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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일반/역사
인연, 악연으로 마침표...
작가 : Number3
작품등록일 : 2019.10.28

오남매의 파란만장 인생 스토리... 악연으로 끝나다...!

 
인연, 악연으로 마침표...8화
작성일 : 19-10-28 19:46     조회 : 258     추천 : 0     분량 : 17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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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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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년 샌님 같은 명숙의 남편이 봄바람이라도 났는지 영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이자 험한 분위기의 살얼음판이 따로 없었다

 . 호출기를 손에서 놓치 않는 것은 기본이고 아침이면 이 옷, 저 옷 장사 진열하듯이 늘어 놓으며 한참씩 별 쓸데없는 고민에 빠져서는 시간을 잡아먹기 일쑤였다. 삐쭉 들여다 보면 무슨 꼴 난 치장을 그리 오래하는지 누가 엿보는지도 모른 채 마냥 심각한 것이 한심스러웠다. 보다 못한 명숙이 농담처럼 한마디 툭 던졌는데 의외의 반응에 오히려 더 의심을 품었다.

 “아아니… 바람이라도 나셨나… 생전 거울이라고는 안 보던 사람이 왜 그런대. 여자보다 더 오래 치장을 하고… 몇 시간째인줄 알기나 해? 어디 젊은 년이라도 숨겨 놨나…” 일편 단심인 남편이 엉뚱한 쪽으로 눈 돌릴 염려가 없다는 확신을 하는 터라 까놓고 내뱉은 농담이었다

 . “쓸데없는 생각하느라 생사람 잡지 말고 남편 뒷바라지에 새끼들 잘 건사할 궁리나 해. 시간이 남아도니 의심이나 하구 말야… 당신 남편이 그 정도 밖에 안 되는 줄 알어? 집에서 하는 일이 뭐라구 별 짓을 다 하네…” 유순하던 사람이 긴긴 변명에 안 하던 짓을 하니 의심이 더 갈 수밖에 없었다. “어머나, 왜 큰 소리야 정말, 자기답지 않게… 누가 언제 바람이 났다구 했어? 그냥 농담으로 해 본 소린데 수상하네. 내가 자길 몰라서… 아무리 날뛰어야 부처님 손바닥 안 이라는거 명심해. 날 물로 보지 말라는 소리야. 행여 바람이라도 피우다 걸리는 날엔 작살을 내 버릴 테니…” 뭔가 미심쩍은 마음에 안달복달하는 명숙을 바라보던 남편이 은근슬쩍 꼬리를 내렸다.

 “도대체 사람을 뭘루 보고 그런 쓸데없는 의심을 하는지 내 원, 당신이야말로 아직도 나를 모르겠어? 일편단심 민들레가 여자한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라구. 나야말로 민들레야. 장명숙의 영원한 민들레…” 비밀에 부치고 싶은 일 일수록 의논 상대라고는 어미 밖에 없던 명숙이 전화통을 붙들고 하소 하던 것은 몇 일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 “글쎄, 밥상을 차리는데 뭐가 삐삐 울려 대는거야. 아유, 뭘 뭘해 뭘 하긴… 씻을때 몰래 훔쳐 봤지.” 신경질을 내는 것으로 보아 명숙네가 박서방은 뭐하고 있었느냐 묻는 꼴이었다. “그 번호 찍힌거 외워 뒀다가 해 보니까 젊은 기집년이 받드라. 요새 수상 쩍드라니 엉뚱한 짓 하는게 틀림 없어. 이 웬수를 그냥… 뭐, 민들레? 웃기고 자빠졌네…”

  거품을 물고 호도독 거릴 명숙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한눈 파는 일 없이 온순하고 성실한 맏사위를 가장 맘에 들어했던 터라 명숙의 말만 듣고는 믿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박서방이 그럴 위인이나 된다니? 그런 사람 이 세상에 또 없다. 그만하면 업어주고 살아도 시원찮을 판국에 괜히 의심하며 닥달하지 말어. 니 신세 니가 볶는 꼴이니…” 맏사위 노릇에, 영식의 가출로 장남 노릇까지 톡톡히 하는 상황이니 어여쁘고 대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 이상 말 해봐야 늘 자신만 나쁜년 만드는 명숙네와는 말이 통하질 않았다. “엄마 아들이야, 사위야? 됐어. 고자질하는 나만 못된 년이지 항상… 말 해봐야 본전도 못 찾는거 입만 아프네…” 그대로 넘기기에는 석연치가 않았던지 아쉬운대로 경숙을 하소연 상대로 정했으나 형부 같은 사람이 세상에 또 어디 있느냐는 웃음 소리에 ‘미친년 지랄하네…’ 라는 우스개 소리만 건넸다.

  마지막 구원병이나 싶어 금숙에게 전화를 하니 펄펄 뛰는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뻥 뚫리는 것처럼 속이 다 후련했다

 . “언니, 분명 뭔가가 있을꺼야. 나한테 맡겨. 그런건 또 내가 빠삭하지. 걸리기만 하라 그래. 형부고 나발이고 다 뭉개 버릴 테니까… 전화번호나 읊어 봐…” 금숙의 거칠 것 없는 작업이 바로 시작되어 호출기에 떴던 번호를 들들 볶았다. “야, 너 뭐하는 년인데 한밤중에 호출은 하고 지랄이야? 그것도 유부남한테…” 다짜고짜 반말 짓거리를 하는 상대에게 움찔했던지 수화기 너머의 앳된 목소리가 잔뜩 얼어 있었다. “저… 그게 아니구요. 번호를 잘못 눌렀었나 봐요…”

  어찌어찌 추적 하다보니 사무실의 나이 어린 여직원이었는데 실수로 누른 것이라고만 했다. 명숙을 대신해서 눈만 뜨면 하루 일과의 시작으로 전화통에 대고 욕지거리를 하던 금숙은 “너 이 씨발년아, 밤길 조심해라. 눈에 띄었다가는 그 날로 니 제삿날인줄 알고…” 하는 악다구니를 써대는데 저쪽에서 “너 나 조심해…” 하는 친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흠칫 놀라던 금숙이 명숙에게 호들갑을 떨며 통화 내용을 전하는데 혼자 보기 아까운 쑈쑈쑈를 자매가 듀엣으로 하고 있었다. “언니, 클났어. 내가 그 년한테 밤길 조심하라구 욕을 퍼붓는데 갑자기 형부가 받더니 너나 조심하라 그러더라. 뭔가가 있다니까. 분명히…. 그러니 소리 소문도 없이 전화도 바꿔주며 쌩쇼 하는거 아니냐구… 내 목소린 줄 알텐데 어쩌지?...” 명숙은 배꼽을 잡으며 웃음 반, 걱정 반이 되어 설마 니 목소리를 단번에 알겠느냐 하면서도 코 라도 막고 하지 멍청하게 그냥 해서 산통 깨게 생겼다고는 했지만 머릿 속이 복잡했다

 . 대낮에 사무실로 동생까지 동원해서,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지랄쟁이 금숙을 시켜 퍼부은걸 알면 아무리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라도 가만 있지 않을텐데 큰일은 큰일이었다

 . 소심한 샌님 성격이지만 한번 꼬라지 났다 하면 쌀쌀맞게 돌변하는 모습을 한번씩 당했던 터라 그리 호락호락 만만한 인간은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술에 쩔어 귀가한 남편은 대뜸 명숙의 뺨부터 갈기며 소리쳤다. “비싼 밥 먹고 할 짓이 그렇게도 없냐? 그것도 막 돼 먹은 막내를 시켜 한참 어린 여직원 상대로 쌍스런 욕이나 퍼붓게 하고… 과간도 아니야. 자매가 셋트로… 왜? 장모님까지 동원하지 그래. 걔 불쌍한 애야. 지방에서 혼자 올라와 자취하는 앤데 무서워서 더는 못 다니겠다고 울고불고 하드라. 그런 앨 협박하고 싶냐? 순진하고 착한 애를…” 주정 같은 연설을 끝으로 한대 맞아 준 명숙은 남편의 양쪽 뺨을 곱빼기로 갈기며 그악을 떨었다

 . “어, 그래? 이제야 실토를 하시네. 불쌍한 년 데리고 살지 왜… 어따 대구 손찌검이야. 우리엄마한테도 안 맞고 살았어. 니 까짓게 뭔데 뺨을 때려…” 어려서 툭하면 경끼하고 넘어가던 성깔 고대로를 재현하듯이 입에 거품을 문 채 쓰러지자 술에 취한 남편이 주춤하며 겁을 먹었다.

  더 이상 건드려 봐야 기절 직전까지 가 일이 커질 것을 직감했던지 일단 수습부터 할 요량으로 한걸음 물러섰다. “이 사람이 왜 이래. 그런거 아닌 줄 뻔히 알면서…손찌검 한 건 정말 미안해. 술김이다 보니 내가 실수를 한 것 같아.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어쩌자구 당신한테 손찌검을 다 하구… 내가 미친 놈이지…” 술 김이 아니라 술에 취한 척 남편도 쑈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만큼 멀쩡한 소리로 지껄이는 것을 보니 무슨 트집이든 잡아 금숙의 행패를 막으려는 의도가 틀림없었다.

  명숙의 묵비권으로 승부도 나지 않은 싸움이 질리도록 계속 되었는데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서서히 미치는건 남편 쪽이었다.

  그런 식으로는 숨이 막힐 만큼 지겨워서 더 이상 못 살겠다는 분통을 터트린 후, 그것을 핑계삼아 새벽녘이 되어서야 도둑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다녔다. 신경을 곤두세우며 자는 척 하던 명숙이 벌떡 일어나 손에 잡히는대로 사정 없이 날리며 악을 썼다.

  그런 횡포쯤이야 진작에 통달한 사람처럼 몸을 돌려 날아오는 것을 피하던 남편은 콧방귀를 핑핑 뀌며 보이지 않는 무시를 했다. 이미 마음이 떠나가버린 듯한 행동에 명숙이 아주 잠깐 후회도 했으나 자존심을 굽히기는 죽기보다 더 싫었다.

  소개로 만나 꽤 오랜 기간의 연애 끝에 너무도 잘 어울린다 싶을 만큼 보기 좋은 커플이었는데 한쪽의 배신으로 이러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연애시절의 다정다감하고 착했던 남편의 모습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마누라와 아이들 외에는 눈도 돌릴 줄 몰랐던 위인이 한번 돌아서니 물, 불을 가리지 못하는 것에 더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기왕지사 뻐그러진 인생이니 같이 어기짱을 놓기로 작정한 명숙의 말투며 행동 하나하나가 나날이 고약스러웠다.

  밥 그릇을 휙휙 날리며 “쳐 먹던지 말던지…” 는 기본이려니와 어느 것 하나 고운 눈으로 봐 넘기질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바 그릇 감싸안고는 꾸역꾸역 한 그릇씩 비운 후, 과일까지 챙겨 옴팡지게 먹는 모습은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반성의 기미는 고사하고 한 수 더 떠서 비아냥 거리는 꼴을 보며 주먹이 자동으로 불끈 쥐어졌다. 느물대는 모습에 명숙이 질릴 즈음 까놓고 여직원과 같이 출 퇴근하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었다. 누가 보아도 비정상적인 관계로 보이던 두 사람은 무슨 꿍꿍인지 명숙의 집 근처에 방을 얻어 동거를 하며 염장을 질렀다. 어느 쪽이 먼저 두 손, 두 발 다 들고 나자빠지느냐의 길고 긴 싸움이 시작된 셈이었다.

  바람나 딴 살림을 차린 주제에 멀쩡히 나타나 태연하게 아이들을 마주 할 때면 면상에 침이라도 냅다 뱉어 주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다 큰 아이들은 그런 아버지를 경멸하고 증오하며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명숙의 평상시 말투며 행동이 오만방자하게 남편을 무시하는 것 뿐이었으니 자연스레 세뇌교육이 이뤄지듯 있으나 마나한 존재에 불과했다.

 그런 일상 속에서도 가족만을 위해 혼자 벌벌 떨며 돈 벌어들이는 기계처럼 앞만 보고 달린 꼴이니 어찌 보면 그보다 더 가여운 인생이 또 있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 붙박이장처럼 안정권 범위 내에서만 몸 사리던 남편의 소심한 탓이었는지 명숙의 화끈하고 불 같은 성격에 밀려 늘 뒷자리였다는게 가장 큰 불만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 신혼초에는 다소곳이 남편을 하늘처럼 여기던 명숙이 아이가 생긴 후로 극성스럽게 돌변하는 모습을 보며 낯설고 무섭다는 말을 장난 삼아 꺼내곤 했다.

 쥐꼬리만한 월급쟁이에 가당치도 않을 만큼 재산을 불려가며 과감히 넓혀 가는 것 또한 언제나 명숙의 공로였다

 . 겁 없이 아무데나 뎜벼드는 것을 보며 불안하기도 했지만 여지껏 한 번도 들어 먹지 않은 채 잘 버텨준 것에는 고마운 마음도 들어 표창장이라도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명숙이 더 오기창창한 이유인 즉슨, 모든 재산이 자신의 소유였는데 겁은 많고 용기는 없는 남편을 상대로 이런 저런 변명 따위를 늘어 놓는 일 조차도 귀찮아 멋대로 저지르고 수습하다 보니 그런 방면엔 완전히 도사 수준이었다

 . 얼띠고 들 떨어져 속 빈 강정 같은 사고 뭉치 정숙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의 대조적인 성격이나 보니 암팡지고 야무지게 재산을 늘릴 수 있었다. 알뜰함이 몸에 베인 짠순이 습성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그리 큰 재산이 있을 줄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 큰 손 마나님께서 빈털터리 남편은 쫓아 내는 일은 그야말로 식은죽 먹기보다 훨씬 쉬웠다.

 

  맞 선 이후, 연락이 두절 상태인 남자에게 몇 번이나 전화를 하려던 경숙은 알량한 자존심 때문인지 절박한 심정이 되어서는 다시 포기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긴 긴 여운을 남기며 미련을 갖게 했던 남자의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럼 그렇지. 내 주제에… 하는 마음으로 일주일이 빠르게 지날 무렵, 동료를 앞세워서는 “코도 좀 막고 나 인것 처럼 해서 바꿔달라고 해봐…” 하는 부탁까지 서슴지 않았다. 자존심도 상하고 쪽도 팔리는 일이었으나 이번만은 결코 놓치고 싶지 않다는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행여 남자의 변덕으로 변덕으로 인해 보기 좋게 차이는 꼴을 당한다 해도 그런 어리숙한 행동을 멈출 수가 없었다. 작고 오동통하니 귀여운 모습에 살로우만 꽃돼지라는 별명을 가진 인숙은 상냥한 성격 그대로 시키지도 않은 코맹맹이 소리까지 섞어 가며 긴긴 서두 끝에 상대를 요구했다. 일을 꾸민 본전도 못 찾을 만큼 ‘출장중이래’ 그 한 마디를 전해 들은 경숙은 온 몸의 기운이 좍 빠지는 느낌에서 허우적 거렸다.

  첫 만남의 분위기도 좋았고 서로의 감정이 썩 괜찮았는데 이쪽에서 맘에 들어하니 역시나 하는 거지 발싸개 같은 징크스에 치를 떨었다. 도대체 뻐그러질 이유 따위가 없을텐데 그 이유도 모르는 채 무참히 차이는 것만 같아 오히려 화가 났다

 . 여운을 남겼던 터라 분명히 다음에 만날 때 운운하며 우롱당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정말 마지막 선 이라고 뻐튕기며 나간 자리였는데 무슨 놈의 팔자가 이리도 기구한지 결혼이고 나발이고 다 때려 치우자는 결론을 내렸다

 . 처녀귀신이 되어 물 먹인 놈 들을 다 가만 놔두지 않을 테다 하는 심정으로 상대를 원망도 하며 미련을 버리자는 생각에 미쳤을 때 전화벨이 요란 뻑적지근하게 울렸다. “저… 수고 많으십니다. 죄송하지만 장경숙씨 좀 부탁드립니다…” 경쾌하다 못해 하늘을 감싸안고도 남을 만큼의 다정다감한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경숙은 단번에 알아 차렸다. 남자로부터 걸려 올 전화가 어디인지 훤히 꿰뚫다 보니 순간 수화기를 들고 있던 얼굴에 야릇한 승리의 미소가 번졌다.

  일주일의 출장 끝에 다시 만난 남자는 두런두런 그 동안의 행적을 보고하듯 달콤하게 속삭였다. 아득한 꿈 길에 푹 빠져들 만큼 아무리 봐도 자상하고 따뜻한 남자였다.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는 명숙네의 흥겨운 핀잔을 들으며 난생 처음 연애다운 연애에 불꽃을 태웠다

 . 둘 다 영화광이다 보니 퇴근 후, 으레히 심야영화 한 편에 포장마차까지 들러 집에 갈 때 쯤이면 컴컴한 어둠이 절정을 이루던 시간이었다.

  점잖고 다정한 성격에 이끌려 겁 날 것도, 두려울 것도 하나 없었다.

 ‘어딜 가든 가장 많이 생각나고 보고 싶드라…’ 하는 말 한마디로 사랑을 표현하던 남자는 경숙이 살아가는 이유를 깨우쳐 주었다.

  점심 시간이면 쏜살 같이 달려와 얼굴 마주 보며 밥을 먹었고 늦은 퇴근을 기다리느라 버스 정류장에서 목을 늘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에 정성이 깃든 그를 보며 경숙은 허공을 붕붕 날아 다녔다.

  그대로 높이 올라갔다 떨어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한 가지 의문점이 있다면 평일에는 새벽까지 싸돌아 다니며 온갖 친절을 다 베풀던 남자가 주말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을 만큼 꼼짝도 하질 않았다. 어디 숨겨둔 애인이라도 있어 양다리 걸치는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수도 없이 고개를 들었다.

  간혹 한 번씩 약속을 펑크내며 나타나지 않는 것에 혼자 이를 갈다가도 무엇에 홀린 듯 샤프한 마술에 이끌려 가는 꼴이 한심스럽기까지 했다. 상대가 밝히고 싶지 않는 것에 대해 굳이 묻고 싶지도 않았을 뿐더러 나이만 꽉 차다 보니 속속 깊이 파헤치는 일 조차 골머리가 아파 가급적이면 피하고 싶었다.

  두 달여의 만남 끝에 찻 집에 마주 앉은 남자는 자기한테 시집 와 달라는 말을 했고 경숙은 그 청혼을 거절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명숙네와 명숙이 신바람 나서 궁합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는데 장남도 아닌 것이 장남 노릇을 하려는게 걸리기는 하나 모시지만 않는다면 별 문제가 없을꺼라는 점괘를 내놓았다

 . 홀어머니로 인해 까딱 하다가는 삐그덕 소리가 그치지 않을 것이라며 부적을 강요했지만 그런 미신에까지 투자할 여유가 없었다. 걸핏하면 때국년 소리를 들먹이며 구박도 했으나 어찌 됐든 지가 벌어가는 터라 보태주지는 못 할망정 명숙네가 허튼 돈을 쓸 엄두도 내지 못했다

 . 점잖고 자상하기만 하던 남자가 청혼과 동시에 떼를 쓰기 시작하는게 밥상의 투정 부리는 아이처럼 집요함을 보였다

 . “와… 정말 너무한다. 바래다주는데 뽀뽀도 안하는 애인이 세상에 어디 있냐…” 그런 생떼를 부리다 못해 호시탐탐 으슥한 골목으로 밀어 붙이기 일쑤였다. 어떤 날은 말도 안되는 꼬득임인줄 뻔히 알면서 동네 어귀의 오래된 여관에 발을 들여 놓았다가 밤새 몸 싸움을 하며 진을 빼기도 했다.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무 생각도 없이 쫄래쫄래 따라 들어간 경숙은 남녀간의 은밀한 행위에 대하여 이론으로만 동냥질해 들었던 터라 남자가 지쳐 떨어져 나갈 정도로 오랜 실랑이를 벌였다.

 그 나이 먹도록 남자하고 손 한번 안 잡아 봤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고 솔직히 뽀뽀도 한번 못 해본 한심한 처지이다 보니 막상 닥친 현실이 무서웠다

 . 남들 다 하는대로 망가지고 부숴지며 즐길 수 있는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굳세어라 장경숙… 의지의 한국인답게 꿋꿋히 순결을 보존했다. 마지막 그 하나만은 지키고 싶었던게 결혼 상대자에 대한 예의가 여겼고 자기 자신에게도 떳떳할 수 있는 자부심이라고 믿었다.

 다 큰 남자와 호젓한 공간에 처음으로 갇혀버린 경숙이 문을 활짝 열어 제치며 소란을 피우자 각방 마다의 묘한 눈빛들이 문을 빼꼼 열고는 호기심에 가득 찬 눈길을 보냈다.

  긴긴 밤의 줄다리기 끝에도 자신의 욕망을 채우지 못한 채 씁쓸히 웃던 남자는 다음 날 아침에 와서 꼭 깨워달라는 조건을 내세우며 한마디 했다.

 “그까짓꺼 힘으로 한다면야 내 맘대로 뭐는 못하겠니… 하지만 내가 졌다. 그렇게 지키고 싶어 하는거 나도 같이 지켜 줘야지 무슨 짐승도 아니고…” 미안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동시에 들으며 새벽녘 혼자 여관 문을 나서는 경숙의 모습은 갈 때까지 다 가버린 허탈한 모습의 반 미친년 같았다. 흘끔거리는 카운터의 총각이 간 밤의 니들 행실을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야릇한 웃음을 흘렸다. 니깢놈이 아무리 그래봤자 난 떳떳한 몸이라는 것을 과시하듯이 당당하게 여관 문을 나선 경숙은 그때서야 주저앉을 정도로 온 몸의 기운이 좌악 빠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그런 와중에도 아무 일 없이 집으로 무사히 돌아가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뛰는 가슴은 빠른 걸음보다 더 팔딱팔딱 뛰었다. 컴컴한 골목길을 허덕거리며 뛰는데 어둠이 무섭게 손을 뻗던 시간이었다. 이리저리 뒤척이며 남자의 손길이 닿았던 순간이 떠올라 잠시 흥분되기도 했지만 뿌리치고 돌아온 것은 역시 잘 한 일이라는 것에 변함이 없어 스스로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 바래다 줄 때면 일부러 으슥한 담벼락으로 잡아 끌던 남자의 얼굴엔 장난끼가 가득 넘쳤다.

 “왜 환한데 놔두고 그리루 가요? 난 컴컴해서 싫던데… 무섭기도 하고…” 눈치코치는 고사하고 연애의 기본도 모르는 무지랭이 경숙을 향해 남자가 신바람 나서 말했다.

 “아이구… 순진한 아가씨야, 이리루 와. 이제부터 여긴 우리 뽀뽀 코너야…” 남의 집 담벼락에 밀어 부친 채 야수처럼 덤비던 남자도 마지막 한가지만은 끝까지 존중해 주었다. 서툰 경험에 익숙해질 무렵 6개월의 진한 연애 끝에 노처녀의 막을 내리는 순간, 덩그마니 혼자 남을 명숙네 생각이 앞을 가렸다. 그런 망설임을 눈치 챈 남자는 넉넉한 형편이 아닌 탓도 있었지만 계 멤버인 그의 노모가 은근히 더 부추기는 바람에 데릴사위로 들어와 살겠다는 뜻을 비쳤다.

 무뚝뚝하고 부루루 성질만 부리던 영식이 채우지 못한 부분들을 세심하게 신경 써 주는 남자로 인해 집안에 늘 부드러움이 맴돌았다. 장모와 사위 관계를 떠나 자상하고 따뜻한 성격 그대로 효성 깊은 아들 노릇을 톡톡히 했다. 걸핏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뻑뻑거리며 속이나 뒤집을 줄 알았던 영식과는 사뭇 다른 점이 보기만 해도 편하고 좋았다.

  한가지 문제 될 것이 있다면 간혹 혀가 꼬부라진 채로 들이닥쳐 밤새 퍼붓던 금숙의 주정이었는데 그 애비의 그 딸년 아니릴까봐 하는 꼬라지 마져 볼 성 사나웠다.

 “어디서 감히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내고 안방을 차지하는 건자… 귓구멍이 다 막힐 노릇이네. 불쌍한 우리 엄말 문간방으로 밀어내고도 니들이 무사할 줄 알어? 야, 장경숙… 너도 일찌감치 냉수 먹고 정신차려. 이 속도 없는 등신아.. 남자가 처가살이 하겠다고 나설때는 다 꿍꿍이가 있는거야. 나이만 먹었지 니가 그런 걸 알기나 하겠냐… 이런 젠장 할… 데릴사위? 끅… 다 좋다 이거야. 반반한 인물에 돈까지 있으면 너 같은 노처녀를 데려 갔겠냐고… 돈 보고 덤빈거야. 정신차려라 제발… 나중에 쫑나서 울고불고 하지 말고…” 말도 안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것이 듣기에 민망했던지 명숙네가 나서서 큰 소릴 쳤다.

 “꼴 값 떨지 말고 니 행실이나 똑바루 하고 살어 이것아… 챙피한 줄도 모르고 어딜 와 큰 소리야. 누가 돈 보구 덤빌 정도로 돈이나 많긴 한거구… 뚫린 입이라고 번지르르하게 말은… 씩뚝 꺽뚝 지껄이지 말구 술 쳐먹고 해롱대는 모습 꼴도 보기 싫으니 다신 얼씬도 말어. 술이라면 내 넌덜머리가 난다. 어째 그리 똑같냐. 그 애비의 그 딸년 아니랄까봐…” 그런 복새통 속에서도 사람 좋은 새 신랑은 밸도 쓸개도 다 빼버린 것처럼 그 주정을 받아 주었다

 . 그런 모습 조차도 화가 나는지 수그러들기는커녕 금숙이 문을 미어 박으며 더 큰 소리를 쳤다. “내 집에 내가 왜 못 와… 엄마두 한심해. 안방 떡 내두더니 부엌떼기처럼 문간방으로 쫓겨나 있는 주제에… 참 잘 되가는 집구석이다.” 명숙네의 씨알도 안 먹히는 핀잔이 오히려 금숙의 주정을 더 돋군 셈이었다.

  아비의 주정을 속 빼 닮은 행패는 날이 밝을 때쯤에야 눈을 흘기며 마지막 악다구니를 썼다

 . “다시 이 집구석에 발을 들여 놓으면 내가 성을 갈아버린다. 오라구 빌어도 드러워서 안 온다 안 와… 씨부랄 놈의 집구석, 불이나 확 싸질러 버릴까 보다…” 제 분을 못 이겨 산발한 공작새의 깃털 같은 노랑 머리채를 쥐어 뜯던 금숙은 유유히 사라지는 순간까지 악에 바친 외마디 비명을 질러댔다.

 그런 날이면 지랄 맞은 년 주정을 다 받아주느라 홀라당 밤을 세운 경숙도, 남편도 서로 눈치만 보며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명숙네 역시 괜히 혼자만 바쁜 척 수선떠는 것으로 보아 어린 년의 주정에 모두 맘이 불편한 건 사실이었다.

  잊혀질만 하면 한번씩 들이닥쳐 뒤집던 금숙의 행패를 제외하고는 그럭저럭 깨 같은 신혼이었다

 

 . 비가 억수 같이 쏟아 붓던 날, 한밤중의 난데없는 요비링 소리에 문을 여니 비에 홀딱 젖은 청년이 영식이네 집 맞느냐며 밀치고 들어섰다.

  놀란 경숙이 명숙네를 흔들어 깨우는 동안 남편이 불청객에게 사연을 물었다. “저… 실례인줄은 알지만 술 김에 이렇게 불쑥 오게 됐거든요… 끄억… 취한 김에 나도 모르게 오긴 했는데 이해 좀 해 주십쇼.. 끄으윽…” 술 냄새와 비에 젖은 퀴퀴한 냄새가 왠지 짬뽕이 되어 그 옛날 진저리 치던 아비의 주정을 방불케 했다. “제가… 오늘 하루종일 영식이 하고 같이 있었거든요…” 끄윽거리던 청년은 명숙네를 보자 “어머니, 저 아시죠? 저 종호에요…” 반가운 척을 했다. 고등학교때부터 없는 집에 수시로 드나들며 라면을 세 개 씩이나 먹어 치우던 영식의 몇 안되는 친구들을 명숙네는 거의 기억하고 있었다.

  삐쩍 마른 영식과는 다르게 허우대가 듬직한 그 청년을 볼 때마다 입이 아프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 뉘 집 자식인지 반듯하고 둥글둥글한게 얼마나 보기 좋은지… 우리 영식이 놈은 중국 놈 빤쓰를 입었는지 순떼국놈처럼 벅벅 대기나 하니… 지 할미가 오냐오냐 키워 버르장머리라곤 없다니까. 저 하나 밖에 모르고…” 하면서 틈만 나면 안성댁을 헐뜯었다. 누추한 집에 꾸역꾸역 몰려 다니며 뭐든 가리는 것 없이 복스럽게 먹는 모습도 보기 좋았고 좋은 제 집 놔두고 구석진 방에 끼어 자는 것 까지도 신통방통하다며 자식보다 더 기특히 여기던 바로 그 청년이었다.

 “그래… 알 것 같은데 무슨 일루다 이 밤중에…” 얼버무리는 명숙네의 표정이 영 너그럽지 않은 것으로 보아 폭 폭 풍기는 술 냄새가 못마땅한 꼴이었다

 . “제가요. 오늘 하루종일 영식이하고 같이 있었거든요…” 하며 앵무새처럼 했던 소리를 또 반복 하는 것을 보니 술에 취한 것이 틀림 없었다. 끄윽거리는 소리로 메아리를 만들며 하는 말이 영식이 술만 마시면 날마다 대성통곡을 하는데 그 꼴이 하도 불쌍해 차마 못 봐줄 지경이라 속이 타서 대신 왔다고 했다

 . 물론 원래 징징거리는 성품에 혼자만 댕가당 잘려 나간 기분이었으니 사는 것 자체가 헤쳐 나가지 못 할 슬픔이란걸 안 봐도 훤한 비디오였다. “매일 식구들 얘기 하면서 울고, 어머니하고 인연 끊은 것이 죽일 놈 이라면서 또 울고… 술만 먹으면 우는데 정말 불쌍해 죽겠어요.” 듣던지 말던지 주정으로 양념까지 뿌려가며 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던 청년은 졸음이 쏟아지는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명숙네가 그런 모습조차도 못마땅 했는지 이젠 아무 상관도 없는 놈이라며 모질게 쏘아 부쳤다. “한밤중에 불쑥 남의 집 찾아 와서는 무슨 쓰잘데기 없는 소리여. 난 그런 놈 모르니 얼른 가기나 해요…” 하면서 내뱉는 독한 표정과는 반대로 몸은 맥빠진 만신창이가 되어 털퍼덕 주저 앉았다. “빌어먹을 놈의 새끼… 그깢 기집년한테 미쳐서 뛰쳐 나갈땐 언제고 누가 저더라 생각해 달랬나… 고양이 쥐 생각 해 주네. 사내놈이 술 쳐먹고 걸핏하면 울긴 왜 울어. 지가 뭘 잘 했따고… 그러더니 눈가가 금새 벌개진 채 코를 팽 하고 푸는 모습이 애처로워 보였다.

  오류동엔가 산다는데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며 청년은 주머니에서 꾸깃꾸깃 주소가 적힌 쪽지를 꺼내 슬그머니 내밀었다. 이미 작정하고 계획적으로 온 사람처럼 주소까지 미리 적어다 내 놓는거 같아 경숙은 그런 모습이 조금 얄밉기도 하고 의아해 보였다

 . 형편으로 치자면 대학 문턱에도 못 가볼 놈을 어렵게 공부시켜 놨더니 뭣 같은 년한테 홀려 그 꼴로 나간 영식이 하도 괘씸해 명숙네 모녀는 취직했다는 소문만 들리면 귀신 같이 찾아 내어 직장을 떨궈 내곤 했었다.

 “근데요… 영식이가 요새 좀 이상해요. 술만 먹으면 어디 목 멜 나무 없나 좀 알아보라는 그런 소리나 자꾸 하고… 정말 눈 뜨고 못 봐줄 지경이라구요…” 주소까지 건넨 마당에 일어서는가 싶었는데 갈 생각은 커녕 잠꼬대라도 하는 것처럼 높 낮이도 없이 지껄이는 것을 보니 날 잡아 작정하고 떼 쓰는 꼴이었다.

 술 취한 척 같이 오자고 했는데 도저히 명숙네 볼 면목이 없다며 울기만 하길래 할 수 없이 혼자 왔다는 청년이 이번에는 아예 엎드려 울부짖는데 신파가 따로 없었다. 뜬금없이 한밤중에 나타나 그것도 4년전의 얘길 들먹이며 흥분하는 청년이 딱해 보였다.

  친구의 일로 어려운 걸음을 할 수 있다는 것도 남자들 세계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의리인 것 같아 한편으로는 대견하고 기특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얼른 가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 때, 모로 꼬고 앉아 훌쩍이던 명숙네가 삐쭉 한 마디 던지는 말이 더 과간도 아니었다.

 “망할 놈… 오려거든 지가 직접 와야지. 뭐가 무서워서 못 와… 그래도 낯짝은 있나 보네…” 그것은 마치 영식이 오지 않은 것에 대한 끝없는 원망으로 들렸다.

  이래서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것이 부모 자식간의 끈끈한 인연인가 싶었다. 자식은 전생에 빚쟁이라 끝없이 요구하고 한없이 베풀어 주기만을 바란다고 하더니 질기디 질긴 악연이 따로 없는 셈이었다. 겉으로만 죽일 놈, 살릴 놈 하면서 거칠게 내뱉을 망정 언제나 변함없이 마음 한구석을 소중히 차지했을 영식의 그 빈자리를 생각하니 왠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 잠자코 돌아가는 상황을 직감으로 파악했던지 경숙의 남편이 청년에게 가서 얼른 처남을 데리고 오라는 말을 했다. “아니,아니지 나하구 같이 가야겠네… 어디 있는데 여길 못 온다는 거야. 이게 누구 집인지… 말도 안되는 소리지…” 그 ‘누구 집인데’ 하는 소리에 경숙이 갑자기 눈을 치켜 뜨며 속마음을 드러냈다

 . “누구 집이기는… 이게 뭐 그 애 집이라도 된대? 칫…” 사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명숙네의 것도, 영식의 집도 더군다나 아니었으니 경숙이 토라지며 불만을 터트릴 명분은 충분했다

 . 발품 팔아 알아본 것만 명숙네의 공 이었을뿐, 줄곧 융자금을 내는 것도 그녀의 몫이었고 세세하게 고치며 예쁜 가구들로 채워 집 같이 꾸미는 것도 경숙의 차지였으니 일말의 양심이 남아 있다면 어느 누구도 집에 대해 나서지 못 할 일이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 아비의 잘난 유산까지 들먹인다면 언제 갈지도 모를 경숙의 혼수 비용으로 남겨진 때 묻은 통장과 맞바꾼 것이기도 했다. 어느날인가 명숙네와 한바탕 싸운 뒤로는 내 집의 지읒자 소리도 소리도 입 밖에 내질 않았었다

 . 하난 쫓아내고 하나는 나가 살다시피 하는 마당에 모녀가 단 둘이 살아왔던 터라 누구 집이냐의 문제로 따질 일도 없었다. 가끔씩 경숙이 골을 퉁퉁거릴때면 명숙네가 시위하듯 베란다로 나가 석유 난로에 밥을 따로해 먹었다

 . “드러운 년… 니 밥 아니면 누가 굶어 죽기라도 한다니? 쇠 심줄보다 더 질긴 년…” 보란듯이 쭈구리고 앉아 따로 밥을 하던 명숙네는 이를 벅벅 갈며 눈물을 훔쳤다

 . 몇날 몇 일을 보이지 않는 대립으로 이중살림의 실랑이를 했으나 명숙네 자신의 남편이라도 되는양 다 일러 버린다는 고집에 경숙이 항복을 했다.

  처가살이 하는 남편이 처제의 주정도 모자라 행여 장모의 고자질로 인해 불편할까 싶은 염려에 할 수 없이 그 쯤에서 끝내야만 하는 싸움이었다

 . 하루 아침에 삼백육십도 태도가 달라진 경숙을 보며 깐죽거리는 모습이 보기 민망할 만큼 니년이 어찌하면 겁을 먹는지 다 알았다는 투로 약을 바짝바짝 올렸다. “왜? 지 서방한테 이른다니 겁은 나는 모양일세… 천하의 지랄쟁이가 무서운게 다 있네…” 마음 같아서는 눈에 불을 켜고 제대로 한 판 실력 발휘를 해야만 속이 후련할 것 같았으나 남편의 귀에까지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꾹 꾹 참아야만 했다

 . 모녀간의 다툼으로 손바닥 만한 집구석에서의 이중살림이 밝혀지면 경숙 자신만 쪽이 팔리도록 무안한 지경이 될게 뻔했다. 무슨 날 콩가루 집안도 아니고 보나마나 노인네 상대로 못된 짓 했다는 핀잔만 들을 판이었다.

  남편의 말에 용기를 얻었던지 언제 봤다고 넙죽넙죽 형님만 믿는다며 울먹거리던 청년이 돌아간 뒤로 더 씁쓸한 날이 이어졌다. 명숙네가 안절부절하며 자주 문 쪽에 눈을 고정시키는 것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 그 누군가가 누구라는 것은 말 안해도 다 아는 사실이었으나 노인네의 새로 생긴 습관에 대해 이런 저런 간섭을 할 처지가 아니었다

 .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누가 왔나보다 라며 괜히 수시로 문을 열어 보는가 하면 저녁 늦도록 밖을 빙빙 돌며 공연한 헛기침만 해대는 것이 오지 않을 것에 대한 그리움으로 보였다. 어떤 때는 아예 문을 활짝 열어 놓은 채 그 문이 닫힐새라 신발짝으로 고여 놓기도 했는데 그런 모습을 보는 경숙이 먼저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 “엄마, 대체 왜 그래… 누가 온다구 날마다 문을 열어 놓는 거야.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그러다 아무나 확 뛰어 들어 오기라두 하면 어쩌려구…” 저럴 껄 왜 모진 소리까지 해가며 내쫓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측은해 보였다. 명숙네의 기다림은 점점 더 심해져 지친 마음에 상처만 깊어 갔다. 병든 닭의 모습처럼 시름시름 앓던 어미를 명숙이 데려간 뒤, 문득 걱정스런 마음에 전화를 하니 말투가 영 껄끄럽고 도전적인게 인상이 절로 써졌다

 . “어쩐 일이라니? 엄마 걱정이 되긴 되냐? 걱정 하들 말어. 엄마 없으니 이제야 신혼 같고 좋을텐데 전화는 무슨…” 정말 좋아 죽느냐 묻는건지 아니면 꽈배기를 박스째 먹고 비비 꼬아대는 건지 재수없다는 생각이 다 들 정도였다.

  둘이 모처럼 호젓하게 지내게 된 것이 다 지 덕분이라는 뻐김처럼 들려 아니꼬운 마음에 수화기를 던져 버리고 싶었으나 그 끝의 짧은 한숨 소리를 듣다보니 마음이 영 편칠 않았다.

  불 난데 부채질한다고 그 쪽도 사네 못 사네 순탄하지 않은 마당에 명숙네까지 곁들여 심란해 있을 것을 생각하니 몽땅 다 가여운 생각이 들었다. “왜 전화했느냐 하면…” 잠시 망설이던 경숙은 어차피 불어야 할 일이었기에 숨 한번 크게 쉬고는 주절주절 떠들어댔다.

 “영식이 말야… 언니네 다음 정거장… 그 동네 산다드라…” 듣는 건지 어쩐건지 숨소리만 쌕쌕 들릴 뿐, 아무런 반응이 없는게 이상했다. “언니… 듣고 있는거야? 언니…” 다급해진 경숙이 목 놓아 부르는데 명숙이 다짜고짜 물었다. “누가 그래? 너 어디서 들은거야? 확실해?” 어디서 들었는지 그깢게 뭐 그리 중요한 일이라고 다그치는 소리가 설마 사실은 아니겠지 하는 말투였다.

  아니, 사실이 아니길 바라는 바램처럼 들렸다.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 해도 곁에 있다는 자체 만으로도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일 일 테니 사실을 거부하고 싶은 느낌이 강하게 전해졌다

 . 비 오던 날의 영식 친구가 왔던 일이며 주소를 놓고 갔길래 알아봤더니 대충 그 동네 같다는 얘길 차근차근 해주는데 갑자기 착 가라앉은 수화기 너머의 명숙네 음성으로 바뀌는 통에 경숙이 움찔 했다.

 “너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 누가 그래?” 그 놈의 ‘누가 그래’ 소리가 모녀의 듀엣 인지 어쩜 둘이 똑같이 물었다. “저번에 그 애가 두고 간 거 있잖어. 알아봤더니 대충 그 동네 같드라. 정말 세상이 넓고도 좁다는 말이 딱 맞네. 어쩜 한동네 살면서도 몇 년동안 한번도 부딪치지 않았나 몰라…”새로운 소식을 전하며 흥분하는 경숙과는 달리 명숙네는 더욱 착잡한 가운데 명숙네의 잔소리까지 곁들여 듣느라 컨디션이 빵점이었다.

 “엄마두 그러는게 아니야. 하여간 응큼 떠는데 도사라니까… 여기 온지가 몇일 인데 그런 얘긴 뻥끗도 안하고… 그 놈 얘기 들으면 누가 찾아가서 또 어쩌기라도 할까봐 숨겨? 내 발등에 불도 못 끄고 사는 주제에 거길 쫓아갈 기력이 어디 있다고 쉬쉬 하는건지…”“얜, 누가 뭘 숨겼다구 그래. 지들 한 짓을 알긴 아나보네… 앞으로 행여 그런 못된 생각들 하지두 말고 살어. 죄 받을까 무섭지도 않니?” 잊혀질만 하면 싫든 좋든 한번씩 들려오는 소문에 심장이 떨리고 고질병이 도지듯 4년전 생각을 하다보면 망할 놈 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괘씸하긴 해도 어미의 그 깊은 속을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 싶었다. 그 길로 달려온 명숙네는 영식의 주소를 손에 들고 당장 찾아 나설 기세였다. 가지 말아야 했을 곳에는 명숙네를 부추기며 먼저 앞장서서 만사 제치고 깽판을 치던 명숙이 어쩐 일로 사양을 다 했다. 하긴 벼룩도 낯짝이 있지 하지 말아야 할 짓을 서슴없이 해대더니 무슨 낯으로 그 앨 찾아 나설지 간다고 해도 붙들어 맬 판국이었다. “난 안가… 아니, 못 가. 무슨 좋은 꼴 보겠다구 거길 또 가냐. 같은 동네라는 것만으로도 짐 스러운데.” 그 동네 땅이 몽땅 다 지것도 아니면서 별 놈의 투정을 다 부린다 싶어 경숙이 비꼬듯 말했다.

 “왜? 먼저 앞장서서 나서보시지 그래. 그런 쪽으로 선수잖어. 지난번처럼 금숙이년 불러서 같이 가면 되겠네… 둘이 환상의 깽판 콤비던데…” 직장 떨궈 낼땐 신바람 나서 하던 일을 같은 동네 이웃이라 찜찜한건지 아니면 일말의 죄책감이 남아 있기 때문인건지 명숙이 끝까지 발뺌을 했다. “그깢년 데리구 가 봐야 지랄이나 칠텐데 뭐하러 앞장 세워…” 한숨을 쉬던 명숙네는 마지막까지 영식을 감싸 안는 마음으로 결단을 내렸다. “다 필요없어…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것들 같으니… 나 혼자 갈 테니 괜히 또 못된 짓 하려거든 따라 나서지들 말어…” 벅벅 우기면서라도 누군가 따라가 주길 바랬던건지 말에 가시가 박힌 채 공연한 트집을 잡는 것 같아 경숙이 같이 가 주기로 인심을 썼다.

 “엄마, 나랑 같이 갈까? 난 어때? 난 못된 짓 안했잖아…” 키득거리며 ‘못된 짓’ 을 강조하는 것도 미웠던지 명숙네가 눈을 흘겼다. 경숙이 올바른 짓에 당첨된 기분으로 동행했는데 어렴풋이 아는 길이다 보니 복덕방을 두어군데 들러 금방 영식의 집을 찾아 냈다. 명숙이 살고 있는 다음 정거장의 산동네에는 사람이 전혀 살아질 것 같지 않을 만큼의 썰렁함이 느껴졌다.

 한 정거장 차이로 그런 곳이 있을까 싶을 정도의 낯선 풍경이었다. 좁은 골목길을 헤집고 들어서니 닥지닥지 붙은 낮은 지붕들이 비애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이런, 우라질… 기껏 가르쳐 놨더니 도망나가 사는 꼬라지 하고는…” 혼잣말처럼 타박을 하는 명숙네를 앞세워 녹슬고 찌그러진 쪽문을 열자 나무토막에 의지한 채 방패막이처럼 비닐 친 문이 눈에 들어왔다

 . 댓돌위에 꽃 분홍색 슬리퍼를 보며 경숙이 인기척을 하자 누구셔요… 하는 소리와 함께 젊은 아낙이 문을 열었다. 여기 장영식… 이라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이구, 어머니..’ 하며 아낙의 얼굴이 허옇게 변했다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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