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데자뷰를 느끼며 눈동자만 굴려 한율을 쳐다봤다.
한율은 진짜 미치겠다는 듯 백호가 보름을 내보내려 했다.
"제발! ...제발 아버지. 도대체 언제, 제가 이러실까 봐 화연보다 먼저 만나러 나간 것인데. 제발요. 이러지 않기로 하셨잖습니까. 나가세요. 여기서 나가세요. 이러는 게 화연과 저의 사이를 악화시킨단 걸 왜 모르십니까."
"한율아. 정말 왜 이러는 거냐. 저 천호는 네가 이렇게 배려해주지 않아도 되는 위치의 사람이란걸 내 그리 가르쳤는데. 저기 있는 저 천호는 빈껍데기, 네가 진정한 천호. 그러니 제발 저 아둔한 천호에게 아량을 베풀지 마라. 네가 원한다면 저 천호는 방한구석에 박혀 너만 보게 될 거다. 내 그리해준다 몇 번을 말했느냐."
"아니요! 저야말로 그걸 원하지 않는다 몇 번이나 말합니까! 저는 진심으로 화연의 마음에 들어가고 싶은 겁니다. 마음이 없는데 빈껍데기만 제 곁에 있다 한들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그에 백호가 보름이 나를 노려봤다.
"대체 어떤 술수를 부렸기에!"
"화연은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그것을 잠시 지켜보던 나는 한율을 만류했다.
"한율, 잠깐만."
한율은 저번처럼 내게 내쳐질 걸 생각했는지 울 듯한 표정으로 나를 허망하게 쳐다봤다.
근데 설마 내가 전의 천호처럼, 자동행동 기능이 씌워 졌을 때처럼 아무 잘못 없는 네게 인성 질을 할까 봐.
나는 안심하라는 뜻에서 한율에게 한번 웃어주고 백호가 보름을 지극히 여유로운 표정으로 쳐다봐주었다.
목소리 또한 격하지 않게.
"백호가 보름. 사람에게 사지를 자르고 눈알을 파내어 궁 깊은 곳에 처박아 놓겠다니. 여호의 품위를 잊은 거야? 그리 천박하게, 감정을 못 이겨 소리는 꼴이라곤. 그럼에도 잘도 보름 자리에 앉아있네?"
백호가 보름의 입장에선, 이런 천호의 태도는 처음이니 백호가 보름은 어이없어서라도 입을 다물었다.
당한 걸 갚아줄 여건이 되면 반드시 갚아준다.
목숨과 신체는 시스템이 보호해준다?
즉, 당한걸 갚아줄 여건이 된다는 것.
나는 내 신조에 따라 백호가 보름을 비아냥거린 건데, 순간 너 이거 잊었지? 열 받아서 이거 잠깐 망각했지? 라고 놀리듯 시스템 창이 떴다.
{백호가 보름과 한율은 부모님과 자식 사이다. 백호가 보름이 한율의 아버지.}
아, 미친.
진짜 열 받아서 생각 안 하고 내뱉었는데 백호가 보름 한율 부모님이잖아.
자식 앞에서 부모랑 싸우는 건 조금...
나는 슬쩍 눈을 굴려 한율의 반응을 살폈다.
응...?
왜 더 하라는 듯, 응원하는 표정이지?
나보고 지금 너네 아버지 갈구라고? 싸우라고?
심지어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작전 시작 전의 스파이처럼 굳건한 얼굴로 진지하게 고개를 한번 끄덕이기까지 했다.
필시 허락의 뜻이렷다.
진짜로? 나 싸워...? 네 아버지랑?
으음... 나야 뭐 저런 반응이 나쁘진 않다만 백호가 보름 입장에선 머리가 꼭대기까지 돌아버리는 기분이겠는데...?
그러나 한율이 응원해준다고 해서 백호가 보름과 본격적으로 싸울 건 아니었다.
시스템이 한율과 백호가 보름은 부자 사이라는 걸 다시 각인시켜줬으니까.
아니, 솔직히 (여기 세계관에선 내가 잘못한 게 아니지만 현실로 친다면 ) 내가 잘못한 부분도 있는데 자식인 한율 앞에서 제 부모인 백호가 보름과 싸우는 건 좀 그렇잖아.
게다가 진실을 모르는 백호가 보름이 열 받아 나를 죽이겠다 찾아온 것도 충분히 이해하고.
나 같아도 내 자식이 제 반려, 그 반려의 첩.
이렇게 셋이 잤다 하면 눈 돌아갈지 몰랐다.
게다가 내 자식의 침대에서.
근데 내 자식의 반려가 평소에 내 자식한테 상처만 줬던 자다?
그럼 죽는 거지.
아, 그래서 백호가 보름이 날 룬으로 죽이려 했네.
완전히 납득한 나는 본격적으로 싸우려고 했던 태도를 버리고 책상에 기대듯 걸터앉으며 팔짱 꼈다.
“백호가 보름, 무슨 생각을 하며 여기 왔는진 충분히 이해하는데 조금만 진정해. 여기엔 다 사정이 있으니까 그걸 듣고서 상황을 판단해도 늦지 않아.”
존댓말은 당연히 하지 않았다.
이유가 어쨌든 날 죽이려던 자한테 존댓말 할 정도로 성격이 좋진 않으니까.
날 룬으로 죽이려는 것도 실패했지, 한율은 저를 말리지, 나는 본 적 없는 태도로 저에게 제안해오지.
기선제압에 실패한 백호가 보름은 한 발짝 물러났다.
“그 사정이란 거 어디 한번 말해보십시오.”
물론 쓸데없는 거면 반드시 죽여버릴 거다, 라고 말하는 듯한 형형한 눈빛은 지우지 않은 채.
그에 나는 저번에 한율과 바론에게 말했던 것처럼 룬이 통하지 않는다, 파장이 맞아야 잠을 잘 수 있다, 열심히 입을 놀렸다.
물론 전부 내 근거 없는 생각이고 조금만 오류를 지적하면 어버버 거릴 변명이지만 말하기만 하면,
{백호가 보름은 당신의 말을 받아들이고 납득합니다.}
시스템이 이렇게 만들어 줄 테니까.
백호가 보름은 내 말에 일리가 있다 생각은 하면서도 마음에 들진 않으니 인상만 와그작 구겼다.
그러다 내뱉은 말은 이것.
“그렇다고 세 명이서 밤을 보낸 겁니까.”
나는 기다렸다는 듯 바로 받아쳤다.
“그럼 바론 하고 단둘만 보내? 그리고 나는 많은 이성을 거느려야 할 의무가 있는 하늘의 핏줄. 오로지 한율만 곁에 둔다고 장담하진 못하지.”
그 말에 백호가 보름은 순식간에 열이 받아선 내게 호통쳤다.
“하늘의 핏줄! 많은 이성? 지금 천호의 자리에 앉은 게 누구 덕인 줄 알고 입을 함부로 놀리느냐! 좋다, 내 제 위치를 파악 못 하고 방정맞게 놀리는 그 입을-,”
저런 반응을 예상하고 있던 나는 당황하지 않고, 역정을 내며 룬을 위험하게 움직이려는 백호가 보름의 말을 평탄한 어조로 끊어냈다.
“이 나라를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여러 명의 아이를 낳아야 하는데, 아이 낳는 게 얼마나 건강에 부담되는지 알지? 그걸 어떻게 소중한 한율에게만 부담 시켜. 그리고 셋이서 자게 된 건 첫 합방은 한율을 택하기로 약속했으니 어쩔 수 없어.”
내가 많은 이성을 거느리는 건 한율을 위해서이기도 하잖아, 당연한 거 아니야? 가 자연스럽게 담겨있는 내 말에 백호가 보름은 순간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흡사 이 미친 천호가 지금 진심으로 내뱉는 건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내뱉는 건가 판단이 안 서는 사람 마냥.
그에 뭔가 이긴듯한 기분이 들어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돌리는데,
“...”
멍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보석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한율이 보였다.
아니, 왜?!
“왜 울어! 나 지금 또 이상한 말 한 거야?”
미친, 또 뭔가 트라우마나 지뢰를 밟은 건가? 뭐지? 왜!
한껏 당황해하며 한율에게 다가갔는데 한율이 고개를 떨군 채,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응? 뭐라고? 안 들려. 울지 말고 말해봐. 나 잘못했어?”
“그게 아니라, 믿기지 않아서.”
“응? 뭐가 믿기지 않아?”
“화연이, 화연이 이렇게 절 위하는 말을 하는 게 믿기지 않아서, 갑자기. 죄송합니다. 저 원래 눈물이 많지 않은데. 추태 부려 죄송합니다.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아, 이해한다.
그동안 얼마나 못된 말만 들었으면.
시스템 창이 알려주는 조각들만 읽어도 알 수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그런 못된 말만 듣고 있다 갑자기 다정하게, 위하는 말을 해주면 기다렸다는 듯 눈물이 날 수도 있지.
“추태는 무슨, 절대 아니야. 눈물 많은 게 뭐, 많을 수도 있지. 이해해. 미안해.”
절대 눈물을 뚝뚝 떨구는 한율이 애처롭게, 한 떨기 꽃처럼 잘생겨서 이러는 게 아니다.
한율의 푸른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이 보석처럼 보이는 것도 한율이 잘생겨서가 아니다.
응, 아무튼 아니다.
나는 약간 까치발을 들어 소매로 한율의 눈물을 닦아주며 달래듯 말했다.
“내가 이제 잘해준다 했잖아. 익숙해져야지, 응?”
그에 더 비 오듯 떨궈지는 눈물.
더 위로받고 싶다는 듯 안아오는 몸짓.
나는 기꺼이 한율을 마주 안아 토닥였다.
그리고 딱, 몹시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백호가 보름과 시선이 마주쳤다.
앗, 잠깐.
굉장히 머쓱한데?
한율의 눈물에 정신 팔려 백호가 보름을 잊고 있었다.
“큼,”
나는 괜히 민망함의 헛기침하며 백호가 보름의 시선을 피했다.
아씨, 둘만 있을 땐 몰라도 다른 사람이 있는데 막 이러게 애정이 어린 낯간지러운 말을 내뱉고 막 눈물 닦아주고 하는 건 조금 창피한데.
창피해서 약간의 열감이 올라온 나는 약간 몸을 움직여 완전히 한율의 품에 파묻어 들어갔다.
*
백호가 보름은 오글거릴 정도로 다정한 한율과 나를 봐서 그런가, 현실의 부정하는 건가, 급 침착해져선 말했다.
“제가 일주일 후, 모든 여자를 궁으로 불러드리겠습니다. 그럼 폐하께선 그들을 한 번씩 안아보며 파장을 맞는 이를 찾으시지요. 단 한 명이라도 찾는 그 즉시, 바론 예무, 한율, 폐하. 이렇게 셋이서 잔다면 이번에야말로 사지를 자를 겁니다.”
물론 강압적인 태도는 그대로였지만.
아, 그 뒤에 덧붙이는 무리한 요구까지도.
“그리고 폐하께선 제가 공문을 내리고 사람을 모으는 일주일 동안, 그 후, 파장이 맞는 사람을 찾을 동안 이렇게 셋이서 자는 건 자제하십시오. 그래, 삼일에 한번. 죽을 것 같을 때즘에야 바론 예무를 사용하십시오.”
거기까진 허용해 줄게.라고 도도하게 말하는 백호가 보름을 한 대 치고 싶었다.
삼일에 한번? 죽을 것 같을 때?
그날 하루 안 잤는데도 죽을 것 같았는데?
게다가 어차피 바론 품에서만 잘 수 있는데?
이게 말인가 똥인가 싶어 썩은 표정을 지으며 안된다 하려 했는데 한율 또한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나보다 먼저 반대 의사를 밝혔다.
“안됩니다. 그날 하루도 화연은 엄청 힘들어했어요. 화연이 그렇게 힘들어하는 걸 볼 바에 차라리 제가 우울해지겠습니다. 화연, 못 들은 걸로 하시고 파장이 맞는 사람을 찾을 때까지 셋이서, 어제처럼 주무시죠.”
“한율!”
한율은 백호가 보름의 호통에도 지지 않겠다는 듯 단호하게, 뭐 문제있냐는 듯 답했다.
“예, 아버지.”
그에 백호가 보름이 골아파다는 듯 인상 쓰며 관자놀이를 누르는 것은 당연했다.
“한율아, 도대체 왜 그러느냐. 응? 아이고, 내가 이 꼴을 보려고 그리 소중히 키운 것이 아닌데.”
아, 음...
저걸 보고 있자니 왠지 미안해졌다.
확실히 한율도 남의 집 귀한 자식인데.
그러다 깨달았다.
모든 건 바론과 화해만 하면 해결되는 거 아닌가?
아무래도 시스템은 안겨있을 목적이 아니면 바론과 만나게 해주지 않을 것 같으니 방법은 하나였다.
“그럼, 이렇게 할게. 솔직히 아예 잠을 자지 않는다는 건 못하겠고. 시간을 바꿀게. 밤 말고 해가 쨍쨍히 떠 있는 오후로. 그냥 대충 어디 나무 그늘 아래에서 잠깐 낮잠 정도로 자는 거지. 그럼 나도 버틸 만은 할 테고 한율도 굳이 올 필요 없겠지? 내가 힘들어하는 걸 보기 힘든 만큼, 나도 한율이 힘들어하는 건 보기 싫어. 그러니 이게 나로선 최선이야.”
“안됩니다, 해가 떠 있다 해도 안겨있는 건 안겨있는 것. 합방은 아니나 결혼을 약속하지도 않은 남녀가 껴안다니. 천호, 당신은 천호이나 천호가 아님을 명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천호에게만 허용되는 짓을 뻔뻔히 하겠다는-,”
아니, 그럼 뭐 어쩌자는 거야.
내 힘듦을, 시스템의 위력을 반의반도 이해하지 못한 채, 반대하는 백호가 보름의 말을 내가 끊기 전에 한율이 끊어냈다.
“네, 저는 괜찮습니다. 화연. 그렇게 해요.”
“한율!”
“아버지, 화연도 최대한 양보한 겁니다. 저도 한발 양보한 것이고. 그러니 아버지도 한발 물러나 주세요.”
그에 백호가 보름은 뒷목을 잡으며 나를 노려봤다.
뭐, 한율이 맞는 말 한 건데 뭐.
이긴 느낌에 에베베, 화나냐? 하는 표정으로 백호가 보름을 쳐다보자 백호가 보름이 악에 받친 표정을 지었다,만 돌연 피식,웃었다.
웃는다고...?
뭔가의 싸늘함이 몸을 타고 올라왔을 때, 백호가 보름이 씩, 세상 사람 좋게 웃으며 말했다.
“예, 그럼 저도 한발 물러나지요. 바론 이라는 그 천한 자식과 언제, 어디서든지, 몇 시간이 든 지 껴안고 자도 됩니다. 허락하지요.”
“...?”
이번엔 내가 백호가 보름에게 미쳤냐는 표정을 지어 보일 때였다.
뭔데...?
갑자기 허락한다고?
백호가 보름의 속마음을 알 수 없어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자 백호가 보름이 기다렸다는 듯 폭탄을 던졌다.
“대신, 한율과 혼례를 올리십시오.”
“와우,”
“...!”
이건 한율도 예상 못 한 발언인지 엄청나게 놀라며 제 아버지, 백호가 보름을 쳐다봤다.
물론 나도 놀람을 참지 못해 나도 모르게 육성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부전자전.
한율이나 백호가 보름이나 폭탄 참 잘 던지네.
하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