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
로렌스의 목소리에 뒤쪽에 서 있던 하녀가 재바르게 대답했다.
“예, 주인님.”
“애쉴리 좀 데려가.”
“예. 애쉴리 아가씨, 가시지요.”
애쉴리는 몹시 불안한 듯 캐런을 쳐다보고서 커다란 눈을 껌뻑이며 울먹였다.
“엄마…….”
캐런은 허겁지겁 물러섰다. 몸이 화장대에 부딪쳐 아팠다. 자신은 저 아이의 엄마가 아니었다. 저 아이와 자신이 닮은 것은 사실이지만, 세상에는 생판 남남이라도 닮는 경우도 있다.
“아가씨, 마님은 지금 편찮으세요. 그러니까 쉬게 해드려야 해요. 저랑 가서 아침 식사 하세요.”
페이스가 애쉴리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으며 달랬다. 애쉴리는 휘휘 고개를 저으며 페이스의 손을 떼어내고 강하게 의견을 피력했다.
“엄마가 어제부터 많이 아프단 말이야, 내가 곁에 있어 줘야 해!”
캐런은 그제야 애쉴리의 오른손 가운데손가락에서 빛나는, 아이들이 갓 마력을 인지했을 무렵에 끼는 앙증맞은 자수정 카보숑 반지를 보았다. 이 아이는 마력자다!
캐런은 애쉴리의 모습에서 자수정 반지를 끼고 고양이를 안고 노는 자신의 어린 날 사진을 떠올렸다. 무서웠다. 몸이 벌벌 떨렸고, 자꾸 허수아비처럼 휘청거리게 됐다. 애쉴리가 절박하게 외쳤다.
“페이스, 나 엄마랑 있어야 해, 엄마가 아프…….”
“애쉴리 애나 콜드웰, 지금 아버지 장난하는 거 아니다. 어제부터 내가 말했지, 주제넘게 나불대며 나서지 말라고! 어른들끼리 의논해야 한다는데, 버르장머리 없이 끼어들 거냐? 계속 그딴 식으로 행동할래, 돼먹지 못한 놈의 핏줄처럼?”
로렌스가 팔짱을 끼며 우렁차게 호통을 쳤다. 캐런은 그의 태도에 또 놀랐다.
‘작고 어린 아이에게 저런 폭력적인 말투와 태도라니…….’
자신이 알던 로렌스 콜드웰은 식당의 웨이터에게도 언성 한 번 높이는 법이 없었다. 누구도 부당하게 대우하는 법이 없었고, 아이들과 작은 동물을 좋아했으며, 작은 새들에게 빵을 나눠 주면서 햇살처럼 웃었다. 캐런이 알고 사랑했던 로렌스는 허상이었을까?
애쉴리는 로렌스의 엄포에 움츠러들더니, 무력한 동물 같은 태도로 캐런을 쳐다보았다. 캐런은 아이의 눈빛에 호응해 줄 여력이 없었다.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하거나 감당할 힘도 없는데. 페이스가 애쉴리의 손을 덥석 잡아끌었다. 애쉴리는 캐런을 자꾸 돌아보며 작은 양처럼 끌려갔다.
“아침 먹고 다시 마님 보러 오세요, 아가씨?”
시녀 페이스는 이 콩가루 집안 상황에도 꿋꿋했다. 애나는 로렌스에게서 충분한 설명을 듣지 못할 경우 페이스를 호출해 상황을 파악해 보기로 결심했다. 물론 이건 꿈일 확률이 높다. 마법사들은 원래 악몽을 자주 꾼다.
혹시 꿈이 아니라면 자신을 속이기 위한 사기극일 수도 있다. 외모가 캐런과 쏙 닮은 아이 정도야 전국에 수배하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사기극을 기획해서 얻는 바가 뭐지? 로렌스는 그새 정장 안주머니에서 어떤 서류를 꺼내 캐런에게 건넸다.
“이혼장.”
캐런은 서류 최상단에 박힌 글씨를 읽었다. 그 밑에는 로렌스의 서명이 자리했고, 자신의 서명 자리는 비어 있다. 어젯밤 하얀 웨딩드레스를 벽에 걸고 내일의 결혼식을 고대하며 잠들었었다. 그런데 아침에 눈뜨자마자 이혼장을 읽고 있다. 눈을 올려 확인한 벽시계는 오전 9시 40분 즈음을 지나고 있었다.
로렌스는 만년필을 꺼내어 건네려 했으나, 캐런은 종이를 콱 구겨서 멀찌감치 던져 버렸다.
“뭐 하는 짓이야.”
로렌스의 반듯한 아미에 주름이 갔다. 캐런은 차갑게 대답했다.
“나는 결혼하지 않았으니, 이혼할 이유가 없어. 당신은 내 남편이 아니야.”
“당신만 쏙 빼닮은 딸 애쉴리를 보고도 못 믿겠단 말이야?”
“어디서 데려 왔나 보죠. 이 대륙을 다 뒤지면 나 닮은 애 하나쯤 없겠어?”
로렌스가 코웃음을 쳤다.
“새로운 회피 전략인가? 나랑 이혼하기가 그렇게 싫어?”
“착각하지 말아요. 오늘 아침 당신이 보인 태도는 당신이 내 남편이라면 즉시 자살하고 싶을 정도니까. 이렇게 폭력적이고 저질스러운 남자인 줄 알았다면, 절대로 당신에게 내 약혼자라는 이름을 부여하지 않았을 거야.
만약 내가 당신 아이를 낳았다는 게 사실이라면, 나는 인생을 잘못 살았다고 어머니 무덤에 참배 가서 엎어져 울 계획이에요.”
로렌스의 얼굴이 캐런이 단어를 뱉을 때마다 시시각각 일그러지더니, 또 팔을 높이 올렸다. 캐런은 어깨를 굽히며 움츠러들었다. 자신이 왜 이러는지 몰랐다. 정신은 분명 부당한 폭력에 저항하라고 하는데, 육체는 알아서 긴다.
자신은 이런 비굴한 사람이 아니었다. 마법이라는 힘이 있고, 꿀릴 것 없는 두뇌가 있었다. 마법사로서 순직한 국가 유공자인 어머니의 피를 이어받았다. 학교에서도 언제나 상위권이었고, 마법부에서 1등급 마법사로 재직했다. 그런데 왜…….
로렌스는 캐런의 표정을 보더니 손을 거둬들였다. 그는 아주 크고 센 괴물처럼 보였다. 주먹을 주무르면서 목을 이리저리 비틀어 뚜둑뚜둑 소리를 내는 태도도 길거리 깡패 같았다.
“어휴, 이걸 진짜. 어젯밤에 그 난리 지랄을 치더니, 이젠 아예 결혼 전으로 돌아가 기억이 없어졌다고? 덕분에 아주 기가 팔팔 살아서 입을 놀려대네, 어? 좋아, 오늘은 일단 봐 주지.
하지만 나하고 이혼 안 하고 버텨 봤자 좋을 것 하나 없어! 나도 너 만만치 않게 네가 역겹거든, 이 염치없는 여편네야!”
캐런은 경악하면서 입을 벌렸다. 이런 천박한 말을 지껄이는 남자였다니! 약혼 후에 절친한 친구 애거서가 머뭇대면서 귀띔했던 말이 기억났다.
“캐런, 아무래도 로렌스 콜드웰은 네가 생각하는 만큼 좋은 남자가 아닌 것 같아. 그의 행동거지를 잘 살펴봐. 염탐 마법이나 추적 마법을 써서 그의 행적을 살펴보는 것도…….”
“애거서,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사랑하고 신뢰하는 연인 사이에 그런 뒷조사를 하면 안 되지.”
캐런은 정색했다. 애거서는 긴 한숨을 쉬더니 캐런의 손을 도닥였다.
“원칙적으로는 그러면 안 되지. 네 말이 다 맞아. 그런데 세상엔 나쁜 남자들이 너무 많아, 캐런. 그런 남자와 일단 결혼하고 나면 벗어나기가 너무 힘들어. 아이라도 낳으면 더하지.
우리는 국가를 위해서 봉사하면서는 조금의 위험도 남기지 않고 철저하게 행동하지. 그런데 왜 개인적인 삶에서는 정도만을 가야 해? 캐런 너는 외모와 조건이 좋잖아. 그가 너를 유혹하기 위해서 진실한 그의 모습을 감추고 있을지도 몰라.”
“애거서, 로리는 그런 사람 아니야. 그는 수줍은 데다 얼굴이 잘생겨서 오해 받는 거야.”
캐런은 굳건하게 말했고, 애거서는 두어 번 더 설득을 시도하다가 결국 포기했다.
“그래, 어쩌면 내가 잘못 오해하는지도 모르지. 그에 대한 소문도 와전된 것이면 좋겠네.”
“내가 결혼하면 애거서도 자주 놀러 와, 셋이 친해지자. 애거서도 곧 로리를 좋아하게 될 거야! 애거서의 애인이 생기면 그 사람까지 함께 넷이서 대륙 마법 순례를 가자!”
캐런은 명랑쾌활하게 제안했다. 애거서는 웃었다. 그 미소는 떨떠름했다. 마치 잘못 우려진 홍차처럼.
‘이 남자가 정말 나의 로리라고……?’
그토록 선량하고, 자신을 존중하던 남자 로리 콜드웰. 매너에 하나 흠 잡을 데 없고, 조각처럼 잘생겨서 거리에서 팔짱을 끼면 으쓱해지던 나의 약혼자. 추억 속의 그 남자는 야비하고 천박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왜, 새삼 내 남자다운 모습에 반했어? 유감이지만 난 새로 결혼할 사랑하는 여자가 따로 있어서, 네 방탕한 암캐 기질에 어울릴 생각은 없어.”
캐런은 방탕한 암캐라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그런 말을! 캐런은 그가 했던 것처럼 팔을 올려 그의 뺨을 갈기려 했다. 그러나 그가 캐런보다 더 빨랐다.
“……악!”
그는 캐런의 손목을 잡아 조이고 비틀어 고통을 준 뒤, 그녀를 내동댕이치고 침 뱉는 시늉을 하더니 나가 버렸다. 캐런은 비틀대다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미지근한 눈물이 흘러나왔다.
‘꿈이라도 이건 정말 너무하잖아…….’
오른손에는 여전히 청금석 반지가 없었다. 마력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리 힘을 끌어내려 이를 악물어도 마력의 미미한 떨림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빈껍데기가 되었다, 로렌스 콜드웰의 말대로.
***
캐런은 무력하게 침대에 앉아 이 악몽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벽시계가 아무리 초침, 분침, 시침을 움직여도 악몽은 끝나지 않았다. 온 것은 자신과 꼭 닮은 아이 애쉴리였다.
“어, 엄마…….”
페이스와 함께 들어온 애쉴리는 캐런을 간절히 불렀으나, 캐런은 무시했다. 저 아이를 또 쳐다봤다간 정신이 몽땅 무너질 것 같았다. 소리죽여 흐느끼는 소리도 무시했다. 페이스가 애쉴리를 달랬다.
“아가씨, 마님이 많이 아프세요. 지금까지도 많이 보셨죠, 마님이 아프신 거. 주인님이 어떻게 해야 된다고 하셨죠?”
“가만히, 놔두라고…….”
“그래요, 안 그러면 마님이 또 멀리 가버리실 수도 있어요. 아주 멀리, 오래 동안요.”
캐런은 그 말의 무시무시한 억양에 놀라서 페이스를 쳐다봤다. 페이스는 무표정했지만 마치 ‘무서운 괴물이 널 잡아먹을 거야.’ 라는 괴담을 말하는 듯한 어조였다. 애쉴리는 겁을 먹은 듯 숨을 헐떡이더니 허둥지둥 방을 탈출했다. 캐런과 페이스만 남았다.
“페이스라고 했지?”
“예, 마님.”
“어린 아이를 그렇게 윽박지르는 버릇은 주인이라는 남자에게 배웠나?”
예상했던 것보다 더 불쾌한 어조가 나왔다. 페이스가 손을 모아잡고 예를 표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마님이 피곤하실 때는 마님의 컨디션을 가장 우선시하고 있습니다.”
“내가 피곤하다고?”
“그렇습니다. 신경 쇠약이시라는 진단이 있었습니다.”
캐런은 페이스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스물 너댓 남짓, 메이드복에 잿빛 머리를 깔끔하게 땋아 올리고 녹갈색 눈동자가 반짝이는 수수한 미모였다. 얼굴은 인형처럼 표정이 없었다. 이 아이는 정직한가, 아니면 거짓말쟁이인가? 로렌스 콜드웰에게 충성하는가, 아니면 나를 우선시하는가?
“그래, 내가 신경 쇠약이란 말이지.”
“그렇다고 집에 왕림하신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기억이 나지 않으시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전에도 조금씩 이러실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도 애쉴리 아가씨를 잊어버리셨습니다.”
캐런은 두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했다. 반지가 없는 손의 감촉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래, 그렇다면 내 신경과 기억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내 명령을 들어라.”
페이스는 얌전히 기다렸다. 캐런은 명령했다.
“피핑턴 하우스의 수잔나 에벗 부인을 모셔 와. 내가 만나자 했다고 하고. 신경 쇠약에는 과거에 친밀하게 지내던 친척을 만나는 것이 도움이 되겠지?”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페이스는 무릎을 굽혀 예를 표하고서 나갔다. 캐런은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꿈인지 생시인지, 올케 수잔나를 보면 확실해지겠지. 곧 노크 소리가 들리고 페이스가 들어왔다. 빵과 김이 나는 수프, 물과 찻주전자가 있는 쟁반을 든 채였다.
“내 명령은 어떻게 하고 왔어?”
캐런이 나무라자 페이스가 나무랄 데 없는 태도로 대답했다.
“1층에 내려가서 하인 노아에게 전달했습니다. 그가 곧 에벗 부인을 모시고 올 겁니다.”
“그래도 되나?”
‘로렌스가 막지 않느냐’ 라는 뜻을 알아챈 페이스가 설명했다.
“주인님은 낮에 마님이 하시는 활동을 막으라고 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일단 저는 마님께 아침 식사를 드려야 합니다. 식사를 제때 하지 않으시면 더 아프실 테니까요.”
페이스는 ‘명령하지 않은 영역’ 에 대해서는 자유롭게 재량을 발휘하는 시녀인 듯했다. 페이스라는 이름답게 신뢰할 만한 아이 같았다. 다만 애쉴리를 건조하게 다루는 태도가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아이 유모는 없어?”
캐런은 목이 타서 물을 꿀꺽꿀꺽 마신 뒤, 김이 나는 감자 수프를 한 수저 뜨면서 물었다. 그 애는 절대 자신의 아이가 아니다, 다만 작은 아이가 돌봐주는 사람 없이 방치되는 것이 걱정되는 것뿐이야……. 페이스가 무감하게 대답했다.
“없습니다. 유모들이 애쉴리 아가씨를 싫어합니다. 애쉴리 아가씨도 유모들을 싫어합니다. 마님만 좋아하십니다. 저도 약간은 좋아하십니다.”
캐런은 억지로 감자 수프를 삼켰다. 생각하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했다. 혹시 체력이 없어서 마력이 사라진 것일지도 모른다. 입 안이 모래알처럼 깔끄러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