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개강 일주일 전
개강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오후에 유진이는 희연이네 집을 찾아왔다. 문이 열려 있어서 유진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집안에선 맑은 피아노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나연은 주방에서 우유 한 잔을 마시고 나오다가 유진이가 온 것을 보았다.
“오빠 왔어요. 언니 불러 올까요?”
나연이가 물었다.
“아냐. 내가 올라갈게.”
유진이는 말을 마치고 나서 희연이 방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가 희연이의 연주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단정한 머리에 노란 색 티를 입은 희연이의 뒷모습이 보였다. 희연은 빠른 손놀림으로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고 있었다. 유진은 희연이의 뒤에 가만히 서서 음악을 감상했다. 한참 후에야 희연이의 손이 멎었고 연주가 끝났다. 유진이 박수를 쳤다. 박수 소리에 깜짝 놀란 희연은 고개를 뒤로 돌렸다. 유진이가 뒤에 서 있었다.
“언제 왔어?”
“방금.”
“왔으면 말하지. 난 온 줄도 모르고 계속 피아노만 쳤잖아?”
“네 음악이 듣기 좋아서 그냥 듣고 있었어. 방해하기도 싫었고. 근데 무슨 곡이야?”
“비창이야. 베어토벤이 작곡한 피아노 소나타야.”
“비창? 그래, 그게 좋겠어.”
유진은 갑자기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른 듯 엄지 손가락과 중지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응?”
희연은 유진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쓰고 있는 소설 제목을 비창으로 바꾸는 게 낫겠어. 우리들의 이야기보다는 비창이라는 제목이 훨씬 설득력 있을 것 같거든.”
“난 또 무슨 말 하나 했네. 소설은 다 써 가?”
“아직 초반부야.”
“내려가서 뭐라도 마시자.”
유진과 희연이는 거실로 내려왔다.
“커피 타줄까?”
희연이가 물었다.
“날 더운데 커피는 무슨?”
“그럼 시원한 쥬스 마실래?”
“그래.”
희연이는 냉장고 문을 열어보았다. 오렌지 쥬스가 담긴 병에는 한 사람이 마실 양밖에 없었다. 희연은 쥬스를 컵에 따라가지고는 유진이가 앉아있는 소파로 왔다.
“마셔.”
희연이가 잔을 건네주며 말했다.
“넌 안 마셔?”
“난 많이 마셨어.”
“그래? 그나저나 8월도 다 지나가는데 왜 이렇게 더운지 모르겠다.”
유진이는 시원한 쥬스를 마시고 나서 말했다.
“그러게 말야. 일주일 후면 개강인데. 근데 집에서 점심은 먹고 왔어?”
“아니. 아직. 너는?”
“나도 아직 안 먹었어.”
“그럼 잘 됐네. 사실은 너희 집에서 점심 같이 먹을려고 왔어.”
“그럼 진작 말하지. 근데 뭐 하지? 마땅한 반찬이 없는데.”
“라면 없니?”
“라면? 덥다면서 괜찮겠어?”
“이열치열이라는 말도 있잖아.”
“알았어. 내가 금방 끓여 가지고 올 게”
“나연이도 같이 먹자고 하자.”
“응.”
희연은 이층으로 올라갔다.
희연이는 나연이의 방문을 열었다. 나연은 책상 앞에 앉아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나연이, 너 라면 먹을래?”
희연이가 물었다.
“라면 좋지. 근데 설마 나보고 끓이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이따 와서 먹기만 하면 돼. 다 되면 부를게.”
희연이는 말을 마치고 주방으로 가서 라면을 끓였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라면이 다 끓었다. 희연은 식탁위에 라면을 내려놓고는 거실로 나갔다.
“다 됐어.”
희연이는 유진이를 보고 말했다.
“그래? 그럼 나연이 보고 내려오라고 할게.”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던 유진이 일어났다.
유진은 나연이의 방문을 열었다.
“라면 다 됐대.”
“예. 이제야 좀 쉴 수 있겠군. 이 놈의 의학이라는 건 정말 골치가 아프다니까.”
나연이는 기지개를 크게 켜고 일어났다. 유진과 나연은 거실로 내려와 주방으로 들어갔다. 희연이 주방에서 상을 차리고 있었다. 유진과 나연은 테이블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고 희연도 상을 다 차린 후 자리에 앉았다. 세 사람은 젓가락을 들어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정말 맛있는데.”
유진이가 말했다.
“언니, 요리솜씨야 워낙 좋으니까요.”
나연이가 말했다.
“비법이 뭐니? 좀 가르쳐 줘라. 그래야 나도 혼자서 끓여 먹을 거 아냐?”
“그런 거 없어. 먹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해. 내가 끓여 줄 테니까.”
“나연이, 너도 모르니?”
“저야 먹는 거에만 관심 있지 요리에는 관심 없거든요. 그러니 알 리가 없죠.”
“라면 끓이는 것도 요리냐?”
희연이가 핀잔을 주며 말했다.
“어쨌든 난 관심 없다고.”
순식간에 면은 다 없어지고 라면 국물만 남았다.
“밥 좀 있니? 밥 말아먹고 싶은데.”
“응, 내가 떠 올게.”
희연이는 유진이의 그릇을 가져가서는 밥을 가득 담아가지고 왔다.
“나도 밥 좀 말아 먹어야겠다.”
나연이도 밥을 뜨러 갔다.
“너도 밥 좀 먹지 그래?”
유진이가 희연이에게 물었다.
“아냐. 난 됐어. 많이 먹었어.”
“그렇게 조금만 먹으니까 니가 약한 거야. 곧 환절긴데 그러다 또 감기 걸릴라.”
“겨우 감기 갖고 뭘 그래? 난 됐으니까 너 많이 먹어.”
유진과 나연이는 깨끗이 그릇을 비웠다. 유진과 나연은 거실로 나갔고 희연은 식탁을 치운 후 거실로 나왔다.
“희연아, 우리 볼링 치러 가지 않을래?”
“볼링?”
“응? 왜 싫어?”
“아냐. 가자.”
“나연이 너도 같이 가지 않을래?”
“됐어요. 전 공부해야 될 게 많거든요. 언니랑 둘이 가요.”
나연은 일부러 자리를 피해 주었다. 언니가 누구보다 유진 오빠를 사랑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였다.
“그래. 그럼 하는 수 없지.”
“언니 잘 놀다 와.”
“응.”
유진이와 희연은 집을 나섰다.
유진과 희연은 3번 레인에 있었다. 유진이가 먼저 공을 굴렸다. 레인을 쭉 따라가던 공은 시원한 소리를 내며 핀을 맞추었다. 하지만 하나의 핀이 쓰러지지 않고 서 있었다. 유진은 스페어 처리를 했다. 공은 깨끗하게 핀을 맞추며 핀을 쓰러뜨렸다.
“이제 니 차례야.”
유진이는 뒤에 서 있는 희연이를 보며 말했다.
“난 볼링 못 쳐. 그냥 구경만 할게.”
“그럴려면 뭣 땜에 왔어? 재미로 하는 건데 한 번 해 봐.”
희연이는 유진이의 말에 따라 힘껏 공을 굴렸다. 하지만 레인을 따라 굴러가던 공은 거터로 빠지고 말았다.
“아무래도 넌 좀 배워야 할 거 같다. 내가 가르쳐 줄게.”
유진이는 희연이에게 정성껏 폼과 스윙을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두 시간이 지나도록 별 성과를 얻지 못한 채 둘은 볼링장을 나왔다.
“나 너무 못하지? 나 때문에 괜히 고생만 하고.”
희연이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미안해 했다.
“아냐. 재밌었어. 난 그만 가 봐야겠다. 다음에 보자.”
“응. 잘 가.”
둘은 갈림길에서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