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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일반/역사
인연, 악연으로 마침표...
작가 : Number3
작품등록일 : 2019.10.28

오남매의 파란만장 인생 스토리... 악연으로 끝나다...!

 
인연, 악연으로 마침표...1화
작성일 : 19-10-28 19:39     조회 : 399     추천 : 0     분량 : 15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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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잉, 쯧쯧.. 또 기집년이네, 또 기집년이야…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셋째 딸이 태어나던 날, 곰방대에 꽁초를 붙여 태우며 아랫목을 차지하고 않은 호랑이 안성댁은 연신 큰 기침만 흠, 흠 해댔다. 그러다가 괜히 한번씩 윗목을 향해 눈을 흘기고는 쓰잘대기 없는 기집년이나 펑 펑 낳는다며 혀를 내둘렀다. 어미가 잘 먹지 못한 탓에 갓 태어난 핏덩이는 커다란 눈만 휑-하니 삐쩍 마른데다 새카맣고아무 볼품이 없었다.

  처음부터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기집년이나 펑 펑 낳은건 아니었으나 첫 아들의 짧은 생을 끝으로 내리 딸만 셋을 낳은 명숙네는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 만큼 면목이 없었다.큰 죄를 지은 듯 한 죄스러운 마음과 더불어 밥만 축내는 입 하나 더 늘린 죄로 산간은 꿈도 꿀 수 없는 처지였다. 몇일 앓은 감기처럼 자리를 툭 툭 털고 일어나 다니던 아교 공장에 다시 나가야만 했다. 꼬장꼬장한 안성댁은 윗목에 아무렇게나 던저져 있는 핏덩이를 훌렁 훌렁 넘어 다니며 알아 들을 수도 없는 쌍스런 욕들로 궁시렁궁시렁 하루를 보냈다. 2대 독자로 뼈 속 깊은 곳의 외로움을 느끼며 자란 명숙 아비가 그져 허허거리며 셋째 딸을 안고는 몹시 좋아했으나 안성댁의 사나운 눈초리를 피해가며 그런 웃음도 흘릴 수 있었다. 서럽게 세상을 맞이한 셋째 딸이 있는 듯 없는 듯 온갖 구박과 설움을 다 겪으며 두어 해가 지나자 3대 독자 영식이 태어났다.

 방문에 새끼를 꼬아맨 빨간 고추의 임자는 안성댁의 아주 유별난 손주였는데 명숙이네 자매들은 어린 나이에도 그런 할머니를 저주할 지경이었다. 유난 떠는 모습이 눈 뜨고는 못 봐줄 만큼 과간이었고 터를 잘 팔아 남동생 보았다는 이유로 경숙에게 향한 욕설이 조금 줄어들 무렵이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살림에 참새떼 같은 입만 늘어가면서 좋은 성격 만큼이나 좋아하는 술로 인해 번번히 일자리도 짤린 명숙 아비는 나날이 주정뱅이가 되어 갔다.

 중매쟁이가 들고 왔던 사진 속의 훤칠한 인물에 더없이 좋아보이는 성격 하며 근본 있는 집안의 자손이라는 것에 끌려 명숙네를 선뜻 내주었는데 빼도박도 못할 화근덩어리였다. 안성댁보다 더한 욕을 퍼붓다 못해 마냥 사람 좋을 것 같던 성격은 손찌검도 불사했다.

 젖은 솜덩이 같은 몸을 이끌며 아교 공장 일을 마치고 들어서는 명숙네가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모자가 머리를 맞대고 속닥거리며 세 딸을 헐뜯는 일이었다. 없는 말까지 만들어 내며 그녀 자신을 흉보는 일은 두 말 하면 잔소리였다.

 불면 날아갈세라 쥐면 터질세라 영식에게 향한 안성댁의 애정은 세 자매를 더욱 서럽고 비참하게 만들었다.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기집년들은 더욱 천덕꾸러기가 되어 갈 뿐이었다. 내리 딸만 셋을 낳은 명숙네에게 그 아들이 귀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안성댁의 손에서 물고 빠느라 내려놓는 적이 드물었다. 그런 것을 서운해 하면서도 손 귀한 집안의 금싸라기 손주에 대한 애착이려니 하며 스스로 위안을 삼는 수 밖에는 별 도리가 없었다.

  첫 아이가 두살도 채 넘기지 못하고 급체로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어떤 강구책을 세우지 못했던 시간을 떠올리다 보면 두 위인이 한 없이 괘씸스러웠지만 가슴에 맺힌 한으로 끝내야만 했다.꾸웩거리며 토하고 뒹구는 어린아이 앞에서 애비는 안절부절이었고 그 아이라면 벌벌 떨며 죽는 시늉까지도 감수하던 안성댁은 겁에 질린 채 윗목에서 흘깃쳐다볼 뿐이었다.

 오히려 새끼 건사도 제대로 못해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책임을 뒤집어 씌운 욕지거리에 치욕스런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떠난 아이의 빈자리를 구박과 욕설로 채우며 수년 만에 태어난 귀한 아들이다 보니 안성댁의 유별을 탓 할 수 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른 저녁 무렵, 영식을 재우느라 업고 서성이던 안성댁을 향해 지나가던 스님이 시주나 하라며 말을 건넸다. 둥가둥가 금이야 옥이야 하는 소리로 영식을 얼르던 안성댁은 시주는 무슨 얼어 죽을 놈의 시주냐며 냉큼 꺼지라는 호통을 쳤다. 그러자 씁쓰레한 표정의 젊은 스님은 아주 곤란한 표정으로 말 끝을 흐렸다. “어허, 이 일을 어쩐다… 보아하니 귀하디 귀한 손인 것 같은데 서른 고개를 넘기기가 힘들겠네 그랴…” 그런 고약한 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있을 안성댁이 아니었다.

 “이 썩어 문드러질 놈의 땡중이 어디서 그런 아가릴 함부로 놀리는거여…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말고 어서 가던 길이나 냉큼 가슈…” 스님은 혀를 끌끌 차며 나무 관세음보살을 찾았고 안성댁은 재수 없다며 소금을 움팡지게 뿌려 댔다.

 그런 광경을 보던 명숙네가 바가지에 보리쌀을 한웅큼 담아 부리나케 뒤를 쫓았으나 젊은 스님은 바람같이 사라진 뒤였다. 두어 해가 지나면서 주정에 지치고 삶에 찌든 명숙네가 철물점에서 외상으로 산 에프킬라를 한 입에 털어 넣고는 궁악산 자락에 목을 메었다.

 그녀가 축 늘어진 시체처럼 철물점 주인에게 업혀 오던 날, 안성댁의 쩌렁 쩌렁함이 낮은 천장을 뚫고 끝없이 퍼져나갔다. “에구.. 이 육시랄년.. 곱게 쳐 죽던가 하지 볼성사납게 목은 메고 지랄이여 지랄이…” 궁핍한 살림에도 생전 남에게 아쉬운 소리조차 못하던 명숙네가 에프킬라를 외상으로 사들고 터덜거리며 산을 향해 가는 것이 불안한 마음에 뒤를 쫓았는데 천만 다행한 일이었다. 하지만 죽을 사람 구해다 살려 놓은 것 조차도 부끄러운 마음이 들 정도로 안성댁의 포악이 극에 달하는 것을 보며 철물점 주인은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그 옆에서 커다란 눈만 꿈벅이던 명숙 아비는 잠시 무슨 생각인가 하는가 싶더니 그 길로 뛰쳐 나가 날이 꼴까닥 샌 후에야 꾀재재한 모습으로 들어섰다. 버선발로 뛰쳐나온 안성댁은 십수년만에 상봉이라도 하는 모습으로 아이구 내 새끼… 아이구 이 불쌍한 놈… 하며 연신 눈물을 훔치는가 싶더니 이내 주저앉아 통곡을 해댔다.

  고만 고만한 천덕꾸러기들은 그 어린 눈에도 할머니가 몹시 미웠고 아버지라는 존재를 향한 원망만 커져갔다. 하루가 멀다 하고 뒤집는 주정에 단칸방에서 수시로 쫓겨나자 그때마다 명숙네는 친정에 손을 내밀어야 했다. 이름 석 자만 대면 누구든 고개를 끄덕일 만큼인 수원 유지의 귀한 딸로 유모에 머슴까지 부리던 금지옥엽 어린 시절은 이미 온데 간데 없었다.

 주정뱅이 남편에 욕쟁이 시 에미가 등 떠밀어 보내는 동냥질의 친정 나들이가 죽기보다 싫었으나 줄줄이 딸린 어린 새끼들을 생각하면 체면 불구하고 나설 수 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생긴 순서대로 벼슬을 하자면 단연 최고 자리에 거뜬히 앉고도 남았을 만큼 훤한 인물의 남편이 그런 날엔 한없이 자상한 웃음을 지어 주었고 호랑이 안성댁은 함박꽃이 되어 손수 저녁상을 차렸다.

  시집온 이후 제대로 차려진 밥상에 익숙하지 못한 명숙네는 옛다…이거나 먹고 떨어져라 하는 심정이 되어 꼬깃꼬깃 접은 보재기만 방다닥으로 내팽개치듯 던져주었다. 그리고는 천덕꾸러기들과 더불어 부뚜막에 쭈그리고 앉아 바가지 밥을 긁는 일이 훨씬 더 편하고 좋았다.

 암팡진 입을 하며 방안의 사람들을 향해 도끼눈을 뜨는 명숙과는 달리 뚜한 모습으로 순하게 눈치만 보는 정숙이 더 안쓰러운 마음에 가슴이 미어짐을 느꼈다. 위 아래로 치이며 자란 탓인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세상일에 통달한 것 같은 표정의 경숙을 바라볼때면 간땡이 큰 년이라는 소리가 입안에서 맴돌았다.

 울기는커녕 웬만한 일에는 눈도 꿈쩍 안하며 휘번덕 거리는 것이 애 답지 않아 어떤 때는 저걸 정말 내가 낳은 자식인가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섬찟 할때가 종종 있었다. 아무리 아롱이다롱이라고 하지만 달라도 너무 다른 통에 무섭기까지 했다. 제 성질대로 호도독 거리거나 마냥 순한것도 아니면서 능구렁이가 수백 마리쯤 들어 앉았을 것만 같은 그 애의 속을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대문에 매달린 빨간고추의 임자가 두 살 되던 해에 다시 또 딸이 태어나자 안성댁은 아예 대놓고 말끝마다 구박을 일삼았다. “에이잉.. 쯧쯧.. 기집년이 모자라서 또 보태는 거여.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기집년들…” 구박이나 욕설에 넌덜머리가 날 만큼 익숙해진 명숙네는 한 귀로 듣고 다른쪽 귀로 털어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으나 몸은 천근 만근이나 되는 쇳덩어리였다.

  그날 밤 명숙 아비의 주정과 이유도 모르는 매로 인해 세 자매는 달밤에 숨바꼭질 하듯 동네를 들뛰다 어느집 처마 밑에 나란히 숨어 있었다. 낮은 스레트 지붕 밑의 낡아빠진 내복 차림인 천덕 꾸러기들은 겁에 질려 오돌오돌 떨고 있었고 그 모습을 비웃 듯 달빛은 휘영청 슬프도록 밝았다. 앞 개울가의 졸졸 흐르는 물소리에 명숙 아비의 다정하리만큼 섬찟한 목소리가 섞일 무렵 삐걱거리는 다리 저 끝으로 그 모습이 드러났다.

 “명숙아아, 정숙아아… 어디있니.. 우리 이쁜 공주님들…” 순하디 순한 정숙은 너무나 무서운 마음에 눈물이 와앙 터지려는걸 꾹 꾹 참으며 한 손은 언니에게, 또 한 손은 동생에게 맡겼다. 그런 중에도 명숙이 둘째 손가락을 입에 대며 쉿, 소리를 냈고 울음보가 터지기 일보 직전의 정숙이 언니 무서워… 할 때쯤 시커먼 그림자가 앞을 턱 막아섰다.

 달빛에 비춰진 자상한 그 웃음은 악마의 웃음처럼 보였으며 세 딸을 향해 구슬리는 그 말은 악마의 유혹 같은 달콤한 사탕발림 이었다. 그러면서도 술에 취해 끄억 거리는 틈틈이 양 팔을 버리며 세상에서 제일 좋은 아버지 시늉을 했다.

 “아이구, 이런… 우리 이쁜 공주님들이 여기 다 모여 있었네…”술냄새를 폭 폭 풍기며 껄껄거리는 모습은 잔뜩 겁에 질린 작은 처녀들을 더욱 오그라들게 만들뿐이었다. “왜들 이러구 있어. 끄윽..애비가 안 때릴 테니 어여들 가자. 끄윽…” 커다란 손아귀에 움켜 잡힌채 그 길로 끌려 들어간 명숙은 큰 언니라는 이유로 몽둥이 찜질을 당했고 둘째는 애비 버리고 언니 따라 도망 갔다는 이유로 얻어 터졌다.

 “어이구, 선도 안보고 데려 간다는 우리 셋째 딸…딸꾹…넌 터를 잘 팔아 남동생 봤으니 애비가 특별히 봐줬다. 끄윽. 우리 셋째딸을 이담에 어느 복터진 놈이 데려 가려나 끄어억…” 여섯 살짜리에게 얼토당토 않은 말들을 쏟아내던 아비는 윗목의 간난쟁이를 들여다 보며 끅끅대더니밤톨만한게고거 참 이쁘네… 하며 알 수 없는 묘한 웃음을 지었다.

 아랫목에서 영식을 끌어안고 있던 안성댁은 기집년 백날 들여다봐야 뭐 나올게 있느냐며 이불자락 펄럭이는 것으로 불편함을 내색했다. 펄펄 끓는 곳에서 몸을 지지며 자리 보존을 해도 시원찮을 판국의 산모는 부엌에 쭈구리고 앉아 하염없이 흐느낄 뿐이었다. 들릴 듯 말듯한 이년의 팔자야 소리에 귀는 어찌도 그리 밝은지 안성댁이 대뜸 날카로운 고함을 질렀다.

 “누가 절더러 기집년만쳐낳으라고 했어? 이런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기집년이나 낳는 위인이 팔자 타령은 왜하고 지랄이여. 지랄이… 입에 담지도 못할 쌍스런 소리임에도 무슨 웃을 일이 있다고 큭큭대던 정숙이 못마땅 했던지 명숙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가는 동시에 면박을 주었다.

 “그게 웃을 일이냐, 너두 참 속이 없는건지 한심한 건지…”애꿏은 매타작도 억울하고 분한 터라 성질 같아서는 누구든 걸리면 머리라도 쥐어 뜯어버릴 판국이었는데 그 대상이 순둥이 정숙인 것에 더 화가 치밀었다. 당연히 아랫목으로 화살이 날아가 불쌍년 같은 험한 소리나 지껄이는 주둥이에 명중된다면 더 없이 통쾌할 일이겠지만 그렇지 못한 현실에도 화가 났고 여지껏 훌쩍이는 명숙네의 흐느낌에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고고하고 깐깐한 안성댁의 남편은 일제 시대하의 여학교 음악 선생이었는데 낡은 풍금 옆에서 찍은 신식 양복 차림에 안경을 쓴 모습이 점잖기 이를데 없었다. 나란히 앉은 쪽진 머리의 안성댁 역시 곱상하고 음전한 모습이었으나 얄팍한 입매며 대나무쪽 같은 성미가 사진에도 고대로 드러났다. 포마드 기름을 발라 가르마를 넘긴 대여섯살 정도의 사내 아이가 꼬마신사 차림으로 가운데 끼어 있었는데 보기만 해도 모양 좋은 시절이었다.

  손 귀한 집에 무럭무럭 자라던 사내아이가 소학교에 들어갈 즈음 아비가 급살을 맞아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곱디 고운 안방 마님이었던 안성댁의 처지는 졸지에 청상과부로 전락을 했다. 일찌감치 외로움을 알아버린 사내아이는 동구밖에서 오지도 않을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그리움부터 배우며 헛헛한 나날을 보냈다. 좋은 가문의 자손이었으나 일찍 세상을 등진 아비로 인해 그들 모자에게 남은 것은 마음 한켠의 가슴저림과 툭 건들면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져 나올 악에 바친 오기 뿐이었다.

 사진속의 부러운 풍경은 그저 아득한 기억속의 빛바랜 과거에 불과했고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을때의 넋빠진 모습으로 수절을 해온 안성댁에게 너그러움을 바란다면 그건 아마도 당해보지 못한 이의 욕심일 뿐이었다. 아교공장일이 줄어들자 돌산에서 돌을 나르기 시작한 명숙네는 행색이 점점 나빠져 마치 중환자처럼 보였다. 겨우 5학년짜리 명숙이 맏이라는 서글픔으로 어미의 변도를 챙기며 눈물을 훔치곤 했다. 그 어린 눈에도 고된 인생의 어미모습이 얼마나 가엾고 불쌍했던지 감자라도 몇알 생기는 날엔 그것을 삶아 쪼개어 밥에 박은채 경숙의 손에 들려 보냈다. 돌산 중간쯤 지날 무렵 철없는 경숙은 사방을 두리번거리고는 몰래 변도 뚜껑을 열고 감자를 꼭 두개만 빼 먹었다. 나머지 두 개는 엄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지 다 꺼내먹는 양심 없는 짓을 절대 하지 않았다.

 포실포실한 그 맛은 입안의 혀 만큼이나 부드럽고 감미로운 느낌이었다. 움푹 패인 자리 고대로의 변도를받아들던 명숙네는 나머지 감자를 다시 경숙의 입에 넣어 주곤 했다. 그리고는 체하지 않게 꼭꼭 씹어 먹으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커다란 눈만 꿈벅거리며 엄마를 바라보던 경숙은 그까짓거 먹고 체할게 뭐 있냐하는 욕심에 멀건 김치 몇조각 있지도 않은 보리밥을 넘보기 일쑤였다. 집으로 돌아온 후에 감자 빼먹은 변도 얘기를 하던 명숙네의 입에서는 헛헛한 웃음이 그치질 않았다. “경숙이란년 심부름 시켜야 구멍 숭숭 뚫린 변도 가져오드라,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다 빼먹진 않았던데…”그런짓까지도 기특하고 마냥 이쁜듯이소리내어 웃던 그 순간만큼은 행복에 겨운 자상한 엄마의 모습 그대로였다.

 없는 반찬에도 뿌역뿌역 먹는 자식들의 입을 보며 그 구멍이 뭐라고 그리 죄다 쏟아 넣느냐던 흐뭇한 소리를 그땐 이해하지 못했었다. 좋은것 하나라도 더 먹이려는 어미의 심정은 헤아리지도 못한채 싫어하기 때문에 못먹는 음식 이거나 아니면 진짜 배가 불러서 안먹는 줄로만 알았던 어리석음을 떨쳐내지 못한 시절이었다.

 그렇게 한 해 두 해가 지나며 온순하고 곱상하던 명숙네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었고 찌든 삶에 지칠대로 지친 악다구니만이 그녀의 전부가 되어 버렸다. 그렇지만 다섯 남매를 아끼는 애틋함은 곱절로 쌓여 무슨 날이라도 되면 꼭 챙겨주며 마음속 깊은곳에서의 행복한 기분이 들게 해주었다. 밀가루에 이스트를 잔뜩 넣어 주먹보다 더 크게 부풀린 빵은 오남매의 특별한 간식이었는데 그것을 싸들고 남산 계단을 오를때나 창경원 벚꽃 놀이를 갈때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자식들에게 하는것과는 반대로 무능력한 남편에 대한 욕설과 삿대질은 나날이 높아만 갔다. 안성댁과의 잦은 댓거리도 서슴지 않았으며 지지리 복도 없는 년 서방 잘못 만나 허구헌날이모냥이꼴로 산다는 푸념이 그치질 않았다.

 그나마 몇 안되는 세간을 깨부수며 동네가 떠나가도록 겁 없이 밤새 주정을 하던 명숙아비에게 집주인은 매몰차게 방 뺄 것을 요구했다. 쪽마루에 걸터앉아 애꿏은 꽁초만 뻐끔거리는 술 깬후의 모습은 줏대라곤 없는 초라한 몰골이었다.

 그럴때면으레히선하디 선한 눈빛이 되어 명숙네를 살살 구슬렸다. “ 이봐, 어떻게 얘기좀 잘해봐. 우리형편에 이사할 처지는 못되고. 아이고 그 놈의 술이 웬수지웬수여…” 예전 같으면 다소곳이 듣고는 손발이 닳도록 빌고 또 빌며 사정했을 그녀였지만 이젠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일이었다. “ 대책도 없는 인간이 맨날 허구헌날 그 놈의 술은 퍼마시고 날더러 뭘 어쩌라고… 차라리 술독에 빠져 뒤지던가 해버려. 아이구 지지리도 박복한이년의 팔자야…”

  어떤 해결책을 바란건 아니었으나 한 수 더 떠가며 악다구니 치는 모습이 영 볼성 사나웠던지 방구석에 쳐박혀 눈치만 살피던 안성댁이 방문을 휙 열어제끼며 이내 욕설을 퍼부었다. “저런 저런, 귀신이 물어가다 놓칠년같으니라구… 아 기집년들 데리고 길바닥에 나 앉기 싫으면 가서 빌기라도 해야지 어따대고껑거리솟음이여. 이런육시랄년…” 막힘도 없이 좔좔 나오는 욕이 끝남과 동시에 남루한 옷가지들을 봉당에 내동댕이치자 그것을 본 명숙네가 발로 훽 걷어 차며 어기짱을 놓았다. “뭐 변변한게 하나나 있다고 던져 주기까지 하는거여.. 내가 이 집구석에 다시 발을 들여 놓으면 성을 갈아 버릴 테다.”

 그김에 금숙을 휘딱 들쳐 업은 명숙네는 누가 말릴세도 없이 영식의 손을 꿰어차고는 그 길로 쏜살같이 집을 나섰다. 삐죽거리며 새카만 손톱을 물어 뜯던 경숙이 엄마… 하고 부르며 쫓아갔으나 못들은 채 걸음만 더 빨라졌다. 눈앞에서 어미의 모습을 놓친 경숙은 온 동네를 눈물로 쏘다니다 컴컴해서야 집으로 찾아 들었다. 호롱불 밑에 머리를 맞댄 명숙 아비와 안성댁의 대화는 쳐 죽일년 다시는 내 집에 발도 못붙이게 한다는 치사하고 졸렬한 내용이었는데 마치 좋은 얘기라도 나누는 듯이 두런두런 다정해 보였다. 명숙과 정숙이 윗목에 웅쿠리고 박혀 있는 모습을 보고있자니 추위와 배고픔에 지친 경숙이 밥 얘기를 꺼낼 처진 아니었다.

  슬그머니 두 언니가 일어서며 툭 치는 것으로 나오라는 시늉을 해주었다. 머뭇거리며 문고리를 잡는 세 자매의 등에 안성댁이 쐐기를 박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우라질년들 자빠져 자지 않고 오밤중에 어딜 까질러 나가는 거여. 에잉,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기집년들…” 쩌렁쩌렁한 목소리는 안성댁의 꼬장꼬장한 모습을 보여주듯 담을 타고 넘어갔다. 그런 어마어마한 욕설에 익숙할대로 익숙해진 자매는 명숙이 몰래 뭉쳐 놓은 맹탕의 주먹밥을 눈물로 베어먹으며 이를 갈았다.

 “언니, 우리 엄마 이제 집에 안오는 거야? 우리 버리고 도망 갔나봐…” 당장 몇 일 후면 어미도 없이 입학해야 할 처지에 놓인 경숙이 딱했던지 명숙은 부드럽게 타일렀다. “경숙아, 걱정하지 말어. 너 학교 갈때쯤이면 엄마가 꼭 올꺼야.” 순하게 생긴 커다란 눈을 불안하게 굴리던 정숙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래 경숙아, 언니 말이 맞어. 엄만 꼭 올꺼야.” 명숙이 달아주던 코 수건을 내려다보며 결국 혼자 입학식을 치룬 경숙은 엄마 손을 잡은 아이들이 마냥 부러웠다.

 비록 혼자였으나 하루 하루 학교라는 곳에 흥미를 느끼며 당찬 성격 고대로 또래보다 훨씬 더 어른스러워졌다. 집에서 듣던 안성댁의 구박과 욕설이 없어 더욱 그랬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외롭고 낯설었지만 경숙에게 있어 학교에 가 있는동안 만큼은 어린 동심의 탈출구였다.

 

 새로 이사한 종암동 개울가 옆의 판자집은 천장이 어찌나 낮은지 그것 또한 안성댁의 욕설 대상이었다. “우라질 놈의 천장은 만들다 만 것도 아니고, 사람은 서서 드나들게 해야 할꺼 아녀. 이런 육시랄, 허리 꼬부라져 지레 죽겠네…”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혼자 수시로 지껄이는 욕에 닥지닥지 붙은 네 가구의 사람들이 비닐친 문을 열고는 빼꼼 내다보기 일쑤였다. 장마가 시작 되면서개울가에서 놀던 명숙의 검정 고무신이 떠내려 가던 날, 안성댁의 공치사가 밤새 끊임 없이 쏟아졌다. “이 우라질년, 힘들게 주워다 신겨 놨더니만 그것도 간수 못하고 떠내려 보내고 지랄이여 지랄이.. 찾아오기 전에는 맨발로 다닐 각오해. 눈 뻘개서 또 주우러 다니게 하지 말고. 들 떨어진년같으니…” 신발을 찾기 위해 훠이훠이 개울가를 뒤지던 명숙은 마치 절름발이처럼 한쪽 발을 쩔뚝거리며 걸었다. 보다 못한 뒷방의 새댁이 낡은 고무신을 내주었는데 그것을 얻어 신은 명숙이 길가다 동무라도 만나는 날엔 꼼짝 않고 그 자리에 서 있곤 했다.

 행여 누가 그 크고 낡은 고무신을 처다 보기라도 할까 싶어 작은가슴이콩닥거렸다. 발보다 훨씬 큰 그것을 끌고 다니면서도 한 쪽 고무신을 항상 손에 꼭 쥐고 다녔다. 나중에라도 혹시 나타날지 모르는 다른 한쪽에 대한 기대감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동네에 상여라도 지나는 날의 명숙네 자매들은 끝까지 쫓아가는 악착을 떨며 허기진 배를 움켜 잡았다. 상여 구경이 목적은 아니었고 그날 만큼은 떡 부수러기며산자도 얻어 먹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 때문에 정말 좋은 구경거리라도 난 것처럼 멀고 먼 망자의 길을 하염없이 쫓았다. 부잣집으로 갓 시집온 새댁이 1년도 채 못살고 죽었는데 그날은 마치 동네 거렁뱅이들의 잔칫날 같았다. 마지막 가는 길의 베품으로 인해 후한 인심이 한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 덕에 허기진 배를 채우고 텅 빈 마음까지 뿌듯하게 채워질 때쯤이면 누군가가 죽는 일이 자주 있었으면 좋겠다는 흉흉한 생각마저 들었다. 다 늦은 저녁에 돌아온 세자매를 향해 날아든 것은 안성댁의 구정물 세례와 그것보다 더 구질 구질한 욕 세례였다.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기집년들에게 푸짐한 욕 뿐만 아니라 고약스럽고 못된 별명을 하나씩 붙여주었는데 명숙에게는 앙칼지고 약아빠진 여우라 했고, 정숙은 그저 허허거릴줄만 아는 것이 속도 벨도 없는 칠뜨기라 놀렸으며 경숙은 속을 알수도 없는 응큼한 늑대 같은 년, 그리고 막내 금숙은 참기름 독에 들어갔다 나온 미꾸라지 같은 년이라고 말끝마다 놀렸다.

  제 스스로 지어 놓은 별명을 흡족해하며 혼자 큭큭거리는 모습은 마치 동화에나 나오는 아주 고약스러운 마귀 할멈처럼 보였다. 무슨 근거로 그리 지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어찌 보면 가장 정확하게 꿰뚫고 붙여준 별명대로 성격이 보이는 것이 그냥 헛된 소리만은 아닌것 같았다.

 소나무 밭에서 다방구 놀이를 하며 놀던 정숙이 하얀 꽃잎처럼 힘없이 떨어지는걸 목격한 경숙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있었다. 아이들이 웅성거리며 몰려 들었으나 경숙은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소나무 끝만 쳐다보았다.

  누군가에 의해 느릿느릿 불려 나온 안성댁은 죽은듯이널부러져 있는 정숙을 향해 대뜸 욕부터 퍼부었다. “기집년이 가랑이 일그적거리며 나무엔 뭐하러 기어 올라가 이 꼴이여! 내 이년의 다리 몽댕일 분질러 놓을 테다.” 하며 길길이 뛰었다.

 그 판국에 분질러야 할 것이 나뭇가지가 아니라 정숙의 가느다란 다리였다는 사실에 경숙이 악을 쓰며 죽기 살기로 대들었다. 늘 해온 습관처럼 아비의 저녁 밥상 머리에 턱 받치고 앉아 고자질을 하던 말던 상관 하지 않았다. “할머닌 언니가 불쌍하지도 않어? 죽었으면 어떻게 하려구 그래. 저승사자는 뭐하고 있는지 난 차라리 할머니가 대신 죽었으면 좋겠어...”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귀신이 너 같은거 얼른 안잡아 가고 뭐하나 몰라, 라고 말해 주고 싶었으나 명색이 할머니이다 보니 차마 그렇게 까지는 할 수가 없었다. 여간해선 울지도 않아 독한년 소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던 경숙이 꺼이꺼이 통곡하는 모습을 보던 안성댁은 머리채를 휘어잡으며 악을악을썼다.

 “육시랄년, 니애미라도죽었냐. 별것도아닌 일로 통곡을 하고 지랄이야. 바소고리 같은 입 닥치지 못해!.. 이년 죽으려면 너나 죽어라. 애꿏은 지 핼미를 왜 끌어다 부쳐. 쳐 죽일년…”

 밥상 머리에서 안성댁의 고자질을 전해들은 명숙 아비는 그렇지 않아도 허연 얼굴에 도화지 보다 더 흰 빛이 되어 누워 있는 정숙이 잘못 될까 싶었던지 이런 저런 말이 없었다.

  수심 가득한 표정이 되어 애미도 없는 판국에 아이구 불쌍한 것… 하며 중얼거렸으나 그깟 기집년이 쥐뿔이나 불쌍하냐는 안성댁의 큰 소리에 잠시 주춤했다. 이마와 손을 번갈아 가며 떡 주무르듯이 짚어 보는 눈빛이 어찌나 애절하고 따뜻해 보이던지 명숙과 경숙이 숨소리도 못 낼 지경이었다. 할머니가 대신 죽으라며 길길이 뛰던 경숙의 방자함이 그대로 묵살되는 것이 배가 아팠던지 안성댁의 못마땅한 눈길이 육시랄년 두고 보자는 고약을 떨며 째리고 또 째렸다

 . 고자질한 의도와는 전혀 다른 상황에 몹시약이 올라 있는 안성댁을 향해 경숙이 혀를 쏙 내밀었다. “저, 저 귀신이 물어 가다 놓칠년 하는 짓거리 하구는 내 저 년의 뱀 같은 혓바닥을 잘라 버릴까보다.” 마음 먹은대로 되지 않은 것에 펄 펄 뛰다 까무러 치든 말든 그까짓 것쯤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다. 분에 못이겨펄쩍거리다경끼하는 명숙에게 못된 성깔머리가 딱 니 할미 닮았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던 터라 약오른 나머지 그 김에 뒤로 넘어가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가득했다.

 맥없이 시름시름 앓던 정숙은 보름이 지나서야 맹-한 모습으로 일어나 혼자 히죽히죽 웃는 모습이 정말 칠뜨기 같았다. 핑계김에 긴 친정 나들이를 끝낸 명숙네는 제법 살이 오른 편안한 모습이 되어 모셔오다시피 남편에게 이끌려 왔다. 명숙이 장마통에 신발 떠내려 보냈던 얘기며 정숙이 나무에서 떨어져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얘기를 침이 마르도록 하던 안성댁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명숙네가 꺼내 놓은 금붙이에 아부하는 뻔뻔함으로 비춰졌다.

 모처럼 술을 거른 남편은 정상적인 사람처럼 보였으며 푸성귀를 무치는 안성댁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그 길로 명숙을 데리고 나가 제법 값이 나가는 운동화를 사주었으나 명숙은 수정처럼 맑은 눈물만 뚝 뚝 떨굴 뿐, 선뜻 그것을 신지 못했다. 내것에 대한 소중함을 간절히 담은 채 신발을 가슴에 품고는 아주 오래도록 울었다.

 그런 딸아이의 모습을 지켜보던 명숙네의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아이구, 이년의 팔자야… 하는 긴 한숨 소리와 함께 명숙을 와락 끌어안았다.

  중학교의 청소부로 취직한 명숙네가 날마다 주워들이는몽당 연필이나 다 닳은 지우개가 세 자매의 기다림이 되어갈 즈음, 아비의 끝도 없는 주정으로 인한 집안 꼴이 나날이 발전은커녕 점 점 더 엉망이 되어갔다. 예전보다 훨씬 더 억척스러워진 명숙네의 입에서는 나오는 족족이 불평불만도 모자라 아예 안성댁의 눈치를 보지 않고도 남편을 무시했다.

 금붙이의 효과가 꽤 오랜 기간 유지되었던 모양인지 안성댁의 욕설과 멸시가 주춤하며 한 걸음 물러서는 기미가 보였다. 코너에 몰린 쥐새끼라도 잡을듯이 남편을 향해 한바탕 푸닥거리를 하고 집을 나선 명숙네가 다시 불려온 것은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학교갈 시간인데도 일어나지 않는 정숙을 흔들어 깨우던 명숙의 낯 빛이 허옇게 변하며 정말 죽었나봐… 하는가 싶더니 빨랑 가서 엄마를 불러오라고 소리쳤다. 턱까지 숨이 차는걸 참으며 물어 물어 찾은 명숙네는 변소 청소를 하다말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엄마, 정숙언니가 죽었대. 빨랑가자… 이번엔 정말 죽었나봐…”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 뚜껑만 봐도 놀란다더니 죽을 고비를 넘긴 정숙은 늘 힘없이 깔딱거리는 여린 촛불 같았다.

  머리에 뒤집어 쓴 수건을 벗을새도 없이 명숙네가 허겁지겁 달려 왔을 때 깔딱 깔딱 간신히 숨을 내쉬는 정숙의 옆에서 명숙이 대성통곡을 하고있었다.

 팔짱을 낀 채 꽂꽂이 돌아앉은 안성댁은 그깢기집년 하나쯤 죽어봐야 무슨 대수냐는 냉랭한 표정으로 정숙을 쏘아보고 있었다.

  정숙의 얼굴을 향해 입 안의 물을 내뿜던 명숙네가 동치미 국물을 한사발 얻어다 먹이자 그때서야 머얼건 안개꽃이 흐드러지듯 배시시 눈을 떴다. 커다랗고 맑은 눈이 스르르 떠질 때의 그 모습은 아침 햇살보다 더눈부시고 아름다웠다.

 독사과를 먹은 백설 공주가 왕자님의 키스에 눈을 반짝 뜨는 운명적인 순간이었다. 고비를 넘겨서인지 터얼썩 주저 앉던 명숙네가 그때서야 안성댁의 괘씸한 소행이 생각 난 것처럼 쏘아보는 눈빛에 독기가 서려있었다. 한 입에 잡아먹고도 남을 만큼 살벌하고 험악한 분위기였다.

  소나무에서 떨어진 이후로 간이 콩알 만해졌다는 정숙은 조그만 일에도 거품을 물며 쓰러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런 정숙을 보며 사내 아이들은 기절 했을 때 문둥이가 간을 빼먹어 거품쟁이가 되었다는 해괴망측한 소문을 퍼뜨렸다.

  문둥이 소리가 들릴 때마다 일일이 찾아다니며 한번만 더 그런 소리 하면 죽을 줄 알라는 공갈협박을 하는 것이 누가 시키지도 않은 한 때 경숙의 막중한 임무였다. 문둥이가 왜 문둥이 인지도 모르면서 아이들과 때 지어 다니며 문둥이를 쫓았던 적이 있었는데 누더기 차림에 산발한 머리의 꽃을 보며 거지중에 상거지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니네 이렇게 하얗고 이쁜 문둥이 봤어? 간 빼먹는것도봤냐구… 주둥이 잘못 놀리면 어떻게 되는줄 알지?” 눈을 부라리며 주먹을 들어 올리는 경숙의 기세에 사내 아이들의 어깨가 쪼그라들었다. 방학이 되면 명숙이네 자매들은 쫓겨 나다시피 외가로 보내지곤 했는데 단칸방의 설움도, 안성댁의 구박도 멀리 할 수 있는 꿈 같은 시간이었다.

  안성댁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기집년들을, 그것도 한무더기나 줄일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입만 벌리면 애비 등골 빼먹는 쓰잘데기 없는 년들이라는 소리를 수도 없이 들었지만 따지고 보면 참 새떼처럼 목 들을 쭈욱 빼고 가엾은 애미의 등골만 빼먹는 셈이었다. 쉴새없이 몸을 혹사시키며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악착떠는 명숙네와는 정 반대로 놀며 쉬며 취미처럼 다니다 짤리는 자식이 안쓰러워 더 입에 발린 소리를 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외가로 가있는 동안은 딸년들이 잠시나마 구박과 욕설에서 벗어나 맛난 음식을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기회였지만 얼굴에 두꺼운 철판을 깔은 것처럼 친정에 염치가 없었다.

  외가에는 식모가 둘 있었는데 잔잔히 챙기며 떠받들어 주는 맛에 방학이 길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푸짐한 상에 둘러 앉아 하얀 법랑 공기의 밥을 몇 그릇씩 해치우고 나면 외할머니가 저녁 참으로 빗어주던 수수 부꾸미나 집안의 허드렛 일을 하던 노지기 아저씨가 마술을 부리듯 둥근 깡통에 넘치도록 만들던 엿은 입안에서 살살 녹아 내렸다.

  외갓집의 풍요로운 추억은 아주 오래오래 곰삭은 김장 김치의 그 맛처럼 가슴속 가장 깊은 곳에 침 넘어가는 소리로 자리하고 있었다. 경숙이 입버릇처럼 말하던 외갓집 냄새는 뭐라 표현 할 수 조차 없을 만큼 정겨움과 풍요의 느낌이었다.

 외손녀들을 향해 말없이 인자한 웃음을 보이던 외할아버지가 깍두기 모양의 캬라멜처럼 생긴 회충약을 구해 먹이기도 했는데 영악한 경숙은 그것을 입에 물고 있다가 몰래 하수구 구멍에 뱉어 버리기 일쑤였다. 사탕도 아닌것이 끈적거리는 단맛을 입안으로 흘려 들여 보내면 뱃속의 온갖 구렁이들이 앞을 다투어 꿈틀거리며 속을 뒤집어 놓을 것 만 같은 두려움이 앞섰다.

 방학 내내 외가에서 머물다 돌아갈 때 쯤이면 서양 미인 같은 멋쟁이 외숙모는 일하는 언니들과 한데 묶어 극장구경을 시켜 주었다. 내용도 모른 채 매산 극장에서 보았던 칠보 반지라는 영화가 경숙의 생에 첫 번째 다른 세상이었다. 포악한 왕비가 왕의 눈을 속여가며 후궁을 들들 볶는 것도 모자라 끝내는 왕이 후궁에게 정표로 주었던 칠보 반지를 빼앗아 연못에 던져 버리는 장면에서 후궁도 울었고 언니들도 훌쩍거렸다.

 정숙이 소나무에서 떨어지던 날 안성댁을 향해 마구잡이로 대들며 통곡했던 경숙은 눈물에서 조차도 인색해지기로 다짐했던지 눈물은커녕 연못에 던져진 반지가 아까운 욕심에 발을 동동 굴렀다. 시집 온지 다섯해 만에 성능 좋은 펌프가 물을 끌어 올리듯 피를 토하던 남편과 사별한 외숙모는 쿰직큼직한생김새 만큼이나 시원스러운 여장부였다.

 아들만 둘이고 보니 계집애들을 무척 이뻐했는데 경숙에게 빨강색 멜빵 주름치마와 솜털 같은 레이스가 너풀거리는 블라우스에 생전 처음 보는 흰 팬티 스타킹까지 사입히고는 혼자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인물이 훨씬 살아나느니 옷이 날개라느니 하는 말을 들으며 경숙은 가장 비싸고 좋은 옷이 생겼다는 사실에 가슴저리는 행복함을 느꼈다. 놀다가 블라우스의 단추가 하나라도 떨어지는 날엔 하루종일 그 단추를 찾느라 눈을 까뒤집고 다녔다.

 연못에 던져진 후궁의 반지가 그보다 더 귀하고 원통할까 싶은 마음으로 땅바닥을 이 잡듯이 뒤졌다. 끝내 손톱보다 작은 것을 주워들고 오는 경숙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명숙네는 아주 튼튼하게 단추를 동여맸다. 쉽사리 떨어져 나가는 단추 하나에서 조차도 딸아이의 서글픔을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야무지게 매듭을 지으며 눈가를 붉혔다.

 자신이 해주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련한 마음이 매듭과 함께 묶였다.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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