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했다.
잠을, 잠을 잘 수가 없다.
처음엔 생각하다 보면 자겠지 싶어 게임에 대해 생각했다.
한율하고도 풀었고 은가람하고도 사이 좋고 이제 바론만 남았는데.
하, 바론은 어떻게 풀지? 역시 한율처럼 다짜고짜 미안하다 하는 수밖에 없나?
근데 그러기엔 바론은 또 노리개로 있을 테니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헛소리로 내 노력을 없애버릴 거 같았다.
흠, 이를 어쩐다.
그렇게 한 시간, 두 시간, 세시간, 결국 아침.
미치듯이 잠이 쏟아지긴 하는데 단 1분의 쪽잠도 없이 잠을 잘 수가 없다.
어제 폭포있던 그 호수가에서 은가람과 사이 좋게 시간을 보내고 고양이 때문에 웃고 천궁으로 자려고 들어와서 누웠고, 분명 누웠고 이불도 덮었고 눈도 감았고.
근데 왜 안 자져?
난 헛소리인 듯 아닌 듯, 속으로 횡설수설하고 있다 순간 번뜩 정신을 차려졌다.
아니, 나 왜 이러지?
현실에선 밤 샘 경력이 몇십 년이다.
겨우 하루 못 잤다고 이렇게 정신이 피폐해지진 않는데?
혼자 내 상태에 의아해하는 사이 들어온 궁인은 나를 보곤 매우 놀라 했다.
“폐,폐하?!”
뭐야, 저렇게 놀랄 만큼 내 상태가 별론가? 싶어 비척비척 걸어 거울을 향해가니 세상에.
“놀랄 만 하네.”
겨우 하루다.
겨우 하루 못 잤는데 다크서클이 지금 발끝까지 내려 가려 하고 몰골은 어디 큰 병을 한번 앓은 것마냥...
“여봐라, 선의를 불러와라!”
내가 잠에 취해 정신 피폐한 채로 멍하니 있자니 궁인들은 분주히 움직여 선의를 내 앞에 대령했다.
“감히 고결한 손에 닿는 것을 용서해주시길.”
나를 진찰하기 전, 인사치레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뱉은 선의는 다급히 내 손을 낚아채 잡았다.
그래, 이 천의 나라를 유지해야 하는 천호인데 이런 병든 모습이라니 다급할 만도 하지.
다시 한번 말하자면 이 천의 나라는 천호가 죽으면 나라 전체가 낙사다.
아님 천무막이 뚫려 괴물들에게 잡아먹히던가.
그런 생각을 하며 선의에게 손을 잡힌 채 가만히 있었다.
음? 근데 손만 잡고 있는 걸로 뭔가 상태가 확인 가능한가?
내가 의아해할 때 이미 진찰이 끝났는지 선의가 내 손을 놓으며 무척 큰일 났지만 애써 차분하게 말하는 사람마냥 말했다.
“폐하, 지금 폐하께선 룬이 통하지 않으십니다. 잠시의 신체 접촉을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래.”
룬이 통하지 않으면 큰일 난 건가?
잠시 생각했지만 이젠 머리도 돌아가지 않는다.
와, 이건 단순히 잠을 못 잔 상태가 아닌 거 아니야?
그에 덜컥 겁을 먹어 선의가 하는 대로 얌전히 따랐다.
그리고 나온 결과.
“아픈 곳은 없습니다. 다만, 못 주무셔 약간 피폐해지셨을뿐.”
선의의 말에 멍한 나 대신 궁인이 대신 답했다.
“정말 그것뿐입니까?”
“예, 제게 뭐 좋은 게 있다고 천호 폐하의 건강에 대해 거짓말을 고하겠습니까. 근데 하나 이상한 점이 그 외엔 이상이 없는데 갑자기 룬이 통하지 않습니다.”
“룬이 통하지 않는다니-,”
아, 이젠 귀도 먹먹해지는 거 같은데.
제대로 말소리가 들리지도 않는데 자꾸 시끄럽게 말하는 궁인과 선의가 짜증나, 시끄럽게 할 거면 다 나가라 축객령을 내렸다.
그에 궁인과 선의는 서로 시선을 교환하더니 선의는 나가고 궁인은 손짓 하나로 다른 궁인들을 불렀다.
“폐하, 지금 폐하의 상태가 위중한 것 같으니 오늘 하루, 푹 쉬시길 바랍니다.”
그에 불러진 궁인들을 쳐다봤는데, 그들의 손에는 간호에 필요한 물품들 하나씩이 쥐어져 있었다.
나는 그들의 손에 다시 누여지며 중얼거렸다.
“아니, 나 오늘 한율 만나야 하는데.”
“예, 불러오겠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한숨 푹 주무세요.”
*
눈을 감았는데도 잠을 잘 수가 없다.
몽롱의 끝.
생각을 끊임없이 하는데, 아니 잘 수가 없다는 걸 계속 생각하고 있긴 하지만.
그래서 그런가?
궁인들이 바라는 것처럼 한숨 푹 자기는커녕, 산송장처럼 눈만 감고 있자니 문밖에서 한율의 목소리가 들렸다.
“빨리 문을 열어라! 화연이 아파 나를 찾는다니 도대체 상태가 어떠시길래! 어제만 하셔도 멀쩡-,”
“한율 여화님, 목소리를 조금만-.”
그 뒤로 들리는 내 상태 설명, 정신 사납다고 궁인들을 물리시고 이제야 잠에 드신 모양이니 조용히 해달라는 부탁, 수긍.
어쩌나, 나는 잠에 들긴 커녕 한숨도 못 잔 상태인데.
잠자는 시간과 인성이 비례하기라도 하는지 속으로 되지도 않게 비아냥거리고 있는데 한율이 들어왔다.
그래, 자지도 못하는데 앉아라도 있자 싶어. 상체를 일으켜 침대에 걸터 앉는데 방금 막 나를 본 한율이 기겁하며 나에게 달려왔다.
“화연! 찾으시던 제가 왔으니 화연이 일어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서 누우세요!”
으음, 앉으려던 것뿐인데.
그러나 괜히 한율을 민망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기에 조용히 있었다.
그러자 한율은 목소리를 차분히 하며 나와 시선을 맞췄다.
“들었습니다, 못 주무신다고요. 겨우 잠드셨는데 밖에서 소란스럽게 하여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깨신 거죠?”
“아니, 애초에 안 잤어 그냥 눈만 감고 있었어.”
그에 잠시 생각하던 한율은 세상 다정하게 내게 물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잠이 오지 않은 데엔 으레 이유가 있는 법이죠. 제가 함께 화연이 잠들 수 있게 노력하겠습니다. 대답해주요.”
“그냥, 그냥 잠이 안 와. 아니, 잠은 오는데 잘 수는 없어.”
“따뜻한 우유를 마시면 잠이 잘 온다던데 마셔보았습니까?”
“아니.”
고개를 젓는 나에 한율은 기다렸다는 듯 궁인에게 손짓했다.
아마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가져오란 거겠지.
궁인이고 한율이고 아랫사람을 시킬 때 모두 손짓 하나로 끝내네.
그것이 약간 웃겨 피식거리자니 한율이 나를 진짜 병자 보듯이 봤다.
아니, 이건 웃겨서 웃은 건데...
아픈 사람이 짓는 씁쓸한 미소가 아닌데...
*
대략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고 자부할 수 있다.
따듯한 우유 마시기, 따듯한 수건을 눈 위에 올리기, 책 읽어주는 거 듣기, 부끄러워하는 한율이 불러주는 자장가 듣기, 한율의 얼굴 감상... 이건 아닌가?
어쨌든.
“진짜 안 자져. 이제 뭐 해?”
힘없는 내 물음에 한율은 또 뭔가 방법이 있는지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렇게 열리고 닫히고를 몇 번 한율은 저 혼자 얼굴을 붉히더니 아예 말하지 않을 것처럼 입을 꼭 다물었다.
“뭐야, 방법 가리지 말고 알려줘. 말할 것처럼 굴어놓고.”
내 재촉에도 한율의 입은 열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래, 이럴 때 쓰기 좋은 말이 있지.
“천호로써의 명령이야. 설마 이래도 말 안 할 건 아니지?”
그제야 한율의 입이 열렸다.
“화연이, 말하라 한 것입니다. 절대 제 사심이 아니라.”
“그래, 그래. 빨리 말해. 난 지금 잠을 잘 수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겠어.”
천사란 단어도 쓰지 않는데 악마나 영혼이란 단어의 뜻을 한율이 알까 싶었지만 이미 내뱉은 거 한율이 알던 모르던 신경 쓰지 않았다.
저런 사소한 걸 신경 쓰기에 나는 몹시 졸렸으므로.
한율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그, 사람의 체온을 느끼면 잠이 잘 온다고 하여...”
"하여?"
내 되물음에 한율은 더욱더 빨갛게 익으며 고개를 떨궜다.
그리곤 중얼거리듯 말했다.
"안아..."
"안아?"
"주세요..."
사심이 아니라더니 사심 한 가득 담았네!
잠이 오는 와중에도 한율이 귀여워 유쾌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보다 머리 하나 정도는 가볍게 크면서 이렇게 귀여울 수가 있다니.
나는 한율이 내게 쉬이 다가올 수 있도록 양팔을 활짝 벌렸다.
"이리 와."
그에 한율은 잠깐 쭈뼛거리다 덮치듯 내게 안겨들었다.
억,
순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침대로 엎어진 나와 한율.
한율은 내 억 소리에 기겁하며 일어나려 했지만 내가 붙잡았다.
세로로 누워야 할 침대에 사선으로 누운 꼴.
그러나 불편하지 않았다.
닿아오는 한율의 따스한 온기가, 가쁘게 뛰고 있는 한율의 심장 박동이 나를 편안하게 만들었으니까.
비록 잠이 잘수있진 않았지만.
한율을 안고 있지 않을 때보단 나았다.
"주무세요...?"
약간의 시간이 지나 조심스레 내게 물어보는 한율.
그에 나는 한율 품에 안긴 채 그대로 아니라 답했다.
"큼, 그, 그럼 이것도 별 효과는 없네요. 그만 일어날까요?"
"왜, 나랑 안고 있는 게 불편해?"
"그게 아니라,"
잠시 뜸을 들인 한율은 이내 내뱉었다.
"제 심장이 슬슬 못 견딜 것 같아..."
아, 그건 인정.
조금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한율의 심장은 아직도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죽는 거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는 한율의 목숨을 위해 떨어져 주기로 했다.
*
이것도 저것도 결국은 다 실패였다.
고작 하루 안 잤다고 이 정도로 피폐해지나에 대한 의문이 다시 한번 들 때 한율이 제안했다.
"산책이라도 하시겠어요? 몸을 약간 움직여 주면 잠들기 수월할 것입니다."
그것도 나쁘진 않지.
어차피 잠을 잘 수도 없는데.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한율은 벌떡 일어나 내 옷을 가지고 왔다.
응? 옷? 아, 나 아직도 잠옷 그대로구나.
깨달음과 동시에 근데 궁인을 시키지 않고 한율이 왜? 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게 표정에 그대로 드러났는지 한율이 쑥스럽게 뒷덜미를 만지며 말했다.
"약혼, 한 사이잖아요. 원래 천호의 반려가 생기면 궁인을 시키는 게 아니라 반려가 해줍니다."
그러곤 내 눈치를 살폈다.
"꼭 해드리고 싶어서. 싫으세요?"
이게 뭐라고 저리 눈치 보나 싶을 때 시스템 창이 떴다.
{한율과 천호가 약혼한 날.
한율은 수업받은 그대로, 반려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 궁인에게서 천호의 옷을 받아 천호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혐오 어린 시선과 오해가 짙게 담긴 말.
"하, 억지로 약혼을 맺게 하더니 이러려고 그런 거였어? 이젠 아주 옆에서, 반려라는 핑계로 내 일거수일투족 전부 감시하려고?"
"화연, 오해-,"
"닥쳐! 닥치고 궁인이나 불러와! 그 가증스런 얼굴로 내 반려인 척 하려 하지 말라고! 꺼져! 제발 내 눈앞에서 사라져! 그 옷에 무슨 짓을 했을 줄 알고 네게 맡겨!"}
아, 미친.
좀 잠잠하나 했더니 또 지랄이었다.
아니, 지랄이래.
못 자서 그런가 험악한 말이 막 나갔다.
나는 구겨지려는 인상을 얼른 폈다.
또 한율이 오해할라.
"아니, 약혼한 사이니 당연히 싫을 리가."
그에 한율은 울적할 때, 위로받은 사람 마냥 울 것 같는 표정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왜 그래, 왜 또 울 것 같은 표정이야."
"아닙니다, 그냥 기뻐서 그래요."
불쌍한 한율.
안쓰러운 한율.
그럼에도 사랑스러운 한율.
나는 다시 한번 한율을 안아주었다.
천호, 이 못된 새끼.
얼마나 갈궈댔으면 시중드는 걸 허락했다고 이렇게 울듯이 기뻐해.
나는 한율에게 더 잘해줘야겠다 결심했다.
그런데 이 미친 시스템은 한율과 함께 거닐고 있는 그때 보란 듯이 내게 엿을 던졌다.
{삼일 밤을 샌것 같은 피로가 갑자기 몰려옵니다.}
{코너를 돌며 발을 헛디뎌 넘어집니다.}
{기적처럼, 우연히 거길 지나고 있던 바론이 당신을 안듯이 붙잡아 줍니다.}
{이런 세상에! 당신은 바론 품에 안기자마자 기절한 듯 잠듭니다.}
{ [빅 이벤트!]
바론과 어떻게 화해할지 고민하는 당신을 위해 게임 시스템이 직접 준비했습니다.
온기를 나누면 마음도 나뉘는 법.
밤마다, 피로해질 때마다 온기를 나누며 화해해보세요.}
{당신은 바론에게 안겨야만 잠을 잘 수 있습니다.}
시스템, 이, 미친... 새...ㄲ...
그걸 끝으로 나는 기절이라는 걸 내 인생 처음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정확히는 꾹꾹, 눌러놓은 잠들이 댐 무너진 듯 몰려와 기절하듯 잠드는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