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1일간 안보이기 닫기
모바일페이지 바로가기 > 로그인  |  ID / PW찾기  |  회원가입  |  소셜로그인 
스토리야 로고
작품명 작가명
이미지로보기 한줄로보기
   
 
자유연재 > 판타지/SF
에나멜
작가 : 신정
작품등록일 : 2019.10.20

요양 간 오지마을에서 주인공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일들.

 
에나멜 04
작성일 : 19-10-20 08:44     조회 : 237     추천 : 0     분량 : 10360
뷰어설정 열기
뷰어 기본값으로 현재 설정 저장 (로그인시에만 가능)
글자체
글자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평소 글자라는 것 자체를 잘 보려고 하지 않는 나로서는 관심도 없는 분야였지만 최다인은 아니었다. 이런저런 매체들에 관심 많고 뭔지 모를 이것저것들을 잘 챙겨 읽는 편이었던 만큼 처음 필름보도매체가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엔 아마도 이렇게 말했었다.

 “그 인간들이 어떻게 정보인식필름을 쓸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니까. 이건, 진짜, 불가사의에 가까워.”

 그런데 그때 당시 정보인식필름에 대해서 얘기만 들어봤을 뿐 실제 접해본 적 없던 나로서도 굉장히 신기한 내용이었다. 그래서 그때 최다인이 내게 들려주는 얘기를 특별한 불평불만 없이 꽤나 귀 기울여 듣고 있었다.

 

 

 

 아저씨네 집으로 들어와 있기 전에,

 

 나는 집에서 예고 없이 들어온 3차원팩스를 확인하고 있었다. 누가 보낸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필름신문 한 부를 당일자로 값도 치르지 않고 그것도 3차원팩스를 통해 받아보게 된 상황이었다. 그래서 한 번 읽어나 볼 요량으로 신경접속회로 의자에 앉아 하나씩 기사를 읽어나가던 중이었다. 사실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았고 조금이나마 흥미를 느낄 수 있었던 기사라는 것도 전혀 없었다. 하지만 다 띄워보긴 해야 했다. 오랜만에 접하는 필름신문전면에 기사를 하나씩 꺼내 띄워놓고 다 읽든 어쩌든 기사 끝 온점 위를 누르면 지워지는 것을 보는 것도 나름 재미있었다. 그런데 순식간에 그렇게 정신없이 띄우고 지우길 반복해나가다가 하나씩 기사 지워진 흔적으로 필름에 약간 얼룩진 모양이 투명한 회색무늬처럼 남았을 때, 문득 확인해보니 남아있는 기사는 두 개뿐이었다.

 하나는 113년8월28일 오전0시22분경 차강 남부에서 벌어진 살인사건 용의자로 최다인이 지목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그 기사엔 목격자가 숨어서 몰래 찍었다는 최다인 사진까지 함께 실려 있었다. 사진 속 얼굴은 내가 봐도 분명 최다인이었다. 하지만 이 기사가 말도 안 되는 엉터리이고 모함이라는 것 또한 확실했다. 27일 밤11시부터 28일 1시 반까지 최다인은 집에서 영화를 보고 있었다. 나도 그 옆에서 같이 봤으니 정말이었다. 게다가 차강이면 여기서 나가도 한참은 나가야하는 사막지대였다. 걸어서 두 시간 걸리는 도로보다도 훨씬 더 멀리까지 가야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차도 없고 버스도 없고 헬기는 당연히 없는 최다인이 무슨 수로 차강까지 나가서 무슨 이유로 살인을 한단 말인가.

 사실 오지마을에서 먼 거리로 나갈 적절한 교통수단이 없는 건 나나 최다인 뿐만이 아니었다. 오지마을 사람들 중 차를 가진 사람은 없었고 바로 앞이 바다인데도 배 있는 집이 없었다. 심지어는 자전거 한 대조차 없어서, 어찌 보면 오지마을 사람들 모두 아예 교통수단이라는 것에 도통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마을에서 어디 한 집은 가까운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으려할 것 같기도 한데, 다들 가끔씩만 바다낚시를 하면서 그날 저녁거리로 한두 마리를 잡아 올릴 뿐이었다.

 이런 마을에서 최다인이 세 시간 네 시간 밖으로 걸어 나가 사막지대인 차강에서 살인을 했다니,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엉터리 헛소리였다. 용의자 최다인이 차강 남쪽 오아시스에서 살고 있는 걸로 추정된다는 내용도 기사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정말 말도 안 되는 내용 아닌가 말이다. 기사를 읽어 내려가면서 필름신문 붙잡은 두 손에 힘이 들어갔는데, 나도 모르게 온점을 누르고 말았는지 기사가 지워져버리고 말았다. 그러더니 아주 잘 익은 토마토광고가 전면에 떴다. 그걸 보며 순간 멍해졌다. 광고 속 잘 익은 토마토는 점점 표면에 에나멜페인트를 칠해놓은 것처럼 바뀌고 있었다. 이건 또 뭔지.

 화가 치밀어 광고를 치워버리고, 마지막 기사를 꺼냈다가 또 홧김에 지워버리고는 필름을 잔뜩 구겨서 바닥에 내던졌다. 그리고 동쪽 문으로 나갔다. 그런데 최다인을 생각하니 걱정되고 초조한 마음에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난 아까 노해림이 말했던 것처럼 햇볕이라도 좀 쬐고 바다라도 좀 쳐다보고 있기로 했다. 그러고 있으면서 언제 올지는 모르겠지만 곧 돌아올 다인을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나선계단으로 언덕에 내려가서 바다 쪽으로 더 가까이 가려고 할 때, 노해림이 뒤에서 날 부르더니 아저씨 집 앞에서 최다인을 봤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분명, 좀 전에 아저씨 집 앞에서 봤다고 했죠?”

 “응. 아저씨 집 앞으로 지나가는 걸 보고 그쪽으로 뛰면서 불렀는데, 아무리 불러도 돌아보지를 않더라고. 그리고 엄청 빠르게 걷던데. 어쨌거나, 그대로 아저씨 집 뒤쪽으로 들어가기에 나도 뒤따라갔는데, 돌아가서 보니까 어디로 가버렸는지 거기 없었어요.”

 “좀 더 자세히 좀 얘기해 봐요.”

 “우리 집 앞으로 지나갔다고? 누가?”

 

 지금 나는 노해림과 함께 수혁아저씨 집에 들어와 있다. 아저씨네 거실은 남쪽으로 창이 나있었다. 비스듬하게 점점 더 길어지던 빛은 이제 내가 앉아있는 의자 발끝까지 닿도록 비쳐들고 있었다. 나는 의자 아래쪽 바닥에 빛이 닿아있는 모양을 내려다보면서 조금이라도 진정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곤두서있는 신경으로 바짝 날 선 두 귀는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내가 다인이네 집 앞 언덕에 간 게 오전 10시쯤이었어요. 나야 그냥 평소에 심심하면 언덕으로 가서 햇볕 좀 쬐고 한두 시간 누워 있다가 집에 가곤 했으니까, 오늘도 그렇게 갔었죠. 그리고 그때 가서 그렇게 또 한 시간 넘게 누워 있다가 이제 집에 가야겠다 싶어서 앉았다가, 아쉬운 마음이 들어서 조금만 더 있다 가자, 하고 있는데 재은 씨가 계단으로 내려왔어. 그래서 인사하고 이런저런 얘기하다가 재은 씨가 다인이 혹시 못 봤냐고 물어봐서 못 봤다고 했지. 그때 바로 일어난 건 아니었지만 그전까지 계속 누워있었으니까, 어쩌면 누워있었을 때 근처에 있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어쨌거나 못 봤으니까. 그런데 재은 씨가 많이 걱정되는지 표정이 좀 그렇더라고.”

 노해림이 그렇게 말하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나는 햇볕 좀 쬐면서 마음을 편하게 갖고 기다리는 게 낫지 않나 싶었는데, 그다지 내키지 않은 것 같았어.”

 난 쓴웃음을 지으며 느껴질 듯 말 듯 미미하게 끄덕거렸다.

 “재은 씨가 집안에서 기다리겠다고 하면서 다시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기에, 난 다인이 보면 바로 말해주겠다고 했어요. 그리고 다인이를 본 게, 재은 씨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 몇 분 안 지나갔을 때였어요. 한, 15분쯤? 정확히는 잘 모르겠는데 그 정도 지나갔을 때, 그때 본 것 같아요. 아무튼 그랬는데, 다인이가 아저씨 집 동쪽 벽으로 바싹 붙어서 가고 있었어요. 만약 그때 다인이가 다른 방향 벽을 지나고 있었으면 못 봤을 거야, 아마. 근데 그때 퍼뜩 말해주겠다고 한 게 생각나서 재은 씨 빨리 나오라고 문까지 두드리면서 불렀거든. 근데 아무 반응이 없더라고요. 그때 못 들었어요?”

 정말 난 집안에서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네, 아무 소리도 못 들었어요. 왜 못 들은 거지, 그때 방문을 닫고 있지는….”

 그땐 환기하려고 온 집안 창문을 다 열어놓고 있었다. 동쪽으로 난 유리문은 닫고 있긴 했지만, 그 외 창문이란 창문은 다 열어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2층 방 안에 들어가 있다고 밖에서 문 두드리며 크게 부르는 소리를 못 들을 수도 있는 건지 이상했다. 그것도 다름 아닌 내가 그런 거니 이거,

 “여러 번 계속 불러도 재은 씨는 낮잠이라도 자는지 아무 반응이 없는데, 다시 쳐다보니까 다인이는 다인이대로 좀 급하다싶게 걷고 있었어요. 그래서 일단 다인이를 붙잡고 물어나 봐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아저씨 집 가까이 가서는 다인이 부르면서 따라갔는데, 진짜 빨리 걷는 거예요. 좀 서보라고 그러는데도 멈출 생각이 전혀 없는지 대답도 안 하고 한 번 돌아보지도 않고 그냥 걷기만 하는데, 정말 좀 이상하던데.”

 “그러다가 다인이가 집 뒤쪽으로 들어가는 걸 너도 뒤따라 들어가게 됐는데, 가보니까 다인이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러니까 사라져서 아무데도 안 보였다는 말이냐?”

 노해림은 제 말 끝에 아저씨가 이어가듯 말하자 아저씨와 나를 번갈아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저씨가 다시 말했다.

 “재은아, 다인이 기사 난 신문, 그거 다 읽었어? 아무래도 그 신문 보면, 그래도 뭔가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거, 다 지워졌어요.”

 “그럼 집으로 가보자. 필름 확인 좀 해봐야겠다.”

 중요한 건 노해림이 아저씨 집 앞에서 최다인을 봤다는 사실이었다. 필름에 기사가 남아있다 한들 최다인에 대해서 무엇을 어떻게 알아본단 말인가?

 “다 지워진 필름인데요?”

 “그래도 필름신문이니까 어디에서 발행한 건지는 알 수 있잖아.”

 잔뜩 구겨 바닥에 내던져놓은 필름, 2층에 아직 그대로 있겠지.

 “그래 재은 씨, 가서 한 번 확인 해봐요.”

 

 

 집안으로 들어서자마자 3차원팩스 들어왔다고 알려주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또 뭐가 들어왔을까 싶었다. 분명히 최다인과 관계 깊은 무언가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곧바로 난 계단을 뛰어올라가서 뭐가 들어온 건지 확인해보았다. 아저씨와 노해림이 곧바로 뒤따라 올라와서 물었다.

 “뭐 있어?”

 “아저씨, 이게,”

 팩스로 들어온 것은 토마토였다. 꼭지가 말라있긴 했지만, 제대로 잘 익어서 표면 전체에 균일하게 붉은빛이 돌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토마토표면에 에나멜처리를 해놓았다는 점이었다. 정말이었다. 아까 필름신문에서 봤던 광고 속 토마토와 똑같았다. 토마토를 3차원팩스로 보낸다는 것 자체가 좀 웃기는 일이긴 하지만, 정말 더 웃긴 건 그 광고에서처럼 토마토표면에 에나멜처리를 해놓았다는 사실이었다.

 아저씨와 노해림이 다가와서 어리둥절하게 날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난 정말 이상한 기분에 휩싸여 그 토마토를 들고 있었다. 처음에 3차원팩스 송수신기에 토마토가 놓여있는 걸 봤을 땐 진짜 토마토일 거라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렇게 유리표면처럼 표면에 광택 도는 토마토가 어디 있단 말인가? 난 당연히 토마토모형일 거라고 생각하며 집어 들었다. 그러면서 아까 최다인에 대한 기사 온점을 누르고 나서 떴던 토마토광고를 떠올렸던 것이다. 그런데 강하게 광택이 흐르는 에나멜 딱딱한 껍데기 안에 물렁물렁하도록 푹 익은 상태로 들어차있는 토마토과육은 집어든 손만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재은 씨, 이거 토마토잖아.”

 “네. 토마토긴 토마토죠.”

 노해림 옆에서 미간을 모으며 토마토를 게슴츠레하게 쳐다보던 아저씨가 말했다.

 “누가 이런 걸 보낸 거지? 발신번호 봤어?”

 “아뇨, 아직요.”

 아저씨는 팩스기에 찍힌 발신번호를 확인하더니 불러주었다.

 “7231-59951-73. 재은아, 이거 어디 번호야?”

 “그거, 아까 필름신문 왔을 때 찍힌 번호인데, 모르는 번호에요.”

 “그래?”

 “처음 들어보는 번호에요. 근데 어쩌면, 최다인이 아는 번호일지도 몰라요. 최다인, 예전부터 기사들 찾아서 읽기도 했고, 그런 데에 관심 많은 편이거든요.”

 “음, 정말 그럴 지도 몰라.”

 끄덕이며 말하는 노해림을 한 차례 쳐다보고, 다시 팩스에 찍혀있는 발신번호를 쳐다보고 있으려니 문득 좋은 방법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팩스. 팩스로 물어보면 되겠네.”

 “팩스? 3차원팩스 말이냐?”

 “네. 여기다 손으로 써서 보내면 될 것 같아요. 어차피 정보인식필름에 써넣을 프로그램은 있어봤자 쓰지도 못하니까, 필름 위에 손으로 적어서—”

 난 주치의에게 보낼 서류와 필름에다 사용하는 펜을 꺼내 와서 필름에 적어 내려갔다.

 

 [살인사건이 일어난 시각에 최다인은 영화를 보고 있었습니다. 증인도 있습니다. 차강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용의자로 최다인을 지목하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리고 이 번호는 어떻게 알았으며, 이런 토마토를 왜 보낸 건지 알려주십시오.]

 

 옆에 서서 내가 써내려가는 걸 지켜보던 노해림이 말했다.

 “거기서 이거 받고 답장을 보낼까?”

 “왜 안 보내겠어요.”

 노해림은 별 말 않고 멀뚱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다시 말했다.

 “좋아. 그럼 가는 데는 얼마나 걸릴까.”

 “가는 데만, 적어도 나흘은 걸릴 거예요. 어쩌면 닷새쯤 걸릴 수도 있어요.”

 다 적은 후 필름을 접고 접어서 보내온 봉투에 다시 넣고 3차원팩스송수신기 위에 올려놓았다.

 

 7231-59951-73

 

 “나흘에서 닷새라. 재은아, 집에서 3차원팩스 자주 사용해?”

 아저씨에게 대답하지 않고 나는 기기에 찍혀있는 발신번호를 수신번호로 설정한 후 시작버튼부터 눌렀다. 그러곤 계속 날 쳐다보고 있는 아저씨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뇨, 왜요?”

 “아니. 지금 생각해보니까, 여기에 3차원팩스가 있다는 게 놀라워서.”

 “아, 이거, 의사선생님한테 일 년에 네 번씩은 서류하고 필름을 보내드려야 되거든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사게 된 거에요.”

 

 

 아저씨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옆에서 노해림은 내내 가만히 아무 말 없이 조용했다. 그래서 옆에 서서 얘기하는 말을 그저 듣고만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마 아까 나한테 두세 가지 물어보고 나서부터 계속 토마토만 살펴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디 있는지 찾아보았더니, 예상대로 내가 팩스송수신기 옆으로 올려놓은 토마토를 쳐다보며 만져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내 토마토를 조심스레 두 손 위에 가만히 올려놓는 모양새로 조심스레 들어 올리더니 눈 가까이 가져가 들여다보며 말했다.

 “이거 진짜 토마토에 에나멜을 뒤집어씌워놓은 거야.”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요.”

 “이거 봐봐. 지금 여러 번 만져서 그런지, 에나멜 껍데기에 균열이 생겼어요.”

 “그래요?”

 그때 아저씨가 말했다.

 “그런데 재은아, 아까 그 필름신문은?”

 “저기 있어요.”

 난 내가 구겨서 던져놓았던 필름신문을 집어 들어 다시 폈다. 잔뜩 구겨 내던진 필름은 내가 머리를 자르고 나서 대충 치운 채로 내버려둔 거울 앞에 떨어져있었다. 순간 난 등 뒤에 서있는 아저씨를 의식했다. 치우지 않고 내버려둔 머리칼들이 흩어져있어서 꽤나 지저분한 꼴이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다지 상관없었다. 그런데 그 꼴을 어떻게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저씨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아무렇지 않게 필름을 받아들더니 말했다.

 “두레구나.”

 “두레?”

 “필름보도매체 등장하고 나서 생긴 주간지인데, 아무래도 이게 그거 같다. 여기 구석 봐봐. 조그맣게 쓰여 있지.”

 필름 맨 위쪽 오른쪽 끄트머리에 정말 작게 쓰여 있었다.

 

 <두레 제244호>

 

 “근데 두레에서 왜 이런 걸 보낸 걸까요? 그것도 3차원팩스로.”

 “글쎄. 우린 잘 모르고 있지만, 다인이와 무슨 연관이 있는 거겠지. 그나저나 다인이가 용의자로 지목된 살인사건이라니, 재은이 너한테 방금 전에 들었는데도 직접 그 기사를 보기 전엔 믿기 힘들 것 같다. 어떻게 다인이가.”

 아저씨 말을 들으니 가슴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내 눈은 거의 무조건반사에 가까운 반응으로 방 한쪽에 떡 하니 자리 잡고 있는 신경접속회로를 찾아 헤맸다. 그런데 노해림이 급하게 부르는 소리에 그 쪽을 쳐다보았다. 아저씨도 마찬가지였다.

 “아저씨, 재은 씨, 여기 좀 봐요.”

 노해림은 여전히 에나멜토마토를 붙잡고 있었다.

 “이거 한 번 잘라서 확인해봐야 될 것 같은데, 재은 씨, 칼 어디 있어요?”

 아저씨는 노해림이 하는 양을 팔짱낀 채 가만히 지켜보고 서있었다. 난 토마토를 잘라보자고 하는 말에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려고 했다. 그런데 그냥 저대로 놔두는 것보다 뭐라도 해보는 게 낫겠다 싶어서 그만두었다.

 “칼? 여기 있어요.”

 

 수치조정기기아래에 붙어있는 서랍에는 이제 조금밖에 남지 않은 일회용섬유다발뭉치와 의료용 작은칼이 소독약과 함께 들어있었다. 항상 신경접속회로 수치조정기기아래에 붙어있는 서랍에는 그 세 가지를 넣어두었다. 신경접속회로를 사용할 때마다 그 물건들도 사용하기 때문이었다. 신경접속회로를 사용하려면 수치도 조정해야하고 바늘도 꽂아야 한다. 항상 구비해두는 칼은 바늘을 꽂을 때 사용하는 것이다.

 바늘을 통해 신경으로 연결되는 나노단위 섬유다발뭉치는 원래 일회용으로 나온 것이다. 예전에 5미터 단위로 잘라놓은 걸 제품으로 판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원래 개인적으로 구매하는 건 금지되어있었고, 주치의처방을 통해서만 구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 역시 신경접속회로 처방을 받으면서 처방받은 섬유다발뭉치역시 그 횟수만큼만 처방받았다. 하지만 나는 처방에 따르지 않고 신경접속회로 사용횟수가 점점 늘어나기만 했다. 그리고 섬유다발뭉치는 그만큼 빨리 줄어들었다. 원래 한번 쓸 때 적당한 길이만큼 잘라내어 그때만 쓰고 버려야했지만, 지지난주부터는 부득이하게 일회용섬유다발뭉치를 여러 번 쓰고 있었다. 그런데 여태 별 문제가 없었다.

 

 노해림이 칼 달라고 했을 때 난 그 칼을 떠올리곤 그거 꺼내주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신경접속회로 쪽으로 걸어가면서는 에나멜을 잔뜩 덮어씌워놓은 토마토를 자르는 데 그 칼을 쓴다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잠시 기다려달라고 한 후, 1층으로 내려가 칼을 찾아다 갖다 주었다.

 “여기요.” “아, 좀 크네.”

 그도 그럴 것이, 주방에서 쓰는 식칼이었다. 하지만 2층에는 의료용 작은칼 밖에 다른 칼은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칼이 그것밖에 없어요.”

 노해림이 자잘한 균열로 이제 관절을 갖게 된 것처럼 보이는 에나멜껍데기를 왼손으로 조심스레 붙잡았다. 그리고 정확히 꼭지 위에 대고는 반으로 잘랐다. 에나멜토마토는 그 껍데기부터 둔하게 균열을 일으키면서 자잘한 조각으로 쓸어내리듯 거칠게 잘렸다. 그런데 갑자기 안 좋은 냄새가 났다. 살짝 찡그린 표정으로 노해림이 그치지 않고 계속해 끝까지 잘라나갔다. 그런데 절반쯤 잘랐을 때부터 이미 안에 들어있던 토마토가 썩은 내를 풍기며 에나멜껍데기 밖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노해림 손에도 썩어 흐르는 토마토가 묻었고, 거의 액체인 토마토가 바닥으로 줄줄 흘러내려 대나무깔개에 잔뜩 묻어서 밑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이게 뭐야.”

 난 순간 코밑으로 손을 가져가 막았다. 아저씨도 노해림도 전부 잔뜩 찌푸린 표정이었다. 그리고 다들 썩은 토마토가 흘러나온 뒤 남은 에나멜껍데기 안쪽이 빨갛게 칠해져있는 모양을 쳐다보고 있었다.

 

 최다인에게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모르겠다. 난 안절부절못한 채 신경접속회로 사용 중에 최다인 모습을 봤던 걸 떠올렸다. 그리고 토마토는 그 안에도 있었다. 내가 토마토를 가방에 한가득 챙겨가는 장면이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다. 옆에서 아저씨는 에나멜껍데기를 눈뜨고 보기 힘들만큼 흉물스러운 무언가인 것처럼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노해림 역시 얼굴근육을 좀처럼 풀지 못하고 내뱉으며 말했다. 그리고 뒤이어 아저씨가 물었다.

 “이거, 썩은 거죠?”

 “재은아. 필름신문하고 같은 데에서 보낸 거라고 했지?”

 “네. 번호가 똑같아요.”

 아무튼, 최다인을 찾으면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을 거다. 나는 계속 신경접속회로를 떠올리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슬쩍슬쩍 그 쪽을 흘긋거리기고 있었다. 썩어 물이 된 토마토에 모두 신경을 쏟고 있는 가운데, 몰래 흘긋거리고 있었다.

 최다인이 있어야 아무 문제없이 안정적으로 신경접속회로를 사용할 수 있다. 내가 저 검은 의자에 반쯤 드러눕듯 편히 앉았을 때, 옆에서 수치조정기기 숫자들을 하나하나 조정해 줄 최다인이 꼭 있어야한다. 내 옆에는 최다인이 있어야했다. 수치조정기기!!!

 난 멍하니 썩은 토마토가 흘러내려 바닥을 적시고 있는 꼴에 시선을 두고 있다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아저씨, 노해림 씨.”

 두 사람이 나를 쳐다보았다.

 “어쨌거나, 우린 지금 아무것도 아는 게 없잖아요. 그죠? 난, 최다인 꼭 찾아야 돼요. 최다인에게, 절대,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안 되는 거잖아요. 음, 분명 노해림 씨가 최다인을 여기에서 봤다고 했으니까, 마을 안에 있긴 있는 거예요. 그렇잖아요?”

 난 노해림과 아저씨를 번갈아 쳐다보며 동의를 구하듯 물었다. 그때 아저씨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저씨를 쳐다보곤 고개 돌려 노해림을 쳐다보자,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응. 내가 분명 아저씨 집 뒤쪽으로 들어가는 걸 봤으니까, 이 마을 안에 있는 건 분명하겠죠.”

 “아무래도 아저씨네 집 안에 숨어있을 것 같아요. 아까 대충 보긴 했지만, 한 번 더 봐야 할 것 같아요.”

 노해림과 마주보고 있으면서 나는 내가 지나치게 흥분한 상태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래서 목소리를 한층 가라앉히고 마음도 진정시키려 하면서, 최대한 차분하게 말하려고 했다. 좀 진정된 것 같아 다시 살펴보았는데, 여전히 아저씨는 별 말도 없이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때 아직 토마토 자르던 자세 그대로 앉아있던 노해림이 말했다.

 “근데 재은 씨, 나 손 좀 씻어야 되겠는데.”

 “아. 저기 문 열고 나가면 바로 화장실 보일 거예요.”

 곧바로 노해림은 토마토 자른 칼을 들고서 밖으로 나갔다. 그나저나 대체 아저씨 집 뒤쪽에서, 대체, 어디로 사라져버린 걸까.

 “근데 두레에서 왜 이런 걸 보냈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아까 최다인 기사 띄웠다가 지우고 나서, 토마토광고가 떴었어요.”

 “토마토광고?”

 “네. 아까 자르기 전에 광택 나는 토마토랑 똑같은 토마토가 나오는 광고였는데, 그냥 잘 익은 토마토가 점점 에나멜 뒤집어 쓴 모양으로 바뀌는 내용이었어요.”

 그러고 보니 거실바닥, 저 대나무깔개에 완전히 스며들기 전에 닦아내야하는데. 대나무깔개도 최다인이 구해 온 거였다. 어디서 사온 거냐고 물어도 비밀이라고 알려주지도 않고, 그냥 웃으면서 좋은 거라고만 했었다. 난 정말 최다인에게 황당하고 어이없는데다 두렵기까지 할 사태가 벌어질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만 들었다.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글자
10 에나멜 10 2019 / 10 / 20 234 0 7475   
9 에나멜 09 2019 / 10 / 20 217 0 11278   
8 에나멜 08 2019 / 10 / 20 213 0 11248   
7 에나멜 07 2019 / 10 / 20 234 0 11233   
6 에나멜 06 2019 / 10 / 20 214 0 11966   
5 에나멜 05 2019 / 10 / 20 226 0 12920   
4 에나멜 04 2019 / 10 / 20 238 0 10360   
3 에나멜 03 2019 / 10 / 20 223 0 13222   
2 에나멜 02 2019 / 10 / 20 242 0 10733   
1 에나멜 01 2019 / 10 / 20 390 0 11254   
이 작가의 다른 연재 작품
해바라기,너에게
신정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 무단수집거부   |   신고/의견    
※ 스토리야에 등록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 본사이트는 구글 크롬 / 익스플로러 10이상에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주)스토리야 | 대표이사: 성인규 | 사업자번호: 304-87-00261 | 대표전화 : 02-2615-0406 | FAX : 02-2615-0066
주소 : 서울 구로구 부일로 1길 26-13 (온수동) 2F
Copyright 2016. (사)한국창작스토리작가협회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