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율 여화와 화연의 사이가 좋아졌다는 소식이 천궁 전체를 타고 돌아다녔다.
화연이 친히 한율 여화를 월궁에 데려다주었다느니, 한율 여화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헤실거렸다느니.
“그거 들으셨습니까, 예단님.”
“한마디만 더 지껄이면 징계다.”
“...”
예무가 저저, 성질머리.라는 뜻으로 날 조심히 흘겨보곤 군말 없이 물러났다.
그에 나는 (상사에게 불손한 눈빛을 보내는) 하극상을 저지른 저 예무를 다시 불러들여 징계를 내릴까 고민했다, 만 오늘은 화연과 함께 나들이 가기로 한 날이니까.
나는 재빨리 환복했다.
언제나처럼 단정하고 고급스러운 옷,
“...”
아니다.
순간 스치는 생각에 나는 자칫하면 끈이 풀려 상반신이 노출되는 옷으로 선택을 바꿨다.
물론 허름한 옷 따윈 따라올 수도 없는 수준의 옷이지만.
선물 받았지만 내 취향이 아니라 처박아 뒀던 옷이 이렇게 쓰일줄이야.
비식,웃은 나는 거울 앞에서 야살스럽게 웃어 보였다.
음, 화연을 꼬시기엔 완벽했다.
화연이 한율 여화와 화해를 하셨다면 나와는 그 이상을 가야 하지 않겠는가.
자신감 있게 웃은 나는 혹여 화연이 기다리실까,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보이는 건 한율 여화.
“네가 왜 여기 있지, 한율 여화?”
“그러는 너는 왜,”
한율 여화는 말하다 말고 뭔가 짚이는 게 있는 듯 인상을 와그작 구겼다.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화연이 이중약속을 잡으신 것.
어이없었다, 매너가 이렇게 없는 사람이었다니.
어제 화연과 화해했으면 오늘 화연과 만나는 것 정도는 자제해야 하는 것 아닌가?
혼자만의 화연이 아니거늘.
역시나 한율 여화는 마음에 안들었다.
그건 한율 여화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미쳤네, 은가람 여화. 나와 화연의 사이가 좋아졌다는 소식이 천궁 전체에 흘렀을 텐데 눈치껏 빠져야 한다는 생각이 안 들었나 보지?”
내 기가 차서.
그 뒤로 둘 다 절대 화연 앞에선 내보이지 않을, 서로를 씹어먹을 듯한 어투로 대화했다.
“그건 내가 할 소리다. 어제 화연님을 독차지했으면 오늘은 양보하는 게 미덕 아닌가? 혼자만의 화연님이 아닌 데 이리 독차지하려고 아등바등하는 꼴하곤.”
“하, 화연님? 천호 폐하의 성함을 감히 멋대로 부르다니. 네가 정녕 정신을 놓은 모양이구나.”
“화연님이 ‘친히’ 허락하신 이름인데 누가 나를 벌할 것이지?”
아, 내가 이겼다.
한율 여화는 화연이 내게 이름을 허락했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듯 입을 다물었고 나는 보란 듯이 비웃음을 걸쳤다.
그리곤 느껴지는 화연의 인기척.
한율 여화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화연이 있는 쪽으로 휙, 돌아보며 물었다.
“선택하세요, 화연.”
“선택해주세요, 화연님.”
”나예요, 아님 이 여화입니까.“
“저예요, 아님 이 여화예요?”
화연은 엿됐다, 라는 표정을 잠깐 지으셨지만 나는 모른 척 천사 같다 칭하셨던 미소를 유지했다.
잠깐 하늘을 쳐다본 화연은 갑자기 본인의 호위무사에게 손짓했다.
왜? 라는 의문을 가질 때 화연은 아주 박력 넘치게 호위무사의 멱살을 잡고 입을 맞출 듯 서로의 얼굴을 가까이했다.
설마, 설마 지금 한율 여화와 제가 귀찮게 굴었다고 호위무사를 택하려는 건가?
충격에 쩡하게 굳어 화연과 그녀에게 멱살 잡혀있는 호위무사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건 한율 여화도 마찬가지였는지, 호위무사가 쑥스러워 급하게 뒤돌아 뛰어가고 화연이 의기양양하게 나와 한율 여화를 쳐다볼 때쯤에야 말문을 떼었다.
“이젠 호위무사까지-,”
충격과 상처를 동시에 받은 게 분명한 한율 여화의 말에 화연이 다급히 부정했다.
“아니아니, 그게 아니라! 천궁에 급한 일이 생겨서 돌려보낸 거야!”
그걸 굳이 그렇게 입맞춤할 듯이 멱살을 잡아서...?
급한 일이 있어서 천궁으로 돌려보낸 것 뿐이라는 화연의 변명을 나도, 한율 여화도 믿진 않았지만 넘어가 드렸다.
그래, 천호 폐하시니까 이 정도는. 그래, 호위무사를 건드는 이 정도는 양호한 편이지.
*
오늘 하루, 누구와 시간을 보내느냐.
그것으로 한율 여화와 신경전을 하던 나는 슬쩍 화연의 눈치를 봤다.
계속 한율 여화와 신경전을 하고 있으면 혹여 아까처럼 호위무사를 택할까 봐 겁난 것도 있었고.
아니나 다를까 화연은 퍽 난처해 보였다.
어쩔 수 없지.
나는 화연이 나를 택하기 편한 상황을 만들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의 밑밥, 착한 척 양보하는 것.
“저는 그저 화연님과 시간을 보내는 거로 만족해요. 그게 굳이 오늘이 아니더라도요. 한율과 이렇게 신경전을 벌이고 있으면 화연님의 마음이 편찮으실 테니 오늘은 제가 양보할게요. 그러니 대신, 다음에 두 번 만나주세요.”
내가 이리하면 한율 여화 역시,
“저야말로 화연과 시간을 보낸다는 그 자체로 만족합니다. 제가 오늘 양보할 테니 저를 두 번 만나주세요.”
그래, 이리하겠지.
역시 멍청하다.
저 말을 기다렸던 나는 냉큼 양보하는 척 말했다.
“이런, 한율 여화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제가 양보해드릴게요. 한율여화는 다음에 화연님과 두 번의 시간을 보내세요. 저는 한 번인 대신, 오늘은 화연과 시간을 보낼 테니.”
그리곤 한율 여화가 또 말을 바꾸기 전에 쐐기를 박았다.
“설마 또 마음을 바꾸어 화연님의 머리를 복잡하게 할 작정은 아니겠죠, 한율 여화.”
그러자 화연이 혼잣말인 것처럼 중얼거렸다.
“역시, 착한 한율이 양보하네.”
그리곤 한율 여화를 쳐다보며 당근을 던져주었다.
“그럼 한율. 바로 내일 천궁으로 와. 아니다, 내가 월궁으로 갈게. 기다리고 있어. 알겠지?”
아니, 잠깐만. 천궁을 허락해주는 것도 모자라 화연이 친히 찾아가신다니.
이럴 거면 내가 내일 화연과 노는 거였다.
하, 한율 여화.
몰랐는데 굉장히 영악하군.
내가 분해하는 사이 한율 여화는 나보란 듯이 얼굴을 확, 붉히며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여우 같은 새끼.
어쩔 수 없다.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든 내일 치 몫까지 화연을 유혹할 수밖에.
*
탐험하듯 몇 차례 수풀을 헤집고 천궁 전체를 감싸고 있는 담을 넘고, 나무 하나를 지나고서야 특별한 곳에 도착했다.
쏴아아, 청량감 있게 폭포가 떨어지고 그 밑에는 밑바닥까지 다 보일 듯 투명한 호수가 있는 곳.
화연이 좋아하는 반짝임이 가득한 곳.
역시나 화연은 마음에 들어 했다.
그에 나는 순수한 의도로 부르는 것처럼 호숫가 근처로 화연을 불렀다.
“화연님, 이리 와서 이것 봐요. 여기 안에 있는 돌까지 보석처럼 반짝반짝, 이쁘게 빛나요.”
“진짜네. 이거 하나 건져서 보석이라 해도 속을 거 같은데?”
내가 뭘 할 줄 알고 순수하게 내 옆에 앉는 화연이 너무 사랑스러워 나도 모르게 웃었다.
그에 화연은 놀란 듯 나를 쳐다보더니 다시 한번 나를 넋 놓고 쳐다봤다.
역시 내 얼굴은 화연의 취향에 딱 맞는 모양이네, 뿌듯함도 잠시.
‘절대 안 잊어! 너만큼은, 너만큼 잘생긴 사람은 절대 안 잊어! 내가 먼저 인사할 거야!’
절대 안 잊는다 해놓고 나를 완전히 잊은 거 같은 화연에 잠깐 심술이 일었다,
그러니 화연님. 조금만 놀려도 되죠? 정말 완전히 저를 잊었는지 확인해도 되죠?
“화연님.”
“응?”
“이곳을 보고 뭐 생각나는 거 없으세요?”
나를 제발 기억해주세요.
내가 자각하지 못했던 바램이 튀어나오는 순간, 화연은 보기 좋게 내 바람을 빗겨냈다.
“음, 예쁘다? 보석함 같다?”
아,
나를 잊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도 왠지 모를 배신감이 차올랐다.
그래서 그런가 정색은 생각보다 쉬웠다.
“거짓말하지 마.”
그러자 화연은 동공 지진을 일으켰다.
그게 너무 귀여워 순간 웃을뻔했지만 초인적으로 참아내며 말했다.
“너 천의 나라 사람이 아니잖아. 외지인, 으로 설명할 수 있을 정도가 아니지, 아마?”
“아,”
당황해서 얼떨결에 나온 단말마, 과연 그 뒤엔 무슨 소리를 할까 궁금해하니 들려온 건 당황 가득한 거짓말이었다.
“아닌데?! 뭘 보고?! 무슨 근거로?!”
“푸훕.”
어쩜 저리 귀여우실 수가.
나도 모르게 웃음을 뱉었다.
이미 웃은 이상 어쩔 수 없네.
뜬금없는 심술을 예상보다 빨리 끝내기로 한 나는 다시 천사 같은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예나 지금이나 급작스런 거짓말은 못 하시네요.”
내가 평소처럼 돌아왔음에도 화연은 잔뜩 혼란스러워했다.
분명, 내가 어떻게 그걸 아는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으신 거겠지.
나는 화연의 혼란을 덜어드리기 위해 자세히 설명해드렸다.
“제가 사계의 숨겨진 세 번째 나이 때 말해주셨잖아요. 자신은 지금 게임을 하고 있는 중이며 현실에서 잠을 잘 때, 게임이 저절로 플레이된다고. 바로 여기서 말씀하셨어요.”
“내가 그걸 말했다고?”
“네, 게임 속에서 사귄 첫 번째 친구니 특별히 말해준다고 하셨어요. 아, 그러고 보니 화연님의 현실과 여기의 나이는 조금 다르네요. 분명 그때 화연님이 말하시길 15살... 이랬나?”
내 말을 끝으로 화연은 욕설을 읆즈리며 이마를 짚었다.
“아, 미친”
“이러는 걸 보니 정말로 기억이 안 나는 모양이네요.”
나는 무해하게 말하는 척하며 화연의 양심을 건드렸다.
“전 화연님만 애타게 기다렸는데.”
“켁, 그, 그게. 음.”
당황해서 헛기침을 하며 동공 지진을 일으키는 화연에도 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쪽에서 하룻밤이 여기선 일 년이라고 하셨죠. 여기서 3년간 화연님이셨고, 지난 10년간은 천호였으니 화연님은 열흘 밤 만에 이쪽을, 저를 잊으신 건가요?”
“아니, 그렇게 간단히 잊어버린 건 음. 맞나? 아니, 나는 애초에-,”
아, 지금이다.
나는 횡설수설, 손짓까지 동원해 변명을 늘여놓으려하는 화연의 손을 잡아끌었다.
쭈그려 앉은 화연이 내 쪽으로 넘어질 정도로 강하게, 그러나 부드럽고 상냥하게.
“!”
그러나 언제나처럼 화연은 내 예상을 비겨나갔다.
화연은 나에게 이끌려 내 위에서, 나를 덮치는 자세를 취하는 대신, 나를 되레 끌어당겨 내가 그녀를 덮치게 만들었다.
잠시 놀랐지만, 이 자세도 나쁘진 않지.
아니, 되려 좋았다.
무엇이 됐던 화연이 하신 건데 싫을까.
내가 화연을 덮치는 자세로, 스스로가 만들어 놓고 되려 놀라는 것도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나는 화연이 정신을 차려 나를 밀어내지 못하게 아주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돌아오셨으니 용서해드릴게요.”
화연은 그런 나에 움직일 수 없다는 듯, 홀렸다는 듯 나를 응시했다.
벌써부터 제게 홀리면 곤란한데.
나는 속으로 비식,웃으며 화연의 머리카락을 소중히 가져다 작게 입을 맞췄다.
그리곤 스륵, 조심스럽게 놓으며 말했다.
“화연님, 화연님은 저를 잊으셨어도 저는 화연님에 대해 잊지 않았어요.”
원래의 천호와는 같은 듯싶지만 묘하게 다른 부분이 많아서 항상 비교하다 보니 각인처럼 된 부분도 없잖아 있지만. 어쨌든 이요.
“아름답고, 잘생기고, 반짝이고, 화려하고. 때론 차분하고 깔끔한 것들도. 계열을 가리지 않고 예쁘면 다 좋아하시잖아요. 어때요, 저는 화연님의 취향에 맞게 잘 컸나요?”
기대하신 만큼으로요. 아, 저와 함께했던 추억을 잊으셨으니 대답 못 하시려나.
설마 아니라 할까 겁먹어 화연의 양심을 약간 건드리며 말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음을 곧바로 느꼈다.
“그때 뭐라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현재로는. 응, 잘 컸네.”
하하! 이건 유쾌하게 웃을 수밖에 없는 대답이다!
나에게 홀린 듯 멍하니 잘 컸다 대답하는 화연님은 나만 보게 어디 가두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사람이 사람에게, 이토록 사랑스럽다는 감정을 가질 수 있다니.
나는 그것이 경이로우면서도 이 묘한 분위기가 깨지지 않게 조용히 속삭였다.
마치 나쁜 길로 빠뜨리기 위해 유혹하는 것처럼,
“화연님, 화연님은 욕심이 많으시니 한율과 저. 둘 다 가지고 싶으신 거죠? 저는 한율과 달리 천호인 화연님의 옆자리를 독차지하고 싶어 아등바등하지 않아요.”
이건 화연이 나를 그 누구보다 편하게 여길 수 있도록 하는 거짓말.
당연, 할 수 있다면 화연이 나만 보게 하고 싶다.
“원하신다면 모든 걸 가지세요, 화연님.”
이건 반쯤 진심.
‘나에 대한 모든 걸’ 가지세요.
나는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채 내게 홀려있는 화연의 손을 잡아 내 가슴팍에 올렸다.
그리곤 천천히,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의도해서 입고 온 보람 있도록 손쉽게 열리는 앞섬, 손 쉽게 내 맨살에 닿는 화연의 손, 온기.
화연은 긴장했는지, 집중했는지 마른침을 삼켰다.
복근을 지나 배꼽, 그리고 바로 직전.
나는 딱 거기서 움직임을 멈추고 부러 화연과 시선을 맞춰 야살스럽게 웃었다.
그리곤 나쁜 길로 인도하는 존재처럼 속삭였다.
“그 첫 번째로 절 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