 그득 따랐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밥과 술을 먹었다. 꼭 끝도 없는 허기짐에 고통받는 사람 같았다. 게걸스럽진 않았지만 쉴 틈 없이 입에 무언가를 넣었다. 무영은 테이블 옆에 놓인 잔을 조심스레 꺼냈다. 그리고 술을 따라 마셨다. 그렇게 첫술을 뜨니 그제야 그에게도 강렬한 공복감이 몰려왔다.

 “ 보기보다 정이 많나 봐 “

 협은 술을 마시는 무영을 보고서는 말했다.

 “아니. 그냥. 다른 사람들은 철수를 못 떠올리더라고. 나는 얼굴이 생각났거든.”

 “철수가 아니라, 그와의 관계를 기억하지 못한 걸 거야.”

 그녀는 수저를 놓고 조용히 그를 봤다. 그리고 속삭이듯 작게 말했다.

 “ 설마 불쌍한 거야?”

 협은 고개를 살짝 내리고 쳐다보았다. 무영은 살을 에는 듯한 시선을 느꼈다. 자신도 왜 여기에 온 지 몰랐다. 협의 말마따나 자신이 어설픈 동정을 가지고 들어선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사실 30분 전까지만 해도 부조금을 얼마나 내야 하는지 고민하던 그였다.

 “사실 잘 모르겠어. 그냥 두려웠어.”

 

 시간이 흐르고 둘은 그릇을 밀어 둔 채 아무 말 없이 술을 마셨다. 이곳은 시간조차 흐르지 않는 곳 같았다. 어린아이들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들의 옷자락을 잡으며 집에 가자며 떼를 썼다. 아주 작은 흐느낌 소리와 아이들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협은 병 바닥에 술이 한 잔 정도 남았을 때, 빈 잔에 남은 술을 털어 넣고 테이블에 놔뒀다. 그리고 자리에 일어섰다.

 “ 여기 계속 더 있을 거야?”

 무영은 조용히 그녀를 따라 나갔다. 밖으로 나오니 해가 지고 있었다. 병원 근처엔 나무가 몇 그루 돌아가며 심겨 있었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나무로 가려진 오솔길을 따라 흡연장으로 갔다. 반쯤 담배가 타서 사라질 때, 협은 그를 봤다.

 “ 뭐가 그렇게 두려운데? 너도 저렇게 아무도 찾지 않을까 봐? ”

 그녀는 화가 나지 않은 모습으로 담담하게 자신의 적의를 드러내고는 했다. 그는 그녀의 말을 곱씹고서는 눈을 똑바로 치켜들었다.

 “ 두려우면 안 되는 거야? 너는 왜 왔는데.”

 협은 그의 성난 목소리에 개의치 않고 계속 말했다.

 “ 난 네가 되지도 않는 동정을 들고 온 게 다였으면 했어. 그러면 그냥 어설프게 착한 놈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이거든. 근데 그게 아닌 것 같아서 말이야.”

 “ 그냥 와야 할 것 같아서 왔어. 됐어? ”

 그 말에 협은 한숨을 쉬었다.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는 소리 같았다.

 “ 너는 너한테서 철수를 본 거야. 그런데 말이야. 철수는 외로워하지 않았어. 너처럼 자신이 불필요하진 않을까 눈치나 보지 않았다고. 너는 좆도 알지도 못하고 쟤가 친구 하나 없이 외롭게 죽은 놈처럼 생각했겠지만, 그게 아니야.”

 협은 거칠고 투박하게 말을 뱉었다. 해가 지며 쏟아지는 노을 속에 그녀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무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녀의 마지막 말을 머릿속에서 되뇌었다. 그녀의 말과 시선은 그의 몸 전체를 천천히 순환하며 옥죄었다.

 “ 뭐가 그렇게 쉬워?“

 무영은 그녀를 쳐다보며 말하고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곤 아주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 그저 모습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어. 그냥 그랬다고. ”

 무영은 갑자기 손에 온기를 느꼈다. 거칠거칠한 감촉에 놀라 그는 몸을 뒤로 뺐다. 하지만 그녀의 손은 그를 힘껏 잡고 있었다. 무영은 벗어날 수 없었다. 조용히 들어온 작은 손에 무력하게 이끌렸다. 협을 향한 분노와 그를 휘감았던 죽음에 대한 무게가 그녀의 손을 향해 다 빠져 나가는 것 같았다. 협은 그를 이끌고 걷기 시작했다. 마지막 노을인 듯, 세상은 빨갛게 변해 있었다. 아무 말 없이 무영은 그녀의 발걸음을 따랐다. 둘은 그렇게 장례식장을 유유히 빠져나왔다.

 

 *

 

 정욱은 인동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학교를 벗어나고 있었다. 그리고는 휴대폰으로 오늘 만날 여자들의 프로필을 훑었다. 그는 기대감에 한껏 부풀어 올랐다. 정욱은 무영의 대타로 온 사람을 만났다. 별 볼일 없이 생각하던 동기 중 하나였다. 녀석은 말쑥하게 서서 눈알만 돌리고 있었다. 기회를 못 잡는 눈이었다. 꼭 무영 같은 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영은 조용히 있어도 사람들을 이끄는 힘이 있었다. 그는 갑자기 오늘 오지 않은 무영이 보고 싶었다. 그리고 동시에 묘한 질투를 느꼈다. 인동은 능숙하게 그를 이끌고 힘든 미팅을 헤쳐나갈 것이다. 정욱이 할 일은 큰 웃음으로 그의 농담에 적절히 웃어주는 것일 뿐이겠지만, 벌써 뿌듯했다. 그는 포마드를 바른 머리를 쓸어가며 정문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정욱은 발걸음을 세웠다. 벌써 어둠이 내리고 있는 길에 무영이 걸어가고 있었다.

 “ 야 장무..”

 정욱은 그를 부르려고 하는 순간 그의 옆에 서 있는 이협을 발견했다. 그들은 동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야. 지하철역 먼저 가고 있어봐. ”

 “야 어디가”

 그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 이 시간에 학교는 왜 가는 거야”

 무영은 의심의 눈빛으로 말을 던졌지만, 그녀는 발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협이 그를 이끌고 간 곳은 학생회관이었다. 학생회관은 이름처럼 많은 학생 동아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건물이었다. 이석대학교에서는 재건축과 보충을 통해 2000년도의 모습을 가진 낡은 건물들이 없어졌지만, 딱 하나의 건물만큼은 해당 사항이 아니었다. 정식 명칭은 고구려홀이었고 통칭 학생회관으로 불리는 건물이었다. 빨간 벽돌과 목조로 짜인 창틀이 오랜 세월을 보여주고 있었다. 제일 동쪽에 있는 이 건물 옆엔 대학원 건물뿐이었다. 학생들이 수업을 듣는 곳은 중앙과 서쪽에 몰려 있었기에 그는 이 건물이 처음이었다.

 “ 여기야?”

 무영은 잠시 멈춰 어두컴컴한 입구를 봤다. 이석대는 매년 5월에 동아리전야제를 실시했고, 모든 동아리 건물들이 연습을 위해 입구가 열려 있었다. 입구 옆엔 큰 나무들이 많았는데 기본적인 가지치기도 되어있지 않아 커다란 그림자를 만들었다. 점멸하는 가로등을 앞에 두고 그는 주변을 둘러 보았다. 협은 그런 그의 손목을 이끌고 입구로 들어갔다. 무영은 몸에 힘을 주고 멈췄다.

 “ 나 동아리 해. 우리 동아리 방에 너 초대 하는 거야 ”

 “무슨 동아린데 이 시간에 여길 온 건데? ”

 그 때 무영은 협의 웃음을 봤다.

 “저수지의 개들”

 “저수지의 개들? 그게 뭐야 ”

 협은 일언반구도 없이 몸을 돌려 유리문을 열어젖혔다. 그는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선배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석대는 서울 대학 중 부지가 꽤 큰 축에 속했다. 칭찬받아 마땅한 점은 학생들을 위해 공간을 많이 내준다는 것이었다. 동아리부터 팀별 과제까지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타 대학에 비해 넉넉했다. 이석대는 그러한 이유로 온갖 종류의 동아리들이 많았다. 그중 학생회관은 90년대 이전부터 밴드와 민속 동아리, 종교 동아리들이 사용하던 곳이라는 걸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무영은 단 한 번도 저수지의 개들이라는 동아리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우두커니 서 있다가 그녀를 따라 건물로 들어갔다.

 

 건물은 전체적으로 어두웠다. 총 3층으로 이루어진 단조로운 정육면체 건물이었다. 꽹과리 소리와 기타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무영은 협을 따라 3층으로 갔다. 3층에서도 왼쪽 끝 방, 문에는 작은 종이가 붙어 있었다.

 “창업 동아리 누벨 바그 ”

 그 앞에 서 있던 이협은 늦게 올라온 무영을 보며 말했다.

 “그래, 나 창업한다고 열심히 사는 사람이야. 빨리 들어와 ”

 작은 틈새로 이미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안에는 누군가가 있는 것 같았다.

 “ 여기 저수지의 개들 아니잖아 ”

 협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문을 열어젖혔다.

 방은 바깥과 다르게 한쪽 면이 비틀려 보였다. 학생회관은 큰 돌산을 뒤로 접하고 있었다. 완전히 산을 깎아내는 것보단, 건물의 뒷부분을 묘하게 직각으로 만들지 않은 것 같았다. 방에 왼쪽은 큰 책꽂이가 수많은 책과 함께 섰고, 그 책꽂이 사이에 프로젝터가 하나 놓여 있었다. 오른쪽 벽의 대부분은 흰 스크린이 걸려 있었다. 마지막으로 정면에는 하나의 긴 책상에 두 개의 컴퓨터가 놓여 있었다. 안에는 덩치가 큰 남자가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 수훈 나 왔어. “

 수훈이라 불린 남자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이어폰을 낀 채 컴퓨터에 앉아 집중했다.

 “ 뭐해 들어와 “

 협은 뒤에 아직 서 있는 무영에게 손짓을 하며 앉아 있는 남자의 어깨를 두드렸다. 무영은 조심스레 발을 내디뎠다. 바닥이 유달리 푹신했다.

 “ 오 협 왔구나. 오늘 술은 너 차례인 거 알… 뭐야? “

 남자는 협과 함께 뒤에 서 있는 무영을 보았다. 그와 동시에 그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키가 족히 190은 될 듯했다. 게다가 살집도 상당히 있는 편이었는데, 자신의 몸보다 더 큰 회색 맨투맨을 입고 있어서 회색곰 같았다. 그는 테두리가 굵은 둥근 안경테를 추어올리며 앞에 서 있는 둘을 번갈아 보았다.

 “ 협. 이게 뭐야? 여기 아무리 너 친구라도 안 되는 거 알잖아. 이 사람 누구셔? “

 협은 빙긋이 웃으며 간이 의자에 앉았다.

 “ 일단 앉자.“

 무영은 낯선 곳에 홀로 버려진 것 같았다. 아직 장례식장에서 마신 술기운이 남아 있는 그는 어딘가 기댈 곳이 필요했다.

 “ 아. 거긴 안돼요. 조심하세요 “

 수훈의 단말마에 무영은 책꽂이에 기대려는 어깨를 빠르게 뒤로 뺐다. 벽 한 면을 모조리 차지하고 있는 책꽂이에는 책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온갖 인형과 작은 미니어처, 피규어들이 나란히 진열되어 있었다.

 “ 무영. 너도 여기 와서 앉아. 소개해줄게 “

 그렇게 방 중심에 두 명은 간이 의자에 앉았고, 수훈은 다시 컴퓨터 앞 의자에 앉았다. 컴퓨터 의자가 높이가 더 높고, 낯선 남자는 앉은 키마저 컸기에, 교무실에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 여기는 수훈. 저수지의 개들의 멤버 “

 “ 야. 협. 너 지금 뭐하는 거야 “

 줄곧 처음 본 사내에게 깍듯이 존대를 쓰던 수훈은 협의 말을 듣고선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는 포동포동한 손으로 흘러내리는 안경을 자꾸만 잡아 올렸다.

 “ 괜찮아. 괜찮아. 그리고 여기는 우리 잡지의 고문이 될 사람. “

 “ 뭐? “

 이번에는 무영의 차례였다. 처음 온 학생회관은 상당히 낡고 어두웠으며, 창업 동아리는 전혀 창업과 가까워 보이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자신을 잡지의 고문이 될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그녀의 얼굴은 이미 정리가 끝난 듯이 뻔뻔해 보였다.

 “ 내가 무슨 잡지를, 아니 그보다 여기 창업동아리라며? “

 “ 수훈, 여기는 같은 과 장무영이야. 나이는 나랑 같고. 우리 얘 데리고 와야 해. 아니면 너 졸업할 때까지 잡지고 뭐고 못 낼 거야. 겨우겨우 발표해도 내용은 똥 같을걸? “

 수훈은 떼쓰는 것 같은 그녀를 빤히 보고 있었다. 짧은 머리를 한 그는 입꼬리가 밑으로 내려갈 데로 내려갔다.

 “ 야 너 술 먹고 왔어? “

 “ 조용하고 우리 소개 좀 해줘. 미래의 박찬호. “

 “ 박찬욱 “

 수훈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턱을 만지며 다른 곳을 보았다. 그러고 나서 무영에게 질문을 했다.

 “ 이석대에서 동아리 혹은 이익단체가 자기들만의 공간을 얻으려면 무슨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는지 아세요? “

 수훈은 금세 진지한 얼굴이었다. 무영은 아직 술기운으로 머리가 살짝 아팠다.

 “ 모르겠는데요? “

 신설된 창업 및 취미 동아리가 동아리 방을 얻기 위해서는 최소 인원이 6명 필요했다. 하지만 창업은 3명이면 되었다. 그리고 창업동아리에 걸맞게 자신들이 하려는 창업계획과 비전을 보고서로 제출해야 했다. 그리고 보고서가 1차로 신청되어 최종 승인을 받으면 과정은 끝이었다. 학교에 중앙이나 서쪽에 있는 동아리 건물들은 모두 신식이었기에 인기가 많았다. 그렇기에 아주 짧은 기간을 신청해도 통과하기가 쉽지 않았다.

 “ 저희는 그래서 학생회관을 노렸죠. 이 방 3년째 비어있었거든요. 왜냐구요? “

 수훈은 양쪽을 번갈아 보았다.

 “1, 2층에 민속 동아리 및 사물동아리, 밴드가 도사리고 있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따로 바닥에 방음 매트 깔았어요. 안 그러면 도저히 뭘 하지를 못 하겠더라구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3층, 즉 우리 옆엔 기독교 동아리가 3개나 있어요. 어떤 미친놈들이 신식건물 놔두고 여기를 들어 오겠습니까.

 무영은 오면서 본 주일예배 및 기도 순서가 적혀 있는 계획표가 기억났다. 하지만 그래도 어딘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 그런데 잡지라면서요. 언론 동아리입니까? 밖에는 창업동아리라고 적혀 있던데. “

 “ 음…. 그러니까…”

 수훈은 망설이며 답을 하지 못했다.

 “ 그야 창업 쪽이 훨씬 통과하기 쉬우니깐. 다들 취업에 미쳐 있어서 인원도 3명만 있으면 되고 말이야. 또 실패해도 돼. 누가 뭐라 안 해. 학생 나부랭이들이 뭐 하다가 고꾸라지고 실패할 수도 있는 거지 뭐. “

 조용히 듣던 협이 수훈을 대신해 답을 했다. 하지만 그래도 수훈은 영 표정이 좋지 않았다. 무영은 황당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사기 및 공갈, 무단 점거 그런 거 아니야? 불공평하잖아. 진짜 절실한 사람들 기회 편취해버리는 거잖아. “

 협은 무영의 말을 듣고서는 큰 웃음을 터뜨렸다.

 “ 절실? 진짜 절실한 새끼들이 있었으면 여기 어떻게든 들어왔겠지. 신식건물들은 방 하나에 경쟁률이 10대 1을 넘어. 그런데 이곳은 3년째 비어 있었다고. 우리 처음 이 건물 들어왔을 때 방 전체가 기독교 동아리 물품으로 가득 차 있었어. 연극에 쓴다고 만든 너 정도 크기의 모형 십자가만 네 개가 있었어. “

 협은 번쩍이는 이빨을 보이며 자신의 진심을 전했다. 둘의 눈엔 확신이 있었다. 무영은 순간 이곳이 기독교 동아리고, 자기는 그저 포교에 넘어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 시발. CCC 내가 여기에다가 포스터 붙이지 말라고 했지! 그렇게 말했는데 아직 서성거려 “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할 틈도 없이 문밖에서 큰 소리에 셋은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카랑카랑한 여자의 목소리였다.

 “ 아. 하영이 왔나 보다. 협. 어떻게? “

 수훈은 잔뜩 걱정한 표정으로 협을 보았다. 무영은 아직도 오늘이 끝나지 않았음을 직관적으로 느꼈다. 그리고 그 예감은 쾅하고 열리는 문과 꼭 맞아 떨어졌다.

 문 앞엔 한 여자가 검은색 봉지를 들고 서 있었다. 그녀는 들어오려는 발을 멈추었다. 여자는 자신 앞에 앉은 남자를 열심히 훑고 있었다.

 “ 하영아 왔어?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여기 와서 앉아. “

 유일하게 자신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협 뿐이었다.

 

 *

 

 문 뒤에는 커다란 검은색 개가 그려져 있는 그림이 붙어 있었다. 포스터가 아니었다. 물감이 젖다 마른 자국으로 종이가 울퉁불퉁했다. 무영은 하영이 들어오는 걸 보고 있었기에 발견할 수 있었다. 결국, 방에는 간이의자와 컴퓨터용 안락의자 두 쌍 모두 가득 차게 되었다. 셋은 남자 하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 설명해봐. 협. 너 우리한테 한 말 지키지 못하면 진짜 나도 화나. “

 무영은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 아니. 나도 들어올 생각 없습니다. 굳이 학교에 떳떳하지 않은 짓까지 해가면서 동아리 할 생각 없구요. “

 그의 말은 일방적으로 흘러가던 흐름을 뒤바꾸는 것 같았다. 협은 빠진 잔머리를 추켜세우며 머리를 다시 묶었다.

 “ 나는 네가 인터뷰어가 되어 주었으면 좋겠어. 전체적인 총괄도 해주었으면 좋겠고 “

 “ 도대체 뭘? “

 아직도 뜬구름 잡는 이야기에 무영의 성격은 바닥을 치닫고 있었다. 수훈은 결국 그녀가 나서야 한다는 걸 안다는 듯이 어깨에 힘을 풀었다.

 “ 당연히 못 들어봤을 거야, 우리는 정확히 말해서 신문도 아니고, 잡지도 아니고. 그저 공동체지. ”

 “ 공동체?“

 “ 그래. 우리는 모든 아웃사이더들의 보금자리를 만들 거야 ”

 그녀의 말에 그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무슨 만화에서나 볼 것 같은 대사였다. 그리고 그런 말을 진지하게 하는 그녀 덕분에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협은 누구보다 진지했다.

 “ 우리는 젊은 창작자들의 잡지를 만들고 있어. “

 골자는 이러했다. 젊은 창작자들을 학생들에게 소개해주고, 학생들은 메인에서 벗어난 독창적이고 새로운 흐름의 문화를 소비한다. 분명 재능 있지만, 자신의 작품들을 보여 줄 곳 없는 예술가, 화가, 만화가, 영화인, 소설가 등을 소개하는 잡지를 만든다. 그리고 홈페이지도 만들어 수 많은 사람이 그들의 작품을 보고 느낄 수 있게 한다. 결국, 예술의 새로운 장을 만든다는 것이 목표였다. 그리고 그런 움직임에 첫 발판이 잡지였다.

 무영은 잘 이해 가지 않았다. 우선 수많은 그들만의 커뮤니티가 있고, 각 분야에 동아리들이 넘쳐 나고 있었다. 굳이 새로운 잡탕 커뮤니티를 만들 필요가 없어 보였다.

 “ 컨셉이 너무 뜬구름 잡는 것 같아. 그리고 왜 하필 잡지야? 요즘 누가 텍스트 읽어. 몇십만 명 쓰는 SNS가 몇 개가 있는데. 그리고 궁극적으로 사람들이 아마추어 작품을 궁금해 하나? 진짜 소비하고 싶어 할까? 그리고 돈은? 그런 거 하는 데 필요한 돈은 어떻게 할 건데? 아. 그리고 너희가 어떻게 그런 젊은 창작자들을 알고 있어? 무슨 전문성을 가지고 있길래 남들의 작품을 평가한다는 거야.”

 무영의 질문이 나올 때마다 수훈은 어두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하영은 짐짓 놀란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벌써 몇 개월을 프로젝트를 준비하며 그들이 부딪힌 문제들을, 몇 분 안 되는 설명 속에서 콕콕 집어냈기 때문이었다. 무영이 말을 끝내자 협은 작은 소리로 웃으며 그를 보았다.

 “맞아. 다 맞아. 그런데 우리는 결국 필요한 존재들이 될 거야. 그리고 필수적인 장소가 될 거야.

 나이 20살 이상 먹은 사람 중에 그래도 글이라는 걸 읽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 것 같아? 아직 책장 넘기며 공부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대학이 그중 하나라고. 대학에서만 가능해. 몇 픽셀짜리로 자신을 소개하는 것보다, 질 낮은 종이에 자신의 사진과 이야기가 실리는 게 더 확신을 줄 수 있다고 믿어. 아직 명함은 존재해. 편의성도 중요하지만, 편의성 말고도 중요한 게 있어. 난 그렇게 믿어. 직접 만지고, 어떤 색을 썼는지 확인하는 건 본능이야. 그래서 저수지의 개들 프로젝트에서 첫 메인이벤트는 잡지인 거지. “

 “ 저수지?“

 “ 응. 버려지고 떠돌이인 개들이 모일 수 있는 유일한 장소. “

 협은 아주 오랫동안 참아왔던 사람처럼 쉴 새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풀었다. 개연성과 논리가 툭툭 끊겨 모가 난 그녀의 말들은 생명력이 넘쳤다. 그리고 무영은 비틀린 사각형의 방이 그리 춥지 않다고 생각했다.

 “ 우리가 진짜 양질의 잡지를 만들고, 그걸 읽는 게 트렌드가 된다면 말이야. 예술의 새로운 흐름이 될 거라고. 재능 있지만, 그림자에 뒤에 서 있던 이들. 온갖 비주류들이 몰려 들 거야. 물론 그것 가지고는 안 되겠지. “

 “ 잠깐만. “

 불리한 전세 속에서 장군이 몇 안 되는 졸들을 모아두고서 하는 마지막 연설이었다. 모두 그 결말을 알지만, 전의를 불태워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주듯이 그녀의 말은 불쏘시개가 되어 그를 쿡쿡 찌르고 있었다. 하지만 먼저 다가온 것은 피곤이었다. 무영은 누구라도 한 명이 눈치를 준다면 이곳을 벗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긴 하루였고, 그 피곤함은 그를 점점 무너뜨리고 있었다.

 “ 시작이 잡지일 뿐이야. 무영. 너는 어른이 언제 된다고 생각해?“

 “ 20살이 되면 어른이잖아 “

 “ 그런 거 말고.“

 “ 그만하자. 너무 뜬구름 잡고 있어. 너희 뭐 나라라도 바꿀 거야? 봉기라도 일으킬 거냐고. 지금이 18세기 프랑스가 아니잖아. 도대체 대학생이라는 새끼들을 얼마나 크게 보는 건데. 그냥 멍청한 새끼들 천지야 “

 “ 스스로 결정하는 경험이 많아지면 어른이지 않을까?“

 “ 뭐? “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기타 소리가 계속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무영과 협의 이야기에 배경음악이 깔린 듯했다. 협은 끊임없이 너그러운 웃음을 그에게 보여 주었다.

 “ 네가 말한 전문성 좋지. 비평이고 인터뷰고, 재능의 유무도 모두 유명한 사업가나 비평가들이 하면 생겨나는 것들이잖아. 하지만 이거는 우리가 해. 대학을 넘어서서 20살이 넘은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우리가 내놓는 창작자들을 비판할 수 있어. 자신들의 의견을 자유롭게 내는 거지. 투고도 할 수 있고, 자신들의 SNS에 우리 까는 이야기 올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교수, 작가, 철학가, 모든 권위자만의 프라이빗한 공간은 최소화 할 거야. 스스로 예술을 소비하고, 고민하는 거지. 자신들 스스로가 대중이고, 후원하는 프로듀서이며, 비판하는 비평가들이 될 수 있을 거야. “

 협은 장례식장에서 가지고 온 술을 한 잔 입에 넣었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 그래서 네가 인터뷰어가 되어 주었으면 좋겠어.”

 “ 그래서? 왜 그래서지?“

 “ 넌 아무것도 모르니까. 우리를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

 “ 그건 나 말고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잖아. “

 무영의 한 마디에 방은 조용해졌다. 하지만 초조해진 것은 자신이었다. 그는 항상 협을 따라가는 걸 실패하고는 했는데, 그 이유는 그녀만의 리듬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속도와 방식이 있다. 그중 아주 독단적인 사람들이 있는데, 그 들은 남들의 속도를 좇는 게 아니라, 남들이 자신의 발걸음을 따라오게 했다. 이협 또한 그런 유형이었다. 그녀는 철저한 계산 끝에 나오는 게 아니라 본능적으로 사람을 끌어당기고는 던져버리고, 넘어진 사람이 일어날 때까지 그 옆을 두리번거리며 유혹하곤 했다. 협의 강단 있는 모습에 무예가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녀는 무용가에 가까웠다. 춤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쉽게 자기 섶에 걸려 넘어졌다.

 “ 네가 필요해. “

 협은 얼굴의 어떤 감정도 보이지 않고 말을 던졌다. 쓰레기를 버리듯, 필요 없는 걸 땅바닥에 던지듯 협의 짧은 말은 침묵 속을 나뒹굴었다. 무영은 무시할 수 없는 자신이 슬펐다. 그는 그 말을 조심히 주워들었다. 손바닥만 한 나무토막, 아니면 돌덩어리 같은 조각의 뒷면에는 무언가가 새겨져 있었다. 사랑을 고백하는 투박한 농부의 모습이 있었으며, 좋아하는 또래에게 주기 위해 서툰 실력으로 새겨 넣은 인형도 있었다. 지금까지는 이 모든 게 연극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고백에 몸에서 열이 나고 있었다. 주로 귀나 손같이 모나게 튀어나온 부분이었다.

 “ 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만들고 있어요. 저는 이번 주에 출품할 짧은 단편 영화를 마무리 짓고 있고, 이 친구는 만화를 그리죠. 공개 웹툰 공모전에서 네티즌 투표로 16강까지 올라갔는걸요. “

 수훈은 껄껄거리며 담담하게 자신과 하영을 소개했다.

 “협아 우리 술 좀 마시자. 이번엔 내 차례니깐 영화 하나 보고”

 수훈의 볼은 더워서 그런지 발개져 있었다. 그리고 웃을 때마다 광대가 부드럽게 씰룩였다. 협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워져 있던 간이 매트릭스를 펴기 시작했다. 하영이라고 불린 키가 작은 여자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지켰다. 그저 수훈과 협을 못마땅하게 볼 뿐이었다. 그녀는 아직 너그러운 인상을 만들 수 없는 것 같았다. 수훈은 프로젝터를 켰다. 무영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 잡지 프로젝트도 진행하지만 우리는 서로의 문화를 소개해주기도 해요. 술 한잔 마시고 한 주 고생했다고 편하게 쉬는 거죠 뭐. ”

 수훈은 수줍어하며 파일을 열었다. 무영은 덩치와 어울리지 않는 그의 모습에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 매주 금요일 저희는 모이는데, 이번 주는 제 차례여서요. 오늘 가지고 온 영화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살다”라는 영화예요. 처음 듣는 이름일 수도 있겠지만, 7인의 사무라이, 라쇼몽, 가게무샤 등은 한 번쯤 들어봤을걸요?”

 “아. 나 7인의 사무라이 들어봤어. ”

 하영이 아직 토라진 목소리를 내며 답을 했다. 수훈은 그녀의 답에 활짝 웃으며 1900년대 일본 영화계와 구로사와라는 사람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냉기가 살짝 느껴지던 방 안은 확실히 따뜻해 져 있었다. 3명보단 4명이 뿜는 열기가 더 강했다. 무영은 나갈 타이밍을 잃고, 매트릭스에 궁둥이를 붙였다. 그들은 술을 나누며 조용히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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