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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일반/역사
인연, 악연으로 마침표...
작가 : Number3
작품등록일 : 2019.10.28

오남매의 파란만장 인생 스토리... 악연으로 끝나다...!

 
인연, 악연으로 마침표...3화
작성일 : 19-10-28 19:42     조회 : 251     추천 : 0     분량 : 18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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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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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대 독자 영식이 국민 학교를 마치도록 안성댁은 그림자가 되어 기를 쓰고 쫓아다녔다. 상대를 불문하고 욕지거리에 어거지를 부리며 눈, 비가 많이 오는 날은 으레이 학교도 보내지 않았다. 추운 날은 춥다고 가지 말라더니 더운 날은 땀빼며 그까짓데 왜 가느냐는 말로 끼고 돌았다.

  안성댁의 과잉 보호로 인해 영식은 스스로 하는게 거의 없을 정도로 나약한 것이 야무진 구석이라고는 눈뜨고 찾을수도 없었다. 그 흔하고 쉬운 누나 소리도 할줄 몰랐으며 별것도 아닌 일에 질질 짜기 일쑤였다.

 걸핏하면 할머니한테 이를꺼야 소리를 해대더니 나가서 얻어 터지고는 동네가 떠나가도록 꺼이꺼이 울어제꼈다. 그때마다 극성스러운 경숙이 부지깽이 부여 잡은채 뛰어나가 해결사 노릇을 했다. 금숙의 눈에는 다섯 살 터울의 그런 경숙이 너무 멋있어 보였고 누구든지 주문만 하면 거뜬히 통일이라도 시켜줄 만큼 못하는 것이 없어 보였다.

 어느 날 어린 금숙의 입에서 튀어나온 황당한 소리는 경숙을 깊은 구렁텅이로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언니, 난 이런 못사는 집의 식구가 아니었으면 하는게 소원이야. 윗동네의 부자가 잃어버린 친딸을 찾고 있는데 그게 나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난 그럼 얼른 다 버리고 부자 따라 가서 잘 먹고 잘 살텐데.” 슬픈 눈빛으로 있지도 않은 허황된 얘기를 만들어내는 금숙을 보며 한참 소공녀에 빠져있던 경숙으로서도 충분히 공감 할 수 있는 상상이었으나 입 밖에 꺼내지는 않았었다.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이 마음 아파할까봐 그냥 상상속에만 묻어 두었던 바램일 뿐이었다.

  걸핏하면 없애려다 실수로 낳았다는 소리나 해대던 명숙네의 입방정이 금숙을 그 지경으로 만들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쇠심줄 보다 더 질긴 년인지 에프킬라를 먹어도 떨어지지 않더라는 얘기를 수 없이 들었던 터라 차라리 더럽고 치사해서라도 태어나지 말았어야 더 나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명숙네의 자살에도 쓰였던 에프킬라의 효력이 결국은 낙태에도 미치지 못한 불찰이었다.

 영식이 커가자 호랑이 안성댁이 형제들 집으로 마실을 갈때면 점점 집을 비우는 날이 잦아졌다. 그때마다 보름에서 한달씩은 족히 머물렀는데 명숙네 자매들은 살판이라도 난 듯 덩실덩실 춤을 추며 온갖 도섭을 했다. 보따리 잔뜩 싸들고 갔던 안성댁이 까탈스러운 성미부리며 형제들간에 다툼이라도 있는 날엔 예고도 없이 들이닥쳐 흥겨운 춤판을 깨는적 또한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머리엔 보따리를 이고 양손에도 짐을 움켜쥔 채 전봇대의 그림자를 건너뛰는 안성댁의 모습은 마치 우스꽝스러운 광대같았다.

  아비의 강압에 못이겨 반갑지도 않은 마중을 나갔던 명숙과 정숙은 그런 할머니의 모습을 몰래 숨어보며 키득거리기 일쑤였다.

 “언니, 할머니 좀 봐. 전봇대 그림자가 개울물인줄 알고 건너 뛰나봐. 호호호…”

  숨어서 보는 재미에 웃음소리 마저 흉흉하게 나올망정 정말 웃기고 신나는 순간이었다. 명숙 또한 짐을 들어주기는커녕 까르르 소리내어 웃으며 그 모습을 즐겼다.

 “맨날 기집년 들이라고 구박 해봤자 바보짓은 혼자 다 하고 있네…” 저 하는 꼴 좀봐.

  달밤에 전봇대 마다 겅중겅중 건너 뛰는 안성댁의 뒤에서 새새거리던 명숙과 정숙은 할머니를 만나지 못했다는 핑계를 앞세워 놀다 들어오기 일쑤였다.

  마실 다녀올 때마다 둥근 깡통에 가득 담긴 각설탕이며 엄지 손가락만한 빠다를 몰래 감추어 놓고는 영식의 밥에 간장을 듬뿍 넣어 쓱 쓱 비벼 먹였다. 옆에서 고소한 냄새를 맡는 것 만으로도 거추장스럽고 싫었던지 3대독자 금싸라기 밥 한술 뜨는데 궁상 떨지 말고 썩 꺼지라는 욕설은 지칠줄도 몰랐다.

 애지중지 하며 숨겨둔 빠다가 녹아버린 날, 어떤 년이 몰래 까 쳐먹고는 껍데기만 홀랑 남겨 놓았다는 억지에 모두들 눈을 흘기며 혀를 내둘렀다. 훔쳐 먹긴 커녕 구경도 못한 것에 누명까지 씌우니 아무리 윗 사람 이라지만 눈이 곱게 떠질 턱이 없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안성댁의 벽장 안에는 온갖 주전부리감이 동네 구멍가게 처럼 널려 있었다.모두 다 귀하디 귀한 3대독자 영식의 몫이었다. 명숙은 호시탐탐 노리다가 안성댁이 마실 나가는 틈을 타서 몰래 벽장문을 열고는 각설탕을 훔쳐 먹는 일이 커다란 행복이었다. 정숙이까지 꼬득여 벽장 안을 뒤지던 날, 느닷없이 들이닥친 안성댁을 피하느라 벽장 안으로 낼름 숨어 버렸다.

 구겅가게를 다녀온 안성댁은 영식의 주전부리를 숨기느라 벽장문을 여는 동시에 에구 에구 이 육시랄년들…이 쳐죽일년들…하더니 길길이 뛰며 서슬이 시퍼래졌다. 그 김에 후다닥 뛰어 내린 명숙과 정숙은 혀를 쏙 내밀며 아더메치유…하더니 우물가를 냅다 가로질러 벌써 저만치 달아나고 있었다.

 “귀신이 물어가다 놓칠년들 뭐 쳐먹을게 있다고 벽장은 들들 뒤지고 지랄이여 지랄이..

 들어 오기만 해봐라 이년들. 내 다리 몽둥일 분질러 놓을 테다..

 그날 밤, 각설탕의 달콤한 여운 대신 호랑이 할머니의 갖은 욕설을 양념삼아 서럽게 잠이 들었다. 노루모와 암포젤 엠을 늘상 끼고 살던 안성댁의 배가 막달의 임산부처럼 잔뜩 불렀을 즈음 동네 어귀의 만화 가게에서 여지없이 순정 만화에 빠져있는 경숙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중학교 진학을 꿇고 있는 같은 처지의 영자가 호들갑을 떨며 “야, 경숙아 니네 할머니 죽었대. 빨랑 가봐.” 하는 믿기지 못할 말을 전해주었다.

  전날 경숙아 노올자… 불렀다가 기집년이 모자라서 보태려고 왔느냐며 호통을 당했던 영자는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도 시큰둥한 경숙이 이상했던지 등 떠밀며 재촉을 했다.

 “진짜라니까, 니네 할머니한테 걸리면 또 욕 먹을까봐 너 부르려고 살살 들어가는데 벌써 사람들이 다 알고있드라. 아무튼 진짜 죽었다니까. 빨랑 가봐.”

  좁은 골목을 세 개지나는 동안 경숙은 그것이 꿈이 아니길 바랬고 사실이라 해도 하나도 슬플 것 같지 않았다. 우물가를 지날 무렵 명숙네의 아이고 아이고오 하는 형식적인 곡소리가 들려오자 경숙은 순간 눈을 반짝이며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가슴을 짓누르던 커다란 바윗덩어리를 걷어낸 듯 싶었고 무언의 압력에서 벗어난 것 처럼 마냥 신이 났다.

 그것은 떠난 사람에 대한 슬픔의 곡이 아닌, 앵무새처럼 입으로만 쫑알거리는 명숙네와 닮은 꼴이었다. 장의사가 달아 놓은 노란 등이 무색할 만큼 집안은 순식간에 잔치 분위기로 둔갑을 했다. 갈 사람은 가고 남은 사람들은 먹고 즐기라는 명령이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모두들 히히낙낙이었다.

 명숙은 환한 표정으로 부침개를 부치며 집어먹느라 정신이 없었고 경숙은 입가에 웃음이 저절로 베어 나와 실실 쪼개고 다녔다. 순둥이 정숙이 할머니 불쌍하다며 잠시 눈물을 글썽였으나 금방 호들갑을 떨며 특유의 철 없는 행동을 했다.

 저 하나만 끼고 돌며 애지중지 하던 영식은 무엇이 못마땅한지 아무한테나 짜증을 부렸다. 손님이 올 때마다 따라 들어가 구관조처럼 아이고오를 몇 번 흉내 내던 명숙네는 가장 밝은 표정으로 안성댁의 마지막을 치루었다.

 살면서 그때만큼 신바람나는 일이 다시는 없는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안성댁의 입을 벌려 쌀을 퍼 넣는 과정에서 경숙이 눈살을 찌푸리며 외면하자 명숙이 팔을 잡아 비틀며 말했다. “잘 봐둬. 우리만 구박하던 호랑이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이니까. 추하기 짝이 없는 주제에…”

  암팡지게 내뱉는 명숙의 얼굴에 독기가 가득한 것을 보며 순간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저승길에 배고플까봐 물려 주는 쌀이나 잔뜩 불러 터질 것만 같은 안성댁의 커다란 배보다 명숙의 그 한마디가 더 섬찟하고 소름 끼쳤다.

 관 뚜껑도 닫치지 않을 만큼 빵빵한 배의 기억은 아주 오래오래 꺼림직한 슬픔이었다. 안성댁이 떠난 후의 방 임자는 당연히 명숙이 세 자매였는데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들 정도로 흡족했다. 밤새 수다를 떨어도 뭐라 할 사람이 없었고 다시는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의 험한 욕설을 듣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너무너무 좋았다

 . 간혹 경숙이 자다 일어나 물끄러미 앉아 있곤 했는데 어디선가 죽음의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아 착잡한 심정이었다. 이제는 정말 귀신이 되어 버린 안성댁이 커다란 배를 쑤욱 내밀며 귀신처럼 버티고 서서는 육시랄 년, 자빠져 자지 않고 웬 청승이냐며 버럭 소리를 지를 것만 같아 무서운 밤을 지새웠다.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기집년들 이라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살았던 호랑이 할머니와의 씁쓸한 인연은 그렇게 끝이 났다. 떨쳐 내지도 못할 만큼 흉물스러운 저주가 되어 영원히 기억 속에 남아 있을 악연이었다.

 

  기운이 딸리면 주정이 더 심해진다더니 나날이 더해가는 명숙 아비의 주정이 눈 뜨고는 못 봐줄 만큼 과간이었다. 아무데서나 바지를 까고 오줌 누는 일은 기본이고 길바닥에 거품 물고 쓰러져 있는 일이 허다했다. 제 힘으로나마 대학을 가겠다는 명숙에게 위로와 격려는 못할 망정 기집년이 고등교육 받았으면 최고 학부지 뭐 말라 비틀어진 대학이냐며 퉁박을 주었다.

 뛰어난 성적과는 반대로 궁색한 형편에 명숙의 대학 진학은 욕심에 그쳤고 경숙의 중학교 입학이 그 꿈을 대신했다. 맏딸이랍시고 고등교육까지 시켜 놨음에도 판판히 놀고 있는 명숙의 꼴을 그 어미는 그냥 넘기지 않았다. 눈만 뜨면 취직도 못하느냐는 닥달을 시작으로 구박을 일삼더니 꼴난 밥상에서는 눈치까지 주었다.

 취직 자리를 알아 보기 위해 차비라도 얻어내야 하는 날이면 거지 동냥 주듯이 몇푼 휙 날아 오는 동전 앞에서 이를 갈며 눈물을 삼켰다. 밤새 언 손을 호호 불어 가며 뜨개질로 뒷바라지한 명숙네의 눈에 최대한 시킬 만큼 공부시켜 놨음에도 빈둥거리는 꼴이 충분히 이유 있는 구박거리였다. 덕지덕지 찌든 때로 얼룩진 어미의 인생에 공부 잘하던 큰 딸은 그야말로 자랑거리에 희망이었는데 놀고만 있으니 영 못마땅해 죽을 맛이었다.

 누가 취직 자리 마련해 놓고 어서옵쇼 하는 것처럼 너무도 당당하게 취직을 요구하고 있었다. 동전 몇 푼 주워들은 명숙은 버스를 두 번 갈아타며 두시간 넘는 거리에 어쩔 수 없는 취직을 했다. 그날부터 명숙네의 대접이 눈에 뜨일 정도로 달라졌는데 푸성귀만 놓고 먹다 남은 밥상이 아니었다. 달걀 후라이와 김장 속 양념을 삭힌 새콤한 무채를 몰래 감추어 두었다가 명숙에게만 내주었다. 돈 버는 딸에 대한 일종의 특급대우였던 것 같았다.

 부모의 멸시와 무능력에 치를 떨던 명숙은 그런 차별 따위를 달가워하지 않으며 오기로 직장을 다녔다. 오로지 인생의 목표가 돈이 되어 버린 사람처럼 악착을 떨었다.

  야간 대학을 혼자 힘으로 거뜬히 졸업한 명숙이 반듯한 직장에 제대로 취직을 하자 명숙네는 큰 딸의 말이라면 벌벌 떨 정도로 변했다. 퇴근길에 피아노 레슨을 받는 명숙을 기다리던 경숙은마냥 부러운 마음에 늘 밤길 마중을 자처했다.

  집에서도 연습을 해야 까먹지 않는다며 도화지의 건반 모양을 두드리는 명숙의 손가락은 가늘고 길었다. 경숙이 종이건반을 몰래 두들겨 보기도 했으나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까막눈에 불과했다. 주말이면 흰 옷에 흰 가방을 둘러메고 테니스 장으로 향하던 명숙이 동생들에게는 부러움 대상이었다. 쭈구리고 앉아 구박만 당하는 아비가 불쌍해 가끔 막걸리라도 사들고 오는 날이면 명숙네가 쏜살 같이 달려가 라면으로 바꿔오기 일쑤였다.

 “넌 술이 지겹지도 않니? 난 술이라면 넌덜머리가 난다. 이가 갈릴 정도야. 다시는 저 웬수 같은 인간 술 사다 줄 생각도 말어 얘.”

 맨 정신 일때에는 기가 팍 죽은채 모녀의 대화를 들으며 허허거리던 명숙 아비의 입에서 마침내는 니 언니 좀 봐라 하는 자부심의 소리가 흘러 나왔다. 호랑이 담배피우던 옛날 옛날 먼 옛날 몰락한 양반가의 쥐뿔도 없는 가문까지 들먹이며 장씨 가문의 자랑스러운 맏딸 이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비의 주정에 쫓겨 다니며 달빛 아래 몸을 숨기던 어린 시절의 초라한 명숙은 온데 간데 없었다.

  일 년을 건너뛰며 남보다 늦게 들어간 중학교가 경숙에게는 꿈과 희망의 세계였다. 달리 더 배우는 것도 없었지만 여러모로 뛰어난 경숙을 젊은 여선생은 무한대로 아끼며내세워 주었다. 깡보리에 허연 김치뿐인 변도가 창피해 점심 시간이면 환하디 환한 얼굴로 배고프지 않을 척 생글거리는 경숙에게 담임은 날마다 변도를 두 개씩 싸와서는 아이들 몰래 책상 속에 넣어주었다. 깡보리가 용감하게 쌀을 제치며 김치 국물이 번져 있는 명숙네의 양은 변도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깔끔하고 맛깔스러웠다. 그런 점심을 정말 내 것인양 자랑스럽게 뻐기며 한 입에 털어 놓고는 다시 아이들 몰래 교탁에 놓고 집으로 가는 길에 양은 변도를 수채 구멍에 털어버렸다. 국민 학교때의 밀린 월사금으로 인해 걸핏하면 쫓아내던 늙은 흰염소나 수분단을 가분단으로 둔갑질 해 앉히던 백여우 선생과는 전혀 다른 사랑을 주던 분이었다.

 생김새와는 달리 어려운 가정 환경 탓에 늦각이 중학생이 된 소녀가 가엾은 나머지 기 살려주며 변도까지 챙겨 주던 사실을 뒤늦게야 알게 되었다. 변덕스럽지 않은 묵묵한 사랑을 앞세워 시키던 심부름은 으레히 경숙의 몫이었으나 고아원 아이를 시켜 연탄 불이나 갈고오라던 치사한 심부름이 아니었다. 일요일이면 집안일 하는 것이 싫어 환경미화 하러 학교에간다며 미꾸라지 처럼 빠져 나가는 경숙이 무슨 큰 일을 떠맡아 쉬는 날도 없이 학교에 가는건가 싶었던지 명숙네는 슬그머니 용돈을 찔러주었다. 가정환경 조사서를 마음대로 적어 내려가던 경숙은 부모의 직업란에서 난관에 부딪치게 되었는데 노동일을 하는 아비의 직업이 부끄러운 나머지 기타의 항목에다 제 멋대로 무식을 떨었다.

 이를테면 가수이거나 기타치는 직업도 있는 줄 알고 속으로 그래, 기타 보다는 아무래도 바이올린이 더 부티나고 멋있어 보이니 난 바이올린 이라고 적어야지.. 하는 생각에 술주정뱅이 아비의 직업을 그림 같이 바이올린이라고 써주었다.

  대졸 출신의 피아노 레슨을 받던 언니 옆에서 주워 들은 것은 있어서인지 결국 피아니스트나 바이올리니스트 등의 그런 쪽으로 마음을 굳히면서 타당지도 않을 뻥을 쳤다.

  종례시간에 “경숙아 왜 기타란에 바이올린 이라고 적었니?” 웃던 선생님은 장난치지 말고 다시 써오라는 말을 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고민하며 머리 굴렸을지에 대해 간단한 장난으로 여기는 것이 더 황당했음은 물론, 굴러가는 낙엽만 봐도 웃음보가 터지던 사춘기 소녀들은 한바탕 까르르 웃어댔고 그날부터 경숙의 별명은 바이올린이 되었다.

 덕지덕지온 몸을 도배한 때로 인해 울며 겨자먹기로 얻었던수치스런때박사라는 별명보다야 백번, 천번 듣기 좋은 별명이었다.

 3층 교실에서 내려다 보이던 주택가의 골목에는 잘 차려 입은 멋진 총각이 가끔씩 휘파람을 불며 소녀들을 유혹했는데 우루루 내다 보는 틈을 타서 재빠르게 바바리 자락을 양옆으로 훽 들추면 커다란 방망이가 고개를 내밀었다.

 쉬는 시간이나 끝마치는 종소리가 울릴때면 어떤때는 바바리맨의 방망이에서 허연 액체가 뿜어져 나오는 것이 종종 목격되었다. 소녀들의 비명 소리에 회심의 미소를 짓던 바바리맨은 한동안 그 자리에 머물다 사라졌다.

 호기심 덩어리 소녀들은 수학 여행 중 누군가의 꼬득임에 빠져 맥주를 몰래 사다 나누어 먹었는데 간밤에 악다구니를 치던 호랑이 할머니를 피해 도망가던 꿈 덕분이었을까 경숙이 축축한 기운에 눈을 떴을때 노란 체육복 바지가 묘한 무늬로 얼룩져 있었다. 아이들이 하나 같이 오줌 쌌느냐며 궁금증을 자아냈지만 자다 물을 쏟았나 보다는 어줍잖은 핑계로 그 자리를 모면했다.

  법주사를 오르던 길목에서 담임은 자신의 점퍼를 벗어 경숙의 허리에 질끈 동여매어 주었다. 한 쪽 눈을 찡긋거리던 모습이 어떤 의미였는지 알 수는 없으나 잊지 못할 또 하나의 사랑이었다. 스승의 날이 되어 큰 맘 먹고 짝꿍인 승희와 돈을 합쳐서반지를 담임에게 선물 했는데 어느 손가락에도 맞지 않는 그것을 끼고는 몹시 좋아했다.

  손가락 중간까지 걸쳐진 반지를 기어이 바꿔온다며 둘이 장위 시장까지 숨이 차도록 뛰었다. 진짜도 아닌 것을 대충 끼지 뭐하러 바꾸러 왔느냐며 퉁명을 떠는 주인에게 승희는 순경 아저씨를 불러 오겠다는 겁을 주었다. 어린 시절의 땅콩 훔쳐 먹다 걸린 화려한 가락이 있던 경숙은 순경이라는 소리에 풀이 팍 죽어 그냥 가자고 했으나 주인은 오히려 기세등등 해지며 큰소리를 쳤다. “아니 대가리에 피도 안마른 것들이 어디서 감히 어른을 협박해. 오냐, 순경 불러 어디 한번 따져 보자!”

 그 말에 승희는 하마 같은 큰 입을 삐죽거리며 불만을 토해냈다. “아저씨, 금방 후회 하실껄요. 우리 아버지가 청량리 경찰서 수사과장 이거든요. 그러니 얼른 바꿔 주세요. 스승의 날 선생님께 선물 한거란 말이에요.

 콧방귀를 뀌던 주인은 갑자기 목청이 커지며 흥분해 소리쳤다. “오오라, 니 애비가 수사 과장이면 난 경찰서장이다. 어린 것이 씨알도 안먹히는 공갈 치지 말고 얼른들 꺼지지 못해? 정말 순경 불러다 혼찌검을 내기전에…”

  학교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 울먹이던 승희는 약방의 공중전화통에 매달려 정말 수사 과장 아버지를 불러냈는데 반지 주인은 울상이 되어 절절 기었다.

 “학생들이 겨우 돈 모아 스승의 날이라고 선물한 모양인데 웬만하면 바꿔주지 그러셨어요. 딸 같은 아이들한테… 학생들 성의를 봐서라도 이러시면 안되지요…”

 아무도 범접하지 못할 점잖은 한마디로 거뜬히 반지를 바꾸며 경숙은 뚱뚱하고 작달만해 난장이 똥자루라는 별명을 가진 승희가 다시 보였다. 입은 하마 같이 크고 눈은 단추 구멍 보다 더 작은 그 애의 어디에 저런 복이 숨어 있기에 그리 좋은 아버지를 가질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부러움이 한 없이 솟구쳤다.

 미아 삼거리의 그 애네 집을 드나드나들 때 매번 느꼈던 것인데 식구들한테 온갖 투정을 다 부리던 것이며 넷 씩이나 되는 오빠들이 못생긴 공주님 시중을 다 들어 주던 것이 마냥 신기하고 부럽기만 했다. 난생 처음 보는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 눈 머는건두 말하면 잔소리였다.

  커다란 방을 여러 개 거치면 맨 끝이 그 애의 방이었는데 작은 왕국의 공주님은 그곳에도 존재하고 있었다. 그 집의 교자상에 끼어 앉아 숨소리도 내지 못한 채 밥을 먹노라면 외갓집의 법랑 공기에 밥 먹던 시절이 떠올랐는데 그곳에서 느꼈던 부잣집 특유의 냄새는 그리 흔치 않았다. 밥그릇을 코에 대고 혼자 흠 흠 거릴때면 승희의 어머니가 슬그머니 웃으며 밥 냄새가 그리 좋으냐 물을때마다 경숙의 대답에 온 식구가 한바탕 웃음보를 터뜨렸다.

 “밥이라고 그냥 다 같은 밥냄새가 아니에요. 외갓집에서 먹던 것하고 똑 같은 냄새가 나서요.” 생긴 것과는 달리 온갖 까탈을 다 부리며 응석받이로 자란 딸 아이가 마음 씀씀이도 고약한 탓에 친구라고는 구경도 할 수 없더니만 누가 보기에도 맘에 쏙 들만한 아이와 어울리는 것을 보며 한 없이 기쁘더라는 말을 해주던 그 애의 어머니였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쌀쌀맞게 굴면서 경숙에게만은 한없이 너그럽고 인자한 것에 대해 엄마, 약 먹었수? 하며 장난을 치던 그 애 큰 오빠의 말도 의미 심장하게 남아있었다. 온 집안 식구들이 경숙의 방문을 쌍수들며 환영했으나 막상 그곳에 끼어 있다 보면 괜히 주눅이 들어 쥐구멍이라도 찾게 되는 바보짓에 늘 서러움이 앞을 가렸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끝 없는 부러움에 마음의 상처만 더 커지던 철부지 시절이었다. 눈을 조금만 돌려도 세상에는 온통 욕심 나는 일 투성이였으니 외모로 풍기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허상이라는 것을 느꼈다.

  생긴 것이 밥 먹여 주느냐며 툭 하면 멀쩡한 허우대조차 못마땅해 타박을 하던 명숙네의 거룩한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기생 오라비를 능가하는 뺀도롬한 사진에 눈이 멀어 멋 모르고 시집와 고생을 달고 산다며 지지리 복도 없는 년이라는 명숙네의 원망 섞인 푸념이 결코 헛소린 아니었다.

 딸년들 중에 가장 인물이 반반한 정숙이 부모의 눈을 속여가며 연애질을 일삼더니 남자가 줄줄이 사탕처럼 끊이질 않았다. 교복을 짤록하게 줄여 입은채 허리는 다 내놓고 다니며 여고생의 상징인 양갈래 땋은 머리를 뭉턱 뭉턱 잘리면서도 벙거지 모자를 뒤집어 쓴 채 싸돌아 다녔다. 인물값 한다는 소리를 수 없이 들으면서도 붙잡혀 오면 또 기어 나가기를 쉴 새 없이 반복했다. 어떤때는 사복을 싸들고 다니며 갈아 입고 노느라 컴컴해서야 모습을 드러내는 딸에게 명숙네는 저 밤 귀신 같은 년 그래도 집구석 이라고 기어 들어오느냐며 구박을 했으나 돌아오는 것은 왕방울 만한 눈흘김 뿐이었다.

 좋아서인지 미쳐서인지 알 수는 없으나 눈이 뻘게 쫓아다니던, 대대로 교육자 집안의 귀공자 하나가 선물 공세를 펼쳐댔다. 그 또래 수준에나 어울리는 하찮은 것들이었으나 정숙은 선물을 가슴에 꼭 끌어 안고는 흥분해 어쩔줄을 몰랐다.

 하긴 누구에게든 선물이라는 것을 받아 보는 일 자체가 처음이었으니 흥분되고 설레이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누군가가 나 하나만을 생각하며 골랐을 것에 대한 그리움에 몸살을 앓았다

 . 선물 중에 가장 많은 것이 가당치도 않을 레코드판 이었는데 명숙네는 그 따위가 뭐 말라 비틀어진거냐며 못마땅해 툭 툭 쏘아부치기 일쑤였다. 전축이라는 물건이 있어야 써먹든 구워 먹든 해당되는 선물을 안고 안타까워 하는 정숙이 안되 보였던지 그런 마음을 헤아려 주는 것은 그래도 명숙 밖에 없었다.

  큰 맘 먹고 거금을 들여 전축을 장만하던 날, 그것은 집안의 가장 귀하고, 비싸고 좋은 물건으로 자리 잡았다. 비틀즈에 넋이 나간 정숙에 비해 차이코프스키나 멘델스존 등의 명숙이 사들이던 클레식판이 경숙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숨바꼭질 같은 아슬아슬한 곡예라도 하듯이 간신히 후미진 여상을 마친 정숙이 반반한인물을 앞세워 덜컥 대형 병원의 원무과에 취직을 하자 자신의 모습을 쏙 빼닮은 아비는 눈을 번득이며 몹시 좋아했다. “

 자고로 사람은 인물이 반반하고 볼일이여. 그 큰 병원엘 아무나 취직 할 수있나? 아니지 아니고 말고! 애비 닮아 인물 값 하다 보니 그 어려운 병원에도 터억 들어가고… 우리 둘째 딸 장하다 장해…”

  말 끝마다 떡잎부터 글러먹은 년이라며 붙잡아다 썩둑 머리 잘라 죽일년 살릴년 할때는 언제고 입에 거품 물고 칭찬 하는 꼴이 더 볼성 사나웠다. 머리 터지게 공부를 한 탓에 무슨 의사나 간호원으로 취직을 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야말로 반반한 낯짝 들이밀며 그것도 소개로 취직을 하긴 했으니 아비의 말이 틀린건 아니었다.

  백옥 같은 피부에 맑고 커다란 눈이며 거기다 옥수수알 보다 더 가지런히 하얀 치아가 애비를 쏙 빼 닮았으니 어느 자리에 내놓아도 한 눈에 들어오는 미인 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아따따, 반반한 것 좋아하네. 생긴게 밥 먹여 준답니까. 그리고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랬다고 내가 낳았지 지가 낳았나. 쓸데없는 공치사는…”

 곧 죽어도 깨갱이라고 명숙네의 말대로라면 자신이 낳은 딸이니 당연히 어미 닮지 않았겠느냐는 반발로 들렸다. 엄격히 따지고 보면 금숙을 제외한 넷이 거의 아비의 판박이에 가까웠음에도 억지를 부리는 꼴이었다. 그런 핀잔이 머쓱 했던지 꽁초를 비틀던 남편은 아무리 잘났다고 입으로 백번 씨부려봐야 사람은 자고로 잘생기고 볼 일 이라는 소리만 되내었다.

  생긴 것으로 따지면 세상 어디에 내놓아도 자신있다는 말투로 인해 더 한심하고 졸렬해 보였다. 교복을 벗어 던진 정숙은 그야말로 날개 돋힌 천사가 되어 뭇 남자들의 시선을 온 몸에 휘감고 다녔다. 월급이라고 타는 족족 치장하기 바빴으나 그것도 모자라 명숙에게 아쉬운 소리를 수도 없이 했다.

 야무지고 암팡진 명숙이 군소리없이 빌려 주기는커녕 오히려 퉁명을 떨며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으나 그런 것조차 아랑곳 하지 않고 속 없는 짓을 일삼았다.

 “넌 그지 근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체 왜 그 모양이냐. 버는족족 다 써대지 말고 모으는 것도 좀 해봐라. 이렇게 사는게 지겹지도 않니?”

 그러거나 말거나 사람 좋은 정숙은 베시시 웃는것으로 대신하며 자신의 사치를 충족 시키기 위해 바보 같은 소리를 지껄였다.

 “언니, 그러지 말고 이번 달 한번만 더 꿔 줘. 나 화장품도 사야 하고 찍어 놓은 옷도 사고 싶단 말야. 어차피 내가 옷 사면 언니도 같이 입을 꺼면서 치사하게 굴지 말고 빌려주라. 응?

 ” 매달 빌릴적 마다 바른 말 하는 명숙이 치사하고 더러웠던지 아니면 벼룩도 낯짝이 있다고 염치 없는 마음이 들었던지 정숙의 꿈질은 가불로 탈바꿈 했다.

 그러면서도 그 놈의 남자 문제는 끊임없이 불거지며 수 많은 염분을 뿌렸다. 꼬리 아홉 달린 백여우도 아니고 좌우지간 한창 미모를 뽐내던 정숙의 전성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장씨 집안의 딸들 중에 가장 미인이라는 꼬리표가 늘 함께 붙어 다녔다.

 그런 정숙을 보며 반반한 인물 앞세워 모든 것들 대신하는속 없는 짓에 명숙이 더 불안했으나 잔소리조차 먹히지 않았다. 오히려 명숙네와 쿵짝이 맞아 속삭거리는 통에 머리가 지끈거려 시선도 마주 하고 싶지 않았다.

 돈에 관한 아쉬운 소리를 꺼내기 무섭게 군소리 한번 없이 선뜻 가불이라도 해다 주는 정숙이 지 어미에게 있어서는 세상에 둘도 없는 효녀로 환영 받는 존재였다. 명숙네의 표현 대로라면 틀어쥐고 여우 깍쟁이 짓을 하는 명숙과는 대조적인 것에 무조건 반기를 들며 후하게 굴었다.

  만만하고 수더분하니 어찌 이뻐하지 않을 수 있으랴. 한 뱃속에서 나온 것들이 하나는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만큼 독해 바진 것에 비해 하나는 어리숙하니 순한것이 어찌 그리 딴 판이냐며 종종 서운함을 내비췄다.

  명숙과의 약속을 지 멋대로 빵구내며 늦게 들어오던 날, 광화문에서 세 시간을 기다렸다는 명숙의 손이 다짜고짜 정숙의 뺨부터 후려 갈겼다. “너 어떻게 된거야? 사람을 몇시간씩 길바닥에 세워 놓고 이제나 저재나 나타날까 목빼고 기다리는 심정이 어떤줄 알어? 넌 틀려먹은 년이야. 매사가 그 모양이니 어따 써 먹을지 걱정이다.”

  양손을 허리에 두른 채 잡아 먹을 듯이 표독스럽게 구는 명숙을 뜯어 말리던 명숙네가 더 흥분되어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얘, 그만해 그럴수도 있지! 그 까짓꺼 가지고 뺨을 때려. 기다리지 말고 그냥 왔음 될꺼 아니냐. 누가 너더러 몇 시간씩 기다리라고 시키디? 나도 안때리고 키웠는데 니까짖게 뭐라고 뺨까지 때리고 난리야. 차라리 날 패라 패…”

  정말 그랬다. 지지리 가난한 살림이었으나 어떠한 상황에서도 명숙네의 입에서 험한 소리가 나오거나 자식들에게 손찌검 한 번 없었던걸 보면 호되게 뺨 한 번 갈긴 것에 대해 흥분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호랑이 할머니의 온갖 구박과 욕설에 이어 주정뱅이 아비의 이유도 모르는 손찌검이 끊이질 않았으나 명숙네는 욕 한마디, 단 한번의 손찌검도 없이 아이들을 키워냈다.

  퉁명스럽고 무뚝뚝해 잔 정이 없는 것처럼 보이긴 해도 어린 시절을 남 부러울 것 없이 귀하게 자란 탓인지 험한 소리조차도 내뱉질 않았었다. 그것만은 다 자란 딸들이 우리 엄만 이랬었지.. 고마워하며 자랑스럽게 말 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정통으로 맞았는지 옆에서 코피를 줄줄 흘리던 정숙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변명을 늘어 놓았다. “미안해 언니. 나오려는데 친구가 와서 걔하고 놀았어.”

  그 말을 듣던 명숙의 표정이 더 사납게 일그러지며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로 따져 물었다. “친구 누구? 보나 마나 뻔할 뻔 자겠지만. 묻는 내가 미친년이지. 남자 새끼에 걸신 들린 년도 아니고 어째 그따위로 인생을 사냐. 아이구 추접스러운 년….” 그 말에 질세라 명숙네가 더 바짝 끼어드는 통에 명숙의 낯 빛이 허옇게 변하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건드려 놓으면 어린 시절 주특기였던 경끼를 앞세워 거품을 물고 쓰러질 판이었으나 명숙네는 속을 뒤집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더 사납게 쏘아 부쳤다.

 “남자를 만나든 무슨 짓을 하든 니가 상관할 바가 아니야! 너나 잘하고 다녀라.. 괜히 애꿏은 지 동생 못잡아 먹어 안달 떨지 말고. 지 신상 지가 볶으면서 왜 저 지랄인가 몰라.. 베라쳐먹을년…명숙을 몰아부치며 무조건 정숙의 편에 서서 손을 번쩍 들어주던 어이없는 판정으로 그 날 싸움은 끝이 났다. 억울하고 분한 것을 혼자 속으로 삭히는 명숙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경숙의 뒤늦은 중학 생활은 없는 집안의 자랑거리가 될 만큼 눈부신 빛을 발했다. 정숙과는 대조적으로 까무잡잡한 피부에 흑진주 같은 커다랗고 까만눈이며 바라만 보아도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눈빛은 모든 이의 부러움 대상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교내 사생 대회나 백일장은 모조리 휩쓸며 제 이름 석 자를 두각시켰다. 3학년 때의 영어 선생님을 짝사랑 했었는데 복도에서의 마주침 조차도 어린 소녀의 가슴에는 커다란 떨림이 되어 방망이질을 쳤다. 동경하는 선생님에 대한 설레임이 어설픈 사랑으로 변할 즈음 일부러 외면하며 관심을 끌기 위해 과목을 낙제로 만드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시험기간 중, 그 날의 시간표대로 감독이 있던 날 예상치도 않은 짝사랑 선생님이 감독으로 들어섰다.

 사춘기 소녀는 아, 저 선생님이 일부로 날 보기 위해 시간을 바꿔 들어왔나보구나 하는 야무진 착각을 하면서도 여전히 눈을 마주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야무진 착각은 착각이 아니었고 발 소리도 없이 슬쩍 지나가던 소녀의 짝사랑은 딱지모양의 작게 접은 편지를 책상 귀퉁이에 올려 놓았다. 순간 고개를 번쩍 들고 선생님을 바라 보았으나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사람처럼 지나치는 모습이 눈물 와락 쏟아질 만큼 야속해 혼자 오기를 부렸다.

  시험을 보는둥 마는둥 가장 먼저 끝내고 보란듯이 쪽지를 책상에 버려둔 채 당당하고 거만하게 문을 나섰다. 종치는 소리와 함께 다시 교실로 뛰어가서는 아무도 모르게 얼른 그것을 집어 들고 변소로 냅다 뛰었다. 떨리는 손으로 펴 보았던 편지에는 순수하고 맑은 영혼을 가진 영특한 소녀로 반듯하게 잘 자라 주었으면 하는 바램과 이 담에 예쁘고 어엿한 숙녀가 되어서도 노총각 선생님을 좋아해 줄 수 있을까하는 일종의 포기 같은메시지가 담겨있었다.

 누가 볼까 두려운 마음에 잘게 찢어버리고 눈을 돌렸던 운동장에는 핸드볼을 하는 짝사랑의 모습이 보였다. 이 쪽을 의식했던지 한 번씩 손을 들어 보이는 그 모습에 넋이 나간 경숙은 얼른 고개를 돌려 버렸다. 마치 나쁜 짓을 하다 들켜버린 사람처럼 도무지 진정이 되질 않았고 다시는 좋아하는 선생님을 볼 수 없을것만 같은 두려움이 커다랗게 밀려왔다.

 짝사랑과의 아픈 추억이 점 점 더해갈 즈음, 먼 친척이 사주로 되어 있는 공장의 사택으로 이사하게 되었는데 오랜만의 보따리 이동이었다. 명숙네가 공장 총각들의 끼니를 해결하는 동시에 명숙아비가 경비일을 맡아 가는 그곳에는 반듯한 2층 양옥이 남루하고 초라한 이사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하에 식당이 딸려 있는 제법 폼 나는 집이었는데 동화에나 나올법한 언덕위의 하얀 집이 부럽지 않을 만큼 마음에 쏙 들어 들뜬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주정으로 쫓겨 나다시피 수차례 보따리 이사를 하면서 리어카에 실은 짐을 뒤에서 밀던 것에 익숙한 식구들은 탈탈거리는 용달에 실려가며 마치 큰 부자가 되어 금의환향 하는 기분이 들었다. 다만 한 가지 문제될 것이 있다면 경숙이 낯선 곳으로 전학한다는 사실이 죽기보다 싫어 몇날 몇일 심한 떼를 쓰며 대성 통곡을 해댔다.

  혼자 학교 근처에 방을 얻어 살겠노라 말도 안되는 소리로 우기는 것도 모자라 새벽에라도 다닐수 있으니 전학을 하지 않겠다고 했으나 도무지 먹힐 일이 아니었다. 그전 같으면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생때에 욕을 배터지게 먹을 판이었으나 생활이 필 조짐이 보였던지 어느 누구 하나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정숙이 빈정거리며 어째 못하는 일이 다 있으니 신기할 따름이라며 놀릴 뿐이었다. “어쩐다니 통일도 시켜줄 만큼 대단하고 잘난 경숙이 전학 앞에서 눈물을 질질 짜다니~ 어머머머~ 웬일이니~ 웬일이야~ 그냥 너 혼자 자취하며 살어. 그렇게 전학이 싫으면 말야. 지 동생들이라고 찍 소리도 안하는데 유난 떨기는. 아무튼 웃기는 년이라니까….”

 전학을 가던 날 짝사랑 노총각 선생님과 노량진의 구석진 빵 집에 마주 앉은 경숙은 떨리는 손으로 선물을 받으며 그동안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멀리 전학을 가버리면 다시는 동경의 대상이었던 선생님을 만나지 못할것만 같은 아련함에 서럽게 울었다. 난생 처음 단팥빵과 같이 먹던 둥근 병의 서울 우유는 비릿함으로 기억되었고 한 모금도 채 마시지 못한 채 목구멍의 비린내를 애써 참아냈다. 슬그머니 웃던 선생님은 소금을 달래서 흔들어 주었으나 역시 촌년의 입맛에 어울리지 않는 사치에 불과했다.

  눈물을 닦아주던 따뜻한 손길을 멀리하며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펼쳐보았던 자물쇠가 달린 일기장에는 R.프로스트의 가지 않는 길이라는 시가 적혀 있었다. 마음과는 다른 곳에서 헤매고 있거든 다시 곧 자기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는 그런 내용이었는데 어린 제자에 대한 순수한 사랑이 오래도록 기억 되었다.

  토요일이면 수업을 마치기가 무섭게 버스를 두번씩 갈아타며 먼 길을 달려가면 여지없이 양 팔 벌려 반겨 주던 짝사랑 선생님과의 인연은 가슴 속 깊은 곳의 소중한 추억이었다.

  전학을 하던 날, 복도에서 바보처럼 쭈삣거리던 경숙을 향해 얼굴이 눈부시게 하얀 혜원이라는 친구가 처음 말을 걸어주며 그 날 이후 단짝이 되어 수 많은 꿈을 함께 꾸었다. 아버지가 제법 알려진 곳의 고급 공무원이었던 그 애의 집을 수시로 드나 들었는데 딸 부잣집의 서글서글한 인상에 이름만큼 예쁜 외모를 가진 귀한 셋째딸이었다. 같은 3번 타자이면서 늘 하늘과 땅 차이가 날 만큼 다른 환경을 가진 자신의 처지에 화도 났으나 서럽게 세상을 맞이한 천덕 꾸러기 셋째 딸 신분을 늘 감추고 살았다.

  그 애네 집에 놀러 갈때면 일하는 언니가 열무 비빔 국수에 얼음 동동 띄어 내주던 알싸한 그 맛이 입에 착착 감겼다. 더 먹고 싶지만 꾹 꾹 참으며 아껴 먹던 어설픔이 그 속에 묻일만큼의 기막힌 솜씨였다. 마지막 번호인 경숙은 앞 번호대의 꺽다리들과 어울리며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이 아쉬운 마음에 온갖 추억을 만들기에 바쁜 나날을 보냈다.

  토요일이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명동의 유네스코 회관으로 몰려들어 진 추아 주연의 사랑의 스잔나나 닥터 지바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의 영화에 푹 빠져 들었다. 그런영화에 미친 한동안은 오만 샤리프의 매력에 넋이 나가 헤어나지 못한 적도 있었다. 눈을 감고 있으면 멋진 서양 배우의 커다랗고 푸른 눈이 뱅뱅 맴돌아 슬픔이 밀려오곤 했다. 우수에 젖은듯한 서글프고 공허한 그 눈빛… 그것은 서러움의 빛이 되어 가슴 속 깊이 꽂혔다.

  참고서 핑계를 대며 뜯어낸 돈으로 수도 없이 보았던 그 시간의 영화들은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정숙이 하던 짓 그대로 사복을 싸들고 다니며 여의도 광장에 자전거 무리를 이루는가 하면 동대문 스케이트장으로 몰리는 날에는 한 마리 우아한 백조가 되기도 했다. 가방에 몰래 사복이나 꿍쳐다니며 원 없이 놀기도 했으나 정숙과는 차원이 다른, 범생이의 정당하고 타당한 놀음이라는 자부심을 버리지 않았다. 흰 염소 선생에게 한창 볶이던 어린 시절에 집 앞의 논에서 어쩌다 스케이트를 탈 기회가 생겼었는데 첫발부터 스르르 미끄러지듯 나가는 것이 마치 내 발에 익숙한 신발을 신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신데렐라의 유리구두가 그보다 편하게 잘 맞았을까 싶을 만큼 안정감을 주었다. 한 번 신어본 것에 대한 끝없는 미련을 떨구지 못한채 먼 발치에서 넋 놓고 스케이트장을 바라보던 경숙에게 고물 장사의 다 낡은 스케이트를 안겨준 것은 아비였다. 막걸리 한 잔 값의 흥정으로 반쯤은 주정과 억지가 섞였을 법한 투정으로 빼앗다시피 얻어온 빨강색 스케이트는 색이 바래 희끗희끗한 것이 분홍에 가까웠으나 그런 것 쯤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윗동네의 부잣집 아이들처럼 그것을 어깨에 둘러메고 스케이트장으로 향할때는 세상을 다 가진 기분에 절로 우쭐해졌다. 그러다 문득문득 기억속의 짝사랑 선생님이 보고파 질때면 지난날의 긴긴 거리로 되돌아가곤 했다.

  언제나 늘 같은 자리에서 같은 모습으로 변함없이 반겨주던 소녀의 짝사랑은 환한 등대였다. 또 하나의 추억을 가슴에 꼭 간직한 채집으로 돌아오는길가의 모든 풍경들이 빛바랜 사진처럼 희뿌옇게 보이기 일쑤였다.

 그런날은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던 나머지 커다란 눈을 단숨에 뱁새 눈으로 만들어 버리기도 했다. 여고를 갈 무렵의 경숙은 토목과를 다니는 친구의 오빠에게 한 달 비용이 칠천원 하는 개인과외의 호강도 누렸다. 굳이 따로 배워야 할 이유도 없었지만 나름대로의 사치를 부리고 싶은 생각이 더 깊었던 것도 같다.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매달았는가 하는 영어 한 줄만 기억날 뿐, 뚜렷한 성과도 보질 못했다.

 어미를 살살 꼬득여 과외도 받았던 허영심에 비해 지지리도 못하던 수학 점수는 항상 기를 꺾는 주눅대상이었다. 오버가 맘에 들지 않으면 학교 앞의 양장점에서 멋대로 디자인 골라 다시 맞추는 경숙을 보며 명숙네가 웃는 얼굴로 칭찬인지 핀잔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말을 했다. “명숙인 다 낡은거 얻어다 입혀도 군소리 없이 공부만 잘하던데 정숙이란 년은 또 어떻구, 지멋대로 썩둑썩둑 잘라 허리에 착 달라붙도록 지가 되는대로 듬성듬성 꼬메 입고 다니더니 어째 넌 제대로 된 걸 해줘도 니 멋대로 또 맞추고 난리를 친다니. 배짱이 두둑한건지 간땡이가 부어도 한참 부은 년이야.”

 교복 입는 것 한가지만 봐도 성격이 다 보인다는 말을 덧붙이던 명숙네는 그래도 속 안썩이고 지 할 일 다하는 경숙이 사내놈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아쉬움을 나타냈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공장이 경숙이네 것으로 다들 알고 있었는데 한번도 집에 데려가지 않는 것에 대해 의심을 하는 통에 진땀을 빼는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오빠만 일곱이나 되는 집안의 막내인 금남이는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집에 들어가면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는 엄살을 피우며 부득부득 경숙의 앞길을 막아섰다.

 “니네 집 한번만 가볼게. 엉? 소원이야.. 제발 한번만 데려가주라. 집에 가면 난 이거거든.”

  하며 목이 댕강 잘려 나가는 시늉을 했다. 버티다 못한 경숙이 데려가고 싶지만 중요한 손님이 오는 날이라 그럴 수 없다는 핑계를 대자 그 애는 도끼눈을 뜨며 돌아섰다.

  집에 돌아와보니 거짓말에 보답하듯 정말로 중요한 손님이 와있었는데 명숙이 사귀던 남자가 감사나온 세무서 직원 같은 안경 너머의 날카로운 눈을 번득이며 사방을 살피고 있었다.

  퇴근길이면 논 밭 건너의 긴 개울을 지나 공장가로 들어서는 것을 질색하던 명숙이 벼르고 겁내던 일을 그제서야 해치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남들이 공장지대를 빠져 나가는 시간대에 그곳을 향해 들어가는 자신이 초라해 못 견딜 지경이었으나 한 번은 치루어야 할 숙제 검사에 있어 남자는 세심한 관찰을 늦추지 않았다. 안경속의 눈이 광채를 뿜어낼 정도로 빠르게 굴리며 한눈에 모든 것을 파악해버린 손님은 저녁을 대충 먹고는 입을 꽉 다물고 앉아있다 돌아가 버렸다.

  그 날 이후 명숙을 까놓고 무시하더니 흐지부지한 만남을 깨는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 없었다. 똑똑하고 야무진 명숙이 보기 좋게 차인 환경의 패배였다.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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