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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전생에서 만난 그대
작가 : 판도라
작품등록일 : 2019.10.4

“뭐...뭐라구요? 돌아갈수 있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구요?"

뜻밖의 사고로 400여년전의 명나라로 타임워프를 한 임서은, 그런 그녀에게 염라대왕은 한가지 제의를 하게 되는데...

알고보니 이 모든것은 그녀의 전생이 저지른 일, 전생이 저지른 일은 후생이 수습해야 하는게 명부의 원칙이라고?

더이상의 망설임은 없다! 요동으로 갈것이다. 이여백, 누르하치, 이성량, 만력황제...기다려. 명나라 요동의 역사는 내가 고쳐쓸터이니!

담대하고 지혜로운 그녀의 좌충우돌 요동 정벌기,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그녀와 그의 사랑과 갈등도 지금 시작되는데....

 
오해
작성일 : 19-10-29 02:42     조회 : 228     추천 : 0     분량 : 146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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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

 

 무순에 도착하여 추잉이 있는 곳으로 들이닥친 서은 일행은 헛탕을 치고 말았다. 이미 앞서간 군사들이 추잉을 데려갔다는 집주인의 말이 끝나자 서은은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우리가 한발 늦었군요.”

 “그렇다면 아까 그 군사들이?”

 

 나치야의 말을 우사가 화난 얼굴로 받았다.

 

 “또 누가 있겠습니까. 추잉을 데려가면서 우리를 모르는척 하고있던 그놈이…”

 

 힐끗 서은을 바라보며 우사가 말을 중단했다. 서은은 한참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다시 집주인에게 물었다.

 

 “그전에 다른 사람들은 찾아오지 않았습니까.”

 “총병님께서 워낙 은밀히 분부하신 일이라…”

 

 서은은 몸을 돌려 말고삐를 고쳐쥐었다.

 

 “일단 헤투알라성으로 가죠. 거기에 가면 자연 답이 나올 것입니다.”

 

 셋은 그길로 발걸음을 돌려 무순을 빠져나왔다. 성문을 나서 헤투알라성으로 가는 길에 들어서는데 어디선가 한무리 장정들이 같은 길에 접어드는게 눈에 띄었다. 그중 한 장정이 이윽히 셋의 행색을 바라보다가 문득 서은의 말앞에 다가와서 정중히 읍을 하였다.

 

 “실례지만 심히 면목이 익사오니 혹여 이 사람이 전에 어디서 뵈었던 분이 아닙니까.”

 

 서은은 고개를 돌려 잠시 장정을 바라보다가 급히 말에서 뛰어내렸다.

 

 “아니, 이곳엔 어떻게…”

 

 금주 성안의 주점 주인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한때 북방 명교의 당주였었던 금주주점 주인이었다. 명교가 해체된후 그도 주점을 닫고 강호를 은퇴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여기서 이렇게 만날줄은 생각지 못한 일인지라 서은은 반갑기도 하고 어안이 벙벙하기도 했다.

 

 “당주께서 여긴 어쩐 일로…”

 

 서은의 부름에 그는 얼굴에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은 당주가 아닙니다. 그냥 주씨 성의 원외라고 불러주십시오.”

 

 주원외는 서은의 뒷쪽에 눈길을 주다가, 다시 얼굴에 미소를 띄우고 말했다.

 

 “우사께서 어찌 이곳까지 강림하셨습니까.”

 “본인은 당주라는 호칭을 사양하시면서, 어찌 제겐 그리 각박하십니까.”

 

 우사도 웃으면서 말에서 내렸다. 주원외가 저쪽으로 장정들에게 뭐라고 분부하자 그들은 일제히 헤쳐졌다. 다시 그들 앞으로 온 주원외는 얼굴에 착잡한 표정을 떠올렸다.

 

 “그간 이도련님의 소식이 전무하여 이참에 얼굴을 뵙고자 이리로 오는 길입니다. 혹시 부인께선 아시는지요.”

 “원외께서 모르는 일을 어찌 한낱 아녀자가 알겠습니까. 저 역시 지금 막 경성에서 오는 길입니다.”

 

 서은의 말에 주원외는 깊숙히 미간을 찌푸렸다.

 

 “애초에 출병하시기 전에 도련님께서 잠시 금주 주점에 다녀가셨습니다.”

 “그래요?”

 “그때 잠깐 이상한 이야기들을 들었습니다. 저는 제가 빗들은거라 생각했는데…”

 “이상한…이야기라니…”

 

 이번에는 서은이 깊숙히 미간을 구겼다. 주원외는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지 머리를 흔들었다.

 

 “글쎄…어떤 노인과 이야기를 주고 받던데…명부가 어쩌고, 대신 이용하라는 말들을 하셨습니다.”

 “…!”

 “아마 출병도 그때문에 하신듯 합니다. 아니면 아직 아무런 기미도 보이지 않는 누르하치를 토벌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것도 엄동설한부터…”

 

 바람이 차지도 않은데 서은의 입술이 떨렸다. 염라대왕…이 모든것이 염라대왕의 간계다. 그녀는 입술을 옥물었다. 그리고는 잠깐 사색을 더듬다가 또박또박 말했다.

 

 “지금의 요동은, 신진세력의 누르하치가 강대해지고…조선인 후손의 장군들의 위망과 세력이 감퇴되는 시점입니다. 이미 시작된 폐하의 태정으로 요동 소수민족들의 움직임은 심상치 않은지 오래고, 이로서 요동은 앞으로 오랜 시간 불안정한 시기를 겪게 될 것입니다.”

 “공주님의 뜻은…”

 “맹고를 인질로 잡아오기전 누르하치는 저를 납치한적이 있습니다. 하여 맹고가 우리 손에 있어도 요동 백성들에게 이 점을 인지시켜 우리에게 유리한 싸움의 명분을 얻을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맹고는 도망가지 않았습니까. 만일 더이상 출병하지 않는다면 누르하치가 선손을 쓸지도…”

 “그게 통탄스럽단 말입니다. 맹고는…분명 그 누군가가 놓아줬을테니까요.”

 

 서은이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녀의 노기어린 표정에 주원외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잠시 무언가 생각하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주원외를 보았다.

 

 “그래서 이곳으로 오신 것입니까.”

 “그때 그 이야기들을 듣고 불안했는데, 봄에 출병하신 도련님께서 여름이 다 되도록 아무 소식도 들려오지 않아 길을 나섰습니다. 다들 강호 출신이라 작은 도움이라도 될가 해서 말입니다.”

 “떠도는 소식조차 수소문하지 못하였나요?”

 “그게…확실하진 않지만…”

 

 주원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흘깃 눈을 들어 서은을 보았다.

 

 “누르하치와의 싸움에서 영채를 습격당해 지금은 수림앞에 영채를 세웠다 들었습니다. 그리고 영채를 굳건히 지키고 전혀 나가지 않고있다 들었습니다.”

 “수림…원습험저(原湿险阻)에 영채를 세우는 것은 병가에서 기피하는 일이거늘…”

 

 서은이 미간을 구기며 중얼거리는 말을 주원외가 두던하듯 받았다.

 

 “그걸 도련님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다만 예허군이 뒤로 양도를 끊어 물 공급이 어려워졌다 들었습니다. 군사들을 위해서는 영채를 물 가까이 세우는것도 어쩔수 없는 일인 듯 합니다.”

 “…”

 “하물며 서북을 끼고 영채를 세운다면 서북풍만 불지 않으면 화공 습격이 어렵지 않겠습니까. 이런 계절에 서북풍이 불 확률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도련님께서도 심사숙고한 후 결정하신 일이겠지요.”

 

 서은은 잠깐 눈을 들어 주원외를 보았다. 그녀의 눈에 알릴락말락 웃음기가 스쳤다.

 

 “원외께서 이토록 용병에 능하시다니. 실로 강호에 숨어 사시는 고수중의 고수이십니다.”

 “저야 그동안 주점에서 보고 들은 강호의 이야기를 빌어 아는척 했을뿐이온데, 부인께서 이토록 병법에 정통하시니 심히 놀라울 따름입니다.”

 “과찬에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서은은 머리를 숙였다가 다시 눈을 들어 주원외를 보았다. 그리고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금방 물 공급의 말씀을 들으니, 얼핏 생각나는것이 있는데 어디 한번 들어주시겠습니까.”

 “저도 그동안 생각해온 것이 있는데 귀 기울여 듣고자 합니다.”

 

 주원외가 흔쾌히 웃자, 서은은 한참 생각에 잠겨있다가 다시 천천히 말했다.

 

 “우리가 사람도 적고 전장의 일도 모르니, 다른것은 도우지 못할지라도 한가지만은 가능합니다. 제가 전에 헤투알라성에 가본적이 있는데, 헤투알라성은 군비와 양식이 충족하나 단 한가지, 물이 충족하지 않아 성밖의 하천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하오니…”

 “혹시…그 물 공급을 끊자는 생각이십니까.”

 

 서은은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 몇사람으로 어찌 가능하겠습니까. 다만 아까 양도를 끊은 군사가 예허군이라 하였으니, 성밖을 지키는자들은 단연 예허군일거라 생각됩니다. 그러니 저희는 그 물공급을 하는 예허군 한명을 잡아 여차여차 하시면 됩니다.”

 

 서은의 말을 듣고있던 주원외는 그녀가 말을 끝내자 경외심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러니 반간계(反间计)를 쓰신다는 말씀입니까.”

 “네, 예허와 헤투알라성은 혼인을 한 처지이긴 하나, 맹고가 아직 대푸진의 자리에 오르지 않아 예허의 나린부루는 줄곧 불만을 품고있던 터입니다. 지금 첫째 푸진 동가가 병이 골수에 들어 목숨이 경각을 다투니, 예허는 이참에 헤투알라성을 도운다는 명분으로 맹고의 지위를 확고히 하자는 목적을 가지고 왔습니다. 저희는 이번에 이 반간계를 쓸뿐만아니라 맹고를 위협할수 있는 인물을 헤투알라성안에 들여보내야 합니다.”

 “어디 가서 그런 인물을 찾겠습니까.”

 “제가 뫼시고 오지 않았습니까.”

 

 서은이 고개를 돌려 나치야를 가르키자, 주원외는 얼굴 한가득 경탄의 표정을 지었다.

 

 “역시…부인께서 이처럼 만단의 준비를 하시고 오셨으니 도련님에게 어찌 별일이 있겠습니까. 암, 없구말구요…”

 

 ……

 

 “어찌 도련님을 먼저 찾아가지 않고…”

 

 주원외 일행과 합친후 따로 길을 접어든 서은에게 나치야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우사는 아무 말없이 뒤를 따라오기만 했다.

 

 “어차피 제가 가도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 사람이 누군가에게 조종을 당하는 이상.”

 

 서은은 더이상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침묵이 괴이했는지 나치야는 여전히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조종을 당하다니요…누가요? 누구한테요?”

 “더이상 묻지 말아주십시오. 저는 이번 싸움에서 꼭 이겨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을, 그리고 내가 지켜야 하는 것을 지킬수 있습니다.”

 

 단호한 어조로 서은이 말했다. 그녀는 염라대왕의 말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이 명부를 상대로 싸움을 걸면 이길 승산이 없다는 것도 알고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던 것들이 사실로 확인되자, 더할나위없는 분노가 온 몸을 휩쓸었다. 명부의 꼭두각시로는 그녀 한사람으로 족했다. 그를, 그녀를 만나 방황을 끝낸 그를, 자신의 존재적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기 시작한 그를 염라대왕이 조종을 하게 할수는 없었다. 그것은 죽음보다도 더 비참한 것이었고, 세상의 모든것을 바꾸는 일보다도 더 심각한 것이었다.

 

 “왜 그동안 함구했는지…알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녀는 혼자만의 중얼거림을 입안으로 삼켰다. 처음에는 쉬이 감이 잡히지 않았고, 그가 기밀을 위해 그녀에게도 쉽게 터놓지 않는 것이라 생각했다. 바로 그녀가 생각했던 진진가가(眞眞假假), 허허실실(虛虛實實)의 방법, 무순에서 헛탕을 치고 또 주원외의 말을 들은후 그녀는 더욱 그 생각을 확고히 할수 있었다.

 

 “이대로 둘수는 없지요.”

 

 그녀는 작은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 그가 그녀대신 희생하게 할수는 없었다. 명부가 어떤 식으로 그를 이용하든지 막론하고 그녀는 그것을 막아야 했다.

 

 “앞에 예허의 군사가 있습니다.”

 

 그녀의 사색을 자르며 주원외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일행은 어둠속으로 몸을 은폐했다. 주원외가 신호를 보내자 장정 두사람이 눈깜짝할 사이에 몸을 날려 사라졌다. 이윽고 반식경도 채 안되어 그들은 여진족의 복색을 한 군사 하나를 끼고 여럿의 앞에 나타났다.

 

 “예허의 군사면 죽이고 헤투알라성의 군사라면 살려두시지요.”

 

 주원외가 짐짓 낮은 소리로 서은에게 속삭이는척 했다. 서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주원외의 말을 알아들은 그 군사는 사시나무 떨 듯 온몸을 떨었다.

 

 “어느 지역 군사인지 이름을 대시오. 나는 헤투알라성의 군졸이요.”

 

 서은은 그 군사의 말에 일이 잘되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장정들에게 분부했다.

 

 “포박을 풀거라.”

 

 장정 둘이 포박을 풀자, 서은은 그 군사에게 딱딱한 표정으로 말했다.

 

 “헤투알라성의 군졸이라 하니 살려두겠다. 대신 누르하치한테 가서 당장 이르거라. 헤투알라성 성주가 너무한 것이 아니냐고…우리를 불러 예허를 약화시키자고 한게 언젠데 여태 손을 안쓰고 있다니. 병가에서도 오뉴월의 군사는 오래 동하지 않는 법이라고 했거늘.”

 

 군사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연신 허리를 굽석거렸다.

 

 “네, 알겠습니다. 헤투알라성에 들어가 바로 고하겠습니다. 실례컨데 뉘신지…”

 

 서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주원외가 목소리를 돋우어 군사에게 호통쳤다.

 

 “총병부 부인의 행차시다. 광녕부를 대신해서 이르는것이니 일호 차착이 없게 누르하치에게 전해야 한다.”

 

 군사가 머리를 조아려 물러가자, 나치야가 서은의 곁으로 다가왔다. 어둠속에서 그녀의 옷자락이 바람에 가볍게 흔들려 한결 표연한 느낌이 들었다.

 

 “누르하치가 그정도에 넘어갈것 같지 않습니다. 총병부에서 총병님의 교육을 받아 장성한 사람이 아닙니까.”

 “누르하치는 속지 않을 것이나 예허의 추장 나린부루는 의심이 많은 자라 꼭 두사람사이 반목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이번에 저희도 급하지만 누르하치는 더욱 초조한 마음일테고, 지금 헤투알라성은 포위를 당하고 아들은 관군에게 인질로 잡혀있으니 그 역시 이런 반간계를 알아차릴만한 지혜는 잃은지 오랠 것입니다.”

 

 서은은 고개를 들었다. 잠시, 어둠에 갇혀있던 그녀의 두눈이 반짝였다. 그것은 물기가 어려 빛나는 그녀의 눈물이었다.

 

 “나치야…내가 당신을 이용하는 것 같아…마음이 괴롭습니다.”

 “당치 않은 말씀입니다. 친구라 하지 않았습니까…저 또한 제 마음을 확인하러 가는 길이니까요.”

 

 나치야의 부드러운 손이 그녀의 흐트러진 귀밑머리를 가볍고 올려쓸어준다. 서은은 나치야의 어깨에 잠시 얼굴을 묻었다. 그동안 졸였던 마음이 일시 탕개가 풀리며 저도 모르게 울컥 울음이 몰려왔다. 그것은 무거운 감동이기도 했다.

 

 “제발…성공하셔야 해요.”

 

 퍽 신경을 써서야 들을만한 낮은 목소리로 나치야가 말했다. 바싹 마른 입술을 추기며 서은도 시선을 들어 그녀를 보았다.

 

 “제게 부탁할 일이 있으면…말씀해주세요.”

 “누르하치를 대함에 있어서, 마음을 공략하는 걸 우선으로 하고 성을 공략하는 걸 차선(攻心为上, 攻城为下)으로 해주세요.”

 

 나치야의 잔잔한 한마디에, 서은은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는 한참이 지나 정중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서방님께서 지금껏 시간을 끌어오신 것 역시, 마음으로 싸우는 것을 상책으로 하고 병사로 싸우는 것을 하책(心战为上,兵战为下)으로 하기때문입니다.”

 

 그녀의 대답을 듣고 나치야가 아름답게 웃었다. 그리고는 그녀를 어둠속에 남겨놓고 헤투알라성이 있는 쪽으로 뒤돌아서 걸었다. 그녀의 마음이 무거워났다. 복잡하고 답답하고 먹먹한 마음을 어찌할 도리가 없어 손으로 가슴을 눌렀다. 그녀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나치야…!”

 

 갑자기 그녀가 목소리를 돋우어 불렀다. 나치야가 걸음을 멈췄고, 그녀는 나는듯이 앞으로 달려가서 와락 나치야의 손을 잡았다. 눈물이 어렸던 눈이 어둠때문인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나치야 역시 울고 있다는 것을 직감으로 느낄수 있었다.

 

 “제가…잘못했어요. 미안해요.”

 “…”

 “친구라면서…친구라면 친구가 행복하게 해줘야 하는것을…내 사심때문에 당신을 보내다니…그럴순 없어요…”

 “…”

 “당신은 대푸진이 되지 않을 거에요. 아니, 누르하치의 부인 반열에 자신의 이름이 남아있는 것조차 거부할 거에요. 그정도로 당신은 결백한 성정이고, 당신의 그런 운명은 당신 스스로 만든 것입니다. 제가 당신 운명을 좌우지할 자격이 없어요…제가…잘못했어요. 제가 지키고 싶어하는 것만 유념하고, 당신이 지키고 싶어하는 건 존중해주지도 못한…제 욕심과 미련때문에 어리석었어요.”

 “공주님이…진정 저를 아시는군요…”

 

 주르륵 맑은 눈물이 나치야의 눈에서 흘러내렸다. 주체할수 없는 눈물이 그녀들의 눈에서 흘러 풀잎을 흥건히 적셨다. 풀잎들은 맥없이 축 쳐져 흙속으로 사라져갔고, 그녀들의 옷깃을 맴도는 바람 끝이 서서히 차거워 지고 있었다.

 

 서북풍이었다.

 

 ……

 

 수림속의 연한 나뭇가지들이 몸을 뒤틀며 분분히 동남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완연한 여름날씨에 일명 살풍(杀风)으로 불리우는 서북풍이 밤새 기승스럽게 불어친 이튿날 아침, 서은은 차분한 시선으로 수림을 꿰뚫고 멀리 헤투알라성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가 그 수림이군요.”

 

 언제 왔는지 우사가 등뒤에서 말을 걸어왔다. 서은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네, 언젠가 지휘사님이 저희를 기다렸던 이곳…후에도 여러번 이 수림을 지났었지요. 헤투알라성과 철령 사이에 이런 수림이 있다는 게 참으로 신기합니다.”

 “신기하다니요?”

 “여기는 평원지대가 아닙니까. 무연한 평원이지만 이런 수림에 시선이 가로막히니 이곳이 헤투알라성의 천연요새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공주님께서 모르시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철령 지대는 워낙 산과 수림이 많습니다. 다만 이곳으로 내려오면서 평원이 시작되는것이지요. 그래서 이 수림을 다들 [종림(终林)]이라 부른답니다.”

 “종림?”

 “네, 수림이 끝난다는 뜻이지요.”

 

 무심한 말투로 우사가 그녀의 말에 답했다. 순간 찌릿…하고 그 어떤 차가운 것이 그녀의 심장을 스친다. 뭔가…물밀듯이 밀려오는 이 정체모를 절망과 슬픔은…그녀는 잠시 고개를 흔들어 그 생각을 털어버렸다.

 

 “종림이라…기억하겠습니다.”

 

 그녀는 우사를 버려두고 나치야가 있는 장막안으로 들어왔다. 금방 일어났는 모양으로 얼굴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그녀를 찬찬히 살피는 나치야의 행동에 그녀는 싱긋 웃어보였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수심이 꼴똑 찬 얼굴입니다. 서북풍이 그치지 않았는지요.”

 “네, 아직…”

 “그럼…어서 사람을 보내어 이도련님께 조심하라 일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새벽에 주원외를 먼저 보냈습니다.”

 

 그녀는 나치야의 시선을 피하며 장막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치야의 눈에는 의혹이 가득차 있었다.

 

 “어찌된 일입니까.”

 “…”

 “여기까지 와서 무엇을 망설이고 계십니까, 제가 아는 공주님 답지 못합니다.”

 

 그녀는 여전히 침묵했다. 전혀 궁금증이 해결이 안된 나치야가 다그쳐 묻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무엇이 문제란 말입니까.”

 

 이대로 기다려도 나치야가 전혀 물러설 기미가 아니어서,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서방님께 해가 될수 있습니다.”

 “해라니요?”

 “여기부터는 헤투알라성의 요새입니다. 즉 우리의 일거일동은 헤투알라성의 세작들의 눈을 피할수 없다는 말입니다. 다시말하면 제가 서방님을 만나게 되면, 지금껏 추진해왔던 모든 일들이 흐트러질수 있습니다.”

 “그렇다고…이렇게 지척에 두고도 모르는척 해야 합니까.”

 

 나치야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시선이 서은의 몸으로부터 천천히 장막밖으로 향했다.

 

 “저희들과는 달리, 두분 사이에는 다른 여인의 존재도 없고, 가문의 영욕도 가로놓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공주님이 구경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제가 두려워하는 것은…”

 

 서은은 잠시 눈을 감았다 다시 떴다. 그녀의 한숨이 입술 사이로 자잘하게 부셔져 공기속으로 흩어졌다.

 

 “살아 계신다는 게 어딥니까. 무사한 것을 알게 된것이 어딥니까…제가 두려워 하는 것은…그 어떤 힘에 조종당해 지금까지의 우리 사이가 전처럼 되돌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두렵습니다.”

 

 나치야가 살풋이 웃었다. 그러더니 잠깐 무엇을 생각한 듯 그녀가 한참 미간을 구기고 있다가 말했다.

 

 “제가 가서 물어보고 오리까.”

 “…”

 “일단 공주님보단 제 목표가 그리 크진 않겠지요. 세작이 저를 안다 한들 뭘 어떻게 할수 있겠습니까. 도련님을 뵙고 공주님의 뜻을 전하고 오리다. 그러면 뭔가 해답이 있지 않을까요.”

 “…”

 “공주님 또한 이곳에서 애간장을 태우지 마시고 영채로 가지 못하면 우선 광녕으로 돌아가 기다리는건 어떨까요.”

 “어떻게…전하겠습니까.”

 “두분만이 아는 그 어떤 말이나 글귀들이 있지 않습니까. 서신으로라도…”

 “서신은 위험합니다.”

 

 서은은 머리를 흔들었다. 뒤이어 고개를 숙이고 이윽토록 뭔가 생각하던 그녀가 다시 눈을 든 것은 한참후였다. 나치야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 작은 미소가 어렸다. 그녀는 나치야를 향해 나직히 한마디 말했다.

 

 “한가지 방법이 있긴 있습니다.”

 

 ……

 

 “왜 저만 여기에 붙들어두는 것입니까!”

 

 겨우 서북풍이 멎은 한산한 수림속에서 우사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서은은 장막앞에 요지부동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달빛이 나뭇가지 사이를 헤집고 들어와 그녀의 반쪽 얼굴에 희미한 그림자를 던지고 있었다. 주원외와 나치야를 영채로 보낸 것을 안 우사가 야단을 친 것도 꼬박 하루의 일이다. 무덤덤한 그녀의 표정에 우사도 지쳤는지 털썩 그녀의 앞에 몸을 던져 앉는다.

 

 “여기까지 와서 저더로 수수방관 하라니요…공주님을 지켜드리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지휘사님은 다 좋으신데 그 명예욕은 좀 버리셔야 합니다.”

 

 나무가지로 수풀을 헤집으며 그녀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녀의 태도에 무안했는지 우사가 잠시 잠잠해졌다.

 

 “여기까지 절 따라오신 게…정녕 누르하치와의 대결을 위한 것인가요? 아니면 서방님의 패배를 눈으로 확인하시려는 건가요?”

 

 그녀의 말에 정곡을 찔렸는지 우사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잠깐 눈을 들었다.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이 욕심나서 인가요.”

 “저도 봉선에게, 곧 태여날 아기에게 부끄럽지 않는 지아비와 아비가 되고 싶습니다.”

 “그것이 꼭 이런 방식으로 얻어야 하는 것입니까.”

 

 그녀는 여전히 담담한 태도를 유지했다. 우사는 그녀의 시선을 피해 눈길을 아래로 떨구었다.

 

 “무슨 뜻이온지…”

 “제 말뜻을 정녕 모르시고 되묻는 것입니까.”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품안에서 뭔가를 꺼냈다. 우사의 눈빛이 반짝 하고 빛났다가 다시 빛을 거두었다.

 

 “이것을 위해 온것이 아닙니까. 저를 지키기 위한것보단, 이것을 얻기 위함이 아니었습니까.”

 

 그녀는 우사의 눈빛을 못본척, 손안에 든 물건을 내려다 보았다. 성화가 그려진 만력의 옥패…명교의 상징.

 

 “공주님을 지켜드리는 것이 그 1순서요, 옥패를 위함이 그 2순서라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우사의 말에 진심이 섞여있다는것은 안다. 하지만 마음 한가득 황량하고 처연한 기분은 떨쳐버릴수 없다.

 

 “이것이 대관절 무엇이기에…이 물건에 그토록 집착을 하십니까.”

 “명교의 잔여 세력을 끌어모을수 있는 힘입니다. 명교…이대로 해체하기엔 너무 아까운 조직입니다.”

 “오라버니의 뜻입니다. 지휘사님이 감히 성상의 뜻을 거스르려 하십니까.”

 “폐하의 뜻이기 전에 공주님의 뜻이 아니었습니까…폐하에 대한 제 충정으로, 설사 명교를 다시 만든다 해도 나라의 기강에 해가 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옥패…공주님에겐 한낱 무용지물일지 모르오나, 제겐 평생을 두고 추구할만한 보물입니다.”

 “…”

 “그것만 제 손에 있으면 저 주원외와 그 수하들은 물론, 출중한 무림 고수들을 응집할수 있는데 어찌 마다하겠습니까.”

 

 어쩜 이리도 다를까. 출사에 담백한 이여백과 명예에 모든것을 거는 우사…어쩜 이리도 같을까, [의천도룡기]의 양소와 범요…그리고 그들의 운명…절로 허구픈 웃음이 나갔다. 이여백도 양소의 운명을 닮을까.

 

 문득 나무가지 사이를 꿰둟고 청량한 옥적 소리가 은은히 울려왔다. 잠깐 귀를 기울이던 그녀의 얼굴표정이 미세하게 변했다. 뭔가에 이끌리듯, 그리고 뭔가에 홀린 듯 눈을 감고있던 그녀의 눈귀에서 투명한 눈물 한방울이 굴러떨어졌다.

 

 “인연…”

 

 놀라움도 잠시, 가슴속에서 격정이 끓어넘치기 시작한다. 그녀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우사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으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옥적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나는듯이 걸음을 옮겼다.

 

 “부인님…”

 

 멀리 수풀을 헤치고 누군가가 불쑥 모습을 나타냈으나 곧 우사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멍해진 것도 잠깐, 수풀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우사가 몸을 솟구쳤던 것이다. 하지만 온 사람이 주원외라는 것을 알아본 서은은 얼른 앞으로 다가가서 우사를 제지시켰다.

 

 “지휘사님…원외님이세요.”

 

 주원외는 숨이 찼는지 장막앞에 앉아서 한참 숨을 돌렸다. 그러다가 서은이 권하는 물 한대접을 받아 마시고 나서야 겨우 말문을 열었다.

 

 “세작들이 얼마나 집요한지 겨우 떨쳐내고 왔습니다.”

 “영채쪽은 무사합니까.”

 

 서은의 다급한 어조에 주원외는 걱정 말라는 듯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미 수림을 멀리 벗어난 곳에 영채를 치고 있더이다. 도련님께서 어떤 분이신데요. 서북풍이 불면 화공을 피해야 한다는 도리를 설마 그분이 모르시겠습니까.”

 “만나…뵈었습니까.”

 

 사뭇 떨리는 목소리로 서은이 물었다. 주원외의 얼굴색이 잠깐 어두워졌다.

 

 “그게…어찌나 경계가 삼엄한지 저같은 사람들은 영채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다만 오는 도중에 한가지 괴이한 일을 듣고 공주님께 여쭈려던 참이었습니다.”

 “괴이한 일이라니요.”

 “지금 저 옥적 소리를 들으셨습니까.”

 “네.”

 “군사들이 말을 주고 받기를…영채 뒤쪽 둔덕에서 항상 저 옥적소리가 울려퍼진다 하더이다. 전혀 듣지 못하던 곡조라 헤투알라성에서도 저 종적을 찾으려고 군사를 풀었지만 가까이 가기도 전에 사람이 가뭇없이 사라져서…”

 “영채 뒤쪽 언덕이라 함은…”

 “이 수림이 끝나는 곳에 있습니다. 제가 오는 길에 들려 봤지만 별다른 흔적은 없었습니다.”

 

 서은은 묵묵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에 잠깐 눈물이 고였다. 지금도 귀가에 여운이 남는 그 익숙한 곡조…바로 이곳 그 아늑한 동굴에서 그녀와 그의 합환곡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군사들의 앞에서 가뭇없이 사라질수 있는 보법은 건곤대나이를 빼놓고는 아무것도 없다.

 

 잠시 눈물을 흘리고 있던 그녀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장막안으로 되돌아간 그녀가 다시 나왔을때 그녀는 벌써 흰 깁으로 싼 거문고를 안고 있었다.

 

 “공주님…위험합니다.”

 

 우사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단정히 눈을 들어 우사를 응시했다.

 

 “저를 지켜주시겠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

 “그 마음이 우선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면 지휘사님의 그 보법으로…저를 지켜주십시오.”

 “…”

 “여기 계시다가 만일 제 곡조가 장군령으로 변하면 바로 달려와 주십시오. 그리 해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우사와 주원외의 놀라운 눈길을 뒤로 하고, 그녀는 결연히 몸을 돌려 수림끝의 둔덕을 향해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둔덕에 이른 그녀는, 잠시 눈을 들어 휘영청 밝은 달과 총총한 별들을 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시선을 돌려 헤투알라성을 향해 작게 미소를 지었다.

 

 “여기가 과연 전망이 좋군요.”

 

 그녀는 거문고를 내려놓고 한참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주위는 캄캄한 어둠속에 쌓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단정히 앉아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손을 내밀어 거문고 줄을 골랐다. 그녀의 손가락이 거문고 위를 가볍게 튕겨나가자, 곧 물흐르는 듯한 청아한 곡조가 삽시에 둔덕위로 울려퍼졌다. 삼라만상이 조용히 귀를 기울이는 듯 했다.

 

 “대체 얼마만한 당신 모습이,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것인가.”

 

 바람처럼, 탄식처럼 표연한 남자가 소리없이 언덕위에 나타났다. 그가 나직히 하는 말에 그녀의 마음이 마치 거문고 줄처럼 팽팽해진다. 거문고줄을 다시 고르는 그녀의 눈에 함뿍 눈물이 고였다. 하지만 그녀는 고집스럽게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결국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눈물을 손등으로 흔적없이 닦아낸 후, 그녀는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퍼지는 절절함을 애써 누르며 최대한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진진가가, 허허실실이 최선이니, 제 모습이 알려지지 않았다 하여도 꺼리낄 것이 없습니다.”

 

 남자가 문득 걸음을 옮겨 거문고 앞에 다가왔다. 그리하여 전혀 설득력 없는, 그녀의 어조와는 상반대 되는 눈물범벅의 얼굴을 보고야 말았다. 남자가 천천히 허리를 굽혀 그녀의 얼굴에 손을 가져왔다. 그녀는 머리를 돌려 그의 손을 피했다.

 

 “우리가 이렇게 다시 만날줄은…생각지 못하였습니다.”

 “화가 많이 났는 모양이구려.”

 

 남자는 손을 거두어들이고 그녀의 앞에 마주앉았다. 그녀의 시선을 마주한 그의 얼굴이 더없이 냉정해 보여서 그녀는 속이 얼어들었다. 잠시 엄숙한 얼굴로 그녀를 보던 남자가 말했다. 사뭇 위압적인 어조였다.

 

 “여기가 어딘줄 알고 왔는가.”

 “헤투알라성밖 관군의 주둔지입니다.”

 “항상 꼬박꼬박 말대답을 하는건 변하지 않았군.”

 “어떤 분은 많이 변하셨던데요. 연기도 많이 늘었구요.”

 

 그녀가 뒤질새라 맞받아쳤다. 두 사람 사이에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냉정하다 못해 싸늘한 표정이던 남자가 잠시 눈을 들어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예상대로 그의 눈빛이 너무 생소해서 그녀는 작게 몸을 떨었다.

 

 “나치야를 시켜 당신은 말을 전했고, 그 말대로 난 내 행적을 당신한테 알렸어. 이젠 그만하고 돌아가.”

 “어디로요. 광녕으로요? 아니면 당신이 원하는대로 내 세상으로요?”

 

 그가 말문이 막혔는지 가만히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는 눈을 들어 수림끝을 응시하다가 말했다.

 

 “우리가…처음 만났던 그때 기억하십니까? 제가 남장을 하고 당신을 형님으로 모셨을 그때…그때도 당신은 항상 나를 밀어냈고, 돌아가라고 말을 하셨죠. 그게 나한테는 어떤 기분이고 얼마나 상처가 되는지…아십니까.”

 “…”

 “당신에게 저는 향락만 같이 누릴수 있고, 고생은 같이 할수 없는 사람에 불과했나 봅니다.”

 “…”

 “만일 이 모든것이 염라대왕때문에 그런다면, 나를 지켜주고 맞서 싸우겠다고 약조하신 건 잊으셨습니까.”

 “지킬수 있는 것과, 지키는 것보다 더 좋은 선택도 있어.’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녀의 마음속으로 뭔가 실낱 같은것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이 지금껏 고민해왔던 일들…똑같은 고민을 그도 하고있었다는 말인가. 그가 움찔 몸을 일으켰다. 잠시 뒷짐을 지고 뭔가를 생각하던 그가 다시 그녀에게 고개를 돌린것은 한참뒤의 일이었다.

 

 “그리고 당신은 여기 모든것을 지키고 싶어하지만, 정작 당신 자신은 지키지 않고있지.”

 “제가요?”

 

 그녀가 눈을 올롱하게 떴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는 듯, 연이어 눈을 깜빡거렸다. 지금껏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것은 미처 생각지 못하였다. 자신때문에 벌어진 모든 일들을 바로잡으려 노력했을뿐.

 

 “그러니 우리는 각자 지키고 싶은것을 지키자구. 당신은 이 모든것을 지키고, 난 내 소신을 지킬테니까.”

 

 머리속에서 윙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토록 무정한 말을 저토록 담담하게 하다니…무슨 남자가 저래.

 

 “뭐라…구요?”

 “못들었을리 없겠는데, 난 내 소신 지키겠다고. 그러니 난 당신을 최대한 빨리 돌려보내야 해.”

 “당신 말인즉, 내가 당신보다는 여기 모든것들에 마음을 더 빼앗긴다는 얘긴가요?”

 “사실이 그래. 당신이 인정하지 않을수도 있어. 당신 자신조차 당신 마음을 다 알지는 못하니까.”

 “뭐가 그렇게 제멋대로에요?”

 

 드디어 잠재하고있던 분노가 폭발해버렸다. 자신의 손이 떨리는 걸 그녀는 보고 말았다. 경성에서 지금까지 마음을 졸이며 찾아왔던 대가가 고작 이런 거였던가, 자신의 마음을 몰라줄만큼, 그가 이토록 냉혹한 남자였던가. 일말의 흔들림도 망설임도 없이, 저토록 깔끔하고 차분한 모습을 보려고 자신이 온 것인가.

 

 “오로지 당신만 억울한 듯한 그런 말투…그런 식으로 나하고 얘기하지 말아요.”

 “…”

 “그 서신…당신이 썼던 그 서신들이 지금은 그토록 위선적으로 느껴지네요. 죽음을 각오한 그 서신들…하지만 제가 만일 여기 와서 확인하지 않았더라면…당신이란 사람은 어떤 의미로 제게 남게 되었을까요…”

 “…”

 “어쩌면 다 거짓일수도 있겠네요. 진진가가, 허허실실이라…당신의 진실한 마음은 구경 어떤 것인가요? 만일 이 모든것이 나를 돌려보내기 위한 수단이라면, 어떻게 그렇게 진지하고도 냉혹하게 얘기할수 있죠? 난 이토록 아픈데…아파서 숨도 못쉴 것 같은데…내 마음을 이토록 몰라주다니…같이 맞서기로 한 약조는 어디다 버리고…언제부터 이렇게 한마음이 아니었던가요? 그리 명부가 두려운가요? 그깟 죽음, 그게 두려웠으면 저 지금까지 오지도 않았어요! 그렇게도 날 모르시나요?”

 

 눈물이 쏟아져내려 그녀는 눈앞이 흐려지는 감을 느꼈다. 그래서 남자의 표정이 어땠는지 그녀는 볼수 없었다. 다만 싸늘한 바람에 실려오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그의 말을 간신히 가려들을수 있을뿐이었다.

 

 “난 당신처럼 순진하지 않아. 난 원래 이런 사람이었지. 당신도 다 알고 시작한 게 아니었나.”

 

 그녀는 주먹을 말아쥐었다. 손톱이 살갗을 파고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런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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