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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미남과 야수
작가 : 윤연주
작품등록일 : 2016.10.9

한국 최고 흉부외과 의사를 꿈꾸는 여자 현기증. 그리고 심장이 뛰지 않는 남자 금지혁. 과연 기증은 지혁의 심장이 다시 뛰게 할 수 있을까?

 
3. 심장이 뛰지 않는 남자 (3)
작성일 : 16-10-11 23:40     조회 : 664     추천 : 0     분량 : 8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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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지던트 당직실에서 넋을 뺀 채 생각에 잠겨 있던 기증은 어젯밤 전화를 걸어 왔던 지혁을 떠올리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아무리 봐도 뒤가 구렸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액수를 병원에 기부하고 얻어낸 자신의 신상정보를 고작 한 번의 전화 통화로 이용하고 끝낸다는 것이 수상했다. 그러니 기증은 자연스럽게 은성의 말이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개인 주치의 제안을 하기 위해 그런 거금을 들여 신상정보를 가져갈 리가 없다던 은성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아, 쓸데없이 신경 쓰게 만드네……쯧.”

 

 기증이 머리를 털어내며 간이침대 위로 벌렁 드러눕자 이제 막 안으로 들어선 지훈이 침대 아래로 떨어진 그녀의 종아리를 발끝으로 툭 걷어찼다.

 

 “뭐가 신경 쓰이는데 그래?”

 

 “그런 게 있어.”

 

 “그런 게 있든 없든, 네가 신경 쓴다는 그 일이 이게 아니면 좋겠다.”

 

 “뭐?”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킨 기증은 그의 손에 들린 신문과 시선을 마주했다.

 

 “읽어 봐. 오늘 아침에 나온 따끈따끈한 비보다.”

 

 “…….”

 

 안 좋은 소식이라는 지훈의 말에 얼른 신문을 받아든 기증은 눈에 확 들어오는 헤드라인을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의료 분쟁 잦은 흉부외과의 현실?”

 

 “그 밑에는 더 비참해.”

 

 지훈이 손끝으로 콧날을 쓸어내며 말하자 침대에 걸터앉아 신문을 바로 잡은 기증은 이어지는 기사를 계속 읽어 내려갔다.

 

 전반적인 내용은 헤드라인에서도 이미 감 잡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외과 중에서도 심장 쪽은 의사의 손이 가장 많이 필요하고 정교한 수술이다 보니 골치 아픈 의료 사고와 적자에 허덕이는 병원이 허다했다. 그런데 기증의 눈에 확 들어온 것은 그녀가 몸담고 있는 한국대학병원이 심장혈관센터 건립을 전면 취소했다는 내용이었다.

 

 “뭐야, 이거?”

 

 기증이 미간을 찌푸리며 나머지 기사를 훑어 내려가자 지훈은 이층 침대 기둥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옅은 한숨을 토했다.

 

 “전국에서 흉부외과라면 최대 규모와 실력을 자랑하는 우리 병원에서도 결국 꼬리를 내렸다는 결론이지. 병원장님도 멋 떨어지게 센터 짓고 스타 써전이신 우리 박은성 과장님을 딱 심어서 명실공의 한국대학병원을 최고의 자리로 끌어올리려던 계획이셨을 텐데 기금을 모으기가 보통 힘든 게 아니라더라.”

 

 기증은 우악스럽게 입술을 비틀었다. 자신의 신성정보를 팔아 기금을 받아낸 것을 이미 아는 터다.

 

 “이 기사, 사실이야?”

 

 “그럼 어떤 기자가 굴뚝에서 연기도 안 나는데 불났다고 떠벌리겠냐. 머리에 총 맞았냐? 그것도 한국대학병원을 상대로.”

 

 “…….”

 

 기증은 입술을 사리물고 자리에서 일어나 레지던트 당직실을 빠져 나갔다. 그녀의 손에는 신문이 야무지게 들려 있었다.

 

 잠시 후 은성의 과장실 앞으로 도착한 기증은 먼저 문을 열고 나오고 있는 그와 마주섰다. 물론 은성은 그녀의 손에 들린 신문을 보고 아침부터 여기까지 온 이유를 대충 눈치 채고 있는 듯 보였다.

 

 “이거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나 지금 외래 있어. 나중에 얘기하자.”

 

 “나중에 얘기할 것 치고는 일이 좀 큰데요.”

 

 “의사한테 환자를 만나는 것보다 더 큰일은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

 

 딱 떨어지는 은성의 답에 기증은 날카롭게 눈만 치켜뜨며 길을 텄다. 그러자 은성은 걸음을 옮기며 그녀를 슬며시 돌아보았다.

 

 “센터가 없다고 해서 우리가 환자를 돌보는데 지장이 있는 건 아니야. 그러니까 너무 날 세우지 마.”

 

 “누가 그런 센터에 미련 있어서 이러는 겁니까? 내 신상정보 팔아서 기금 다 받아놓고 신문에는 이딴 식으로 기사를 내보내니까 하는 말 아닙니까.”

 

 “…….”

 

 은성은 옅은 한숨을 씹어 삼키며 온전히 돌아섰다.

 

 “이번 일로 병원장님과 부딪치지 않았으면 싶다.”

 

 “해명은 하셔야죠.”

 

 “해명할 일 아니야. 그런 해명을 요구하는 너도 주제넘고.”

 

 “뭐라고요?”

 

 “병원 운영자들이 할 일이 있고 우리 의사들이 할 일이 있는 거야. 그러니까 있는 자리에서 네 할 일에만 최선을 다하면 그만이야.”

 

 “허, 센터 지어지면 거기 담당으로 가셨을 텐데 너무 초연하신 척 하는 거 아닙니까?”

 

 “나 역시 너 못지않게 그런 거에 미련 없어.”

 

 은성이 다시 돌아서자 기증은 그의 등 뒤에 툭 하니 말을 던졌다.

 

 “우리 병원도 얼마 못 가서 다른 병원 흉부외과처럼 적자를 면치 못할 거라는 거, 과장님이 말씀하시는 그 병원 운영자들이 이미 알고 이러는 거 아닙니까?”

 

 그녀의 물음에 우뚝 걸음을 멈춘 은성이 돌아보지 않은 채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상황이 어떻게 되든, 어디에 있든, 의사는 그저 환자를 돌보면 되는 거다.”

 

 그 말만 남긴 채 복도를 벗어나는 은성을 보며 기증은 이를 악물었다. 죽어라 수술하고 환자를 돌봐 봤자 이익을 내지 못하면 사라지는 게 이 세상 순리였다. 사람 목숨을 가지고 장사를 하는 것 같은 기분에 기증은 착잡한 기분을 어쩌지 못했다.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와 병원을 운영하는 사업가들은 이율배반처럼 하나가 될 수 없었다.

 

 

 *

 

 

 자숙은 기증이 한바탕 풀고 간 빨래를 해놓고 화원 문을 열었다. 오늘은 배달 주문도 딱히 없다보니 일이 생겨 하루 동안 나오지 못하는 알바생 걱정을 할 필요도 없었다. 살다 보면 이렇게 한가한 날이 하루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화원 앞을 쓸고 있었다.

 

 /띠리리-/

 

 그런데 아침부터 요란하게 전화가 울렸다. 가게 전화가 울리는 경우라면 백발백중 꽃 배달 주문이었다.

 

 “예, 사랑 꽃집입니다.”

 

 평소처럼 낭랑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은 자숙은 수화기 너머로 건너오는 차가운 숨결에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고 말았다. 한여름에 이런 한기가 느껴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꽃을 좀 주문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차가운 숨결만큼 냉랭한 목소리를 가진 남자였다.

 

 “아, 예……. 어떤 꽃으로 하시겠어요?”

 

 자숙은 조금 긴장한 목소리로 주문을 받았다. 그러자 전화 속 남자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지금 화원에 있는 꽃들을 모두 구매하고 싶습니다.)

 

 “예?”

 

 뜬금없는 말에 자숙은 생각할 틈도 없이 되묻고 말았다. 하지만 건너오는 말은 없었다.

 

 “여기 있는 꽃을……다 주문하시겠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금액이 상당할 텐데요.”

 

 (비용과 상관없이 되도록 많은 꽃을 구매하고 싶습니다.)

 

 “아, 예…….”

 

 자숙은 순간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비용에 상관없이 꽃을 구매하겠다고 한다면 배달차가 꽉 차도록 최대한의 꽃을 담고 가는 것을 전제로 계산 했을 때 이번 달 수익을 모두 벌어들일 수 있었다.

 

 “그럼 언제까지 배달을…….”

 

 (오늘입니다.)

 

 “오, 오늘이요?”

 

 (예, 반드시 오늘까지 배달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

 

 자숙은 잠시 망설였다. 서툴긴 해도 운전을 할 줄 알았고 배달차에 가득 찰 정도로 꽃을 주문 받았다면 가게 문을 닫고 가도 오늘 장사에는 지장이 없었다.

 

 “예, 그럼 배달할 주소를 불러주시겠어요?”

 

 자숙은 남자가 불러주는 주소를 받아 적으며 싱글벙글 하고 있었다. 살다보니 또 이런 횡재를 하는 날도 오는가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이 배달이 대박횡재가 아니라 비명횡사의 길임을 알지 못했다.

 

 

 *

 

 

 자숙의 화원으로 배달 주문을 끝낸 지혁은 그의 서재에서 나와 대기하고 있던 황비서를 지나쳐 복도 끝으로 향했다.

 

 “그 화원에서 배달하는 알바생은 오늘 확실히 안 나오게 조처 했나?”

 

 지혁은 등 뒤에서 따라 걷고 있는 황비서에게 물었다.

 

 “예, 화원 주인이 배달을 올 게 분명합니다.”

 

 “알았어. 도착하는 즉시 화랑으로 들여보내.”

 

 “예, 알겠습니다.”

 

 고개를 조아리고 걸음을 멈춘 황비서는 지혁이 화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다시 일층으로 내려갔다.

 

 지혁은 그림들이 걸려 있는 널따란 화랑 한 가운데 서서 가만히 숨을 가다듬었다. 이 그림들을 수집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오늘 덫을 놓기 위해 그림들 중 하나를 포기해야만 했다. 그리고 지혁은 그가 포기할 그림으로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인 행복한 눈물을 선택했다. 시가 70억을 호가하는 그림이니 이거 하나면 자숙의 발목을 잡기에 충분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기증의 발목을 잡기에 충분하다고 해야 할까. 자신의 제안을 단박에 잘라 거절했던 기증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리는 것 같았다.

 

 그 사이 자숙은 되도록 많은 꽃을 팔기 위해 운전석을 제외한 모든 공간에 꾸역꾸역 꽃을 실었다. 그리고 서툰 운전으로 지혁이 알려준 주소로 향했다.

 

 “생각보다 외진 곳이네…….”

 

 인적이 드물어지기 시작한 이유는 근처가 낮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 입구에 사유지를 알리는 푯말을 붙여 사람들이 출입할 수 없도록 막았기 때문이었다. 서울 한복판에서 이 정도 땅에 집을 짓고 살 정도라면 배달차 하나 가득 실은 꽃을 사는 것은 그야말로 애들 장난이라는 생각에 자숙은 이번 주문으로 한탕 해보려던 양심의 가책을 조금이나마 씻을 수 있었다.

 

 “어머, 이거 문이 얼마나 큰지 벨도 못 찾겠네.”

 

 웅장하게 막아선 정문 때문에 차에서 내린 자숙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벨을 찾았지만 허사였다. 그런데 감시 카메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던 관리실 직원이 스피커로 방문 목적을 물었다.

 

 “아, 오늘 꽃배달 주문 받고 왔는데요.”

 

 어디서 목소리가 들리는지도 몰라 고개를 허공에 쳐들고 답을 하던 자숙은 육중한 정문이 자동으로 열리는 것을 보며 얼른 차에 올랐다. 그리고 다시 안으로 들어서 조금 더 올라가자 우거진 숲 너머로 조금 으스스한 기운을 뿜고 있는 대저택이 나타났다.

 

 “어휴, 이건 집이야 성이야.”

 

 자숙은 어디에 차를 세워야 할지도 몰라 우선 저택 앞까지 차를 몰았다. 그러자 입구 쪽에 황비서가 미리 나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꽃을 배달하러 온 사람한테 건네는 인사 치고는 너무 깍듯했던 탓에 자숙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조아리며 황비서의 인사를 받고 말았다.

 

 “꽃은 어디에 둘까요?”

 

 “우선 안으로 들어오시죠. 꽃을 어떻게 할지는 이사님과 상의를 하셔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아, 예…….”

 

 자숙은 그제야 주문 전화를 한 남자가 누군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황비서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간 그녀는 왠지 모르게 오싹한 기분이 들어 몸을 움츠렸다.

 

 “여기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황비서는 지혁이 시킨 대로 화랑으로 자숙을 안내한 후 사라졌다. 잠시 후 안으로 들어선 자숙은 끝도 없이 펼쳐진 넓은 방에 그림들이 잔뜩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우뚝 멈춰 섰다.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허공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움찔 놀란 자숙이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밀실에서 막 나온 지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장신의 사내는 단단한 가슴과 어깨만큼 야무진 입술을 가지고 있었다. 차려입은 옷차림새를 보니 빈틈없는 완벽주의자가 틀림없었다.

 

 “아, 안녕하세요.”

 

 역시나 배달을 온 사람에게 나타낼 예의는 아니어서 자숙은 조금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런데 왜 이곳으로…….”

 

 “아, 부탁드릴 것이 있어서 모셨습니다.”

 

 “부탁이요?”

 

 “예, 제가 여기 그림 액자 중 하나를 꽃으로 장식하고 싶어서 말입니다. 듣기로는 꽃을 사면 포장이나 꽃다발을 만들어주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긴 하죠…….”

 

 “그런 서비스의 일종이라고 보시면 될 거 같습니다. 크게 어려운 작업은 아니지만 어떤 꽃이 그림과 어울리는지 몰라서 꽃집에 있는 꽃을 모두 주문한 겁니다.”

 

 “아, 그러셨군요. 하지만 저도 그림 액자를 장식해 본 적은 없어서요.”

 

 “그냥 그림과 어울릴 만한 색깔의 꽃들로 꾸며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딱히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진 않지만 색에 대한 감각은 필요한지라 꽃을 다루시는 분이라면 충분히 하실 수 있으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물론, 평범한 포장 작업도 아니니 액자를 꽃으로 장식해주신다면 꽃값의 두 배를 수고비로 지불하겠습니다.”

 

  오 마이 대박횡재. 자숙은 속으로 쾌거를 부르며 차분한 척 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어머, 그럼 믿고 맡겨주시는 만큼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일말의 거절도 없이 다소곳하게 고개를 조아린 자숙은 곧이어 직원들이 화랑으로 가지고 온 꽃들을 보며 색깔별로 나열했다.

 

 “어떤 그림의 액자를 장식하면 될까요?”

 

 “바로 뒤에 있는 그림입니다.”

 

 지혁의 말에 고개를 돌린 자숙은 붉은색 머리를 한 여자가 양손으로 제 뺨을 잡고 기쁨의 눈물을 찔끔거리고 있는 커다란 그림을 올려다보았다. 얼핏 봐서는 무슨 만화 같기도 한 그림이었다. 특별히 정교해 보이지도 않고 색깔도 총천연색이라 다른 그림들에 비해 뭔가 싸구려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자숙은 이 그림이 시가 70억에 달하는 로이 히스텐슈타인의 행복의 눈물임을 알지 못했다.

 

 “그럼 시작하시죠. 저는 나가있겠습니다.”

 

 “아, 예.”

 

 자숙은 그렇게 넓은 화랑에 혼자 남았다. 그리고 그녀 곁에는 커다란 그림의 액자를 장식할 때 사용할 수 있는 도구들과 사다리가 놓여 있었다.

 

 화랑을 나온 지혁은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닫힌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제 곧 덫에 걸릴 불쌍한 희생양을 직접 목격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묻어나는 눈빛이었다.

 

 “사다리는 잘 조처했나?”

 

 다시 서재로 돌아온 지혁이 황비서에게 물었다. 그러자 황비서는 고개를 조아리며 데스크 앞에 자리를 잡고 앉은 지혁을 내려다보았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순간 그림과 함께 쓰러질 겁니다.”

 

 “흠…….”

 

 차분하게 숨을 가다듬던 지혁의 손에 병원장에게서 받은 기증의 신상정보가 들려 있었다. 생각보다 상세한 내용에는 기증과 그녀의 가족에 대한 것들이 일목요연하게 적혀 있었다. 하지만 개인정보 유출의 한계로 인해 병원 측에서도 기증의 주민번호와 의대생 시절의 학과 성적은 밝히지 않았다. 물론 지혁에게 그런 것은 필요 없었다. 단지 기증을 끌어들이기 위한 수단으로 자숙의 화원이 걸렸을 뿐이었다.

 

 지혁이 예상한 대로 일은 터졌다. 액자의 다른 곳을 장식한 후 꼭대기 쪽에 꽃을 달기 위해 사다리를 타고 올라섰던 자숙은 이미 손을 써두었던 사다리와 함께 앞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벽에 걸지 않고 일부러 세워 두었던 그림 역시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면서 요란스럽게 찢기고 말았다.

 

 “어머! 어머! 어머!”

 

 아무리 애처롭게 소리를 질러 봐도 찢긴 그림이 돌아오진 않았다. 그 즉시 직원들이 화랑으로 들어섰고 어느 새 나타난 지혁은 처음보다 더 냉랭한 표정으로 자숙과 마주 했다.

 

 자숙은 죄인 취급을 받으며 손님 응접실로 끌려갔다. 그렇다. 끌려갔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그런 상황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흠, 그저 죄송으로 끝나기엔 상황이 조금 복잡해진 거 같은데 말입니다.”

 

 “보, 보상할게요! 그림은 보상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저로써도 마음이 놓입니다. 그럼 여기에 사인 하나만 해주시죠.”

 

 마치 미리 준비라도 한 것처럼 지혁이 꺼낸 서류에는 자숙이 망친 그림의 이름과 작가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그림의 가치만큼 보상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그 가격이 얼마나 되는지는 명시하지 않았던 탓에 자숙은 그런 만화 같은 그림 한 장이 얼마나 할까 싶어 얼른 사인을 해버렸다.

 

 “자, 우선 받으시죠.”

 

 자숙의 사인이 적힌 배상각서를 집어든 지혁이 그녀 앞에 봉투를 하나를 내밀었다.

 

 “이, 이건 뭔가요?”

 

 “주문한 꽃값입니다.”

 

 “아직 가격을 말씀 안 드렸는데요.”

 

 “직원들이 대강 계산해서 3천만 원으로 책정했습니다.”

 

 “예!?”

 

 눈을 부릅뜬 자숙은 그림 값을 갚고도 엄청난 이윤이 남을 거라는 희망으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어휴,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되는데. 그럼 여기서 바로 그림 값을 빼고 가져가면 안 될까요?”

 

 그러자 지혁은 길쭉한 다리를 여유롭게 겹치며 말을 이었다.

 

 “죄송하지만 그림 가격은 그 돈으로 조금 부족할 것 같은데요.”

 

 “예?”

 

 3천만 원으로도 부족하다는 말에 자숙은 돈봉투를 양손으로 잡고 멈칫했다.

 

 “그럼 얼마를…….”

 

 “70억입니다.”

 

 “…….”

 

 잠시의 정적이 자숙의 숨통을 조여 왔다.

 

 “치, 칠십……뭐라고요?”

 

 70원은 아니리라. 잘못 들었다고 하기에도 지혁의 발음은 너무나 명확했다.

 

 “70억입니다. 그리고 되도록 빠른 시일 내에 보상을 부탁드립니다.”

 

 “70억!”

 

 자숙은 그 자리에서 소파 위로 꼬꾸라졌다. 하지만 지혁은 일말의 동요도 없이 일어나 응접실 입구로 향했다.

 

 “서, 선생님! 잠시 만요! 잠시 만요!”

 

 다급하게 일어나 지혁에게 달려간 자숙은 3천만 원이 담긴 돈봉투가 이제 종이쪼가리로 보였다.

 

 “한번만 선처해 주십시오! 그렇게 비싼 그림인지 모르고 사인했어요!”

 

 “그림의 가격을 몰랐다고 해도 어차피 보상은 하셔야 했을 겁니다. 이미 CCTV에 모든 사실이 녹화됐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각서에 명시된 기일 내에 배상하지 않으면 즉각 고소장이 날아갈 겁니다.”

 

 “예!? 고, 고소요!”

 

 자숙은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얼른 무릎을 꿇고 지혁의 발치에 엎드렸다.

 

 “선생님! 한 번만 선처해 주세요! 보아하니 돈도 정말 많으신 거 같은데 저 같은 시민한테 70억이 어디 있습니까! 대출을 해도 그 돈을 마련하는 건 어렵습니다!”

 

 “…….”

 

 어차피 예상했던 시나리오인 탓에 지혁은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다.

 

 “그럼, 선처를 하는 조건으로 하나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예! 뭐든 부탁만 하시면 성심성의껏 들어드릴게요!”

 

 무릎을 꿇은 채 양손을 싹싹 비비며 외치는 자숙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지혁이 평소보다 더 차갑게 굳어진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현기증씨를 알고 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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