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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일반/역사
인연, 악연으로 마침표...
작가 : Number3
작품등록일 : 2019.10.28

오남매의 파란만장 인생 스토리... 악연으로 끝나다...!

 
인연, 악연으로 마침표...4화
작성일 : 19-10-28 19:43     조회 : 238     추천 : 0     분량 : 19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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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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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멋 내는데 있어서만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활짝 핀 목련보다 더 화사한 정숙은 행여 누가 따라 오기라도 할세라 두어 정거장 쯤에서 버스를 내려 한참을 걷는 미련을 떨었다. 생김새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녀의 거쳐가 공장이라는 사실은 숨기고 싶을 만큼 부끄러운 현실이었다. 어쩌다 공장의 총각들과 눈이라도 마주치는 날에는 치를 떨며 큰 눈을 휘번덕거렸다. 허우대만 멀쩡한 채 속 없는 아비의 입장에서야 팔등신 같은 딸들이 공장 총각들에게 크나큰 자랑거리 이겠지만 명숙네 자매들은 부딪치는 눈길 조차도 치욕이었다.

 공장에서의 탈출을 수 없이 꿈 꿨으나 아무에게든 시집이라도 얼른 가버려 그 지긋지긋한 곳을 떠나는 방법 밖에는 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다.

 소심한 성격 그대로 자기 주장도 없이 있는 듯 없는 듯 자라던 영식이 온갖 말썽을 부리며 구박 덩어리로 전락하는가 싶더니 하루가 멀다 하고 혼찌검을 당하는 것이 안쓰러울 정도였다. 아무리 귀한 3대 독자라지만 명숙네의 입에서는 말끝마다 누가 버릇 들여 놨는지 참 드럽게 키워놨다며 뻔히 누군지 다 아는 그 누군가를 원망했다.

 지 아비가 경비라는 사실을 잊었는지 담벼락을 넘다 걸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고 한밤중이면 주인의 회전 의자에 몸을 맡긴채 코를 막고는 아무데나 수화기를 돌리며 거드름을 피웠다. “아, 요뽀세요. 거기 혹시 공동묘지 아닌가요? 이런 이런, 제가 눈이 어두워 번호를 잘못 돌렸는데 그럼 중국 집인가 보군요. 여긴 공동묘지인데 짜장면 열 그릇만 갔다 주세요오.”

 무엇이 그리도 신나고 좋은지 날마다 이어지는 장난 전화에 욕을 바가지로 먹으면서도 혼자 키득거리는 모습이 마치 저능아처럼 보였다. 보다 못한 경숙이 그만 좀 하라는 소리로 애를 잡는가 싶더니 호기심이 발동한 나머지 더한 장난을 치게 되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영식을 닦달하던 압력이 경숙에게는 일사천리로 통과되었다.

 오히려 더 못된 장난을 일삼는 경숙의 중계방송을 들으며 온 집안 식구들이 박장대소를 했다. 장난을 치면서도 상대가 조금이라도 대차게 나온다 싶으면 금방 잡으러 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벌벌 떨던 영식과는 달리 더 악을 쓰며 욕을 퍼붓는 경숙에게 어미는 무섭고 못된 년이라는 욕을 퍼부었다. “방귀 뀐 년이 성낸다고 되레 지가 껑거리 솟음이네. 그러다 정말 잡혀가면 어쩌려고.” 입으로는 질긴년 독한년 소리를 하면서도 누구의 손도 빌리지 않고 완벽하게 장난의 끝을 마무리 하는 것이 신기했던지 더 이상의 군소리를 하지 않았다.

 못된 장난질도 무슨 칭찬받을 일이라고 역시 우리 셋째 딸이라는 가장 듣기 싫어하는 소리로 인해 재수없다는 생각이 들어 그 김에 그만 두긴 했으나 쏟아져 나온 요금으로 인해 깨갱할 수 밖에 없었다.

 아직 어린 탓인지 별 말썽 없이 커주는 금숙이 가장 살갑고 싹싹한 존재였는데 조금이나마 숨통 트인 현실에서 응석도 부리며 맘껏 보호받는 대상이었다. 명숙네의 완전 판박이인 금숙은 얌전한 생김새와는 달리 암팡지고 여우스러운 것이 명숙의 성격과 가장 가까웠는데 나름대로의 애교 찰찰 넘치는 막내딸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어느날 지 손바닥 만한 병아리 두 마리를 사들고 온 금숙은 금방이라도 꼴까닥 넘어갈 것 같은 여린 목숨 앞에서 대성 통곡을 하며 안절부절이었다. 2대 독자로 외롭게 자란 아비는 명숙네에게서 느낄 수 없는 잔 정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사람이든 짐승이든, 심지어는 풀 한 포기 조차도 정성으로 보살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고질병 같은 술주정으로 인해 자식들에게 인심을 잃고 무시당하는 신세이긴 하지만 그 섬세하고 따뜻한 속정을 아무도 헤아려 주지 못한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고슴도치도 지 새끼는 귀하다는데 홀홀 단신으로 외롭게 자란 처지이다 보니 자식에 대한 애착심이야 오죽할까 싶었지만 늘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가로막고 있었다.

 하찮은 병아리 새끼조차도 죽음으로 인해 어린 금숙에게 상처를 줄까 두려웠던지 온갖 정성을 쏟아부으며 키워 놨는데 기운이 넘치는 수탉들은 펄떡펄떡 날아다니며 기를 쓰고 금숙을 쫓아 다녔다. 꼬꼬댁 꼬꼬 소리를 목청껏 내질러 겁을 주기도 하고 주위를 맴돌며 쪼아대는 통에 금숙이 기겁을 했다.

 배은 망덕도 유분수지 주인을 만만히 보았던 탓일까 금숙은 닭에게 쫓기며 늘 울상이었다. 아침이면 어미의 치맛자락 붙들고 숨어 나가는 것도 모자라 집으로 돌아올 때쯤 이면 담벼락에 붙어 아주 작은 소리로 엄마 하고 불렀으나 금숙의 목소리만 들려도 두 놈이 기세등등하여 나타나는 통에 죽을 맛이었다. “그깟놈의 닭, 새끼가 잡아 먹는다니. 무섭긴 뭐가 무서워.”

  말을 그리 하면서도 뒷 꽁무니에 매달려 다니는 막내의 재롱이 한없이 흐뭇했다. 어김없이 담벼락에 기대어 엄마를 부르던 어느날인가 금숙이 마당을 기웃거리며 살금 살금 들어왔으나 여지없이 나타나 쪼아댈 그 놈의 우렁찬 꼬꼬댁 소리가 들리질 않았다.

 극성떨며 쫓아다니던 닭 대신에 기분 좋은 냄새가 코를 찔렀는데 명숙네가 응큼하게 웃으며 나타나서는 대단한 일을 벌인 것 처럼말했다.

 “얘, 이제 숨어 다니지 않아도 돼.”

 무슨 말인지 몰랐던 금숙은 맛있는 냄새에 현혹되어 다른 곳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것들 내가 삶아 버렸다. 다 컸으면 잡아 먹어야지 언제까지 키우냐. 허구헌날 쫓겨 다니는 꼴도 과관이구.”

 아무리 닭에게 쪼이며 쫓겨다니는 신세라지만 제 손으로 처음 사들고와 그만큼 키우는데 미운정도 들었던 터라 금숙이 목놓아 울며 소리 쳤다. “엄만 사람도 아니야. 어떻게 그걸 잡아 먹을 수가 있어. 우리도 키워서 어느날 잡아먹겠다.”

  졸지에 정성을 쏟던 말 상대 동무를 잃어버린 남편은 허전한 마음으로 마당을 바라보며 귀한 안주를 앞에 두고도 그 좋아하는 술을 찾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두 놈이 푸드덕거리며 힘차게 꼬꼬댁 꼬꼬를 외칠것만 같아 왠지 허전했다.

 금숙이 솥단지를 쏟아 버린다며 사납게 굴었으나 명숙네는 그 따위 말도 안되는 소리 그만 하고 어여 먹기나 하라며 숟가락을 손에 쥐어 주었다. “내 덕에 이제 숨어 다니지 않아도 될텐데 뭐가 서러워 통곡이냐. 니 애미 죽었니… 아침에 쫓겨 나가 저녁엔 숨어 들어오고. 그게 어디 사람 할 짓이냐 그깟 닭 새끼 때문에.”

 자식의 슬픔이야 안중에도 없는 듯 닭 잡아먹다 죽은 귀신이라도 씌었던지 명숙네는 게걸스럽게 솥 바닥까지 박박 긁으며 보기에도 민망할 만큼 궁상을 떨었다. 비단 닭 뿐만 아니라 아무리 생각해도 매사에 한창 거꾸로 돌아가는 집안 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아기자기하게 가꾸며 키우는 것을 좋아하는 남편에 비해 늘 가로뛰고 세로뛰며 극성에 억척스러운 명숙네를 보면 넉넉하고 좋은 환경에서 자란 어린 시절이 무색할 만큼 덕지덕지 궁상이었다. 그런 어미의 성격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이 바로 경숙이었으니 고집부리며 억척 떨때는 아무도 그 지랄맞은 성질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야무진 손재주까지 빼다 박았는지 꿍쳐 뜨개질한 모자와 목도리를 두른 경숙이 합격자 명단을 보고 오던 날 당연한 결과에 무덤덤한 그녀와는 달리 아비의 흥분된 목청이 하늘을 찔렀다

 . “암, 역시 우리 셋째 딸이 최고야 최고. 선도 안보고 데려 간다는 우리 셋째 딸이 최고지.

 ” 경숙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 중의 하나인 그 놈의 선도 안보고 데려 간다는 소리에 눈살을 찌뿌렸다. 혼자 흐뭇해 공장 마당을 서성이던 아비는 누구든 붙잡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바쁘게 움직이는 공장 총각들은 경비원 딸들의 미모나 한번씩 흘금거릴줄 알았지 합격 따위야 아무 관심도 없었다.

  그야말로 혼자 속 끓이며 쑈를 하다시피 실업계 원서를 내는 것을 보며 의아해 하던 친구들을 따돌리던 기억이 떠올라 혼자 피식 웃었다. “왜 실업계 가는데, 대학 안갈거야?”

  혜원이 안타까워 물었으나 대학 가기 위해 인문계 원서를 넣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라 혼자 얼버무렸다. 누가 가지 말라는 말 한마디 했던 것은 아니지만 감히 가서는 안될 것 같은 마음에 그냥 혼자 결정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실업계 가도 요샌 진학반이 다 있어서 대학 가는데 아무 지장이 없다드라. 너도 같이 갈래?

 ” 난데없는 진학 문제에 있어 애꿎은 혜원을 끌어들이려 무단이도 애썼으나 그 애는 엄마한테 맞아죽기 싫으면 조용히 인문계 원서 내야한다는 말만 전했다. 그렇게 해서 절친했던 멤버들이 뿔뿔히 흩어지게 되었는데 서운함과 배신감이 교차되는 시기였다.

 여고생이 되던 첫 날, 입학 성적이 일등이라며 구두로 반장을 임명하는 담임에게 경숙은 끈질긴 실랑이 끝의 울먹임으로 사양을 했다. 그 말을 전해 들은 명숙네의 입에서는 그까짓것 해보지 그랬느냐며 얼토당토 않은 욕심을 부렸다.

 그나마 아주 조금 살만했기 때문인지 육성회비가 나오기 무섭게 어차피 낼 것 얼른내라며 득달 같이 챙겨주었다. 몇 푼 안되는 월사금이 없어 수시로 쫓겨나던 예전의 코흘리개 경숙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가정 환경 조사서의 빈칸을 역시나 제 멋대로 써내려 갔는데 아비의 직업이 사업으로 둔갑을 했으며 억척스럽고 극성스러운 어미를 현모양처라고 적어주었다.

  어느것 하나 꿀릴것이 없어 보이는 경숙은 갓 부임해 온 신참내기 담임의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 했다. 심지어 어머니께 집안일 할 처녀를 알아봐 줄수 있느냐는 부탁을 받았는데 그 말을 당돌하게 받아치는 경숙의 입에서는 엄마도 식모를 구하는 중인데 사람이 없어 속상하다는 거짓말을 능숙하게 늘어 놓았다. 그러면서 친구들 집에 가서 보았던 식모에 한이 맺혔는지 가당치도 않은 거짓말에 스스로 놀랬다.눈도 깜짝 안하며 둘러대는 자신이 영악스럽기도 했으나 어린 시절의 초라하고 궁색한 기억들을 최대한 멀리 던져버리고 싶었다. 식모는 고사하고 이른 새벽에 어미 혼자 많은 양의 점심을 준비하는 것이 마음에 걸려 숟가락으로 감자라도 벅벅 긁어주고 등교하는 날이면 곤색 교복 소매에 감자분이 허옇게 눈처럼 내려 있었다

 . 말도 안되는 소리로 명숙네를 살살 구슬려 걸스카웃에 입단하게 되었는데 학교앞의 삼거리에서 교통정리라도 하는 날에는 인근 학교 남학생들의 휘파람소리며 날아오는 종이 비행기에 몹쓸콧대만 더 높아졌다. 오래전 테니스에 빠져 있던 명숙을 떠올리며 그것이 너무 부러웠던 나머지 정구채와 흰 가방을 손에 넣기 무섭게 어깨에 둘러메고는 있는 폼 없는 폼 다 재고 다녔다.

 심지어는 고적대에 들어가고 싶어 안달을 떨며 공갈에 심통으로 어미를 볶아대더니 그 짓도 잠시, 교련 검열을 받을때는 소대장이 되어 구령도 힘차게 외쳤다.

 무엇이든 마음 먹은 일이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치우고 말아야 직성이 풀리는 못된 성격이었으니 사흘이 멀다하고 명숙네와 부딪치는 일이 벌어졌다.

 “에구 저 고집통머리 하구는. 누구 닮아 저모냥인지 날 갔다 팔아써라. 말만 하면 돈이 술술 나온다니.”

 부탁하는 주제에 그런 소릴들으면 나 죽었습니다 하고 입 다무는것이 아니라 더 껑거리 솟음을 하며 닥치는대로 던져대니 낯 빛이 허옇게 변하며 뒤로 물서러는 것은 늘 명숙네였다.

 기껏해야 두어 끼 굶고 심통부리면 지겨워서라도 오케이 싸인이 떨어지는 것을 이용하다 보니 수시로 밥통 내던지는 시위를 서슴지 않았는데 어미의 가장 큰 약점이 새끼가 굶는 일이었다.

 한 끼쯤 굶는다고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건만 밥 굶는 것을 가장 무서워하며 벌 벌 떨다시피하던 명숙네는 내팽개친 변도를 들고 목이 터져라 부르며 쫒아와서는 용돈이라도 찔러 주었다. 매점을 들락거리며 잔뜩 먹고 히히덕거리던 경숙은 집에 돌아갈 때쯤 다시 주둥이가 댓발로 나와 문을 세개 미는 것으로 왔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때마다 눈치 슬슬 보던 명숙네는 말 없이 밥상을 밀어주며 요구조건도 함께 들어 주었다. 긴 한숨과 함께 쇠심줄 보다 질긴 년.. 하는 소리를 듣는 경숙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번졌다.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것 없이 마음 먹은대로 원하는 일은 원 없이 다 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그녀를 홀딱 뒤집어 놓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수학 시간에 안경너머의 눈이 빙빙 돌던 늙다리 선생은 다짜고짜 경숙을 일으켜 세우더니 냅다 뺨을 갈겨댔다. 번갈아 서너대를 때리고 나서야 지 멋대로 앉어..를 명령했으나 억울하고 분한 나머지 표독스럽게 눈을 흘기던 경숙은 한참을 서 있다가 그 자리를 뛰쳐나갔다. 무슨 달거리 하는 심술쟁이 노처녀도 아니고 지 기분 내키는대로 횡포를 일삼던 꼰대 선생에게 걸려든 것이 그야말로 왕재수 없는 날이었다. 밤새 분풀이를 어떻게 해줄까 머리짜내던 경숙은 다음 날, 등교하기 무섭게 늙다리를 찾아갔는데 건방이 뚝뚝 흐르는 말투로 당당하게 통보를 하고는 인사 따위도 생략한 채 휙 나가 버렸다.

 “저 이따 아버지가 오신대요. 어제 일로 선생님 뵙겠다고.”

  쉬는 시간마다 뽀르르 달려 가서 늙다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엿보았는데 안절부절 하는 모습이 가소로웠다. 꽤 늦은 시간임에도 퇴근을 못하고 있던 늙다리는 얼굴이 붉으락거리며 연신 땀을 닦아내고 있었다. 그 틈을 놓칠세라 교무실로 들어간 경숙은 놀리듯이 인심 쓰는 말투로 툭 내던졌다. “선생님, 아버지가 사업 때문에 오늘은 바빠서 못 오시나봐요. 내일은 꼭 오시라고 다시 말씀 드릴게요.” 하며 ‘꼭’ 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순간 경숙의 손을 움켜잡은 늙다리는 처절하리 만큼 불쌍한 표정이 되어 땀을 비오듯 흘리며 사정을 했다. “경숙아, 어젠 내 정신이 아니었나 보다. 앞으로 내가 너한테 어떻게 해주었으면 좋겠니? 관심을 가지고 대해줄까? 아니면 무조건 모른채 하며 무관심으로 대해줄까?”

 그 말을 듣는 순간, 경숙의 커다란 눈이 반짝 빛나며 더욱 커졌다. 아니, 이게 웬 떡이람 하며 속으로 승리의 쾌재를 부르는데 예상치도 않았던 결과에 웃음이 저절로 실실 나왔다

 . 잠시 후, 고개를 푹 숙인채로 깊은 생각에 빠져있던 늙다리가 다시 말을 꺼냈다.

 “집에 가거든 아버님이 안오셔도 된다고 잘 말씀 드리련?” 기분 내키는대로 손 한번 잘못 날렸다가 한참이나 아래뻘한테 된통 당하는 늙다리의 모습이 어찌나 고소하던지 그 벅찬 감정을 뭐라 표현 할 수 없을 정도로 기분 좋았다.

 기회는 이따대 싶어 더 바짝 조여볼까 궁리를 하다가 그래도 명색이 어느 집 가장일텐데 관두자 관둬 하는 너그러운 마음이 들어 경숙이 매듭을 지었다. 그 날 이후, 늙다리는 마주치기만 하면 마냥 이뻐 죽겠다는 듯이 볼을 꼬집기도 하고 팔을 비틀며 장난질을 했다.

  어찌보면 어느 특정인을 대상으로 공연히 화풀이 하던 못된 선생의 손찌검을 고쳐 놓은 결과가 되었으니 아이들의 환호성에 다시 한번 우쭐해 질 수밖에 없었다.

  머리 규정이 엄격하기로 소문난 경숙의 학교는 두 갈래의 간격을 붙이듯이 좁혀서 네 번 땋은 후, 그 밑을 한 뼘 정도로 남겨야 하는 까다로운 규칙이었다. 어느 날 교실에 느닷없이 들이닥친 선도부는 애교 머리를 비롯해 규정에 어긋날 날라리들을 콕콕 찍었다.

  갑자기 경숙의 앞에 서서 머뭇거리던 친한 친구인 종미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경숙을 지목했다. 몇가닥 내려온 애교머리 죄명으로 날라리 공주님들과 학교 대자보에 이름이 걸린 그녀의 고달픈 생활이 시작 되었다.

 아침 일찍 등교하여 운동장 청소를 시작으로 방과후에는 학생부에 들러 반성문 검사를 받는 곤욕스런 나날이었다. 무슨 일에든 성실 자체였던터라 조금 더 일찍 등교하는 것 이외는 다른 날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대부분 매번 걸린 놈들이 걸렸던 터라 성의 없는 반성문에도, 형식적인 농땡이 청소에도 학생부의 노총각 선생님은 아무런 관심도 없이 무덤덤 했다.그런 상황이다보니 벌 청소에도 열심인 경숙을 볼 때마다 안쓰러운 마음이 드는 것 또한 어쩔 수 없었다. 반성문을 내밀던 경숙에게 규정을 어긴 이유야 알겠지만 또 무슨일 저지르는건 아니겠지 하는 의문의 눈초리를 보내던 노총각 선생님이 큰 소리로 웃었다.

 행실이 엉망인 놈들과 엮여 벌 받는게 무슨 자랑거리이냐고 물었으나 경숙의 깊은 속을 헤아릴 수 없었다. 침을 퉤 퉤거리며 인상도 드러운 재수땡이한테 아침, 저녁 문안도 지겨운데 쪽까지 팔려 죽겠다는 고정 날라리들의 불만에 경숙이 비꼬듯 한마디 했다.

 “넌 아직 팔릴 쪽이 남아있기나 한거니? 그 호랑이도 니들 낯짝 안보면 속이 후련할꺼다. 조심들 해. 지난번에 2반 공주님들 걸렸다 반 죽었다드라. 지 엄마까지 와서 싹싹 빌고 난리도 아니었대.” 제 할 일 다하며 뒤집어 털어도 먼지 한 톨 안나올 것 같은 경숙에게는 감히 날라리들의 시비도 먹히질 않았다. 놀땐 또 반미치광이가 되어 확실히 놀아주는 의리의 여장부였으니 그들에겐 살가운 존재였다.

 안개가 자욱히 교정을 뒤엎던 날, 운동장에는 비발디의 사계가 경쾌하게 흐르는 가운데 쓰레기를 줍던 경숙의 눈에 저만치 학생부 선생님이 보였다. 무섭기로 소문난 인상과는 달리 인자하게 웃으며 “경숙이 수고가 많구나…” 하는데 순간 안개속의 노총각 선생님이 어찌나 멋있고 낭만적이었던지 그 선생님을 좋아하게 될 것만 같은 설레임에 소녀의 가슴이 콩닥거렸다.

 큐피드의 화살에 꽂힌 경숙은 수시로 자습서에 참고서 산다는 핑계로 삥땅을 쳐서는 학생부에 프리지아를 조달했다. 마지막 반성문을 검사 받던 날에는 용돈을 박박 긁어 3족 양말 셋트와 밤새 썼다 지웠다를 수십번도 더 했던 비밀의 고백을 끼워 넣었다.

  벌 청소 이후, 운동장이나 복도에서 마주치면 경숙의 머리를 말없이 쓰다듬으며 얼굴이 붉어지던 노총각 선생님 또한 그녀와 같은 심정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 제발 그랬으면 하는 경숙의 커다란 바램이며 야무진 착각이었다.

  그 어느 누구에게도 털어 놓지 못한 채 가슴 속 깊이 꼭 꼭 숨겨둔 비밀 얘기 같은거… 반성문에 얽힌 그 분은 소문처럼 악랄하고 무서운 호랑이 선생님이 결코 아니었다.

 여고 마지막 여름방학이 되어 스카우트의 봉사활동을 떠나던 날, 노총각 선생님과 나란히 앉은 경숙은 가슴이 터져 죽을 것만 같았다. 두런두런 속삭이는 나지막한 음성에 귀가 멀었고 몰래 훔쳐보던 자상하고 따뜻한 모습에서는 안개 낀 교정의 인자한 웃음이 클로즈업되고 있었다. 농장에 텐트를 치다가도 경숙아…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면 씨익 웃으며 손가락으로 브이자를 만들어 보였다. 캠프 파이어때의 멋진 모습이며 소녀들을 위해 불러주던 불빛 아래서의 그윽한 음성은 또 하나의 소중한 메아리였다.

  달빛에 비춰진 달덩이만한 수박을 서리해 낫으로 쪼개어 먹던 원두막의 추억과 손에 손을 잡고 부르던 동구박 과수원길도 평생 가져갈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경숙의 졸업이 가까울 무렵 거처였던 공장의 부도로 인해 그동안 뼈빠지게 해먹인 밥값도 건지지 못한 채 알거지로 나앉을 지경에 다다랐다.

  명숙네는 몇날 몇일을 얼르고 달래며 협박 하다시피 명숙의 비자금을 뜯어냈는데 지하의 작은방 두개 꺼리 값이었다. 그나마 좋았던 시절은 바람따라 가버리고 다시 또 지긋지긋한 리어카 행렬의 이사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연탄 보일러의 연통을 따라 물이 뚝뚝 새는 작은방에 남자 둘이 기거를 했고 인색하리만큼 아주 살짝 햇빛이 스며드는 방에 다섯여자의 인생을 풀었다. 반쪽짜리 쪽문을 구부려 열면 바로 수도꼭지가 하나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는데 거기서 세 걸음 정도의 거리에 방문이 헐거운듯 삐그덕 거렸다. 부엌이 따로 없는 탓에 수도꼭지를 중심으로 살림을 즐비하게 늘어놓는 그림이 펼쳐졌다. 풍로 하나에 수도꼭지 하나인 부엌이었으나 기본적인 물과 불만 갖춰진 꼴이었다.

 운수회사 외동딸인 은영이 마구잡이로 경숙을 혼자 좋아하며 선물 공세를 퍼부었으나 경숙은 그애의 음탕한 눈빛이 싫어 눈길도 주질 않았다.

  제발 니네집 한번만 데려가 달라며 무작정 버스에 올라타고 쫓아 오는걸 따돌리느라 어찌나 애먹었던지 뭐 저런 질긴년이 다 있나 싶어 욕이 조절로 나왔다. 지하방을 들키는게 싫어 동네를 빙빙 돌며 무사히 따돌렸는가 했는데 이게 웬걸 목련이 두 그루 있다는 기억을 떠올렸던지 담너머의 하얀 솜뭉치만 보이면 경숙아, 경숙아… 동네가 떠나가도록 목청을 높였다

 . 실제로 주인집 앞마당에는 슬픔을 함박 머금은 목련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으니 맘먹고 덤비면 그깟 것쯤이야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었다. 자신의 이름을 목이 터져라 부르는 소리에 죄인처럼 숨죽이며 조바심을 내다가도 다시 또 욕이 바가지로 쏟아졌다

 . 저 미친년, 왜 몰래 쫓아와 지랄이야 지랄은… 혼자 되내이며 숨어 있는 처지가 한 없이 참담하고 한심했지만 개 같은 현실이었다. 딸년들 모두가 하나 같이 공장지대로 들락거리던 것을 숨막히도록 싫어 했으나 잠깐이나마 숨통이 트였던 그 시절이 그립기까지 했다.

  명숙아비는 다시 노가다판을 기웃거렸고 명숙네는 함바집에 기거하며 근근히 생활을 이어나갔다. 정숙이 찔끔찔끔 푼돈이나마 보태는데 비해 방을 얻느라 총재산을 뜯긴 명숙은 그런 자린고비가 따로 없었다.

  잠시, 한 순간 마음으로 여유부리던 고등학교 간판을 떼기가 무섭게 없는 집구석의 살림까지 강제로 떠맡게 된 경숙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두 동생을 건사했다.

  그것이 기특했던지 절인 무보다 더 짠 명숙이 용돈도 쥐어주었고 가끔씩 청계천으로 불러내어 냉면이나 돈까스를 사주었다. 메리포핀스나 사운드 오브 뮤직이라는 대작을 개봉과 동시에 보여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쇠심줄보다 질기고 우악스럽긴 해도 감성적인 경숙을 위해 르네쌍스라는 고전음악실을 알게 해준 것 역시 그녀였다.

  지분지분 거짓뿌렁이나 일삼으며 속빈 강정 같은 정숙과는 사뭇 다른 대우를 해주었다

 . 늘 그랬던 것처럼 금강제화에 들러 발에 꼭 맞는 구두를 사주는 날에는 그걸 신고도 갈 곳이 없다는 사실이 서글퍼 혼자 숨죽여 울었다. 개울가에서 검정 고무신을 떠내려 보낸 날의 아픈 기억 때문인지 동생들의 반듯한 신발을 사주는 것은 늘 명숙의 몫이었다.

  신데렐라의 유리구두가 어찌 그보다 편하고 귀할 수 있으랴 싶었다. 살림핑계로 야금야금 돈 뜯어내는 횟수를 늘려가던 경숙은 학창시절 참고서값 뻥튀기하던 기억을 되살려 연탄값이나 일년에 두 번이면 너끈히 해결되는 변소푸는 돈을 수시로 타내서는 동생들 변도에 쏟아부었다.

  저년은 툭하면 똥 푼다고 돈 뜯어다 변도에 쳐박는다며 우스개 소리를 하던 명숙네조차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 덕에 영식과 금숙의 점심 시간은 부잣집 아이들이나 맛볼 수 있는 호사를 누렸다. 어떤날은 김말이로, 또 어떤날은 귀하디 귀한 불고기를 노릇노릇 구워 보내기도 했다. 얇게 돌돌 말린 계란말이는 그 정성 만큼이나 입안에서 포슬포슬 녹아내렸다.

  혼식장려에 그나마 박자 맞추느라 조금 나아진 형편에서 명숙네가 싸주던 쌀 반에 보리가 반 섞인 귀퉁이의 터진 달걀 후라이와 뻘겋게 볶은 덴뿌라따위는 비교도 안될 정도였다. 데데한 제 어미를 닮지 않은 것이 천만 다행일 정도로 야문 손맛에 깔끔을 떨었다.

 

  착하고 성실한 신랑감을 인사 시킨뒤 약혼 하던날의 명숙은 자태고운 새색시 그 자체였다. 그런 모습까지도 너무 부러웠던 경숙은 언니의 약혼 때 처럼 머리를 틀어 올려도 보고 한갈래로 땋기도 하며 그야말로 도섭을 떨었다. 아무도 없을때면 약혼식 한복을 훔쳐 입고는 미인 대회의 수상자가 되어 숟가락을 마이크 삼아 줄줄이 당선소감을 읊었다.

  어떤날은 춘향이가 되어 벽을보며혼자 큰 절을 올리다가 금방 미스코리아로 둔갑해 아름다운 꽃 진선미..라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뒷받침해주는 환경만 허락한다면 미모로야 골백번도 더 자신이 있을 것 같은 허황된 꿈을 꾸었다.

  명숙의 함이 들어오던 날, 달걀을 한꾸러미 훔쳐낸 경숙과 금숙이 몰래 삶아서는 쪽문뒤에 쭈구리고 앉아 게 눈 감추듯이 해치웠는데 된통 체한 금숙이 밤새 똥물까지 토해내느라 결혼식에 얼굴도 내밀지 못했다. 달걀 구경 첨했는지 두 년이 몰래 훔쳐 먹더니 벌받아 싸다며 쌤통이라는 어미의 핀잔이 더럽고 치사했지만 큰 것 들에게만 차별을 두었던 결과이기도 했다.

 밑으로 내려갈수록 달걀 구경도 못한 처지이다 보니 그런 날 훔쳐서라도 실컷 먹어 보겠다던 욕심 앞에 병만 얻고 욕만 배터지게 먹은 꼴이 되었다.

  명숙의 신랑은 지방 부농의 장손이었는데 대학을 다니느라 상경하여 하숙하던 중 소개로 만난 사이였다. 부모보다 더 마음으로 의지하던 명숙이 시집가던 날, 오히려 경숙이 밤을새며 오만가지 생각을 하느라 잠까지 설쳤다.

 어떤 이유에서였는지는 모르겠으나 큰 언니를 상대로 심하게 대든 이후에 손바닥 만한 방에서 조차 서로 무시하며 거의 3년을 소 닭보듯 외면하던 일도 떠올랐고 수시로 불러내어 보여주던 극장구경이나 맛난 것들을 사주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 그런 생각을 하자니 시집간 언니가 더욱 그리운 마음에 수 없이 하얀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장씨 딸년들 중에서 유달리 도도하고 화사한 정숙은 생김새 만큼이나 수 많은 연분을 뿌리고 다녔다. 어느날은 귀신 대가리 같은 장발족을 거느리다가 금방 또 군인 아저씨로 바뀌는가 하면 순식간에 멀대 같은 총각으로 변하기 일쑤였다.

 한동안은 배우가 되겠다고 사방 팔방 기웃거리며 원서를 쳐 넣더니 눈물 찍, 콧물 찍 섞어가며 정신병자 방불케 하는 쌩 쑈를 보여주었다. 으레히 경숙이 연습 상대역 이었는데 눈물을 펑펑 흘리며 연기에 몰두하는 모습이 예쁜건 숨길수 없는 사실 이었다.

  하지만 반복되는 상황에 지친 나머지 ‘아이구 대가리는 텅텅 비어서 무슨 배우가 되겠다고…’ 하는 야유를 속으로 퍼붓는건 또한 잊지 않았다. 간섭하고 닦달하던 제 위의 언니가 없어서인지 행실이 나날이 멋대로였다

 . 하루가 멀다하는 외박에 경숙이 포기를 할 무렵, 급기야는 불러오는 배를 감추기 위해 꽤나 긴 시간을 숨어 지내느라 코빼기도 볼 수가 없었다. 그럴때마다 경숙이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듯 명숙에게 고자질의 편지를 보냈는데 떳떳하고 당당한 배가 남산만해진 명숙이 그것도 친정이랍시고 겸사겸사 상경을 했다.

 3대 독자인 영식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대학을 보내야 한다는 설득에 결국 명숙이 입학금을 내주는 조건으로 간신히 어미의 허락을 받아냈다. 기집애 같은 성격으로 조용하고 소심한 영식이 공부에만 약착 떨며 장학금까지 놓치지 않는 기특함을 보이자 명숙네는 세상을 다 얻은 것 처럼 마냥 기뻤다. 없는 형편에 대학이라고 보내놨으면 지까짓게 공부라도 열심히 해야지 어쩌겠느냐는 등의 마음에도 없는 공치사를 들으며 쌍코피가 터지도록 파고 들었다.

  반면에 별 말썽 없이 커가는 금숙이 공부와는 높은 담을 쌓은 것처럼 끝에서 주름 잡으며 달랑달랑 후미진 상고에 턱걸이로 고개를 디밀더니엉덩이 뿔난 못된 것들과 어울리며 파출소를 제집 처럼 드나들던 때에 남자 후리는데 있어서만은 재주가 비상한 정숙이 화려한 싱글의 막을 내렸다. 남자는 그녀가 근무하던 병원 옆의 작은 약방 약사였는데 조금만 부딪쳐도 시퍼렇게 멍자국을 남기던 정숙이 수시로 드나들며 어떤 꼬리를 살랑였는지 꽤 긴시간의 연애로 이어졌다.

  활달한 성품의 약사는 빠릿빠릿하고 잽싼 것이 수더분하고 느려터진 정숙과는 정반대의 성격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반반한 백치미에 반한 탓인지 오랜 기간의 연애 끝에 결혼에 골인 했는데 뒷배경의 정숙이 못지 않게 보잘 것 없는 집안이었다.

  소실 자식으로 천덕꾸러기 어린 시절을 겪으며 이를 악물고 공부한 탓에 그 자리까지 갈 수 있었다는 말에 가여운 느낌이 가시질 않았다. 집에서 숟가락 쪼가리 하나 해주지 못하는 것에 이를 갈던 정숙은 순한 성격에도 그 서운한 마음이 어찌나 오래 갔던지 한동안 연락을 끊고 지냈다. 하나 둘씩 언니들이 빠져 나가는 것을 허전해 하던 경숙은 스물 둘이라는 꽃다운 나이가 되어서야 지겨운 식모살이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착실한 그녀를 눈여겨 보던 2층의 주인집 아주머니가 단골 옷가게에 소개시켰는데 새로운 세상에 푹 빠져버린 것처럼 가리는 것 없이 정말 열심히 일했다.

 

  비번인 날의 명숙 아비는 곤드레 만드레가 되어 욕과 함께 술주정도 늘어갔다. 무슨 재주를 부리는건지 동네 구멍가게마다 외상을 깔아 놓았으며 그때마다 명숙네는 애꿎은 가게 주인과 대판 싸움을 벌였다. 한번만 더 저 인간 상대로 외상을 주면 신고하거나 불질러 버린다는 말도 안되는 소리의 엄포를 겁도 없이 늘어 놓았다.

 으레히 술주정의 시작은 예나 지금이나 시집가고 없는 딸들의 출석을 부르는 것으로 시작 되었는데 그때마다 명숙네는 재빠르게 튀어나가 숨기 일쑤였다. 이젠 어느 누구도 그 주정을 봐 줄 사람이 없었다. 꼴같지도 않은 살림을 던지고 깨부수느라 제 풀에 지쳐 구겨진채 잠이 들어서야 명숙네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났다.

  영식은 골방에서 이를 악물며 눈물로 공부하느라 거들떠 보지도 않았으며 금숙은 무슨 사무가 그리도 바쁜지 거의 나가 살다시피 했다 .가끔씩 삐죽 낯짝이라도 보이는 날엔 어디서 주웠는지 한창 유행하던 발바닥 모양의 상표를 오려다가 아무 옷에나 삐뚤삐뚤 되는대로 꼬메 붙이고 다녔다. 컷트한 노랑머리를 새꼬랑지모냥 고무줄로 칭칭 묶어 그 위에 벙거지 모자를 뒤집어 쓰는가 하면 알도 없는 검은 테를 눈에 걸친 것이 그야말로 혼자 보기 아까운 난리 부르스였다.

  팔뚝엔 담뱃불로 지직거린 영광의 자국이 춤을 추었고 다방에 취직을 한다고 한동안 깝죽거리는 동시에 무슨 짓을 벌렸는지 쉬쉬거리며 숨어 다녔다. 얌전하고 순하던 것이 어찌 저리 망가졌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그것은 어느 누구의 책임도 아니었다

 . 팩팩거리는 성격에 입바른 소리는 죄다 골라 하면서 상대가 누구든 상처주고 할퀴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타고난 천부적인 소질을 발휘하듯 어찌나 싸납게 구는지 말 건네기조차 두려운 존재였다.

 

  경숙이 그야말로 금값이라는 나이에 부케를 처음 받았다. 그것은 다음 타자로 결혼할 의미라고 하던가…쥐어진 뭐라도 있어야 받은 꽃값을 할텐데 아무런 꿈도 꿀 수 없는 처지인걸 뻔히 알다 보니 날아오는 꽃도 외면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고 1때부터 단짝이었던 성주는 무려 12년이라는 나이차를 거뜬히 극복하며 만난지 두 달만에 똑딱 결혼이라는 것을 해버렸다. 번갯불에 콩 볶는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후다닥 아무 거칠 것 없이 해버린 결혼이었다. 딸만 넷인 그 애네 자매들은 하나같이 손바닥만한 얼굴에 오똑오똑 인상이 이국적인 미인들이었다.

  거기다 집장사를 하며 수유리 일대를 한손에 움켜쥐고 있는 부자 아버지를 둔 덕에 대궐 같은 3층집에서 부족한 것 없이 자란 부러운 존재였다. 그 애의 집을 처음 갔던 날, 경숙은 놀라움으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채 떠억 버티고 있는 대문 앞에 서서 한참을 올려다보았다. 정말 이런곳에 사는 사람도 다 있구나 하는 마음에 털털거리던 덜렁이 그애가 얼마나 부러웠던지를 모른다. 3층의 공부방에 모여 반은 수다에 나머지 반은 시험공부라도 하는 날이면 이모라고 불리던 식모 언니가 잘 차려다 준 밥상에는 간장에 쫄여 쭉쭉 찢어놓은 장조림이 있었는데 경숙은 그런 반찬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그때 처음 알았다.

 눈치 보느라 선뜻 그 귀한 것을 집어먹지도 못하던 그때의 바보스러움이란…

 뭐든지 풍족하게 넘쳐나던 집 아이답게 아낌없이 베풀던 성주는 가장 따뜻하고 가까운 존재였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살면서도 지각을 도맡아 하며 눈꼽도 떼지 않은채 부스스 나타나곤 했지만 상대방 몰래 배려하며 감싸주던 그 애의 섬세한 성격에 주위가 늘 시끌 벅쩍이었다

 . 한가지 의문점이 있다면 딸들이 누구를 사귀던지 인사 시키는 동시에 곧바로 날 잡아 사위로 맞는 집안이란게 신기했다. 귀한 딸들의 의사존중이라는 명분아래 이리저리 재고 따지는 것이 전혀 없는 면에서 어찌보면 좋을수도, 또 어찌보면 무슨 똥값에 팔아 치우는 것 같은 찜찜한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명색이 집장사라 그런지 금 나와라와라 뚝딱, 은 나와라와라 뚝딱 보다 더 간단히 새끼 마누라의 여러 형제들에게까지 집 한 채씩 뚝 뚝 떼어주며 베포부리던 그애의 아버지 성격상 뭐든지 오케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처음 맞는 친구의 결혼식이다 보니 모두가 들뜨고 설레이는 것이 그야말로 환상 그 자체였다. 신부화장을 곱게한 성주는 인형 같은 모습에 일류배우 뺨 칠만큼 아름다웠다. 서른 넷이나 먹은 그애의 신랑은 경양식 집의 날라리 피아니스트였는데 지방에 사는 언니한테 놀러 갔다가 고속버스 안에서 불꽃 튄 사이라고 했다.

 그것도 모자라 여든 둘의 노모가 금방이라도 세상을 뜰 것만 같아 서둘러 결혼식을 치뤘다는 뒷 얘기가 나돌았다. 칼만 안들었지 날강도가 따로 없다는 수군거림 속에 신혼여행을 떠났던 성주로부터 최대한 예쁘게 치장하고 오라던 소리에 신혼집을 처음 방문하는 최초의 손님이 되었다. 경숙 하나만을 위하여 준비된 것들이 마냥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낯선 느낌을 떨칠수가 없었다. 그 애의 신랑이 어린 신부를 대신해 장을 보고 식탁을 꾸미며 집안 구석구석을 꼼꼼히 치장한 것이 한눈에 척 들어왔다

 .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던 새신랑을 보며 모든 것이 부러웠으나 컴컴한 동굴속에 혼자 갇혀버린 숨막히는 분위기였다. 지금까지 가깝게 지내던 친구가 이젠 더 이상 다가갈수 없는 존재가 되어 저만치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잠시 후, 또 하나의 방문객이 있었는데 결혼식날 커피 한잔으로 인심쓰듯 너무도 당당하게 부케를 가로채 갔던 장본인이었다. 부케를 받으면 그것을 신랑 친구들한테 다시 팔아야 하는데 나이도 많고 거의가 유부남인 능구렁이들은 꽃보다 더 여리고 어린 처녀들을 상대로 능청 떨며 진땀을 뺐다.

  성주의 신랑이 이시대의 마지막 총각으로 꽃을 살 사람이니 잘해 보라며 귀띔을 해주었던, 결혼식날 틈틈이 수도 없이 뒷주머니의 도끼빗을 꺼내 머리를 빗어 제끼던 가운데 가르마였다. 고개를 한번 휙 하고 젖힐때마다 양 옆으로 착 착 사이좋게 나뉘어지며 넘어가던 머리 꼴 하며 건들건들 뒷골목 똘마니 같은 불량스런 외모가 맘에 안들어 꽃사세요…소리도 하고 싶지 않았었다. 어색한 분위기에서 서로 눈을 피한채 불편한 점심을 먹고는 청평으로 드라이브나 가자는 새신랑의 말에 모두 일어섰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노모의 소리에 무슨 뜻인가 한참을 의아해하던 그때의 경숙은 참으로 단순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 덩어리였다. 속도위반이 어떤 일을 의미하는지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알았다. “아가, 홀몸도 아닌데 살살 조심해서 다녀야 하느니라…”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괜히 우울하고 서글퍼지는 것이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 순간을 놓칠세라 가운데 가르마가 아주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

 기분이 별로 안좋아 보이시네요.” 대꾸조차도 하고 싶지 않아 시큰둥한 그녀에게 가운데 가르마는 조금 불량스런 말투로 혼자 중얼거렸다.

 “날씨도 죽이게 좋은 데 뭐 바람이나 쐬러 가자는 거죠. 하 하 하” 그런 것 조차도 거슬린 경숙은 속으로 죽이긴 뭘 죽이냐 싶은 기분이 되어 시선을 창밖으로 고정시켰다

 . 불편함이 역력한 그녀에게 성주가 뒤돌아보며 눈을 찡끗 했다. 여전히 뚜 한 표정의 경숙이 민망했던지 새신랑까지 합세해서 거드는 것이 더욱 불편할 뿐이었다.

 “경숙씨 기분이 별로인가 보네. 우리 이쁜 색시가 바람쐬고 싶다고 해서요. 꼭 경숙씨 같이 가야 한다고 어찌나 우기던지…” 그제서야 대충 돌아가는 판을 알것만 같아 경숙이 혼자 오만가지 상상을 다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완전 계획적이네. 저 가운데 가르마랑 어찌 엮어보려나 본데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수작 말어라..하는 저 깊은 곳의 불만이 주먹처럼 치밀어 올랐다.

 결혼식 날 뒷풀이에서 새신랑이 했던 얘기까지 총동원 시켜가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빨리 장가가서 손주 안겨줘야 할 처지라던 홀어머니 외아들의 가운데 가르마 얘기였다. 홀어머니에 외아들이 무슨 전염병도 아니고 그런 모임을 작정하고 만든것도 아니면서 어찌 그리고 경숙의 주변에는 홀어머니에 외아들 천지였던지 그것 조차도 못마땅했다.

  어쩌다 잘 걸려들어 맘에 좀 든다 싶으면 명숙네나 명숙이 쌍심지 켜고 뜯어 말리던 악조건이었다. 말 끝마다 우리 이쁜 색시라고 노래를 부르던 새신랑이 경숙씨 모시고 보트나 타고 오라며 가운데 가르마를 부추겼다. 서슴없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무엇엔가 홀린 것처럼 엉겁결에 일어서는데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익숙하게 들어왔던 그런 느낌이었다.

  이런, 뭔가에 홀려도 단단히 홀렸구나 싶었지만 피는 못 속인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과연 주정뱅이 장씨 집안의 셋째딸 다웠다. 연거푸 마셔댄 그 놈의 소주 몇 잔이 사람 마음을 간사하게 흔들어 놓는 것이 그 순간, 과히 싫지가 않았다.

 보트에 몸을 맡기자 물도 무섭고 사람도 무서운 마음에 이대로 빠져죽는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섰다. 가운데 가르마는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입이 귀까지 걸쳐지며 크게 하 하 하 웃었다

 . 물가를 벗어난 배가 잠시 기우뚱 거리는가 싶었고 노를 젓는 가운데 가르마의 시선이 영 심상치가 않았다. 술김에 괜히 따라 나섰구나 하는 불안한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것처럼 그가 “왜, 무서워서요?” 하며 제법 심각하게 물었다.

  올때와는 달리 불량끼라곤 전혀 느낄 수 없는 진심으로 걱정스런 말투였다.

 “무섭긴요. 아무렇지도 않으니 신경끄세요…” 공갈치며 새침떠는 그녀에게 “제가요. 물이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누가 언제 무섭다고 했나요?” 말투가 아까보다 훨씬 더 곱지 않다는 것을 그녀 스스로 인정하면서 쌍꺼풀진 커다란 눈을 부라리는데 가운데 가르마의 중얼거림이 속삭임처럼 들려왔다

 . “경숙씨… 그날… 결혼식장에서 처음 봤을때부터 그랬어요. 지워지지 않드라구요. 감히 넘볼수도 없는 그런 상대인줄 뻔히 알면서… 뒷풀이고 뭐고 놀면서도 노는 것 같지 않았었고. 꽃까지 사드렸는데 시선 한번 안주던데요.”

  혼자 독백처럼 쓸쓸히 말하면서도 그 끝의 웃음소리는 늘 하 하 하 크게 웃었다. 이게 이사람의 버릇인가. 별 희안한 버릇도 다 있네… 혼자 그런 생각을 하던 경숙은 암, 노총각 주제에 어딜 감히 넘보냐 하는 잘난척이 표정에 역력히 나타났다

 . 따지고 보면 사실 감히 소리도 어울리지 않을 만큼 아무 주제도 못되는 주제에 반반한 낯짝하나 믿고 까부는 셈이었다. 명숙네의 표현대로라면 쥐뿔도 없는 주제에 눈만 높아 건방떤다는 것이 딱 맞는 소리였다. 상대가 싫으면 옷 깃 스치는 것은 고사하고 눈길 한번 주지 않을 만큼 쌀쌀맞고 도도하게 굴었으니 목메고 쫓아다니며 저 혼자 일편단심으로 좋아했던 운수회사 딸년인 은영이 마지막 엽서라며 써 보냈던 것이 늘 머릿속에 박혀 있었다

 . 겨울 바다의 겨울 바람보다 더 차고 멀게만 느껴지던 너의 먼 시선…이라던 표현이었다.

  끝없는 선물 공세에 아무리 미쳐서 날뛰며 혼자 좋아해봤자 경숙은 그 애의 음흉한 눈 빛이 맘에 안들어사람 축에도 끼워주기 싫을 만큼 멀리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느라 아무런 말이 없는 그녀를 한참 바라보던 가운데 가르마가 그대로 물에 빠져 죽을수도 있다는 협박 비슷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경숙이 화들짝 놀라며 큰 눈을 더욱 크게 치켜뜨자 결혼하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물에 빠져 죽어 물귀신 처럼 살겠노라는 엉뚱한 주정을 했다. 죽으려면 저 혼자 쳐 죽던가 하지 애꿎은 사람까지 끌어들이는 것도 괘씸할 뿐 아니라 이젠 정말로 무섭고 불안해진 경숙이 나가자는 말을 하자 뚫어지게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 물가로 툭 떨어졌다.

 고개를 푹 숙인채 한바탕 혼난 아이처럼 마지못해 물가를 벗어나면서 말 한마디 없던 그를 몰래 훔쳐보다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안쓰러운 마음이 잠깐 들기도 했으나 매몰차게 그런 마음을 내몰았다. 재수 드럽게 없는 날이네. 노총각에 정신병자도 아니고 대체 뭐람. 하마터면 물귀신 될 뻔 했잖아…

 어슴프레 구름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야윈달처럼 막막한 순간이었다

 

 
작가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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