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창한 봄날. 햇볕이 정원을 따스하게 내리쬈다. 정원에는 양산을 쓰고, 면장갑을 낀 소년이 화단을 둘러보며 꽃을 꺾었다. 엄마에게 가져다줄 꽃다발을 만드는 중이었다.
"태원아."
"아빠..."
정 사장이 여비서와 함께 정원으로 걸어 나오며 태원에게 호통쳤다.
"차림새가 그게 뭐야!"
"그게... 엄마가 햇빛을 맞으면 안 된다고 해서요..."
"사내가 햇빛에 좀 그을릴 수도 있는 거지. 그 꽃다발은 뭐야! 계집애도 아니고. 도대체 애 교육을 어떻게 하는 건지..."
그는 눈썹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젊은 여비서가 그의 옆에서 교활하게 웃었다.
태원은 여비서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정원을 빠져나가는 아빠를 지켜봤다. 아빠의 손이 여 비서의 허리를 감싸 안는 것이 보였다. 태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엄마가 기다리겠다."
태원은 꽃다발을 들고 집으로 들어갔다. 대궐처럼 넓은 집은 이가 딱딱 떨리도록 싸늘했다.
"엄마. 어딨어요?"
태원이 엄마를 찾아서 집 곳곳을 헤맸다. 엄마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태원의 발길이 마지막으로 집에서 가장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엄마..."
의상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그 사이에서 차가운 공기가 퍼져 나오고 있었다. 손을 바들바들 떨며 문을 열었다.
"엄마!"
태원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엄마에게 달려갔다. 엄마는 피가 낭자한 바닥에 쓰러져 풀린 눈으로 태원을 올려다봤다. 그녀의 손목에서 피가 계속 흘러나왔다.
"태원이 왔니..."
"엄마! 엄마! 피 나요... 구급차..."
"태원아... 엄마 주려고 꽃다발을 가져왔구나..."
심선미는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꽃다발을 품에 안았다.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일었다.
"이 피로 너의 더러운 피를 씻어줄게. 이렇게 하면 진짜 우리 딸이 나타날거야..."
그녀가 바닥에 흘러넘치는 피를 태원의 머리 위에 쏟아부었다. 태원은 얼굴을 뒤덮는 피의 온기를 느끼며 그대로 얼어붙었다. 비릿한 냄새 때문에 코가 얼얼했다.
"엄마... 죽지마... 엄마 소원대로... 진짜 딸이 될게... 제발..."
"태원아... 사랑은 소유하는 거야... 가지지 못할 거라면... 부숴버리는 게 나아..."
태원이 싸늘하게 식어가는 엄마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자 그녀가 비웃음을 흘리며 마지막 힘을 다해 태원의 귓가에 속삭였다.
"역겨운 피를 가진 넌... 절대 여자가 될 수 없어... 영원히 그 놈의 자식으로 고통 받을 거야... 모두 네 곁을 떠나버리겠지... 네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심선미는 그 말을 끝으로 눈을 감았다. 태원은 엄마 품에서 벗어나 죽어가는 엄마를 지켜봤다. 의상실을 가득 메운 피가 빠르게 식어갔다.
날이 저물자 가정부가 의상실에서 흘러나온 피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경찰과 구급차가 뒤늦게 출동해서 의상실로 들어왔다. 그들이 처음으로 발견한 것은 어린 소년이었다.
그들은 소년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소년의 온몸에 들러붙은 피딱지와 소년이 안고 있는 여자 인형, 그리고 피딱지 사이로 보이는 소년의 하얀 머리카락.
소년은 감정이 없는 눈으로 의상실에 들어온 그들을 응시했다. 차가운 한기가 소년에게서 뻗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