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삐 도착한 구급차들은 숨 돌릴 새도 없이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는 응급환자들을 싣고 근처에 자리한 종합병원 응급센터로 향했다.
한 경사와 강 비서의 상태에 놀란 의사들은 시간을 다투는 수술을 진행하였고 가게 앞 모든 것을 목격했던 민성희는 그녀를 부축하는 윤 경위와 함께 병원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장 시간의 수술 후, 중환자실로 옮겨진 한 경사는 여전히 의식 없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여 있었다.
한 경사와 달리 폐 수술 후 회복실로 옮겨진강 비서는 의식을 찾아 일반 병실로 이동하였다.
정신 없이 병원 곳곳을 분주히 오가면서 윤 경위는 한 경사와 항상 꼰대라 부르던 정년을 앞둔 최 팀장에게 연락했고, 한 경사를 대신할 중랑 경찰서 직원들이 속속 도착하였다.
“너희들 도대체 뭔 짓을 하고 다녔던 거냐? 한 경사는 왜 다 죽어 가고 저 사람들은 도대체 또 뭐냐?”
안재현과 민성희 뿐만 아니라 강 비서에게도 보호 인력을 배치한 꼰대가 한 경사의 중환자실 앞 복도 의자에 힘 풀려 앉은 윤 경위를 내려다보며 꾸짖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처음엔 단순 폭행 미수 사건으로 생각했는데 한 경사님이 무척 관심을 가지시더라고요. 그런데 연관되어 보이는 살인 사건도 발생하더니 결국 일이 이렇게 커졌네요. 도대체 그놈 뭐죠? 사실 저흰 저기 누워있는 검은 양복을 의심했는데.”
풀 죽은 윤 경위의 목소리를 겨우 알아들은 꼰대가 더욱 답답해 하며 큰소리로 다시 재촉해 물었다.
“좀 크게 이야기해! 내가 작년에 겨우 경정 달았다. 내년 퇴직할 때 경정 유지한 채로 정년 퇴직해야 연금도 넉넉할 거 아냐! 말년에 왜 남의 관할까지 기어들어가 일 벌려! 다시 차근차근 이야기해 봐! 나도 한 경사처럼 강등된 채로 정년 맞기 싫다."
십여 년 전, 강남 고속 터미널 앞 지구대에서 경장으로 근무했던 한 경사는 절차를 무시하고 직접 고아원에 연락해 애연이의 보호를 수녀님께 부탁한 사유로 일 계급 강등 징계를 받아 지금까지 승진이 늦었다.
아이를 일반 보호 시설에 보내지 않은 그의 판단이 옳아 애연이의 보호를 수녀님께 유지하도록 징계 위원의 결정이 났음에도 절차를 무시한 그의 행동엔 냉정히 징계가 유지 되었다.
한 경사는 강등된 이후에도 애연의 부모님 찾기를 도왔으나 큰 소득 없었고 중랑 경찰서로 옮겨져 꼰대와 나머지 세월을 함께 해왔기에, 한 경사의 사연을 잘 아는 팀장으로서는 절차 상의 문제로 야기될 징계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윤 경위에 설명을 조용히 끝까지 다 들은 후 긴 한숨 한 번 내 쉬고는 윤 경위 옆에 앉으며 꼰대의 푸념이 이어졌다.
“너희들이 응급실에서 죽네 사네 하는 동안, 오늘 아침에 말이야. 예혼 마을 인근 아파트 옥상에서 경비의 시신이 벌견되었는데 둔기로 살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수서 서에선 부검 결과 살해 흉기가 장도리로 나오면 우리에게 이관하려는 모양이야. 에휴. 너 그놈 봤지? 수배 전단이라도 만들어야 하는데, 애들 보내서 검은 양복 저 친구에게 범인 인상 착의 물어 보려 했더니, 처음 본 놈이라 경황 없어서 얼굴이 기억 안 난다고 딱 잘라 말하며 입 다물었다. 검은 양복도 뭐 있는 거 같은데, 아무튼 너라도 기억 살려 몽타주 그려보자.”
꼰대의 푸념 섞인 지시에 윤 경위가 당황해 급히 답했다.
“전 그놈 뒷모습만 봐서 앞 모습은 몰라요. 낮에도 안재현 뒤따라 다니느라 공원에서 뒷모습만 보았고 커피숍 앞에서도 길 건너에서 도망가던 그놈 뒤만 봤거든요. CCTV나 블랙박스는 확보하셨어요? 당장 공개 수배 진행해야 하지 않을까요?"
“공개 수배는 안 돼. 공개 수배 원칙이 긴급 상황이 아니면 6개월 이내로 범인이 잡히지 않아야 가능해. 물론, 이놈이 당장이라도 사고칠 놈이라, 긴급 수배를 할 수 있지만, 뭐가 있어야 수배하지. 좀 더 살펴 봐야겠지만, 한 경사 차의 블랙박스와 근처 CCTV엔 그놈 모습만 없더라. 한 경사 혼자 괴로워하며 쓰러지고 피 흘리는 모습과 날라차기하다가 갑자기 쓰러지는 검은 양복의 모습만 있더라. 놈의 모습을 제대로 본 사람이 없어서 큰일이네. 게다가 CCTV와 블랙박스에도 담기지 않는 안건에 대한 공개는 비논리적이라 이 부분은 어지간한 비난을 감수하지 않으면 공개가 불가해.”
꼰대의 한숨이 길어지자 윤 경위가 머리를 긁적이며 조심스레 의견을 내 보았다.
“본 사람이 있어요. 안재현과 민성희. 안재현은 시각장애인이지만, 민성희는 기억을 살려 보면 뭔가 나올 것 같습니다. 몽타주 반드시 작성 가능합니다.”
윤 경위의 제안에 고개를 가로 저으며 일어선 꼰대가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더니 윤 경위의 어깨를 두드리며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 맞다. 아마 내일 쯤엔 별도의 수사팀이 꾸려질 거야. 너도 합류해 그리고 안재현과 민성희 불러 몽타즈 확보하고 검은 양복도 사람 붙여서 잘 뒤져 봐. 난 일이 밀려서 회사 들어간다. 여긴 다른 직원에게 맡기고 넌 내일 회사로 출근해. 음, 네 말대로 몽타주 나오면 CCTV와 블랙박스 언급 없이 공개 수배 검토하자.”
또박또박 구두 소리를 강하게 내며 한 마디, 한 마디에도 힘주어 말하는 꼰대의 뒷모습에 어정쩡히 일어 선 윤 경위가 반쯤 허리 숙여 애매하게 인사와 동의를 함께 표시했다.
꼰대의 지시대로 다음날 중랑 경찰서로 출근한 윤 경위는 곧 바로 수사팀에 배속되었다.
그에게 부여된 첫 임무는 안재현과 민성희 및 강 비서에게 범인의 인상 착의를 진술받아 몽타즈 작성이었다.
강 비서는 준희에 대한 일체의 정보룰 함구하고, 그저 밤 늦게 집으로 가기 위해 큰길로 나가다 잔혹한 폭행을 목격해 이를 막기 위해 급히 뛰어들었다며 범인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다는 진술로 일관하였다.
강 비서의 진술 태도에 강한 의구심을 품으면서도 그의 마음을 돌려보기 위한 윤 경위는 저자세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결과적으로 강 비서에게선 아무런 소득을 내지 못했다.
다음 목격자로 민성희를 불렀으나 두려움 때문이였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그녀였다.
민성희의 기억을 되살려 주기 위해 노트북으로 민성희 옆 창에 비친 범인의 얼굴을 보여주었으나 화면 해상도가 낮아 큰 도움이 될 수 없었다.
민성희의 진술 이후 민성희와 항상 함께 방문하는 안재현이 마지막 진술자로 자리에 앉았다.
상대가 시각장애인이었기에 윤 경위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범인 인상착의는 잘 정리 되셨나요?”
윤 경위 책상 앞에 놓인 의자에 앉으며 안재현이 묻자, 이제는 조금 친해졌는지 윤 경위의 넋두리가 이어졌다.
“전혀요. 키와 체형만 정리되고 인상착의는 전혀 진전이 없네요. 용의자를 목격한 분들의 진술이 어째 이 차창에 비친 흐릿한 영상보다도 더 도움이 안 되고 있어요. 선생님이 시력만 좀 더 좋으셨어도. 에휴. 제가 쓸데없는 소리를.”
시각장애인인 안재현이 불쾌할 수 있는 표현이었기에 서둘러 서과하는 윤 경위와 달리 안재현의 표정은 조금의 변함도 없이 일어나 윤 경위 앞에 놓인 노트북을 들여다 보았다.
“여기에 놈의 얼굴이 찍혀 있나요?”
잘 보이지도 않는 화면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안재현이 묻자 그의 행동이 마냥 신기한 윤 경위가 더듬더듬 설명하기 시작했다.
“네, 여기 보이시죠? 아니아니, 여기에 민성희 씨가 앉았고 그분 옆으로 조금 뒤 차창에 뭔가 비치는데. 민성희 씨 진술에 따르면 범인의 얼굴로 추정되거든요. 그런데 해상도가 낮아서 몽타주로 작성이 어렵네요. 유일하게 CCTV에 찍힌 놈의 모습인데.”
유령처럼 CCTV와 블랙박스에 담기지 않는 범인의 모습 탓에 공개 수배조차 어려운 상황이라 윤 경위는 이 영상에 마음을 붙잡고 놓지 못 하고 있었다.
윤 경위의 설명에 뭐가 보이는 듯 정상인처럼 노트북을 한참 들여다 보던 안재현이 고개들어 윤 경위를 향해 빙그레 미소 지었다.
“제가 예전 프로그래머로 일할 때, 3D 렌더링으로 게임 화면을 동영상으로 저장하기 위한 코덱을 주로 담당했었지요. 몽타즈를 3D 렌더링으로 동영상을 만들어 드려도 될까요?"
“3D 렌더링, 그게 뭔가요?”
“차창에 비친 잔상으로 범인의 윤각을 따서 동영상 몽타주를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에요.”
윤 경위를 향한 안재현의 눈빛에 힘이 가득하며 반짝이고 있었다.
***
한밤의 소란을 벌인 준희는 윤 경위의 사격을 피해 어둠 속으로 몸을 피한 후 최대한 인파가 많고 CCTV와 블랙박스가 잘 준비된 곳을 향했다.
양재에 도착해 거리에 늘어 선 사람들에 합류해 택시를 잡아 탄 후, 강남역에 내려 다시 택시를 갈아 타고는 고속터미널에서 내린 다음 길 건너 늦은 밤 취객들이 나오는 환한 불빛을 속에 묻혀 걷다가 다시 택시에 올라 일산으로 목적지를 이야기했다.
CCTV에 찍히지 않는 이점을 살려 자신의 얼굴을 모르는 군중 속에서 몸을 숨기며 동선을 어지럽힌 것이었다,
그렇게 CCTV와 블랙박스에서 사라진 채, 인파 속에 묻힌 준희는 치밀하게 추적을 피했다.
새벽 4시 쯤, 일산 유흥가의 불이 하나 둘 사라질 무렵 거리를 배회하던 준희는 눈가에 피곤이 가득한 점원이 카운터를 지키는 편의점 문을 어깨로 밀고 들어갔다.
환한 불빛 아래 점원 이외엔 다른 이가 없음을 확인하며 준희는 입꼬리를 살짝 올려 미소 짓고는 냉장고에서 맥주 한 병을 꺼내와 계산대 앞에 서서 담배 한 값을 추가로 시켰다.
조금의 의심도 없이 등 뒤의 담배 진열대로 시선을 옮긴 점원이 담배를 찾아 계산대 위에 올림과 동시에 준희는 빠르게 계산대 위에 맥주병을 내리쳐 깨트린 후 날카로운 유리날을 번뜩이며 병목을 쥐고는 점원의 눈을 겨누었다.
점원이 자신의 눈을 겨눈 가죽장갑을 착용한 준희의 오른손과 깨진 맥주병의 날카로운 유리날이 위협적으로 느껴져 등골이 서늘해질 때 쯤, 준희의 차분한 목소리가 점원의 의식을 깨웠다.
“계산대에서 돈 다 꺼내렴. 형이 바빠서 그러니 말 대꾸하지 말고. 말 잘들으면 넌 오늘은 죽이지 않을게. 알았지?”
머리 위 CCTV를 비웃으며 편의점을 나온 준희는 자신의 말대로 점원의 양손을 뒤로 해 케이블 타이로 묶기만 했을 뿐 불필요한 폭력은 사용하지 않았다.
다시 택시를 타고 아직은 어둠이 내린 여의도로 향했다.
아침 해가 뜰 무렵 어깨에 맨 가방을 빛나는 한강에 던진 준희는 지하철을 이용해 몇 번의 환승을 하며 의정부로 이동했다.
‘당분간 큰 사건 만들지 않고 사람들 속에 묻혀야겠다. 어차피 난 촬영되지 않을 테니 당장 추적은 어려울 거야. 서서히 멀어진 후 다시 서서히 돌아오자. 편의점 점원이 내 얼굴을 봤지만, 편의점 강도와 강남 커피숍에서의 나를 연관짓기 어려울 거야. 사용 흉기가 달라 카테고리화하기 어려워. 잠시, 편의점 강도 같은 잡범이나 하며 관심 끌지 않고, 그간 못했던 여행을 한다는 생각으로 한반도를 한바퀴 돌고 올라와 여자가 된 애연이를 내 몸으로 뭉개 죽인 뒤 나머지 것들도 처리하자. 급할 것 없어. 14년을 참았는데 이 정도 쯤이야. 어떻게 살아온 인생인데.’
흔들거리는 전철과 달리 애연이를 향한 준희의 마음은 점점 더 단단해져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