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우는 연락을 받고 다급히 병원으로 뛰어가는 도중이었다. 원장 수녀님의 건강이 악화되어 입원이 결정됐다는 소식에 서우는 불안으로 몸을 떨었다.
오늘따라 병원 엘리베이터는 느리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맘이 초조했던 서우는 엘리베이터를 포기하고 계단으로 뛰어 올라갔다.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나서.. 신경을 왜 못썼을까’
서우는 연락 한번 해보지 않았던 자신을 자책하며 빠르게 원장수녀님이 입원한 병실을 찾았다.
“원장수녀님!!!”
“오. 서우 왔구나”
너무 걱정했던 탓일까. 생각보다 건강해 보이는 원장수녀님의 모습에 서우의 맘이 놓였다. 거친 숨소리만 서우의 긴장을 나타내주고 있었다.
“왜 이렇게 뛰어왔어. 어디 도망 안 가는데”
원장 수녀님이 서우를 위해 음료수를 챙겨주며 물었다. 서우는 숨을 고르며 음료수를 받았다. 맘은 아직 불안했지만 평소와 다름없는 수녀님의 모습에 조금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어떻게 되신 거예요? 지병이 있으신 줄은 알았지만…”
“아 요새 행사가 많아서 이것저것 준비하다 보니 잠깐 어지러웠는데.. 아니 근데 괜찮다고 하는데도 끌고 오는구나”
수녀님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갑갑하다는 듯이 말했다.
“조금 아프다고 자꾸 이렇게 가둬놓으면 더 아파질 것 같은데 ..어휴 아파봤어야 내 맘을 알지…”
기억 속의 수녀님은 언제나 씩씩하신 분이었다. 서우는 이 순간만은 수녀님 편을 들 수가 없었다.
“항상 무리하시잖아요”
“내가 무리가 아니라는 대두… 하여간.. 어떻게 잘 지내고 있었어? 내 얘기는 재미없으니까 네 얘기를 해보자”
원장 수녀님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원장수녀님의 나이에 관계없는 소녀 같은 모습은 서우의 긴장을 풀어지게 만들었다.
“뭐 별거 없어요.. 그냥.. 거짓말 거짓말뿐이죠 뭐”
씁쓸한 기분에 서우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기도는 잘 하고 있고?”
"…아…. 음.. 그러니깐.. 그게 너무 정신없어서…”
기도는 수녀원 생활의 기본이었다. 하지만 서우는 묘하게 기도에 거부감이 들었다.
“처음에 수녀원에 왔을 때 보이지도 않은 사람을 어떻게 좋아할 수 있냐고 매일 물었었지”
“…”
“그런데 그 물음이 성인이 돼서도 해결되지 않은 것 같구나”
“네.. 비슷해요”
“그 물음이 해결되지 않은 채 진로를 결정하는 건 너무 자신을 방치하는 것 같잖니. 사실 그래서 내심 서란이가 오는 게 좋았단다.”
“네?”
서란이가 찾아올 걸 알고 있었다는 듯한 수녀님의 말에 서우는 너무 놀라 원장 수녀님을 쳐다봤다.. 서우는 이 모든 게 깜짝 이벤트 같은 일이었다는 걸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뭐 이젠 비밀로 하기도 이상하니까 말하자면… 서란이가 항상 뒤에서 지켜보고 있긴 했어. 몇 번 찾아오기도 하고.. 어떻게 찾아냈는지 신기했지만 그건 묻지 않았지. 어쨌건 누군가 의지할 대상이 분명해 보였거든”
예상조차 못 했던 사실에 서우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오히려 수녀원에 있는 너보다 서란이가 널 더 종교같이 의지하는 눈치였어. 몇 번인가 들어가자고 했지만 끝끝내 거절했지. 아직은 좋은 타이밍이 아니라며”
“…”
“그러더니 결국은 이렇게 끌어내서 자기 옆에 뒀구나. 참 맹랑한 꼬마지”
말을 마친 수녀님이 크게 웃었다. 하지만 서우는 도저히 그 웃음을 같이 할 수가 없었다.
“.. 그러니까 서란이 계속 저를 지켜보고 있었다고요?"
“그래. 하지만 서우 너도 서란이 맘을 어느 정도 이해해 줬으면 좋겠구나. 서란이는 어렸을 때 풍족하지 못한 환경에서 자라서 너를 보러 오는 것도 힘든 일이었을 거야. 그런데 정기적으로 찾아왔으니 너를 얼마나 의지하고 있었겠니”
“…그런데 왜 저한테 바로 오지 않고 계속 거짓말을 했죠?”
“사람들은 절박해지면 누구나 조금씩 거짓말을 하지. 사실 서우 너도 수녀원에서 평생을 바칠 맘은 그다지 없지 않니?”
서우는 자신의 마음속이 투명하게 비치는 것 같이 느껴졌다. 수녀님은 자신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없었다.
“…고민이 되긴 했어요. 정말 이렇게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도 되나 하고요. 편하고 익숙한데 이렇게 평생 가는 걸까 싶은..”
“나도 알지.. 그래..”
원장 수녀님은 자책으로 말끝을 흐리는 서우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익숙한 따뜻함에 서우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 지금도 사실 잘 모르겠어요. 막상 밖에 나와보니 너무나 많은 일들이 있었고… 제가 여기에 맞는 사람인지 계속 고민이 돼요.”
서우는 아무에게도 하지 못했던 말을 원장 수녀님께 털어놓았다. 서란의 힘이 돼주고 싶어 수락한 일이었지만 자신은 생각보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거짓말만 늘어가는 이 상황이 힘들었다.
“ 저는 누가 저를 좋아해 줄 거란 생각을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기대하고 싶지 않아요. 감정을 커지게 하고 싶지 않아요”
조금씩 맘속 얘기를 털어놓자 그동안 참았던 말들이 계속 쏟아졌다. 이 질문들은 언제나 서우의 가슴속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는 의문들이었다.
“처음 겪는 일을 많이 겪어서 우리 서우가 좀 힘들었었나 보구나..”
한참을 듣고 있던 원장 수녀님이 서우의 얼굴을 쳐다보며 다정하게 말했다.
“하지만 기대하지 않겠다는 건 결국 자신을 가둬놓겠다는 건데.. 어떤 쪽이 더 힘들지는 아무도 모르지. 선택은 자신이 하는 거니까”
“…”
“어떤 선택이든 장단점이 있는 법이니 좀 더 생각해보고 좋은 선택을 하면 좋겠구나. 언제든지 돌아오면 반겨줄 내가 있는 걸 잊지 말고”
서우는 다정한 원장수녀님의 품에 조용히 안겼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익숙함이었다. 새로움으로 가득 찬 세계는 재미있었지만 혼란스럽기도 했다. 어쨌거나 서우에겐 선택의 순간들이 계속 다가오고 있었다.
“ 그거 아니? 어린아이들이나 영원한 행복을 꿈꾼단다.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을 그런 행복들..”
“.. 그래요?”
“ 변하지 않는 행복은 없다는 걸 성인들은 이미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언제까지고 변하지 않는 행복은 지루하잖니.”
“…네..”
“너도 잘 알 거 같으니 지금 빛나는 감정이나 상황에 집중하는 것도 난 좋은 선택이라 본다. 이렇게 보니 안쓰러워 보여서 맘을 가볍게 해주고 싶구나.”
온화한 미소에 서우의 맘이 가벼워졌다. 원장수녀님을 위로하려고 찾아온 건데 오히려 위로를 받고 말았다.
어쨌거나 서우는 좀 더 힘을 내보기로 결정했다. 의도한 대로 서란의 일을 돕고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여 이 모든 일을 언젠간 사실대로 말하고 민우를 당당하게 마주 볼 수 있게 되기를 빌었다.
오랜만에 본 원장 수녀님은 서우에게 많은 힘을 주었다. 서우는 수녀님이 언제까지나 자신의 곁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동안의 밀린 대화를 천천히 나누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