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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원초적 욕망
작가 : 박소영
작품등록일 : 2016.10.9

“당신을 위해, 당신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세상이 여기 있습니다. 당신이 원하던 외모로 살아가며 당신이 원하던 일을 이루고, 당신의 이상형과 당신이 원하는 사랑에 빠질 수 있습니다. 당신의 모든 상상을 현실로 만드십시오. 유토피아는 당신이 창조하는 완벽한 현실입니다.” 인간의 원초적 욕망이 결국 유토피아를 가능케 했다. 만 30세를 넘긴 사람은 누구나 유토피아에 갈 수 있는 세상. 그러나 실제 유토피아를 조작하는 것은 인간이 아닌 ‘그들’의 욕망이다. 이를 깨달은 몇몇 사람들은 유토피아가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세상을 찾아 나선다.

 
울적한 여성 지구인
작성일 : 16-10-09 21:55     조회 : 702     추천 : 2     분량 : 9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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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으로 만난 지구인에게 미친놈 취급을 받기 5개월 전.

 

 우리 1팀을 태운 모함(mothership)이 태양계와 우주의 경계(Heliopause)에 도착했다.

 

 몇 번의 웜홀을 지나고도 별 탈 없이 살아남은 우리는 크게 환호하며 자축했다. (3팀은 웜홀 하나를 통과하다 원자 단위로 쪼개질 뻔했다고 한다.)

 

 “1팀, 태양계 앞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팀의 리더인 자호가 아버지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다들 고생했네!”

 

 지구에 있는 아버지의 ‘아바타’가 홀로그램으로 나타났다. (아바타는 약 30년 전 아버지의 모습을 모델로 제작됐기 때문에 실제 아버지의 모습보다 현저히 젊다.)

 

 “여러분은 지금부터 48시간 뒤, 비행선 점검을 마치고 지구로 출발해주시기 바랍니다.”

 

 아버지의 아바타는 우리 팀원들과 일일이 눈을 맞추며 지시를 내렸다.

 

 모함에 남아 후방지원을 맡는 디디와 쓰라지를 제외한 9명의 팀원들은 여기서부터 각자 1인용 비행선을 타고 지구로 향한다.

 

 “5개월간의 긴 비행 동안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꼼꼼히 점검해주길 바랍니다.”

 

 5개월이 길다는 아버지의 말에 동의할 수 없다는 듯 우리는 서로를 힐끗거렸다.

 

 지구와 인간의 역사, 자신이 맡은 지역의 문화와 특성 등 지구로 향하는 5개월 동안 우리 각자가 복습해야할 내용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만능통번역기가 없었다면 10년을 줘도 다 못해낼 일이다.)

 

 “물론, 저의 새 아바타도 조심히 가져와 주시구요.”

 

 우리를 둘러보던 아버지는 조종실 구석에 서 있는 자신의 새 아바타를 발견하고 웃었다. (새 아바타의 기능 중 하나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신체적 노화를 진행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네, 제가 잘 챙기겠습니다.”

 

 동아시아 담당 미류가 아버지와 마주 웃으며 답했다.

 

 “저는 어제 중요한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디디, 거기 스크린에 카메라 E-1부터 E-47까지 전부 연결해줄래?”

 

 “네!”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디디가 분주하게 손을 움직이자, 조종실의 전면 유리창에 47개의 영상들이 떠올랐다.

 

 각 영상에는 각기 다른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생김새를 보아하니 모두 지구인들이었다.

 

 “어제 총 47명의 지구인에게 관찰카메라를 한 대씩 붙였습니다.”

 

 “오, 드디어 시작하셨군요.”

 

 아버지의 설명에 자호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앞으로 이 지구인들을 자세히 관찰해주시기 바랍니다. 2주 뒤, 우리의 파트너로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되는 지구인은 바로 카메라를 회수하겠습니다.”

 

 아버지가 말하는 동안 내 시선은 한 여성 지구인에게 머물러 있었다. 그녀는 침대 위에 꼼짝 않고 누워 30초 간격으로 한숨을 쉬고 있었다.

 

 나는 왼쪽 손목에 차고 있는 디바이스에 ‘E-47 카메라 소리 연결’이라고 입력했다. (이 디바이스는 지구의 스마트워치와 똑같이 디자인됐다.)

 

 -후우우우우.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는 듯한, 여성 지구인의 한숨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동아시아 담당 미류는 특히 더 유심히 봐줘. 47명 모두 한국인이니까, 이 중에 괜찮은 사람이 있다면 미류 너와 파트너가 될 거야.”

 

 “뭐, 일단은 마음에 드는 사람이 안 보이네요.”

 

 미류가 농담을 던지며 웃었다.

 

 그 때 한국의 현지 시간은 오전 3시 51분. 47명 중 44명이 자고 있었다.

 

 깨어있는 3명 중 한 명은 한숨을 푹푹 쉬고 있었고(울적한 여성 지구인), 또 다른 두 명은 열정적으로 컴퓨터 게임에 집중하고 있었다. (디지털 세계에 중독된 인간이 어느 행성에나 존재한다는 건 참 무서운 사실이다.)

 

 “2주 뒤에는 미국에서 파트너 후보를 고를 계획입니다. 미국 LA와 뉴욕에서 사인회를 하기로 확정했어요.”

 

 아버지는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아버지의 아바타는 지구에서(정확히는 ‘한국’이라는 나라의 ‘서울’이라는 도시) ‘이원우’라는 이름의 소설가로 살고 있다.

 

 우리 독립단체가 공식적으로 결성되기도 전인 27년 전. 아버지는 ‘유토피아 반대’에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함께 다섯 대의 아바타를 지구로 보냈었다.

 

 당시는 다른 행성으로의 이주 방안이 별로 지지받지 못할 때라, 다섯 대의 아바타는 간간이 지구를 여행하고 몇몇 지구인을 만나보는 정도로만 사용됐었다.

 

 1년 뒤 네 대의 아바타는 예정대로 지구에서 깔끔히 폐기됐다.

 

 그러나 아버지의 아바타는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인해 27년 째 서울에 머무르고 있는 중이다. (덕분에 우리 팀이 지구를 탐사하는 데 매우 큰 도움이 된다.)

 

 “근데 아바타가 그렇게 멀리 가는 건 너무 위험하지 않나요? 오가는 길에 보는 눈도 많을 텐데, 갑자기 접속이 끊기면 어쩌시려고요.”

 

 아버지의 계획에 나는 우려를 표했다.

 

 15억 광년이나 떨어진 곳에 사는 아버지의 조종을 받다보니 아바타는 툭하면 연결이 끊겼다. (연결이 끊긴 아바타는 정말 아무 것도 안하고 오로지 숨만 쉰다. 이 문제를 개선하고자 새로운 아바타는 갑자기 연결이 끊길 때를 대비한 매뉴얼 설정이 가능하도록 제작됐다.)

 

 “괜찮아. 연이가 같이 가주기로 했거든.”

 

 아버지는 걱정 말라는 듯 빙긋 웃었다.

 

 연. 아버지의 아바타를 지구에 남게 한 사건의 주인공이자, 내가 지구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만나보고 싶은 지구인. 하지만 북미 담당인 내가 연을 만날 일은 딱히 없다.

 

 “그리고 지구인 파트너를 찾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 위험은 얼마든지 감수해야지.”

 

 아버지는 지구인 파트너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했다. 모두가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구인 파트너의 역할은 대략 두 가지이다.

 

 1. 현지인 가이드: 주요 거점 국가의 토박이로서, 지구에 낯선 우리가 각종 임무를 수행하는 데 도움을 준다.

 

 2. 우리와 지구인 간의 연결고리(=홍보맨): 우리의 이주 계획에 대다수 지구인이 찬성하도록 긍정적인 여론을 형성하는 데 힘쓴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지구 도착 한 달 안에 2명의 파트너와 계약을 맺으라고 못박아놓은 상태였다.

 

 이것이 지구에서의 첫 임무인 셈인데, 꽤나 조심스럽고 어려운 일이다.

 

 한 번도 지구 밖의 생명체를 만나본 적 없는 지구인에게 우리의 존재를 납득시키고 우리와 뜻을 함께 하도록 만든다는 건…… 상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인생이 왜 이렇게 그지 같냐!!!

 

 별안간 ‘울적한 여성 지구인’의 고함이 내 고막을 때렸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른 팀원들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E-47 카메라에 소리를 연결한 건 나뿐인 듯했다. 아버지를 비롯한 사람들은 원자가 될 뻔한 3팀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으아아아아.

 

 울적한 여성 지구인은 몸을 말아 접으며 왼쪽으로 돌아누웠다.

 

 뭐…지?

 

 굉장히 사람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생명체가 아닐 수 없다.

 

 

 ***

 

 

 아버지와의 교신이 끝난 뒤 팀원들은 하나 둘 웜홀로 인한 멀미 증세를 호소했다. 멀미약을 충분히 복용했음에도 저마다 두통이나 매스꺼움을 느꼈다.

 

 특히 나의 경우, 물 이외에는 아무 것도 먹지 못할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다.

 

 그래서 나는 내 비행선을 점검하는 대신 48시간 동안 47명의 지구인 관찰을 전담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수십 명의 지구인을 동시에 지켜보는 일은 매우 정신없지만 그만큼 재미있는 일이었다.

 

 먼저, 47명 지구인들의 공통점은 그들 모두 우리 아버지의 열혈 팬이라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작가사인회에 참석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관찰카메라를 붙였다.)

 

 아버지의 아바타, 그러니까 아버지가 만들어낸 ‘소설가 이원우’라는 인물은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29권의 책을 써내며 지구에서 매우 큰 사랑을 받고 있는데,

 

 아버지가 자신의 아바타를 소설가로 만든 것은 대략 세 가지 목적 때문이었다.

 

 1. 소프트파워의 힘: 아버지는 자신의 소설을 통해 외계와의 교류, 공존에 대해 긍정적인 이미지를 만들고자 했다. (지구에는 외계인을 향한 경계심과 적대감을 키우는 영화가 과도하게 많다.)

 

 2. 향후 활동을 위한 자금: 지구 탐사와 이주 계획이 실제로 진행될 경우, 지구에서 사용할 수 있는 돈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훌륭한 선견지명이었다.)

 

 3. 연: 지구인 연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도 지구의 돈이 필요했고, 아버지는 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벌고 싶어 했다.

 

 그래서 25년 전, 아버지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지구의 출판 산업 구조를 고려해 ‘영어’라는 언어로 첫 소설을 써서 ‘미국’이라는 나라를 공략했다. (물론 아버지는 영어를 전혀 모른다. 만능통번역기의 결과물이다.)

 

 아버지의 계산은 제대로 들어맞아, 그의 책은 3년 만에 지구 전체에서 엄청난 흥행을 이뤄냈고, 아버지의 아바타는 지구의 유명인사이자 엄청난 팬덤을 확보한 문화 아이콘이 되었다.

 

 처음의 목적보다 훨씬 큰 성공을 이루자, 아버지는 이원우라는 인물에게 또 하나의 역할을 부여했다. 바로 우리의 ‘첫 번째 홍보맨’.

 

 세계적인 팬덤을 확보하고 있는 이원우가 ‘저는 외계 인류의 이주를 찬성합니다.’라고 성명을 낸다면 이는 긍정적인 여론 형성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기대하고 있다.)

 

 “괜찮은 후보 있어?”

 

 미류가 내가 있는 큐브로 들어오며 물었다. 한국을 거점으로 활동하게 될 그녀는 같은 질문을 오늘만 벌써 네 번째 하고 있다.

 

 “음…….”

 

 “저 사람 어때? E-19번.”

 

 미류가 E-19 화면 속 남성 지구인을 가리키며 물었다. 한 출판기념회에 참석 중인 그는 마주치는 사람마다 먼저 악수를 건네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글쎄.”

 

 나는 관심 없다는 듯 짧게 답했다.

 

 그에 대해 내가 지금까지 파악한 정보는 이름(한정철), 나이(31), 직업(국회의원 보좌관), 그리고 자신이 보좌하는 4선 의원과 큰아버지-조카 사이라는 것과 여자친구가 두 명이라는 사실.

 

 “별로야? 내가 어제 자기 전에 좀 보니까, 저 지구인 큰아버지가 자기 조카도 국회의원 시키려고 엄청 밀어주는 것 같던데. 물론, 한정철 본인의 야망도 엄청나고.”

 

 나는 미류의 말을 잠자코 듣기만 한다.

 

 “야망 있는 젊은 정치인! 파트너로 괜찮지 않아?”

 

 유세운동 중인 정치인처럼 미류는 양 팔을 쫙 벌리며 나의 바라본다.

 

 “아직은 그냥 정치인의 조카일 뿐이야.”

 

 나는 친절히 미류의 왼쪽 팔을 접어주고.

 

 “딱히 유능한 보좌관도 아니고. 겉만 번지르르해.”

 

 그녀의 오른쪽 팔도 마저 접어준다. 나에게 포박당한 모양새가 된 미류는 몸을 흔들며 내 손을 떼어낸다.

 

 “그러니까! 딱히 유능하지가 않으니까! 선거에서 이길 수 있도록 우리가 돕겠다고 하면, 쉽게 우리랑 손을 잡지 않겠어?”

 

 미류는 내 어깨에 한 손을 턱 올리며 나의 공감을 재촉한다.

 

 “저 사람의 정치적 야망과 무능함을 이용하겠다?”

 

 “바로 그거지!”

 

 미류가 내 어깨를 꽈악 누른다.

 

 “별로 좋은 생각 같지 않은데.”

 

 “아 왜?”

 

 내 뾰로통한 태도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미류는 내 어깨를 붙잡고 있던 손으로 내 등짝을 내려친다. 미류는 손이 거칠다. 특히 나에게.

 

 “네 말대로 저 지구인은 정치인이 되고 싶은 사람이야.”

 

 나는 그녀를 타이르듯이 말한다.

 

 “그래서?”

 

 “그런 사람이 과연 사회적 혼란을 반길까? 대중의 지지를 얻는 데는 오히려 우리의 반대편에 서는 게 더 효과적일 수도 있어.”

 

 내 반론에 미류의 입꼬리가 살짝 내려갔다.

 

 “국민 여러분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 외계침입자로부터 여러분을 지키기 위해 저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내 정치인 흉내에 미류가 백기를 든다.

 

 “에라이.”

 

 “게다가 저 남자 애인이 둘이야.”

 

 내 추가 지적에 미류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게 뭐 어쨌다고?”

 

 “스스로에 대한 양심, 타인에 대한 존중이 결여된 인간이라고.”

 

 내 말에 미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녀는 내게서 돌아서며, 들으라는 듯이 크게 혼잣말을 한다.

 

 “하여간 저 촌스러운 순정파 새끼.”

 

 나는 못 들은 척 한다. 저런 식으로 나를 구박해도 그녀 역시 이따금 진을 그리워한다는 걸 알고 있다.

 

 미류가 떠나간 뒤, 나는 다시 47개의 화면을 찬찬히 들여다 보기 시작했다.

 

 “어?”

 

 그러다 재빨리 E-47 화면을 확대시켰다. 울적한 여성 지구인이 일기를 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일기를 보는 일은 지난 38시간 사이에 새로 생긴 나의 취미활동이다.

 

 나는 E-47 카메라 앵글을 그녀의 노트북 화면에 고정시킨다. 그리고 그녀의 타자 속도에 맞춰 그녀의 이야기를 읽는다.

 

 

 ***

 

 

 이 집에 처음 들어올 때는 중딩이었던 내가 어느덧… 백수가 됐구나ㅋ 젠장ㅋ 내 인생의 모든 희로애락을 기억하는 곳. 나조차도 잊고 있던 기억의 조각들까지 곱게 품고 있었다.

 

 그 덕분에 짐을 정리하며 내 삶까지 돌아보게 됐다. 그리고 슬퍼졌다. 비록 금수저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어릴 적의 나는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었는데.

 

 왜 그런 칭찬을 듣게 된 건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글짓기반 선생님으로부터 작가로서의 재능이 있다는 말도 듣던 어릴 적의 나는… 작가를 꿈꾸는 백수가 되었다ㅋ 젠장.

 

 아무튼 사방에 열려 있던 수백 개의 문은 이제 몇 개쯤 열려 있으려나. 아니, 어릴 때는 아예 문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다. 온 사방에서 밝고 따뜻한 햇살이 쏟아졌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이상하게도 어두운 그림자를 느낀다. 이 말은 내가 닫힌 문 앞에 서 있다는 뜻일까?

 

 어버이날과 엄마아빠의 생일 때마다 ‘나중에 크면 꼭 성공해서 효도하겠다’는 편지를 쓰던 차영주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이제 크긴 다 컸는데, 효도는 언제 하니ㅜㅜ 에혀…

 

 나를 무척이나 사랑한다던 우리 아빠는 그 작은 카드만을 남긴 채 어디로 가버린 걸까.

 

 아기의 탄생을 축복하던 이모는 지금의 나를 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나는 그녀의 축복대로 자랐을까.

 

 우리 엄마는 나의 탯줄까지 보관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그토록 소중한 존재인 내가 이렇게 하찮은 사람이 됐다는 게 너무 슬프다.

 

 어제 오늘, 살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들을 보았다. 마지막 몇 달 동안의 몸무게를 매일 기록해둔 아빠의 달력, 나의 말라비틀어진 탯줄, 엄마친구의 편지, 이모의 일기 네 쪽, 엄마의 일기 두 쪽, 아빠가 엄마에게 보낸 일곱 쪽의 연애편지.

 

 기자를 때려치기 전에 이 글들을 마주했다면, 난 닥치고 계속 기자질을 했을 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의 드라마가 있다. 모두의 인생이 힘들고 모두의 이야기가 특별하다. 난 나만 특별한 줄 알았다. 등신. 나는 전혀 특별한 인간이 아니다. 이런 내가 작가가 되겠다니.

 

 아 두렵다. 자신이 없어져서.

 

 내가 그토록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은 건, 내가 얼마나 안 특별한 존재인지 알고 있기 때문일까.

 

 

 ***

 

 

 그녀의 일기는 방밖에서 들려오는 동생의 목소리와 함께 마무리 됐다.

 

 지난 38시간 동안 내가 그녀에 대해 파악한 정보는 이름(차영주), 나이(28), 직업(무직), 가족관계(엄마/여동생), 그리고 그녀의 가족이 내일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간다는 사실과 그 외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하고 중요하지 않은 것들(가령 그녀가 좋아하는 간식이라든가).

 

 “어? 이거 옛날에 너 쫓아다니던 애가 준 편지 아니야?”

 

 “헐, 그게 아직도 있어? 대박! 봐봐.”

 

 동생과 책장 정리를 시작한 그녀는 언제 울적했었냐는 듯 키득거리며 웃고 있다. 신기할 만큼, 다른 사람과 있을 때의 그녀는 항상 웃는다.

 

 나는 다시 화면을 전환해 47개의 영상을 다 띄운다. 그리고 다른 영상에는 특이사항이 없는지 살핀다.

 

 E-31번 지구인은 아까부터 말없이 담배만 피우고 있다. 2시간 전 그는 아내로부터 임신 소식을 들었다. 10살 어린 애인과의 새 출발을 꿈꾸던 그는 아내의 전화를 끊고 괴성을 질렀다.

 

 E-5번 지구인은 4시간 동안 술을 마시더니 결국 술집에서 뻗었다. 그녀는 오늘 원하던 회사에 최종합격했다.

 

 그때 E-42번 지구인이 요리를 하다 실수로 뜨거운 물을 엎는다. 저런. 나는 E-42 화면을 크게 확대한다.

 

 

 ***

 

 

 “미류랑 서로의 담당지역을 교환하고 싶습니다.”

 

 나의 갑작스러운 건의에 아버지가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이미 나와 얘기가 끝난 미류 외 다른 팀원들도 마찬가지.

 

 “이유는?”

 

 “제가 파트너로 삼고 싶은 지구인이 한국인이라서요.”

 

 “그게 누군데?”

 

 아버지가 흥미로운 표정을 짓는다. 47명이었던 한국인 파트너 후보는 현재 3명까지 줄어든 상태다.

 

 “E-47번, 차영주요.”

 

 “차영주가 누구지?”

 

 자호가 주변 팀원들을 두리번거리며 되묻는다.

 

 “그 있잖아, 일기 쓰는 여성 지구인.”

 

 “아아. 그 작가 지망생.”

 

 미류의 간결한 설명에 자호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다.

 

 “근데 그 지구인이랑 파트너를 하고 싶다고?”

 

 자호는 내게 이해할 수 없다는 눈초리를 보낸다.

 

 서유럽 담당인 된 자호는 일찌감치 ‘영국’이라는 나라의 왕세손과 그의 아내를 파트너 후보로 점찍어놓았다.

 

 그 두 지구인은 아버지의 런던 사인회에 오지도 않았지만, 자호는 이미 그전부터 그들을 파트너 1순위로 정해두었다. (“왕실 사람들이 영국 대중한테 엄청 인기가 많네!” 영국을 공부하던 자호의 큰 발견이었다.)

 

 아무튼. 그래서인지, 자호는 별로 특별할 것 없는 차영주에게 내가 꾸준한 관심을 갖는 걸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편이었다. (무려 4개월이 지나도록.)

 

 “일단 미류와 너 사이에는 합의가 끝난 거니?”

 

 “네! 저도 북미로 가고 싶습니다.”

 

 아버지의 질문에 미류가 재빨리 답했다.

 

 북미의 대중문화를 공부 중이던 내 옆에서 이것저것 만져보던 미류(의 홀로그램)는, 그녀의 표현에 따르면 ‘운명처럼’, 한 미국 밴드의 음악을 듣는 순간 매료됐고, 며칠 뒤 담당지역을 바꾸자는 내 제안에 기쁨의 주먹질을 날렸다.

 

 “음…… 그래. 뭐, 안 될 것도 없지.”

 

 엄지손가락으로 턱 아래를 문지르던 아버지는 나의 건의를 수락했다.

 

 “대신 차영주 씨를 꼭 설득하도록 해.”

 

 아버지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죠.”

 

 4개월 간 차영주를 관찰해온 나는 자신 있게 답했다.

 

 “근데 그 지구인이 우리한테 도움이 되겠어?”

 

 자호가 못내 아쉬운 얼굴로 묻는다.

 

 “일단, 영국 왕세손인가 하는 지구인보다는 접근 가능성이 100배쯤 높고.”

 

 내가 제시하는 근거에 미류가 키득거린다. 자호도 그 부분은 인정한다는 듯 슬쩍 웃는다.

 

 “그리고 현재 직업이 없기 때문에 24시간 내내 나를 도와줄 수 있고.”

 

 이 대목에서는 모두가 공감대를 형성했다.

 

 “그런 조건이라면 파트너 후보가 너무 많아지지 않아?”

 

 자호는 예외였지만.

 

 “무엇보다, 차영주라면 왠지 내가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아.”

 

 내 마지막 말에 미류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입모양으로 ‘뭐?’라고 물었지만 그녀는 어깨를 으쓱거릴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

 

 

 한국 현지 시간 오후 7시 30분.

 

 우리는 화성을 지나고 있었고, 차영주는 동생의 수술소식을 들었다.

 

 그 때부터 나는 단 한 순간도 E-47 영상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병원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불안해하던 차영주와 병원으로 들어가기 전 머뭇대던 발걸음.

 

 큰딸을 보고 무너져 내린 어머니와 그 앞에서 입술을 깨무는 차영주.

 

 작은딸의 상태에 대해 설명을 듣는 여읜 뒷모습과 의식 없는 여동생을 바라보는 언니의 얼굴.

 

 마치 곁에 있는 것처럼, 그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차영주를 설득할 거래 내용을 일부 수정해 차영주의 여동생을 첫 번째 거래 조건으로 넣었다.

 

 저 불쌍한 여성 지구인은 이제 나의 파트너 제안을 절대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 현지 시간 오전 3시 00분.

 

 우리는 지구에서는 보이지 않는 달의 뒤편에 도착했다.

 

 1시간 뒤 최종점검을 마치고 각자 자신의 거점 도시로 향하라는 지시 사항이 내려왔다.

 

 모두들 설렘과 긴장이 섞인 표정이었다. 나는 여전히 E-47 영상에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한국 현지 시간 오전 3시 22분.

 

 내가 한국의 지구인들처럼 검은색으로 머리를 염색하려는 찰나, 집으로 가던 차영주가 갑자기 택시기사를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자신을 당장 내려달라며 별 얘기를 다 한다.

 

 지구 위치 파악 시스템(GPS)은 차영주가 있는 위치가 마포대교라고 표시했다.

 

 “마포대교?”

 

 내 혼잣말을 인식한 정보시스템이 마포대교에 대한 정보를 띄웠다.

 

 ‘한강에 건설된 다리의 하나. 서울특별시 마포구 마포동과 영등포구 여의도동을 연결하는 다리로, 1970년 5월에 준공하였다. 전에는 ‘서울 대교’라 하였다. 길이는 1,389미터.’

 

 “저기가 산책하기에 그렇게 좋은가?”

 

 나는 산책을 하고 싶다는 차영주의 말을 떠올리며 물었다.

 

 정보시스템이 ‘마포대교는 한국(서울)의 자살명소입니다.’라는 정보를 추가했다.

 

 “자살?”

 

 나는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한국은 지구 내 자살률 1위 국가입니다.’라는 정보가 추가됐다.

 

 “젠장. 울적한 여성 지구인이 결국 사고를 치네.”

 

 한국 현지 시간 오전 3시 23분.

 

 나는 지시사항을 무시한 채 대열에서 이탈한다.

 

 “야, 너 어디가!”

 

 미류의 다급한 목소리가 내 비행선 안을 울리고, 나는 모든 통신을 차단하며 지구로 향한다.

 

 아, 속이 또 울렁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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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dream 16-11-05 05:01
 
* 비밀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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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dream 16-11-05 0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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