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8시, 담희는 새로운 일과를 추가해볼까 싶어 자취방 근처의 야트막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일이 끝나고 운동을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퇴근 시간이면 해가 뉘엿뉘엿 저무는지라 산책을 다니기에는 위험했다. 거기다 밤의 분위기 때문에 되려 겁을 집어먹게 되어 해가 지면 집에서 잘 나오지 않게 된다.
“공기는 좋네.”
자취하기 전까지는 고모와 산책을 자주 했기에 혼자 다니는 것은 조금 신선한 느낌이 들면서도 조금 쓸쓸했다. 산책로가 닦여진 산을 오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어제의 일을 떠올렸다.
“강동원.”
남자의 이름을 떠올린 그녀는 풋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주위에 아무도 없음에도 차마 남의 이름을 비웃는 거 같아 애써 웃음을 참아냈다.
특히 어제는 웃음을 참느라 곤욕을 치러야 했다. 바로 직전에 이름을 비웃었다고 오해하여 화를 냈는데 염치없이 상대의 이름을 듣고 웃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창피한지 시선을 피하는 그의 행동으로 미루어 볼 때 자신의 이름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어 보였다.
'하긴 아무리 잘생겼어도 강동원이라는 이름이면 부담스럽겠지.'
우연찮게 동명이인인 이들이 측은해졌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계속해서 떠오르는 그의 표정과 이름에 담희는 피식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저승차사라지만 그런 인간적인 면모에 친근감을 느꼈다.
"어?"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숲과는 이질적인 냄새가 바람에 실려 날아왔다. 조금은 탄내와 같으나 향긋한 냄새에 바람이 불어온 방향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자주 맡아본 적은 없어도 왜인지 익숙한 냄새였다.
“촛불? 아닌데.”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이끌리듯 걸음을 옮기며 냄새의 정체를 유추해보고 있었다. 예상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날아온 냄새였기에 곧이어 냄새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향?”
누군지 모를 묘비 앞, 상석에 올려진 향로에는 작게 연기를 내며 타들어 가는 향이 꽂혀 있었다. 성묘까지는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다녀간 흔적이 남아있었다.
담희는 조심스레 주위를 둘러보고는 크게 안심했다.
“귀신은 없네.”
무덤가라고 하면 무덤의 주인을 비롯한 다른 귀신들이 있을 거 같은 분위기였다. 조금 무서운 느낌도 들어 절로 몸이 경직되었다.
냄새의 정체를 알았기에 담희는 다시 걸음을 재촉해 왔던 길을 돌아갔다.
“아, 그 할머니가 다녀가신 건가?”
조금 전 스쳐 지나가던 노부부의 모습이 떠올랐다. 정확하게는 노부부가 맞는지 알 수 없지만, 겉보기에는 그렇게 보였다.
“무덤의 주인은…….”
일순 할머니의 옆에 함께 있던 할아버지 귀신을 떠올리다 고개를 저었다. 함부로 속단해도 좋을 일이 아니기에 과한 생각을 털어냈다.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출근길, 그러나 평소와는 다르게 일찍 도착한 담희는 버스를 내리기 전부터 버스 정류장 근처를 유심히 살폈다. 또 동원이 모습을 보일까 하는 궁금증 때문이었다.
저승차사인 그를 또 만날 수 있는 건가 하는 기대감과 공포감이 서로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듯 그녀의 가슴을 뛰게 했다. 그녀의 기대에 부응하듯 버스 창문 너머로 하얀 도포 차림의 동원이 보였다. 이내 문이 열리고 담희는 침을 꿀꺽 삼키며 용기를 내어 버스에서 내렸다.
“오늘은 어제보다 빠르구나.”
“네, 할 게 있어서요.”
거짓말이었다. 그가 정류장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 자신도 모르게 출근을 재촉했다.
“그럼 빨리 들어가 보도록 해.”
동원은 조금 아쉬운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담희 또한 거짓말이었기 때문에 당황스러웠다. 바로 들어가면 오히려 하릴없이 일만 일찍 시작할 뿐이었다.
“네, 그래야죠.”
담희는 머릿속으로 대화를 이을만한 질문을 떠올리려 노력했다.
“그런데…… 차사님은 안 바쁘신가요?”
담희는 잠시 그를 어떤 호칭으로 부를까 고민하다가 차사라는 명칭으로 일축했다. 이름을 부르기에는 존재 자체가 너무 먼 사람이니 말이다.
의외의 질문에 동원은 눈을 껌뻑이며 담희를 바라보았다.
“어제도 몇 시간 동안 여기 계신 거 아닌가요? 그…… 마중 나가는 거 때문에 바쁘시지 않은가 해서요.”
“아…… 응, 바쁘지.”
담희는 동원에게 실례가 되지 않기 위해 말을 고르며 이야기를 이었다. 동원도 그녀의 말뜻을 알아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는 너와 헤어지고 바로 찾아갔었지.”
어제도 일을 다녀왔다는 말에 놀랐다. 분명 저승차사는 오랜 시간 그 사람의 옆에 붙어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어제저녁에 그녀를 마중 나왔던 그를 떠올린다면 분명 당사자가 일찍 죽었거나 죽을 운명이 바뀐 거였다.
“내가 찾아갔을 때는 며칠 전에 이미 검사를 마친 상태였지. 어제 수명이 달라진 것을 보면 죽음의 원인이 되던 질병을 의사가 찾아낸 모양이다.”
명부가 나왔던 이가 죽을 일이 없어졌기에 동원은 서둘러 이곳으로 서둘러 돌아왔었다. 비가 방울방울 맺혀 내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죽음을 피해 가는 거군요.”
“그래, 운이 좋은 자였다.”
“우리가 보기에는 다행이지만 그분은 앞으로가 힘드시겠어요. 병원에서 통보받는 것도 꽤 무서울 테니 말이에요.”
“그렇군. 하지만 그 정도 끝나는 것에 감사해야 할 거다.”
동원은 밝게 웃으며 말했다. 담희도 좋은 결말에 안심했다. 그인지 그녀인지도 모르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살아간다는 말은 좋은 것이었다. 희소식이기에 누군지 알면 알려주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면 오늘은 일 안 하세요?”
예정대로였다면 더 오랜 시간 그 사람의 옆에 있어야 했기에 한 질문이었다. 명부에 적힌 날짜까지는 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었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왜 이 복장으로 있겠니.”
잠시 그의 차림새를 살펴본 담희는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차사님은 몇 번째 차사세요?”
“난 첫 번째다.”
대답을 마친 그는 잠시 담희에게서 시선을 떼고 그녀의 뒤를 바라보았다. 담희에게 보내던 미소는 사라지고 매우 담담한 눈빛으로 누군가의 뒤를 쫓았다.
“난 이제 일 해야겠다.”
담희를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동원의 말에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전 시간이라 그런지 지나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중 머리 위에 적힌 숫자를 확인하던 그녀는 전화를 받으며 택시를 잡는 여성의 머리에 눈이 갔다.
“저 사람인 건가요?”
그녀는 조금 전 동원이 쳐다보았던 인물과 동일인물을 눈짓하며 말했다.
“뭐?”
“저기 저 사람이요. 저 사람의 수명이 3월 1일까지네요. 앞으로 일주일 조금 넘게 남았으니 차사님이 따라가는 거 아닌가요?”
담희의 말에 동원은 자리에 얼어붙은 듯 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담희는 그의 반응을 돌아보지 않은 채 여성의 뒤를 눈으로 좇았다. 여성이 택시에 오르고 사라지자 그제야 그녀의 시선이 동원에게로 돌아갔다.
“너는 뭐야. 무당도 아니면서 남의 수명을 어떻게 알아.”
담희는 그의 서슬 퍼런 목소리에 자신이 실언했음을 깨달았다. 동시에 등골이 오싹해지는 한기가 몰려왔다. 그와 계속 눈을 맞추면 뼛속까지 얼어버릴 것 같은 공포감이 엄습해 고개를 숙여 눈을 피했다.
담희는 모르지만 무당들도 그녀처럼 죽을 날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저 가늠할 수 있는 것일 뿐이고 그것이 당연하였다.
“……그냥 보여요.”
담희는 간신히 말을 뱉어냈다. 간신히 나온 그녀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고 그에 못지않게 몸도 달달 떨리고 있었다.
“……보고 싶어서 보는 게 아니에요.”
변명처럼 들리는 말이었지만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녀 또한 그것을 보지 못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귀신을 보는 것보다 누군가가 죽은 것을 안다는 것이 더 두려웠다.
“저도 보고 싶지 않아요.”
위를 올려다볼 용기가 나지 않아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동원의 한숨 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그래, 보이는 건 어떻게 할 수 없는 거지.”
누그러진 그의 목소리에 담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힐끗 쳐다본 사늘하던 표정은 담담하게 바뀌어 있었다. 조금은 슬픈 것 같기도 하고 씁쓸한 것 같기도 하였다.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에 담희는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이만 가겠다. 너도 네 갈 길 가라.”
그는 아쉬움과 조금의 외로움이 묻어나는 어조로 말했다.
“잘 지내.”
영영 보지 않을 거 같은 그의 인사말에 담희는 퍼뜩 고개를 들었으나 그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주위에는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모두 제 갈 길 가는 사람들뿐이었다.
“제가 뭘 잘못한 거예요.”
답이 돌아오지 않을 질문을 던져보지만 억울함만 커질 뿐이었다.
"말이라도 해주고 가지."
담희는 왜 그가 화를 냈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