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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버킷메시아
작가 : 비맞은산타
작품등록일 : 2019.10.6

물이 찰랑이는 양동이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린 청년은, 팔이 빠질 것 같은 아픔에 끙끙대며 자신을 천계로 끌고 온 눈매 사나운 여신에게 질문했다.

-누님. 이 물양동이는 뭐죠?

-그거 지구.

-네?

-그거 떨어트리는 순간 70억이 죽거든? 그 꼴 보기 싫음 버텨라?


10년.

20년.

100년.

어느새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은 양동이를 고쳐들며 이를 부득 갈았다.


-망할 년들. 이쁜 것들은 얼굴값을 한다더니...

 
누님, 강림(3)
작성일 : 19-10-30 16:57     조회 : 235     추천 : 0     분량 : 5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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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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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님이 다시 유카의 등에 털썩 주저앉으며 입을 열었다.

 

 "자, 다시 한 번 이야기를 해 보자. 이 망할 놈아. 날 성희롱한 기억이 없다고 했었지? 이번에도 같은 대답이냐? 잘 생각하고 대답하는 게 좋을 거다."

 

 "자, 자까마뇨."

 

 난 어버버버를 반복하며 근 10분간의 기억이 날아간 멍한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렸다.

 

 그녀는 신이다. 따지고 보면 신님씩이나 되시는 분이 내게 뻥을 칠 이유는 없을 터. 그렇다는 건 정말 그녀가 그렇게 생각할 만한 뭔가가 있었다는 이야기인데. 하지만 난 그런적...

 

 잠깐, 설마?

 

 난 간신히 제자리를 되찾은 입으로 속삭이듯 몇몇 문장을 입에 담았다.

 

 "OL누님은 오늘도 출근하지 않는다."

 

 "호오."

 

 "OL누님은 오늘도 야근중."

 

 "호오오."

 

 "OL누님, 복사기 사용법이 틀렸어요."

 

 "호오오오. 네놈, 그것들에다 일일히 제목까지 붙였었더냐?"

 

 이럴 수가!! 설마 이 누님 지금 내 '뇌내극장'을 트집 잡고 있는 건가?

 

 뇌내극장이 뭐냐고? 내가 무료함과 고독을 씹어 삼키다 못해 개발한 새로운 놀이다.

 

 생각해 봐라. 하루 24시간 물양동이를 들고 있는 내가 할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딱 세 가지 뿐이다. 바로 걷기와 생각하기, 그리고 혼잣말하기.

 

 그럼 이중 내가 시간을 가장 많이 투자하는 것은 뭘까? 바로 생각이다. 왜? 다른 두개와는 달리 생각하기는 패시브니까. 그리고 그 생각하는 시간 중 절반이상이 바로 누님신과 유카의 모습을 되새기는데 투자된다.

 

 그녀들의 얼굴을, 몸을, 복장을, 그리고 찬란한 백금발과 잔잔히 빛나는 은발을 떠올린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목소리는 어땠지? 무슨 말을 했지? 어떻게 웃고 어떻게 찡그리고 어떻게 화를 내고 때렸지? 그녀의 향기는? 그녀의 손의 감촉은?

 

 이젠 눈을 감는 것만으로 그녀들의 모든 것을 그려낼 수 있다. 보고 들을 수 있다. 느낄 수 있다. 흩날리는 머리칼 한 올까지 말이다.

 

 자, 그럼 그걸 이용해서 난 뭘 할 수 있을까? 범위를 좁혀 유카와 누님에게만 집중하면 작년, 유카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녀들의 짝퉁(환상)을 만들어 낼 수 있고,

 

 퀄을 좀 떨어트리는 대신 범위를 넓혀 배경과 엑스트라까지 넣으면,

 

 -무려 머릿속에서 영화를 만들어 상영할 수 있다. 스스로도 해 보곤 '이게 되네'싶어서 깜짝 놀랐었더랬지.

 

 근데 그걸 봤다고? 어느 틈에?

 

 난 경악하며 외쳤다.

 

 "그저 머릿속으로 공상만 했을 뿐인데! 그걸 어찌?!"

 

 "네놈도 내가 네놈 머릿속을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텐데?"

 

 "물론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런 능력은 거리가 멀어지면 잘 안통하기 마련 아닌가요?! 게다가 혹시나 싶어 그런 뇌내극장은 일부러 랜드마크 바깥에서 이동 중일 때만 상영했는데?! 유카가 분명히 랜드마크 바깥에선 누님의 눈을 피할 수 있다고..."

 

 "그건 이 년이 법술에 특화된 지천이라 그런 거고. 넌 걍 똥 빠지고 대가리 떨어진 다시멸치마냥 쥐뿔도 없는 생짜 인간이잖아? 안 들킬 거라고 생각한 게 더 신기하다?"

 

 "큭."

 

 "게다가 넌 자주 잊는 것 같은데, 난 신이다. 치천급 신. 이 우주 통틀어도 동급정도나 좀 있을까, 더 높은 존재는 없는 그런 분이라고. 우주 끝에 있어도 네 망상 따윈 1445인치짜리 스크린에다가 4D로 상영해 줄 수도 있거든?"

 

 "어쨌건 그, 그건 그냥 제 머릿속의 생각일 뿐이잖습니까."

 

 누님신이 유카의 등짝을 찰싹찰싹 찰지게 때리며 대답했다.

 

 "천만에. 넌 날... 아얏아얏 시끄러워. 이년아. 잡음 넣지마. 여튼 넌 날 앞에 두고 내가 주인공인 19금영화를 상영한 거야. 이게 성희롱이 아니면 뭐가 성희롱이지?"

 

 "19금은 아니었어요! 억지로 우기면 아슬아슬하게 15금이라고 우길 수 있을지도 모르는 레벨이었다고요! 애초에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 건 이미지가 불명확해서 배경으로나 써먹을까 주요 등장인물엔 적용 못합니다! 그러니 19금은 불가능하다고요! 못 벗기는데 무슨 19금입니까!"

 

 "......"

 

 뜨아, 아무리 당황했다지만... 난 지금 무슨 개소리를 하고 있는 걸까? 이놈의 주둥이를 그냥 확!

 

 누님신의 눈이 가느스름해진다.

 

 "호오? 눈으로 보지 못한 건 소재로 쓰지 못한다? 그래서 OL누님시리즈랑 비키니 아머 여전사시리즈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거군?"

 

 "헉!"

 

 그녀가 자신의 군복과 유카의 토가를 슥 훑는다.

 

 "그럼 오늘부턴 제복여군 시리즈랑 그리스로마 여신시리즈가 폭증하겠네?"

 

 "허헉!!!"

 

 "......"

 

 잠깐의 정적이 흐른 후 난 다시 허둥지둥 변명을 시작했다.

 

 "으, 으흠. 여튼 지금 중요한 건 어쨌든 그게 19금이 아니라 15금이란 점입니다."

 

 누님신은 일단 화제전환에 따라주겠다는 듯 피식 실소했다.

 

 "15금도 성희롱이긴 매한가지야."

 

 으으, 어서 일해라. 내 머리. 빨리 변명을 짜내!

 

 "...원점으로 돌아가죠. 다시 말하지만 그건 제 머릿속에서 이루어진 망상일 뿐입니다. 제 프라이버시라고요!"

 

 "멸치 똥에 프라이버시는 무슨."

 

 아깐 다시멸치더니 이번엔 왜 멸치 똥이냐. 그새 평가가 추락했나보다.

 

 난 좀 발끈했다.

 

 "세상에 망상 좀 했다고 성희롱범이 되는 법은 없습니다."

 

 "그 세상의 룰을 정하는 게 바로 나다."

 

 "윽!"

 

 "그리고 네놈은 종교서적도 안 읽어봤냐? 그 대다수가 신이란 존재 앞에선 생각도 선악의 범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말하고 있을 텐데?"

 

 내가 입을 벙긋거리고 있자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여하튼 네놈도 정말 난놈이긴 난놈이다. 나란 존재가 얼마나 초월적인 존재인지 몸소 보고 겪었으면서도 나를 그런 눈으로 볼 수 있다니."

 

 ...젠장, 나이 130넘어서 껄떡쇠 소리를 듣다니. 막말로 130살이면 어쩌고 동네의 장수 할아버지하면서 TV에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란 말이다.

 

 "게다가 나와 네놈이라는 등장인물만으로 러닝타임이 두 시간은 족히 될법한 이야기를 헐리우드 뺨치는 대작부터 소소한 로맨스까지 수천편이나 뽑아내다니. 유카 이 년이 나온 것까지 포함하면 무려 만 편이 넘어가지?"

 

 이 상황에서 내가 들이밀 수 있는 반론은 하나뿐이다.

 

 "...그래봐야 결국 고, 공상인데."

 

 "그냥 공상이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근데 말이야, 네놈의 머릿속 이미지는 그냥 공상으로 치부하기엔 퀄이 지나치게 높아."

 

 "...엥?"

 

 "내가 괜히 1445인치 4D운운한 게 아니란 말이다. 자식아. 지구 문명이 이대로 발전하면 십수 년 혹은 수십 년 안쪽으로 시도 될 영화제작기법 중에 Daydream materializing(데이드림 마테리얼라이징, 공상구현)라는 게 있다. 사람의 생각을 읽어내는 장치를 이용해 머릿속을 영상이나 소리로 구현해 영화 등의 베이스를 만들어내는 거지. 그 위에 여러 보정과 내용의 가감을 덧씌우면 하나의 작품이 되는 거야. 생각해 봐라. 단지 생각만으로 수많은 예산을 때려 부어야 할 영상과 소리를 만들어 내는 모습을. 대단히 효율적이지 않나?"

 

 데이드림 마테리얼라징라니, 공상구현이라니 뭐야 그게. 멋지잖아! 마치 옷 입는 센스라곤 쥐뿔도 없는 금발거유아가씨가 생각만으로 막 성도 짓고 쇠사슬로 사람도 후드려 팰 것 같은 이름이다!

 

 "근데 이건 과학 이외엔 문명발달의 기반이 될 만한 학문이 없는 대부분의 인류문명권에선 반짝 시도되곤 그대로 묻혀버려. 아니, 정확히는 상업영화제작기법으로선 거의 사장되지. 왜 그런 줄 아냐?"

 

 "아뇨."

 

 "그건... 아이썅."

 

 "아, 아이썅?"

 

 누님신이 말을 이어가다 말고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갑자기 짜증스런 표정을 짓는다. 난 내가 또 뭔가 죄를 지은 게 있나 싶어 몸을 떨었다.

 

 "야, 이 새캬. 근데 내가 왜 이딴 걸 이야기하고 있어야 하지?"

 

 "그, 글쎄요. 저도 모릅니다. 전 듣기만 했어요. 전 무죄입니다. 그러니 때리지 말아주세요. 더 때리시면 저 울 겁니다. 울 거에요. 막 질질 짤 거라고요."

 

 그녀가 좀 깬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저 표정 좀 봐. 나 좀 상처입었어.

 

 "후. 기억이란 건 그냥 단순한 이미지나 영상이 아니라 뇌 기능의 복합적인 산물이다. 그중에서 시각적인 이미지만 뽑아내면 당연히 애매하고 정보량이 극도로 부족한 거지같은 물건이 나올 밖에. 심지어 기억이 아닌 창조의 영역으로 가면 더더욱 허술해지지. 물론 돈이나 인력, 시간을 때려 부어 보정을 하면 불가능 한건 아니지만 그럴 거면 그냥 기존방식으로 영화를 만드는 게 차라리 나아. 그래서 결국 공상구현기법은 사장된 거다. 물론 마도학 같은 영능학이 있는 세계라면 좀 다르겠지만."

 

 "으음."

 

 "그런데 네놈의 그것은 거기에 가져다 대면 마치 8K UHD(7680×4320)급의 영화를 보는 것 같다는 이야기다. 끄집어내자마자 바로 1445인치 스크린 영화관에 바로 올려도 될 정도로 말이다. 덤으로 그런 정보량의 덩어리 같은 걸 며칠마다 두 시간이 넘는 분량으로 꼬박꼬박 쑥쑥 뽑아내고도 무리는커녕 '히히, 누님 가슴 좀 봐. 만지고 싶다.' 이딴 소리를 지껄이고 있지."

 

 음? 뭔지 모르겠지만 나 뭔가 칭찬 듣고 있는 건가? 칭찬 맞지?

 

 누님신이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칭찬 아니다. 이 망할 놈아. 다만 좀 놀라긴 했다. 인간이 성욕과 결부된 채 망상만 100년을 하면 여기까지 발전 할 수 있나 싶어서 말이다. 심지어 욕망이 억제되는 이곳에서. 이것 참. 인간의 잠재력을 칭찬할지, 시도 때도 없이 거시기를 세우고 헐떡거리는 인간의 성욕이 가진 힘을 칭찬해야 할지 모르겠군. 머릿속으로 AV좀 만들어 보겠답시고 보통 여기까지 하나? 흠. 네놈은 실로 인간의 성욕과 잠재력의 화신이로구나."

 

 "AV아니라고! 15금 로맨스 영화라고! 안 벗겼다니까! 그리고 그건 인류를 살리기 위한 내 숭고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그걸 거름통에 처박지 말라고요!"

 

 누님신이 어디서 개가 짖냐는 표정으로 내 항변을 깔끔하게 무시한다.

 

 "좌우지간 그거다. 그냥 평범한 인간의 어줍잖은 망상이면 초딩이 쓴 야설 보는 기분으로 웃고 넘어갈 수도 있겠는데, 이건 퀄이 쓸데없이 높다보니 진짜 내가 너랑, 그것도 수천 번 패턴을 바꿔가면서 애정행각 하는 걸 눈앞에서 직접 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더럽단 말이다. 이 정도면 확실히 성희롱 맞지? 그러니 이걸로 난 널 적법하게, 내킬 때마다 두들겨 팰 권리가 있다고 해도 괜찮지?"

 

 "이제껏 썰을 푼 결론이 그겁니까...? 합법적으로 패기위한 밑밥 깔기였어요?"

 

 "나도 일단은 공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는 선신을 표방하고 있거든. 납득하지 않은 상대를 줘패는 건 맘이 아프단 말이지"

 

 "뻥이다!"

 

 "믿거나 말거나. 여튼 이해한 거지?"

 

 "애정행각이든 뭐든... 보라고 들이 민 것도 아니고, 그냥 안보면 되잖습니까."

 

 "야, 네놈은 네놈도 모르는 새 널 주인공으로 한 AV가 만들어져서 몰래 방영중이란 소리 들으면 그거 확인 안 할 거냐? 호기심이든 만든 놈을 패죽일 목적이든 일단 보기는 할 거잖아?"

 

 "......"

 

 ...듣고 보니 말 된다. AV는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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