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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일반/역사
인연, 악연으로 마침표...
작가 : Number3
작품등록일 : 2019.10.28

오남매의 파란만장 인생 스토리... 악연으로 끝나다...!

 
인연, 악연으로 마침표...6화
작성일 : 19-10-28 19:45     조회 : 236     추천 : 0     분량 : 15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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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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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숙의 몇 안되는 직원들의 회식이 있던 날, 모두 원 없이 놀아 보자는 누군가의 제의에 무진이라는 나이트로 향했다. 경숙도 어쩔 수 없이 명주와 어울려 얌전히 몸을 흔드는데 부루스 타임으로 변하며 ‘연인들 이야기’ 라는 곡이 감미롭게 울렸다

 . 누군가가 노리고 있었던 것처럼 명주를 잽싸게 낚아 챘는데 훤칠한 키의 허여멀건한 상대에게 끌린 그 애 또한 아예 그 품속으로 파고 들었다. 진작에 서로 눈도장을 찍었던 사이처럼, 아주 오래된 연인처럼 다정하고 좋아 보였다. 몇 걸음 들어가던 경숙은 정중히 몸을 숙이며 춤을 청하는 남자와의 실랑이 끝에 다시 무대로 향했다. 깔끔한 인상의 와이셔츠 차림이던 그는 작은 키가 흠이긴 했지만 막 돼먹지 않은 점잖은 행동이 마음에 들었다.

  연신 경숙의 귀에 대고 속살거리던 남자는 S제지의 망년회차 온 것이며 들어올때부터 눈여겨 보았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면서 갑자기 경숙의 볼에 스치듯 얼굴을 부비더니 아기 피부처럼 보드라운게 향기도 아주 좋다는 아부를 했다

 . 그렇게 말하는 남자에게서 방금 세수를 한것처럼 다이알 비누 냄새가 아주 진하게 풍겼다. 경숙은 볼이 화끈거리는 동시에 가슴이 덜덜 떨렸으나 어느 정도의 간격을 유지하던 상대는 최대한의 예의와 신사다운 면모를 잃지 않았다. 다시 곡이 바뀌면서 자리에 앉은 그녀에게 쪽지를 건넨 것은 우간다라는 이름표의 웨이터였다.

  입구에서 만나고 싶다는 내용을 보며 명주가 부추겼다. “괜찮은 사람들 같지 않니? 직장도 확실한거 같고… 꽤 쓸만하던데 나가서 만나보자. 인상들도 그만하면 됐고. 오케이?...” 명주의 특기는 어딜 가든 항상 남자가 득실득실하게 꼬였다. 정숙과는 또 다른 무언의 바람기가 있었던지 어느 자리에서든 그야말로 인기 폭발 지경이었다

 . 아무하고나 텀벙텀벙 말 섞으며 진한 농담에 반말 찍찍거리는 모습이 결코 밉지 않은 그런 아이였다. 매달 끊이지 않은 가불로 마사지를 받느라 얼굴에 공을 들이면서도 정작 그 애의 두어 평 방 꼬라지는 발 딛을 틈도 없을 만큼의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폭탄 맞았느냐는 농담 끝에 경숙이 드나들때마다 대충 치워주기는 했으나 방 구석에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생리대며 올 뜯긴 스타킹은 밥맛이 다 떨어질 정도로 보기 역겨웠다. 그야말로 지 낯짝만 뺀도롬하게 떡칠하고 다니는 괴물중에 상 괴물이었으나 시원스런 외모며 털털한 성격이 묘한 매력을 풍겼다.

  어디든 갈때면 그애와 둘이었으나 돌아오는 길은 항상 뻥튀기 해오는 것처럼 늘 짝이 생기곤 했었다. 검고 커다란 눈에 눈웃음까지 살살 치는 그 애의 깊은 눈을 보고 있자면 그 속으로 빨려들어 갈 것만 같은 맑디 맑은 눈이 신비스러울 정도였다.

  그 애의 별명이 흑진주라는 것을 떠올리며 입구에서 그들을 다시 만났을때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겁도 없이 둘씩 나뉘어져 충무로 밤길을 하염없이 걸었다. 뒤에서 두런거리는 명주와 허여멀건의 목소리가 멀게 느껴질 즈음, 경숙이 무서운 마음에 뒤를 보았으나 거기엔 이미 아무도 없었다. 차가운 겨울바람만이 바쁘게 뒤를 쫓을 뿐이었다.

  순간 더럭 겁이 난 경숙이 연신 뒤를 돌아다보자 작은 키의 신사가 야유 섞인 말을 했다. “그 사람들 지금쯤 어디 따뜻한 곳에 들어가 있을걸요. 아마도…” 방금전의 예의 바란 신사는 온데 간데 없이 굶주린 한 마리의 늑대가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 무슨 소리냐며 경숙이 의아해 묻자 컴컴한 밤거리에서의 음흉한 미소만 스쳤다. 갑자기 내리는 솜방망이 같은 눈을 맞으며 남자가 다시 말했다. “우리도 친구분처럼 어디 따뜻한데 잠시 들어갔다 갈까요? 눈도 피해야겠고 추워서 더는 걸을수도 없을 것 같은데…” 그리 추운 날씨도 아니었는데 늑대 탈을 쓴 신사의 표정이 험하게 일그러지며 금방이라도 얼어 죽을 것 같다는 엄살을 부렸다. 경숙이 속으로 ‘지금 피해야 할게 눈이 아니라 니 놈이다 이놈아…’ 하며 저만치 앞의 글로리아라는 간판을 가리켰다.

 “그럼 저기 잠깐 들어갔다 갈래요? 그렇게 추우면…” 심야 다방이라는 불빛이 깜빡이는 것도 못마땅한지 애꿎은 간판만 뚫어지게 쏘아보던 남자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채 콧방귀를 뀌었다. “허…참… 장난도 아니고…” 그러더니 이번에는 사정을 하기 시작했다.

 “제 말 뜻은 그런게 아니고요. 우리도 그 사람들처럼 이불 속에 발 뻗고 따뜻하게 앉아 있을 그런 곳을 찾자는 거지요… 순진한 건지 꽉 막힌 건지…” 하면서 말 끝을 흐렸다

 . 그제서야 상대의 확실한 속셈을 눈치 챈 경숙이 한숨을 포오 내쉬는 동시에 사납게 째려보고는 걸음을 빨리했다. 머뭇거리다가는 잡혀 먹힐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 지까짓게 따라오던 말던 불빛이 새어나오는 심야 다방의 계단을 혼자 또각또각 올라갔다.

  머쓱해진 남자가 허둥대며 뒤따라오더니 마치 애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허락도 없이 옆자리에 나란히 앉자마자 다시 또 쫑알거렸다. “친구분도 아마 지금쯤 제 말처럼 그렇게 있을껄요…” 마치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고 있기나 한것처럼, 아니면 애초에 여자 하나씩 낚아 못된 짓을 하기로 약속이나 하고 나온 놈처럼 확신에 찬 소리를 하며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 앤 그럴애가 아니라며 엽차만 후루룩 마시자 남자는 긴 긴 한숨을 뿜어냈다. 다 잡은 고기를 마음대로 요리하지 못한 아쉬움의 분노가 이글거리는 그런 눈빛이었다. 어느 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입을 꽉 다물어버린 경숙을 쉴 새 없이 꼬득이던 남자는 제 풀에 지쳤는지 실례 많았다는 말을 끝으로 잡은 고리를 순순히 놓아주었다.

  어둑어둑한 찻 집의 자명종이 네 번 울리고 있었다. 다음 날 만난 명주는 상기된 표정으로 쉴새 없이 지껄여댔다. “그 사람 순진하고 착한 것 같애. 택시까지 잡아주더라.” 말을 그렇게 하면서도 눈을 맞추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분명히 간 밤의 사건이 있었을 법도 한데 요점을 쏙 빼버리는 것이 내내 서운했다. 다른때 같으면 누굴 만나 뭘 했는지 입 밖에 내서는 안될 사생활까지도 일일히 보고하듯 떠벌리던 사람이 그 날은 다르게 느껴졌다

 . 어젯밤의 늑대가 굳게 확신 했던대로 소리도 없이 사라지더니 뭐했냐 묻고 싶었지만 그냥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었다. 그 아무일이라는게 어떤 의미인가를 훤히 알면서도 일은 무슨 일이냐며 얼버무리는 그 애는 깨드득 웃기만 했다

 . 그 웃음 속에는 너도 얌전 떨어야 별수 있겠니… 하는 짓꿎은 표정이 숨어 있는 것 같아 조금 불쾌하기도 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웃는 입 모양과는 정반대의 의심 가득한 눈빛이 아주 고약해 보였다. 커다랗고 맑은 눈으로 그런 눈빛도 만들 수 있다는 아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아무튼 명주는 정에 굶주린 사람처럼 그 날 이후로 전화통에 매달려 웃음을 실실 흘리는 것이 보기에도 위태위태 했다.

  좋은 장소에서의 만남도 아니면서 저러다 상처만 남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앞섰지만 서로의 인생관이 다르다 보니 더 깊이 관여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틈만 나면 그애와 어울리며 심야 극장을 미친듯이 드나들던 지난 시간이나 무슨 먹고 살 일이라도 난 것처럼 수시로 수다떨며 홀딱 밤을 새우던 심야 다방의 추억이 새삼 그리웠다. 무교동의 금란 다방이 주로 날 밤 까는 장소였는데 간혹 라노비아나 체인징 파트너 같은 신청곡을 써내면 긴 퍼머 머리의 DJ가 애꾸마냥 찡끗거리는 눈으로 그것을 째까닥 틀어주었다

 . 그러면서 아리따운 아가씨의 방문을 환영한다는 허풍스런 멘트도 잊지 않고 해주었다. 밤샘 동지였던 명주는 다섯달의 비밀스런 속삭임 끝에 허여멀건과 결혼을 했는데 식장에서 다시 마주친 그 애의 신랑은 첫날의 거짓말처럼 넥타이족이 아닌, 택시 기사였다

 . 드레스 속의 볼록함이 제법 드러나는 것으로 보아 처음 만난 날, 눈 내리던 밤의 행적을 짐작할 수 있었다. 순간 불결함이 느껴지던 동시에 심한 구토 증세가 일어났다. 경숙은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남녀 사이의 알 수 없는 어떤 행위에 대하여 언제나 더럽다는 느낌이 먼저 들었다

 . 거짓 사랑에 배반당한 비련의 여주인공 처럼 그것을 괜히 증오했다. 밤새 떼쓰듯이 경숙을 꼬시던 키작은 신사는 구석에 숨어 눈치만 슬슬 보다가 어느 순간 눈이라도 마주치면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확 덮어 버렸다.

  뉴스에서나 볼 수 있는 범죄자의 모습처럼 낯짝 가리는 꼴을 보니 니 죄는 니가 알렸다 라고 소리쳐 주고 싶었으나 그냥 씁쓸이 웃어 넘기고 말았다. 몽땅 유부남이라는 것도 그때 알게 되엇는데 총각도 아닌 주제에 멋대로 추근거렸던 사살이 몹시 불쾌했으나 무사히 달아날 수 있었던 그날 밤을 천만다행으로 여겼다

 . 뻔뻔할 정도로 미련 떨며 고지식 하긴 해도 함부로 굴리지 않는 제 자신이 참으로 대견스러울 뿐이었다. 기립 박수라도 힘껏 쳐주고 싶은 마음이 한 없이 솟구쳤다

 

 . 영식이 집을 나간 후 그냥그냥 무마된 것처럼 낙심하는 명숙네의 모습이 보기에도 안타까울 만큼 애처롭기 짝이 없다. 속상하고 배신 당한 마음이 한가득 일 테니 일부로 말도 아끼며 부딪히지 않으려 애쓰지만 갈수록 여위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찢어질 지경이었다

 . 명숙에게 하소연을 하던 중 무언가 석연치 않은 대답과 동시에 탁한 공기가 느껴지는 불길함 또한 떨칠수가 없었다. “엄마 좀 어떻게 해봐… 죽을상이야. 도저히 못 봐줄 지경이라구…” 명숙네 얘기를 꺼내자 갑자기 명숙이 벼락 같이 소리를 질러댔다.

 “망할놈의 새끼… 그런거야 바로 부모 심정이라는게… 집 나간건 괘씸해 하면서도 거길 괜히 갔었나 후회 하는거겠지. 우리가 누구냐… 그걸 그냥 놔 뒀을 것 같아. 가서 개망신 주고 사장 만나 몽땅 다 얘기했지. 그런 속사정 알면서 어느 누가 직원이라고 붙여 두겠냐. 엄마도 참 울고 짜고 뒤집을땐 언제고 그것 땜에 더 그러나 보네. 나같으면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

 . 마음 아파 할 것 하나 없다구…” 명숙은 경숙이 그간의 일 들을 당연히 알고 있을꺼라고 여겼던지 막힘도 없이 자랑거리 처럼 술술 잘도 늘어 놓았다. 경숙은 순간 놀라 자빠질 것 같은 심정이 되어 숨이 콱 막혀옴을 느꼈다

 . 바로 이거였구나… 탁한 느낌의 그 무엇인가가. 이게 어떻게 한 뱃속에서 나온 자식이라고 할 수있단 말인가.“언니, 정말이야? 정말 거길 갔었단 말이지? 너무들 하네, 어떻게 그럴수가 있어 사람이… 불쌍하지도 않어? 걔도 살겠다고 그러는걸 그렇게까지 모질게 할 필요는 없는거잖어…” 경숙의 씨알도 안 먹힐 설교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는다는듯, 수화기 너머의 명숙이 더 고래고래 소릴 질러댔다. “그런 말 하지도 말어. 다 지가 뿌린데로 거두는 법이야. 너두 마음 아파할 것 하나 없다. 그깢눔 봐줘 봤자라구. 아예 싹을 잘라 버려야 해.”

  더 이상의 악담을 듣고 싶지도 않아 수화기를 내려 놓은지도 모른 채 명숙은 혼자 계속 지껄였다. 이제껏 들은 것들을 모조리 귀를 잘라내어 서라도 훌훌 털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반듯한 대학 나와서 제대로 된 직장에 취직 했으니 가문의 영광이라며 좋아들 할땐 언제고 이제와서 변덕을 부리며 깨부수는게 몹시 얹짢았다. 어린시절, 주정뱅이 아비를 피해 도망 다닐때의 따뜻한 손 잡아주던 언니가 더 이상 아닌것만 같았다

 . 어쩜 그리도 독할 수가 있는건지 그져 슬플 따름이었다. 그러자 영식이 더욱 가엾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서로 죽고 못 사는 사이까지는 봐 줄수 있지만 가족과의 인연을 끊으면서까지 그 따 따위 구는건 도무지 납득이 안되는 부분이기도 했다

 . 연애도 제대로 못해본 경숙의 입장에서 보면 이해되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정작 그렇게 하기까지는 많은 용기가 필요 했을테지만… 용기 같지 않은 용기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경숙이 늦은 퇴근을 하려는데 전화벨이 온갖 방정을 다 떨며 요란하게 울렸다. 그냥 나갈까, 받을까를 잠시 망설이다 네-에 하며 수화기를 드는데 귀에 익은 음성이었다. “나야… 요 밑에 있는데 퇴근 안 해? 나 한참 기다렸는데 더 기다릴까?” 어제 보고 오늘 또 볼 일이 있어 누가 기다리라고 한 것도 아닌데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기다리고 있다는 그런 말투였다.

 풀이 죽고 기운도 다 빠져 버린채 쓸쓸함만 가득 배어나오는 황량한 목소리였다. 오히려 경숙이 더 다급해진 마음에 금방 나간다는 말을 하는데 눈물이 핑 돌면서 이미 제 정신이 아니었다. 그 사이 맘이 변해 그냥 달아나 버리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에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눈물을 훔쳤다. 이 쪽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면 안될것만 같았다

 . 얼마나 막막하길래 스스로 찾아온 것일까를 생각하니 커다란 슬픔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내려앉아 걸음이 한층 더 무거웠다. 옆에 스치는 사람 모두를 떠밀듯이 뛰쳐나오니 공중전화 옆에서 땅을 주시한 채 서 있는 영식의 모습이 보였다

 . 덥수룩한 머리에 후줄근한 점퍼 하며 다 낡아빠진 신발 모두가 몹시 초라한 행색이었다. 명숙네 말대로 철철이 데리고 다니며 반짝반짝 윤기나게 챙기던 흔적은 눈 씻고 찾을래야 찾아볼 수도 없었다. 환자처럼 누렇게 뜬 낯 빛이며 그런것들을 보고 있자니 울컥 울음이 쏟아질것만 같아 손으로 입을 막은 채 한참을 서 있었다.

 나이보다 훨씬 더 늙어버린 추한 모습에 그 어떤 말도 떠오르질 않았다.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푹 찔러 넣은 영식은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는지 계속 땅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동안 어떻게 살아 왔는지를 묻지 않아도 훤히 보이는듯 했다

 . 행여 놀라기라도 할까 싶어 조용히 다가가 마주 서니 그제야 눈을 들어 따스한 눈길을 주었다. “어…? 왔어?” 몇날 몇일 굶은 사람과도 같은 휑-한 눈에 광대뼈는 툭 불거지고 까칠한 얼굴에 덥수룩한 수염하며 전혀 낯선 사람과 서 있는 것 같아 경숙이 어색할 정도였다. “어떻게 지냈니?” 물으며 영식의 손을 꼬옥 잡는데 손가락 마져도 앙상한 나뭇가지였다. 금방이라도 부서져 버릴 것만 같은 배짝 마른 그런 느낌에 눈물이 솟구쳤다. “왜 그랬어….? 꼴이 이게 뭐니? 불쌍해 죽겠네…” 하는게 꾹 꾹 참았던 울음보가 터지며 말이 이어지질 않았다

 . “이러지 말어. 남들이 보면 오해하겠네. 무슨 불륜 관계인가 하고…”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서도 그 애 답지 않은 농담으로나마 경숙 걱정을 하는 것이 더욱 마음 아팠다. 영식의 팔을 잡아끌며 마주 보이는 제과점의 목조 계단을 오르니 붐비는 1층과는 달리 한산하고 조용한 곳이 오히려 다행스러웠다

 . 마치 남의 눈을 피해 도망다니는 사람들처럼 눈치를 보며 창가의 맨 구석진 자리를 찾아 앉았다. “빵 먹을래…? 아님 딴데 가서 밥 먹을까?” 다급한 마음에 아무곳에나 들어오긴 했으나 배고프고 지쳐 보이는 영식에겐 따뜻한 밥이 더 급선무일 것 같았다

 . “아아니…됐어. 밥은 무슨… 그냥 얼굴만 잠깐 보고 가려구…” 하며 말 끝을 흐렸다. 탁자에 고정되어 있는 영식의 눈에 뭔가가 살짝 맺히는 것이 느껴졌다.

 그걸 들킬세라 고개를 확 젖히며 천장으로 향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목이 메일 지경이었다. 그나마 평소에 가장 스스럼없던 사이였기에 절박한 상황에서 찾아 왔을꺼라는 생각을 하니 더욱 가슴이 아팠다. 시켜 놓은 우유를 마시며 빵을 포크에 찔러주자 그것을 받아드는 손이 보일 듯 말 듯 흔들렸다.

 “어떻게 지냈니? 말 좀 해봐… 궁금해 죽겠네…” 경숙 혼자 애 닳아 궁금해할 뿐, 영식은 아무런 동요도 하지 않았다. “됐어… 그냥 찾아온거야. 그냥…” 듣고 싶은 얘기는 그런 것이 아니었는데 더 이상의 그 어떤 말도 해주지 않을 것 같은 단호함을 보이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속으로 ‘빌어먹을 놈의 새끼, 맨날 되긴 뭐가 되냐…’ 혼자 서운해하는데 산더미 같은 빵을 게눈 감추듯 급하게 먹고 벌떡 일어 서더니만 하는 소리가 “그만 가자. 그래도 생각이 제일 많이 나드라…” 하며 그 놈의 누나 소리는 죽어도 못하겠는지 턱 끝으로 경숙을 가리켰다

 . 버스 정류장까지 걸으며 한마디 말도 하지 않는 영식의 뒤에서 몰래 지갑을 열어 손에 잡히는대로 모두 꺼내 반으로 접으니 꽤 두툼했다.

  그걸 주긴 줘야 하는데 똥고집에 자존심만 강한 영식이 상처받을까 싶은 두려움이 앞섰다. 될 수 있는 한 아무렇지도 않게 애써 환한 모습이 되어 어디로 갈거냐 물었으나 영식의 대답은 간단명료하게 찬 바람 그 자체였다. “됐어. 알 거 없으니 먼저 가. 난 저쪽으로 건너가야 하니까…” 여전히 누나 소리는 죽기보다 하기 싫은지 고개를 까딱 하는 것으로 모든 대답을 대신했다.

  굳이 말하지 않으려 하니 더 이상 물어야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은 경숙이 손에 감추듯 들고 있던 것을 잠바 주머니에 재빠르게 찔러 넣어주며 또 연락하라는 소리를 했다.

  영식은 고마움을 표시하는 것인지 애써 눈 한번 맞추는 것으로 희미하게 웃어 주었다. 그 애의 마지막 자존심까지는 차마 건들고 싶지 않아 서둘러 버스에 올랐으나 마음이 편칠 않았다

 .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밖을 보았을때는 낡은 석고상처럼 그 자리에 오똑 서 있는 영식의 모습이 너무 서글퍼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 ‘드러운 새끼… 저 꼴로 다나탈 껄 왜 뛰쳐나가고 지랄이야…’ 혼잣말로 애써 화를 삭히며 마음을 달래려 해도 도무지 진정이 되질 않았다. 황량한 벌판에 혼자 덩그마니 버려진 아이처럼 한참을 서 있던 영식의 모습이 점 점 멀어져 갔다. 한숨이 저절로 나오며 눈 앞이 흐려지는 탓에 도저히 밖을 내다 볼 자신이 없었다.

  아무런 도움이 되어 줄 수도 없는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 인생이라는 자체가 모두 제 성격대로 간다고 했던가… 철부지에 날라리 금숙이 명숙의 손에 반강제로 끌려가다시피 한 것이 엊그제 같 같은 말끔한 모습의 숙녀로 탈바꿈을 했다.

  막내에 대한 책임감이나 애정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명숙이 빠듯한 월급쟁이 수입에서 매달 일정량을 피아노 레슨비로 지출하는 정성도 아끼질 않았다.

  라면가락 같은 뽀글머리의 노랑물이 다 빠지고 정상적인 색으로 돌아오자 예전의 천박하고 쌍스럽던 날라리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조카들과 어울리며 철딱서니 없는 행동을 일삼기도 했으나 맘 좋은 형부는 그런면까지도 어여삐 여기며 온전한 사람 취급을 해주었다

 . 욕이나 찍찍 내 뱉으며 무시하고 쥐어박던 영식에겐 오빠라는 당연한 호칭도 아까웠는데 형부는 정말 맘 좋은 오빠처럼 의지할 수 있는 존재였다.

  지 버릇 개 못 준다고, 가끔씩 뒷 골목에 숨어서 뻐끔거리는 짓을 빼고는 활달하고 싹싹한 처녀의 모습 그대로였다. 유치원의 보조 교사로 취직을 해서는 되는둥 마는둥 성깔을 부리며 다니면서도 어떤 자리에서든 아무 거칠 것 없이 당돌하고 화끈한 성격이 금숙의 매력이기도 했다.

  자기 표현 확실하며 주장도 강하고 조금만 거슬리는 꼴에도 물, 불 안가리며 덤벼드는 반면에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모습은 미워할 수 없는 장점으로 비춰졌다

 . 꼬챙이처럼 들쑤시며 남을 불편하게 만드는데 선수였던 금숙이 제대로 된 연애를 하게 될 줄은 아무도 상상 못한 일이었다. 동료의 사촌 오빠를 소개받고는 맘에 드네 안드네 튕기며 오만방자하게 굴었으나 오히려 그런것까지를 예쁘게 봐 줄 만큼 분에 넘치는 상대를 만났다.

  껀수만 생기면 온갖 생트집을 부리며 잡 먹을 것 처럼 굴었으나 뒷 끝도 없고 군소리따윈 더욱 하지도 않는 투명한 성격 그대로 확실한 연애를 했다. 상대는 운동으로 다져진 몸매에 반듯한 이목구비며 한가닥 하는 집안의 2남 3녀중 장남이라고 했다

 . 위엣 것들한테 치이며 막내로 자란 탓인지 형제 많은 집안의 맏며느리 자리가 소원이라는 금숙의 입 방정에 신랑 자리는 두 말 할것도 없이 결혼을 결정했다. 그야말로 겁대가리 없이 선택한 맏며느리 자리였다. 자기 부모 모시는게 소원이라는데 세상의 어느 남자도 그런 소원을 마다할리 없었다. “우린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그런지 부모님 잘 모시는게 소원이에요…” 시아버지 사랑은 며느리란 말만 믿었던지 천하절색 양귀비가 애교 떨며 내 뱉은 그 한마디에 꼴까닥 넘어가 버린 결혼이었다.

  있는 집안의 맏며느리로 아랫것들 거느리며 맘껏 성질을 폭파시키다 못해 제 선에서 뭐든 다 해결 하고 싶은 못된 욕심이 솔직한 이유였을 것이다. 금숙의 속내와는 전혀 다른 중매로 만난 두 달여의 진한 연애 끝에 소원처럼 시작된 맏며느리 자리는 그리 만만치도, 핑크빛도 아니었다

 . 자신이 꿈꾸었던 결혼 생활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까지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생긴 값 한다는 소문대로 남편은 바람 같은 존재였고 젊은 시부모는 모든 것을 트집으로 일관했다. 더욱 기가 막히는 일은 남편이 내뱉던 말을 그대로 믿었을 만큼 행새하는 집안도 아니면서 사사건건 혼수를 트집잡아 애를 먹였다

 . 가까이 살면서 시도 때도 없이 드다드는 시누이 년들은 지들도 잘난 것 하나 없는 주제에 있는대로 무시하며 찬 바람을 쌩 쌩 일으켰다. 시동생 마져도 새초롬한 눈길로 못마땅한 듯이 피해 다니며 벌레 씹는 얼굴을 하자 금숙은 돌아버릴 지경까지 이르렀다.

  뭘 어떻게 하고 살아야 하는지의 대책도, 자신도 없었다. 며느리인지 식모인지 덜렁 들여 앉히고는 누구 하나 따뜻한 말은 커녕,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일에 치어 죽을 지경이었다. 낡고 오랜 탓인지 무슨 놈의 집구석 일이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질 않았다

 . 개판치며 손가락도 까딱 안한 채 지 몸뚱이나 치장하던 금숙의 봄날을 고된 맏며느리 자리와 맞바꾼 꼴이 되고 말았다. 덩치가 산 만한 남편을 겪어보니 중증 마마보이 환자였던지 말 끝마다 엄마, 엄마 노래부르며 매달리는 철부지 어린애였다. 어느 것 하나 맘이 맞질 않으니 부딪치며 싸우는 일이 잦아졌다.

  시누이들은 눈만 뜨면 들이닥쳐 언니 소리 한마디 없이 알뜰하게 부려 먹더니 갈 때는 무엇이든 바리바리 싸가기 일쑤였다. 남편이라는 작자는 코빼기도 구경할 수 없을 만큼 잦은 외박도 모자라 점 점 목소리까지 커지며 싸움이 늘자 손찌검도 마다하질 않았다. 지 부모 앞에서 감히 큰소리 친다는 죽이고 싶은 명분이었다

 . 왕년의 한 성깔 하던 금숙은 쨉도 안되는 상대를 만나 인생 조진 꼴이 되고 말았다. 맘껏 성질도 부리기 전에 커다란 주먹이 날아오는 것에는 당할 재간이 없었다. 덤빈 횟수만큼 멍이 늘면서 뛰쳐나오기 십상이었고 그 짓이 반복되는가 싶더니 다시 끌려 들어갈때마다 심한 손찌검과 욕설이 기다리고 있었다

 . 쥐뿔도 없기는 양쪽 집안이 피장파장이건만 싸한 표정의 시아버지는 까놓고 멸시를 했다. 온갖 응석도 다 받아 줄것만 같았던 첫 인상의 후덕함 따위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 건드려 놓지만 않으면 한없이 싹싹하고 활달한 성격인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단단히 미운 털 박힌 금숙은 지옥의 불구덩이에 처박힌 참담함을 느꼈다. 돌이킬 수도 없는 자신의 입방정이 벌여 놓은 상황에 그 입을 바늘로 쫑 쫑 꿰매버리고 싶었다.

  막내 주제에 하늘이 내린다는 맏며느리 자리를 넘봤던 자신이 잘못된게 아니라 드러운 놈 만난 것이 후회 막급이었다. 견디다 못해 악에 바친 금숙이 성질을 제대로 발휘하며 신혼방을 난장판으로 만들던 날, 그 기세에 움찍한 시부모가 백기를 들고 말았다.

 “허구헌날 싸우는 꼴 보기도 지겨우니 니네 멋대로들 나가 살어라. 땡전 한 푼 줄 수도 없는 처지라는건 더 잘 알고 있을 테니 입에 풀칠을 하든 말든 니들이 알아서들 하고…” 지옥에서 해방 된다는 것 만으로도 감지덕지인터라 명숙이 얻어준 싸구려 월셋방이 천국 같았다

 . 금숙의 남편을 얼르고 달래며 막내라 철이 없어 그렇지 잘 맞춰주면 야무지고 싹싹한 아이라는 칭찬도 뺴놓칠 않았다. 조금만 맞춰주면 입 안의 혀 같은 금숙을 감싸줄줄도 모르는, 덩치만 크고 한없이 귀가 얇은 바보를 살살 구슬렸다.

  명숙의 지극 정성에 보답이라도 하듯 잠깐 애쓰는 것처럼 보이던 바람둥이의 딴 살림이 발각 되던날 금숙이 눈에 불을 켜고 찾아낸 것은 술집년을 끼고 있던 커다란 등짝이었다. 깨진 술병을 휘두르던 금숙은 반 미치광이나 다름없었다. 그동안 애써 참느라 숨겨 놓았던 실력과 성질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년 놈들…너 죽고 나 죽자며 덤비는 것으로 1년도 채우지 못한 금숙의 신혼은 갈기갈기 찢어진 상처뿐이었다. 영식의 빈 자리가 메꿔질 무렵 걸핏하면 싸움질에 도망을 일삼던 금숙의 마지막이라는 소리는 늘 불안한 가시방석 같았다.

  어렵게 키워 놓은 자식들이 잘 살아 준다면야 얼마나 좋을까마는 그런 소박한 바람도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어미의 사나운 팔자를 빼 닮는 것이 아닌가 싶어 눈물과 한숨이 끊이질 않았다

 . 온 몸이 멍으로 얼룩진 채 일찌감치 헤어짐을 경험한 금숙의 악몽 같은 신혼은 그렇게 끝이 났다. 짧은 시간 동안의 치가 떨릴 만큼 구차하고 치욕스런 악연이었다.

 

  경숙이 마지막 셋방살이를 하던 시절, 간혹 한 번씩 마주치던 고물상 집 총각은 작은 키에 볼품은 없지만 성실하다는 소문이 온 동네에 자자했다. 쪽마루에 밥상을 펴 놓은채 늘 영어 테이프를 듣거나 공부하는 모습이 전부였다

 . 어쩌다 경숙과 눈이 마주치는 날에는 수줍은 새색시처럼 귀 밑까지 벌개져서는 오히려 이 쪽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고물상을 하는 아버지 밑에서 억척스럽고 착실하게 공부에만 매달리는 모습이 무척 보기 좋았다. 총각의 어머니가 데리고 들어온 팔불출 형이 있었지만 어차피 다른 핏줄이다 보니 따지고 보면 그 총각이 장남이었다

 . 개천에서 용 났다는 소문이 떠돌만큼 일류대학의 영문과에 재학 중이던 총각은 결코 오만하지도 건방을 떨지도 않는 겸손 덩어리였다. 그의 모친은 새벽이면 물 한대접 떠놓고 북쪽을 향하여 수 없이 남묘호랑계교를 외쳤다. 자식을 위한 지극정성에 손이 닳도록 엎드려 빌었다

 . 정성을 쏟는 만큼 한눈 파는 일 없이 자식도 올바르게 자라 주는 것 같아 문득 명숙네 생각이 떠올랐다. 숨겨진 사랑은 있을지 모르겠으나 자식을 향한 성의나 관심도 없어 보이는 무덤덤함에 어느 자식 하나 순탄하질 않았다.

  제각기 가시 돋힌 성격에다 불만 덩어리에 저 하나 밖에 모르는 이기심으로 똘똘 뭉쳤다. 그 중 온순하고 사람 좋아보이는 것은 정숙 하나였는데 죽은 아비의 성격 그대로였다. 어느 날인가 빨래를 널던 경숙의 눈에 쭈뼛거리는 총각의 모습이 보였다. 솔깃하는 마음에 다시 돌아보니 저…하며 아주 어렵게 말을 건넸다.

  평소에 관심이 있던 터라 속마음은 그게 아니면서도 무슨 일이냐며 차갑게 물었다. 상대방의 접근을 막는 방법으로 차디찬 표정 짓는거 하며 쌀쌀맞은 말투는 경숙의 주특기였다

 . 뒷머리를 긁적이던 총각은 서늘한 한마디에 돌아서는가 싶더니 다시 되돌아와서는 점잖은 말투로 간곡히 얘기했다. “저…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가까이서 보니 작은 눈도 웃고 낮은 코도 웃고, 입도 웃는 듯 선하디 선한 인상이었다

 . 얼핏 훔쳐 보았을 때처럼 공부에만 열중하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졸업생의 마지막 축제이다 보니 혼자 가기도 뭐하고 시간이 허락된다면 꼭 같이 가자는 정중한 부탁을 해왔다

 . 잠시 머리를 굴리던 경숙은 튕겨, 말어를 변덕 부리다가 못 갈것도 없다 싶어 부탁을 수락하자 총각의 입이 귀까지 뻘개지며 웃는데 얼굴이 온통 붉은색이었다.

  축제 날, 새로 장만한 미색 투피스 차림의 그녀 모습은 단아하고 우아한 것이 한 떨기 백합처럼 청초해 보였다. 흘끔거리며 남의 눈을 의식하던 작은 키의 총각은 축제의 연인들이 그러하듯이 경숙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는 대롱대롱 매달렸다

 . 남이 볼세라 온 몸이 화끈거리던 경숙은 그 팔을 뿌리치며 서둘러 자리를 떴다. 무슨 큰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슬슬 눈치만 보며 간격을 두고 따라오던 총각은 갑자기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팔을 덥석 잡아 끌었다. 순간 인상에서 풍기던 웃는 얼굴은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린 채 분노에 가득찬 모습만 보였다. “사람 맘을 너무 몰라 주시는군요. 얼마나 오랜 시간동안 꿈꾸며 벼르던 일이었는데…” 그 한 마디는 마치 한 맺힌 절규에 가까웠다.

  그가 벼르던 일이 축제에 동행하자는 부탁이었는지 아니면 어깨에 팔을 두르기 위함이었는지를 생각하다 보니 그 자리가 몹시 불편했다. 경숙이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던 그의 눈가에는 절망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 “그만 가요…”조금 쯤 틈을 보이는 경숙의 한 마디에 용기를 얻었는지 총각이 씨익 웃으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러면서 대뜸 경숙의 가장 숨기고 싶은 가족사를 낱낱이 파고 들었다. 아버지는 언제 돌아가셨느냐를 시작으로 시집 간 언니가 둘에, 집 나간 남동생이 있다는 것 까지를 제 입으로 다 토해냈다. 날라리 금숙이 시집간지 채 1년도 못되어 쫑 났다는 것까지 아는 것으로 보아 뒷조사를 했거나 아니면 눈물 겹도록 지대한 관심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는 노릇이었다.

  혼자 주절주절 외운 것 고대로를 연습하듯 한참을 얘기하던 총각이 취조하는 말투로 물었다. “근데.. 학교는 어디 나오신 거에요…?” 경숙의 집안 일을 손바닥 들여다보는 것처럼 소상히 알고 있으면서 어째 모르는 일이 다 있는건지 아님 알고 있는 것을 재차 확인하려는 건지 기분이 상한탓에 대꾸도 하고 싶질 않았다

 . “저기… 학교요… 학교…” 순간 속으로 무슨 이런 개자식이 다 있나 싶어 화가 치밀어 소리를 질렀다. “유치원 중퇴했어요… 왜요? 도대체 뭐가 궁금한 건데요...?” 총각은 잠시 움찍하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다시 말을 했다. “우와… 그 시절에 유치원도 다닐 정도였으면 어려서 집안이 부유 했었나 봐요… 어쩐지 달라 보여서요…” 농담인지 진담인지 그것 조차도 구별 못하는 인간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가 않아 혼자 버스에 성큼 오르자 강아지처럼 쫄랑쫄랑 올라탔다.

  이런 질경이가 다 있나 싶게 살 살 또 묻기 시작하는데 이번에는 대상이 오로지 경숙 하나였다. 한밤중에 동사무소 호구조사 나온 것도 아니고 왜 그리고 궁금한 것이 많은 청춘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긴 변변한 연애도 한번 못해본 주제에 쓸데없는 나이만 먹었으니 그런 것이 상대에 대한 관심인지 짝사랑인지 알 턱이 없었다.

  동창회 같은데도 나가느냐 묻는 꼴로 보아 이제껏 다 알고 있으면서 장난 치는 것으로 느껴졌다. 경숙의 휘황 찬란했던 여고 시절을 캐봐야 아무런 거리낌도, 부끄러울 것도 없었으나 그 놈의 여고 졸업이라는 간판이 늘 쪽팔렸다

 . 그러면서 속으로는 먹고 살기도 바빠 죽겠는데 동창은 무슨 얼어 죽을 놈의 동창회냐며 혼자 쓸쓸하게 웃었다. 가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았지만 대학도 못 간 자존심이 그녀를 늘 괴롭혔다. 물론 먹고 살기 바빠 숨가쁘게 앞만 보고 달린것도 숨길 수 없는 현실이었다.

  남의 속을 알리 없는 총각은 한 번도 나가 보지 못한 동창회의 이름이 뭐냐며 끈질기게 또 물었다. 문득 언젠가 타보았던 기차안의 홍익회가 떠올라 ‘홍익회요..’ 하고는 자신 없이 말했다. 이럴 대 아비의 직업란에 바이올린이라고 적었던 순간 만큼 난처한 마음에 처음으로 축제고 나발이고 괜히 따라 나섰구나 하는 후회가 생겼다.

  상대는 가뭄에 콩 나듯이 한 번씩 대꾸해 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인지 연신 싱글벙글인 채로 “아.. 예… 홍익회요… 아주 깊은 뜻의 모임이군요… 인간을 이롭게 하자는 뭐 그런 취지이지요…?” 도무지 그 속을 알 수 없는 경숙은 더 대꾸해 봐야 낭패일 것 같아 궁색하게 얼버무렸다. “아니에요. 그냥… 그냥 지은거에요.” 마냥 환하게 웃던 총각의 얼굴이 불 빛에 반짝 빛났다.

  집 앞에서 헤어지며 다시 순한 양처럼 하는 말이 당분간 볼 수 없을꺼라는 여운을 남겼다. 그 당분간이라는 말 뜻을 의아해하던 경숙은 못된 짓 하다 들킨 사람처럼 심장이 두근거림을 느꼈다. 처음으로 가 보았던 대학교정도 벅찼고 남자의 팔이 어깨를 들렀을때의 설레임에 가슴 떨렸다. 늦은 시간에 나란히 같은 문으로 들어서기가 뭐했던지 경숙을 먼저 들여보낸 총각이 골목 끝을 몇 번이나 서성이던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그 뒤, 행여 마주칠까 하는 기대 속에 안 채의 쪽마루를 기웃거렸으나 졸업 후 바로 군대를 갔다는 총각의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었다. 혼자만의 기억 속으로 꼭 꼭 숨어버린 아지랑이 같은 존재였다.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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