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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일반/역사
무사
작가 : 설매1
작품등록일 : 2019.11.1

이 소설 속 주인공은 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를 지나 첫번의 생을 살았고 두번째 생은 조선중기 그 격변하는 전쟁 중심의 시대를 돌파해 나가는데 무사의 길을 걸으며 살았다.
문과 시험을 치루기위해 열심히 공부하던 주인공 무극은 그 길을 접고 무사의 꿈을 꾸게된다. 그는 태어나면서 2018이라는 숫자에 매료된다. 그 숫자로인해 무사의 길이 열린다. 순막히는 순간에 2018의 숫자로부터 하늘의 에너지를 받게 된다. 인간의 삶이 한번에 끝나지 않는다는 소설속 < 동희> <승려포청전 > <무사 > 에서결정되었다.

 
6화
작성일 : 19-11-01 21:21     조회 : 263     추천 : 0     분량 : 16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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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자를 강제로 잡고 있는 의원은 없습니다. 장군의 상태가 좋아지긴 했어도 워낙 몸의 기력이 다 소모 되었으니 기를 보충하는 데는 시간이 좀 필요합니다. 아무런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어요. 사람이 쉬어 갈 때도 있어야지, 더 큰 일을 하려면 참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이제 장군의 몸이 혼자의 몸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세요. 몸이 건강하여야 다음 일을 합니다. 너무 서둘지 말고 의원의 말을 들어요. ”

  의원은 무극이 마음을 헤아려 훈계 아닌 훈계를 하여 환자의 조바심을 안정 시켰다.

  “살펴본 결과 장군은 다른 병이 없으니 며칠 내로 완전히 정상을 되찾을 것이니 조금만 더 몸을 추스린다고 큰일 날 일도 아니구먼" 하였다.

  부모님의 생각에 마음이 급했지만 어쩔 수 없이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의녀 미란은 웃었다. 눈을 뜬지 삼일만이다. 어디로 날아가고 누구를 만난 것 같은데 생각이 정리 되지 않았다. 죽음의 강을 건너갔었나 하는 생각에 웃음도 나왔다. 예전에 없던 일이다. 걸핏하면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마음의 무장이 풀린 탓일까. 아름다운 여인이 옆에 있어서 일까. 알 수없는 일이다. 아침마다 의녀가 건네 준 하얀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손을 닦으며 자신의 얼굴이며 손가락을 살펴본다. 이렇게 생겼구나. 몸의 한 부분인 손가락이 어찌 생겼는지 살펴 본 적이 없었다. 얼굴도 손으로 문질러 보았다. 어릴 때 동네어른들이 보는 사람마다

  “그놈 참 잘생겼구나. 크면 장수가 되겠어.” 하던 생각이 떠올라 또 웃었다. 다른 환자를 돌보느라 바쁘지만 은근슬쩍 곁눈질로 무극의 모습을 보면서 미란도 덩달아 웃었다.

  자라면서 공부밖에 몰랐고 공부를 버리고 꿈을 바꾸면서 정의부대 훈련병으로 훈련에 참여하면서 군의 모든 훈련이 자기 몸에 맞는다는 생각에 열심히 노력했던 결과를 얻어낸 것이다. 여인에 대해서는 마음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고 오직 나라에 대한 마음뿐이었다. 그리 순수하고 철없던 마음에 웃음이 헤퍼지고 비오는 밖을 바라보는 것도 왠지 쓸쓸한 분위기가 좋은 것 같고, 자기를 위해 달려와 준 대원들의 마음도 고마웠다. 몸이 편안하니 마음도 여유로워 몰랐던 경계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옆에서 보는 의녀의 마음이 너무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였다. 고통스러워 하는 환자들과 진심으로 함께 아파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병을 고치는 의원들이 얼마나 고마운가를 알게 되었다. 그들이 진정 애국자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 혜택을 받을 수 있었던 자신도 하늘을 가진 것처럼 기뻤다. 생각하는 것마다 모든 것이 좋았다. 침을 매일 맞았데니 내 속이 잘못되었나? 무슨 약인지 약이 잘못되었나? 웃음이 헤처진 것에 의심해 보면서 또 피식 웃었다. 빨리 이곳을 나가야지, 사나이 대장부가 이리 비실비실 웃음이 허해서 무엇에 쓰려고 그러나 하는 마음으로 정신을 차렸다.

 

  왜군의 침략이 한동안 뜸하였다. 나라가 안정이 되고 임금은 무기를 개발하는 데 많은 관심을 두고 탄약을 제조한다든가, 조총을 만드는 기술자를 발굴하는 데 신경을 쓰고 있었다. 임금이 한 번씩 시찰을 나갈 때에 무극이 호위병으로 임금을 따라 보필하는 역할을 맡은 지도 시간이 많이 흘러갔다. 나라가 조용하니 백성들도 웃으며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하늘엔 다시 검은 구름이 일기 시작하였다. 임금의 하나뿐인 아들 세자가 14세에 죽었다. 궁궐 안 팍이 설음에 싸였고 임금은 임금대로 정사에 의욕을 일어가고 있었다. 세자가 죽었으니 궁궐의 모든 사람들도 손에 일이 잡히지 않았다. 임금은 날이 갈수록 멍하니 정사를 멀리하는 날이 잦았다. 대궐 안은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인과응보라고도 하고 대비 아들인 임금이 무슨 죄가 있느냐며 하늘이 무심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임금이 후실이 없는 것도 아닌데 후실의 몸에서도 왕자가 더 이상 태어나지 않았다. 나이 14세가 된 세자가 참변을 당하고 보니 임금은 아예 산으로 들로 말을 타고 방황하였다. 그럴 때마다 따라나서는 호위의 책임은 당연히 무극 몫이었다. 방황하는 마음은 명종을 병들게 하였다. 나라에 대한 애정이 남달라 성군이 될 거라고도 하였는데, 다 큰 세자를 잃어버린 부모는 제정신으로 살 수 없었다. 대관들이 모이는 곳마다 임금에 대한 무슨 조치가 있어야 한다는 공론이 공공연하게 돌았다. 임금의 귀에 들어왔다.

  “전하 후궁을 새로 들여서라도 속히 원자를 보셔야 합니다.”

  “ 나라에 기강이 서려면 다른 왕족을 찾아 빨리 세자로 옹립하여야 합니다.”

 서로 다른 의견을 내어 아뢰었지만 임금은 모든게 다 시들하여 정사도 뒤로 미루고 무극을 불러 자리를 비우는 때가 많았다.

  “여봐라. 속이 답답하니 호위무사를 불러라.”

  그럴 때마다 임금의 옆에는 무극이 따랐다. 무엇으로도 달랠길 없는 자식을 그리는 마음이 명종의 가슴을 병들게 하고 있었다. 대신들이 어찌할 줄을 모르고 이리저리 공론하여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마음이 시름시름 시들어가는 명종에게 무엇 하나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걸핏하면 버럭 화를 내어 대신들을 당황하게 할 때가 많았고, 점점 조울증 증세가 깉어져 누구도 들이지 않고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갔다.

  원래명종이 앓고 있는 조울증 때문에 총애하는 내시가 툭하면 바뀌고 궁녀들의 불안도 커졌다. 외아들 순회 세자를 잃은 이후로 더 심해졌다. 단순히 총애의 정도가 바뀌는 게 아니라 술에 취해서 하옥시키는 일이 허다하고, 국문까지 시행하는 일이 빈번하여 왕실의 걱정거리가 늘어나고 있었다.

  1555년 을묘왜변은 왜구가 전라도 서남해안에 대규모로 침입하여 영암, 장흥, 강진, 진도 일대를 휩쓸며 약탈과 살인을 자행한다는 전계를 접했으면서도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고 명을 하달하지도 않았다. 왜변 중 가장 최대이자 마지막인 을묘왜변이었다. 조정은 호조판서 이준경을 도순찰사로 정하고 김경석· 남치훈을 방어사로 임명하고 전주부윤 이윤경을 파견하여 왜군을 진압했다. 영암에서 크게 이겨 왜군을 몰아내었다. 삼포왜란이후 생겨난 비상기관인 비변사는 이때부터 상설 정치 기구화 되었다. 을묘왜변 이후 조선은 해군력을 크게 강화하고 판옥선의 도입, 총통의 개량, 수군의 정비, 권관제의 도입 등 개혁을 추진하여 임진왜란 때 수군의 활약을 뒷받침하게 된다. 또 줄어든 군마를 명나라에서 수입하려해 사림 계열 신하들의 비판을 심하게 받았음에도 명종 임금은 왜군의 세력을 약화시키는데 쓰이는 게 조선에 없다면 그게 무엇이든 수입을 해서라도 전쟁에 이길 수 있도록 전력을 쏟아 부었다.

  1565년 문정왕후가 사망하자 명종은 윤원형 일파를 모두 숙청하고 억불 정책에 돌입하는 등 새로운 개혁을 꿈꾸어 정치가 안정 되는가 했는데 나라의 기둥이었던 세자가 1563년 사망하는 바람에 대궐에는 계속 찬바람만 지나갔다. 명종은 조선의 조총 기술을 새롭게 개발하여 더 이상 왜군의 침략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하였었다. 나라에 대한 사랑이 넘첬던 명종 임금은 1567년 34세의 젊은 나이에 갑작스럽게 사망하게 된다.

  여러 후궁에게서도 보지 못한 명종의 후계자는 어쩔 수 없이 선대의 왕손으로 넘어가야 하는 급박한 형세였다.

  전혀 예상 못했던 왕실의 불행은 명종의 외아들 세자가 14살의 나이에 갑자기 죽었기 때문이다. 다음 왕위는 중종의 7남의 셋째 아들이자, 명종의 조카인 하성군에게 이어졌다 바로 조선 14대 임금으로 등극하면서 왕실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한 환란 속에서도 궁궐의 수비는 철통같이 경계심을 강화하는 데 게으르지 않았다. 별동대원들은 슬픔에 빠진 대궐의 수비를 재정비하였고 궐의 수비를 철저히 하였다. 임금이 승하 하였으니 나라의 슬픔은 컸다. 더우기 한창 나이에 붕어 하였다는 소식은 왕실의 비극이며 왕실의 장래가 걱정되는 것이다. 별동부대원들은 더욱 그랬다. 대궐의 수많은 나인들은 세자가 죽자 임금의 승은을 입을 수 있는 기회를 엿보았다. 나이 젊은 임금에게 라도 발탁 되었으면 하는 허황된 마음으로 몸을 드러내 왕자라도 낳아볼까 촉을 세웠던 나인이나 후궁들의 슬픔도 역시 컸다.

 

  내의원 의녀 사미란은 무극을 치료한 계기로 별동부대원들과 대궐에서 마주 칠 때는 무심결에 무극의 안부를 듣는다. 훈련대장은 미란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무극과 좋은 사이로 연결시켜주려는 속셈도 있었다. 미란과 어쩌다 마주치면 남달리 반가워하며 묻지도 않는 무극의 활약을 자랑삼아 이야기 하면서 미란에게 친근감을 보였다.

  “의녀님이 우리 장군을 살리셨어요. 정말 큰 절이라도 하고 싶습니다. ”

  “따로 한 일은 없었어요. 본인이 고생하셨지요. ”

  무극도 대궐 사람이라 내의원 부근을 지날 기회가 있다든지 시간이 되면 내의원에 들려 허의원이나 의녀들에게 인사도 나누고 그랬다. 근무시간에는 철통같은 경계를 게을리 하면 안되었지만 남는 시간에는 마음의 경계를 풀고 내의원에 드나들고 있었다. 어차피 대궐에서 살아야 한다면 대궐의 곳곳을 알아두는 것은 누가 뭐라 할 수 없는 맡은 직책이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대궐에 들어와 첫 임금을 섬긴 인연 때문에 그 임금이 없는 대궐이 너무 슬펐다. 정계는 발 빠르게 새로운 임금을 자리에 세웠다. 새로운 세도가 자리잡는 분주한 대궐에서 무극은 그 자리의 책임이 중요하기에 새 임금에게 충성을 다짐하고 있었다. 이미 떠나간 님을 그리며 애통해 할 자리가 아니었다.

  명종은 중종과 문정왕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인종이 즉위할 때까지만 해도 그저 선왕 중종의 아들이자 현왕인 인종의 이복동생일 뿐이었으나 인종이 즉위한지 8개월 만에 급사함으로서 왕이 되었다. 왕이 된지 1년 뒤 문정왕후가 스스로 수렴청정을 거둠으로서 친정이 시작된다. 1553년에 명종은 20세의 청년이었다. 모후의 간섭을 받지 않고 나름대로의 정치를 펼쳐 나갔다. 1567년 명종 즉위 22년에 명종은 34세의 젊은 나이에 갑작스럽게 사망하게 된다. 외아들순회세자가 14세의 어린 나이에 갑자기 죽었기 때문이다. 순회 세자를 잃은 안타까움에 슬퍼하다 병을 얻어 일어난 일이라 대궐은 슬픔에 잠겼다. 아무런 대비도 없었고 세자도 없이 당한 왕실과 사대부들은 우왕좌왕 임금의 붕어를 슬퍼하였다. 명종의 직계 손은 순회 세자뿐이었다. 왕실은 명종 임금마저 없는 마당에 세자 자리가 비어 있음이 황망하여 어전의 주인이 없는 자리에 대비를 불러 대궐의 최고 어른으로서 대리청정을 아뢰어 하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 왕위는 중종의 7남인 덕흥대원군의 3남이자, 명종의 조카인 하성군이 적임자라는 의견으로 좁혀졌다. 그가 바로 조선 14대 임금 선조 임금이다. 명종은 외아들이 죽고 아들을 보기 위해 노력했으나 왕비의 몸에서 소식이 없자, 어떤 노인이 한 말을 믿었다. 노인이 어떠한 여인을 들이면 아들을 낳는다고 하는 말을 듣고 한 여자를 후궁으로 삼았지만, 끝내 아들을 보지 못했다.

  명종 비인 인순왕후는 임금의 자리는 잠시라도 비워둘 수 없다는 대신들의 상소 때문에 남편인 명종을 잃은 슬픔을 마음대로 느낄 새도 없이 그들의 성화에 따라 대권의 주인을 정할 수밖에 없었다. 친정인 외척의 권세를 명종이 모두 묵살해 버렸으니 이 난국을 누구와 의논할 것인가. 옹주라도 있었으면 마음이라도 의지할 것이라고 한탄해 보지만, 하나밖에 없는 세자와 임금을 한꺼번에 일어버렸으니 누구를 원망할 것인가. 대신들이 원하는 대로 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인순왕후는 세자도 임금도 없는 대궐 일에 애착이라고는 없었다. 그러나 누구로 왕위를 이을 것인가. 하는 마지막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자가 죽을 거라고는 꿈에서라도 예상하지 못하고 살았던 인순왕후는 한꺼번에 아들과 임금을 잃어버린 슬픔과 팔자 사나운 여인으로 왕실 어른의 자리를 지켜야한다는 사실에 혼절할 지경이었다. 자신을 지키려는 마음에서 대신들이 천거하는 대로 새 임금의 즉위를 받아 들렸다.

  16세인 하성군을 새 임금으로 천거하였다. 중종의 7자의 아들로 태어난 하성군은 대궐에서 기습적으로 들이닥친 대신들 때문에 정신이 혼미하였다. 임금의 자리는 잠시도 비워둘 수 없다는 대신들이 어가를 들이밀자 하성군은 어머니의 상중이라 갈 수 없다고 울면서 사양했지만 그것은 막을 수없는 역부 적이 었다. 상중에 강제로 끌려가 왕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인순왕후의 눈에 하성군이 있었다. 세자가 죽자 후사가 없는 왕실에 하성군이 어떠냐고 명종의 의중을 떠 보기도 하였지만 명종은 허락하지 않았었다. 세자가 죽은지 2년 뒤 갑자기 명종도 승하하자 화성군을 새 임금으로 임명 하라는 인순왕후의 명이 떨어졌다.

  하성 군이었던 선조는 선왕의 윤허도 없이 왕위에 오른 것이다. 세자로서 교육도 못 받은 어린 왕에 대한 수군거림은 처음부터 선조의 마음을 소외시켰다. 왕실의 최고 어른인 명종비가 없었다면 더욱 소외된 왕이 되었을 것이다. 왕의 교육은 인순왕후의 대리청정으로 받았다. 17세의 나이로 그 무거운 왕의 자리에서 정사를 책임지는 것이 쉬웠을 리가 없다. 조선에서는 왕이 자주 바뀌는 혼란을 틈타 외세의 침략이 빈번하였다. 아무 경험도 없는 임금이 나랏일을 얼마나 잘 할 수 있었으랴. 어린 임금을 기회로 좌지우지하는 세력은 임금이 바뀔 때마다 세력구축에 촉을 세웠다. 어린 임금은 낯선 대궐의 기둥하나까지도 부서워 울고 싶었을 것이지만 대궐의 어른인 인순왕후를 믿고 정사를 볼 수 있었다.

 

  선조는 무기 개발에 관심이 많았다. 임금이 되자, 선조의 비호 아래 화포장이 만들어졌다. 이 비격진천뢰라는 무기는 선조 때에 군사적 목적으로 만든 것인데, 임진왜란 때 1만여 명의 조선군을 이끈 장수 박진은 비격진천뢰를 경주성 안 왜군 진영에 발사 해 순식간에 비격진천뢰 하나에 20여 명의 왜군을 즉사시켰다. 왜군은 비격진천뢰의 위력에 놀라 사생포로 철수했다. 박진의 조선군은 1만여 석의 곡식을 노획 했고 경주 탈환이라는 위업을 달성하였다. 이렇듯 임진왜란 이전부터 비격진천뢰 개발 등 화포의 개량 및 제작에 선조는 국고를 아끼지 않았다. 선조가 무엇보다 가장 큰 관심을 가졌던 것은 바로 조총이었다. 선조는 임진년 변란을 겪으면서 왜군이 사용하는 조총에 큰 관심을 가졌는데, 조선군이 왜군을 포로로 잡으면 반드시 조총 제조 술을 알아내라고 명을 내릴 정도였다. 또한 포로로 잡은 왜군을 무자비하게 참수하는 조선군에게 경고를 내리기까지 했다. 선조는 임시 무과 시험의 새로운 규정을 반포했다. 무과에 조총 사격 과목을 새로 추가시킨 것인데, 우수한 성적을 거둔 자에겐 금군(왕의 호위 군사)이 될 수 있거나, 아니면 후한 상을 내려주는 혜택은 주었다. 선조는 조총술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노비든 양인이든 신분을 막론하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실력 있는 자를 금군에 임명하기도 하며, 또는 면천의 특혜를 주었고, 예비 포수의 가족들에게 곡식과 상금을 내리는 등 후하게 대우를 해주었다.

  1594년(선조 27), 선조는 비변사에 조총 사용법의 전습과 왜 포로의 귀순 권유 등을 명했다.

  “전하, 포로로 잡은 왜적을 대국인 명나라에게 보고하여야 하옵니다.”

  선조가 이르기를,

  “대국에게 보고할 필요 없다. 만약 우리나라가 대국에게 보고할 시, 왜인 포로들을 데려갈 것이다. 이 왜인 포로들이 조총과 염초의 기술을 안다고 하니, 잡아 두고 우리 군사에게 이 기술을 전습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

  조총에 대한 선조의 사랑은 선조가 직접 조총을 만드는 기술을 습득할 정도로 관심을 기울였다. 선조는 유성룡에게 전교하기를,

  “조총은 천하에 신기한 무기인데, 다만 화약을 장전하기가 쉽지 않고 혹시라도 선이 끊어지면 적의 화살에 맞아 죽게 될 것이다. 과인이 이를 염려하다가 우연히 이런 총을 만들었는데, 한 사람은 겨냥하여 쏘고 한 사람은 화약을 장전하여 돌려가면서 다시 넣는다면 탄환이 한없이 나가게 될 것이다. 다만 처음 만든 것이라 제작이 정교하지는 못하다. 비치해 놓고 한번 사용해 기술을 습득하기 바란다.”

  선조 시대를 중심으로 조선군 전체 병종 비율에 있어서, 포수의 비율이 상승하기 시작하였다. 임진왜란 중, 후반기에는 조선군 포수의 활약이 돋보이면서 곳곳에서 왜군들을 상대로 적잖은 전과를 몰리기도 했다. 특히 선조는 조총으로 무장한 포수들을 북쪽 변방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북쪽 변방에서 누르하치의 건주 여진 부락이 점차 강성해지고 있었다. 조선의 감시와 지배를 받고 있었던 변방의 여진 부락들이 이탈하면서, 조정에서는 변방의 여진 부락들을 정벌함으로써 변방의 안정을 기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전하, 야인 오랑캐가 북쪽 변방에서 횡포를 부리니, 토벌을 하지 않으면 변방을 안정시킬 수 없을 것이옵니다. 이번 토벌은 포수를 동원하지 않으면 작전 자체가 불가능하옵니다.”

  선조는 국경 지역의 정예 포수 수 백여 명과 기병 5천을 동원하였다. 1600년 4월 14일부터 16일 이틀 사이에 300여 리의 여진 땅을 장악하고 장주 부락을 비롯한 여타 부락까지 1천여 채 이상의 여진족의 집을 불태웠다. 곳곳에서 조선군의 학살전이 전개되면서 1만여 명의 여진족을 학살했다. 선조 33년인 1600년 함경도 관찰사 윤승훈이 오랑캐를 토벌한 전과를 선조에게 보고했다. 수시로 침략을 하던 오랑캐 일당들은 조선의 조총 실력에 혼비백산하였다. 악에 바친 조선군은 다시는 조선을 업신여겨 침략할 수 없도록 잔혹하게 그들의 목숨을 짓밟앗다. 현지 사령관의 표현에 따르면 이번 싸움에 포수가 없었다면 완승을 거둘 수 없었을 것이며, 조선군은 현장에서 총을 쏘며 승전 의식을 거행하기도 하였다. 이후 쫓겨 가던 여진족을 기병대들이 다시 추격해오자 조총으로 여진족 기병대 수십여 명을 사살하면서 무사히 국경을 넘어 조선 땅으로 귀환했다. 우리나라의 약점은 바로 화포를 사용하지 못하는 데 있다! 이제 마땅히 각 도는 화약을 많이 구워내는 한편, 사람들에게 방포를 가르치되 한 사람이 열 사람을 가르치면 그 열 사람은 또 백 사람을 가르치고, 그 백 사람은 천 사람을 가르치며, 천 사람은 만 사람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면 몇 해 지나지 않아 모두 훌륭한 포수가 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안이하게 대처한다면 어린아이가 불이 난 집에서 나오지 못하고 우는 것과 같다. 이 말을 여러 승지들이 잊지 아니하고, 기억하여 후일까지 전한다면 반드시 나라의 안위를 지키는 교훈이 될 것이다. 당대 사대부와 선비들 혹은 사관들은 선조의 조총기에 대한 열정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신록에 사관은 신랄하게 선조를 비판했다. 조총이 적을 막는데 유리한 것은 사실이지만, 임금이 무기의 장점을 논한다면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므로 임금의 직분에도 맟지 않은 것과 같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참으로 통탄스럽구나. 선조가 조총에 대한 열정으로 사대부들에게도 조총의 훈련을 권유하자, 그들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그들의 권위가 임금보다 아래 있음에도 스스로 양반임을 내세워 임금의 행위를 비웃었다. 조총을 배워서 무엇에 쓸 것인가. 전쟁에 나가 쓸 일도 없는데 배워서 무엇 하겠느냐, 우리 사대부에게는 쓸데없는 기술이다. 조총 기술은 천한 놈들이 배우는 것이다. 그들의 안이한 마음 때문에 선조 사후, 조선은 무기 기술 개발에 진력하지 않았다. 표현에 의하면, 비격진천뢰와 같은 병기도 선조 이후 개발이 끊겼다.

  선조 임금은 역대 최상의 인재를 둔 임금이었지만 그 인제를 제때에 쓰지 못하였다고 한다. 지혜가 모자라 그럴 수도 있고, 어려서 판단력이 모자라 그랬을 수도 있다. 사대부들의 탁상공론이 임금의 성지를 흐려 그랬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라에 대한 걱정이 남달랐던 선조는 역사에 오명을 남긴 임금이 되었다. 처음과 끝지 같이 않은 것이 사람이다. 나라의 위급을 알리는 충신들의 장계 까지도 무시해 버렸다. 왜의 침략 위협이 심각했음에도 이를 파악하지 못한 조정이 임진왜란의 큰 위기를 무시했기 때문에 충신의 간언에 귀를 막고 선조 임금은 이순신장군에게 역사적인 업적을 넘겨주었다.

  조선 시대의 충신인 이순신 장군이 라든가 율곡 이이의 과학적 선경지명을 알지 못했고, 왜군의 침략을 무시했던 대가는 나라의 존망을 시험하는 위기를 초래하였다. 유비무환의 정치를 하였다면 조선은 훗날 나라를 빼앗기고 36년의 긴 세월 동안 울분과 고통 속에서 목숨을 빼앗기는 불운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일이다.

  언제나 그러하듯 나라를 책임진 권력가들의 판단이 바로 섰다면 역사의 굴곡은 없었을 것이다. 역사를 이끌어간 모든 사람들은 좋은 역사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했을 것이다. 역사에 길이 남아 대대손손 추앙받고 싶었을 것이다. 생물과 같다는 권력을 쥔 자는 귀가 밝아 야하고 정의를 위해 눈이 반짝거려야 할 것이다. 곧 썩어 얻어질 몸에 비단을 휘감는 어리석음은 자신과 역사를 파괴하는 무기가 된다.

  선조 임금의 입지가 탄탄하지 못한 조선은 술렁였고, 왜군이 조선을 넘보는 행위로 이어졌다. 한양에 빈번하게 일어나는 해상 도발의 심각성을 파악 할 수 없다. 급한 장계를 받고서도 분분하게 의견이 엇갈려 임금은 누구의 말이 옳은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연이어 올라오는 급보의 심각성을 외 견하여 역적 아닌 대신들의 질투와 시기는 나라 팔아먹는 행위와 마찬가지였다. 그 순간 임금의 지혜로운 판단이 해결책이다. 무능함은 곧 바다를 지키는 수비대들의 목숨이 초개처럼 살아져 가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별동부대의 인원도 각 전쟁에 참전하여 부대원이 거의 소멸되었다. 선조는 선대왕 명종처럼 무과 시험을 선포하였다. 신분보다는 실력을, 신분상승의 기회를 강조 하였다. 그러자 양반 세력의 강한 반대가 있었다. 결국 사노비들은 그 주인에게 면천의 대가를 지불한다는 것으로 절충되었다.

  바다의 수비 인원도 모라라는데 육지에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조선 근처를 떠나 거주하고 있던 여진족은 흉년으로 인한 식량부족과 세력 다툼 때문에 세력을 결집 하기위하여 조선을 공격했다. 북방 지역은 또다시 여진족 공세에 직면하게 된다. 그 때 여진족 수장은 니탕개였다. 니탕개는 한 때 조선에 귀화하였다가 다시 돌아간 사람이다. 그러기에 니탕개는 조선의 지리적 조건을 잘 알뿐 아니라 조선의 군 방어체계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 때부터 육지에서는 오랑개들과 수없이 전쟁이 벌어진다.

  선조는 불교에는 관심이 없었다. 선대 명종 때부터 불교를 탄압하였다. 전쟁을 위해 조선의 젊은이들이 전장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는 이때 나라의 정세를 몰라라 공부만 하는 스님들을 전쟁에 참여하게끔 각 사찰의 종을 몰수하여 전쟁에 쓰일 무기를 만들었다. 사찰에서 공부하던 스님들도 전쟁에 내몰리는 시기였다. 임진왜란 때 수군이 되어 나라를 도왔고 그 시기에 사명대사가 출현하게 되었다.

  어느 날 병조판서 안달흥이 수비대를 찾았다. 무극은 그때 마침 왕실호위 임무를 마치고 퇴궐하려던 참이다. 대궐에 들어온 지도 여러 해가 지나고 경제적 여유도 생겼다. 한양 한 곳에다 집을 마련하여 가족과 살고 있었다.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이 무과에 급제하여 임금을 모신다는 말에 분이를 비롯해 가족이 자빠질 정도로 놀랐다. 나이가 이미 혼기가 차 있었다는 걸 깨닫지 못하고 맡은 임무에 전념 했다.

  “대감이 여기 어인 일이십니까. 가내는 평안하십니까?”

  그때 달랑성 전투에서 몸의 이상으로 정신을 잃고 내의원에 있을 때 무극의 인물이 출 충 하다는 것을 안 안달흥은 무극이 속히 건강을 회복하기를 바랐다. 내의원에서 나갔다는 소식은 오래 전에 들었지만 나랏일이 변화무상하여 군사를 지휘하는 임무를 맡고 있는 병판의 책임이 막중하였다. 그러한 바쁜 일정에 시간의 여유를 얻어 퇴궐하는 길에 들렸다.

  “그래 몸은 어떤가?”

  처음 안흥과 만났을 때는 오금이 저려왔는데 친근감에 그런 말도 하게 되었다.

  “자네 나와 약주 한 잔 하려나?”

  다른 사람이 있는 관계로 스스럼없이 의견을 물었다. 의아하여 잘못 들었는가하고 안달흥을 처다 보았다.

  “퇴궐 하는 길에 말일세.”

  어느 안전이라고 토를 달 것인가. 옆 사람의 눈도 있고 하여 예의를 갖추고 그러마고 대답하였다.

  “자네도 말을 타고 따라오게, 나도 오랜만에 말을 타고 갈 것이네.”

  마구간의 말을 타고 가자고 하는 것을 보니 먼 곳에 주막으로 가려나 하는 생각으로대답 하였다.

  용비마를 보니 반갑다. 가끔씩 말을 단련시켜야 하기에 퇴궐 후에 용비마를 타고 달리는 때가 많았다. 주인을 알아보고 몸짓으로 반가움을 표현하는 용비마가 가족인 양 친숙하여 서로 마음이 통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말을 보면 명종 임금의 생각이 났다. 지금껏 함께 하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용비마를 안고 목을 쓸어 준다. 집에 갈 때도 용비마를 타고 다녔다. 말을 끌고 나왔다. 마장이 따라 나오며 인사를 하였다.

  “내일 뵙지요.”

  “안녕히 가십시오,”

  성 밖에서 만나기로 했기에 말에 올라 성 밖으로 나왔다. 아직 안달흥은 보이지 않았다.

  안달흥은 평소에는 사인교를 이용해 퇴궐하였지만 무극과 둘이 말을 타고 싶었다. 안달흥은 아침에 나올 때 집에다 일렀다. 오늘 손님 한 분이 오실 터이니 집안을 치워놓고, 딸아이에게도 예쁘게 단장을 하고 있으라 했다. 맛있고 영양 있는 음식을 가려서 챙겨놓으라 일렀다.

  ‘무슨 일로 딸아이까지 단장하고 있으라고 하십니까?’ 뒤에서 부인이 하던 말이 들리는 듯 하였지만 이렇다 할 대답을 주지 못하고 대문 밖으로 나왔었다. 그만하면 대강 짐작을 할 터라고 부인에게 다른 말은 할 필요도 없었다. 혹시나 약속이 어긋날 수도 있기에 하루 종일 마음이 쓰였다.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안달흥이 웃으며 옆으로 섰다. 무극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그의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번하한 거리를 피해 한적한 들로 말을 몰았다. 그 뒤를 따라 말을 몰았다. 나라가 우울 하지만 밖으로 나와 말을 달리니 신선했다. 더구나 높은 사람과 말을 타고 한가로이 들을 달려 보는 것은 처음이다. 무슨 일일까. 내게 무슨 말이라도 하려는가. 따로 만나서 할 이야기가 무엇이란 말인가. 나라일 같으면 대궐에서 명령할 일이지 밖으로 나와 만나자는 속 샘을 알 길이 없었다.

  한참을 달리던 말이 좁은 마을길로 접어들었다. 말이 속도를 줄이고 좁은 두렁 길

 한참을 달리던 말이 좁은 마을길로 접어들었다. 말이 속도를 줄이고 좁은 두렁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한 마디의 말도 서로 하지 않았다. 어둠이 마을을 점령하고 있었다. 한양 어딘가에 이런 곳이 있는가 할 정도로 처음 와 보는 부자 마을이 집집마다 저녁연기로 아련하다. 참으로 평화로워 보였다. 밭일 나갔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안달흥이 타고 가던 말이 고개를 휙 돌리더니 소리 내어 울며 어느 집 앞에 섰다. 마당도 넓고 집도 컸다. 말울음소리에 안에서 가족이 달려 나와 인사를 한다. 한 사람이 말고삐를 잡고 안으로 들어간다.

  그 모습에 가만히 있던 용비마가 고개를 높이 들고 푸득 거렸다. 나는 말의 목을 쓰다듬으며 말에서 내렸다. 또 다른 사람이 내 말 고삐를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버지 다녀오셨습니까, ”

  소리 나는 쪽은 대감의 딸인 듯 웃으며 앞으로 나와 대감의 손을 잡았다.

  “손님이 오셨는데 인사 하여라!”

  대감의 가족인 듯 마당으로 나와 인사를 한다.

  “들어가세.”

  사전에 아무 말이 없었던 그가 웃으며 말했다. 무극은 의아한 뒤를 따라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안에서 나오는 음식 냄새가 코로 들어왔다. ‘이, 무슨 일인가?’ 생각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미안 하이, 진작 말을 안 하고 데려와서. 우선 편히 앉게나. 자네에게 우리 집 음식을 대접하고 싶었네. 놀랐겠지만 나의 마음이라 생각하고 용서하게.”

  “아닙니다. 조금 놀랐을 뿐입니다. 영광스럽게 집으로 초대해 주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미리 말씀해 주셨다면 마음의 준비라도 하고 왔을 텐데 제가 경황이 없습니다.”

  “그럴 것 없네. 앞으로 친하게 지내면 되니까. 윗도리를 벗고 집이라 생각하고 편안이 안게”

  이렇게 부드럽던가. 병조판서가 아니던가. 군대를 총괄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한 가정의 주인으로 돌아오니 저리 다정할 수도 있구나. 할 정도로 너무 달라 보였다. 윗도리를 벗고 앉으려는데 마당에서 부터 풍기던 냄새가 밥상으로 차려져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음식이 나왔다.

  “일찍 이런 자리를 만들고 싶었는데 늦었네,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들게”

  마주하고 상 앞에 앉았다. 무엇부터 먹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맛있는 음식이 많았다. 궁궐의 일이며 새임금의 일이며 세상 돌아가는 일들을 이야기했다. 여진족 니탕개가 조선에 들어와 저지르는 약탈에 대한 이야기도 하였다. 어색했던 자리는 술이 오고 가며 나라 걱정하는 마음이 일치하여 금방 편안해 졌다. 어느덧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되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안달흥은 무극을 데려 온 목적이 있는 만큼 이제나 저제나 딸에 대한 말을 끄집어 낼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상, 하가 구분되어 있는 술자리는 절제하게 되어있다. 술로 인해 말이라도 헛 나오는 실수를 저질러서는 안되기 때문에 대화의 촉매로만 술을 이용하는 것이다.

  “자네는 형제가 어떻게 되는가?”

  나라 걱정에서 분위기를 한 풀 내려 의도했던 대로 무극의 신상에 대한 질문이 자연스럽게 대화에 올랐다. 무극은 부모님과 동생 둘이 있고, 얼마 전에 가족이 한양으로 올라와 함께 살고 있음을 말했다. 한양 생활이 아직은 익숙지 못하고 지난번 북한성을 빼앗겼을 때 어머니가 성문 밖에서 자식의 안부를 묻느라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며 아들 걱정에 노심초사 하였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그 때는 대궐의 임금을 비롯해 모든 백성들이 가슴을 조였는데 자네의 쾌거 덕에 한 순간 시름을 덜었네. 그 임금이 오래 살았다면 더 좋았을 텐데... 이제 다시 나라는 바람 앞에 등불이 되어 조선의 백성들은 전쟁에 몸서리를 치고 자식에 대한 걱정이 하늘을 찌를 만도 하지. 부모의 마음은 같은 것이라며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혼기가 된 딸이 있으며 지켜본 결과 무극에게 딸을 마껴도 될 것 같아 겸사겸사 함께하게 되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안쪽을 대고 큰 소리로 불렀다. 기다렸다는 듯이 부인이 달려왔다.

  “부인, 상을 물리고 차를 내오시오. 그리고 우리 하린이좀 사랑으로 나오라 하시오.”

  나는 술이 확 깨는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지체 놓은 안달흥의 말에 토를 달수도 없는 어려움이 자리를 황망하게 만들었다.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의녀 사미란을 몇 번 찾아가 만나면서 미란이라면 혼인을 하여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여자에 대한 마음이 미란으로 인해 생기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 한양 생활에 자리를 잡지 못한 처지라 대감의 집안과 혼인할 입장이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이 황당한 자리를 털고 일어 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무어라 반대의 말도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안에서 나와 상을 들고 나갔다. 안절부절 콩닥거리는 마음을 것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술이 갑자기 올라 얼굴이 달아올랐다. 미닫이문이 사르륵 열리더니 소녀 같은 앳된 모습의 여인이 차반을 들고 살포시 들어왔다. 얼굴에 홍조를 띠고 수즙어하는 모습을 보니 처음 마당으로 들어올 때 보았던 그 처자였다. 그렇게 명랑한 모습으로 아버지를 부르던 조금 전의 그녀가 아니었다. 아버지 옆에 차반을 내려놓고 일어서는 모습은 얼핏 보기에도 훤칠한 키와 입고 있는 옷이 너무나 잘 어울렸다. 순간 예쁘다는 생각을 하였다. 정신을 못 차리고 앉아있는데 나의 앞에서 두 손을 이마에 대고 큰절을 하는 것이 아닌가. 황망히 일어나 마주 절을 하였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입가에 어린 엷은 미소가 그녀의 마음을 말해주었다.

  “장군께 차 한 잔 따라 올리거라.”

  그녀의 예쁘고 고운 손놀림을 혼이 나간 사람처럼 바라보았다. 여인을 품어도 될 나이가 이미 지나서 그런지 옆에 사람이 없다면 와락 끌어안고 싶은 충동이 솟았다. 그녀의 아름다운 자태에 사내의 음흉한 본색을 감추지 못하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미란과 다른 매력을 풍기는 처자라는 생각을 하였다. 대감은 잠시 소피를 본다며 밖으로 나갔다. 하린이 고운 손으로 건네는 차를 받으며 서로 눈이 마주쳤다. 나는 한마디 쯤 해야 했다.

  “고맙습니다. ”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자신의 잔에도 차를 따랐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차 맛을 음미하며 마셨다. 실수를 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숨이 막히던 순간에 차의 부드러운 향기가 마음을 안정시켜 주었다. 말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차를 음미하는 시간은 두 사람에게 지루하지 않았다. 그녀의 손이 또 찻잔에 닿았다. 그녀가 따르는 차 향이 몸에 밴 듯 바라보는 눈빛이 은은하다. 처음 잔은 향을 음미하는 시간이었지만 두 번째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차 향이 좋습니다.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고개를 다소곳이 숙이고 이를 드러내지 않고 미소로 답례를 할 뿐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열여섯 살인 그녀는 아버지로부터 무극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다. 무예가 띄어나며 머리도 비상하여 임금을 기쁘게 하였다는 말을 들었다. 키에 인물이 출중하여 장군의 기계가 있는 무극을 사위로 삼고 싶은 사람이라고 말했던 아버지의 말에 가슴이 설렜던 생각이 났다. 어둑한 마당에서 본 무극의 모습에서 하린은 첫눈에 마음에 들었다. 저녁내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의 앞에 앉아 있다는 것이 꿈이 아닐까하고 가슴이 뛰었다. 그러나 귀한시간이 아까웠다.

  “제 이름은 하린이라 합니다. 아버님께서 장군님 말씀을 하셔서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장군님을 이렇게 뵈올 줄은 몰랐습니다. ”

  조선의 양반집 아녀자가 처음 본 사내 앞에서 또박또박 말을 하고 있었다. 남녀 칠세가 되면 서로 마주 처다 볼 수도 없다는 조선의 아녀자가 아니던가, 무극은 속으로 놀랐다. 그리고 호기심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가슴의 안정을 찾아 그녀를 바라볼 수 있었다.

  “평소 대감님을 존경해 왔는데 오늘 초대를 받고 보니 기뻤고 음식도 잘 먹었습니다. 그리고 하린 처자가 손수 끓여 오신 차를 마시니 마음이 흡족하여 다음에 또 오고 싶어 질것 갔습니다. ”

  고개를 약간 숙여 고마움을 표했다. 안달흥이 장인이 된다면 그리 나쁠 것도 없었다. 저리고운 처자를 맞아 아내로 삼는다면 부러울 것이 없을 것 같기도 하였다. 속으로 계산을 하는 자신이 음흉 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생각지 못했던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오랜 계획 끝에 진행된 일을 혼자 모르고 있었다고 해도 자존심이 상할 일은 아니다. 그녀와 마주앉아 보니 가정을 갖고 싶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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