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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고독한 쥬뗌므
작가 : gloryr****
작품등록일 : 2019.10.26

우리는 저마다 어떤 사랑을 할까?

헌신적인 사랑을 믿는 리아
사랑에 의해 상처만 받는 고독한
사랑을 집착하고 소유하려는 로이
곁에서 바라만 봐도 행복한 민호
사랑을 투쟁으로 쟁취하려는 지민
제각기 다른 사랑을 믿는 이들이
만드는 동화 같은 이야기

멋진 공주와 예쁜 왕자 동화 속으로
​지금 당장 들어가볼까요?

 
29. 아무도 내게서 벗어날 수 없어... 아무도...
작성일 : 19-10-26 11:30     조회 : 168     추천 : 0     분량 : 8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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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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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말 아침, 실내 동물원 매표소 앞에는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한낮의 더위를 피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실내 관광지로 놀러 왔다. 고독한과 지수는 매표소 앞에서 미리 예매해둔 표를 보여줬다.

 

  고독한이 실내 동물원에 들어가기 앞서서 마른 침을 삼켰다. 지수가 그의 상태를 살피며 물었다.

 

 "고독한 씨, 진짜 괜찮겠어요? 저번에 베르사유 궁전에서도..."

 "괜찮아."

 

  그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가 그의 팔에 팔짱을 두르고 안으로 들어갔다.

 

 "잠깐만... 쿠키슈... 이, 이건..."

 "왜요. 다들 이러고 다니는데."

 "그건 저 사람들이 연인이니까..."

 "그럼 우리도 오늘 하루만 연인해요. 한국에서는 연인끼리 뭐라고 부르더라. 자기야? 여보?"

 "뭐, 뭐라고?"

 "여보. 이 뱀 좀 봐요. 자기 목에 메고 있는 스카프랑 비슷하게 생겼어요."

 "어, 어디가! 이 스카프는 프랑스 본점에서 직접..."

 

  지수는 그의 말을 자르고, 그를 막무가내로 끌고다녔다.

 

  실내에는 다양한 동물이 전시되어 있었다. 비단뱀, 미어캣, 사막여우, 토코투칸, 잉어떼, 드루통, 거북이, 닥터피쉬, 꼬마 돼지, 토끼, 카파바라, 골든리트리버, 등 비교적 몸집이 작고, 귀여운 동물들이 주로 보였다.

 

  고독한은 그녀의 손에 이리저리 이끌려다니며 수시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확인했다. 신기하게도 꽉 막힌 실내에서 많은 사람들과 부딪혔지만, 그들 중 아무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팔짱을 낀 채로 쉴 새 없이 떠들어대는 그녀가 옆에 있었기에.

 

 "여기는 직접 만져보고, 먹이도 줄 수 있나 봐요. 이거 뭔지 알아요? 알파카예요. 낙타랑 비슷하게 생겼는데 많이 달라요. 낙타는 사막에서 살지만, 알파카는 높은 산에서 살거든요. 거기다 이 애들은 어찌나 순한지. 모르는 사람이 다가가도 물거나, 겁내지 않아요. 와서 만져봐요."

 "싫어..."

 "에이. 여기까지 왔는데 만져봐야죠. 자, 여기."

 

  지수가 그의 손을 붙잡고, 알파카의 이마에 손을 갖다 댔다.

 

  고독한은 눈을 질끈 감으며 비명을 참았다. 손끝에 따뜻하면서 부드러운 촉감이 느껴졌다. 눈을 뜨니 알파카가 반쯤 감긴 눈망울을 깜박거리며 쳐다봤다. 졸린 듯한 표정의 알파카 얼굴이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봐요. 얘도 싫어하지 않잖아요. 어때요? 기분 좋아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가이드도 없이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동물들을 좋아하니까요. 이번엔 먹이도 줘봐요. 잘 먹을 거예요."

 

  그는 그녀의 말따라 알파카에게 이름 모를 풀을 줬다. 알파카는 아래턱을 이용해서 풀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녀는 먹이를 잘 받아먹는 알파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 지었다. 그녀의 얼굴을 본 그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나를 원망하지 않아?"

 "내가 고독한 씨를요? 왜요?"

 "나 때문에... 엄마랑 헤어지게 됐잖아..."

 "그게 왜 고독한 씨 때문이에요. 다 그 나쁜 백발 마녀 때문이지. 아, 백발 마녀는 그 머리 하얀..."

 "알아."

 

  고독한은 백발 마녀란 말에 피식 웃었다. 지수는 웃는 그의 얼굴을 마주보며 같이 웃었다.

 

 "정말로 원망 안 해?"

 "그럼요. 내가 왜 원망 하겠어요. 고독한 씨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인데."

 "사랑이라고..."

 

  그는 어두워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그녀가 깨금발을 들어서 그의 볼에 가볍게 입맞췄다.

 

 "오늘 나랑 있을 때는 이런 표정 짓지 마요. 나도 알아요. 이게 우리의 마지막 이별 여행이라는 것 쯤은. 그러니까 지금은 내 말대로 해요. 그런 표정 지으면... 고독한 씨를 떠날 수 없으니까..."

 

  그녀는 말을 끝맺지 못한 채로 뒤돌아섰다. 그는 해야할 말을 가슴 속에만 품고서 그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갑자기 그녀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따라와요! 갈 데가 있어요!"

 "어디가는데!"

 

  지수는 빠르게 실내 동물원 밖으로 나갔다. 한낮의 태양은 거리를 태워버릴 것처럼 뜨거웠다. 고독한은 끝까지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들은 뜨거운 햇살 속을 빠르게 달려나갔다. 땀으로 흥건히 젖은 두 손을 꼭 마주잡고서.

 

 *

 

 "여기 어딘지 알 것 같아요? 잘 찾아왔는지 모르겠네."

 "여기는..."

 

  고독한은 눈에 익은 거리를 둘러보며 눈을 감았다. 어둠 속으로 여자들의 웃음소리와 술 취한 남자의 고함이 들리는 듯했다. 스카프가 서서히 목을 조여왔다.

 

 "여기는 내가 살았던 곳이야. 왜... 왜 여기에 온 거야..."

 "내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니까요."

 

  지수는 재개발이 한창인 동네를 훑어봤다. 동네는 이미 재개발 공사로 가림막이 둘러져 있었다.

 

 "한 번쯤 찾아와보고 싶었어요. 내가 어디서 태어났는지."

 

  그녀가 가림막을 피해서 동네 안으로 들어갔다. 가림막 밖에서 멀뚱히 서 있는 그에게 손짓했다. 그는 주위 눈치를 살피며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어렸을 때부터 꿈꿨었거든요. 언젠가 내가 태어났던 곳에 찾아가면, 그때 놓쳤던 것들을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고독한은 인적이 없는 거리를 유심히 살피며 걸었다.

 

  눈앞에 보이는 풍경과 기억이 언뜻언뜻 일치하긴 했지만, 대부분 달랐다. 좁디좁은 골목길과 어디에서나 보이던 깨진 술병, 지린내가 나던 거리, 매일 술에 취해 홍등가를 기웃거리던 취객과 취객을 상대하던 윤락 여성, 등 기억 속의 장면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

 

  동네는 새롭게 탈바꿈 중이었다. 공사가 끝나면 완전히 바뀌어 있을 것이다. 예전에는 이곳이 홍등가였다는 기억을 떠올릴 수조차 없게.

 

  하지만 이곳에 살았던 주민들은 이 동네를 여전히 홍등가로 기억할 것이다. 사람들의 추억까지 지울 수는 없을 테니까.

 

 "과거는 절대 바뀌지 않아. 잊혀지지도 않고."

 

  그는 한 손으로 스카프를 붙잡았다. 그날의 잔상이 떠오르는 듯했다. 스카프가 목을 조여왔다.

 

  언제쯤이면 이 지독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마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무슨 짓을 해도 과거는 변하지 않을테니까.

 

  그때, 그녀가 스카프를 붙잡은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는 당황해서 스카프를 잡은 손을 놓았다. 스카프는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 멀리 날아갔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에요. 손에 움켜쥔 걸 놓아야만, 새로운 걸 다시 움켜쥘 수 있어요. 중요한 건..."

 

  그녀의 손이 그의 목에 난 흉터를 어루만졌다. 바람이 그들 곁으로 시원하게 불어왔다.

 

 "지금 이 순간이잖아요."

 

  지수는 눈을 감고 그에게 입을 맞췄다. 입속으로 그의 영혼이 느껴졌다. 그의 영혼은 따스하고, 달콤했다.

 

  고독한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봤다. 심장이 빠르게 뛰면서 뜨거운 피가 온몸에 돌았다. 그녀의 허리를 붙잡고 그녀를 안았다. 눈을 감고,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기운을 느꼈다.

 

  그래, 과거는 바뀌지 않겠지. 과거 때문에 아파했던 고통도 여전할 거야.

 

  하지만, 중요한 건... 지금 내 눈앞에 있잖아.

 

  더는 외면할 수도, 의심할 필요도 없었다. 드디어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입속에 차올랐다.

 

 "쿠키슈. 너한테 할 말이 있어."

 

  그녀가 글썽이는 눈으로 그를 마주 봤다. 그가 그녀를 꽉 끌어안으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런데 그전에 해야 할 일이 있어. 네가 한국을 떠나기 전에 돌아올게. 그때까지 기다려줄래?"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품속에 얼굴을 묻었다. 가슴이 설레면서 동시에 불안했다. 왠지 그를 이대로 놓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뜨거운 햇볕이 구름에 가려 희미해졌다. 기온은 여전히 높았지만, 더위는 잠시 멎었다. 그러나 하늘은 넓고, 구름은 얕았다. 구름에 가린 태양이 다시 모습을 드러낼 준비를 끝마쳤다.

 

 *

 

  짙은 어둠 속에 초인종이 울렸다. 인터폰으로 얼굴을 확인했다. 반갑지 않은 손님이었다.

 

 "잠깐! 로이! 오늘은 진짜 문 열어줄 때까지 있을 거야. 문 안 열어주면 여기서 하루종일 소리칠 거라고!"

 

  인터폰으로 중성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로이는 이를 악물었다.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현관문을 열고,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찾아오지 말랬지. 우린 끝이라고. 내 말 못 알아들어?"

 

  지민은 쌀쌀맞은 로이를 보며 자기 팔을 매만졌다.

 

 "자기, 오늘따라 더 섹시하네."

 "꺼져. 다신 찾아오지 마."

 

  로이가 매몰차게 현관문을 닫았다. 현관문이 닫히기 전 문틈 새로 지민의 말이 들렸다.

 

 "언제까지 이렇게 머물러 있을 건데. 얼마든지 기다려줄 수 있으니까. 말만 해."

 

  현관문이 천천히 열렸다. 까마득한 어둠이 열린 문 사이로 뻗어 나오는 듯했다.

 

 "내 말이 어렵니? 못 알아듣겠어? 다시 말해줘? 끝이라고. 너 같은 거 다신 보고 싶지 않으니까..."

 "그 애를... 영원히 붙잡아 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지민은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응시했다. 어둠 속에서 서슬 퍼런 눈빛이 섬뜩하게 빛났다.

 

 "그놈은 자기를 가둬두는 족쇄야. 자기는 엄마가 아니야. 그놈은 어린 로이가 아니고. 왜 그걸 몰라?"

 

  그의 말에 어둠은 침묵했다. 어둠은 소리 없이 더욱더 짙어졌다.

 

 "그 비밀의 방을 보고 나서... 자기에 대해 알아봤어. 자기 엄마가 어렸을 때 그렇게 죽고 나서... 자기가 겪었을 상황과 현실에 대해서 생각해봤지. 지금 자기는 스스로에게 죽은 엄마를 대입하고 있어. 그 놈한테는 어린 시절 불행했던 자신을..."

 

  그는 말을 더 하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 하얀 손이 뻗어나와 그의 목을 붙잡았다.

 

 "죽고 싶니?"

 

  미성의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지민은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로이의 손을 꽉 붙잡았다.

 

 "자기 손에 죽는 거라면 얼마든지..."

 

  하얀 손이 지민을 강하게 밀쳐냈다. 지민은 숨을 켁켁 내쉬면서 닫히는 문 사이로 소리쳤다.

 

 "그 놈한테서 벗어나야만 해! 언제까지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고! 앞으로 나아가!"

 

  로이는 현관문을 닫고, 눈을 감았다. 깊은 어둠이 차가운 바람을 타고 찾아왔다. 그의 발걸음이 더 깊은 어둠 속으로 향했다.

 

  그가 도착한 곳은 하얀 빛을 내뿜는 유리관 속이었다. 유리관 안에 놓여진 금발 머리 여자 인형이 그를 쳐다봤다.

 

 "아무도 내게서 벗어날 수 없어... 아무도... 안 그래요?"

 

  하얀 손이 유리관 속에 여자 인형을 와락 움켜쥐었다. 여자 인형이 놀란 눈으로 하얀 손의 주인을 응시했다. 핏기 없는 푸른 입술을 따라 시린 숨결이 뿜어져 나왔다.

 

 "어머니..."

 

  여자 인형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점점 하얗게 변했다.

 

  로이는 눈을 번뜩이며 정면을 응시했다. 눈앞이 하얀 장막으로 뿌옇게 가렸다. 온 사방에 눈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

 

  지수는 무표정한 얼굴로 여행 가방에 짐을 쌌다. 한국에 올 때는 여행 가방 속에 공간이 많이 남았었지만, 프랑스로 돌아가는 짐은 한가득이었다. 한국에서 새로 산 옷이며, 여행지에서 산 기념품, 프랑스에 있는 아빠들과 친구들에게 줄 선물로 여행 가방이 미어터지려 했다.

 

 "짐이 엄청나게 많네... 언제 이렇게 늘어났지..."

 

  여행 가방에 짐을 넣을 때마다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엄마와 함께 백화점에서 쇼핑한 물건들, 아쿠아리움에서 산 돌고래 모양 열쇠고리, 민호와 엄마를 찾기 위해 보육원에 갔던 날 입었던 바지, 절대 빨래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그의 땀 냄새가 뒤섞인 티셔츠, 색이 바래진 엄마의 옛 사진을 여행 가방 속에 하나씩 차곡차곡 쌓았다.

 

  그녀가 여행 가방을 들고 거실로 나왔다. 거실은 처음과 달리 마구 어지럽혀져 있었다. 아기자기한 소품이며, 먹다 남은 과자, 읽다 만 책, 작은 선인장 화분이 거실을 꾸몄다. 이제 좀 사람이 사는 집처럼 보였다.

 

 "내가 이렇게 어지럽혔나."

 

  지수는 희미하게 웃으며 정든 거실을 둘러봤다. 소파에서 매일 아침 예쁜 왕자를 기다리던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민호와 함께 한국 음식을 같이 먹던 모습도 나타났다. 그들이 모두 모여 웃고 떠드는 장면도 눈에 비쳤다. 모든 순간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이제 정말 안녕이네..."

 

  그녀가 여행 가방을 들고 뒤돌아섰다. 거실 바닥에 길게 노을이 졌다. 붉은 햇살이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듯했다. 당차게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카페로 내려가자 민호가 카페 밖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짐 다 쌌어요? 지금 가는거죠?"

 "네. 그동안 신세 많이 졌어요."

 "신세라니. 그런 말은 어디서 배우는 거예요. 가끔은 지수 씨가 우리나라에서 나고 자란 사람 같다이까요."

 

  그는 애써 웃으며 마른 입술을 오므렸다. 노을이 거리를 붉게 물들였다.

 

 "한이 형이 안 오네요. 데이트는 잘 했어요?"

 "네. 민호 씨 덕분이에요. 마지막까지 고마워요. 나는 민호 씨 한테 매번 받기만 하고. 미안해요."

 "그런 말 마요. 지수 씨가 좋으면, 내도 좋으니까. 형은... 올 거예요, 분명히. 내는 지수 씨 비행기 타는 건 못 볼 것 같아요. 보다시피 카페를 봐야해서."

 "괜찮아요."

 "그럼 여기서 작별 인사를 해야겠네요."

 

  민호는 말을 하지 못하고 마른 침을 삼켰다. 그러자 지수가 그를 가볍게 안았다.

 

 "프랑스에 가서 연락할게요. 한국에 오면 보러도 올게요. 잠시 헤어지는 거니까."

 "알아요... 지수 씨..."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햇살이 점차 아래로 기울었다. 그가 짧게 심호흡을 하며 말을 꺼냈다.

 

 "저기..."

 "그럼 잘 있어요. 연락할게요."

 

  지수는 그의 가슴을 가볍게 밀어냈다. 그녀의 눈빛이 아래에 머물렀다. 어느새 그들 곁으로 외제차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차에서 류미리가 내렸다. 류미리는 지수와 포옹하며 그녀를 차에 태웠다.

 

  민호는 노을을 따라 떠나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여름 동안 함께 했던 추억이 통째로 떠나가고 있었다. 붉은 거리 위로 서서히 어둠이 짙어졌다.

 

 *

 

  모든 것이 확실해진 순간, 세상은 달라졌다. 새파란 하늘, 상쾌한 바람, 저무는 노을이 모두 선명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기운이 마구 솟아올랐다. 드디어 해야 할 일이 분명해졌다.

 

  고독한은 차가운 현관문 앞에 섰다. 초인종을 눌러도 안에서 반응이 없었다. 현관문 비밀번호를 입력해서 현관문을 열었다.

 

 "로이... 안에 있어?"

 

  어둠이 짙게 깔린 실내 공기는 싸늘했다. 한여름에 이 집만 겨울이 찾아온 것처럼 추웠다. 차가운 바람이 짙은 어둠을 따라 불어왔다. 어둠을 따라 깊숙이 안으로 들어갔다.

 

  까마득한 어둠 사이로 가는 빛줄기가 보였다. 고독한은 가는 빛줄기가 새어 나오는 문을 천천히 손으로 밀었다.

 

 "로이..."

 

  로이는 하얀 빛줄기가 쏟아지는 유리관으로 둘러싸인 방 한가운데 등지고 서 있었다. 고독한은 뒤돌아선 그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로이. 할 말이 있어."

 

  그의 곁에서 한기가 불어왔다. 그에게 다가가기가 무서울 정도로 피부가 시렸다.

 

 "나... 아무래도 그 애를 좋아하나봐. 로이 넌, 내가 게이라고 했지만... 그 애 앞에만 서면 기분이 이상해.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기도 하고, 어쩔 때는 숨이 차지 않는데도 현기증이 나. 이런 게... 사랑인 것 같기도 해. 로이, 내 말 듣고 있어?"

 

  로이는 아무말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고독한은 한걸음씩 힘겹게 그에게 다가갔다.

 

 "그래서 지금 그 애한테 갈 거야. 가서... 떠나지 말라고 붙잡으려고. 이제와서 소용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로이... 우리는 무슨 사이였던 걸까. 우리가 나눈 시간과 감정은 무엇이였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잘 모르겠어. 로이... 뭐라고 말 좀..."

 

  고독한이 로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등지고 선 로이의 몸이 천천히 뒤돌았다. 아주 느리게 얼굴이 나타났다. 시리도록 하얀 눈동자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차갑디 차가운 그 눈을 마주한 순간, 어떤 소리도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로이는 새하얗게 변한 눈동자로 고독한을 내려다봤다. 핏기없는 푸른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아무 데도 못 가. 넌 내 거야. 내 소유라고."

 

  미성의 목소리와 함께 하얀 손이 고독한의 목을 움켜쥐었다.

 

  고독한은 목을 타고 몸 전체로 퍼지는 차가운 기운을 느꼈다. 온몸이 옴짝달싹할 수 없이 빠르게 굳었다. 주위에 공기가 모조리 사라졌다. 눈앞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 그날이 생생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모든 소리와 감각이 사라졌다. 그날의 잊혀지지 않는 얼굴만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천장이 길을 잃고 힘없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유리관으로 둘러싸인 방바닥에 그의 몸이 차갑게 식었다. 그의 옆으로 목이 꺾인 여자 인형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 하얗게 시린 눈동자만이 그들을 가만히 지켜봤다.

 

 *

 

  긴 활주로가 붉게 물드는 광경은 눈을 뗄 수 없이 아름다웠다. 활주로의 끝에서부터 조금씩 어둠이 내려앉았다. 한국에서의 마지막 순간이라 여기니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지수는 지는 태양을 조금만 더 붙잡고 싶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다 됐구나."

 

  류미리가 지수의 여행 가방을 끌고 검문소로 향했다. 지수는 검문대에 여행 가방을 맡기고 검문소 반대편으로 넘어갔다. 지수의 눈길이 자꾸만 밖으로 나돌았다.

 

 "혹시 그 애가 오길 기다리고 있니?"

 

  류미리와 지수는 검문소 울타리를 두고 마주 봤다. 지수는 엄마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지만, 아니라고 말을 하지 못했다.

 

 "지수야.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된단다. 한 번 더 생각해보렴. 비행기 표는 다시 끊으면 되니까..."

 "아니에요. 이제 가볼게요."

 "그래. 프랑스에 가서도 연락하고. 한국에 또 올거지?"

 "네. 금방 다시 올게요. 엄마, 사랑해요."

 "나도 사랑한단다, 우리 딸."

 

  지수가 류미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류미리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프랑스로 가는 비행기가 곧 이륙한다는 방송이 들렸다. 프랑스로 가는 비행기를 탈 사람들이 서둘러 비행기로 향했다.

 

  지수도 그들을 따라서 비행기에 올라탔다. 비행기 의자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니 처음 한국에 왔을 때가 생각났다. 설레면서도 조금은 두렵기도 한 떨림을 가지고 공항에 착륙했을 때가.

 

  이제는 한국에서 받은 수많은 선물을 가지고, 한국을 떠날 때가 왔다. 한국에서 보낸 여름은 덥고, 습하고, 흐린 날도 많았지만, 살아오면서 최고의 여름이었다. 살면서 이런 여름은 다시는 없을 것이다.

 

  비행기가 이륙한다는 기내방송이 울렸다. 창밖에 시야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행기는 긴 활주로를 달려나갔다. 창밖으로 인천 공항이 서서히 작아졌다. 눈앞이 흐려지면서 두 볼이 뜨거워졌다.

 

 "챠오..."

 

  붉은 태양이 수평선 너머로 가라앉고 있었다. 그녀의 낮은 속삭임을 따라 하늘은 짙은 어둠으로 물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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