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부작용.
[그렇게 까지 할 이유가 있어?]
..틀린말은 아니었다. 세희의 말을 듣고 막무가내로 강행하던 계획들이, 내 멋대로 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희도 걱정이 되어서 해준말이겠지. 내가 이렇게 해서 허스키인척 하루를 버텼대도, 결과적으로는 내 결석이란 구멍이 생기는 것이고, 혹시라도 중간에 들켜버리면 나뿐만 아니라 허스키까지 오해받을 수 있는 부분이 생겨버릴테니.
제대로 생각지 못한 채, 최선의 선택이라고 마무리 지었던 나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세희가 다음으로 말하는 부분도 역시나 내가 생각했던 그 부분 이었다.
“너는 어쩌고? 넌 그럼 결석인거잖아.”
“반장이 아픈건, 반장이 해결해나가야할 문제 아닐까..”
“그리고 이렇게 한다고 해서 반장이 좋아할지..의문이기도 해.”
세희는 혹시라도 나에게 기분 나쁘게 들리진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는지, 지적하는 듯한 말투로 느껴지게 하지 않으려고, 중간중간 말의 끝부분을 조금씩 아래로 내렸다.
그 부분을 발견했기에, 나는 세희가 되려 고마웠다. 사실, 세희가 말한 생각들에 반사적으로 반대하는 말이 나갈뻔 했지만, 생각해보면 걱정어린 말 들 이었기에, 걱정해준 세희를 무안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허나, 우산은 당장 혼내주고 싶었다.
“그러니까..”
“우산을 왜 훔쳤어요 원흉님아.”
내 말을 듣자마자, 언제 진지한 표정을 지었냐는 듯 세희가 밝게 웃었다.
“아하하하하!!!”
“일단 내 책임도 있으니까, 그럼 내가 최대한 도울게!”
세희는 진지하게 내 걱정을 했지만, 한 편으론 이미 펼쳐져버린 이 상황에서도 나를 도와주고 싶어했다. 어쩐지 그 모습이 난 너무 고마웠다.
갑자기 세희가 사물함에서 가방 하나를 가져오더니, 지퍼를 열고 안의 물건들을 책상 위에 다 꺼내 놓았다. 어느새 높게 올라가 있는 화장품 산이 나를 멍하게 만들었다.
“이..이게뭐야?”
여태 살면서 쓴 화장품도, 이것보단 적을 것 같다. 세희는 화장품을 종류별로 정리하며 이렇게 많은 이유를 설명했다.
“내가 이어준 애들이 괜찮다고 해도 그냥 넘어가기 미안하다고 매번 화장품을 사서 주더라구.”
“가방에 넣어놨었는데, 이게 이런식으로 도움이 될 줄은 몰랐네?”
형형색색의 블러셔, 전 종류의 톤타입이 모인 여러개의 팩트 등등. 보아하니 피부 타입과 색타입이 종류별로 화장품마다 전부 있는것 같았다.
..마치 화장품 가게에 온 느낌. 와중에, 이정도면 세희는 얼마나 많은 사람의 인연을 도와준걸까. 이젠 무섭다 못해 상상이 안 가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이건 왜 꺼낸거야?”
내 말을 듣자마자 신난다는 듯 씨익 웃는 세희가 보인다.
왜 일까. 난 저 표정의 세희가 무섭다.
“이왕 하는거, 진짜 반장같이 하면 좋잖아?”
세희의 손이, 화장품 하나에 닿는 것을 시작으로, 몇 분만에 나를 능숙하게 허스키느낌으로 만들어 주었고, 지금. 반에 있는 길쭉한 거울 앞에 서있는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녀석과 닮은 얼굴은 아니지만, 화장을 이용해 이 정도까지 표현할 수 있다니 너무 놀라웠다. 째진듯 째지지 않고 은근 큰 느낌의 눈매. 머리색과 같은, 너무 얇지도 굵지도 않은 눈썹의 얇기. 적당한 톤의 피부색. 무뚝뚝하면서 시크한 듯한 인상. 잘난척하면 정말 재수없어 보일 것 같은데, 은근히 납득될것 같은 전체적인 느낌.
..이렇게 보면 세희가 나보다 녀석을 더 많이 아는 것 같다.
“와 진짜 짱이다. 어떻게 한거야?”
“완전 재수없어 보여.”
나도 모르게, 녀석 앞에서 허물없이 장난치듯 하던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하하하! 좋은말이지 그거?”
너무 신기해서 계속 거울만 바라보고 있는 나. 엄마의 가발이 운좋게 녀석의 머리색인것도 다행이지만, 나도 이미 짧은 단발 느낌의 컷트머리 인데다, 세희의 정확한 포인트 화장까지 더해져서..
와, 이건 녀석과 비교했을때 더 했으면 더 했지, 못하지는 않았다. 감탄에 가득찬 내 놀람이 주체없이 커져갈때 즈음, 담임선생님께서 들어오셨다.
“..!!”
나도 모르게 찔려버린 감정. 당장 녀석의 자리로 달려가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고개를 숙이게 만들었다. 앉은키는 잘 구별할 수 없을거라 자신에게 속삭이면서, 두근대는 심장을 숨기고자 호흡을 규칙적으로 반복했다.
선생님께서 많이 놀란 듯 한 목소리로, 걱정을 잔뜩 머금은 채, 녀석을 표현하고 있는 나에게 질문을 건네셨다.
“거기. 민우지? 아침에 어디갔었니?”
“평소에 지각도 결석도 절대 안 했는데, 갑자기 안보여서 깜짝 놀랐단다.”
목소리를 어떻게 변조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아직 자리에 가지않은 세희에게서 귓속말로 신호가 왔다.
“일단 엎드려 있어. 나만 믿어.”
살짝 고개를 들어올려 세희를 바라보았더니, 웃으며 윙크하는 뭔가 불안한 사람 한 명이 보였다.
‘믿어도 되는 걸까.'
허나 지금 상태에선 믿을 사람이 세희 뿐이었기에, 일단은 세희 말처럼 엎드린 채로 세희를 슬쩍슬쩍 지켜보았다.
자리에 돌아가서 앉자마자, 딜레이도 없이 곧바로 촥하고 일어나는 세희의 모습.
'아니, 뭐있는 것처럼 너무 티나잖아!'
나는 이때 알았어야 했다, 꿈뻑이는 눈만으로 세희를 불안하게 바라보지 말고, 당장 세희의 입을 막았어야 했다.
..하지만 세희의 입은 이미 열려버린 상태.
“선생님! 반장은 급성설사로 오전 내내 화장실에 있었어요!”
그래. 세희를 말려야했다.
‘말려야 했다고!!!’
세희가 진심으로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다. 아니, 너만 믿으라고 해놓고, 허스키가 용변을 봤다고 하면 어떡해!!
웅성거리는 반 아이들 속에, 못 참겠다는 피식거림이 중간중간 튀어나온다. 중요한건, 세희의 잘못된 증언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
“부반장인 저에게 출석을 부탁하고! 배를 잡으면서!”
“잽싸게 뛰어서 화장실로 달려가는 모습까지 제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더 이상 공식화시키지 말라고 세희에게 그만하란 의미로 두 손을 안 된다고 흔들었는데, 또 그걸 좋은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세희도 내 쪽으로 손을 살짝살짝 흔들고 있었다.
'아냐 그런 의미가 아니야!! 선생님 그런거 아니에요!!'
놀란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던 선생님께서, 잠깐 멈칫하며 멀쩡한 출석부를 한 번 훑으셨다. 갑자기 들어온 급성설사에 당황하셨는지, 헛기침을 한 번 하셨고, 생리현상은 나쁜게 아니란걸 얘기하셨다.
“아, 그랬니? 그러면 어쩔 수 없었겠네.”
여차저차 넘어가려 하시는 것 같았는데, 세희가 3절을 읊었다.
“중간에 제가 양호실에서 약까지 운반해 줬습니다!”
참던 웃음들이 풉하고 전부 터져나왔고, 심지어 나까지 녀석이 그랬다고 상상하며 ‘풉’거리고 있었다.
‘아니야, 나 뭐하는거야!!!’
잘 못 되었다는걸 다들 알아주길 바랬는데, 다들 세희의 말이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분위기에 당황해 엎드린 채 빼꼼하며 눈치를 보는 나에게, 세희가 나만 볼 수 있도록 뒷짐을 지며 엄지를 치켜들고 있었다.
세희는 정말 진심으로.. 스스로가 잘했다고 생각하는 걸까.
나도 모르게 막말이 튀어나왔다.
‘…저녀석, 죽일까.”
***
세희의 매우 쓸모없고 필요없이 자세한 증언으로, 나는 허스키의 탈을 쓰고 책상에 엎드려 강제 핸디캡을 받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점이 있다면, 선생님께서 세희의 소설에 세뇌되었는지, 결과적으로 녀석의 출석을 인정해 주셨다. 심각한 부작용이 있다면, 반 아이들이 허스키에게 타이틀을 붙여주었다는 것.
아주 귀여운 별명.
[..설사반장.]
그 타이틀을 듣자마자 나는 진심으로 녀석에게 죄송하고 미안해졌다. 이걸 바라고 녀석의 흉내를 냈던게 아니었기에, 부작용이 너무 강력해서, 되려 녀석에게 뭔가 더 주고 싶었다.
내 결석 부분도 세희가 어떻게 해보겠다고 했으나, 이젠 아무 생각도 안 들었다. 그렇게 담임선생님의 담당 과목수업이 끝났고, 종소리 이후 쉬는시간이 돌아왔다. 세희는 교무실에 갈 일이 있다보니, 잠시 자리를 떠났다.
세희가 가고나서, 나는 더욱 더 죄책감에 시달렸다. 녀석이 내일 학교에 오면 수근덕대는 아이들을 발견하고 이상함을 느끼겠지. 거기에, 누군가가 설사반장을 흘리면, 녀석이 얼마나 삐걱일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아, 진짜 녀석한테 미안해서 어떡하냐.."
한참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가까이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안돼. 다가오지마.
..이 상황에서 녀석의 역할극까지 하기엔 무리가 크다..!
그대로 엎드린 자세를 유지한 채, 당장 사라지라고 마음 속으로 외치며. 다가오면 나쁜일이 일어날거라고 주술을 걸었다.
'나한테 더 다가오면 너희 오늘 새끼발가락에 모기물린다.'
내 주술이 먹혔는지, 다가오던 발걸음이 한 분단 정도를 사이에 두고 멈췄다.
"반장, 생각보다 완벽한 애 아니었나봐?"
"왠 걸, 화장실에 오전 내내 박혀있었대잖아."
"시원했을까?"
뭐야, 저 애들 뭐라는거야. 다 들리는데 자신들끼리만 말하고 있다는 듯 웃고있는 이중적인 목소리의 아이들.
허스키 이녀석, 나로 모자라서 다른 여자애들까지 적으로 만들었나보다. 녀석 성격이 좋진 않다는거 알긴 알지만, 저런식의 행동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야, 너희 뭐라고..."
나도 모르게 화가 올라와 숙였던 고개를 들어올리고 소리를 내려했는데..
비웃는 줄 알았던 여자애들의 목소리가, 갑자기 귀엽다는 의미의 설렘가득한 미소로 바뀌어 있었다.
'..응?'
"그래서 더 좋은 거 있지."
"맞아 맞아. 인간미 가득한 모습까지 있다는거 아니야."
"배가 얼마나 아팠길래 그랬을까.. 진심 나까지 슬퍼진다."
뭐지. 내가 들은게 대체 뭐지. 나쁜말인줄 알았던 딱딱함이, 알고보니 부드러운 액체였다니.
허스키 녀석. 적이 아니라 주주들을 선임해놓았나보다.
'무서운 놈. 투자자들이 이렇게 많아서야, 마음대로 행동하지도 못 하겠구만.'
그냥 이대로 엎드려서 하루를 보내는게 제일 좋을것 같단 생각이 들어, 아무것도 하지않고 가만히 있는 것을 선택했다.
거의 완벽하게 마무리 되어가는 이 상황이 빨리. 순조롭게 지나가길 바라고 있었는데..
큰일이다. 방광에 차오른 액체가 당장 이곳에서 일어나 빨리 특정구역을 가라며 소리치고 있다.
"어떡해. 나 화장실 가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