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세계에서 부는 시원한 바람은 나의 기분을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반짝이는 강물을 볼 때면 나도 반짝이는 것 같아 행복해 질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반짝이는 강물을 정말 좋아한다. 하루 종일 바라보고 있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한참을 잔잔히 흐르는 강물 옆에 앉아 있었다. 금빛 햇살이 강물에 반사되어 눈부셨고, 바람이 만들어 내는 물결의 흔들림에 강물은 쉬지 않고 반짝였다.
이 모든 장면을 눈에 꼭 담아 놓고 싶었다. 아니 어떻게든 내가 보고 있는 이 풍경을 담아보고 싶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빌려 줄 수만 있으면 그러고 싶었다. 이 풍경을 보는 그 누군가도 나처럼 행복해 질 수 있는 기회가 생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순간 은호가 생각났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쪽 세계는 오늘도 달라져 있었다. 얼마 전까지 빽빽하게 초록빛이었던 나무들이 확실히 색이 변했음을 제대로 확인 할 수 있는 때가 된 것 같았다. 단풍이라고 했다. 노랗고, 빨간 빛깔로 물들어 있었다. 한참을 바라보았다. 신기해서, 그 색들이 예뻐서.
이쪽 세계는 자주 변했고, 다양했고, 그래서 예뻤다. 나의 세계랑은 느낌이 확실히 달랐다.
은호가 보였다. 은호도 빨간 나뭇잎들을 바라보며 걸어온다. 나는 은호 옆으로 가서 같이 걸었다. 은호는 바람에 떨어지고 있는 빨간 단풍잎을 공중에서 잡았다.
“아싸”
은호의 의외의 소리에 웃음이 났다. 은호는 잡은 단풍잎을 요리조리 돌려보았다. 그러고는 손바닥 위에 올렸다. 은호의 작은 손보다도 훨씬 작은 단풍잎이었다. 은호는 다른 한 손으로 단풍잎을 덮었다. 그러고는 꼭 눌렀다. 단풍잎을 다시 손가락으로 잡았다. 은호의 마음에 드는 듯 했다. 단풍잎을 가방 안 책 사이에 넣었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걸었다.
은호는 갑자기 발끝으로 걸었다. 나는 그런 은호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은호뿐만이 아니라 주위에 몇몇 사람들도 은호처럼 걸었다. 바닥에 떨어진 노란 열매를 피하고 있었다. 그리고 은호는 양손으로 코 주위를 가렸다.
‘냄새가 나나?’
은호는 재빨리 걸어서 그 근처를 벗어났다. 어떤 냄새가 나길래 저렇게까지 하는지 궁금해졌다. 노란 열매는 작아서 귀여웠고, 노란 단풍잎은 화려하지 않았지만 둥글어서 예뻤다. 저런 나무를 왜 피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은호의 집에 들어왔다. 역시나 아무 소리도 없었고, 어두웠다. 은호는 현관입구의 신발들을 정리를 했다. 흐트러진 건 하나도 없었는데 그냥 은호의 습관인 것 같았다. 집에 들어오면 늘 하는 행동처럼 보였다.
은호는 옷을 갈아입고,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그리고 아까 넣어둔 빨간 단풍잎을 꺼냈다. 티슈 한 장을 꺼내 단풍잎을 천천히 닦아냈다. 그리고는 다시 책으로 눌렀다. 서랍을 열더니 가위랑 투명한 비닐 같은 것을 가져왔다. 비닐치고는 단단해 보였다. 그 투명하고 단단한 비닐 같은 것의 중간을 펼쳤다. 단풍잎을 그 사이에 넣어 꼭꼭 눌렀다. 단풍잎이 단단해졌다. 그 단단해진 단풍잎을 가위로 단풍잎 모양대로 잘라냈다.
은호는 무언가 생각난 듯 방으로 들어가서 작은 상자 하나를 가지고 나왔다. 상자를 연 은호는 투명하고 단단한 비닐에 넣어진 단풍잎 여러 개를 꺼냈다. 그 단풍잎들을 탁자위에 펼쳐놓았다. 그 밑에 적힌 숫자가 다 달랐다. 은호는 또 다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잠시 후 오늘 들고 온 단풍잎에도 숫자를 썼다.
나는 은호가 펼쳐 놓은 단풍잎들을 보고 있다. 색깔도 조금씩 달랐고, 모양도 달랐다. 꽤 많이 모아 놓았다. 아까 은호가 피했던 나무 열매의 노란 잎도 있었다.
한참을 구경했나보다. 은호가 조용해서 보니, 쿠션으로 얼굴을 덮고 소파에 누워있었다. 그새 잠이 든 것 같았다. 아무 움직임도, 소리도 없는 것 보니 잠이 든 게 확실했다. 이상한 상태로 잠이 들 수 있는 게 신기했다.
은호 얼굴 위에 올려 진 쿠션 위에 사진이 하나 있었다. 자세히 다가가서 보았다. 그 사진 속 에 은호가 있었다.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활짝 웃으며 빨간 단풍잎을 하나 손에 들고 있었다. 처음 본 은호의 표정 때문에 그 사진을 한참 바라보았다. 처음 본 모습이었지만, 은호에게 딱 맞는 표정이었다. 눈을 감아도 떠올릴 수 있을 만큼 은호에게 드디어 어울리는 표정을 본 것이었다.
그렇게 사진 속 은호의 얼굴에 신기해하며 그 사진을 바라보다가 점차 은호의 얼굴에서 벗어나 은호가 서 있는 뒤가 보였다. 다른 누군가의 뒷모습이었다. 은호가 그 사람의 뒤를 기대어 서 있었다. 그 사람의 한쪽 손에는 노란 단풍잎이 들려 있었다. 은호는 그 노란 단풍잎을 바라보며 재미있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나의 시선은 그 사진 속 배경이 된 반짝이는 강물을 발견했다. 이쪽 세계에 와서는 그런 곳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여기도 나의 세계랑 비슷한 곳이 있었다. 그 사진 속 강물의 흐르는 물결이 빛에 의해 반짝이고 있었다. 마음속에서 찌릿했다. 반가워서. 여기도 저런 곳이 있다면 굳이 내가 나의 세계에서 담아 올 필요가 없었다.
은호가 저곳을 봤을 텐데, 봤으면 분명 행복해 질수 있었을 건데 왜 행복해 보이지 않을까. 나는 순간 여러 가지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때 소리가 들렸다. 은호한테서 나는 소리가 확실했다. 은호가 아주 잠깐 흐느낀 것 같았다. 그러니까 우는 건 아닌데, 그럼 아까 울었나? 분명 나는 못 들었는데. 나는 확신 할 수 없었다. 확인할 방법도 없었다. 나는 다시 그 사진을 바라보았다. 어딘지 궁금했다. 가서 보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은호를 데려가는 방법을 찾고 싶었다. 그러나 나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지 알 수 없다. 나는 다만 주어진 일을 할 뿐이다. 그래서 처음으로 나의 일이 답답했다.
은호가 움직였다. 은호 얼굴 위에 있던 쿠션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은호의 얼굴이 보였다. 눈 주위에 눈물이 있었다. 은호가 울었던 게 확실했다. 혼자서 소리 없이 은호가 울었다. 내가 옆에 있었는데 나도 못들을 정도로 소리 없이 은호가 울었다.
은호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사진 속 은호를 바라보았다. 은호가 저 사진 속, 저곳에 가면 사진 속처럼 저렇게 웃을까? 저곳에 가면 분명 은호도 안 울고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은호가 진심으로 행복하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랬다. 누구한테,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면서 바랬다.
‘은호가 행복하게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