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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에나멜
작가 : 신정
작품등록일 : 2019.10.20

요양 간 오지마을에서 주인공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일들.

 
에나멜 08
작성일 : 19-10-20 08:50     조회 : 212     추천 : 0     분량 : 1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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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우희설 어깨를 붙잡고 있는 아저씨 두 손에 힘이 들어갔는지 또 칭얼거리듯 그녀는 아아아 음을 타며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노해림을 쳐다보는 아저씨얼굴이 어딘지 창백해진 것 같았다. 아저씨는 그러다 내 쪽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나는 집요하게 따라붙어오는 그 눈길을 피하고 있었다. 거기서 살짝 시선을 비껴 아저씨 뒤쪽 해가 기울어지는 유리문 밖을 내다보았다.

 “나도 이거에 대해 잘은 몰라. 근데 의사 처방으로 신경접속회로를 사용하는 사람을 본 건 정말 재은이가 처음이야. 희설 씨는, 그러니까, 정식면허를 가진 의사에게 처방받은 게 아닌 거야.”

 아저씨가 하는 말에 다시 바로 앞 아저씨에게 붙잡혀있는 우희설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정신을 차린 건지 아닌지 이제 바로 앉아서 정면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희설은 무면허의사에게 진찰받았다는 얘긴데, 어디서 어떻게?

 

 어디서 어떻게?? 이럴 수가.

 

 “아저씨, 노해림 씨!”

 엄청난 깨달음이라도 얻은 것처럼 아르키메데스라도 된 것처럼 소리 지르면서 두 사람을 불렀다. 아저씨도 노해림도, 심지어 어딘지 정신 나간 것 같은 우희설도 놀라서 날 쳐다보았다. 아저씨가 놀란 표정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왜, 왜 그래?”

 “다인이 말이에요. 차강에 갈 필요 없는 거였어요. 아니, 왜 차강에 가려고 했는지, 지금 생각하니까 황당해요.”

 “차근차근히 말해 봐요.”

 진지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노해림을 보니 왠지 안심되었는데, 그만큼 난 흥분해있었다. 난 정수리에 손을 얹었다가 살짝 그러모아 가슴에 갖다 대곤 진정하려 크게 한 번 숨 쉬고 말했다.

 “아무런 교통수단도 없고 체력도 떨어지는 최다인이 어디 다른 데 갔을 리가 없어요. 있어도 이 마을 안에 있을 거예요. 똑똑한 애니까, 어디 아무도 못 찾을 곳에 꼭꼭 숨어 있는 거예요. 어쩌면 밖에서 자길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할 곳에 말이에요. 거기가 어딘지 아직까지 못 찾았다는 게 답답한 노릇이지만 이 마을 안에 있다는 건 확실해요. 최다인은 살인사건과는 전혀 아무런 연관도 없으니까요. 난 정말, 알리바이를 입증해줄 증인이 그걸 모르고 헤매고 있었다니 진짜.”

 “그런데 그 생각, 안 해본 거 아니잖아요. 마을 전체를 하루 온종일 뒤졌는데도 못 찾았어. 이제 어디 또 찾아볼만한 데도 없잖아. 그런데 정말 이 마을 안에 있다고 생각해요?”

 “그건 그렇지만….”

 “그럼 재은아, 이제 어떻게 할지는 생각해봤어?”

 “사실 잘 모르겠어요. 최다인을 빨리 찾아야 될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그냥 내버려둬야 하는 건지. 그런데 노해림 씨가 말한 대로 저번에 하루 종일 세 명이서 구석구석 안 찾아본 데 없이 찾아 헤맸는데도 아무데도 없었잖아요….”

 떠오르는 것 없이 할 말이 없다는 게 이렇게 슬픈 일인 줄 미처 몰랐다. 아무런 방법도 떠올리지 못하는 내 머리가 원망스러웠다. 마을 안에 있는 건 분명하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불안해하면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건가? 먼저 찾을 수는 없는 거야?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정말 당장이라도 울 것만 같다.

 “아, 어떡하죠? 정말, 아…. 어떡해요?”

 슬프게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며 아저씨는 아무 말 못하고 있었다. 노해림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자리에서 일어나 내 옆으로 오더니 가만히 안고 손끝으로 가볍게 토닥여주며 말했다.

 “괜찮아. 걱정 마.”

 나도 모르게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그렇지만 터져 나오기 전에 닦아내고, 내 몸에 두르고 있는 노해림 두 팔을 조심스레 풀었다.

 “맞아요. 별 일 없을 거예요. 최다인, 분명 어디 잘 숨어 있는 거야. 어디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자기가 이제 됐다고 판단하면, 그러면,”

 그렇게 말하다 보니 다시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참으려고 했지만, 참으려고 했지만…, 어쩌지 못하고 결국 나는.

 

 

 눈물이 매번 때맞춰 흘러나오지 않는다. 한없이 계속 쏟아낼 것 같아도, 결국 멈추게 마련이다. 눈물이 멈추는 시기 대부분은 그 눈물에 뒤따르거나 앞서있는 감정보다 한 박자 뒤처지거나 앞서있다.

 

 내 눈에서 흘러나던 눈물도 멈추었다. 이렇게 울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정말 다인이가 마을 안에 있는 거라면 굳이 애태울 필요 없는 거잖아. 그러니까 너무 불안해하지 마요. 어디 잘 있을 거야.”

 “그래. 재은아. 이럴 게 아니라, 차라리 마음 편하게 먹고 다인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는 편이 훨씬 낫겠다.”

 어쩌면 그 편이 나을 지도 모른다. 정말로 최다인이 마을 어딘가에 아무 일 없이 꼭꼭 잘 숨어있다 나올 거라면 말이다. 난 가볍게 동의하면서 두 사람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우희설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노해림 역시 어딘가 우희설 쪽으로 흘긋거리는 것 같더니 말했다.

 “희설 씨 괜찮은 거예요? 어떡하죠?”

 “크게 걱정할 필요 없어. 누워서 한숨 푹 자면 괜찮아질 거야. 집에 데려다 눕혀줘야지. 신경접속회로 중독반응에서 벗어나려면, 일단 진짜로 자야 하거든.”

 “그럼 지금 가요. 나랑 같이요. 아저씨 혼자 힘들 거예요.”

 두 사람이 하는 말에 난 그럼 팩스 좀 확인해보겠다고 말하려 했다. 그런데 노해림이 또 먼저 입을 열었다.

 “재은 씨는 집에 있어요. 다인이 때문에라도 희설 씨 데려다주고 바로 올 거니까.”

 속으로 안 그래도 집에 있으려고 했다고 중얼거리면서 어딘지 불안하고 불편해 보이는 우희설 얼굴을 가만 쳐다보았다. 아까부터 보이던 그 모든 모습이 신경접속회로 중독반응이라면 어떻게 되는 건지, 걱정스러웠다. 수혁아저씨는―

 

 정말 최다인 문제만으로도 머리에 빈 곳 없이 터질 지경인데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꽤나 복잡해진 상황에 갑갑한 마음으로 노해림이 우희설을 업고 아저씨는 옆에서 붙잡은 채 나가는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뒷모습이 뒤쪽으로 가려지고 딸깍 소리를 내며 문이 완전히 닫혔을 때, 문득 아까 들었던 말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가만 보면 이 마을 이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고 온통 이상한 것투성이라고 했던 말부터 토마토라니 엉뚱한 소리 하지 말라고 신경접속회로에서 대체 뭘 알아낼 수 있냐고 했던 말과 강제종료 후 신경접속회로남용에 대해 길게 쏟아내던 말까지.

 노해림은 감전사고당한 후로 거의 모든 기억을 잃었다고 했다. 어쩌면 그가 잊어버린 기억 속에 뭔가 중요한 단서가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가 했던 모든 말을 전부 그럴 수도 있다고 그는 우연히 그렇게 말한 것일 뿐이라고 치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감전사고당하고 거의 모든 기억을 잃은 상태에서 신경접속회로에 대해 그토록 상세히 알고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 모습 역시 그저 우연이라고 그럴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단순한 우연으로 여기기엔 신경접속회로에 대해 그가 한 설명들이 너무 정확했다.

 

 집에 눕혀만 주고 바로 온다고 했으니, 늦어도 10분을 넘기지는 않을 거였다. 노해림에 대한 의문은 두 사람이 돌아오면 해결하기로 했다. 그전에 혹시 팩스 들어오지 않았는지 확인해봐야 했다. 두레에서 벌써 답장을 보냈으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지만 그사이 다른 내용으로 뭔가 보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2층 방에 올라가서 보니 3차원팩스송수신장치 위엔 아무것도 올려져있지 않았다. 난 방 안을 죽 둘러보고, 대나무 깔개에 썩은 토마토가 스며들었던 부분을 발로 두어 차례 쓱쓱 문질렀다. 그러고는 거울 앞에 서서 상태가 어떤지 거울 속 두 눈을 살폈다. 그런데 눈가장자리 둘러서 몇 가닥 실핏줄이 빨갛게 드러나 보일 뿐 방금 전 울었던 티는 나지 않았다. 이내 거울에서 눈을 떼고, 오른쪽 서랍 위 올려놓은 그 자리에 그대로인 에나멜껍데기를 보았다.

 

 대체 이건 뭘까. 뭘 말하려는 거지. 두레에서 이걸 왜 보낸 거며, 신경접속회로 사용할 때 계속해서 토마토가 나타났던 건 또 뭐지.

 

 “재은 씨.”

 그새 갔다 왔는지 아래층에서 노해림이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난 에나멜껍데기를 집어 들어 망가지지 않게 살며시 쥐고는 1층으로 내려갔다. 두 사람은 아까 앉아있었던 탁자 옆으로 서있었는데, 어딘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 보이는 노해림과 달리 아저씨는 뭔가 찜찜한 듯 탐탁지 않아 보이는 표정이었다. 무슨 일인지 물어보려는데, 노해림이 내 앞으로 유리병 하나를 내밀면서 말했다.

 “재은 씨, 이것 좀 봐.”

 “이게 뭔데요?”

 “우희설 씨 침대에 눕혀놓고 보니까, 베게 옆에 이런 게 있었어. 산 것 같지는 않고, 그냥 빈 병에 내용물만 담아놓은 것 같아. 근데 뚜껑 열고 냄새를 맡아봐도 뭔지 잘 모르겠어.”

 에나멜껍데기를 탁자에 내려놓고 병을 받아들어 붉은색 내용물로 삼분의 일쯤 차있는 유리병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뚜껑을 열지 않은 채로 들어 올려서 빛에 비춰 보이는 병 안을 들여다보았다. 붉은색 내용물은 보기엔 숟가락으로 뜨면 부드럽게 푹 떠질 것처럼 병을 기울이면 안에서 둔하게 흐르며 기울어졌다. 그런데 뚜껑 열고 봐도 뭔지 모르겠다는 말에 난 노해림을 쓰윽 쳐다보고는 뚜껑을 열어서 병 입구 가까이 얼굴을 가져갔다. 뭔가 코에 익은 냄새였다. 그때 노해림 뒤쪽에 서있던 아저씨가 가볍게 손사래 치며 말했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희설 씨가 만들어놓은 건가봐. 그냥 두고 오자고 하는데도 해림이가 고집을 부리더라. 이런 게 뭐라고 들고 나온 건지. 아무도움도 안 되는걸.”

 “아뇨. 잠시 만요.”

 병을 가져가려는 아저씨 손길을 피하며 대꾸한 후 뚜껑 연 유리병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숟가락 하나를 꺼내왔다. 숟가락으로 병 안에 들어있는 정체불명 내용물을 한 숟가락 떴다가 다시 떨어뜨리면서 살펴보았다. 만들다 만 반죽과 같은 반고체 형태인 내용물에 뭉글뭉글한 덩어리들이 뒤섞여있었다. 덩어리들 역시 확실한 형체라곤 없었고 크기도 일정하기 않았다. 낯설다. 그런데 익숙했다.

 

 코에 익은 냄새다.

 노해림이 약간 힘을 준 눈으로 날 쳐다보며 말했다.

 “재은 씨, 뭔지 알겠어? 뭐 같아?”

 그는 찜찜한 듯 탐탁지 않은 표정 그대로인 아저씨를 돌아보더니 다시 내가 들고 있는 병을 쳐다보았다.

 “병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이 뭔가 굉장히 익숙한데, 도무지 기억이 안나.”

 기억하지는 못하는데, 굉장히 익숙한 것. 두 사람이 돌아오기 전 노해림에 대해 의아스럽게 여겼던 것들을 떠올리면서, 나는 거의 노려보다시피 하며 병 안 내용물에 집중했다. 노해림도 바로 옆으로 다가와 같이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아무렇지 않은 척 했을 뿐이었던 모양이다. 노해림이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고 태평해 보이는 모습에 난 정말 그런 건가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는 ‘기억에 없지만 굉장히 익숙한 물건’이 등장하자 잔뜩 긴장하며 이렇듯 집중해 쳐다보고 있다. 그렇다.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아마도 그에겐 평생을 통째로 잃는 것과 마찬가지일 텐데.

 그렇게 잠시 노해림을 쳐다보고 있다가, 별 생각 없이 병 안에서 반 숟갈 떠내 먹어보았다. 입 안으로 들어가는 숟가락 혀에 닿아서 안으로 들어가는 내용물 맛. 나도 모르게 눈을 부릅떴다. 혀가 찌릿할 만큼 단 토마토였다. 다디단 토마토 맛이었다.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가 그는 나를 따라 덩달아 깜짝 놀란 모양이었다.

 “왜 그래요.”

 “토마토에요.”

 “네?”

 “이거, 토마토라고요. 아저씨, 이거 토마토로 만든 거예요. 근데 대체 어디서 구했지? 여긴 토마토 없잖아요. 키우는 사람도 없고.”

 내가 아저씨를 돌아보며 말하자 그제야 아저씨도 가까이 옆으로 와 섰다. 아저씨 안색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 탓인지 목소리도 약간 가라앉은 느낌이었다.

 “응. 없지. 토마토는….”

 “해림 씨, 이거 먹어봤어요?”

 “아니. 별로 먹어보고 싶지는 않아서.”

 “한 번 먹어봐요. 뭔가 기억날 지도 모르잖아요.”

 “잠깐, 재은아, 근데 그거 희설 씨 베게 밑에 있던 거잖아. 베게 밑에 놓고 지낼 정도면 꽤나 중요하게 여기는 물건인 것 같은데, 더 손대지 말고 제자리에 갖다놓자.”

 그렇게 말하면서 아저씨는 토마토 맛이 담긴 병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토마토를 어디서 구한 걸까요?”

 “그것까지 누가 어떻게 알겠어. 근데 여기서 맛보기 힘든 것이니만큼 희설 씨가 아끼는 걸 거라는 건 확실히 알겠다. 이리 줘. 내가 갖다놓을게.”

 “이거 무슨 연관이 있는 게 분명해. 안 그래요?”

 “무슨 소리야.”

 “노해림 씨, 어떻게 생각해요? 저번에 토마토가 무슨 상관이냐고 했었잖아요. 근데, 자꾸 토마토가 나타나는 게 이상하지 않아요?”

 심각하게 말하는 날 보면서 노해림은 멀뚱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있었는데, 아저씨가 한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재은아, 엉뚱한 데로 엮어가지마. 네가 신경접속회로 사용할 때 본 토마토하고 지금 이 병에 들어있는 토마토하고 무슨 상관이 있겠어. 아무래도, 너 다인이 때문에 너무 신경쓰다보니까 점점 판단력이 흐려지는 것 같다. 해림이도 그렇고. 재은이 네 말대로 다인이가 마을에 있는 게 확실하고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면, 어차피 당장 뭘 어떻게 할 수도 없는 거고 하니까 좀 쉬는 게 좋겠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아저씨는 정말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저씨 말대로 할 수는 없었다. 최다인을 그렇게 엮어간 게 대체 무엇인지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아내야 했다. 다시 이런 일을 겪지 않기 위해서라도 알아야했다. 그런데 옆에서 노해림은 여전히 뭔가에 한 방 제대로 얻어맞은 것 마냥 멍한 상태였다. 이 상황에 대체 왜 저러고 서있는 건지 답답한 노릇이었지만, 노해림은 좀 쉴 필요가 있어 보였다.

 “아뇨. 아니에요. 아저씨, 저 멀쩡해요. 피곤하지도 않고, 아무런 문제도 없어요. 판단력이 흐려진 것도 아니에요.”

 “재은아.”

 “그런데 지금 보니까, 아저씨말대로 노해림 씨는 정말 쉬어야할 것 같아요.”

 아저씨에게 말하고 나서 옆을 돌아보니 그는 곧은 자세로 팔에 힘을 빼 늘어뜨린 채 표정 없이 서있었다.

 “노해림 씨, 괜찮아요?”

 아저씨도 노해림을 조심스레 부르면서 어깨에 손을 올리고 괜찮으냐고 물었다. 그러자 조용히 몇 초가 지나간 뒤, 표정 없는 얼굴 그대로 그는 내 쪽을 쳐다보았다.

 “좀 피곤해.”

 “재은아.”

 피곤하다고 말하더니 노해림 얼굴은 매우 파리했고 안 좋아보였다. 그 모습이 놀랍기보다는 걱정스러워서 어디 많이 안 좋은 건지 물어보려는데, 나지막이 부르는 아저씨 목소리가 들려 다시 그쪽을 쳐다보았다. 아저씨는 날 향해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탁자 위에 유리병을 집어 들고는 뚜껑을 닫고 말했다.

 “해림이 정말 안 좋아 보인다. 여기서 쉬고 있어. 이거 돌려주고 올게.”

 저 토마토병조림, 우희설 어차피 깊이 잠들었을 텐데 이대로 머리맡에 갖다놓기엔 뭔가 아쉬웠다. 하지만 무엇 때문인지 노해림은 파리한 얼굴로 겨우 서있는 것 같았고, 아저씨는 또 저렇게 지금 당장 돌려줘야한다며 막무가내였다.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아저씨는 이미 돌아서서 현관 쪽으로 나가고 있었다. 난 문 열고 나가는 아저씨를 부르려 했다. 그런데 어지러웠는지 갑자기 내 어깨를 짚는 노해림 때문에 휘청거리며 신음만 흘리고 말았다. 다시 고개들어보니 아저씨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우선 창백한 노해림부터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아 일단 의자에 앉게 했다.

 그러고 나서 생각해보니, 아저씨는 유리병을 돌려주고 오겠다고 했다. 그리고 난 유리병에 든 내용물에 관해 궁금한 게 있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붙잡고 낑낑대기보다, 원래 있던 자리에 갖다놓았다가 우희설이 깨어날 때쯤 찾아가 직접 물어보는 게 가장 확실하고 손쉬운 방법이었다. 당연한 거였다. 그런데 썩 좋아 보이지 않는 노해림은 그렇다 치고, 아저씨도 나도 그렇게 당연하고 손쉬운 방법이 있다고 우희설이 깨어난 뒤 물어보면 된다고 말하지 못했다. 아니라고 아저씨에게 우기긴 했지만, 노해림만큼은 아니더라도 나 역시 신경이 곤두서있었고 아저씨도 별다를 건 없는 거였다. 이럴 때 나라도 조금이나마 곤두선 걸 가라앉히고 진정하려 해봐야지 생각하고 있으려니, 서서히 머릿속이 누그러들어 정돈되어가는 듯했다. 그런데 그때 문득 어디서 어쩌고 있는지 모르는 최다인이 떠올랐다. 그러자 이러다 어쩌면 또 다시 울 것처럼 불안하게 얼굴이 일그러지려고 했다.

 “재은 씨.”

 좀 괜찮아졌는지 옆에서 노해림이 피곤하다고 말할 때보다는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날 불렀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난 목소리 내어 대답하지 못했다. 한결 편안해진 얼굴을 돌아보며 쓰게 웃고 말았다.

 

 나간 지 꽤 되었는데도 아저씨가 돌아오지 않았다. 아까 우희설 눕혀주고 오겠다고 나갔을 때에도 15분정도밖에 걸리지 않았었다. 그런데 유리병하나 머리맡에 갖다놓고 오는 일이 벌써 25분이 지나가도록 걸리고 있었다. 아저씨 오길 기다리는 사이 노해림은 약간 피곤한 기색이긴 하지만 여느 때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재은 씨, 지금 몇 시야?”

 “5시17분이에요. 근데 아저씨가 많이 늦으시네요.”

 “1843분 남았네.”

 “네?”

 “1843분 남았다고.”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었다. 그런데 가만 보니 노해림은 다름 아니라 신경접속회로 처방기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괜히 헛웃음이 나왔다.

 “아, 그러네요. 정말 이제 1843분 남았구나.”

 “어떡할 거예요? 이제.”

 “뭘요?”

 “말도 안 되지만, 최다인 찾으려면 신경접속회로 사용해야 된다면서. 그래서 오늘 오전만 해도 바늘 꽂았던 거잖아. 도중에 내가 강제종료 시키긴 했지만.”

 노해림 말이 맞다. 난 신경접속회로를 이용해 최다인을 찾으려 했다. 최다인이 겪고 있는 일과 토마토가 어떤 연관관계에 있는지 알아내고 싶었다. 그리고 나중엔 두레에서 무얼 말하고자 토마토를 보낸 것인지도 알아내고 싶었다. 난 노해림과 마주친 시선을 돌려 탁자에 올려놓은 에나멜껍데기를 보았다.

 아무 쓸데없는 껍데기일 뿐이었다. 손을 뻗어 에나멜껍데기를 집어 들고 만지작거리다가 빛에 비춰보면서, 감싸고 있던 내용물도 없이 물 빠진 얼룩으로 흔적만 남아있는 걸 다시 살펴보았다. 지금은 신경접속회로를 사용하고 싶은 마음이 그렇게 간절하지 않았다.

 “안 써도 괜찮겠어? 시간 얼마 안 남았는데.”

 “별로, 소용없는 짓 같아요. 이젠 필요 없어요. 신경접속회로로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요. 괜히 바늘 꽂을 필요는 없어요.”

 

 에나멜껍데기를 도로 내려놓고 노해림 쪽을 돌아봤을 때, 그는 떠보기라도 하는 듯 묻고는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에 난 꽤 담담하게 말했다. 정말이었다. 그제처럼 어제처럼 몇 시간 전 눈 뜨고 일어났을 때처럼 간절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나는 노해림이 1843분 남았다고 말하기 전까지 신경접속회로에 대해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주로 팔이긴 하지만 이미 여기저기 바늘 밀어 넣었던 흔적이 흉터로 여럿 진하게 남아있는 몸이었다. 거기에 더 보태고 싶지 않았다.

 물론 신경접속회로가 간절할 때나 사용하고 있을 때야 그깟 흉터 따위 떠올리지도 못한다. 하지만 깨어난 후에는 생각하게 되고 그 다음 번 연결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수시로 자기 몸에 남는 걸 보게 된다. 그런데 사실 그런 것쯤 수십 번을 봐도 소용없다. 신경접속회로를 사용하면 흉터가 남을 수밖에 없다는 건 처방받은 환자든 아니든 사용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몸에 하나둘 피부보다 어둡거나 밝은 반점으로 늘어가는 흔적에 가끔씩 이건 아닌데 싶다가도, 그 시간이 되면 어쩔 수 없다고 여기고 마는 것이다.

 사실 남은 흉터에 더 보태고 싶지 않다고 분명하게 생각한 건 노해림이 내게 거의 절망적인 어조로 말했을 때가 처음이었다. 대체 그걸로 뭘 알아낼 수 있느냐고, 단순의료기기일 뿐이라고 곧 울려는 얼굴로 내게 말했을 때였다. 얼룩덜룩해질 지경인 오른팔 아래 손목을 아프도록 세게 붙잡고 말했을 때였다.

 문득 노해림에 대해 의아해했던 걸 떠올렸다.

 “노해림 씨, 근데 신경접속회로를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

 “내가 잘 안다고? 신경접속회로를?”

 “네. 저번에 남용얘기 할 때도 그랬고, 좀 전에 아저씨랑 얘기할 때도 그렇고, 아무튼 말 할 때마다 보면 무슨 전문가 같아요.”

 “그래? 그렇게 보여요? 근데 맞아. 전에 나 신경접속회로에 관해 공부했어. 꽤 열심히.”

 똑바로 쳐다보며 말하는 얼굴을 보고,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난 아저씨얘길 꺼냈다.

 “희설 씨네 한 번 가볼까요? 아저씨 너무 늦으시네요.”

 “그럴까?”

 아무렇지 않게 멀쩡해진 모습이라서 난 또 다시 당황했다. 노해림이 의자에 앉도록 부축한 사람이 나인데도, 방금 전 잔뜩 창백해져서 비틀거리기에 겨우 부축하여 앉혀놓은 사람이 과연 그가 맞는지 믿어지지 않았다. 창백한 기운도 완전히 가셔서 평소 혈색 좋았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괜찮은 거예요?”

 “응. 그렇게 걱정 안 해도 돼요.”

 “많이 안 좋아 보였는데 정말 다행이에요.”

 “그러는 당신은요?”

 “뭐가요?”

 “다인이 말이야. 못 찾아도 괜찮으냐고.”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또.”

 “신경접속회로, 쓸 필요 없다면서요.”

 노해림, 왜 또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난 그를 쳐다보며 힘주어 똑바로 말했다.

 “이제 그건 상관이 없다는 소리였지, 최다인을 못 찾아도 괜찮다는 건 아니었어요.”

 “아, 그렇군.”

 그는 알겠다는 듯 말하고 뭔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다시 고개 들어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이제 우희설 씨 집에 가봐야겠네.”

 

 오지마을에 있는 열일곱 채 집들은 똑같은 구조로 설계되어 있다. 동서남북 사방에서 문이 어느 쪽을 향하고 있는지에 차이가 있을 뿐 모든 집은 공장에서 똑같이 만들어낸 대량 생산품처럼 크기도 모양도 똑같았다. 우리 집 같은 경우 현관문이 남쪽으로 나있지만 아저씨 네와 노해림 집은 동쪽으로 나있었다.

 노해림 집은 두 집 사이에 넉넉하게 세 채를 짓고 남은 공간에 한 채 더 짓기엔 약간 모자라는 정도로 우리 집과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그리고 반대편 옆집인 우희설 집과도 두 채는 더 지을 수 있을 만큼 떨어져 있었다. 왠지 조금 먼 것 같았다.

 ‘다인이네’로 옮겨온 지 이제 열 달이나 되었다. 그런데도 여태껏 오지마을에 신경접속회로를 사용하는 사람이 나 말고 벌써 세 명이나 된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우희설과 제대로 말을 나눠본 적이 없다는 건 아까 집배헬기로봇 옆에서야 알아차렸다. 오지마을에 산 지 꽤 되었는데도 나는 이 마을에 대해 여기 사람들에 대해 뭘 너무 모르고 있었다.

 “재은 씨.”

 걷는 내내 앞으로 뻗어가는 발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 옆에서 노해림도 같이 가고 있었으니 아래엔 나보다 좀 더 느리게 움직이는 그의 발도 내려다보였다. 아직까지도 내가 모르고 있는 게 무엇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어쩌면 ‘내가 아직까지 모르고 있는 무언가’가 바로 최다인과 두레와 토마토를 잇는 연결고리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마도 그럴 것 같았다.

 “재은 씨. 다 왔어요.”

 언제 다 왔는지 모르게 우희설 집 앞이었다.

 “네.”

 초인종을 두 번 세 번 눌러도 별 반응이 없었고 대문을 똑똑똑 두드리며 불러도 묵묵부답이었다. 나중엔 오른쪽으로 돌아가서 큰 창문 안쪽을 살펴보았는데 아저씨도 우희설도 보이지 않았다.

 “희설 씨는 방에서 자고 있다 치고, 아저씨는 어디 계신 거지?”

 혹시 이제 어두워져 잘 보이지 않는가 싶어서 유리 앞에 붙어 서서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옆에서 노해림이 자연스럽게 유리문을 밀어 열고 안으로 들어가려했다. 좀 놀라서 쳐다보고 있으려니, 그가 들어가다 말고 돌아보며 말했다.

 “보니까 문이 조금 열려 있네. 들어와요. 아저씨 있는지만 확인하게.”

 나는 아무 말 않고 뒤따라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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