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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일반/역사
인연, 악연으로 마침표...
작가 : Number3
작품등록일 : 2019.10.28

오남매의 파란만장 인생 스토리... 악연으로 끝나다...!

 
인연, 악연으로 마침표...7화
작성일 : 19-10-28 19:45     조회 : 267     추천 : 0     분량 : 17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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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이혼의 상처였던지 다시 예전처럼 살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금숙은 단숨에 망가지기 시작했다. 불 지르면 빠지직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타버릴 만큼의 뽀글뽀글한 노랑머리로 미친년 산발을 한 채 쉴 새 없이 쏘다녔다

 . 새벽에 기어 들어오든 외박을 하든 명숙네도 경숙도 한마디 참견을 하지 않은 채 구경만 했다. 괜히 건드려 봤자 개지랄만 떤다는 명숙네의 말대로 잠자코 놔 두는 것이 상책이다 싶었는지 서로들 모른 척 지냈다

 . 옆에 있어도 없는 것 같은 투명 인간 취급을 하는 것이 딱 맞는 말 같았다. 별 대화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뼛 속 깊이 박힌 상처를 내색하지 않으며 멋대로인 금숙을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안타까울 뿐이었다. 세 모녀가 안방을 쓰면서 작은 방 둘을 세 놓았는데 중년 부부에 불량끼 철 철 넘치는 중3 짜리 아들이 하나 있었다.

  어느 날 부터인가 미심쩍은 마음에 경숙이 표시해 두고 나갔던 방 안의 물건들이 퇴근해서 보았을땐 단체로 삐딱선을 탔는지 위치가 제각각이었다. 가장 분통 터지는 일은 통나무 집 모양의 나무 저금통에 기를 쓰고 모으던 오백원짜리 동전의 수가 날마다 경숙을 혼란에 빠트렸다. 그것은 마치 약오르지 메롱… 하며 날름거리는 간교한 뱀의 혓바닥 같은 더러운 기분이었다.

  잘못 세었나 싶어 으레히 퇴근 후면 동전 개수부터 쩔그덕거리며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으나 착각의 늪에 빠져 혼자 머리카락을 쥐어뜯기 일쑤였다.

  참다 못한 경숙이 동전의 수를 24개라고 적은 쪽지에 ‘이거 꺼냈다간 죽는 줄 알어라. 널 지켜보고 있으니…’ 라는 어줍잖은 몇 글자 협박으로 단속을 했던 날에도 그것은 여전히 메롱… 하며 스무개로 줄어 있었다

 . 처녀가 기거하는 빈 방을 뒤진다는 것도 불쾌했으나 일부러라도 바꿔다 모으는 귀하디 귀한 오백원짜리 동전이 더 아까워 미칠 지경이었다.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는 꼴이지 남의 입에 털어 놓는 쪼다 짓을 왜 하는지 모르겠다. 그럴 돈 있거든 지 애미나 주지 무슨 저금은 얼어 죽을 놈의 저금이람…” 씩씩대는 경숙의 옆에서 실실 웃으며 얄미원 소리만 골라하는 명숙네 역시 얄팍한 혀를 낼름거리는 뱀새끼와 하나도 다를게 없었다

 . 보다 못한 경숙이 어른을 상대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으나 오히려 도둑 누명을 씌운다며 온갖 욕을 다 퍼붓고는 방을 뺐다. “아무리 없이 살아도 우리 아들 도둑놈 소리 듣게 하고 싶지 않으니 당장 방 빼줘욧…” 제 아들의 실체도 모르는 불량 학생의 어미가 얼마나 그악스럽게 덤비던지 욕쟁이 할머니가 무덤 속을 해치고 나온 느낌이었다. 문득 어려서 지긋지긋할 정도로 술 주정에 쫓겨 다니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나마 집 한 칸 가졌다고 해서 몰인정하게 굴지는 말아야지 하던 마음과는 달리 행동이 불손해지고 있었다

 . 결국 손버릇만 나쁜 어린 놈이 그런 빌미를 제공한 셈이었다. 방을 두 칸씩이나 비워 둘 형편이 아닌지라 싸게라도 다시 세를 놓았는데 경숙보다 한참 어리고 아리따운 처녀가 이사를 왔다. 혼자 살림에 없는 것 없이 호사스럽던 처녀는 침실과 옷 방을 분리해 쓰면서도 으레히 밥상에 끼어 들어 공짜 식사를 했다

 . 처음엔 혼자라 밥 맛이 없어 그런가보다 라는 위안을 삼았으나 얄미울 만큼 손도 까딱 안하는 것에 슬슬 짜증이 날 지경에 이르렀다. 경숙이 퇴근해 들어설 때의 모습은 명숙네와 처녀가 사이 좋은 모녀처럼 히히덕거리며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게 전부였다

 . 왔니… 소리나 밥 먹을래… 따위의 빈 말이라도 한마디 없이 유항가나 따라 부르던 명숙네의 사랑을 샤랑으로 발음하던 소리는 귀를 뜯어내 버리고 싶을 만큼 괴로웠다. 냉장고에서는 김치 국물이 줄 줄 흘러 넘쳤고 먹다 남은 반찬통은 뚜껑도 없이 늘 헤벌레였다

 . 혼자 뒤적거리며 밥을 먹던 경숙이 쿵쾅거리는 동시에 냉장고 속을 몽땅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신바람 나서 유행가를 흥얼거리던 명숙네의 입에서는 샤랑 샤랑 대신 저년 또 왜 지랄이야… 하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처녀도 불안 했던지 슬그머니 방 안으로 사라지자 명숙네는 텔레비전 볼륨을 더 크게 울렸다. 아무리 난리 쳐 봤자 눈도 깜짝 안하겠다는 못된 심보였다. 화장실에 물을 퍼껹으며 밤 새 푸득거리는 경숙이 못마땅 했던지 새벽부터 수화기를 통해 명숙에게 고자질하는 것이 얄미웠다.

 “아이구… 쇠귀신 같은 년… 시집이나 가든가 하지 왜 점 점 더 못되게 군다니. 밤 새 푸드덕거리고 지랄도 하드라. 저거 누가 안 잡아 가나 몰라…” 그리고는 무엇이 그리고 좋은지 컴컴한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고자질이나 하며 킬킬거리던 모습이 마치 귀신처럼 보였다. 경숙의 고양한 행동 탓이었는지 처녀도 일 년만에 방을 빼 나갔는데 그 때마다 명숙네가 입에 거품을 물고는 길길이 뛰었다

 . “그나마 세 안주면 뭐 먹고 살라고 허구헌날 지랄이야, 지랄은… 못된 성질머리에 누가 배겨. 나나 되니 그 꼴 봐주고 살지. 어려서 쫓겨 다니던거 지겹지도 않니? 난 그 생각만 하면 아직도 치가 떨린다. 손바닥만한 집이라도 지니고 사니까 걸핏하면 지가 쫓아내고 지랄이야. 순 불쌍년 같으니… 얼른 시집이나 가지 왜 저 속을 썩이고 있나 몰라…” 돈에 얽혀서는 자식도 안 보이는지 자라면서도 들어 보지 못한 욕을 퍼붓는 명숙네가 몹시 서운 했다. 돈 벌어봐야 꼭 쓸 데가 아니면 움켜 쥐고 내놓지도 않는 경숙이 괘씸한 탓에 그 동안 쌓였던 울분이 터진 것처럼 보였다

 . “순 때국년이야. 어째 그리 별명도 잘 지어 놨는지… 늑대 같은 년… 응큼한 속을 알 수가 없으니 어느 눈 삔 놈이 널 데려가겠니…” 입에서 악담을 줄줄 이 쏟는 와중에도 안성댁이 지어 놓은 별명 하나는 맘에 들었던지 그걸 들먹거리는 것이 괘씸해 이번엔 경숙이 펄쩍 뛰었다

 . “엄만 뭘 그렇게 잘 하고 살아서… 들어오면 밥 한번 차려줘 봤어? 끼끼덕거리며 그 놈의 텔레비나 들여 보면서… 그리구… 말이야 바른 말인데 이거 따지고 보면 내 집이야. 아버지가 나한테남긴 돈이라구 결국은…” 그 말을 듣던 명숙네의 눈이 뿅-하고 튀어나왔다

 . “미친년, 지랄하고 자빠졌네… 내 서방이 남긴 돈이 왜 니 돈이냐. 그게 어느 나라 법이야. 기껏 키워 놨더니 이제 와서 니 돈, 내 돈 따지기나 하고… 그게 애미한테 할 짓이냐. 그리구 잘난 집이라두 끼고 사는거 그것두 다 내 덕인줄 알어. 내가 샀지 니가 샀나…” 경숙이 결정적으로 집 얘기 운운하며 비수를 꽂게 된 원인은 너 같은 년을 누가 데려 가겠니 하는 소리에 열 받아서였다. 정말 다들 눈이 삐었던지 거들떠도 안보는 것에 얼마나 속상해하는 줄도 모르는 채 어미 입에서 나올 소리인가 싶어 억울하고 분해 미칠 지경이었다.

 “누가 데려가든 상관 말라구… 내가 알아서 사니까. 이대로 늙어 죽든 뛰쳐나가든 내 인생이니까 신경 꺼…” 명숙네는 방구 뀐 년이 성낸다며 눈을 흘겼다

 . 거들떠도 안본다는 것은 거짓말이었고 나이도 나이니만큼 시세사 없는 것은 사실이었다. 사람 심리가 묘한 건지 목메고 쫓아오는 놈들에게는 눈길도 안주면서 손에 잡히지 않는 무엇인가를 하염 없이 쫓는 신세 같았다

 . 남들은 아무데서고 만나 덜렁덜렁 시집들도 잘 가던데 그 나이 먹도록 짝도 없는 신세가 그야말로 낙동강 오리알 만도 못했다. 모녀간의 니집 내집 싸움은 명숙네가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드러워서 피하지… 라는 말을 끝으로 눈치만 보며 슬슬 피해 다녔다. 드러운년 건드려 놨으니 또 몇날 몇일 못된 성질 부리며 푸다닥거릴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골만 나면 밤 새 물바가지 퍼 끼얹으며 푸닥거리는 통에 사지가 벌벌 떨릴 정도로 불안하다는 표현을 종종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키에 낮 도깨비 화장을 한 여자가 새로 이사왔는데 시장 입구의 퇴폐 이발소에 근무하는 면도사였다.

 저녁마다 바뀌어 드나드는 장사꾼들을 보며 경숙이 눈살을 찌푸리자 아예 까놓고 민망한 꼴을 보였다. 방문을 활짝 열어 놓은 채 니 까짓게 까불어봤자 라는 음흉한 미소로 일관하며 상대를 무안하게 만들었다. 어느날 부터인가 누구든 끌고 오는 기색이 보이면 경숙이 슬그머니 신발을 감추고는 방문도 걸어 잠근채 없는 척 숨 죽이기도 했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들려오는 소리들은 끈적끈적한 신음을 토해 냈다

 . 그걸 듣는 것만으로도 경숙이 불결한 마음에 헛구역질을 했다. 공연히 까탈부리다 방세도 못 나오면 책임 질꺼냐는 명숙네의 핀잔이 서러웠으나 잘나빠진 집 문제로 다시 부딪치고 싶지 않아 꾹꾹 참았다. 살랑살랑 꼬리 치던 면도사의 통굽 슬리퍼에는 정들면이라는 상표가 붙어 있었는데 경숙이 그걸 발견한 순간부터 면도사의 별명은 정들면이 되었다

 . 덤으로 주는 생선에 몸으로 보답하던 정들면은 결국 생선가게 아저씨와 눈이 맞아 도망을 갔다. 눈에 띄기만 하면 단칼에 생선 대가리 잘라내듯 정들면의 머리통을 박살 낼 것 같은 험악한 표정의 생선집 아낙이 들이닥쳐 난장판을 만들었다

 . 애꿎은 경숙을 닦달하며 볶아댔지만 두사람의 행방은 흔적조차 없었다. 한동안 가게 문을 닫고 잠적했던 생선가게 아낙은 생선들 틈에서 썩은 동태만도 못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 정들면의 가느다란 모가지 대신 자신의 투실한 팔목을 덩그렁 잘라 버린 채였다.

 

  제 버릇 개 못준다더니 왕년의 바람기가 발동했던지 티격태격하는 날이 잦던 정숙이 두 아이를 앞세워 들이 닥치던 날, 정들면의 빈 방에 정체불명의 총각들이 이사를 왔다. 인상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으나 사내들끼리 속닥거리며 눈짓으로 주고 받는 웃음이 기분 나빴다.

  방 문 앞에 턱 받치고 앉아 무슨 남자들이 쪼잔하게 귓속말이냐는 한마디를 시작으로 총각들에게 관심을 보이며 웃음을 날리던 정숙은 그 날로 두 총각의 누님이 되었다. 쫓겨 와 있는 주제에 새록새록 밑반찬까지 해 들이밀며 환심을 사려 애를 썼다

 . “니가 지금 쫓겨와 있는 주제에 총각들 반찬 신경 쓸 처지냐? 어째 그리 칠띠기 짓을 하는지, 원…” 명숙네의 핀잔에도 아랑곳 하지 않은 채 오히려 껑거리 솟음을 했다. “어머머, 엄만 뭐 어때서 그래. 동생 같고 이쁘기만 한데. 말이야 바른 말이지 영식이 놈보다 훨씬 낫지 뭐. 누나 소리 한번 제대로 못 듣더니 이제야 실컷 들어보네…” 그리고는 갑자기 큰 눈을 부라리며 “쫓겨나긴 누가 쫓겨났다구 그래. 그 인간 꼴 보기 싫어서 내가 나온거지.” 하는 꼴이 챙피하기는 했던지 작게 얼버무렸다

 . 뻔한 잔소리가 답답하다는 듯이 제 가슴을 턱턱 치던 정숙은 분명 총각들을 의식하는게 틀림 없었다. 누님 소리 듣던 꿈 같은 시절도 잠시, 몇 일 지나지 않아 정숙의 남편이 제 식구들을 앞세워 가던 날은 폭우로 인해 지붕이 빵꾸라도 날 만큼 세차게 비가 퍼붓던 날이었다

 . 딸년이고 사위고 다 못마땅 하던 차에 한숨만 내쉬는 어미를 보며 경숙이 나갈 차비를 하는데 뒤에서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년들… 이라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 아주 오랜만에 듣던 그 말… 아니, 세상 구경을 처음 하는 동시에 들었던 정말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그 말이 비난이 되어 다시 뒷통수에 꽂혔다. 서러운 기억 속에서도 차마 떨쳐버릴 수 없었던 지난 순간들이 떠올라 사납게 눈을 흘기나 명숙네가 움찔 했다

 . “누가 엄마 응큼한 속 모를줄 알고… 할머니 욕 할거 하나도 없어. 둘이 똑같애. 그래.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년 나간다 나가…” 문이 부서져라 쾅 소리가 나도록 닫고 돌아서는데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러면서도 제 어미의 헛헛한 마음을 헤아리려 다짐을 했지만 생각조차도 하기가 싫었다. 자식의 빈 자리를 이겨내지 못하는 심정이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기집년들한테 화풀이나 하고만 셈이었다.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 혼자 청승을 떨때나 공연히 영식의 앨범을 뒤적일 때 보면 마음은 늘 그 애를 향하고 있었다

 . 하필이면 맞선 보는 날 추적추적 내리는 비도 심란했지만 명숙네의 알 수 없는 심통이 더 견디기 어려워 화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날궂이 하는 것도 아니고 가끔씩 보이던 그런 행동들이 부담스러운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다.

  선뜻 다가서지도 못하면서 마음으로만 애태우는 것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얼마나 질리고 진빠지게 하는 일인가를 손톱만큼도 해아려 주지 않았다. 성주가 호들갑 떨며 주선한 자리에는 동글동글 귀여운 인상의 남자가 턱받치고 앉아 있었다

 . 그 애 동네의 단골 약방 약사였는데 친구가 눈이 너무 높아 눈썹 위에 붙어 있다 보니 결혼할 생각도 안하더라는 얘길 듣고 궁금했다는 말을 꺼냈다. “친구분 말씀이 틀리진 않았는데요… 반가워요…” 하던 남자는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3남중 장남으로 수더분한 인상에 직업이며 매너도 깍듯했으나 언감생심 끝까지 무사히 갈 수 없을 것 같은 불길함이 스쳤다.

  아니나 다를까, 낌새가 이상해 내다 보았던 매장 밖으로 얼핏 비치는 그 남자의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모른 하며 그냥 넘기려 했으나 곁눈질로 뒤를 밟는 통에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무슨년의 팔자가 그 모양인지 학창시절에는 제발 니네 집에 한 번만 데려가 달라며 몰래 쫓아오던 친구년들에 이어 선 본 남자까지 살살 뒤를 쫓으니 무슨 큰 죄라도 짓고 숨어 사는 죄인 같았다. 열흘 가량의 졸렬한 미행을 끝으로 경숙이 질려 스스로 포기하는 동시에 그 쪽의 뒷조사도 끝이 났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늘 그따위로 뒷조사에 미행을 하다보니 사귀는 여자마다 오래가는 적이 없었다는 말이 돌았다.

  여자의 집안이나 돈 버는 능력을 평가하는게 그 남자의 결혼 기준이며 미행 이유였다니 더럽고 치사한 기분이 들었다. 경숙은 ‘내 그럴줄 알았다 이놈아…’ 혼자 속으로 이를 뿌드득 갈면서 자신자 보잘 것 없는 환경에 다시 한번 굴복했고 성주에게 거품을 무는 것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 “무슨 그런 미친놈이 다 있냐… 다신 소개 따위 하지도 말어라. 약사 아니라 약사 할애비라도 그렇지 별 꼴을 다 당하고 산다. 이 나이에… 내가 무슨 빨갱이냐? 미행은 하구 지랄이야. 하루 이틀도 아니고 재수 없게… 싫음 싫다고 산뜻하게 거절하면 될 것을… 더 웃기는 일은 배시시 웃고 앉아서 하는 말이 자기 부모 잘 공경하고 내조 잘 하는 현모양처를 원한다나 어쩐다나… 여자들 사회 생활 하는거 경멸한다고 노래하던 놈이야. 주둥이에 똥이나 한 바가지 퍼 부어야 하는건데…” 길길이 뛰며 흥분하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던 성주는 무엇이 그리고 재미있는지 깨드득 웃으며 더 황당한 얘길 했다.

 “미안 미안해… 그런 넋 나간 놈인줄 알았으면 널 소개했겠니? 온 동네에 소문이 파다하드라. 원래 그런 놈이래. 저는 뭐 볼게 있다고. 딸랑 손바닥만한 약방이나 하는 주제에… 근데 더 웃기는건 그 양장점이 니껀줄 알았대. 등신 천지 같은 놈… 기껏 말 할땐 어디 갔다 왔는지 뒷북 치고 있드라. 그만 흥분하고 화 풀어. 니 미모에 띠용 눈 먼건 사실이라니까…” 미모고 나발이고 주둥이만 살아 잘났다고 큰 체는 다 하면서 평생 노처녀로 늙어 죽을것만 같은 불안감이 밀려왔다

 . 꿈 속에서도 결혼을 하지 못한 자신이 얼마나 애초러웠던지 자다가 벌떡 일어나는 적도 많았다. 수 없이 맞선을 보면서도 늘 그랬던 것처럼 맘에 들어하면 상대가 꺼려 했고 또 상대가 껄떡거리면 퇴짜를 놓고 싶은 묘한 줄다리기 인생이었다

 . 코 앞에 닥친 서른을 면하지 못한 채 눈, 코, 입만 제 위치에 붙어 있다면 아무한테다 가버릴까 하는 처참한 생각도 들었으나 그런 것 자체가 너무 초라해 슬프도록 외로웠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에는 그리운 사람을 더욱 그리워하자는 싯 귀도 있지만 경숙은 눈이 부시게 푸른 하늘만 봐도 눈물이 후드득 쏟아졌다. 천둥 번개에, 양념으로 중간중간 벼락까지 쳐 주면서 비가 억수 같이 퍼 붓는 그런 날이 가장 좋았다. 어두컴컴한 하늘을 바라만 봐도 좋았고 비까지 줄기차게 쉬지 않고 내리 붓는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였다

 . 어린시절, 굵은 빗방울이 머리 꼭대기에 내려 앉을때의 따끔한 감촉과 곧 이어 살갖을 파고 들던 그 부드러운 속삭임을 잊을 수가 없었다. 잠들어 있는 영식을 훌렁 타 넘었다는 이유로 기집년이 감히 가랭이 일그적거리며 3대 독자를 타넘느냐던 서슬퍼런 호랑이 할머니의 욕을 곱빼기로 얻어 먹고 뛰쳐 나갔던 적이 있었다.

  골목을 방황하던 때에 쏟아져 내리던 비의 친근한 추억은 짜릿함으로 기억에 남았다. 가슴속까지 후련해지는게 가장 깊은 곳의 응어리까지도 걷어내 줄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 그때부터 경숙은 비 오는 날을 미치도록 좋아했다. 장마철에 살랑살랑 손에 잡힐 듯 말 듯 떠내려 가던 명숙의 애잔한 검정 고무신을 떠올린다면 퍼붓는 비 마져도 저주 해야겠으나 어쨌든 비오는 날의 추적거림이 무작정 좋았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난 없다더니 명숙네 5남매가 딱 그지경들이었다. 조금 답답하긴 해도 순하디 순한 성격 그대로 남편에게 순종하며 복에 겨운 애교나 떨며 살 줄 알았던 정숙의 삐걱거림이 그것을 증명했다

 . 남아도는 시간이 화근이었던지 남편의 눈을 피해 야곰야곰 옆 집의 아낙들과 어울려 심심풀이 고스톱을 즐기더니 급기야는 비밀의 하우스까지 원정을 다녔다. 못된 짓거리는 어찌 지 어미를 고대로 빼 닮았는지 기웃기웃 화투판 넘볼때부터 알아봤어야 했지만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남편을 속이며 생활에 쪼들려 허덕거리더니 집까지 잡혀먹는 간뎅이 부은 짓에 주렁주렁 열린 빚이 종잡을수 없을만큼 불어났다

 . 살림도, 아이도 모두 내팽개친 채 맑고 커다른 눈에는 불안이 가득 고였다. 이 구멍 빼서 저 구멍 막는 식으로 쉴 새 없이 부산을 떨더니 난데 없는 직장을 다닌다며 보험회사로 향했다. 혼자 수습해 보겠다는 취지와는 달리 살림은 고사하고 다시 못된 바람이 꼬리를 흔들었다. 전화벨 소리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심장이 두근거려 이미 제정신이 아닌 듯 보였다

 . 눈웃음 살살치며 코맹맹이 소리를 하는데 남편에게 먹혔던 행동들이 고객에게 전해졌다. 대출 문제로 은행을 들락거리는가 싶더니 급기야는 여관방에서 해괴망측한 짓도 서슴지 않았다. 경매 직전에 가서야 남편의 손이 미치는 동시에 그간의 불미스러운 일이 낱낱이 파헤쳐졌다

 . 꼬리를 잡은 남편은 그래도 살 마음이 남았던지 내막이나 알자며 정숙을 다독였다

 . 생활비가 적어 그랬느냐는 말을 시작으로 둘이 사이좋게 배쭈욱 갈고 엎드려 적은 내용은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짓을 했느냐의 육하원칙 심문이었다. 바보스런 정숙은 순진함을 그대로 들어내며 자랑스러운 일처럼 은행직원과 여관 드나들던 일까지 소상히 부는데 남편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돈에 관한 문제라면 어떻게든 수습해 보려 했으나 바람 피운 사실까지는 절대로 용서 할 수가 없어 그 자리에서 이혼을 요구했다.

 “그 짓이 그렇게도 좋으냐? 넌 어쩔 수 없는 년이야. 틈만 나면 꼬릴치고 다니더라니.. 드러운년 같으니… 아무한테나 실실 쪼개고 다닐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건데. 다 내 죄다. 내 죄야…” 울며불며 매달리며 용서를 구하던 정숙의 입에서 한심스러운 소리가 튀어나왔다. “솔직히 말하면 다 없던 일로 한다며 이제와서 오리발 내밀면 난 어떻게 하라구…” 모지리 행동 만큼이나 더 한심하고 모자란 그 한마디에 남편은 기가 막혀 뒤로 나자빠질 지경이었다. 솔직히도 어느 정도지 여관 방 들락거리던 날짜와 시간까지 소상히 다 알면서 이 세상 어느 미친 놈이 용서를 해 줄지 손들어 보라며 다그치는데는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 울고 짜고 해봐야 이미 쏟아진 물이었고 뒤늦은 후회였다. 거짓말도 못하는 단순무식의 순진 덩어리는 제 입으로 다 까발려 화를 자초한 셈이었다. 그러고도 무엇이 억울하고 분하다는 건지 오히려 벌컥 성을 냈다. “내가 속았어. 다 말 하라고 해서 빠짐없이 다했더니 그만 살자는 소리나 하고… 나만 미친년 바보지 뭐야…” 한두 살 먹은 애도 아니고 그들 부부는 늘 그런 식이었다. 행동이나 생각 모두가 빠릿 빠릿하게 팍팍 돌아가는 남편에 비해 어수룩하고 느려터진 아내의 답답함이 살면서 늘 불만이었다.

  대화조차 못 따라가던 무지한 결혼생활이 결국은 정숙의 바람으로 끝이 났다. 먹구름에 밀린 인생이 끝나는 순간 남편이야말로 뒷통수를 된통 얻어 맞은 입장이었다. 풍성한 열매처럼 주렁주렁 탐스럽게 열린 빚더미 만이라면 벌어서 해결한다 치지만 불륜은 결코 용서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아무한테나 살살 꼬리치는 화낭년 꼴을 더 이상 봐 줄수 없다는 말을 끝으로 이혼이라는 것을 뚝딱 해치웠다.

  아이들은 남편이 맡기로 통보하면서 정숙은 알거지로 쫓겨나 홀로 덩그마니가 되었다. 궁색한 어린 시절에서 벗어나 그래도 명분이 약사 남편을 둔 덕에 남들이 보기에는 부러운 그림이었고 부족한 것 없이 아이들 키우며 소꿉장난 같은 아기자기한 살림을 하던 그녀였다

 . 맞지 않는 성격으로 인해 남편의 속이야 곪아 터져 뭉그러질 형편이었으나 겉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던 부부였다. 그런 정숙이 버려진 세상에서 호락호락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굼뜨고 성실하지 못한 탓에 가는 곳마다 문전박대였다

 . 이혼을 당하고도 모자라 어디든 잠시 머무는 동안에도 남자를 달고 살았다. 불쌍한 마음에 명숙이 취직까지 시키며 한달 가량을 데리고 있었는데 그야말로 사고뭉치 덩어리였다. 늦게 마중을 나갔던 명숙이 허탕을 치고 돌아오던 날, 정숙은 말 그대로 행방불명이 되었다. 수소문 끝에 알 수 없었던 것은 주방장과 눈이 맞아 사라졌다는 낯 뜨거운 얘기였다

 . 명숙은 기가 막히다 못해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며 그동안 참았던 분노를 토해냈다. “원래 그런 년이야. 칠띠기 같은 년… 인생이 하두 불쌍해서 끼고 어떻게든 해보려 했던 나도 미친년이고… 이 판국에 누굴 탓하겠니. 지 팔자가 그런걸…” 제 잘못으로 인해 가족이라는 울타리 마져도 부숴 버린 채 또내기가 되어 버린 하루살이 인생이었으나 정숙은 아무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저능아처럼 보였다. 야무지지 못한 성격이다 보니 얽히는 놈팽이마다 돈이나 울궈내며 주먹질을 일삼는 통에 늘 멍자국을 영광의 상처처럼 달고 살았다.

  그것두 지 팔자다 싶어 아무도 관여하지 않았으나 이혼에 있어서는 대선배인 금숙만이 연락을 하며 서로 위안을 삼았다. 남편을 따라 매몰차게 돌아섰던 아이들은 다시 엄마라는 존재를 찾지 않았고 간혹 학교 담벼락에 숨어 눈물 훔치던 정숙의 가슴만 미어질 뿐이었다. 미련하고 둔탁한 그녀도 이혼은 또 하나의 산 지옥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나 이미 늦은 후회였다.

 들 떨어진 성격에 칠띠기 소리나 듣던 정숙의 악연은 그렇게 끝이 났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야…’ 를 외치며 나가는 경숙에게 명숙네가 비굴할 정도로 비위를 맞췄다. “내 참, 드러워서… 무슨 벼슬하러 나가냐? 니 나인 적어서? … 노처녀로 늙어 죽지 않으려거든 잘 하고 와 이것아. 꼬라지 부리지 말고… 니 나이 생각도 해야지 죽어 처녀 귀신으로 떠돌까 무섭다. 괜히 옷 매무새도 만져주며 생전 안하던 짓을 하는 것으로 보아 얼른 해치워 버리고야 말겠다는 조바심이 역력했다.

 명숙네 겟 방 멤버가 경숙의 참하다는 소문을 듣고 중신한 자리였다. 그 소문의 진상이 백숙에 얽힌 사연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경숙은 달랑 이름 석자만 들고 나가는 입장이었다. “엄마든 언니든 아예 따라 나올 생각 하지두 말어. 그럼 나 안 나갈거니까…” 무슨 구경거리라도 난 것처럼 선 보는 자리마다 저만치 떨어져 염탐하듯 수군거리는게 늘 볼성 사납고 부담스러웠다.

  이번에 얼마나 엄포를 놓았던지 제발 혼자만이라도 나가만 다오 하며 사정하는 판국이었으니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경숙이 아니라 구경꾼들이었다.

  새로 산 투피스가 날개처럼 몸에 착 착 감겼으나 마음은 물에 젖은 솜뭉치였다. 호텔 커피숍에 도착 했을때는 약속 시간보다 훨씬 이른 탓인지 아직 넘어가지 않고 삐쭉 고개 내미는 해 마져도 야속했다. 햇빛으로 인해 더 나이들어 보이지나 않을까 하는 조바심에 모든걸 감추고 싶었다. 제 시간에 정확히 나타나 주는 것도 노처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으나 본래의 꼿꼿하고 정확한 성격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주위를 뱅뱅 돌며 시간을 죽이던 경숙은 애꿎은 엘리베이터를 수도 없이 타고 오르내렸다. 웬 놈의 시간은 그리도 더디가는지 다 집어치우고 도망가 버리고 싶다는 망므이 굴뚝 같았다. 정확히 약속 시간에 맞춰 들어선 경숙은 깊은 구렁텅이로 빠져드는 참담한 심정이었다. 다시 한 번 속으로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야…’ 를 다짐하며 딸랑 이름 석자만 알고 나온 입장이다 보니 뭘 어찌해야 하는지 대책이 서질 않았다.

  나이가 어려서는 산 보는 자리가 흥미롭고 기대도 되며 조금쯤은 가슴 설레기도 했으나 한 해, 두 해 지날수록 정말 못 할 짓이라 여겨졌다. 꼭 어디 팔려가는 기분도 들고 상대가 퇴짜 놓으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이 생기곤 했다. 입구에 장승처럼 떡 버티고 서 있는 경숙을 보며 안내 직원이 로봇처럼 말했다. “여기서 상대방 이름 확인하세요…” 어떻게 왔느냐 묻지도 않는 것으로 보아 모조리 같은 처지의 사람들임이 분명했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던 것은 일종의 방명록 같은 것이었는데 경숙이 자신의 이름을 정말 자신 없는 표정으로 짚어주자 커다란 팻말에 상대의 이름을 적어 딸랑딸랑 종소리와 함께 한바퀴를 돌았다. 그러다 입구에 앉아 있던 남자가 손을 번쩍 들며 일어섰다

 . 선생님 질문에 어린 제자들이 저요, 저요 하며 일어서는 것 같아 경숙이 스윽 웃었다. 첫 눈에 과히 낯설지 않던 그 남자가 멋쩍게 같이 웃어 주었다. 상대가 꽤 괜찮다 보니 기우는 기분이 들어 한껏 움추려 들었다. 또 얼마 안가서 보기 좋게 차이는건 아닌가 하는 조바심을 꼭꼭 숨기며 주스를 시킨 경숙은 얼음까지 와자작 깨물어 먹었다. “왜요, 더워서요?...” 자상하고 따뜻한 표정의 남자가 마주보며 작은 소리로 속삭이듯 물었다

 . 제 스스로 저울질하던 것을 드켜버린 경숙은 점점 더 기가 죽는 것을 느꼈다. 뜬금없이 그 쪽 어머니가 칭찬을 많이 하더라는 말에 경숙이 의아해하자 어설픈 솜씨로 닭의 배를 꿰메어 내놓았던 기억을 떠올려 주었다.

  남의 집 살이를 하던 명숙네가 계단에서 굴러 잠시 입원한 적이 있었는데 보양식을 생각해 낸 것이 문제의 백숙이었다. 시집도 안간 처자가 조신하게 그런 것도 해서 내어 놓는다며 효성이 깊다는 말과 함께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 하더라는 말을 덧붙혔다.

  상대 역시 서른을 훨씬 넘긴 노총각이다 보니 재고 따질 처지는 아니었던지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면이 과히 싫지는 않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처럼 편하게 분위기를 이끌던 남자는 여화나 한 편 보자며 일어섰다. 헬 나이트라는 공포물을 눈도 깜짝 않고 보는 경숙에게 남자가 넌지시 물었다. “무서움도 안 타나봐요? 이런거 보면 대부분 눈 가리며 어깨에 숨곤 한다던데…” 그 말 뜻이 무엇인지 조차도 헤아리지 못하던 경숙은 원래 무서움 안 타는 성격이라며 인색할 만큼 아주 조금 웃어 주었다. 작은 소리로 나지막히 웃던 남자가 슬며시 손을 잡으며 다시 말했다.

 “사실은 손 잡아보고 싶어서 그래요. 어깨도 빌려주고 싶고…” 그러면서 어깨를 기울여 주며 꼭 붙잡던 손에는 땀이 흠뻑 베어 있었다.

  보드랍고 촉촉한 느낌에 무어라 말 할수 없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올때는 훨씬 가까운 사이가 되어버린 것처럼 어깨에 손을 두르는데 경숙이 멍하니 딴 생각에 잠겼다. 축제에 따라 갔던 날, 고물상 집 학생이 그랬던 것처럼 대롱대롱 매달리는 느낌도 들지 않는 것이 어쩐지 매몰차게 뿌려쳐서는 안될 것만 같았다

 . 아무렇게나 기대어도 든든히 지켜줄 버팀목 같은 그런 느낌의 사람이었다. 그의 손에 힘이 가해지는 것을 느끼며 한참을 걷던 경숙이 시계를 보자 다시 물었다. “설마 귀가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잘 사는 집안의 귀하신 몸들은 엄한 아버지를 둔 덕에 늦어도 아홉시 전에는 귀가해야 한다는 그런 말도 주워들은 적이 있던 터라 경숙이 호호 웃었다.

 “우리집은 완전 자유당이에요. 늦는다고 나무랄 사람은 더군다나 없고… 연애하느라 늦는다면 아마 쌍수 들고 환영할껄요…” 말은 그리 하면서도 속으로는 집에 숟가락까지 몇 개 있는 줄 다 아는 처지일텐데 쓸 데 없는 것을 왜 물어보나 싶었지만 그의 말투가 밉질 않았다. “어디 가서 저녁이나 먹을까요?...” 경숙이 망설일 틈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성큼성큼 들어서는 그의 등이 넓고 푸근해 보였다.

  시원하다 못해 소름이 오싹 끼칠 정도로 찬바람이 홱홱 불던 식당은 꽤 비싼 곳 같았다. 정식을 주문하던 남자는 술 한잔 같이 할 수 있겠느냐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왕년의 술고래 아비를 떠올리던 경숙은 그 아비에 그 딸년 아니랄까봐 껀수만 생기면 원 없이 마셨으나 주정 비슷한 것도 배우질 않았다. 극성스럽고 솔직한 성격에 비해 유일하게 내숭떠는 자리가 술 좌석이었는데 절대 서둘러 먼저 취하는 적이 없었다.

  전혀 술을 못하는 것으로 알던 주위 사람들은 막판까지 굳세게 남아 있는 경숙을 보며 고개를 휘둘렀다. 혀가 꼬부라질데로 꼬부라져서는 주정 비슷한 시비를 걸며 삿대질을 하곤 했다. “야, 넌 뭐니 대체… 재수없어. 왜 똑같이 마시고도 너 혼자만 맨정신이냐 이거야. 넌 뭐 용가리 통뼈라도 되니? 끅, 아이구 얄미운 년… 꼭 혼자만 제정신이드라. 너 참 잘났다… 끅…”

  그런 말을 들을때마다 아비의 주정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것은 물론,걸핏하면 푸념처럼 지껄이던 명숙네의 말이 늘 머릿속에 박혀 있었다.

 “돈이라곤 씨알 꼽쟁이만큼 벌어들이는 인간이 그 놈의 웬수 같은 술은 허구헌날 퍼마시니 집구석이 맨날 요모냥 요꼴…” 이라던 소리가 귓전에 맴돌았다.

  불행하게도 술 한 방울 입에 대지도 못하는 어미를 닮지 않은 탓에 오남매가 굳이 술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집 앞까지 바래다주던 남자를 떠올리며 다른 때와는 달리 느낌이 좋은 것 같아 쉽게 잠이 오질 않았다. 왜 이제야 인연이 닿았을까 싶을 정도의 김치 국물부터 배가 터지도록 퍼 마시며 하얗게 밤을 지새웠다.

  그러면서 돌아서 가던 그의 넓은 등이 잠깐 외롭게 느껴지던 것도 함께 떠올렸다. 누구를 막론하고 왜 사람의 뒷모습에서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이 쓸쓸함과 슬픔일까를 생각하며 두살 터울의 바라만 봐도 듬직하던 상대의 외로움을 함께 나누고 싶은 욕심이 한가득 생겼다.

 

  정숙의 예전 동서로부터 전화를 받던 명숙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며 수화기를 떨구었다. 그것을 보던 남편이 무슨일이냐 물었으나 명숙이 마치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은정 아빠가 죽었대요…” 그리고는 닭똥 같은 눈물을 후두둑 쏟아냈다.

  화낭질에 치를 떨며 이혼했던 정숙의 남편은 2년여의 방황 끝에 참한 여자를 소개받았는데 다소곳하고 얌전한 성격이다 보니 아이들도 잘 따라 주었고 꽤 맘에 들어하던 눈치였다. 서로 재혼이다 보니 간소한 결혼식을 마치고 신혼여행을 가던 중 사고로 그 자리에서 부부가 즉사했다는 말을 전했다.

 머리가 뽀개져 알 수 없을 만큼 참담한 상황에 내장이 다 튀어나와 눈 뜨고는 차마 볼 수 없을 정도라고 했다. 너무나 처절하고 가엾은 죽음에 정숙을 향한 분노가 다시 솟구쳤다. 멀쩡하던 가정을 깨뜨린 것이 결국 바람기 때문이었으니 사람들의 입방아가 그칠 줄 몰랐다.

  일부로 결혼식 날 죽음을 택해 정숙에게 복수를 하려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미련의 소리도 들렸고 음주운전이 불러 일으킨 사고라고도 했다.

  다시 고아가 된 아이들은 울다 까무러치기를 반복하며 나타나지도 않는 엄마를 향해 이를 갈았다. 정숙이 그 자리에 가 보는 것이 죽은 사람에 대한 마지막 예의겠지만 서방 잡아먹은 년이라는 봉변이 두려워 갈 수 없다는 변명부터 늘어 놓았다.

 “됐어. 지 무덤 지가 판거지 날더러 뭐 어쩌라구. 고새를 못 참고 누가 재혼하랬나.. 둘 다 죽어도 싸지 싸…” 눈물은 홀짝거리던 정숙은 그렇게 둘이 죽은 것도 팔자라며 공연한 원망을 했다. 보다 못한 명숙네가 애당초 니 년이 잘 하고 살았으면 왜 멀쩡한 사람이 그 꼴 당하느냐며 죽은 사람의 역성을 들었다

 . 날이 갈수록 지 여편네 무시하며 주먹질 하던 것이 괘씸하기도 했으나 원인 제공이 칠칠치 못한 바람둥이 딸년이다 보니 양심에 가책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남겨진 아이들은 당분간 친할머니가 맡기로 했는데 데려 갈 마음이 있으면 아무 때고 상관없다는 무언의 압력이 날아왔다

 . 그조차도 짐스러웠던지 아이들 데리고 어떻게 사느냐며 그냥 지금처럼 저 혼자 몸이 홀가분하고 좋다는 말에 눈총 세례를 받아 마땅했다. 남편 잡아먹은 것도 모자라 자식까지 거부하던 정숙은 전혀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예전의 상태로 돌아가 늘 히히덕거리며 남자를 밝혔다. 명숙이 경숙을 앞세워 찾아 갔던 은정의 학교는 미아리를 한참 지나 변두리에 꼭꼭 숨겨져 있었다.

  반도 모른 채 물어물어 아이를 찾아내니 아무 말없이 눈물을 훔쳤다. 언년생인 작은 아이의 반을 묻자 마지못해 손가락으로 맨 끝을 가리켰다. 아이들의 웅성거림으로 진작에 알았다는 듯이 영약하고 속 깊은 둘째는 냅다 화장실로 튀어버렸다.

 경숙이 쫓아가 달래느라 한참 애를 먹었는데 열 네 살의 아이는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표독함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수업이 끝나길 기다려 학교 앞의 분식집에서 아이들을 마주한 명숙이 손을 부여잡고는 한없이 울었다

 . 할머니가 거둘 형편이 못되어 친구 집에 얹혀 사는데 매달 나오는 보조금을 그 집에서 관리한다는 말을 어렵게 꺼냈다. 재산이라고 정리된 것은 누가 가로챘는지 그것까지는 알지 못한다며 어떻게든 살아지니 다시는 찾아와서 귀찮게 하지 말라는 식으로 쏘아부쳤다.

  하긴 두눈 시퍼렇게 뜨고 어미가 살아 있으면서도 나 몰라라 내깔려 두었으니 악에 바친 여린 심정을 이해하고도 남았다

 . 어쩌다 니네들 팔자가 이리 사나워 졌느냐며 그나마 행색이 깔끔해서 마음이 놓인다던 명숙은 훌쩍이는 틈틈이 아이들 운동화를 내려다보았다. 희디 흰 운동화의 슬픔 같은 빛깔 때문이었는지 아이들이 더욱 초라하게 느껴지는 것 또한 떨칠수가 없었다. 보여지기 위한 어떤 가식적인 힘을 빌어 내 놓은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땅을 향한 아이들의 시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에 다다르자 마음 한구석에 큰 파도가 쏴아하고 밀려왔다

 . 명숙이 그날로 정숙을 불러다 얼르고 달래듯 얘기를 꺼냈지만 도저히 혼자 힘으로 키울 자신이 없다며 한 방에 거절하는 것 까지는 봐 주겠는데 다시는 귀찮게 하지 말라는 식의 아이들과 똑 같은 소리를 지껄였다

 . 모두들 뚫린 입으로 말은 번지르하게 한다며 새끼도 버린 독한 년이라고 흥분 할 뿐, 선뜻 그 아이들을 어찌 하겠노라 나서지를 않았다. 오히려 명숙의 샌님 같은 남편만이 여자 아이들 내깔려 놔 봐야 험한 꼴만 당한다며 데리고 있자는 말을 꺼냈다

 . 그러자 명숙이 새초롬해지며 일장 연설을 했다. “내가 마음 같아서는 공부도 시키고 보란듯이 잘 키워 시집도 보내고 싶지만 지 애미가 버젓이 살아 나 몰라라 하는데 괜히 오지랖 넓다는 소리나 들을 것 같아 그림도 안 좋아 보이고…” 하며 얼버무리는 꼴이 가만히 입 다물고 나 죽었습니다… 하는 것만도 못했다. 그러다 의리의 금숙이 호도독 끼어 들며 다 들으란 듯이 핀잔을 주었다. “칠띠기가 사내눔한테 눈이 멀어 저 지경인데 새끼들 눈에 보이기나 하겠어… 없는 셈 치라구 그건 엄마두 아니야. 그리구… 큰 언니도 차라리 입 다물고 가만히나 계슈. 키워줄 것도 아니면서 뭐하러 잘난척이래. 나도 좋은 꼴 보이면서 살아준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내 배 아파 낳은 새끼 버리는 짓은 차마 못 할 것 같으네. 그따위를 엄마라고 아는 애들만 불쌍하지. 질질 웃음 흘려가며 남자 후리는 일이나 잘하고… 에그 등신 칠띠기 같은 년…” 지 아랫 사람에게도 함부로 내뱉지 말아야 할 소리들을 거 없이 쏟아내며 금숙이 어찌보면 속 시원해 보였다. 모두들 몸조심하느라 발뺌하는 가운데 정숙을 손가락질 할 줄만 알았지 아이들 문제는 어떤 해결책도 나오질 않았다. 금숙이 술집에라도 취직해 아이들을 맡겠다고 으름장을 놓자 이번에는 명숙네가 펄쩍 뛰었다. “ 니 까짓게 무슨 재주로 키울래? 그것도 둘 씩이나… 괜히 혼자 찧고 까불지 말고 니 앞가림이나 잘해…” 누군가의 갑작스런 죽음 앞에서 일말의 양심들은 있어서인지 서로들 주둥이만 살아 핑계대기에 급급한 것을 보고 있자니 차라리 그 자리에 없는 경숙이 속 편해 보였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더니 금쪽 같은 새끼들을 들먹이며 아무도 거두지 않는 것을 안다면 죽은 사람이 벌떡 일어나 모두에게 해코지를 할 것만 같아 두려웠다

 . 떠난 사람이 불쌍한 것이 나리나 남겨지고 버려진 아이들만 불쌍했다.

  죽음은 남겨진 사람들의 변명이며 지우지 못할 슬픔이었다.

 

 
작가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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