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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어느 초라한 초옥(草屋:초가집) 앞에서 멈춰선 여옥이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으나, 조급해진 마음이 마치 뜀박질한 것 마냥 심장을 몰아세웠던 모양이다.
‘도착해 있으려나? 제발 있어야 할 텐데…….’
괜히 고생하지 말고 집에서 대기하고 있으라는 여옥의 말에, ‘정리할 게 많다‘며 구태여 시장에 나간 홍월이었다. 해시(亥時:21~23시) 전까지는 오겠다고 했지만 그게 제 마음대로 될까. 시간에 쫓기는 자는 시간으로 겁을 주고, 돈에 쫓기는 자는 돈으로 겁을 주는 게 바로 저 약삭빠른 장사치들 아니던가.
‘차라리 기방으로 곧장 오라고 했더라면…… 지금부터 준비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한 식경은 걸릴 텐데…… 더군다나 가는 시간까지 더하면…….’
불과 1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여옥에서 기생생활을 하던 홍월이다. 갑작스레 돌아와 다시금 기녀차림을 준비하는 그녀를 보면 다들 수군거리며 달려들게 뻔했기에, 일부러 집에서 대기하라 일렀던 것이다.
저 좁디좁은 곳에서 씻으랴, 복장 챙기랴, 담장질 하랴…… 곧장 기방으로 오게 했다면 적어도 한 식경은 단축시킬 수 있었으리라.
“휴…….”
일분일초가 급한 여옥으로선 자연스레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게 있느냐?”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초옥은 잠잠했다.
조급함이 여옥의 전신을 휘감아왔다.
“홍월이 없느냐!?”
역시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이를 어쩐다…….’
여옥은 고민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라도 시장으로 달려가야 하나? 기방에 물품을 대는 업장은 정해져있으니 물어물어 경로를 추적한다면 어떻게든 찾을 수는 있을 것이다. 다만 족히 한 식경은 넘게 걸릴 거라는 게 문제이지. 그리고 혹, 엇갈리기라도 한다면?
‘시장으로 가는 건 아냐, 그것은 어불성설이다. 허면…….’
생각을 거듭하던 여옥은 잠시 뒤,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장 오라는 쪽지를 남겨둔 채 기방으로 되돌아가는 것 외엔 달리 떠오르는 게 없었다. 이는 이 시점에서 가장 합리적인 대안이긴 했으나, 당장의 답답함을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다지 실효성 있는 방책이라 보기 힘들었다.
“아니! 여태 안 들어오고 대체 어딜 가 있는 게야!”
대답을 기대하고 내뱉은 건 아니었다. 그저 답답함을 견딜 수 없어 소리를 지른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바로 그때,
“귀 나가겠어요, 어휴.”
초옥의 뒤편에서 추레한 차림의 홍월이 터벅터벅 걸어 나오는 게 아닌가?
“너…… 너!?”
“도저히 짬이 안 나서 일단 세안만 하고 담장질 좀 했어요. 오랜만이긴 하지만…… 제법 나쁘지 않죠?”
“…….”
한껏 벌어져있던 여옥의 입이 별다른 소리도 내보지 못한 채 ‘꾹’ 하고 닫힌 것은, 과연 그 말대로 추레한 차림과는 달리 ‘제법 나쁘지 않은’ 홍월의 담장된 얼굴 때문이었다.
아니, 실은 ‘나쁘지 않다’ 정도가 아니라 잠시간 눈을 떼지 못했을 만큼 어여쁜 용모였다. 깜빡 할 말을 잊어버리고 말았을 정도로.
“……뒤편에서 담장하고 있었더냐?”
“호롱불에 들어갈 기름이 다 떨어졌더라고요…… 달빛을 좀 빌렸죠.”
곧이어 입가에서 사르르 피어나는 한 줄기 미소.
‘가히 명기일색(名妓一色:미모가 뛰어난 기녀)의 얼굴이로구나…….’
여옥은 자기도 모르게 튀어 나오려던 탄성을 꾹 눌러 참았다.
“……기방의 기름이란 기름은 죄다 들여오는 년이 제 집 구석 하나 못 챙기고…….”
“기방 물품이 어디 제 것인가요.”
“성인군자가 여기 계셨구나.”
“모르셨어요?”
여옥은 저 능청스런 얼굴에 일갈(一喝)을 내지르려다가도, 이내 현 상황을 깨닫곤 황급히 얼굴을 굳혔다.
“너와 장난칠 시간 없다. 지금 당장…….”
“서두르긴 했는데 예상보다 더 빨리 온 모양이네?”
여옥의 다급한 음성에도 불구하고, 홍월은 여전히 느긋한 기색이었다.
“……빨리 올 줄 알고 있었다는 게냐?”
“당연하지 않나요? 난 오히려 방주님이 조금 늦는다 싶었는데?”
“그럼…… 어찌 준비를 서두르지 않고 이제껏……!”
“준비는 끝났어요. 필요한 건 여기 다 있지요. 기방에서 옷만 갈아입으면 돼요.”
그러곤 메고 있던 봇짐을 살며시 흔들어 보이는 것이었다.
“그, 그럼 어서……!”
“잠시, 잠시요 방주님.”
“……?”
“서두르지 마세요. 우리가 서두른다한들, 이 밤은 그리 쉬이 흘러가주지 않아요.”
이에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 여옥이 뚱한 표정으로 홍월을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더냐?”
“서둘러봤자 좋을 게 하나 없다는 말이지요.”
“……뭐라?”
“오늘 밤을 여태 기다린 자들이에요. 누군가 냉큼 들어와 방해하겠다고 하면, 그들이 가만있겠어요? 모든 것의 등장과 퇴장에는 다 적절한 때가 있기 마련이지요.”
이만하면 알아들었겠지. 홍월이 재차 미소를 띠우려 할 참이었다.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게야!?”
그러나 여옥은 좀처럼 이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아니, 어차피 당장엔 저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니깐요? 저들도 어느 정도 마마와의 시간을 만끽해야만 마음의 틈이 생기고 또 새로운 얼굴에 흥미를 보일 수가…….”
“그래서 세자마마를 이대로 계속 홀로 두라고 말하는 것이냐!”
그즈음엔 홍월의 느긋함에도 조금은 균열이 갈 수밖에 없었다.
“……아냐, 됐어요. 그럼 일단…….”
“일단은 무슨 일단! 냉큼 봇짐 들고 따라 오거라!”
“아니, 어차피 지금 가봐야 별 수도 없다니깐…….”
“흥, 누가 당장 들여보낸다 했더냐!? 옷도 갈아입어야 하고, 또…… 네 년은 지금 네 담장이 완벽한 줄 아나보지?”
순간 홍월의 안색이 샐쭉해졌다.
“어…… 음, 별로예요?”
여옥은 이에 대답하는 대신,
“어서 따라오지 않고!”
성을 내며 뒤돌아 걸을 뿐이었다.
“허참…… 많이 걱정되시나 보네. 그래도 꽤 잘하실 텐데…….”
그러고 툴툴거리면서도 냉큼 여옥을 쫓아가는 홍월이었다.
“두 번째 기녀생활이라…… 이번엔 조금 괜찮을까나? 나도 괜히 두근거리네…….”
골목에 드리운 희뿌연 달빛을 따라, 두 여인의 발걸음이 표홀히 어둠을 좇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