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1일간 안보이기 닫기
모바일페이지 바로가기 > 로그인  |  ID / PW찾기  |  회원가입  |  소셜로그인 
스토리야 로고
작품명 작가명
이미지로보기 한줄로보기
 1  2  3  4  5  6  7  8  9  10  >  >>
 1  2  3  4  5  6  7  8  9  10  >  >>
 
자유연재 > 로맨스
웰컴 투 틸다 아일랜드
작가 : 태리베어
작품등록일 : 2019.10.31
웰컴 투 틸다 아일랜드 더보기

카카오페이지
https://page.kakao.com/content...
>
네이버시리즈
https://series.naver.com/novel...
>
조아라
https://www.joara.com/book/156...
>

이 작품 더보기 첫회보기

착하고, 소심하고, 남의 눈에 띄지 않고 살아가는 게 낙인 마설희!!
VS. 세상과 24시간이 모자라게 소통하고 싶은 마틸다!!
달라도 너무 다르지만 하나의 몸을 셰어하고 있는 마설희와 마틸다!

이중인격 두 사람(?)에게 두 남자가 나타났다?!

 
Who is Matilda?
작성일 : 19-10-31 06:52     조회 : 317     추천 : 0     분량 : 7714
뷰어설정 열기
뷰어 기본값으로 현재 설정 저장 (로그인시에만 가능)
글자체
글자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숨은 쉴 수 있나 싶게 타이트한 민소매 니트 원피스 아래로 만족스러운 볼륨이 드러났다. 뽕이라는 것의 도움을 받아 가슴은 두 말하면 잔소리고, 엉덩이 라인은 더할 나위 없었다. 하지만 뽕은 약간의 양념일 뿐, 얇은 팔다리에 밥공기를 뒤집은 봉긋함을 기본으로 갖춘 체형이기에 창조 가능한 맵시다. 고데기가 충분히 뜨거워질 동안은 화장 타임이다. ‘화장은 될수록 진하고 화려하게’가 신조다. 어차피 어둠 속에서는 티가 안 나니까 셰도우로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턱을 깎아도 괜찮다. 마지막으로 신어본 적 없는 여자라면 100% 휘청거릴 높이의 킬 힐을 신고 전신거울 앞에 섰다.

 

  “완벽해.”

 

  한 시간 반이 걸린 외출 준비를 끝내고 예의상 재킷을 하나 챙기고 나가려다 문득 멈췄다. 현관에 붙은 화이트보드에는 파란 글씨와 빨간 별이 무어라, 무어라 잔뜩 읍소하는 중이었다. 집에 들어올 때와 180도 변신한 그녀의 미간이 날카롭게 구겨졌다.

 

  「저녁에 한남동 갤러리 카페에서 저번 주에 너랑 만났다고 주장하는 남자를 마주쳤어. 모른 척하고 도망치기는 했는데 당분간은 놀러 다니지 말고 집에 있어, 불안하단 말이야. 그리고 노트북에 야한 소설 적어놓지 마. 특히 보고서 파일에 덮어쓰기는 왜 하는 거야. 내일 선생님 만나러 가야 하는데 다시 작성해야 되잖아. ㅠㅜ 바람 쐬고 싶으면 동대문 가서 쇼핑이라도 해. 그래도 15만 원 이상은 쓰면 안 돼, 알지?」

 

  “하여간 마설희. 이 페이퍼 정리병자.”

 

  화가 났을 텐데 그 와중에도 구구절절한 글자들은 오타는커녕 띄어쓰기마저 완벽했다.

 

  “화도 제대로 못 내는 바보 천치, 마설희. 나 같으면 머리를 쥐어뜯어 놨을 텐데.”

 

  원피스 안으로 손을 넣어 거침없이 브래지어를 정리하며 지난날을 더듬어 본다. 저번 주에 만났던 남자라. 이태원 반디 클럽에서 만나 비싼 Bar로 자리를 옮겨 100만원이 넘는다는 이름 모를 술을 얻어 마셨다. 번호를 달라기에 휴대폰이 없다고 했더니 튕기는 게 매력 있다며 능글맞게 윙크를 던졌다. 그리고 화장실 좀 다녀오겠다는 말을 인사 대신 남기고 튀었더랬지. 무슨, 무슨 로펌이라고 적힌 명함을 받기는 했는데 아마도 지금쯤 8만대의 서울 택시 중 하나에 버려져 있을 것이다. 먹고 튀었다고 앙갚음 조로 아는 체를 한 걸까. 그런 데서 만나서 하루 논 상대와 마주쳤다면 못 본 척하는 게 인지상정 아니냐고. 물 좋다고 반디를 자주 갔더니 이런 일이 생긴다. 그렇다면 오늘은 안 가본 클럽에 가봐야지. 혼잣말을 하며 지우개를 들어 화이트보드의 글자를 대충 지웠다. 그러고는 빨간 보드마카를 들어 한 마디를 남겼다.

 

  ‘ㅇㅋ’

 

  정성스러운 메모에 대한 답 치고는 지나치게 간소했다. 불타는 금요일 밤에 동대문 새벽 쇼핑이라니 외모 낭비다. ‘ㅇㅋ’ 라는 대답이 무색하게 그녀는 흥겨운 몸놀림으로 택시에 오르고는 외쳤다.

 

  “아저씨, 이태원역이요♡”

 

  아, 밤의 냄새.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기분을 만끽했다. 초여름에 들어섰지만 자정의 바람은 아직 시원하게 느껴졌다. 택시 타고 날아온 별들이 소곤대는 이태원의 밤거리! 역시 금요일 밤에는 이태원이다. 마설희가 바쁜 척을 하는 바람에 이 달콤한 밤의 공기를 2주 만에 맛본 참이다. 쿵쿵대는 비트, 이성을 감추도록 유인하는 다채로운 조명, 구석이란 구석마다 끈적끈적하게 붙어있는 남녀의 그림자. 모든 것들이 술을 마시지 않아도 들뜨게 만들었다. 예의상 챙겨 나온 재킷은 입구에 맡겨놓고 데킬라 두 잔을 선 자리에서 들이켰다. 손등에 묻은 소금을 쪼옥 빨아 먹으면 준비는 끝이다.

 

  “혼자 왔어? 이름이 뭐야?”

  “마틸다.”

  “마틸다? 이름 특이하다. 왜 마틸다야? 부모님이 영화라도 감명 깊게 봤대?”

  “그냥.”

  “그냥?”

  “안 잊히잖아.”

 

  밤이 오면 마설희의 시간은 끝난다. 그리고 새로운 마틸다의 시간이 시작된다.

 

 * * *

 

  부지런한 새들이 상큼하게 울고, 창에서 이른 아침 특유의 햇살이 쏟아졌다. 1층 카페에서 사온 아메리카노에서는 향긋한 냄새가 물결치며 퍼졌고, 세탁소를 바꾼 보람 넘치게 다림질이 잘된 셔츠도 만족스러웠다. 무엇 하나 빠질 게 없이 완벽한 남자의 아침을 망친 건 담배냄새로 영역 표시를 하고 있는 요망한 미니 원피스의 여자, 그러니까 마틸다였다.

 

  “너 오빠 좋아하니?”

  “에?”

  “‘전이’라는 전문용어가 있어. 이게 뭐냐면 환자가 자기를 치료하는 의사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끼는 심리학적인 현상이거든.”

  “개소리 하고 앉아 있네.”

 

  개소리라니, 마틸다. 두통이 몰려오는지 남자가 양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단정한 검은 머리에 은테 안경, 안경보다 더 은빛으로 빛나는 반지를 왼손 약지에 끼고 있다. 실내에서만 일하느라 탈 일이 없는 피부는 남자라는 성을 떼고도 무척 하얀 편이었고, 평소에 표정을 많이 짓지 않는 성격이라 그런지 이마나 미간은 주름의 흔적 없이 판판했다. 자로 잰 듯 정리된 사무실이나 깨끗한 피부보다 그의 결벽에 가까운 깔끔함을 돋보이게 하는 건 하얀 의사 가운이었다. 가운의 왼쪽 가슴에는 사진과 함께 ‘정신과 전문의 김도진’이라고 적힌 출입증이 달랑거렸다.

 

  “병원에는 설희 씨가 와야 하는 거잖니.”

  “어제 장난을 좀 쳐서 사죄하는 마음으로 내가 왔어. 마설희가 아침에는 약하잖아. 저혈압인 애가 아침에 일어나서 보고서 나부랭이나 쓰고 있으면 얼마나 짜증나겠어.”

 

  촌스러운 표현이지만 안 봐도 비디오다. 분명 설희가 고심해서 한 자, 한 자 채워놓은 보고서에 또 야한 낙서나 해뒀겠지.

 

  “둘 사이에서 만든 규칙을 어기면 안 돼. 하나를 어기기 시작하면 균열이 생겨. 균열이 얇을 때는 모르지만 어느 순간이 오면 그 안으로 스며드는 낯선 것들 때문에 순식간에 무너지게 돼.”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리라고 기대도 안 했지만 미숙한 어린 아이 취급에 기분이 상했다. 틸다는 제 노고도 모르면서 은테 안경 뒤의 눈을 부라리는 도진이 미웠다.

 

  “마설희의 생활 반경에는 얼씬도 하면 안 돼. 누군가 마설희냐고 물어봐도 맞다고 하면 안 돼. 애 체력을 생각해서 클럽은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안 돼. 남자랑 키스 이상도 안 돼. 야한 소설도 쓰면 안 돼. 온통 안 된다는 것뿐이어서 지긋지긋한데 병원 하나 내 마음대로 못 와?”

  “네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건 엄밀히 따지자면 단 하나도 없어.”

  “아, 진짜 짜증나게. 내 편은 아무도 없어.”

  “네 편 이태원에 많잖아.”

  “그래서 내 편인 줄 알고 규칙 어기고 병원 온 거지. 당신도 이태원에서 만났으니까.”

 

  어흠, 어흠! 헛기침을 내뱉은 도진이 미지근하게 식은 아메리카노를 들이켰다. 허옇게 드러난 허벅지를 도진의 재킷으로 가린 채 맞은편에 앉아 킬킬대는 모습이 골탕 먹이는 게 취미인 작은 악마 같았다.

  마틸다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그녀와는 4년 전, 이태원 클럽에서 처음 만났고 그 길로 호텔까지 골인했다. 20대 여자애가 술을 어찌나 잘 마시는지 대단하다는 말 말고는 표현이 안 됐다. 지지 않겠다는 남자의 허세를 벗 삼아 와인 병나발을 불던 도결은 기절하듯 잠들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침대 위에서 만난 건 시원스럽고 도발적인 틸다가 아니라 눈물을 가득 매단 채 바들바들 떨고 있는 어린 양이었다. 처음에는 과음으로 인한 단기 기억 상실. 그러니까 단순한 ‘블랙아웃’이라고 단정 지었다. 취하면 성격이 변하고, 술이 깨면 본디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은 흔했으니까.

 

  ‘누, 누구세요? 제가 여기 왜 있어요?’

 

  하지만 도진과 만났던 일 자체를 몽땅 날려버린 데다 마치 얼굴만 똑같고 성격은 정반대인 쌍둥이처럼 행동하는 걸 보며 단정은 의심으로 바뀌었다. 클럽에서 만난 여자와 맞은 첫 아침 침대가 졸지에 진료실이 되었다. 술 마시다가 입술 몇 번 쪽쪽댄 게 전부이긴 했지만 어쨌든 애매한 상대인 건 당연했다. 하지만 대학병원 레지던트 과정을 끝내고 개인병원을 막 연 정신과 전문의에게는 놓칠 수 없는 케이스였다.

 

  ‘얼마 전부터 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옷이 바뀌어 있고, 술을 마신 적도 없는데 마신 것처럼 속이 쓰리고, 냄새가 나고, 휴대폰에 모르는 번호들이 저장돼 있었어요. 전화가 걸려 와서는 어제 놀았던 거 기억 안 나냐고… 왜 모른 척하냐고 남자들이 화를 내요…. 처음에는 몽유병인 줄 알았는데… 이젠, 이젠 모르겠어. 무서워요…….’

 

  그녀는 자신을 마틸다가 아닌 마설희라고 소개했다. 잠이 들면 스스로가 모르는 일이 일어나는 것 같다고, 하지만 꿈을 꾸다 깬 것처럼 흐릿하고 단편적인 기억만이 남아있을 뿐이라 무섭다고 했다. 자신감 넘치고, 섹시하고, 적극적이었던 마틸다가 그녀의 밤을 가지고 노는 범인이란 걸 도진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이런, 순진해 보이는 여자애가 큰일을 겪고 있네. 도진이 호텔에 비치된 인스턴트커피를 타서 내밀었다. 그리고 호로록 커피를 마시고, 킁! 눈물과 콧물을 들이마시는 아침의 그녀를 향해 제 명함을 내밀었다. 실생활 속 환자 케이스 체험도 체험이지만 갓 태어난 새끼 강아지마냥 떨고 있는 순진한 눈동자에 잠시 흔들렸다는 건, 관에 들어갈 때까지 비밀로 간직할 셈이다.

 

  “아무리 그래도 제발 아침부터 찾아오지 마. 아직 병원 오픈 전이잖아. 그리고 그렇게 야한 옷 입고, 담뱃재에서 수영하다 온 냄새 풍기면 간호사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겠어?”

  “내가 그 약지에 낀 반지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겠지. 환자로 만나서 연인이 됐구나, 정도의 합리적인 의심?”

  “됐고, 다음 주 진료는 설희 씨가 직접 다시 잡으라고 전해줘.”

  “맞다! 오빠는 마설희가 오는 걸 좋아했었지?”

 

  관에 들어가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은 120세 시대에 비밀이 벌써 파토 났다. 입고 있는 원피스보다 타이트하게 상대를 옥죌 줄 아는 틸다를 보니 잠시 잊었던 두통이 다시 몰려왔다. 그거 다 옛날 얘기거든? 이라고 반박하고 싶은 심란함은 접어두기로 했다. 어차피 반박해봤자 틸다의 마수에 걸려 의사로서의 체신만 떨어뜨릴 뿐이다.

 

  “처방전 줄 테니까 약 타서 얼른 돌아가.”

  “왜. 자기가 너무 잘나서 간호사들끼리 김도진 선생님 차지하겠다고 머리채 잡았다며. 분란 일으키기 싫어서 끼고 다니는 가짜 반지를 간호사들이 수상쩍다고 했담서? 여자 친구 아바타냐고 의심받는 와중에 살아있는 증거가 뒷받침해주면 얼마나 좋아. 가짜 반지에도 진짜 같은 힘이 실리고, 나는 클럽 말고 병원 와서 콧바람 좀 쐬고. 오빠랑 나랑 윈윈인 건데 왜 그렇게 도도하게 구는 거야.”

  “…… 요새 클럽에서는 스피치도 가르쳐주냐.”

  “나 말 잘하지? 소심해서 웅엥웅엥 거리는 마설희보다 낫지?”

  “말조심해, 마틸다. 설희 씨가 너보다 못한 게 아니야. 서로 비교군이 아니라고.”

 

  한 사람이 둘 이상의 인격을 가지고 있는 해리성 정체장애. 현재는 공식적인 명칭으로 쓰고 있지 않지만 쉽게 말해 다중인격, 도진이 내린 모의 진단이었다. 어떤 사건이나 충격으로 인해 내면에 만들어진 정신 일부분이 일시적으로 그 사람을 차지하는 질환이다. 드라마나 영화 주인공이 종종 앓는 질환이라 생소하지는 않지만 실제로는 매우 희귀해서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장기적인 추적 관찰이 필요하기에 아직은 모의 진단이라는 거다. 약물 치료보다 중요한 건 다중성을 하나로 흡수시키고 서로를 이해하게 만드는 것이다.

  마설희의 밤을 차지하고 있는 마틸다는 도진이 진지하게 굴든 말든 무릎 위에 재킷을 던지고 일어났다.

 

  “…… 딱딱하게 굴지 말고 해장국이나 먹으러 가자. 나 속 쓰려.”

  “하루 세 번, 식후 30분. 알지? 약 타가지고 가. 해장국은 다음에 먹자.”

 

  틸다가 개별적인 행동이나 말을 하면 으레 찾아오는 도결의 엄격함이었다. 틸다도 알고 있었다. 적으면 일주일에 한 번, 많으면 세 번 가량. 틸다가 누리는 들쑥날쑥한 밤은 죄다 마설희에게서 시작됐다는 걸 말이다. 그래서 다리를 선물 받은 인어공주처럼 가고 싶은 곳, 해보고 싶은 것들이 많아도 참았다. 설희의 생활 반경인 홍대나 여의도 인근에는 발도 들이지 않았다. 그렇게 하나, 둘 수칙을 세워 공존한 게 4년이었다. 하지만 깨어있는 밤의 시간이 쌓일수록 욕심이 생각을 사로잡았다. 밤의 시간은 내 건데. 마설희가 나 가지라고 양보한 건데 주위에서는 자꾸만 틸다를 부정했다. 너는 마틸다가 아니라 마설희라고. 깊은 바다 속에서 다리가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아온 또 다른 마설희. 그뿐이야. 틸다의 입술이 절로 비죽여졌다.

 

 * * *

 

  맨발 아래의 모래가 곰실거렸다. 발가락을 꼼지락 거리면 고 부드러운 모래 안으로 하얀 발이 조금씩 묻혔다. 히히, 기분 좋다. 몸에 힘을 빼고 스르륵 누우면 달빛을 받아 적당히 따끈해진 모래가 비싸다는 여느 매트리스보다 편안했다. 머리 위에 있던 밤하늘이 바로 앞에 펼쳐졌다. 꼬리를 늘어뜨린 긴 강처럼 수많은 별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설희는 그 어떤 시간보다 이 순간이 황홀했다. 무엇에도 신경 쓰지 않고, 무엇에도 상처받지 않는 이곳에서의 시간을.

 

  “어? 이제 밝아진다.”

 

  수평선 너머에서부터 땅따먹기를 하듯 광채가 밀려들었다. 돌아가야 할 시간이 왔다는 의미다. 설희가 퍼뜩 일어나 엉덩이에 묻은 모래를 탈탈 털어냈다. 그러고는 발을 도구 삼아 모래 위에 커다랗게 글씨를 남겼다.

 

  ‘마.틸.다. 바.ㅂ….’

 

  끔뻑. 끔뻑. 눈을 뜨니 익숙한 천정을 보며 제가 발장구를 치고 있었다. 다리가 미처 그리지 못한 모음 ‘ㅗ’를 완성하느라 분주했다. 괜한 민망함에 머리를 긁적이며 몸을 일으키는데 머리카락에서 짙은 담배냄새가 풍겼다. 한동안 클럽은 참아 달라고 부탁했건만 모래보다 더 힘없이 부탁이 바스러졌다. 비죽. 입술을 꼼지락거리며 보일러를 올리고 따뜻한 물줄기 아래로 머리통을 들이 밀었다. 발바닥이 욱신거리는 걸 보니 새벽 내내 댄스의 혼을 불태웠나 보다. ‘바보’라는 단어를 완성하지 못한 게 아쉬웠다.

  말끔하게 샤워를 마치고 나와 다리 부기에 좋다는 알약을 혀 위에 얹고는 생수를 마셨다. 믹서에 토마토와 사과를 넣고 갈아 뚝딱 주스 한 잔을 만들었다. 꼴깍꼴깍 주스를 마시며 붙박이장으로 걸어간다. 오후로 예정되어 있는 출근이지만 동료들에게 얼른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므로 일찍 출근해야겠다. 거실 한편의 붙박이장을 열자 누가 선이라도 그어둔 것처럼 왼쪽과 오른쪽이 판이하게 달랐다. 왼쪽에는 현란하고, 대담한 스타일이 오른쪽에는 차분한 색감의 옷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역시 청바지에 검은색 티셔츠가 제일 편하고 좋아.”

 

  산 지 3년이 넘어가는 청바지와 언제 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검은색 반팔 티셔츠였다. 옷은 오래 입을수록 몸을 이해하듯 더욱 편안해졌다. 설희는 그랬다. 새 옷과 새 신발을 사도 막상 3년 전의 옷과 2년 전의 신발에 손이 갔다. 좋아하는 음악이 생기면 한 곡을 반복 재생했다. 좋아하는 곡이 플레이 리스트에 쌓일 뿐 질려서 삭제하는 일은 잘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패이보릿 푸드였던 김치찌개는 서른이 된 지금도 좋았다.

  청바지와 검은 티셔츠를 입고, 단시간에 완성되는 출근용 화장을 끝냈다. 5년째 쓰고 있는 화이트 머스크 향수를 뿌리고, 가방을 챙겨 현관으로 걸어갔다. 화이트보드가 보이자 심장이 두근거렸다. 매일하는 과정이지만 희한하게 매일 긴장됐다. 기억하지 못하는 내가 나에게 남긴 메시지를 확인하는 건 익숙해지기 쉬운 일이 아니니까. 게다가 어제는 분노를 살짝 담은 메시지까지 남겨뒀으니 댓글이 궁금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ㅇㅋ’

 

  하……. 기대를 안 하는데도 매번 기대에 못 미치는 것도 능력이다. 실망에 입술을 툭 내민 설희가 지우개를 들어 화이트보드를 꼼꼼하게 닦아냈다. 그러다가 화이트보드 구석에 아주 작게 적힌 메시지를 발견했다.

 

  ‘선생님한테 다녀왔어. 잔소리는 내가 대신 들었음. 그러니까 보고서는 다음 주로. 식탁 위에 약 잊지 말 것.’

 

  달고 새콤한 토마토 사과 주스의 맛이 비로소 향긋하게 감돌았다.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글자
31 발각 2019 / 11 / 10 216 0 5371   
30 틸다, 이국의 클럽으로! 2019 / 11 / 10 200 0 5951   
29 키스했던 걸 후회하는 건가? 2019 / 11 / 10 212 0 6316   
28 만만하게 보지 마. 나 마틸다야. 2019 / 11 / 10 213 0 6901   
27 술김에 한 실수 아니면 진심 2019 / 11 / 10 219 0 6033   
26 내가 무서워요? 아님 내가 싫은 건가? 2019 / 11 / 9 222 0 5781   
25 그래서 내버려 둘 수가 없어. 2019 / 11 / 9 207 0 5258   
24 마설희 작가님, 레몬 셔벗 먹을래요? 2019 / 11 / 9 211 0 6256   
23 뭔가 재밌는 일이 벌어질 것 같은데. 2019 / 11 / 9 216 0 5143   
22 변화의 시작 2019 / 11 / 8 218 0 5969   
21 국지헌 VS 원계류 2019 / 11 / 8 207 0 4934   
20 예뻐요. 2019 / 11 / 8 226 0 5996   
19 동생 반만 닮으면 참 좋을 텐데. 2019 / 11 / 7 201 0 5504   
18 크랭크 인 2019 / 11 / 7 205 0 5564   
17 이탈리아에서 만나요. 2019 / 11 / 7 197 0 6441   
16 국지헌과 마설희의 첫 만남 2019 / 11 / 7 203 0 6079   
15 뒷담화 2019 / 11 / 5 204 0 5591   
14 제 별명이 인간 청심환이거든요. 2019 / 11 / 5 199 0 6862   
13 해체한 아이돌 그룹 '파이몬'의 역사 2019 / 11 / 5 226 0 5338   
12 스폰 받는 것보다 자존심 한 번 굽히는 게 낫… 2019 / 11 / 4 201 0 6446   
11 마설희는 소심한 덕후였다. 2019 / 11 / 4 222 0 5932   
10 숨기만 해서는 괜찮아지지 않아. 2019 / 11 / 4 206 0 5998   
9 어중간한 재능은 악마가 준 선물이다. 2019 / 11 / 3 203 0 6545   
8 뭔가 잘못돼 가고 있어요. 2019 / 11 / 3 232 0 6289   
7 마틸다, 사고 치다! 2019 / 11 / 3 212 0 7455   
6 밤의 틸다 VS 국민 첫사랑 국지헌 2019 / 11 / 2 209 0 5771   
5 마설희는 어쩌다 마틸다를 만나게 되었나 (2) 2019 / 11 / 2 320 0 7427   
4 마설희는 어쩌다 마틸다를 만나게 되었나 (1) 2019 / 11 / 2 290 0 7326   
3 아이돌 출신 영화감독 이태평 2019 / 10 / 31 288 0 5759   
2 Who is Matilda? 2019 / 10 / 31 318 0 7714   
 1  2  
이 작가의 다른 연재 작품
등록된 다른 작품이 없습니다.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 무단수집거부   |   신고/의견    
※ 스토리야에 등록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 본사이트는 구글 크롬 / 익스플로러 10이상에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주)스토리야 | 대표이사: 성인규 | 사업자번호: 304-87-00261 | 대표전화 : 02-2615-0406 | FAX : 02-2615-0066
주소 : 서울 구로구 부일로 1길 26-13 (온수동) 2F
Copyright 2016. (사)한국창작스토리작가협회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