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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Record Of U
작가 : 저녁의나팔수
작품등록일 : 2019.9.6

"세상의 끝이 오지 않아 난처해하는 인류가 있다고 한다면 믿겠는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세상에 두 사람이 있다. 이 세상에 두 사람만 남았다는 뜻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끝이라고 부르는 것이 언제 그들을 찾아올지 두려워하며 벽 속에 숨어 살고, 앞으로도 오지 않을 거라며 아랑곳없이 살아가는 이들도 무수히 많다.
이 둘은 어느 쪽인가? 적어도 첫 번째 부류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두 번째라고 하기도 애매하다. 그들은 배달부다. 악어가 끄는 배를 타고 아직 덜 끝난 세상의 벽과 벽 사이를 오간다. 화물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오가고, 이야기는 시작과 끝의 사이를 오간다.

모든 이야기에는 끝이 있다. 끝과 함께 이야기를 담고 있던 세계도 사라진다. 그렇다면, 그 세계에서의 모든 이야기들은 대체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선장은 아직 대답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Tape 1-9
작성일 : 19-11-05 03:35     조회 : 197     추천 : 0     분량 : 158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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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하루 일과의 마무리와 함께 급격히 달아올랐던 밤의 거리는, 어떤 시각을 지나고 나자 마찬가지로 급속히 식어갔다. 그 이유는 당연히, 살아가야 할 날이 오늘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야말로 집으로 돌아가 정말로 ‘개인적인’ 시간을 갖길 원하는 이들도 많았으니까.

 

  이런 거리의 질서에서 예외를 찾자면, 우선 휴일이든지 비번 등으로 내일의 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 그들은 좀 더 늦게, 아니면 내일 아침까지라도 이곳에서 시간과 돈, 그 외의 여러 가지를 불태울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 한 술집의 테이블에 혼자 엎어져 있는 저 여성의 경우를 참조하면 좋을 것이다. 이름은

 

 “린다! 살아 있어?”

 

  흠. 어쨌든 이야기를 주의 깊게 따라왔다면, 그녀가 누구인지는 금방 알 수 있다. 이름이 아니라 ‘부하 직원’이라고 부르는 편이 좀 더 기억해 내기는 쉽겠지. 조문객마냥 근처를 둘러싸고 있는 빈 술병들 사이에서 테이블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꼴이 설득력은 전혀 없겠지만, 보이는 것과 달리 그녀는 멀쩡히 살아ㅇ

 

 “죽었네. 적어도 두 번은 죽었어.”

 “야 임마, 사람이 말을 할 때 끊지 좀 말라고.”

 

  아마 같은 직장의 패거리라고 생각되는 무리들이 미동도 하지 않는 그녀를 쿡쿡 찔러보지만, 반응이 없다. 다들 이 밤의 다음 코스로 자리를 옮기거나, 아니면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그녀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정도는 확인해 보려는 거겠지.

 

 “냅둬. 걔 아마 내일까지 안 일어날걸?”

 “그럼 집까지 날라다 놔야 하나?”

 “아니, 넌 못해.”

 

  그 말대로, 그녀가 자리에서 얼굴이라도 들게 만들 만한 사람은 그들이 알기에도 딱 한 명밖에 없었다. 문제는 그들이 알기에도 그 한 명을 여기도 데려오기 위한 그럴 듯한 구실이 단 하나도 없다는 거다.

 

 “네가 갈래?”

 “싫어. 이 시간이면 벌써 집에 갔을 걸.”

 “아니면….”

 “아니면 뭐?”

 “네가 말해.”

 “싫어.”

 

  아무리 얼굴이 붉게 달아오를 만큼 취했기로서니, 방벽 바깥까지 들락거리면서 기어코 제 시간에 데이트를 성사시킨 그 남자를 억지로 끌고 올 만큼 배짱과 잔악함을 겸비한 인재는 그들 가운데에는 없었다. 만약 있다면 지금 여기가 아니라, 집에서 푹신한 소파에 앉아 아이들의 눈물이나 홀짝거리고 있겠지.

 

 "에휴, 얘도 참."

 "자업자득이란 말도 있지만, 그래도 좀 그렇긴 하네."

 

  기상 위성에 입력된 계절이라는 것이 두 바퀴를 돌 동안, 그들의 직장에서 보이고 있던 어떤 징후에 대해 알아야 할 것들은 이미 다들 알고 있었다. 모르는 것은 남의 문제에는 귀신같으면서, 정작 자기가 관련된 일에는 둔하기 짝이 없는 한 명 정도겠지. 그러니까, 오늘 하루 동안 린다가 얼마나 괴로운 일을 겪었는지 모르는 사람은 이 자리에 한 명도 없다는 거다.

 

  결국 바텐더에게 좀 지켜봐 달라는 말을 남기고 그들은 가게를 나간다. 이대로라면 더 마실 기분은 나지 않을 게 분명하니, 집에나 가야 할 것 같다. 그녀가 허튼 짓이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지만, 어쩔 수 없다. 다름 아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다. 주위에서 건드려 봐야 아픔만 커질 뿐이다. 그들에게나, 그녀에게나. 또는 지금 이 상황 따위는 꿈에도 모르고 있는 그에게나.

 

 *

 

  지금으로부터 몇 시간 전, 그녀는 회사의 휴게실에서 한 남자의 옷차림을 봐 주고 있었다.

 

 “좀 더 바짝 올리세요. 여기가 헐렁하게 풀어지면 얼마나 보기 싫은지 아세요?”

 

  아무래도 답답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남자는 고개와 어깨를 부자연스럽게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혹시 사이즈가 안 맞는 거 아닐까?”

 “어린애 같은 소리 하지 말고요. 자, 이쪽 보고 똑바로 서 봐요.”

 

  이 일을 하기 전, 잠시 패션 쪽의 일에 몸을 담았던 것이 오늘 여기에 불려나온 이유였다. 나쁜 선택은 아니다. 거절해야 할 만한 부당한 지시도 아니고. 권위자라고 할 만 한 건 못 되지만, 적어도 정장을 제대로 입는 법 정도는 기본 교양으로 배웠었다. 그럴 만한 자리에 그럴 만한 차림을 하고 나가면서, 예절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에게 제대로 가르침을 받고 나가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게 업무가 아닌 사적인 자리라고 해도, 이 정도의 도움은 받아도 될 만큼 이 남자는 주변에서 고루 인망을 얻고 있다.

 

  그게 전부다. 특별히 불만 같은 게 나올 구석도 없고 이런 일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셔츠의 깃이 제대로 세워졌는지 꼼꼼히 체크하면서도 린다가 느끼고 있는 복잡하면서도 불쾌한 기분은, 그런 걸 느끼는 게 허락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새어 들어오고 마는 어떤 감정으로 인한 것이었다.

 

 *

 

  사람들이 게으르고 무기력해진 것은 전쟁 이후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지만, 그 전이라고 해서 보기 드문 것도 아니었다. 린다의 경우에는 그녀의 부모가 그랬다. 항상 변변찮은 일이나 요행으로 만지는 푼돈만 바라보고 살던 그들이 유일하게 열정을 가지는 일은, 술에 취하거나 자신들이 얼마나 불행한지 객관적인 관점에서 인정받으려 하는 것. 대개는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의 열정도 불러일으키는 구조였다.

  린다는 그들이 원하던 아이가 아니었다. 그녀는 첫 번째 열정의 결과에 의해 태어난 아이였고, 언제나 두 번째 열정의 가장 뚜렷한 근거가 되었다. 그녀를 지우지도, 버리지도 못한 것은 부모로서의 정보다는 그 뒤에 따라올 비난과 죄의식 따위가 더 꺼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그런 그들이더라도, 린다는 다시 고르는 것 따위는 할 수 없는 가족의 마음을 얻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학교에서는 언제나 열심히 공부하여 좋은 성적을 내었고, 눈 밖에 날 만한 말썽 따위는 꿈도 꾸지 않았다. 학교와 이웃들 사이에서 그녀는 언제나 품행이 단정하고 부지런하며, 착하고 영리한 아이로 귀여움과 은근한 기대를 받으며 자랐다. 그러나 집 밖에서의 평가가 어찌했든, 그녀가 정말로 원했던 가족의 사랑은 끝내 그녀에게 주어지는 일이 없었다.

  그녀의 부모에 대해서는, 일정한 직업이 없었다는 게 정확할 것이다. 그들에겐 젊을 적부터 교류해 온 비슷한 꼴의 패거리들이 있었다. 힘들여 일이나 노력 따윈 하지 않고, 그럴싸한 궤변만 늘어놓으며 누군가에게 기생해 살아가는 자들 말이다.

  그들의 믿음에 따르면, 자신들에 대한 막연한 악의를 품고 있는 어떤 거대한 존재가 세상을 불합리하게 바꿔 놓았고, 그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힘 때문에 자신들은 궁핍하고 보잘 것 없이 사는 것이었다. 정작 그 세상, 혹은 자신을 바꾸려는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으면서 그저 자신들의 시대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라며, 이미 한참 흘러버린 시간을 시시한 일로 낭비하는 것이 그들의 주된 일과였다.

  허나 그런 짓에도 결국 질렸는지, 아니면 나름대로 머릿수가 모인 패거리에 헛된 자신감이라도 생긴 건지 그들은 모여서 나름의 무언가에 도전을 하기 시작했다. 적은 노력으로 큰돈을 만질 수 있는, ‘참신하고 기발’한 도전을.

 

  당연하지만 세상은 그것을 ‘범죄’라고 부른다. 린다의 부모가 철창에 갇히지 않은 것은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정도의 축에도 들지 못할 만큼 그 도전이라는 게 좀스럽고 황당무계한 것이었기 때문이리라. 아무튼 그 유일한 가족은 그녀가 가장 원치 않던 방식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아주 약간이지만, 그렇게 생긴 평판은 그녀 자신의 발뒤꿈치에도 묻어 때때로 어딘가에서 수군거리며 귀를 거슬리게 하는 소리가 들리도록 했다.

  감옥에 가지는 않았지만, 처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결과 린다의 가정은 전보다 더욱 초라하고 옹색하게 쪼그라들었다. 그리고 그 책임은 엉뚱하게도 그녀에게 돌려졌다. 원치도 않게 태어나, 무리한 돈벌이를 그들에게 강요했다는 게 이유였다. 그게 정당한지 부당한지 고민해 보는 것은 이제 의미가 없으리라. 아무튼 그 ‘벌’로써 린다가 치러야 했던 고통은 그녀의 몸과 마음이 자라날수록 그에 걸맞게 커지고 늘어났다. 그와 반대로 그녀가 자신의 가족에게 품고 있던 희망은 점점 줄어들고 희미해졌다.

 

  부모가 경제적으로 의지할 만한 대상이 못 된다는 것은 일찍이 알고 있었다. 때문에 어느 정도 나이가 차고 나서는 스스로 할 일을 찾아, 밥벌이도 할 만큼의 돈을 손에 쥐게 되었다. 돈이라고 하는 것이 사람을 움직이는 데에 무엇보다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것은 그 때에 알게 되었다. 그녀의 손에 돈이 쥐어져 있을 때 그들은 평소보다 더 부드러워지고, 그녀의 말을 오래 들어 주었다. 그걸 계속 쥐고 있는 한 뚜렷한 이유 없이 얻어맞는 일도 없었다.

  그런 그들을 한편으로는 경멸하면서도, 린다는 약간의 희망을 보았다. 자신이 좀 더 자라 가족을 온전히 부양할 수 있게 되면, 어쩌면 그녀가 바라고 있던 (이상적이지는 않지만)평범한 가족의 모습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하고. 비록 남을 매수(買收)한 것과 같은 가족이라도, 그녀는 바보 같을 정도로 혈육의 ‘정’이라는 것을 믿고 있었다. 때문에 그 날, 평소와는 사뭇 달랐던 집 안의 분위기에 그녀는 수상하게 여기는 대신 갑작스런 기적이 일어난 걸지도 모른다고, 그녀답지 않은 일생 최악의 착각을 하고 만 것이리라.

 

  아르바이트를 하던 곳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불길한 뉴스를 보고 걱정스러운 마음에, 서둘러 돌아와 집의 현관을 열자마자 익숙하지 않은 온기가 코에 스며들었다. 어머니. 당시엔 그렇게 불렀던 여자가 요리를 하는 걸 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썩 좋지는 않지만 음식이 조리되는 따뜻한 냄새가 부엌에서 흘러나왔고, 아버지와 어머니. 두 사람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마지막 기억조차 까마득한, 온 가족이 둘러앉은 저녁 식탁이 눈앞에 있었다.

  TV나, 아니면 다른 집에 초대받는 일을 통해 평범한 가족의 저녁 풍경이 어떤지는 대강 알고 있었다. 그것을 보면서, 항상 자신에게는 좀 더 늦게 주어질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것이 이토록 순식간에 현실로 다가오자, 집으로 돌아오며 머릿속으로 떠올렸던 온갖 끔찍한 생각들은 되새길 틈도 없이 부엌 창문 밖으로 빠져나가 사라졌다.

  우선은 가장 하고 싶었던, 밥을 먹으며 가족들과 즐겁게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어느 것 하나 대단한 것은 없지만, 린다는 그 날 학교에서의 일을 이야기했다. 사귀던 두 친구가 서로 크게 싸운 뒤에 토라졌고, 자주 고장 나던 사물함의 문이 결국 완전히 맛이 가 뜯어내야 했으며, 작년 IE사태의 피해자들을 위한 성금을 모집하는 사람들이 왔었고, 담임선생님이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르바이트에 가고 나서는 가끔씩 와서 치근대는 손님 덕에 골치가 아팠고, 말이 잘 통하는 신입이 들어왔다는 것 정도.

  두 사람은 린다의 이야기를 잠자코 들어주었다. 혼자서 재잘거리고 웃고 떠들다, 조금 무안한 기분이 들면서도 그녀는 행복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웃다가 그만 눈가에 고여 버린 눈물을 몰래 닦고 나서, 그녀는 어머니가 권하는 수프를 서둘러 입으로 옯겼다.

 

  어머니의 수프를 처음 먹어 본 감상은, 일단 그녀에게 솔직하게는 말하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지독하게 맛이 없었다. 제대로 젓지 않아 어지간히도 바닥을 태운 것 같았다. 어느 정도 나이가 차고 나서부터 그녀가 차려주는 밥상을 받는 일은 없었기에, 스스로 이것저것 하는 과정에서 조리에 대해서는 일가견을 갖추게 되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어머니를 데리고 함께 요리를 해 보자는 다음의 소망도 마음속에 잘 적어 두었다. 지금은 우선 다른 할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었다.

 

  하얀 입김을 뿌리며 달려온 밖의 거리는 추웠지만, 가족과 함께 있는 집 안은 따뜻했다. 정말로, 오늘은 난방도 제대로 틀어 놓은 것이다. 무언가 아직 밝히지 않은 좋은 일이 남아있는 걸까? 그런 달콤한 생각을 하며 씁쓸한 수프 한 숟갈을 또 목구멍으로 넘겼다.

 

  언제나 하던 긴장이 풀린 탓인지, 하루 동안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 같았다. 아직 더 앉아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지만, 그 동안 얼마나 피곤했던 건지 스푼을 들어 올리는 것도 할 수 없었다. 죄송하지만, 조금 가서 쉬어야 할 것 같다고 이야기를 하려 해도, 그럴 수 없었다. 뭔가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제대로 하기 직전에, 시야가 어지럽게 옆으로 돌며 빠르게 어두워졌다.

 

  기분 이 이 상하 다 .

 

  무겁다. 정신이 들었다. 소리가 들린다. 가까운 곳에서, 조금 먼 곳에서. 눈이 부시다. 분명히 부엌 천장에 달려 있던 전등을 올려다보고 있다. 누워 있는 게 분명하다. 기분이 이상하다. 다른 것도 보인다. 사람들이다. 아는 사람들이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옆에 서서 내려다보고 있다. 그늘이 져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무겁다. 아버지와 어머니, 보이지 않는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난다. 기분이 이상하다. 먼 곳이다. 다른 방에 있는 것 같다.

 

  무겁다.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이상하다. 몸이 커진 것 같다. 아니, 그건 아니다. 몸에 뭔가가 달라붙어 있다. 하반신에 무언가가 달라붙어 있다. 무겁다. 짓누르고 있다. 기분이 이상하다. 초점이 또렷해진다. 자세히 본다. 그건 사람이다.

 

  아는 사람이다.

 

  머릿속을 돌던 피가 차갑게 식으며 눈앞에 보이는 것을 뺀 나머지 공간이 전부 어두워졌다. 부엌의 불빛은 그대로다. 하지만 불이 꺼졌다. 머릿속에서, 그리고 가슴 한가운데에서. 잠시 잠들어 있던 감각은 한층 더 예민해진 상태로 눈을 떴다. 사고가 이어지기 시작한다. 익숙하지 않은 온기가 코에 스며들었다. 익숙한 얼굴이 아주 가까이에서 보였다. 받아들일 수 없는 감각이 온 몸의 신경으로부터 쏟아져 들어왔다. 아프다. 기분이 이상하다. 싫다. 모르겠다. 사고가 타들어가는 것 같다.

  머릿속의 불을 꺼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미쳐 버렸을 것이다. 약의 효과는 오래 전에 사라졌음에도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의식만이 혼령이 되어 죽은 몸에 올라타 있는 것 같았다. 사실이었다. 그 장소, 그 시간에서만큼은 그녀는 완전히 죽어 있었다. 거기서 이루어지고 있던, 어떤 일이 끝날 때까지

 

  기분이, 이상했다.

 

  귀 뒤를 차갑게 적시는 느낌에, 그리고 정적에 머릿속의 불이 다시 켜졌다. 정말로 조용하진 않다. 비교적, 그렇게 된 거다. 그녀를 둘러싸고 짓누르던 기척이 사라져 있다. 눈가와 양쪽 귀, 뒤통수에 느껴지는 감각은 축축함이다. 보기 싫었겠지. 아니면 보다 질렸거나. 거실에서 소리가 들린다. 술병이 부딪히고 또 무슨 좋은 일이 남아있는 건지 큰 소리로 떠든다. 즐거워 보인다.

 

  몸을 일으킨다. 약효는 완전히 사라져 있다. 몸 여기저기서 익숙하지 않은 게 느껴지지만, 상관없다. 가벼운 감기만도 못한 것이다. 정신은 오히려 맑다. 머리와 가슴도, 깨지 않았던 기나긴 꿈에서 깬 기분이다.

  온 몸의 감각과 근육에 신경을 집중한다. 맑게 깨어난 정신이 그 어느 때보다도 민첩하게 주위를 파악하고 분석한다. 돌아와 칭찬 한 마디라도 듣기 위해 기말 시험 문제를 들여다볼 때도 이 만큼 집중한 적은 없었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통하는 부엌의 문 쪽으로 다가간다.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조심스럽고 천천히 문고리를 잡아 돌린다. 거실 쪽에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기척은 없다. 과도하게 달아오른 정신이 이쪽으로 달려와 팔을 잡아채는 우악스러운 감촉을 거듭해서 모사하지만, 숨을 쉬는 것마저 참으며 빠끔히 문을 열고 미끄러지듯 그 사이로 몸을 움직였다.

  심장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와 바닥에 떨어질 것처럼 가슴을 두드렸지만, 침착하게 열었던 문을 도로 닫고, 다시 주위를 파악했다. 거칠게 풀어헤쳐졌지만 다행히 옷은 몸에 걸쳐져 있었고, 아직 그녀가 집에서 빠져나간 걸 눈치 채는 낌새는 없었다. 안타깝지만 벗겨진 신발을 도로 가지러 갈 여유는 없다. 기분 같아서는 이대로 전 속력을 내 여기서 멀어지고 싶지만, 그래선 안 된다고 이성이 만류한다.

 

  최대한 조용히 밤의 그림자에 숨어, 평범한 행인처럼 길을 걸어간다. 어느 새 가슴 한가운데까지 완전히 사라진 온기에 발가락은 오그라들고, 이를 악물어야 할 정도로 온 몸이 떨렸다. 맨발로 디디는 땅바닥은 생각했던 것보다 발바닥을 잘라내고 싶을 만큼 차가웠다. 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였기에, 참는 것에는 그 무엇보다 자신이 있었다. 이대로 사람이 많은 시내로 간다면 목표 완수다. 일단은 경찰서를 찾자.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지만, 그곳의 경찰관들과는 전에 만날 일이 많았기에 얼굴도 익히고 있다. 분명 친절하게 도와주실 거다. 따뜻한 난로도 있을 거고.

 

  그녀가 아는 가장 빠른 길로 시내에 가까워질수록 도시의 소음과 사람들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크다. 제법 늦은 시간일 것임에도 상당히 크다. 게다가 가까이 갈수록 점점 명확해지는 소리의 종류는, 명백히 그녀가 익숙히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상한 냄새가 난다. 이성이 막연히 어떤 경고를 보내지만, 마지막 모퉁이를 돌 때까지 그 정체를 직접 확인할 수는 없었다.

 

  불타고 있다.

 

  경찰서가 불타고 있다. 주위의 가게와 도로에 방치된 차들에서도 붉은 화염과 검은 연기가 피어오른다. 사람들이 있다. 지금껏 숫자로만 접했을 뿐, 이렇게 많았나 싶을 정도의 사람들이 큰 소리로 외치거나, 뭔가를 집어 던지고 있었다.

  뒤늦게, 잊고 있었던 뉴스의 내용을 떠올렸다. 이 위태로운 세계를 그나마 유지시켜 주고 있던 국가가, 마침내 그 마지막 기능을 잃어버렸다는 것. 거리는 갑작스레 터져 나온 분노와, 그 동안 억눌러 왔던 욕망을 무작정 드러내는 공간으로 변해 있었다. 성난 외침과 함께 적지 않은 비명 역시 들려왔다. 저 불빛들도 따뜻해 보이긴 했지만, 더 이상 다가가선 안 된다고 이성이 더없이 심각한 얼굴로 막아선다. 그의 말이 옳다.

 

  나가야 한다. 이 거리, 가능하면 이 도시도. 어디든 간에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으로.

 

 *

 

  그게 그녀가 기억하는 두 사람과의 마지막이었다. 쉽지 않았지만, 이후 그녀는 살기 위해 무엇이든 했다. 공교롭게도 시기가 시기인지라 범죄라는 수단에 대한 경각심은 매우 낮아져 있었다. 예상치 못하게, 그동안 그들에게 듣기만 했던 쓸 데 없는 잔지식이 재산이 되었다. 이용할 수 있는 최대한 이용했다. 그들과는 달리 그녀에게는 뭐든지 잘 해낼 수 있는 재능이 있었다. 이걸 조금만 더 빨리 발견했더라면, 상당히 독특한 가족이 탄생했을지도 모른다.

 

  중간의 이야기는 생략하고, 그녀는 살아남았다. 전쟁이 승자 없이 끝나고, 파괴되었던 도시가 수습되고, 폴리스라는 이름의 격리 도시에서 새로운 사회가 뿌리를 내릴 때에 그녀는 잠시 지저분했던 과거는 깨끗이 씻고 순조롭게 그 안으로 섞여 들어갔다. 막 재건이나 개발 중인 도시에서는 어디든 사람이 부족했고, 모두가 알만 한 서로의 과거를 공연히 캐고 드는 사람도 없었다.

  여러 일을 전전했다. 폴리스의 방벽을 칠하는 것부터 공산품을 조립하고, 경비대 병영에서 식사를 조리하는 것도. 여자의 몸으로 허락되는 어떤 일이든 그녀는 훌륭하게 해냈고, 집이라고 부를 자신만의 새로운 보금자리도 마련했다.

 

  그녀는 성공했다. 적어도 그렇게 보였다. 그 날의 지옥 밑바닥 같은 집에서 도망쳐 나와, 머나먼 곳에서 이전에 두려워했던 그 어떤 것도 걱정할 필요 없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이제는 자리를 잡을 생각으로 들어간 의류 회사에서도 그녀는 뛰어난 센스를 보이며 주목받는 중이었고, 이대로라면 곧 이쪽 업계에 이름을 알릴 수도 있을 터였다.

  허나, 그 무렵의 세계에는 새로운 고민거리가 생겨났다. 그 모든 파괴를 극복하고 완전하진 않지만 어느 정도 안전한 삶의 터전을 일구어낸 사람들은 긴장이 풀림과 동시에 심각한 우울과 무기력증에 빠져 버렸다. 세상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불행한 사고가 몇 번 이어지고 나서야, 남은 사람들은 좋건 싫건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고 일단은 살아가기 위해 다시 집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다.

  지금까지처럼 쉽게 극복할 줄 알았건만, 그녀는 거기에 그야말로 직격탄을 맞았다. 단순히 사람이 게을러지는 유행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녀 자신에 더해 주위의 희망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 도전도 노력도 전부 아무 의미 없다고 좌절하는 사람들의 모습. 그저 당장 죽지 못했기에,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결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어떤 사람들에 대한 기억을 수면 위로 밀어 올리며 잊으려 했던 순간을 재생했다.

 

  그들에 대한 복수심 같은 것은 남아있지 않다. 그저 다시는 마주칠 일 없이, 그 행동에 걸맞은 결말을 맞기만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잔혹하게도 그들은 그녀를 놔 주지 않았다. 아무리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온 몸에 달라붙은 더러운 감촉이 끈덕지게 남아, 기억의 끄트머리에 불이 붙는 매 순간마다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지금껏 언제나 차분하고 능청스럽게 다른 사람을 대했던 그녀였지만, 때때로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라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순간이 찾아왔다. 또는 갑자기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 상태로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깨어나기도 했다. 증상이 점점 구체적이고 뚜렷해지자, 이제는 그 증상 자체가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어 그녀의 일상을 망가뜨렸다. 막말로 산전수전 다 겪은 그녀라도 이건 경험한 적 없는 위기였다. 유망한 인재로 기대를 받던 회사에서도 곧 그녀를 자를지 말지 고민하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떻게든 퇴근 시간까지만 버티고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와, 잠들지도 못하고 빈 허공만 노려보면서 그녀는 문득, 이번에야말로 막다른 곳에 몰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망쳤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여겼던 것은 그녀뿐이었다. 이제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가장 고약한 과거가 달라붙어 그녀를 갉아먹고 있었다. 그녀의 재능과 지식 어느 곳을 뒤져봐도 그것을 해결할 방법은 보이지 않는다. 이대로 계속 저 끔찍한 것을 매달고 살아갈 수는 없었다. 이성이 곁에 앉아 끊임없이 어떤 말로 그녀를 달래었지만, 지금의 그녀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내일 하루만 더 출근하고, 돌아올 때는 튼튼한 밧줄을 하나 사서 오자고. 정말 마지막으로 ‘내일의 할 일’을 생각해 보았다.

 

  그 남자를 처음으로 본 것은 정확히 그 내일이었다.

 

  여느 때처럼 회사에 필요한 원료를 차에 싣고 나타난 배달부가, 어째서인지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 있었다. 일단 화물이나 계약에 문제는 없었기에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배달 건을 처리했지만, 나중에 동료들에게 들은 소문은 그 반대로 극히 대수롭게 여길 만한 것이었다.

  서쪽 끝 해안, 시애틀 근방에 세워진 폴리스. 그곳의 물류 회사에 희한한 사무장이 있다고 한다. 모험심이 강한 건지, 아니면 겁이 없는 건지 남들이라면 겁을 먹고 꽁무니부터 뺄 일에 가장 먼저 뛰어들어, 어찌되었든 해결을 한다는 것이다.

  그 때 보았던 것도, 운송 도중 약탈자들에게 잡힌 배달부를 혼자서 숨어 들어간 건지 쳐들어간 건지 트럭 째로 데리고 나온 후의 모습이라고 한다. 배달부는 한동안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지만, 화물은 본인이 책임지고 전부 날라다 주었다는 후일담까지.

 

  더없는 따분함과 화제의 부족을 겪고 있던 동료들에게 그의 소문은 더없는 이야깃거리가 돼 주었다, 그것은 린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 자신의 과거와, 좋은 것이라고는 떠오르지 않는 주변의 풍경으로부터 눈을 돌리게 해 준 새로운 관심사였으니, 반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처음에는 그저 흥미 때문에, 밧줄을 사 오는 것을 하루 미뤄 그 남자의 무용담에 대한 것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후 그것이 이틀이 되고, 직접 밧줄을 엮어도 충분할 만한 시간이 지나갔다. 무엇이건 간에, 한 가지 일에 몰두를 하는 동안은 옛날의 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었다. 놀랍게도 발작이 일어나는 빈도 역시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조사 또한 차곡차곡 그 데이터를 쌓아가고 있었다. 남자의 이름은 아이작 굿맨. 그녀보다 세 살 위이며, 마찬가지로 어릴 때 가족과 떨어져 홀로 살아왔다고 한다. 놀라운 우연이라고 할 만한 일은 아니다. 최근 신문에서 북미 대륙 20여 개 폴리스의 1인 가구 비율을 분석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유난히도 넓게 퍼진 사건은, 비슷한 과거를 가진 사람을 무수히 만들어내기 마련이다.

  처음 보았을 때의 인상으로 왠지 그러지 않을까 했는데, 역시 그가 처음으로 가졌던 직업은 배달부였다. 범상치 않은 인물인 것은 그 때도 마찬가지여서, 젊은 나이임에도 대륙을 가로지르는 장거리 운송이 가능한 몇 명 없는 인물 중 하나였다. 그러던 중에 시애틀에서 발생한 납치 사건의 해결을 돕고, 그 인연으로 도시에 정착하여 회사의 사무장을 맡고 있다는 것이다.

  배달부였던 시절부터 용감하고 모험심이 가득했던 성격은 한 곳에 정착을 했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책상 앞을 벗어나지 않으며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직업임에도, 주위에서 벌어지는 사고나 다툼에 적극적으로 끼어들어 해결을 도우려 했다. 물론 우선은 회사와 도시에 이익이 되는 것을 추구했지만, 개인적으로는 대가나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도와주는 일도 많았다.

 

  조사를 진행하면서 가장 많이 느꼈던 생각은, 현실의 이야기 같지 않다는 점이었다. 어려운 과거를 겪었으면서도 그 마음이 비틀리는 일 없이,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남을 돕고 잇는 모습은 그녀가 문학 정도에서나 접했던 이상적인 주인공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그녀 역시 과거를 극복했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그건 그저 상처를 옷으로 가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유능하다고 평가를 받는 것 역시 자신의 앞가림을 하는 정도에서 그쳤을 뿐, 그 힘으로 남을 돕는다는 일은 그다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사건집을 모으고 그 사람에 대해서 생각할수록, 실제로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더 강해졌다. 모아 놓고 보면 마치 어떤 소설의 주인공으로 밖에 보이지 않지만, 그는 엄연히 살아 있고,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그녀를 괴롭히던 증상은 사라져 일상으로 다시 복귀할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뭔가가 그녀를 몰아가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자신의 의지로 어떤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싶었다.

 

  지금껏 그녀와 함께하며 선택의 갈림길마다 조언을 해 주던 이성이, 썩 좋은 선택은 아니라고 말해 주었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진지하고 무서운 표정이 아닌, 어쩔 수 없다는 듯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생각해 봤자 뻔한 일이었지만,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생각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었다.

 

  처음으로 살던 곳에서 뛰쳐나왔을 때, 그녀는 불안함과 두려움에 등을 떠밀리고 있었다. 때문에 목적지 따위를 깊게 생각할 틈은 없었고, 그저 어딘가 먼 곳으로 가 등 뒤에 있는 것들이 보이지 않기만을 원했다. 그 다음에 집을 옮겨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과연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이번에는 얼마나 더 머무를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며 불안해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이번에는 공포가 아니라, 기대가 그녀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리고 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 무엇을 하더라도, 그녀는 잘 해낼 수 있다. 어딜 가더라도 머무르고 싶은 만큼 머무를 수 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정말로 만나고 싶은 신비로운 사람을 찾아 가본 적 없는 땅으로 스스로 향하고 있다.

 

 *

 

  이틀 밤낮으로 씻어내야 할 것 같은 담배 냄새로 찌든 화물차 조수석에서 드디어 내리게 된 것은, 그걸 타고 대륙 반대편의 도시에 무사히 도착한 것만큼이나 기분 좋은 일이었다. 미리 알아봐둔 방에 짐을 풀고 나서, 린다는 운전석 문에 크로스헤어를 그려놓고 다니는 배달부가 가르쳐 준 주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처음 방문한 도시에서 잠시 헤매는 사이 시간은 저녁으로 넘어가, 하늘에 밝혀진 불빛이 점차 꺼지며 일터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겨우 찾아낸 물류 회사의 건물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장 책상이 없어질 만한 일이 아니고서야 야근 따위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얼굴로 건물을 빠져나오는 사람들 중에, 그녀가 찾고 있는 남자의 얼굴은 없었다.

  퇴근 시간으로 주위가 혼잡한 것은 오히려 행운이었다.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물결을 거슬러, 문에 붙은 번호를 주의 깊게 살피며 한 사무실의 문을 열었다. 기대했던 대로, 그 사무실의 안쪽에서 아직 퇴근하지 않은 한 사람이 이런 사무실에는 어울리지 않는 두꺼운 헬멧과 방호복 같은 것을 정비하고 있었다.

 

 “-”

 

  저물어가는 창문으로 들어오는 붉은 빛을 받으며 일에 몰두하고 있는, 단 한 번밖에 본 적이 없었던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는 잠시 그 자리에 멈춰서 그가 하는 일을 그대로 지켜보았다. 닦아내고, 조이고 두드려 펴는 작업이 끝나기까지에 시간이 제법 걸렸으니, 일을 마친 아이작이 여태껏 서 있던 린다를 보고 제법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무슨 일로-라고 그가 말을 이을 틈도 주지 않고, 린다는 그가 앉아 있는 책상으로 다가가 여기까지 달려오며 준비해 두었던 말을 한꺼번에 늘어놓았다.

 

 “그러니까-‘여기’서 일하고 싶다고요?”

 

  물론 그건 그녀가 생각하는 일자리를 원하는 사람의 평범한 행동이 절대 아니었다. 사실 어딘가 이상한 사람으로 여겨져 대번에 쫓겨나도 억울할 것 없는 짓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가 기대했던 대로, 그녀를 수상한 눈으로 보는 대신 서랍에서 지난달의 인사 변동 자료를 꺼내 훑어보았다.

 

 “마침 새 직원이 필요하긴 했습니다만….”

 

  잠시 양 미간을 찌푸리던 그는 아무렴 어때, 하는 혼잣말과 함께 다시 표정을 펴고 그녀를 향했다.

 

 “괜찮죠? 그래도 되는 거죠?”

 “아니, 그 전에.”

 

  그는 이것 참 못 말리겠다는 느낌의 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아직 이름도 못 들었잖아요. 지금 들을 수 있을까요?”

 

 *

 

 "자, 다 됐어요. 어때요?"

 

  그녀가 돌려세운 거울 안에는 난생 처음 정장이라는 걸 입어 본 서른 두 살의 독신 남성이 여전히 무언가 어색하다는 얼굴로 스스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 괜찮아 보여? 영 어색한 것 같은데."

 

  솔직히 어색하다고 느끼는 것은 그녀 역시 마찬가지다. 그 동안 바로 옆 자리에서 봐온 그라면, 사무실에서 늘 입는 수수한 평상복이나 땀냄새 나는 방호 자켓 쪽이 훨씬 자연스럽게 느껴질 거다. 허나 어색한 건 그저 분위기의 이야기일 뿐이고, 지금까지의 인상을 빼놓고 객관적으로 본다면 제법 잘 어울린다. 무엇보다 게으름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며 만들어진 몸이 큰 공을 세웠다. 그 쪽 일을 하며 배운 몇 가지 기술로 살짝 마법을 부리면, 평소에도 곧잘 입는 옷이라고 믿게 만들 수도 있겠다.

 

 "아뇨, 아주 좋아요."

 

  약간 초조한 것 같았던 그의 얼굴이 그 말을 듣고 눈에 띄게 밝아지는 것이 보였다. 지금까지 그가 기뻐할 만한 일이라면 대체로 그녀에게도 마찬가지인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무리까지 해 가면서 일을 서둘러 끝마치고 나가게 될 중요한 '약속'을 앞에 둔 그의 웃음을, 그녀는 좋아해야 할지 아니면 다르게 이야기해야 할지 쉽게 정할 수 없었다.

 

 "잠깐만요."

 

  끝으로 양 팔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선을 바로잡으며 잠시, 그대로 그 촉감을 느꼈다. 적지 않은 세월을 옆에서 봐 왔음에도 직접 손끝으로 닿는 그의 몸은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넓고 단단했다. 전에 동료들이 이런 주제로 이야기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어쩌다가 닿은 이성의 몸이 생각한 것보다 듬직하게 느껴지면…그건 더 이상 의심할 필요가 없는 징조 중 하나라고.

 

 "됐어요. 다른 거 잊어버린 건 없겠죠?"

 "어. 주문하는 법 하고, 그 밖의 매너에 대한 것들도 다 외워 뒀어. 조금 힘들었지만."

 "그리고, 이것도 들고 가요."

 

  조금 전에 사람을 시켜 가져온 예쁜 종이 상자가 들어있는 가방을 그에게 건넨다.

 

 "이건…물론 나도 좋아하긴 하지만, 이런 걸 줘도 괜찮은 거야?"

 "전에 말씀해주신 대로라면, 이것보다 더 좋은 건 없을걸요?"

 

  이제 이쪽에서 챙겨줄 만한 것은 모두 끝냈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지만, 아직 서둘러서 나가야 할 시간은 되지 않았다.

 

 "이제 슬슬 가 보세요."

 "응? 그렇지만 아직 시간이-"

 "제가 피곤하다고요. 얼른 나가 봐요. 우리도 퇴근하게."

 "아, 알았어. 미안해. 그럼 먼저 가 볼게."

 "네. '그건' 당연히 챙기셨겠죠?"

 "물론이지. 그럼 내일 봐!"

 

  평소처럼 명랑하게 인사하며 그가 휴게실을 나간다. 우스운 사실이지만, 그가 부하 직원들보다 먼저 퇴근하는 걸 본 게 마지막으로 언제인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익숙지 않은 구두를 신은 그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마침내 두 번째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며 그가 완전히 나갔다고 확신이 들 때까지도 그녀는 휴게실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지난 날 그 때처럼 저물어가는 창문이 붉은 빛으로 방 안을 물들이고 나서야, 그녀는 천천히 바깥으로 나왔다.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몇몇 직원이 아직 퇴근을 하지 않고 남아 있었다.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혼자서 집으로 돌아갈 용기가 나지 않을 게 분명했으니까.

 

 
작가의 말
 

 튀기지 않았다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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