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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옥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띠링-.
술잔을 돌리며 이야기 삼매경에 빠져있던 중년인들도 어느덧 하나둘 입을 닫는 모습이었다.
기방 ‘여옥’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물론, 방주인 여옥의 목소리였으나 그녀의 연주솜씨 또한 정평이 나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또한 기존의 유명한 곡들을 포함하여, 기녀들 사이에서 전승되어오는 옛 기방가요들과 고려가요, 민요, 심지어는 이웃나라 명(明)에서 들여온 중화풍 가락에까지 조예가 있었으니…….
띠링- 띠링-.
당연지사 이목을 집중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과연, 술 맛 한 번 제대로구나!”
“절로 감탄이 나오는 구려!”
탄성을 내지르는 것도 잠시, 하나둘 연주에 빠져들기 시작하면서 주위 소음이 빠르게 잦아들었다. 대신 고요한 분위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여옥이 만들어낸 금의 음률만이 허공을 수놓았다.
한 곡이 모두 끝이 나자 여옥은 곧바로 다음 곡을 이어갔고, 그렇게 연주는 무려 일다경 가량이나 계속되었다.
여옥이 노린 바는 명확했다. 적당히 단조로운 곡들의 연이은 연주를 통해 분위기를 가라앉힘으로써 저들의 흥과 마음을 충분히 식혀내는 것. 이안을 향한 저들의 탐심을 조금이라도 억제하기 위함이었다.
“좋네, 좋아.”
“수기의 고명한 솜씨에 실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네 그려!”
또한 그와 동시에 곡의 질은 유지하여 그들로 하여금 ‘수준 높은 대접을 받았다’고 여기도록 만드는 것이 진정한 여옥의 의도였다.
‘내 이 정도까지 했으니 세자마마께 결코 함부로 대하지 못하겠지…….’
모두가 다 기녀에게 존중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의와 겸양의 덕을 항시 잃지 않은 채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이만이 기녀에게 존중을 받을 수 있다. 이것이 기녀들과 객들 사이에 은연중 퍼져있는 ‘기방에서의 예(禮)’에 관한 인식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인식 때문인지 스스로 귀한 대접을 받았다 여기는 이들은 대체로 행동에 조심성을 더하는 경향이 생기곤 했는데, 여옥은 바로 이를 노린 것이었다.
그러나 물론, 이는 객들이 여옥의 뜻을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의 상식과 교양을 지닌 이들이라는 전제가 뒷받침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연주는 정말로 좋았네, 정말로. 다만…….”
여옥은 말끝을 흐리는 이상환을 경계의 눈으로 쳐다보았다.
“분위기가 가라앉은 듯하여…… 이를 어쩌나, 글쎄?”
그의 말에 가만 여운에 잠겨있던 이들이 하나 둘 동조하고 나섰다.
“그러게 말이야.”
“연주가 조금…… 아니, 너무 잔잔했다고 사실!”
“그러니까! 수기가 우리 마음도 몰라주네 그려!”
여옥은 자신의 의도가 먹혀들지 않았다는 사실과 더불어, 연주 자체를 모욕 받았다는 생각에 분노를 감추기 힘들었다.
‘이, 이자들이……!’
그때였다.
꼬옥.
갑작스레 손을 덮어온 온기에 놀란 여옥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이안이 가만 미소를 지어보였다.
괜찮아요, 침착하게.
놀랍도록 차분한 그의 표정이 그렇게 말해주는 듯했다.
‘또, 또 세자마마께 폐를 끼치려…….’
여옥은 잠시간 스스로를 꾸짖은 다음, 천천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제 연주가 흥을 깼다면 사죄드리겠습니다. 저만치나 밝고 고운 달빛에 어울리는 곡을 찾으려다 그만…….”
여옥이 그리 나오자 오히려 무안해진 양반들이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 아닐세! 연주는 좋았어.”
“암, 그렇고말고.”
“수기가 그리 말하면 우리가 뭐가 되나?”
좋아, 위기를 기회로! 여옥은 그들의 주춤거리는 틈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제가 너무 제 위주로 생각했나 봅니다. 항시 객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을 가졌어야 하는 것인데…….”
“아니, 아니라니까?
“정말로 다시 못 들을 귀한 연주였다네.”
“이거, 이거 우리가 괜한 말을…….‘
심지어는 잠자코 있던 이상환마저,
“어허, 수기께서 왜 이러시나? 그 좋은 연주를 들려주고 자책하는 꼴이라니?”
이러고 말을 하는 게 아닌가.
이에 여옥이 기세를 올렸다.
“아닙니다, 모두 제 불찰이옵니다. 흥을 가라앉히고 말았으니 저 송화주 한 병 값은 받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지금부터 제대로 된 곡을 연주해 올리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여옥의 제안에 다들 놀라 머뭇거리는 기색이었다.
“아, 아 그것이…….”
“이것 참…… 수기가 몇 곡을 더 연주해준다면 우리야 좋다만…….”
“그래도 다른 방에도 들려야 하지 않는가? 분명 그대의 솜씨를 여러 번 청해 들으려면 필히 예약을 해야 한다고…….”
“일찍 오시지 않으셨습니까. 시간은 넉넉합니다. 걱정 마시고 즐기시지요.”
“허 참…….”
잘만하면 조금의 시간을 더 벌 수 있을 듯했다.
“그럼 다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였다.
“어허, 잠시 기다리게.”
그녀를 멈추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이상환이었다.
여옥의 눈에 긴장의 빛이 떠올랐다.
“수기는 조금 전까지 공들여 연주하지 않았나? 무리할 것 없어.”
“아닙니다. 술자리의 분위기를 제가 망쳤사온데 어찌…… 다시 연주를 올리겠…….”
“아니, 아니지. 우리는 술을 마시러 온 거야, 수기의 연주를 들으러 온 게 아니라. 그리고 연주는 좋았어. 그러니 그 이상은 필요 없네.”
단호히 말하는 이상환의 짝눈이 묘한 빛을 내뿜었다.
이에 여옥 또한 주춤거릴 수밖에 없었다.
“허, 허나…….”
“딱히 잔말은 필요 없을 듯싶은데…….”
이어 여옥이 가장 두려워하던 말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럼 이제 수기는 다른 볼 일을 보러 가도 되지 않겠나? 곧 있으면 해시인데, 본격적인 손님맞이에 들어가야지?”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객이 이렇게까지 나오면 그녀로선 버틸 재간이 없다.
“그, 그럼 다른 아이들을 불러오겠…….”
“그때 그 미화들이라면 필요 없네. 말마따나 전혀 준비가 되지 않은 아이들이더군. 괜히 술맛만 해치겠지. 우린…….”
이상환의 뱀 같은 눈초리가 이안을 훑었다.
“이 아이 하나면 충분하지 싶은데…….”
끝내 우려하던 상황이 닥치고 만 것이다. 여옥의 눈이 좌절감으로 물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