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한 옷차림으로 침대에 누운 서희는 벌써 몇 번째 핸드폰 통화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신호는 가지 않았고, 계속 전원이 꺼져 있다는 기계음만 들려왔다.
‘근데, 은영인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지 무슨 일이 있는 건가?’
다시금 핸드폰을 들어 통화 버튼을 누르려던 서희는 이내 그대로 핸드폰을 내려 놓았다. 사진 작가인 은영은 사실 사진 촬영을 하러 지방으로 가면 통화가 안되는 것이 부지기수였다.
‘별 말은 없었지만, 이번에도 급하게 또 사진 촬영하러 갔나보네. 우리 오빠 얘기 해주고 싶은데.’
조금은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짓던 서희가 한 켠에 놓여져 있는 녹음기를 집어 들었다. 어느 덧 서희의 표정에서 아쉬움은 지워졌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가 지어졌다. 서희가 녹음기를 가만히 만졌다. 사실 남자들을 사귈 때마다 이 녹음기를 꺼내서 그들의 목소리를 녹음해 왔던 것은 아니었다. 운명 같은 두근거림이 느껴질 때만. 뭐 그 느낌이라는 게 지독히 서희의 주관적인 것이라서 딱히 어떤 것이라 설명할 순 없지만. 그래서 사실 최근 몇 해동안 녹음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다시 녹음기를 꺼내게 될 줄이야.
녹음기를 만지작 거리자 마치, 누군가 리와인드 버튼을 누른 듯 서희의 기억이 아주 예전으로 되돌아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이 녹음기를 자신에게 주었던, 세상에서 자신을 가장 사랑해 주던 그녀의 모습에서 스톱 되었다가 이내 재생 버튼으로 바뀌었다.
서른 살에 홀몸이 된 그녀는 자식을 일곱을 낳았지만, 운명의 장난처럼 막내 아들 하나만 남기고 여섯을 잃었다. 그리고, 자식을 잃어서 세상 누구보다 슬픈 그녀를 향해 세상은 한 번도 원한 적 없던 자식을 잡아 먹는 년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는 수군거렸다.
다른 사람들의 수군거림은 그녀를 힘겹게 하긴 했지만, 그 수근거림을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들의 이야기야 그냥 무시해 버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정말 그녀를 견딜 수 없게 만든 건 바로 유일한 자신의 편이라고 믿었던 사내의 행동들이었다. 자식을 잃은 건 사내 뿐만이 아니라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사내는 마치 자신만이 자식을 잃은 것처럼 행동했다. 사내는 툭하면 술을 먹고 들어와 정말 끔찍할 정도의 폭력을 그녀에게 행사했다. 어디서 이런 년이 들어와서 우리 집 안이 이 모양 이 꼴이 됐다며. 재수 없는 년이 들어와서 자식들도 모조리 잃게 된 거라고. 그렇게 늘 그녀를 향해 저주 어린 악다구니만 퍼붓던 그에게 그녀는 그 어떤 대꾸도 변명도 하지 않았다. 마치, 그 모든 게 정말 그녀의 잘못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그렇게 악다구니만 퍼붓던 그는 여섯번째 자식을 잃고 난 얼마 후 마지막까지 그녀에게 저주 가득한 말들을 미친 듯이 퍼붓다 그렇게 쓰러졌고, 그 뒤로는 다시는 그녀에게 악다구니를 퍼붓지 못했다. 너무도 그녀를 힘겹게 했던 그가 죽어 그녀는 비로소 폭력과 폭언에서 자유로워졌지만, 그녀는 그의 죽음이 전혀 기쁘지 않았다. 부부라는 이름이 참 묘했다. 얼굴을 맞대고 살 땐 사내가 없어지면 자유로워 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그 날만 바라고 살아왔는데, 막상 그가 그렇게 죽어 버렸는데 그녀는 전혀 자유롭지 않았다.
몇날 며칠을 죽은 그를 위해 울다 혼절하다 울다 혼절하다를 반복하던 그녀를 본 마을 사람들은 이번에도 친절하게 그녀에게 이름 하나를 더 붙여주었다. 자식들 잡아 먹은 걸로는 부족해서 남편까지 잡아 먹은 년이라고.
자식들을 잃고 난 뒤로 그녀는 웃지 않았다. 아니 어떻게 웃을 수가 있었겠는가. 수 십년을 그녀는 웃지 않았다. 그러던 그녀가 처음으로 웃었던 날은 바로 자신의 막내 아들에게서 첫 핏줄인 서희가 태어났을 때 뿐이었다. 미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녀는 서희를 보며 웃고 또 웃었다. 상황은 웃을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도. 그만큼 그녀는 서희가 태어난 것이 너무도 기뻤던 것이다. 웃고 또 웃고... 그렇게 그녀의 집에서 웃음 소리가 흘러 나오자 마을 사람들은 그녀에게 또다시 친절하게 이름을 붙여 주었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놈이 갓 태어난 피붙이를 집 앞에 버려두고 달아났는데, 저렇게 웃다니 그디어 저 할망구가 노망이 들었다고. 미친 할망구라고.
그렇게 자식을 잡아먹고, 남편까지 잡아 먹은 것도 부족해서 노망까지 든 미친 할망구라는 조금은 긴 이름을 가진 그녀는 버려진 서희를 (할머니는 절대 단 한번도 서희에게 버려졌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아주 잠시 부모랑 떨어져 있는 거라고 말했을 뿐. 서희에게 넌 버려진 거라고. 니 아버지, 엄마가 니가 태어나자 마자 널 버려두고 달아났다고 이야기 해준 사람들은 친절한 마을 주민들이었다. 허긴 그들은 언제나 그렇게 친절했으니까) 지극 정성으로 키웠다.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은 물론, 목소리도 얼굴도 단 한 번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지만, 서희는 슬프지 않았다. 세상에서 자신을 너무도 사랑해 주는 그녀가 항상 서희의 곁에 있었던 것이다. 그 시절 서희의 소원은 단 하나였다. 오직 할머니와 오래 오래 함께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
서희가 아버지 어머니라는 존재를 본 것은 그로부터 6년이 지난 겨울이었다. 아이들과 놀다가 집으로 향하는 서희의 눈에 맨발로 찬 바닥을 정신 없이 달리고 있는 할머니가 보였다. 할머니 앞에는 낯선 남자와 여자가 승용차에 부리나케 올라타고는 황급히 시동을 걸어 자동차를 출발시키고 있었다.
-할머니, 할머니!!
서희가 몇 번이고 할머니를 불러보았지만, 평소와는 달리 할머니는 미친 듯이 승용차만 따라 뛸 뿐 서희쪽은 바라보지도 않았다. 순간,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된다 이놈아. 집문서... 그건 안된단 말이다.
할머니의 악다구니에 무슨 일인가 싶어 담장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밖을 바라보던 김씨가 한 마디를 내뱉었다.
-망할 놈, 어디서 여기 고속도로가 뚫린다는 이야길 들었나 보구만. 짐승 만도 못한 놈!!
그 이야기가 무슨 뜻인지 서희는 이해할 수 없었다. 허긴 제대로 이해했다고 무엇이 달라졌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할머니가 멀어지는 모습을 서희는 잠시 바라보았다. 서희는 할머니를 따라갈까 싶기도 했지만, 아이들과 논밭에서 노느라 양말이 다 젖어 너무 발이 시려웠다. 그래서, 화로에 발을 녹여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사실,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나 발이 시려웠던 것이다. 만약... 정말 만약에 말이다..... 그것이 할머니를 보는 마지막이었다는 걸 알았다면 서희는 지독한 발시려움을 참아낼 수 있었을까.
닫아 두었던 감정의 둑이 툭하고 무너져 내렸다. 녹음기를 가슴에 부둥켜 안은 서희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 내리기 시작했다.
‘할머니, 잘 지내는 거야? 미안해... 나 정말, 할머니한테 해준 게 아무것도 없네. 정말, 아무것도....’
서희에게서 뿜어져 나온 깊은 슬픔에 어느 덧 원룸 구석구석이 젖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