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잔나와 다니엘이 돌아간 뒤, 캐런은 화장실에 들어가 샤워를 하려고 원피스 앞단추를 끄르면서 자신의 배를 보았다. 거기에는 긴 칼자국이 있었다. 캐런은 기겁해서 비명을 질렀다.

　“엄마, 왜 그래?”

　캐런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애쉴리가 생쥐처럼 달려와 욕실 문을 쾅 열어젖혔다. 캐런은 옷을 벗다 말아서 절반 나신인 채로 아이를 마주했다. 까닭 모르게 굉장히 수치스러웠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다쳤어?”

　애쉴리는 다가오려 했으나, 캐런은 옷을 추슬렀다.

　“아니야, 그냥 잠깐…… 놀랐어. 별 일 아냐, 페이스한테 가 있어. 씻고 나갈게.”

　애쉴리는 전혀 믿지 않는 듯했지만, 캐런이 실비아의 못마땅한 표정을 흉내 내서 눈썹을 찡그리자 어깨를 움츠리고 나갔다. 캐런은 샤워를 하면서 자신이 아이를 낳은 여자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가슴이 묵직하게 커졌고, 골반도 넓어진 것 같았다. 그리고 부정할 수 없는 칼자국까지.

　마법부에서는 귀중한 인재인 자신이 죽지 않도록 출산 시 치유 마법사를 동반시켰을 텐데, 그러고도 칼자국이 이 정도면 죽음에 가까웠을 것이다. 캐런은 비누거품을 물로 씻어내면서 소리죽여 울었다. 뭔지 모르지만 뼈저리게 억울했다. 마력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무언가를 몽땅 빼앗긴 것 같았다.

　“엄마, 잘 씻었어?”

　샤워 가운을 입고 나오자 애쉴리가 반색하며 달려들었다. 캐런은 어색하게 애쉴리를 안아준 뒤, 쉰다는 핑계로 페이스를 딸려 내보내고 싸늘한 방에 혼자 남았다. 캐런은 나지막하게 혼잣말을 했다.

　“이제부터 나는 생각을 할 거야,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내가 아무리 미쳐 있었다고 해도 나는 나였어. 그러니까 나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결정적 정보를 보관했을 거야.

　마력이 있었다면 은폐 마법진으로 남겼겠지. 하지만 이제 난 마력을 못 써. 내 마력이 차근히 소멸해간다는 건 내가 가장 잘 알았을 거야. 그러니 물리적인 방법, 혹은 사람을 통해서 내가 꼭 알아야 할 사실을 보관했을 거야. 나는 나의 사고를 추적해봐야 해.”

　캐런은 벌떡 일어섰다. 어디부터 뒤질까? 일단 화장대 서랍을 열었다. 빈약한 장신구 두어 개와 고리타분한 핀들이 굴러다녔다. 신경 쇠약이었던 캐런은 몸치장할 여력이 없었겠지. 화장수 병을 열어 보니 퀴퀴한 냄새를 풍겼다. 몽땅 변기에 쏟아 버렸다.

　옷장을 열자 좋게 말해 검소하고, 나쁘게 말해 초라한 드레스 몇 벌이 걸렸다. 외출할 일이 좀처럼 없었을 테니까……. 서랍에는 말아 갠 실내복만 가득했다. 헐렁헐렁하고 옷맵시 하나 없는 환자복 같은 드레스들. 전부 회색, 쥐색, 베이지색이었다. 환자가 뭘 쏟거나 토해도 빨기 쉬운 면직물. 이 드레스를 입고 서서히 죽어가던 머리를 산발한 캐런 애나 애벗이라니, 끔찍스러웠다.

　그러나 지금 캐런은 마법의 세계로 도망칠 수가 없었다. 애쉴리의 존재, 자신의 배에 남은 흉터는 현실이었다. 캐런은 손을 허공에서 부드럽게 움직여 보았다. 일생토록 훈련한 익숙한 동작으로. 그러나 마력의 진동은 전혀 없었다.

　캐런은 입술을 짓씹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마법을 모르는 나는 어떻게 행동하는 사람이지?'

　캐런은 카펫에 웅크리고 앉았다. 자신과 가장 가까운 비마력자인 오빠 윌리엄을 떠올렸다. 가까운 친구들은 전부 마력자였으므로. 윌리엄이라면 어디에 물건을 숨길까?

　소년 시절 윌리엄은 쿠키 틴 케이스에 여배우들의 야릇한 사진과 새총, 낡은 놋쇠 해군 앰블럼 등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넣어 숨겼다. 남자애들은 물건을 애지중지하는 걸 창피스러워하니까. 캐런은 대륙 국기 무늬 쿠키 상자를 뒤지며 깔깔 웃었다. 윌리엄도 캐런의 일기장을 뒤졌으니까 피장파장이었다.

　“넌 무슨 일기에 헛소리만 써 놨냐?”

　“그러는 오빠는 닳아빠진 해군 배지는 뭐에 쓰려고 모셔 놨어? 진짜 유치해, 나보다 나이도 많으면서.”

　얼굴이 빨개진 윌리엄은 펄펄 날뛰었다.

　“뭐, 내가 유치하다고! 캐런 너야말로 유치 대마왕이면서! 너 바티 좋아하지, 유치해 빠진 암호 따위를 쓰면 내가 모를 줄 알았냐?”

　캐런도 얼굴이 빨개져서 고성으로 대거리했다.

　“모함하지 마! 그러는 오빠는 옆 동네 수잔나 짝사랑하면서, 내가 모를 줄 알고! 수잔나 닮아서 배우 제인 폰티 사진 모으면서!”

　“뭐라고, 이게 정말!”

　윌리엄은 캐런에게 달려들어서 등짝을 팼고, 캐런은 윌리엄의 배를 팔꿈치로 찍었다. 둘은 한 치 봐주는 것 없이 왁살스레 싸운 뒤, 엄마에게 잡혀서 나란히 무릎을 꿇고 벌을 섰다. 실비아는 스튜를 젓던 국자를 휙휙 휘두르며 둘을 혼냈다.

　“엄마가 없으면 너희 둘밖에 없는데, 왜 맨날 싸우고 난리니!”

　“엄마가 왜 없어!”

　캐런은 빽 소리를 질렀다. 실비아는 질린 표정을 짓더니, 마력으로 국자를 휙 허공에 띄워 남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국자는 둥실둥실 떠 있었다. 실비아는 허튼 일에 마력을 소비하는 법이 없었지만, 둘을 혼낼 때는 예외였다.

　“잘 들어, 캐런과 윌리엄, 윌리엄과 캐런. 다른 애들은 포크와 나이프처럼 두 분의 부모가 계시지만, 너희는 이 국자처럼 나 하나뿐이야! 내가 없으면 너희에게는 서로뿐이라고. 계속 싸우면 내가 천국에서 이렇게 꿀밤을 날려 보낼 테니까!”

　국자는 허공을 날렵하게 날아 윌리엄과 캐런의 머리를 연달아 콩콩 때린 뒤, 엄마의 손으로 돌아갔다. 둘은 아픔도 잊고 환호했다.

　“엄마, 또 그거 보여줘, 국자로 때리는 거! 캐런 한 번 더 때려!”

　“싫어, 윌리엄 때려줘! 윌리엄이 더 잘못했어!”

　“됐어, 이 말썽쟁이들아! 일어나서 스튜나 먹어!”

　실비아는 손에 든 국자로 둘을 팡팡 때려 일으켜 스튜를 퍼 먹였다. 행복했었는데…….

　캐런은 기억에서 벗어나 마루의 카펫을 돌돌 말았다. 마루를 자세히 살피자 그 시절 윌리엄이 표시했던 것처럼 널조각을 일부러 떼어낸 하얀 자국이 보였다. 그 마룻널을 밟아 지레처럼 올리자 아래에 쿠키 틴 케이스가 있었다. 엄마 실비아랑 오빠 윌리엄이랑 버터 쿠키를 나눠 먹던, 버터링 쿠키가 딱 스무 개 들어가는 상자.

　쿠키 케이스가 리뉴얼된 듯, 국기 무늬가 아니라 귀여운 소년과 소녀가 나란히 앉아서 서로에게 쿠키를 먹여 주는 그림이었다. 캐런은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신문 기사 스크랩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맨 위에 놓인 기사의 거대한 활자체가 눈에 들어왔다.

　[흑거미 로즈 매닝, 고디러 공작을 죽였나?]

　밑에는 여자의 타원형 사진이 있었다. 흑백 사진이지만 굉장한 미인임을 한눈에 알아챌 수 있었다. 검은 상복 드레스를 입고 하얀 목깃에는 카메오 브로치를 달았으며, 머리카락은 곱고 우아하게 올려 사슬이 치렁치렁 늘어진 호화로운 보석 핀으로 장식했다.

　칠흑처럼 검은 머리, 참숯처럼 새까만 눈동자. 눈빛은 당당하다 못해 청순했다. 살인 용의자인 여자는 아름답고 순수했다. 대마법사 엘린 칸 마나타가 처단한 검은 악마, 대륙을 위협하던 악의 섬의 주인 루 라나 에다처럼.

　그녀는 자신만만하게 생긋 웃고 있었다. 로즈를 포함한 세상 전체에 선전포고를 하는 듯.

　‘나는 이런 여자야. 감히 나에게 덤빌 수 있겠니?’

　성인이 된 뒤에 비마력자에서 마력자로 각성했는데도 단번에 1등급 마법사가 되었고, 많은 남자들을 거쳐 이제는 고디러 공작의 유산을 반이나 차지한 여자. 로렌스가 결혼하겠다고 공언한 여자. 캐런은 사진을 잠시 응시하다가, 부스럭부스럭 신문 스크랩을 뒤적였다. 죄다 로즈 매닝의 기사였다. 특집이 아니라 단신까지 깨알같이 모았다. 가끔 글자가 군데군데 시커멓게 먹칠되어 있었다. 정말 기이했다.

　‘나는 왜 로즈 매닝의 기사를 수집했지? 로렌스가 그녀와 결혼한다고 해서 질투로? 설마…….’

　그 때 1층에서 누군가 들어오는 인기척이 들렸다. 캐런은 서둘러 쿠키 상자에 스크랩들을 욱여넣고 마룻널을 원래대로 복구한 뒤, 카펫을 도로 굴려 깔았다.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거리낌 없는 남자 구두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