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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흑표범소녀
작가 : 지아몬
작품등록일 : 2019.10.31

자칭 다른 세상에서 왔다는 표범소녀와 자칭 황자라는 인간 남자는 이종족에게 빼앗긴 인간들의 땅을 다시 되찾으려 신뢰의 약속을 시작으로 파란만장한연대기를 그린다.

 
그녀의 정체-2
작성일 : 19-11-06 23:57     조회 : 233     추천 : 0     분량 : 4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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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아의 마지막 말에 로크는 맥없이 긴장의 끈을 놓아버렸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로크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해가 중천에 뜬 정오였다. 기분은 오랫동안 잔 것처럼 상쾌했다. 잠에서 깨자마자 주변이 덥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자신에게는 불을 때지 말라고 해놓고 본인은 밤새 불을 땠었던 모양인지 작은 불씨로 타닥타닥 타고 있는 나뭇가지들이 보였다. 몸을 일으키니 윗옷은 벗겨져 있었지만, 부드러운 넝쿨로 온몸이 둘둘 감겨있었다. 이것도 그녀의 작품일 것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일이 꿈은 아니었나 보다.

 “깼어?”

 앳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뻐근한 상체를 일으켜 뒤를 돌아 목소리가 들렸던 주변을 쭉 둘러보았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여기 있어.”

 나무 위에서 껑충 뛰어내려 그의 눈앞에 가볍게 착지한 소녀는 로아였다. 옷은 그대로였지만 만만치 않게 흙과 먼지로 만신창이었던 그녀의 얼굴과 보랏빛이 도는 검은색 머리가 말끔히 정리된 모습이었다.

 “내가 얼마나 잔 거야?”

 “이틀.”

 “뭐?”

 로크는 토끼 눈을 뜨며 다시 물었다.

 “어제저녁에 잠든 게 아니라 벌써 엊그제라고?”

 “그래. 버릴까 말까 고민 많이 했어.”

 로아는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위험하진 않았어? 왜 안 깨운 거야? 잠깐, 지금 나고 있는 냄새는 뭐지? 굉장히 역겨운데? 혹시 이거 피 냄새냐? 설마?”

 로크의 동공은 커졌다. 죽어있는 통나무 밑에 있었던 그는 킁킁거리며 흥분한 듯 벌떡 일어나 냄새가 가장 지독히 나고 있는 통나무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두 눈에는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 로아는 평온한 목소리로 로크가 보고 있는 장면에 설명을 덧붙였다.

 “너 거의 죽을 뻔했어.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어쩔 수 없이 어제 불을 지폈는데 바로 달려오더라. 덕분에 본의 아니게 간병이란 걸 해봤지.”

 로크는 저절로 목젖에 마른 침이 꼴딱 삼켜졌다.

 “이, 이게 뭐야?”

 “뭐긴 뭐야. 딱 보면 몰라? 멀리서 모닥불을 발견하고 쫓아왔는데 운 좋게도 널 발견했고 기세 좋게 도끼부터 날리려던 오크라는 녀석들이지. 도망친 녀석들은 전부 따라가 죽였어. 단 한 마리도 빼놓지 않고. 냄새가 지독해서 이 이상 그냥 둘 수는 없고 이제 막 불태우려고 했는데 네가 깬 거야. 일단 물부터 마실래?”

 로아는 검은색 가죽 허리띠에 꽂아 놓았던 은색 물통을 내밀었다.

 “이 물통은 못 보던 건데? 혹시...”

 “맞아. 쟤네 들 거야. 당분간 물 걱정은 없을 것 같아. 그리고 냇가도 찾았어. 찝찝하면 가서 씻어도 좋아. 먹을 것도 있으니 배도 채우고.”

 “아니, 아니, 잠깐만. 지금 이게...”

 로크는 지금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죽은 통나무 뒤에는 초록색 피로 뒤덮여 있는 오크들의 시체가 작은 산처럼 쌓아져 있었다. 그냥 죽어있는 것도 아니었다. 대부분 목이 없거나 얼굴의 형태가 불분명했고 팔, 다리가 없이 몸뚱이만 있는 시체들도 많았다. 일반적으로 17살 정도 보이는 소녀가, 그것도 인간 여자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성인인 로크도 눈으로만 보고있어도 구역질이 날 정도로 역겨운 장면인데 로아는 대수롭지 않게 아니, 오히려 뿌듯한 표정으로 오크의 시체들을 바라보고 있다.

 “너 진짜 정체가 뭐야?”

 “말했잖아. 난 인간이 아니야.”

 로크는 다시 한번 마른 침을 삼키고는 로아의 손에 들려 있는 물통을 냉큼 뺏어 벌컥벌컥 마셨다.

 “난 빨리 네가 정신을 차려서 나한테 설명을 좀 해 줬으면 좋겠으니까 다른 말 말고 네 몸부터 챙겨줘.”

 로아는 표정 없이 걱정하듯 말했지만, 살짝 조급한 티를 냈다.

 “나야말로 설명을 좀 들어야 할 것 같은데?”

 로아는 푸른 눈을 굴리며 으쓱했다.

 

 몇분 뒤, 로아가 찾았다는 냇가에서 말끔히 씻고 온 남자의 행색은 이틀 전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 옷은 걸레짝이 되어 형편없었지만, 그 안에 숨겨진 다부진 몸과 준수한 외모, 풍겨 나오는 분위기는 귀족이나 왕족이라 해도 당연히 믿을만했다. 옆에 있던 로아는 역시 자신은 인간을 보는 눈은 있는 것 같다며 그의 외모를 칭찬하고는 사냥해 온 토끼고기를 냉큼 내밀었다.

 “어제 모닥불 피운 김에 확실하게 익혀 논거야. 식긴 했지만, 맛은 있어.”

 “나에게는 불 피우지 말라며.”

 “그거야, 내가 자리를 비웠으니까? 그리고 네가 죽을 뻔했다고 말했잖아. 불덩이였던 몸이 갑자기 미친 듯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지는 걸 나보고 어떡하라고. 넌 거의 숨넘어가기 직전이었단 말이야.”

 로아는 회상하듯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질색했다.

 “너부터 말해.”

 로크는 로아가 건네준 토끼고기의 뒷다리를 입에 물며 뜬금없이 말했다.

 “뭘 말하라는 거야?”

 “내가 쓰러지고 무슨 일이 있던 거야? 그리고 정확히 너의 정체가 뭐야? 표범이라니, 도무지 말이 안 되잖아. 무엇보다 저거.”

 로크는 산처럼 쌓여있는 오크의 시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로아는 이번에도 눈알을 또르르 굴렸다.

 “먼저 설명해. 내가 먼저 물었어.”

 로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 번 크게 들숨과 날숨을 내뱉고는 입을 뗐다.

 “네가 쓰러지고 그날은 별일 없었어. 난 사냥을 했고 역시나 사냥은 금방 끝났어. 근처에 토끼가 많았거든. 그리고 내 감에 따르면 좀 더 나가서는 냇가도 있을 것 같더라고 소리도 들렸고. 역시 가보니까 냇가도 있었어. 나는 일단 너에게 알려 줘야 할 것 같아서 금방 왔지. 불과 삼십 분도 안 걸린 시간이었어. 혹시 몰라서 불침번을 섰는데 정말 별일 없었어. 그리고 다음 날 일이 터졌어. 태양은 뜨거운데 네 몸은 점점 얼음장처럼 차가워지기 시작한 거야. 나는 젖어있는 네 윗옷을 벗겼고 주변에 있는 넝쿨들을 네 몸에 감았어. 아주 조금 나아진 것 같았지만 그래도 몸은 차가웠지. 그리고 저 녀석들이 오는 소리가 들렸어.”

 로아는 눈짓으로 오크들의 시체를 가리키고는 곧장 말을 이었다.

 “내가 표범인지 아닌지 지금 당장 너에게 증거를 보여줄 수도 없어. 왜냐면 이 세상에 오자마자 반응이 오질 않아. 아무리 원래 모습으로 변하고 싶어도 변할 수가 없단 말이야. 그래서 너에게 증거를 보여줄 수가 없는 거야. 하지만 다행이게도 짐승의 감각이라던가 힘이나 싸우는 실력은 그대로야. 짐승의 감은 절대 틀리지 않지. 숲속에서 짐승들이 서로를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내가 생각하는 영역 안으로 누군가 침입하면 자연스럽게 감각이 곤두서게 돼 그 예시로 저 녀석들이야.”

 “그럼 일부러 불을 지폈다?”

 로크는 먹던 토끼고기를 내려놓고는 소녀의 말을 끊어 버리고 물었다.

 “어차피 이곳에서 맞닥뜨리게 될 녀석들이었어. 아주 조금 앞당겼을 뿐이야. 대략 스무 마리쯤 됐었고 네 몸은 차가운 상태로 죽어가고 있었어. 내가 직접 저 녀석들을 찾아 죽이지 않고도 쉽게 죽이는 방법. 그리고 죽어가는 널 지키는 방법은 이 자리에서 불밖에 생각나지 않더라. 그래서 해가 떨어지는 직전에 일부러 불을 지폈고 딱 맞춰 근처에 있던 저 녀석들을 이곳으로 유인했어. 난 네 몸에 상처 하나 나지 않게 지키고 저 녀석들 모두 죽일 자신 있었거든. 이미 처음 여기 왔을 때 싸워 봤으니까. 물론, 몇 번 왔다 갔다 해야 하긴 했어. 도망치는 녀석들이 있어서... 하지만 찾는 즉시 죽여버리고 땅에 묻고 왔어.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토끼 두 마리 정도 더 잡아 왔던 거고, 몸에 나는 피비린내를 지우려고 냇가에 가서 씻기도 했어. 어차피 불을 지펴봤자 내가 생각하는 영역에는 너뿐이었거든. 혹시 몰라서 호루라기를 건네준 건 정말 말 그대로 혹시 몰라서야. 별 의미 없었어. 나는 너에게 아무도 접근하지 못할 거란 걸 알고 있었지만 내가 놓치는 게 있을까 봐, 그리고 상태가 좋지 않았던 너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건네줬던 거야. 내가 표범이라는 사실은 너 빼고 이곳 숲속에 사는 모든 짐승이 알고 있어. 절대로 내 영역으로 들어오지 못해. 표범이 영물이었다며? 네 말이 맞았나 봐. 이곳에 있는 짐승들은 하나같이 날 보면 기겁을 하고 도망가더라. 아무튼, 나는 다시 이곳으로 와서 주변에 저 역겨운 시체들을 나름 정리했고 전날과 똑같이 불침번을 서면서 네 상태를 지켜봤어. 다행히 네 몸은 점점 나아지기 시작했고 숨도 다시 돌아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하고 서야 겨우 새벽에 잠이 들었지. 그리고 다음 날 너는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서 생명의 은인을 심문하고 있고. 그게 끝이야. 거짓은 없고. 이제 궁금증이 풀렸어?”

 쉬지 않고 말을 끝낸 소녀는 당당하게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채 세모 눈으로 바로 앞에 앉아있는 남자를 쳐다보았지만 그의 표정은 일관성있게 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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