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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원초적 욕망
작가 : 박소영
작품등록일 : 2016.10.9

“당신을 위해, 당신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세상이 여기 있습니다. 당신이 원하던 외모로 살아가며 당신이 원하던 일을 이루고, 당신의 이상형과 당신이 원하는 사랑에 빠질 수 있습니다. 당신의 모든 상상을 현실로 만드십시오. 유토피아는 당신이 창조하는 완벽한 현실입니다.” 인간의 원초적 욕망이 결국 유토피아를 가능케 했다. 만 30세를 넘긴 사람은 누구나 유토피아에 갈 수 있는 세상. 그러나 실제 유토피아를 조작하는 것은 인간이 아닌 ‘그들’의 욕망이다. 이를 깨달은 몇몇 사람들은 유토피아가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세상을 찾아 나선다.

 
새벽 세 시 반. 마포대교 위.
작성일 : 16-10-09 21:53     조회 : 622     추천 : 1     분량 : 9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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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삐리리리. 삐리리리. 삐리리리.

 

 여기저기서 끊임없이 울려대는 전화.

 

 “제발 누구든 전화 좀 땡겨받아주세요!”

 

 맨 앞에 앉아 컴플레인 건을 처리하고 있는 대리님이 알바생들에게 목청껏 외쳐댄다.

 

 “네 감사합니다, 고객님. 즐거운 추석명절 보내세요.”

 

 내가 응대 중이던 전화를 빠르게 마무리하는데, 그새 다른 알바생이 전화를 땡겨받았다.

 

 후. 덕분에 잠시 숨 돌릴 틈이 생긴다. 나는 컴퓨터 전산시스템에 쭉 나열된 고객연락처 중 하나를 최대한 천천히 클릭하며 ‘말하지 않을 수 있는’ 찰나의 순간을 누린다.

 

 지-잉. 지-잉. 지-잉.

 

 무릎 위에 올려둔 내 핸드폰도 몇 분째 울리고 있다. 두 번이나 수신거부를 했는데도 엄마는 계속 전화를 걸어댄다.

 

 중요한 일인가?

 

 “여보세요?”

 

 고개를 숙여 몰래 전화를 받았다.

 

 ‘고객님, 안녕하십니까. 신대백화점 센트럴점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추석 선물 배송 때문에 주소 확인차 연락드렸습니다.’

 

 같은 멘트를 읊조리는 알바생 수십 명의 목소리가 돌림노래를 완성하며 엄마의 말소리를 차단한다.

 

 “엄마 잘 안 들려.”

 

 나는 왼쪽 귀를 틀어막으며 오른쪽 귀에 대고 있는 핸드폰을 더욱 밀착시켰다.

 

 “지금 빨리, 빨리 한국병원으로 와! 빨리!”

 

 울음과 고함으로 뒤섞인 엄마의 음성. 평소의 엄마와는 전혀 다른, 그러나 소름 돋게 익숙한 느낌. 시끄러운 주변 소음이 일순간에 고요해지는 착각이 든다.

 

 “무슨, 일이야?”

 

 “영지가…… 다쳤어……. 지금 수술 들어갔어.”

 

 엄마의 말들이 힘없이 축축 늘어진다.

 

 “뭐? 무슨 소리야?”

 

 나는 화난 사람처럼 되묻는다.

 

 “나도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일단 빨리 와! 빨리!”

 

 엄마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다급함이 10년 전과 너무 똑같아서 무섭다.

 

 나 역시 10년 전과 마찬가지로 엄마의 전화를 끊고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난다.

 

 저녁 시간에 사둔 영지의 생일 케이크가 내 의자 아래에서 날 바라보고 있다. ‘난 어떻게 할 거야?’

 

 “어? 언니 벌써 가요? 무슨 좋은 일 있어요?”

 

 케이크를 집어 드는 내게 6살 어린 옆자리 알바생이 생글거리며 묻는다. 첫 데이트에 나서는 친구를 응원하듯.

 

 나는 그녀를 무시하며 자꾸만 땅바닥에 눌어붙는 발걸음을 재촉한다.

 

 

 ***

 

 

 “엄마가 여기 있을 테니까 넌 집에 가서 자.”

 

 많이 가라앉긴 했지만, 엄마는 다시 평소의 목소리를 되찾았다. 본래 그녀는 자신이 바스러지고 또 바스러져도, 딸들 앞에서는 티내지 않는다. 세상 그 누구보다 강인한 우리 엄마….

 

 나 역시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여전히 꿀 먹은 벙어리처럼 엄마 곁에 앉아 있다.

 

 영지의 침상 근처에 놓아둔 케이크가 날 바라본다. ‘교통사고로 의식도 못 찾고 있는 여동생 곁에 날 굳이 앉혀놔야겠어? 가난한 백수지만 동생 생일만큼은 챙긴다고 유세떠는 거야?’

 

 케이크는 정말 괜히 가져왔다. 엄마에게 오늘이 영지의 생일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재확인시켜주고 있다.

 

 “아냐, 나도 여기 있을게.”

 

 나는 케이크를 슬쩍 침대 아래로 밀어 넣으며 말했다.

 

 “괜찮아. 의사가 오늘 수술은 잘 됐다고 하잖아.”

 

 엄마가 나를 타이른다. 담당 의사도 영지가 깨어날 것이라고 자신했다.

 

 하지만 그는 영지가 식물인간상태에 빠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고 덧붙이는 바람에 나와 엄마의 불안을 가중시켰다.

 

 영지를 두고 집에 가기가 두렵다. 내가 집에 갔던 새벽에 아빠가 떠났었다.

 

 “그래두.”

 

 나는 힘없이 굽어 있는 엄마의 등을 보다, 눈을 크게 깜빡거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힘든 엄마 옆에서 나까지 울 수는 없다.

 

 “네가 집에 가서 이것저것 좀 챙겨왔으면 해서 그래.”

 

 말하는 엄마의 시선은 영지의 왼쪽 무릎에 고정돼 있다.

 

 무릎 뼈가 산산이 부서지면서 무릎을 통과하는 신경이 모두 절단됐다. 수술로 일부분은 접합했지만 모든 신경을 회복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게 아까 그 의사의 소견이었다. 의사들은 뭐 하나 확실한 법이 없다.

 

 보는 사람도 불편할 만큼 여러 개의 깁스로 채워진 발레리나의 발과 다리.

 

 백조처럼 아름다운 영지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없게 됐다. 영지는 이제 보통 사람처럼 걷는 일도 쉽지 않을 것이다.

 

 촉망받는 발레리나인 영지가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일단 나와 엄마는 영지가 무사히 깨어나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란다.

 

 “…뭐 필요한데?”

 

 나는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재차 입술을 깨물었다.

 

 “미역국 끓여놨는데, 그거 조금만 담아와.”

 

 무슨 국이든 두세 번 졸인 걸 좋아하는 영지를 위해 엄마는 올해도 미역국을 미리 끓여놓았나 보다.

 

 “알겠어. 다른 건?”

 

 나는 눈물이 터져나오기 전에 부랴부랴 병실을 나섰다.

 

 

 ***

 

 

 “기사님, 저 여기서 내릴게요.”

 

 이제 막 마포대교로 들어선 택시가 주춤거리며 속도를 줄인다.

 

 “에? 아가씨 연서동으로 간다며?”

 

 기사 아저씨가 백미러를 통해 의문스러운 눈초리를 보낸다.

 

 “날이 좋아서, 좀 걸으려구요.”

 

 카드를 내밀며 으레 그렇듯 예의바른 미소를 짓는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조차 미소 지을 수 있다. 신기하다.

 

 하지만 기사 아저씨는 내 얼굴을 힐끔거릴 뿐, 택시는 여전히 움직인다.

 

 기사 아저씨의 딸로 보이는 어린 여자 아이. 그 귀여운 사진 아래로, 시계가 새벽 3시 22분을 가리키고 있다.

 

 ‘날이 좋으니 좀 걷고 싶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이해되는 시간대는 아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별 하나 없는 밤하늘과 그보다 더 시커먼 한강뿐.

 

 “저기, 아가씨. 혹시 이상한 생각하는 거 아니지? 아까 병원에서 탔을 때부터 표정이 안 좋던데.”

 

 기사 아저씨가 조심스럽게 물어온다.

 

 “걱정마세요. 저 안 죽어요.”

 

 나의 말끝에 헛웃음이 묻어난다. 이 아저씨야 말로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럼 연서동 근처에서 내려드릴게, 거기서 걸어요.”

 

 아저씨는 나와 타협을 시도한다.

 

 “기사님.”

 

 아저씨의 귀여운 딸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한 손으로 운전석의 오른쪽 끝을 부여잡는다.

 

 “죽다 살아난 여동생이 여전히 의식을 잃은 채로 아까 그 병원에 누워있어요. 그리고 그 앞에는, 이미 10년 전에 다른 병원에서 남편을 떠나보낸 저희 엄마가 앉아 있구요.”

 

 운전석 끄트머리를 붙잡은 내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런데 제가 여기서 뛰어내리기라도 할 거라고 생각하세요? 아저씨라면 그러실 수 있어요?”

 

 나도 아저씨도 딸아이의 사진을 바라보고 있다.

 

 “저 그렇게 이기적인 애 아니에요.”

 

 거짓말이다. 사실 나는 매우 이기적인 딸이다. 못된 언니고, 찌질한 인간이다.

 

 “내려주세요.”

 

 나는 다시 한 번 카드를 들이민다. 택시비는 있냐고 묻던 엄마의 얼굴이 겹쳐졌다. ‘당연하지’라고 답했지만, 사실 불안하다.

 

 통장 잔고에 145,264원이 찍힌 걸 보고 부랴부랴 백화점 단기알바를 시작했다. 알바비는 이번 달 말에나 들어온다.

 

 택시가 소심하게 멈춰 서고, 다행히도 카드단말기에서 영수증이 솟아나온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택시가 아주 느릿느릿 사라진 뒤, 나는 다리 난간에 온 몸을 기댔다.

 

 두 팔을 난간 밖으로 축 늘어뜨린 채 크게 심호흡을 한다. 공허한 새벽 공기가 나를 훑고 지나간다.

 

 내 판단에 따르면, 망해가고 있던 나의 인생은 이제 확실하게 망했다.

 

 그리고 이러한 판단은 내가 얼마나 못된 언니이며 찌질한 인간인 지를 잘 보여준다.

 

 하나뿐인 여동생이 의식을 잃고 누워있는 마당에, 그로 인해 엄마의 오랜 소망과 기쁨이 한없는 좌절과 슬픔으로 뒤바뀐 이 순간에도, 나는 내 인생을 생각하고 있다.

 

 이제는 동생 대신 내가 엄마의 희망이 돼야 한다. 10년만의 세대교체다.

 

 하지만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단순계약직 혹은 아주 저렴한 정규직 자리에 나의 변변찮은 이력서를 보내는 일뿐이다.

 

 아니면, 내가 제 발로 박차고 나온 회사를 찾아가 눈물로 복직을 호소할 수 있……으려나. 그러기엔 시간이 너무 많이 흐른 것 같다.

 

 가슴이 뻐근하고 시야가 흐려진다.

 

 내 뇌가 없어지거나, 나 자신이 없어지면 좋겠다.

 

 그렇지 않고서는 지금부터 한동안, 어쩌면 평생을 견뎌내야 할 날들이 나를 너무 고통스럽게 할 것 같다. 나는 이제 꿈이 아닌 현실만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나는 이내 엄마를 생각한다. 내가 앞으로 겪어야 할 일보다 더 많은 일을 감내하며 살아온 엄마.

 

 난간 밖으로 더 몸을 기울인다.

 

 조금만 더. 그러면 정말 앞으로 고꾸라질 것 같다.

 

 그때 바지 뒷주머니에 꽂아둔 핸드폰이 부르르 떨려온다. 영지가 깨어났다는 엄마의 전화일까? 두 발로 단단히 땅을 짚고 일어서 재빠르게 핸드폰을 꺼낸다.

 

 ‘발신번호 표시 금지’

 

 엄마가 아니다. 누구지? 이 새벽에 광고전화를 거는 몰상식한 업체가 있지는 않을 테고.

 

 그 순간.

 

 한때 좋아했던 남자애, 혹은 한동안 소식이 끊겼던, 그러나 과거에는 매우 친했던 누군가의 전화이길 바라는 이상한 마음이 생긴다.

 

 지금도 나와 인연을 맺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보여줄 수 없는 내 못난 속내를 그냥 들어주고, 다시 제 갈 길로 돌아설 사람.

 

 “여보세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머릿속 깊숙이 구겨 넣으며 전화를 받았다.

 

 내가 기대하는 일의 열에 아홉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사실 난 잘 알고 있다. 이제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상한 짓 할 생각 말고, 기다려요.”

 

 핸드폰 너머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투는 다급했지만 목소리는 한없이 차분했다.

 

 “네? 누구세요?”

 

 나는 눈을 살짝 찡그리며 묻는다.

 

 “만나서 얘기해요. 곧 도착하니까.”

 

 남자의 목소리는 꽤나 단호하다. 흠.

 

 “잘못 거신 것 같은데요?”

 

 내 말에 상대는 답이 없다. 난 핸드폰을 슬그머니 귀에서 떼어낸다.

 

 “끊지 마요!”

 

 이어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려는데 남자가 다급하게 외쳤다.

 

 “차영주 씨!”

 

 그리고 그는 정확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네? 저요?”

 

 내가 깜짝 놀라 묻는다.

 

 “누구…시죠?”

 

 그리고 조심스럽게 다시 묻는다.

 

 “아… 차영주 씨는 아직 저를 몰라요.”

 

 잠깐의 정적 뒤 남자는 이렇게 답했다.

 

 새벽 세 시 반. 마포대교 위.

 

 알 수 없는 번호. 내 이름을 아는 낯선 남자.

 

 그가 나에게 오고 있다.

 

 심장박동이 조금 전까지의 움직임에서 슬며시 벗어난다.

 

 “어…….”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내가 이리저리 눈을 굴려대는데 어디선가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작은 이물질이 눈을 파고들고, 나는 고개를 숙이며 뒤로 휙 돌아섰다.

 

 그리고 누군가와 부딪혔다. 그 누군가는 나의 어깨를 감싸 안았고, 나는 꼭 감았던 눈을 힘겹게 뜬다.

 

 그러자 나보다 꽤 키가 큰, 오묘한 생김새의 남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하얀 피부와 백금발. 입체적인 얼굴선, 그러나 보일 듯 말 듯 옅은 쌍꺼풀의 부드러운 눈매.

 

 국적을 가늠하기 어려운 묘한 얼굴에 당최 감정이라고는 묻어나지 않는 표정.

 

 큰 키와 단단한 체격. 고급스러워 보이는 검은 정장.

 

 마치 할리우드 영화에 나오는, 미스테리한 단체의 요원 같다.

 

 “누구세요?”

 

 뭔가에 홀린 듯 나는 멍하니 묻는다.

 

 남자의 두 눈에는, 처음으로 남극펭귄을 만난 북극곰의 호기심, 오랫동안 뒤쫓던 살인용의자를 마주한 베테랑 형사의 성취감 같은 게 한 데 뒤섞여 있다.

 

 “지금 차영주 씨랑 통화하고 있는 사람이요.”

 

 그의 목소리가 내 눈 앞에서, 그리고 휴대폰 너머로 동시에 들려온다. 이상한 일이다. 남자의 손에는 핸드폰이 쥐어져있지 않다.

 

 그리고 내가 깨달은 또 한 가지. 난 아직도 이 남자의 품에 안겨 있다!

 

 “어, 잠시만요.”

 

 나는 엉거주춤 남자의 품에서 벗어난다. 그러자 그는 바로 내 한쪽 손목을 낚아챈다.

 

 “뭐하시는 거예요 지금?”

 

 나는 ‘이상한 개수작 부릴 생각하지 마’ 하는 눈빛으로 남자를 쏘아본다.

 

 멀쩡하게 생긴 이 남자가 실은 변태나 사이코패스인 각종 시나리오를 머릿속에 그리며, 그럼에도 겁먹지 않은 척 눈을 부릅뜬다.

 

 “죽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그는 앞뒤 맥락이라고는 전혀 없는 얘기를 한다.

 

 “네?”

 

 뭐지? 날 죽이려는 게 아니라 날 살리겠다고? 근데 뭘 근거로 내가 죽을 거라고 단정 짓는 데? 여기가 마포대교라서?

 

 그 전에, 당신 대체 누구야?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고, 내 번호는 또 어떻게 알았어? 게다가,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 건, 그건 정말 어떻게 알았는데?

 

 “저 안 죽어요. 그러니까 팔 좀 놓고 얘기하죠?”

 

 내 안의 수많은 물음을 꾹꾹 누른 채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했다.

 

 남자의 무표정에는 상대를 압도하는 무언가가 있고, 나는 쫄았다는 걸 숨기려 애쓰고 있다. 젠장.

 

 “정말이에요?”

 

 남자는 단호하지만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물었다. 내 말이 진짜인지 확인하려는 듯 내 얼굴을 찬찬히 살핀다.

 

 “네.”

 

 나는 그의 시선을 마주하며 크게 답한다.

 

 “죽는 것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거든요.”

 

 그리고 부러 까칠하게 덧붙인다.

 

 나는 그 누구 앞에서도 기죽지 않으려 노력한다. 처음 만난 사람과의 대화는 항상 내가 리드해야 하며, 강자 앞에서는 그에게 지지 않을, 딱 그만큼의 강한 척을 한다.

 

 나는 타고난 성향 자체가 조용하고 내성적이었다. 쉽게 얼굴이 빨개지고, 항상 조그만 목소리로 말하는 아이.

 

 이런 성격은 세상을 사는 데 별로 유용하지 못했다. 특히 낯선 환경에 자주 노출되는 이방인의 경우 더더욱.

 

 그래서 나는 그런 나 자신을 감추고, 당당하고 활기찬, 언제나 방긋방긋 잘 웃는 모습으로 살아가려 부단히 노력해왔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남자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되받아치는 중이다. ‘나는 당신에게 밀리지 않는다’는 듯이 보이기 위해.

 

 남자는 이내 말없이 나를 놓아주었다.

 

 “누구시냐고요.”

 

 괜히 손목을 쓰다듬으며 나는 다시 한 번 이 대화의 주도권을 쥐려한다.

 

 “솔직하게 말할게요.”

 

 남자는 짧은 심호흡을 했다.

 

 “모르겠어요, 어떻게 설명해야 차영주 씨가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

 

 그리고 겨우 이딴 대답을 내놓았다.

 

 무릎 뼈가 산산조각나버린 내 동생이 의식조차 되찾지 못한 채 병상에 누워있다.

 

 그 앞에는 온 몸의 수분이 빠져나간, 자신의 인생을 갈아내 두 딸을 먹여살려온 우리 엄마가 앉아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글을 쓰고 싶다며 멀쩡히 잘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1년 넘게 백수로 살아온, 우리 집의 맏딸인 내가, 자신을 어떻게 소개해야할지도 모르겠다는 남자와 목적 없는 대화에 낭비할 수 있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정답은?

 

 단 1초도 없음.

 

 “그럼,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알게 되면 그때 다시 찾아오세요. 저를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는 그 때도 잘 아시겠죠.”

 

 알지도 못하는 남자와의 다음 만남을 제멋대로 기약한 뒤 나는 재빠르게 돌아섰다.

 

 아, 근데 나 너무 비아냥거렸나…?

 

 뒤늦은 후회와 일말의 두려움을 애써 무시하며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이대로 두면 차영주 씨 동생은 결국 죽어요. 깨어난다고 해도 다시는 무대에 설 수 없을 테고.”

 

 남자는 내가 절대 자신을 외면할 수 없는 말을 던진다.

 

 “지금 차영주 씨는 내 도움이 필요해요.”

 

 나는 다시 그를 향해 돌아섰다. 그는 여전히 감정 없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를 알아요?”

 

 내가 정말 되묻고 싶었던 건 ‘방금 한 말 진짜에요?’였다. 하지만 알지도 못하는 사람 앞에서 그렇게 절박한 꼴을 내보이는 건 평소의 나답지 못한 일.

 

 “나는 차영주 씨한테 거래를 제안을 하려고 왔어요. 차영주 씨뿐만 아니라 차영주 씨 가족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거래.”

 

 악마의 완벽한 속삭임.

 

 할리우드 영화에 나오는, 자신이 세상을 구할 중요한 인물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주인공에게 접근하는, 미스테리한 단체의 요원.

 

 지금 이 남자가 그런 인물쯤으로 보인다.

 

 물론 나는 세상을 구할 주인공은 전혀 아니다. 그저 인생파탄에 직면한, 그래서 미스테리한 단체가 시키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따를 것 같은 비운의 인물쯤 되겠다.

 

 “네. 차영주 씨를 알아요. 특히, 지난 5개월간의 차영주 씨에 대해서는 꽤나 잘 알고 있어요.”

 

 지난 5개월이라면.

 

 1년 이상 지속된 내 백수생활의 후반기에 해당하는 시기로서, 더 이상은 불가능할 정도로 못나고 찌질한 방구석 폐인이었던 차영주를 지칭하는 것이리라.

 

 이쯤 되면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반드시 들어야만 한다.

 

 “대체 누구신데요.”

 

 지난 5개월 간 몰래 나를 염탐해온, 여자 보는 눈이 더럽게도 없는 스토커라거나, 수개월에 걸쳐 살해 대상을 관찰하는 치밀한 사이코패스라거나, 그런 것만 아니길. 제발.

 

 나는 침을 한 번 꼴깍 삼키고, 그는 입을 연다.

 

 “일단. 저는 지구에서 15억 광년 떨어진 곳에서 왔어요. 지구인 여러분이 아직 발견하지 못한 행성에서요.”

 

 “……네?”

 

 한국형 신파드라마의 전형적인 공식을 따라가던 나의 하루에 난데없이 난입한 할리우드 SF 캐릭터.

 

 아…… 이걸, 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나를 혼란에 빠뜨린 당사자는 여전히, 불필요할 만큼, 침착하고 무감각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다.

 

 뭐…지?

 

 미친놈인가?

 

 “말했잖아요.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모르겠다고.”

 

 황당무계함으로 점철된 내 얼굴을 보며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사람이 이리도 태연하게 미치다니.

 

 “대, 대체 저한테 필요한 게 뭐에요?”

 

 이건 ‘대체 저한테 왜 이러세요.(눈물)’를 나름 강인하게 표현한 말이다.

 

 하필 오늘 같은 날, 왜 이런 미친놈이 나를 찾아왔을까.

 

 내 이름과 번호, 영지에 대한 얘기만 없었더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달아났을 텐데. 이 미친놈이 우리 집이나 영지의 병원까지 알고 있을까 걱정된다.

 

 “제가 차영주 씨에게 요구할 내용은 좀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에요.”

 

 “그…래서요?”

 

 “제가 차영주 씨께 해드릴 수 있는 것부터 말할게요.”

 

 남자는 미리 준비해온 프리젠테이션을 선보이는, 능숙한 비즈니스맨 같았다.

 

 “첫째, 동생 차영지 씨를 살리고, 손상된 무릎 신경도 완벽하게 복원해드리겠습니다. 원하신다면 동생 분을 국립발레단의 수석무용수로 만들어드릴 수도 있습니다.”

 

 남자는 내 동생의 이름, 그 아이의 현재 상태와 가장 소중한 목표까지 알고 있었다.

 

 “둘째, 앞으로 6개월 간 차영주 씨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겠습니다. 동생분의 치료비를 포함해 넉넉한 보수를 지불해드릴게요.”

 

 내가 백수인 것과 재취업을 해야 한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으며.

 

 “셋째, 그 6개월 뒤에는 차영주 씨를 작가로 데뷔시키겠습니다.”

 

 나의 오랜 꿈마저 알고 있었다. 16살 나이에 걸려들어 10년도 넘게 허우적대고 있는 꿈.

 

 순간, 내가 이미 작가가 된 듯한 착각이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사라진다.

 

 “이 외에도 기타, 지구사회의 법과 도덕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차영주 씨가 원하는 일들을 향후 1년 간 돕겠습니다.”

 

 그것으로 남자의 완벽한 발표가 끝났다.

 

 그리고 또 한 번 사용된 ‘지구’라는 표현에 나는 번쩍 정신을 차렸다.

 

 이 사람은 제정신이 아니다.

 

 “정말 그걸 다 해주겠다고요?”

 

 “네.”

 

 하지만 나는 그를 끊어내지 못한다.

 

 그의 손에는 고객의 니즈를 정확히 파악한 안성맞춤 패키지 상품이 들려 있으니까.

 

 “대체 왜요?”

 

 “나한테는 차영주 씨가 필요해요. 기브 앤 테이크라고 하죠?”

 

 그의 새까만 눈동자가 나를 설득한다.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댄다.

 

 이 남자가 원하는 게 뭘까.

 

 사이비 종교로의 권유? 얼토당토 않는 종교 법전에 딱 나 같이 생긴, 나만큼 이상한 애를 제물로 바쳐야 세계의 평화가 올 거라고 기술돼 있기라도 한가?

 

 아니면.

 

 그냥 이대로 나를 끌고 가 내 안의 십이지장을 모두 팔아버릴 속셈?

 

 근데 그럴 거면 굳이 나에 대해 조사할 필요는 없잖아…?

 

 “방금까지 내가 한 말, 이해했어요?”

 

 불안장애라도 얻은 것처럼 현란하게 눈알을 굴려대는 나를 보며 그가 묻는다. 그는 한쪽 눈썹을 추켜세운다. ‘너 괜찮냐’고 묻는 것 같다.

 

 “그래요. 뭐, 다 좋은데! 지구 밖에서 왔다니? 대체 왜 그런 소리를 해서 사람을 골치 아프게 해요? 그냥 솔직하게 말하면 안 돼요?”

 

 나는 어린애가 응석을 부리듯 불만을 쏟아냈고, 남자는 처음으로 표정의 변화를 보였다.

 

 결백함. 지금 그의 얼굴은 결백함을 주장하고 있다. ‘나 외계인 맞아. 그게 그렇게 받아들이기 어렵니?’

 

 내 인생이 완벽하게 망했음을 선고받은 지 8시간이 흐른, 새벽 세시 반.

 

 삶의 무게를 견뎌내는 사람들의 생과 사가 구분되는, 마포대교 위.

 

 나는 자신이 지구 밖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미친놈과 마주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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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dream 16-11-05 04:51
 
신선하네요. 재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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