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의 차들이 즐비한 도롯가. 그리고 큰 전광판에 서린과 강호의 골프웨어 광고가 나왔다. 그 장면을 버스 정류장에 서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아경. 그리고 정류장으로 시선을 돌리자 큰 벽 광고판에 서린이 다이어트 음료를 들고 날씬한 몸매를 자랑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경은 사진 속의 서린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아경의 손에는 몇 벌의 의상들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쇼핑백에는 '대여 전문, 빌리 샵'이라고 적혀있었다. 그때 연기학원에서 전화가 오자 벤치에 급하게 짐들을 내려놓고 전화를 받는 아경.
"어, 아경씨. 옷은 잘 빌렸고?"
"네, 실장님. 말씀해 주신 곳에 가서 잘 빌렸어요."
"그래, 소속사 없이 혼자 움직이는 게 쉽지 않은 일이야. 교통편도 많이 불편하지?"
"네, 그래도… 이렇게 할 수 있는 게 어디에요."
"아경 씨 이번 영화 잘 되면, 기획사들 눈에 띌 수 있을 거야. 우리도 계속 밀어줄게."
미소 지으며 전화를 끊는 아경. 그리고 한 손을 조용히 움켜 쥐며 입 모양으로 화이팅을 외쳤다. 아경이 짐을 다시 들려고 하자 누군가 아경을 불렀다.
"… 아경누나?"
"… 원도? 네가 여긴 웬일이야?"
원도가 아경이 들고 있는 쇼핑백을 바라봤다.
"저도 의상 대여실 다녀왔어요. 이번 오디션에 필요한 거 좀 빌리려고."
"아, 그랬구나. 오디션 준비는… 잘 돼가?"
원도가 머리를 빠르게 긁적였다.
"… 저는 항상 준비가 돼 있는데 말이죠."
아경이 미소 지었다.
"시원이한테 네 안부 잘 전해 듣고 있어."
"… 저도요. 근데 누나."
"응?"
"혹시 시간 되면… 차 한잔 하실래요?"
원도가 정류장 바로 앞에 있는 카페를 가리켰다. 아경은 원도의 얼굴을 쳐다보며 두 눈을 깜빡거렸다.
카페 안으로 들어온 두 사람. 원도가 두 손에 커피를 들고 와 아경과 자기 자리 앞에 내려놓았다.
"… 고마워."
원도는 고개를 빠르게 끄덕이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큰 덩치를 앞뒤로 왔다 갔다 하며 안절부절못했다. 원도를 가만히 쳐다보는 아경.
"너… 무슨 고민 있구나?"
머리를 또다시 벅벅 긁적이는 원도.
"아니, 뭐. 그냥 좀 답답해서요."
"… 원도 너 잘해왔잖아. 난 네가… 우리 학원에서 제일 캐릭터가 다양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원도가 피식 웃었다.
"전, 누나가 참 부러워요."
아경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오디션 붙어서? 그거야 당연히 너무 좋지. 근데, 나 혼자 소속사도 없이 매니저도 없이 이렇게 움직이려니 진짜 신경 쓸 게 한두 개가 아니야. 어떤 날은… 내가 과연 이걸 다 감당할 수 있을까? 진짜 배우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
"… 그런 고민 할 수 있다는 것도… 부럽네요."
아경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저는 과연… 시원이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까요?"
원도의 말에 미소짓는 아경.
"그럼~ 내가 봤을 땐… 시원이도 너 많이 좋아해."
"… 계속 이렇게 가다가… 혹시 영영 아무 것도 안된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좋아하는 여자 책임은 질 수 있을지… 불안해요. 정말 이거 하나만 보고 달려왔는데."
아경이 원도의 말을 가만히 듣다가 다시 미소 지었다.
"나는… 시원이가 부러운데?"
원도가 아경을 쳐다봤다.
"이렇게 자기를 행복하게 해주려고 고민하는 멋진 남자친구가 있잖아."
원도가 머리를 또다시 긁적였다.
"시원이는… 누나를 부러워하던데요?"
"… 뭐야. 너희 나 오디션 된 거 축하해줄 땐 언제고!"
"… 아뇨, 두 남자의 사랑을 받는 거요."
아경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미안해요. 시원이 한테는… 제가 이 말 했다고 하지 마세요."
아경이 미소 지으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못살아, 내가 정말… 이시원 별 얘기를 다 하고 다니네."
아경이 커피를 마셨다.
"그것도… 굉장한 남자들 이라면서요? 저 솔직히 그 말 듣고, 어찌나 현타가 오던지…"
아경이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 나에겐 힘든 일이야. 두 사람의 마음을 받고 있다는 거."
원도가 아경을 쳐다봤다.
"내 마음이 비록 한 곳을 향하고 있다고 해도… 다른 사람이 자꾸 나타나서 나를 막 흔들어."
원도가 입술을 오므렸다.
"나는 내 마음을 확신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나를 향해 확신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원도가 입술을 더 내밀었다.
"내가 선택한 이 길에서… 만약 생각지 못한 일이 생기거나, 내가 지쳐서 포기하는 일이 생긴다면… 그땐 정말 힘들 것 같아."
원도가 코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때론 미래를 정해놓고 사는 게 무서워. 그만큼… 아픔은 더 크게 다가올 거니까."
* * *
서린의 소속사 사무실. 서린이 하얀색 털이 달린 화려한 의상을 입고 앉아 있었다. 그때 서린의 매니저가 사무실 안을 왔다 갔다 하며 두 손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있었다.
"오빠, 산만하게 굴지 말고 가만히 좀 앉아있어."
"야, 이 상황에 어떻게 내가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 대박 사건이 일어났는데!"
서린이 턱을 들며 입꼬리를 올렸다.
"도대체 유니버스 개발자는 언제 어떻게 만난 거야?"
"… 운명적으로 만났다고 할까?"
"아니, 나는 네가 줄곧 이강호만 노리고 있…"
서린이 매니저를 겨누어 봤다.
"조, 좋아한다고 생각하다가… 갑자기 데이비드 오를 만난다니까 너무 놀랍잖아?"
"대표님 이든 오빠든… 다 내가 유니버스 모델이 되기를 바라고 있는거 아니야?"
"그거야 당연하지! 근데… 네가 이렇게 뒤에서 노력하고 있는지 몰랐다는 거지."
"나야 나, 한서린. 내 앞길은… 내가 알아서 만들어."
그때 소속사 대표가 들어왔다. 고개 숙여 인사하는 매니저. 서린은 자리에 가만히 앉아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어, 서린 씨 와있었구나. 자자, 일단 자리에 좀 앉죠."
점잖은 모습을 유지하던 대표가 평소와 달리 조금 들뜬 모습이었다. 서린은 그런 대표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자, 그러니까 지금… 유니버스 개발자랑 서린 씨가 만나는 사이다 이거죠?"
"음, 알아가는 사이라는 표현이… 더 맞겠네요."
"그게 사귀는 거나 다름없지. 안그래요?"
대표가 매니저를 쳐다봤다. 그러자 매니저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유니버스 새 모델, 반드시 제가 되겠다고."
"그럼요, 그럼요. 마케팅부에서도 못하는 걸 우리 서린 씨가 직접 해내네. 그럼, 이제 연예부 기자 섭외해서 기사 한번 제대로 만들어 볼게요."
"아뇨, 그러실 필요 없어요. 이미… 준비가 됐거든요."
대표가 입을 벌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매니저도 서린을 보며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국내 최고 연예매체 '디스팩트' 에서 기사 나갈 거예요. 내용만 나가는 게 아니라… 사진까지."
계속 말을 잇지 못하는 대표와 매니저. 그러다 매니저가 입을 뗐다.
"근데 데이비드 씨는… 네가 유니버스 모델이 되는 걸… 밀어주기로 한 거야?"
서린이 소파 뒤로 등을 대며 팔짱을 꼈다.
"아마…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