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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에나멜
작가 : 신정
작품등록일 : 2019.10.20

요양 간 오지마을에서 주인공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일들.

 
에나멜 06
작성일 : 19-10-20 08:47     조회 : 214     추천 : 0     분량 : 1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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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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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식하지 못한 사이 일어나는 일이라도 행위자에게 그 책임이 있는가?

 책임소재에 관해서라면 엄밀히 따져봐야 하는 문제인가? 아니, 사실 책임소재라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인가? 그렇다면,

 책임소재를 따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최다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대체 어떤 음모에 휘말린 건지 말도 안 되도록 심각한 사건에 휘말려버린 것인지, 당장이라도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바로 앞에서 노해림이 부르고 있는 목소리도 듣지 못할 지경이었다.

 “재은 씨!”

 

 

 

 2. 처방과 복용에 관하여

 

 갑자기 들려 깜짝 놀라게 하는 목소리에 벌떡 정신을 차리고는 내뱉듯 말했다.

 “그래요. 그럼, 아저씨한테 도와달라고 부탁드려보는 게 좋겠어요.”

 일어서서 노해림을 쳐다보았는데, 날 쳐다보는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왜 저렇게 쳐다보는 거지?

 “왜요?”

 “아니, 가요, 가.”

 

 노해림 집에서 나오면 오른쪽 앞으로 꺾어져나가는 대각선상에 수혁아저씨 집이 있었다. 난 집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도록 큰 유리창 안쪽으로 서있는 아저씨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집배헬기로봇이 오려면 얼마나 남았는가.

 “시간 얼마나 남았는지 알아요?”

 “이제 10시 반쯤 됐으니까, 두 시간 정도 남았죠.”

 두 시간. 너무 길다.

 아저씨 집 앞에 서서 말했다.

 “아직 멀었네요.”

 “아직 멀긴요. 난 오히려 모자란 것 같은데.”

 디리리리리.

 띠리리리리리.

 구식 전화벨소리 같은 초인종. 한 번 누를 때 소리는 두 번 울린다.

 한 번 더 누르자, 누구세요, 묻는 아저씨 목소리가 들렸다.

 “아저씨, 저 재은이에요.”

 옆에서 노해림이 뭔가 중얼거리는 것 같았는데, 워낙 작게 혼잣말하듯 해서 입만 뻐끔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거기에다 잠시만 외치는 아저씨 목소리와 풍경 소리에 딸깍 문 열리는 소리까지 겹치는 바람에 더 그랬다. 뭐라고 하는 건지,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뭐라고 한 거예요?”

 물어보는 말에 노해림은 살짝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 아니에요.”

 

 

 문을 열고 나온 아저씨는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그런데 아저씨 안 이후로 처음 보는 모습이라서 어색하면서 좀 신선하기도 했다. 가라앉은 풀색바탕 위 똑같은 색실로 무려 꽃무늬 자수를 수놓은 앞치마에 샛노란 뒤집개. 그런데 귀여운 느낌마저 드는 샛노란 뒤집개까지 들고 있는 모습이 아저씨덩치에 기이하게도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난 계속 눈을 끔벅거리며 비비고 다시 보았다. 하지만 앞에 문 열어준 사람은 분명 풀색바탕에 풀색 꽃무늬로 수놓은 앞치마를 두른 채 샛노란 뒤집개를 들고 있는 아저씨였다.

 “아저씨, 지금 혹시 요리하시는 중이었어요?”

 “응. 들어와. 근데 옆에 저 애는—”

 “안녕하세요. 노해림이라고 합니다.”

 문 열어준 수혁아저씨에게 노해림이 마치 처음 만난 사람을 대하듯 인사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앞에 서있는 아저씨를 다시 보게 되었다. 그런데 가만 살펴보니 수혁아저씨와 많이 닮긴 했지만, 분명 수혁아저씨는 아니었다.

 “저기, 혹시 수운아저씨세요?”

 마주 서있는 아저씨가 뒤집개 든 그대로 가볍게 박수치며 말했다.

 “수혁이한테 들어서 알고 있었구나. 응. 내가 황수운이야. 수혁이랑 많이 닮았지? 나도 너희 두 사람 전부터 알고 있었어. 그러고 있지 말고 안으로 들어와. 근데, 수혁이는 지금 안쪽에서 자고 있어.”

 들어오라며 손짓하는 아저씨를 따라 들어가면서 보니, 뒷모습은 진짜 수혁아저씨와 똑같았다. 난 바로 옆 노해림만 듣도록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두 분 진짜 똑같지 않아요?”

 “응. 정말 많이 닮았네요.”

 수운아저씨는 자리에 앉아서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더니, 가스레인지에 올려놓은 팬을 살펴보곤 한 차례 뒤집으며 말했다.

 “안 그래도 부침개 부치는 중이었는데, 마침 잘 왔다. 먹어봐. 진짜 맛있게 됐어.”

 “괜찮아요. 아저씨, 방금 밥 먹어서 지금 배불러요.”

 사실 먹을 만큼 먹었다고 할 순 없었다. 하지만 이 상태로 뭘 먹어서는 제대로 소화될 것 같지 않았고, 별로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아저씨는 그렇게 말하는 내 쪽을 돌아보면서 못내 아쉽다는 표정이었다.

 

 “그럼, 커피 마실래? 혹시 커피 안 마시는 사람 있어?”

 “아뇨. 커피 좋아해요.”

 “그래? 잘됐네. 오늘 일어나서 내린 거거든. 근데 일어나자마자 여태 계속 집 치우고 커피내리고 부침개 부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다. 뭐, 그 전이랑 별 다를 건 없는 것 같기도 하지만.”

 “아저씨 그렇게 계속 움직여도 괜찮으신 거예요?”

 “그럼, 이제 일어났는데 뭐.”

 “아, 그제 보내주신 부침개 진짜 맛있었어요. 감사하다고 인사드리고 싶었는데, 어제 왔을 때 말씀드리질 못했어요.”

 아저씨는 약간 구부려있던 허리에 힘을 줘 세우더니, 얼굴에 옅은 미소를 드리우곤 말했다.

 “응. 내가 잠이 좀 많은 편이라서.”

 갑자기 그렇게 말하는 아저씨 얼굴이 왠지 해쓱해보였다. 근데 실제로 수혁아저씨에 비해서 얼굴이 좀 더 마른 형이긴 했다. 난 수운아저씨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때 문득 노해림 잔이 눈에 들어왔다. 대체 언제 마신 건지 이제 막 따라내어 아직 식지도 않은 커피를 벌써 다 마셔버린 모양이었다. 제대로 데었을 것 같았다. 노해림을 보니, 미간을 심하게 찌푸린 채 수운아저씨를 쳐다보고 있었다. 데인 데가 많이 아픈가.

 “노해림 씨.”

 “아저씨, 근데 수혁아저씨는 어디 계신 거예요? 집에는 안 계신 것 같은데.”

 “수혁이? 지금 저 방에서 자고 있어. 어제 통 잠을 설치는 것 같더니, 방금 전에야 겨우 잠들어서 깨우긴 좀 그런데, 뭐 급한 일이라도 있는 거야?”

 수혁아저씨한테 물어보려고 했는데 도와달라고 하려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집배헬기로봇으로는 도저히 안 될 것 같은데—

 11시10분. 집배헬기로봇 오기 전까지 이제 1시간20분정도 남았지만, 그 때문에 초조하진 않았다. 내가 이렇게 초조한 건 신경접속회로 사용기한이 이제 만 하루하고도 한나절정도밖에 안 남았기 때문이다. 수혁아저씨가 당장 도와줄 수 없다면, 여기서 더는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난 노해림을 한 번 쳐다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재은 씨?”

 “아저씨. 저희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실은 급한 일이 있거든요. 근데, 이따 밤에라도 수혁아저씨 깨어나시면 저 찾아왔었다고 말해주세요.”

 옆에 앉아있던 노해림이 느리게 일어서더니 내 말에 이어서 덧붙이듯 말했다.

 “그리고 아저씨, 재은이한테 좀 가보라고도 전해주세요. 해림이도 같이 왔었다고요. 부탁드릴게요.”

 “알았어. 전해줄게. 근데 수혁이, 며칠 지나야 일어날 텐데. 적어도 사흘은 걸릴 거야. 그때라도 괜찮겠어? 많이 급한 것 같은데.”

 “수혁아저씨가 사흘은 지나야 일어난다고요?”

 수운아저씨는 난처한 듯 살짝 찡그리면서 나와 노해림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응. 음….”

 난 노해림을 다시 한 번 쳐다보곤 말했다.

 “수혁아저씨, 주무시는 거 아니에요?”

 “맞아. 지금 푹 자고 있어. 근데 어제 잠을 통 못 자서—”

 어제 잠을 설쳐서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어제 하루 제대로 못 자서 그 다음날 오전에 잠든 것까진 그렇다 쳐도, 사흘씩이나 잠만 자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수운아저씨가 하는 말을 들으며 내가 생각하고 있을 때, 노해림은 아저씨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말했다. 그런데 그건 이 순간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수혁아저씨가 ‘적어도’ 사흘 동안 깨는 일 없이 쭉 잔다고요?”

 

 

 신경접속회로는 신경계 이상증세로 나타나는 질환들을 치료하기위한 목적에서 개발된 전문 의료기기이다.

 신경접속회로 처방환자들은 하나같이 위험부담이 큰 수술을 할 필요가 없이 신경계질환을 치료할 수 있어서 편리하다고 말한다. 또한 치료과정도 마치 푹 자고 일어나는 것과 같아서 전혀 고통스럽지 않으며 오히려 편안하기까지 하며, 깨어난 후에는 굉장히 개운하다고 말한다.

 

 수운아저씨가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 거리고 있는 모습을 봤을 때, 나와 노해림은 너나할 것 없이 성큼성큼 걸어가서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오른쪽에 설치되어있는 신경접속회로와 거기 의자에 누워있는 수혁아저씨 모습을 보았다.

 수혁아저씨 왼쪽 관자놀이 근처 위쪽으로 섬유다발뭉치를 통해 이어지는 바늘이 꽂혀있는 걸 보았다. 아저씨는 내게도 굉장히 익숙한 의자 위로, 내게도 굉장히 익숙한 자세인 반쯤 누운 그 자세로 완전히 늘어져있었다. 아저씨는 이미 깊이 잠들어버린 모습이었다.

 “이건—”

 “재은 씨, 이거 신경접속회로 맞죠?”

 분명했다. 의심할 여지없이 수혁아저씨가 누워서 잠들어있는 의자는 우리 집 2층 방에 설치된 신경접속회로 의자와 똑같은 것이었다. 심지어는 수치조정기기까지 똑같은 제품이었다. 난 옆에 서있는 노해림과 뒤쪽에 창백한 수운아저씨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내가 듣기에도 꽁알꽁알 중얼대고 있는 내 목소리는 정말 침울하기 그지없었다.

 “아저씨 수치조정기기나 신경접속회로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것 같았는데.”

 

 

 

 “빨리 와. 그러고 있지 말고.”

 “어디 가려고 그러는데.”

 

 어디서 어떻게 해서 내 가방에 담겨있게 되었는지 알 수 없는 토마토들을 안주삼아 술 마시다 엉망으로 취해서 곯아떨어졌다가 아픈 머리 부여잡으며 정신 차렸을 때였다. 최다인은 침대에 기대앉은 그 자세 그대로 엎어져서 자고 있었다. 난 방에 굴러다니고 있는 토마토 하나를 집어 들어 옷에다 쓱쓱 문질러 닦아먹었다. 그렇게 세 개쯤 먹고 나니 정신이 조금 맑아지는 듯했다. 하지만 도저히 일어서서 돌아다닐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난 무릎을 질질 끌며 기어가서 최다인을 흔들어 깨웠다. 정말 힘들었다.

 “최다인, 일어나봐. 야, 최다인, 일어나라 좀.”

 정말 억울한 건, 아무렇지도 않고 멀쩡하게 초롱초롱하기까지 한 최다인 눈빛이었다. 메스꺼운 속으로 팔도 겨우겨우 들어 올려 흔들고 깨운 건데 그렇게 깨워놓은 최다인은 어제 무슨 일이나 있었냐는 듯이 전혀 아무렇지 않았고 아주 멀쩡했다. 오히려 팔팔해 보일 정도였다. 난 속에서 밀고 올라오려는 걸 억누르며 고개를 숙였다. 최다인은 그런 날 쳐다보고 있더니, 바닥에 굴러다니는 토마토 하나를 집어 들어 한 입 베어 먹으며 말했다.

 “이거 뜨뜻미지근한 게 술 깨는 데 딱 좋겠다. 근데 아무리 봐도 너, 여기 있는 토마토 다 먹어야 깨겠다. 뭘 그렇게 마셔댔어.”

 “말, 시키지 마, 나, 더, 자야겠어.”

 토마토 하나를 들어 내 쪽으로 내미는 최다인 손을 힘 빠져서 늘어지는 손짓으로 겨우 밀어 치웠다. 그리고 그대로 누워서 다시 잤다.

 

 “내 뒤로 바싹 따라와. 거기서 그러고 있지 말고.”

 “진짜 어디 가려고 그러는 건데. 그거나 좀 알자.”

 내 앞에 두 걸음쯤 앞서가고 있는 최다인 뒷모습은 거칠 것이 없어보였다. 그런데 어디로 가는 건지 말도 없었다. 가마민박에서 최다인을 깨워놓고 다시 곯아떨어졌다가 정신 차리고 일어났을 때, 이제 가자고 하더니 무작정 따라오라고 하는 거였다. 분명 가마봉 오를 때 불평 불만투성이였던 최다인이 산길에서 이렇게 잘 다니다니, 이제까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귀신이라도 씌었는지 전문산악인이라도 된 것처럼 빠르면서도 능숙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몇 번이나 뒤에 바싹 붙어서 빨리 따라오라고 말하는 소릴 들었다. 그렇게 똑같은 말을 네 번째 들었을 때, 난 최다인 어깨를 붙잡아 세웠다.

 “잠깐.”

 “왜?”

 “어디로 가는 거냐니까 왜 말을 안 해.”

 자길 붙잡고 있는 날 쳐다보고 미간을 찌푸리고는 가던 쪽을 자꾸 흘긋거리는 최다인 모양새가 꽤나 초조해보였다.

 “야, 최다인.”

 “차강으로 가는 거야. 차강 어딘지 알아?”

 “차강? 응, 알지. 전에 같이 간 적도 있잖아. 그때 거길 뭐 하러 갔었지? 근데 갑자기 거긴 왜? 이때까지 그런 말 한 적 없잖아.”

 최다인은 내 손을 잡아떼어 내고 앞으로 돌아서면서 말했다.

 “지금은 좀 급하니까, 가면서 설명할게. 일단 빨리 가자.”

 

 아마 내가 다시 잠들었을 때 최다인이 절벽 위로 올라가서 황수운 씨와 뭔가 얘기를 나눈 모양이었다.

 “너 깨기 전에, 잠깐 절벽 위에 올라갔었어.”

 난 그랬을 거라고 짐작했다. 왜냐면 그 한 마디 하고는 그때부터 더는 말 않기로 작정하기라도 했는지 입을 꾹 닫은 채 가는 길만 서두르고 있어서였다. 그 뒤를 따라가면서 다시 말을 꺼냈지만, 최다인은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면서 도착하면 알려주겠다고만 하고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쉬지 않고 움직여서 봉우리 하나를 넘어가다가 다시 한 번 어깨를 잡아챘을 때였다.

 

 

 < 주의사항 >

 

 1. 사용 중 강제종료금지.

 신경접속회로에 연결한 상태에서 의식이 흘러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잠 깨듯 사용종료하지 않고 외부 힘에 의해 강제로 종료 당하게 되는 경우 사용자는 한순간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된다. 정도가 극심한 경우 기도가 좁아지면서 호흡곤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튕기듯 의자에서 일어나보니 노해림이 옆에 서서 내 팔에 꽂혀있던 바늘과 연결된 섬유다발뭉치를 들고 있었다. 난 곧바로 몸을 일으키려했지만 고개를 들려하자 시야가 까맣게 무너져 내리듯이 어지러웠다. 노해림은 일어나지 못하는 날 노려보면서 들고 있던 섬유다발뭉치를 바닥으로 내던졌다.

 “수운아저씨는요?”

 “글쎄요.”

 “당신 때문에, 나 어쩌면 발작 일으켜서 죽을 지도 몰라요.”

 “근데 멀쩡하잖아.”

 바늘을 어떻게 잡아 뺀 건지 꽂았던 자리에 핏방울이 맺혀있었다. 곧 흐를 것처럼 왼쪽 팔꿈치 안쪽에 크게 맺힌 핏방울을 내려다보다가 왼손을 들어 머리를 짚었다. 뒤흔들리는 머릿속을 조금이나마 가라앉혀보려고 노력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나저나 재은 씨, 의료기기를 사용하면서 주의사항을 어기면 어떻게 되는지 몸소 체험한 건데, 괜찮아요?”

 “왜 그랬어요. 아….”

 노해림은 이마를 짚고 있는 내 옆으로 의자를 끌어다 앉으면서 왼손을 꽉 잡아 내리면서 말했다.

 “왜 그랬냐고? 나도 황수혁도 분명 당신한테 신경접속회로 되도록 사용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어. 근데 듣지 않은 건 당신이야. 일회용으로 나온 섬유다발뭉치를 서너 번이나 쓰면서 이런 일 겪게 될 건 예상 못하고 있었어? 알고 있었잖아. 이런 일 생길 수 있다는 거. 그러니까 왜, 왜 그랬어. 내일이 처방 마지막 날이니까 도저히 안 하고는 배겨낼 수가 없었어? 안재은 당신, 딴 사람이라면 모를까 황수혁 말은 그래도 잘 들어왔잖아. 근데 왜 또 이러고 있는 거야. 넌 이미, 주치의에게 처방받은 신경접속회로 사용횟수를 초과하고도 남았어. 이거 과다사용이야. 알아? 남용이 뭔지 알지?”

 쉴 새 없이 말을 쏟아내는 걸 듣고 있으려니, 노해림은 어느 순간 말을 멈추곤 잡고 있던 내 손을 얌전히 내려놓았다. 그런데 그다지 아프다고 여기지 않았던 부위에 멍까지 들어 있었다. 강제종료 당하는 바람에 아직도 지각이 완전히 살아나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자리가 은근히 아프기 시작하는 걸 보면 이제 곧 완전히 돌아오리라는 건 분명했다. 노해림이 지나치게 흥분했는지 고혈압 환자처럼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는 모습을 올려다보면서, 난 반대로 숨을 가라앉혀 깊게 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과다사용이라고요?”

 노해림은 반쯤 누워있던 자세에서 바로 앉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과다사용이라고요 되묻는 내 목소리를 듣더니, 다시 좀 전에 말을 쏟아낼 때와 비슷한 기세로 내뱉기 시작했다.

 “그래. 과다사용. 간단히 남용이라고도 하지. 무슨 뜻인지 모른다면 기꺼이 설명해줄게. 하지만 분명 처방전 내주면서 주치의가 당신한테 말해줬을 거야. 남용이라는 건 다른 것보다도 ‘신경접속회로’라는 의료기기 때문에 사용하게 된 용어야. 보통 남용이라고 할 땐 약물에 대해서 말할 때야. 그것도 향정신성약물 말이야. 적정량에 맞지 않게 약물을 제멋대로 먹어대는 거나, 사회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서 향정신성약물을 비정상적으로 사용하거나 그에 집착하는 걸 말하지. 꼭 향정신성의약품에만 해당되는 얘긴 아니야. 알코올이나 아편 같은 유사약물이라도 못 끊고 강박적으로 사용한다면 역시 남용이라고 할 수 있어. 술이라든가 마약 같은 거 말이야. 신경접속회로남용, 그거 약물남용이랑 똑같은 거라고 보면 돼. 신경접속회로 같은 경우 몸속으로 흡수되지 않는다는 것뿐이지 남용했을 때의 증상부터 결과까지 약물남용과 별다를 게 없으니까. 근데 왜지? 당신은 누구보다도 신경접속회로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어. 당신은 정식 절차를 밟아서 정확한 진단을 통해 처방받은 환자라고. 병증도 가벼운 편이어서 처방기간이나 횟수도 다른 환자들에 비해 적은 편이었지. 게다가 당신 옆엔 최다인까지 있었어. 언제 한 번 성격문제인가 생각해봤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아. 그럼 왜지? 당신 대체 왜 신경접속회로를 남용하게 된 거야. 대체 언제부터 처방에 따르지 않게 된 거야? 응?”

 정신없이 쏟아내는 말을 제대로 들을 수도 없었다. 노해림은 분명 내 얘기를 하고 있었지만, 내게 말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들렸다. 저 혼자서 마구 떠들고 있었다. 긴 시간 독백을 쏟아내는 연극배우처럼 잔뜩 감정에 도취되어있는 모습으로 보였다. 그런데 문득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려니 저러다 어떻게 되는 거 아닌가 싶어서 더럭 겁이 났다. 노해림은 토해내듯 쏟아내며 말하던 목소리를 조금씩 죽여 가더니 이젠 속으로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노해림 씨, 노해림 씨.”

 

 노해림은 내가 바로 옆에서 작지 않은 목소리로 부르는데도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난 그가 더는 중얼거리는 것도 아니라 오므린 입으로 읊조리고만 있는 걸 보았다. 그런데 잠시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고 있던 그가 갑자기 내 쪽으로 눈을 치켜뜨고는 내뱉기 시작했다. 좀 더 거칠어진 목소리였다.

 “안재은, 남용 아니냐고 묻잖아. 왜 대답이 없어? 모르는 건가? 아직 남용이 뭔지 몰라?”

 힘주어 다물고 있던 턱에 점차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남용이라. 난 힘 빠진 턱이 내려앉으면서 벌어진 입을 들어 올려 다물 수가 없었다. 눈가가 떨리는 것 같았다. 사실 난 떨리고 있는지 아닌지 잘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런 날 보며 다시 말하는 얼굴부터 목소리까지, 노해림은 좀 전과는 다르게 부드러워져 있었다.

 “말해봐. 재은 씨, 말해보라고. 주치의가 누구야? 당신 주치의, 지금 어디 있어? 응?”

 “최다인부터 찾아야 돼.”

 “그 놈의 최다인, 최다인, 최다인! 최다인이 뭐야 대체. 아무 말도 없이 사라진 비겁자로도 모자라서, 이젠 살인용의자에 불과해. 더 이상 그런 놈 아무 쓸모도 없어.”

 잔뜩 흥분해서 주체를 못하고 씹어서 퉤 내뱉듯 어이없는 말을 떠들어대는 걸 보니 화가 났다. 근데, 그러고 보니 집배헬기로봇 기다리는 곳에 있어야할 노해림이 왜 여기 있는 거지?

 “노해림 씨, 말조심해. 필름신문에 실린 기사내용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거야? 최다인은 그 시간에 집에서 나랑 같이 영화보고 있었어. 알리바이가 분명하다고. 계속 그딴 소리만 할 거면 당장 나가.”

 잠시 동안 방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무거운 분위기. 고개 드는 일이 어렵게 느껴질 만큼 무거운 분위기다. 정말 왜 이러는 거지?

 

 옆에서 푹 고개 숙인 채 말이 없는 노해림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현재 그의 상태로 봐서는 이제껏 그가 그래왔던 것처럼 맑은 정신으로 대답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긴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우선 내가 아직 일어나 돌아다니긴 힘든 상태인데다 시야에 수운아저씨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좀 이상해져서 미덥지는 않지만 그에게라도 물어보는 수밖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노해림 씨. 저기 지….”

 그때 노해림을 향하고 있는 초점에서 살짝 비껴난 시야 앞쪽으로 보이는 계단에 누군가 올라오고 있었다. 계단을 올라오는 발걸음소리가 들렸고, 이내 짧은 머리칼인 수운아저씨 정수리가 보였다.

 “재은아, 그새 깬 거야? 몇 분 되지도 않았는데?”

 “아저씨.”

 “해림이 여기로 올라와 있었구나. 근데 재은인 꽤 오랫동안 잘 줄 알았더니 잠깐 어디 좀 나갔다 온 사이에 금세 끝나버렸네. 볼 건 잘 봤어? 확인해볼 거 있다면서.”

 “아, 네, 보긴 봤어요.”

 

 아까 수혁아저씨 집에서 신경접속회로 의자에 앉아있는 수혁아저씨모습을 보고 놀랐을 때, 왜 모르는 척 했을까 의아해하면서 이제껏 쭉 속아왔다는 사실에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머릿속에 커다란 물집이라도 잡힌 것처럼 둔했었다. 그때 내 뒤쪽에 서있던 수운아저씨가 말했다.

 “수혁이, 신경접속회로 사용한지 꽤 오래됐어. 처음에 재은이 네가 신경접속회로 사용하고 있다는 거 알고 나한테 말할 때는 진짜 놀란 것 같았어. 근데 넌 주치의한테 제대로 된 처방을 받아서 의료목적으로 사용하는 거니까 별 문제는 없을 거라고 말은 그렇게 하더라. 수혁이가 신경접속회로를 사용하는 건 의약처방이 아니라 원하는 시간만큼 자기 위해서거든. 나랑 수혁인 의사 처방으로 신경접속회로 사용하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어. 재은이밖에.”

 혼자서 해결하기 어려웠던 수치조정기기 각종 숫자들을 맞춰준 사람은 수운아저씨였다. 나와 노해림이 방 안을 확인하기 전엔 그토록 망설였으면서, 일단 말문이 트인 아저씨는 거침없이 털어놓고 있었다. 그런데 중간에 노해림이 가로막았다.

 “그럼 처음엔 어떻게 구하신 거예요? 불법적인 방법으로 구했으리라는 건 말할 것도 없어 보이는데. 이거 사용법도 꽤 복잡하지 않아요?”

 “어떻게 구했는지까지는 나도 잘 몰라. 설치하는 것도 그렇고 사오는 것도 수혁이 혼자서 했거든. 신경접속회로랑 수치조정기기 사용법 알려줄 때, 전에 어디서 배웠다고 알려주긴 했는데, 귀담아듣지 않아서 금세 잊어버렸어.”

 

 “재은아.”

 “네, 아저씨. 근데 혹시 최다인 왔어요?”

 “아니, 아직 안 온 것 같은데.”

 사용종료되기 전에 최다인과 아무렇지 않게 이야길 나눈 기억이 생생해 정말로 돌아와 있을 것만 같았는데 아니었다. 눈뜨자마자 곧바로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계단으로 올라오는 아저씨 모습을 보곤 최다인도 뒤따라 올라올 것만 같았는데, 착각이었다.

 “근데 토마토는?”

 “보긴 봤는데 별로 알아낸 것도 없고, 그냥 최다인이랑 같이 차강으로 가다가 중간에 끊어져버렸어요.”

 “다인이랑 차강에?”

 “네. 가마민박에서 나가서부터 어디로 왜 가는 건지 말해주지도 않고 그냥 무작정 끌고 가려고 하는데, 내가 계속 꼬치꼬치 캐물으니까 말해주더라고요. 차강으로 가는 거라고 하면서, 그 이유는 도착하면 알려주겠다고 했어요.”

 “다인이가 지금 살인사건용의자로 수배 중이랬지.”

 “네. 근데 최다인은 절대 아니에요. 살인사건 일어났다고 하는 시간에 나랑 같이 집에 있었어요.”

 “그래. 근데, 해림아?”

 언제 다시 앉은 건지 노해림은 의자 옆 수치조정기기 앞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아까 전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좀 이상해요. 왜 그러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는데, 아까 갑자기 제 바늘을 잡아 빼는 바람에 강제 종료되어서 깨어났거든요.”

 “뭐? 강제종료? 너 괜찮아? 숨 쉬기 불편하지 않아?”

 “네. 아깐 정말 큰일 나는 줄 알았는데, 괜찮아졌어요. 지금은 아무렇지 않아요. 숨쉬기도 편하고, 감각도 제대로 돌아왔어요.”

 아저씨는 강제종료라는 말에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앉아있는 노해림을 내려다보는 아저씨 얼굴이 약간 질려서 굳어있었다.

 “노해림, 해림아.”

 “아, 아저씨 올라오셨어요?”

 아무 이상 없어 보였다. 아저씨를 쳐다보며 대답하는 노해림에게 더 이상은 아무 문제도 없어 보였다. 좀 전을 떠올려보면, 오히려 편안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반면 아저씨는 심각하기 그지없었다.

 “노해림, 강제종료가 얼마나 위험한지 몰라? 하마터면 재은이 죽을 뻔했어. 대체 왜 그런 거야?”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깐 흥분해서 쏟아내는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살짝 이성을 잃은 것 같았는데, 이런 식으로 순식간에 멀쩡하게 되돌아와서는 어쩔 수 없었다니.

 “저기요.”

 “미안해요. 근데 정말 어쩔 수가 없었어요. 당신은 과다사용인데다 어쩌면 처방남용일지도 모르잖아요. 어차피 내일까지라곤 하지만 그냥 내버려두면 영영 못 깨어날지도 모르는 일인데, 도저히 그냥 내버려둘 수가 없었어요.”

 절망적이었다. 신경접속회로를 통해 에나멜껍데기에 관해 알아내려는 방법은 이미 물 건너 가버린 듯했다. 어차피 다시 연결해도 방금 전처럼 노해림 때문에 깨어날 것 같고, 신경접속회로는 연이어 사용할 수 없게 되어있었다. 게다가 이제 사용기한도 2070분밖에 안 남은 상태였다. 몇 번이나 더 사용할 수 있을까.

 “여기 좀 봐요. 이제 2070분밖에 안 남았어요. 내가 정말 처방남용에 과다사용 중이라도, 저 에나멜껍데기가 뭔지는 알아야 될 거 아니에요. 당신은 안 궁금해요? 아저씨, 저게 뭔지는 알아야 되잖아요. 저거, 두레에서 보낸 거예요. 분명 최다인과 연관이 있는 거라고요.”

 노해림이 반으로 갈라서 벗겨낸 에나멜껍데기는 아직도 내 방 거울 옆 서랍 위에 올려져있었다. 단단히 감싸고 있던 토마토 색이 껍데기안쪽에 물들어 있었다. 난 몸을 일으켜 의자에서 내려섰다. 다리에 힘이 완전히 돌아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걸을 수 있었다. 천천히, 에나멜껍데기를 올려놓은 서랍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저씨가 옆에서 날 붙잡아 부축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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