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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론은 공윤의 등쌀에 시달리면서도 끝끝내 도움을 거부했다. 그는 토끼와 불독의 혼종으로 변모한 듯한 공윤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 방면에서 공윤 씨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요. 아직 차크라(Chakra)도 열리지 않았잖아요.”
차크라는 또 뭐야...... 키론은 공윤이 멍해진 틈을 놓치지 않았다.
“공윤 씨가 하는 것도 중요해요. 아미의 꿈이 매개가 되는데, 그 주체인 아미를 잘 보호하고 있어야죠. 저도 지켜주고요.”
“네?”
“이걸 하면 잠들어버려서, 좀 무방비해지거든요. 저 지켜주실 수 있죠?”
그 말을 하는 키론의 자태는, 보호욕구를 불러일으키는 데 한 점 모자람이 없었다. 오......
공윤은 감정을 자제하려고 입술을 오므렸다. 그녀는 아미를 꼭 껴안으며 말했다.
“네.”
키론이 예의 애교살을 찡그리듯 웃었다.
“잘 부탁해요.”
“근데 이거 주희 사생활 침범하는 건 아니죠?”
공윤은 불현듯 걱정스러워져 물었다. 키론은 고개를 저었다.
“심층적인 의식은 건드리지 않을 거예요. 억지로 파고든 흔적이나 경로만 살펴볼 거니까.”
공윤은 안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시작해요. 아미는 잘 안고 있을게요.”
키론은 주희의 화장대 스툴을 끌어당겨 앉았다. 그는 맥을 짚듯 주희의 손목을 잡고는 뭔가를 연결하듯 기묘한 손짓을 했다.
그는 아미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미, 힘든 건 알지만, 꿈 하나만 줄 수 있겠어요? 많이는 필요 없고.”
아미는 짧고 도톰한 팔을 흔들었다. 아미는 복식호흡을 하듯 배를 부풀리더니, 라벤더 색의 연기를 한 줄기 뽑아냈다.
키론은 허공에서 아른대는 연기를 천천히 들이마셨다. 연기가 닿자 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키론은 수면제를 삼킨 사람처럼 눈을 감았다. 곧 그의 고개가 툭 떨어졌고, 그는 침대에 뺨을 기댄 채 잠들었다. 마치 주희의 병구완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공윤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봤다. 시계 초침이 째깍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몇 십 분 쯤 지난 것 같았다. 공윤은 아미의 등을 쓰다듬으며 그들이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연결된 듯 잡은 두 사람의 손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외로운 기분이 들었다.
멍해진 공윤의 눈에 키론의 이마에 맺힌 땀이 보였다. 그는 집중하는 듯 미세하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공윤은 그의 땀이라도 닦아주려고 일어섰다가, 발이 꼬이는 바람에 넘어지면서 키론의 팔을 덥석 잡아버렸다. 매끄러운 촉감이 손가락을 스쳤다.
순간 속이 울렁거리고, 두통이 느껴졌다. 공윤이 입을 벌렸지만 아무 소리도 새어나오지 않았다.
아미가 코로 그녀를 밀면서 먕먕 울었다.
그녀는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알아차리기도 전에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22.
공윤은 눈을 떴다. 그녀는 잠깐 비틀거렸다. 어쩐지 시야가 평소보다 높게 느껴졌다. 바람이 세게 불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날렸다. 흩날리는 머리칼이 금빛으로 반짝였다.
금빛?
공윤은 당황해서 머리카락을 한웅큼은 뽑을 듯한 기세로 잡아 쥐었다. 머리칼은 햇살을 하나하나 모아 자아낸 듯 눈부시게 반짝이는 금발이었다.
공윤은 황망한 나머지 눈을 빠르게 깜박거렸다. 나...... 염색했나?
근처에 냇가가 있었다. 그녀는 넘어질 듯 냇가에 다가가 얼굴을 비춰보았다.
수면을 통해 보는 형체라 분명하게 식별하기 어려웠지만, 공윤의 것과는 다소 다른 이목구비가 보였다.
공윤은 그녀가 자신보다 미인이라는 점을 어렵게 인정했다.
전체적으로 훨씬 또렷하고 우아했다. 특히 고양이처럼 올라간 눈꼬리가 완전히 달랐다. 공윤의 눈매는 만만해 보일 정도로 유순하게 둥글었다.
실제로 공윤을 접한 사람들은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그 인상을 버려야만 했지만.
손, 발, 다리, 어쩌면 가슴까지도. 모든 것이 더 크거나 길었고, 원래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본래보다 십 센티미터는 커진 것 같았다.
공윤은 숨을 들이키면서 생각했다. 키가 백 칠십을 넘는 사람들이 마시는 공기는 이런 느낌인가.
공윤은 무심코 뺨을 만져보았다. 매끄러운 살결이 손가락으로 느껴졌다.
‘겁나 예쁘네.’
분위기에도 아름다움이 있다면, 마땅히 그런 수식어가 붙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수면 위에서도 그녀가 주변에 미치는 영향이 보였다.
자연이 그녀를 존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이 여자가 된 거지?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공윤은 기절하기 전에 키론과 닿았던 게 생각났다. 설마 그것 때문에......?
그녀는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울상을 지었다. 여자의 머리카락은 파리가 앉으면 찍 미끄러질 정도로 부드러운 직모였다.
문득 멀리서 길고 뚝뚝 끊기는 신음 소리가 들렸다. 산맥을 관통하여 들려오는 소리였다. 아주 오래되고 긴 고통의 소리...... 어린 짐승의 것 같은.
공윤은 그 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돋은 소름을 쓸었다.
공윤이 자기 의지대로 몸을 움직일 수 있었던 건 그게 마지막이었다. 실제 이 몸의 주인일 금발의 여자가 일어서서 걷기 시작했던 것이다.
좀 짜증나는 방식이었다. 마치 자신이 빙의된 귀신인 것처럼 느껴졌다. 일종의 VR체험 같기도 했다.
공윤은 몇 번 마음대로 움직여보려고 하다가 포기했다. 이 여자의 의식은 굉장히 강력했다.
그녀는 여자의 시선으로도, 제 삼자의 시선으로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둘 다 보는 건 복잡하고 이해하기 힘들었다. 여자의 시선이 되는 게 좀 더 편했다. 신체의 존재가 확실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여자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주변 풍경이 빠르게 바뀌었다. 무슨 축지법이라도 쓰는 것 같았다.
그녀는 확고한 목적지를 가지고 있는 듯, 때로 고개를 들어 방향이나 흔적을 살피며 계속 걸었다.
태고를 간직한 듯 울창한 숲이었다. 나무들은 크고 높았고, 이파리들은 진한 초록색으로 빛났다. 깨끗한 자연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오래된 불안도 느껴졌다.
갑자기 여자가 멈추더니, 대뜸 나무에 끈을 연결했다. 그리고 다른 한 쪽을 잡은 채 바싹 쪼그려 앉았다.
우거진 수풀이 그녀의 체구를 가렸다. 그녀는 뭔가 재미있는 일을 기대하는 듯 쌕 웃었다.
공윤은 한심한 퀘스트를 수행하는 게임 캐릭터가 된 기분이었다.
오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인기척이 났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한 남자가 접근하는 게 보였다.
그런데 방향이 안 좋았다.
‘어, 계속 오면......’
꽈당.
남자는 끈에 정통으로 걸려 넘어졌다. 이러려고 끈을......? 공윤은 혀를 내둘렀다.
실제로 여자가 혀를 내두르지는 않았다.
그는 어딘가 정신이 없어보였는데, 넘어지고 나서도 자기가 뭣 때문에 땅과 격한 스킨십을 나누게 되었는지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남자는 입에 들어간 흙을 뱉으면서 일어났다.
그의 얼굴은 다소 초췌했고 땀으로 젖어있었다. 아프다기보다는 스트레스 때문인 것 같았다.
그녀는 남자가 뿜어내는 불안함과 초조감을 느낄 수 있었다.
공윤은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 충격을 받았다.
하얗고 갸름한 얼굴, 섬세한 대칭을 이루는 이목구비는 앳된 기색이 남아 있어 부드러웠다. 그리고 갈색 눈.
지금보다 어려보이고, 눈이 갈색이긴 했어도 확실했다.
키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