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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에나멜
작가 : 신정
작품등록일 : 2019.10.20

요양 간 오지마을에서 주인공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일들.

 
에나멜 02
작성일 : 19-10-20 08:42     조회 : 242     추천 : 0     분량 : 1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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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난 최다인에게 별다른 문제는 없는지 뭔가 이상한 점은 없는지 물었다. 그런데 아무런 문제도 없는 모양이었다. 오히려 방이 아주 멀쩡하고 생각했던 것보다 튼튼해서 안전해보이고 나름 아늑하기도 하다면서 꽤나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이었다. 물론 챙겨온 짐에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나는 가방 속에 들어있던 것들이 몽땅 다 없어져버렸다. 그리고 챙겨 온 등산용품과 먹을거리가 들어있어야 할 자리에 온통 토마토만 꽉 차있는 황당한 일을 겪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문득 지금 방안에 어지럽게 한가득인 토마토들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떠올리지 못하고 있던 지갑 생각이 났다. 겉옷 안주머니에 넣었던 대로 있는지 꺼내보려고 했다. 그러면서 그나마 체크인하고 값을 치를 때 지갑을 가방에다 도로 넣지 않고 안주머니에 넣은 것이 다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안주머니도 텅 비어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안주머니뿐만 아니라 밖에 있는 주머니도 바지주머니도 텅텅 비어있었다. 정말 어이가 없고 이 상황을 믿고 싶지가 않아서 주머니를 밖으로 뒤집어 빼내 털털 털어보기까지 했다. 하지만 주머니 구석에 한 덩어리로 뭉쳐있는 먼지만 털려나올 뿐이었다. 지갑. 난 분명 지갑을 상의 겉옷 안주머니에 넣었다. 이건 너무나 확실하고 분명한 기억이어서 어디다 대놓고 따질 수도 없었다. 결국 내가 방으로 내려올 때 낭떠러지로 떨어뜨렸거나 어디 엉뚱한 데다 흘린 게 분명했다.

 애써 찾을 마음이 생기지도 않았다. 토마토에 신경 쓰는 것만으로 머리가 아프고 피곤했다. 그리고 어차피 안주머니에 집어넣을 땐 돈 한 푼 들어있지 않은 싸구려 빈 지갑이었다. 난 침대 위로 벌렁 드러누워 중얼거렸다.

 “뭐, 어차피 닳아빠진 싸구려였어.”

 그러다 갑자기 한심한 기분이 들어서 몸을 일으켜 방 안에 가득한 토마토냄새를 의식하며, 사방에 토마토들 널브러져 있는 모습을 둘러보았다. 이 토마토들을 대체 어째야한단 말인가. 토마토는 덜 익은 것부터 잘 익은 것까지, 일부는 익을 대로 푹 익어있었다. 몇 개는 터져있고 또 몇 개는 뭉그러져있다. 난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네.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가1’호 연결해주세요.”

 -‘가1’호 말씀이십니까? 바로 연결해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엘리제를 위하여, 열 마디 돌림 멜로디, 세 마디 채 지나가기 전, 딸각.

 -아니, 방값도 치렀는데, 또 무슨 일입니까?

 “아…안녕하세요.”

 상대방 쪽에서 당황한 듯 미미한 신음으로 끙 하는 반응을 보였다. 혼자 온 사람인가. 직원이 자주 연락을 한 모양이다. 며칠이나 묵었던 걸까? 왠지 들리는 목소리로는, 어느 정도 나이 든 아저씨 같았다.

 -황수운이 아닌 것 같은데, 누구세요? 그 사람 말고는 여기서 나한테 전화 연결할 사람이 없는데.

 “‘가2’호에 묵고 있는 사람입니다.”

 -‘가2’호에 투숙 중이라고? 지금?

 “네. 지금 내선전화로—.”

 -여기엔 언제 들어왔습니까.

 심각하고도 진지한 어조로 묻는 목소리라 난 잠깐 당황했다. 괜히 긴장하게 하는 목소리에 괜히 깜깜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내다보면서 말했다.

 “오늘 오후에 체크인 했는데, 왜 그러세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오늘 오후라고! 당신, 누군지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여기서 나가는 편이 신상에 좋을 텐데. 한시라도 빨리 여기서 나가는 게 좋을 거야.

 “그게 무슨,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약간 정신이 이상한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이왕 연결한 거 하려던 말은 해야지.

 “제가 연락드린 건, 토마토를 좀 나눠드릴까 해서….”

 -토마토? 토마토라니, 그건 또 뭡니까.

 “아. 지금 저한테 토마토가 좀 많이 있는데, 혼자 먹기엔 양이 많아서 다른 방에 계신 분과 나눠먹으면 좋겠다 싶어서요.”

 -토마토? 난 토마토 같은 건 안 먹으니까 줄 필요 없어요. 근데, 당신은 토마토 따위 내버려두고 일단 여기서 나가야 된다니까. 난, 난…못 나갔지만, 당신은 아직 아니야. 나갈 수 있다고! 그러니까 나갈 수 있으면, 아니 나갈 수 있건 없건 간에, 지금 나갈 수 있을 때 나가는 편이 좋을 거야.

 

 딸깍.

 확실히 살짝 미친 게 분명해 보이는 사람이다. 어쩐지 처음에 목소리부터 뭔가 흔하게 접해보기 힘든 위화감이 실려 있는 것 같다 싶기도 했다. 그런데 그나저나 여긴 왜 저런 사람이 며칠 동안 묵도록 내버려두는 건지 좀 이상했다. 토마토 해결하려다가 도리어 더 복잡한 문제와 부딪히게 될 것 같아 뭔가 좋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난 그대로 수화기를 내려놓고는 널브러진 토마토들을 하나하나 쳐다보면서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그대로 한숨을 내쉬고, 다시 수화기를 집어 들어 최다인에게 연결해달라고 부탁했다.

 

 -네.

 “너 토마토 잘 먹지.”

 -아, 갑자기 토마토는 왜?

 “나한테 지금 토마토가 진짜 많이 있는데, 먹을래? 줄까?”

 -갑자기 토마토가 어디서 나서?

 “아, 그게, 가방에 토마토만 들어있더라고.”

 -뭐?

 “자세한 건 나도 잘 모르겠고, 설명하려면 복잡해. 건너가서 말해줄게. 일단 내가 토마토 가지고 건너갈 테니까, 전화 끊고 나서 방을 최대한 왼쪽으로 붙이고 맨 아래쪽으로 내려. 나는 그동안 토마토 챙겨서 밖으로 나갈 테니까. 끊는다.”

 -알았어.

 

 전화를 끊고, 활짝 열어 벌린 채 내팽개쳐놓은 가방을 집어 들어 방바닥에 흩어져있는 토마토들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아직 완전히 익지 않은 것들을 찾아 먼저 담고, 무르고 터진 것들을 위쪽에 올렸다. 엉망으로 뭉그러진 건,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뭔 생각이 떠오르지도 않고 이 시점에 내 손으로 치우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냥 내버려두었다.

 문 여는 손잡이를 돌려서 사다리까지 내리고 문도 열어둔 후, 토마토를 가득 채운 가방을 짊어 매고 올라갔다. 최대한 ‘가3’호와 가깝도록 방을 맨 아래 오른쪽 끝으로 붙여두었기 때문에 아마 간단히 건너갈 수 있을 거였다.

 위로 올라서니 옆방 ‘가3’호는 한 걸음 좀 더 되는 거리만큼 떨어져있었다. 뜀뛰기 할 필요는 없어보였고, 일단 뭐가 되었든 부디 흔들리는 일이 없기를 실수만 하지 않기를 바라며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건너가기만하면 되었다. 그런데 방에서 매고 있을 때보다 위로 올라서서 낭떠러지를 건너뛰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가방은 천근만근이고 다리까지 살살 떨리는 듯했다. 고소공포증도 아닌데. 거리가 먼 것도 아니고. 그렇지만 지금 이 상태는 너 지금 고소공포증으로 떨고 있다고 거리는 엄청 멀다고 그래서 떨고 있다고 속삭여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아무래도 이 가방이 문제야.

 난 가방을 벗어서 양손으로 들고는 두어 번 앞뒤로 흔들다 ‘가3’호 위로 던졌다. 그리고 땅에 빗물 고여 있는 걸 뛰어 넘는다 눈을 감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건너편으로 뛰어넘어갔다. 그런데 발이 닿자 툭 문 떨어지는 소리에다 요란하게 사다리 미끄러지며 바닥에 꽂히는 촤륵 소리 때문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순간 자연스레 가슴에 심장 위에 손이 올라가 꾹 누르고 있었다. 눈을 꾹 감았다 뜨고는 다시 감으며 손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데 누군가 사다리 밟고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최다인이겠지만 슬며시 눈을 뜨고 확인해보니 문 열려있는 바깥으로 최다인이 슬며시 고개를 내미는 모습이 보였다.

 “난 또 위에서 뭐 떨어진 줄 알았잖아.”

 넌 그 정도였는지 모르겠지만 난 이 절벽에 방을 매달고 있는 줄이 끊어지는 줄 알고 놀라서 정말 심장마비 오는 줄 알았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놀란 여운이 남아있는지 제대로 입을 열 수도 없었다. 그저 심장이 떨어지지 않게 붙잡아두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가슴 위로 손을 올려 꾹 누른 채 한참을 떼지도 못하고 있었다.

 “괜찮아?”

 “응. 휴우, 들어가. 이제 좀 들어가자.”

 

 ‘가2’호와 ‘가3’호는 위치와 이름만 다를 뿐 똑같은 방이었다. 각종 손잡이들도 그렇고, 뭐 한 가지라도 다른 곳은 없어보였다. 가마민박이 자리 잡고 있는 위치를 떠올려보면 방마다 내부도 왠지 다르게 해놓았을지도 모르겠다고 어쩌면 그럴 것 같다고 상상해보기도 했는데 말이다. 아주 약간이지만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그렇게 한번 쓱 둘러본 후 바닥에 앉아서 가방을 열었다. 곧바로 풍겨나며 방 안으로 퍼져가는 토마토냄새. 가장 위쪽에 얹어놓은 토마토들은 완전히 터지고 풀어져있었는데, 그 중 두 개는 완전히 으스러져서 거의 액체 상태로 껍질만 옆 토마토들에 걸쳐 있고 사방 군데 묻어가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가방 안에 토마토 아마도 두 개가 마치 물 풍선 터진 것처럼 안쪽 전체에 범벅으로 묻어있는 모습과 그 아래 꽉 들어차있는 토마토들 모양을 들여다보며 할 말을 잃었는지 최다인은 입 벌린 채 가만있다가 고개 돌려 날 쳐다보면서 말했다.

 “이거 혹시 집에서 갖고 온 거야?”

 “무슨 소리야. 이런 걸 왜 갖고 와. 내가.”

 “그럼 이 많은 게 다 어디서 났어?”

 난감했다. 그렇다고 뭐라고 지어낼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워낙 황당한 사건이어서 둘러댈 말을 떠올려볼 시도도 우습게 느껴진다. 그냥 털어놓는 수밖에.

 “그냥, 방으로 내려와서 짐 풀려고 가방 열어보니까 들어있더라고.”

 누가 듣더라도 어이없어할 말이지만, 사실이 그런 걸 어쩌겠는가. 사실이 그런 걸.

 “혹시 직원이 그래놓은 거 아냐? 말해봤어?”

 “당연히 바로 전화했지. 근데, 당연히 모른다고 하더라.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딱 잡아떼던데. 그러면서 여기서 벌어진 일이니까 얼마 정도는 보상해줄 수 있다고, 없어진 것들 목록을 달라고 하던데?”

 “그래서, 줬어?”

 “아니, 아직. 근데 침낭 말고는 뭐가 없어졌는지도 잘 모르겠어.”

 “침낭? 너 침낭 안 가져왔잖아.”

 “아니야. 가방에 넣어서 가져왔어. 집에서 짐 챙길 때, 그거부터 맨 처음으로 챙겼는데.”

 “그래?”

 “넌 같이 가자고 얘기도 안 꺼냈는데 그냥 내가 가는 거 보고 무작정 따라 나왔잖아. 근데 내가 침낭을 챙겼는지 말았는지는 어떻게 안다고 그래?”

 “어떻게 알긴 뭘 어떻게 알아. 침낭을 가방 속에다 집어넣고 다니진 않잖아. 밖에 매달고 다니지.”

 그랬던가. 침낭을 보통, 가방 밖에다 매달고 다녔었나.

 

 후다닥 가방만 챙겨 뛰쳐나왔을 것 같은데, 잊어버리지도 않고 술까지 챙겨 온 최다인에게 감탄하면서 그 정신에 어떻게 이거 챙길 생각을 했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대답이 가관이었다. 정말 그럴싸했다.

 “야, 급하니까 이렇게 챙겨온 거지. 안 그랬으면 챙겨놓고도 빼먹고 그냥 나왔을 거다.”

 붓고 마시고 토마토 먹고, 붓고 마시고 토마토 먹고, 마시고 토마토 먹고 붓고 또 붓고.

 

 곧 나는 머리가 어디로 떨어질지 모를 것처럼 불안하게 몸을 가눌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최다인은 이미 쓰러져 잠든 것인지 나처럼 정신 놓고 헤매고 있는 건지 혼자 크게 뭐라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웅얼거리면서 이리저리 팔을 내젓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다가 난 대체 얼마나 마신 건지 힘겹게 손가락을 꼽아보다가 포기하고 항변하듯 허공에 대고 말했다.

 “얼마나 마셨으면 뭐!”

 그러곤 굴러다니는 병 사이를 헤맸다. 어딘가 무언가에 단단히 붙잡혀있는 뇌를 중심으로 머리뼈부터 온몸이 흐느적거리며 휘청거리는 것 같았다. 고정된 뇌가 머리뼈 안쪽에 이리저리 부딪치는 통에 토할 것 같았고 정신이 없이 죽을 것처럼 어지러웠다. 난 최다인 옆으로 가려다가 그냥 그 자리에 엎어져서 웃었다. “토마토— 토…마토…….”

 

 

 

 벌써 날이 샜나?

 강하게 눈으로 찔러 들어오는 통에 눈꺼풀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올려 눈앞을 가리고 아주 천천히 조심스레 눈을 떠보려 했다. 그런데 밤이 얼마나 깊었고 심하게 어두웠던지. 아주 살짝 눈꺼풀이 떨릴 만큼만 움직였을 뿐인데도 벌어진 틈새로 비치는 세상이 아프도록 눈부시게 하얀 빛뿐이었다. 앞을 가리고 있는 손을 치우지 않은 채로, 한참동안 아주 조금 들린 채 떨고 있는 눈꺼풀 그대로 버티면서 적응하고 난 후에야 조심스레 눈을 떠보려 할 수 있었다.

 

 찝찝하면서도 건조하게 마르고 더운 호흡이 입 안에 쩍쩍 달라붙었다. 그리고 쓰러져서 잠들기 전과는 전혀 딴판으로 달라져버린 환경에 아직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갑자기 실내 환경이 이렇게 바뀔 수도 있는 건가.

 

 눈을 완전히 뜨고 나서도 시야에서 모든 사물이 형태를 갖추고 멀리 풍경을 이루는 선과 색이 눈앞에 훤히 드러나 보일 때까지 기다려야했다. 나는 홀로 도로 한가운데에 드러누워 있었다. 가방을 등에 매고 있는 상태로 뜨거운 볕 아래에 손수건도 없이 말이다.

 

 쓰러져 잠들어버리기 전에 토마토와 뭔가 같이 먹었던 것 같은데, 다른 건 남기지 않고 전부 먹어치운 모양인지 가방엔 토마토뿐이었다. 그나저나 이런데서 이러고 잠들 수 있다니, 정말 내가 그렇게 한 거지만 당사자인 나조차도 대단하다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아까 5시2분12초에서 시계가 멈췄다는 걸 확인했을 때 시간이 어떻게 될지 가늠해보면서, 날이 더운 정도가 아니라 뜨겁게 느껴지기까지 하기에 지레 한낮일거라고 짐작했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아니었나보다. 더운 정도나 해떠있는 위치만으로 몇 시인지 파악해보려 한 시도는 약간 무리였던 거다. 여기 이렇게 있고 보니 그때가 아니라 지금이 딱 한낮인 걸로만 느껴지는 걸 보면 분명 그랬다.

 잠들기 직전 토마토를 계속 먹었던 것 같은데, 일어나니 심하게 목이 말랐다. 그래서 물을 마시려는데 물통에 마실 거라곤 한 방울도 없이 물 마른 자국만 남아있었다. 난 하는 수없이 또 토마토를 먹으며 목마름을 해결했다.

 그건 그렇고 이렇게 덥다 못해 뜨거운 날씨에 이 많은 토마토를 계속 들고 다니다보면 가방 안에서 얼마 못가 물러지고 곧 썩어버릴 텐데, 그렇게 몽땅 다 썩어서 못 먹게 된다면 어떡해야할지 큰일이었다. 그런데 가만 보면 지금까지 멀쩡하게 있는 것만도 정말 놀라운 일이지 싶었다. 어쨌거나 토마토가 전부 썩어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는 불상사가 벌어지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여기 도로 위에서 온 길로 되돌아가지도 못한 채 발이 묶이고 홀로 덩그러니 배고픔과 목마름으로 죽어가는 사태를 맞이할 확률. 99.999%

 

 어떻게든 한시라도 빨리 이 도로 끝으로 빠져나가야했다. 여기 도로에서 벗어나는 건 절대 안 될 말이었다. 서있는 자리에서 사방으로 아무리 둘러보아도 지평선까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으면서 오로지 황량할 뿐인 평원에 누렇게 마른 풀과 크고 작은 돌멩이들만 굴러다니고 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서 당장 내 유일한 식량인 토마토가 전부 상해서 먹을 수 없게 되고 목마르다면 마실 걸 찾아다녀야할 만큼 사정이 급해질지라도 도로 밖으로 빠져나가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는 황량한 평원에서 헤매고 돌아다니는 짓은 안 될 말,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걸음을 옮기면 옮길수록, 토마토가 이제 썩을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은 정말 쓸데없는 일이었다.

 난 계속 토마토 썩겠다는 걱정을 하면서 하염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한두 걸음도 옮기지 못하고 뜨거운 날씨에 너무 덥고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려서 휴대용 칼을 꺼내 양쪽 소매를 잘라냈다. 그런데 날씨 때문인지 몸이 힘든 건지 대여섯 걸음 옮기면 목이 타고 다시 열 걸음 옮기면 어지럽고 배가 고팠다. 그때마다 하나씩 토마토를 꺼내먹었다. 그러니까 계속해서 쉬지 않고 토마토를 먹으며 걸어간 것이다. 그러다보니 애초에 걱정했던 바와 다르게 토마토는 얼마 가지 못하고 썩는 게 아니라, 그보다 한참 전에 이미 전부 내 뱃속으로 들어가서 남아 있지도 않았다. 가방 속에 가득했던 토마토는 이제 바닥이 드러나 보일 정도로 적은 양만이 남아있었다. 그렇게 어깨에 실리던 무게를 덜어내고 몸이 가벼워졌지만, 마치 토마토를 흡수한 몸이 그 무게만큼 무거워진 것처럼 힘이 없었고 갈수록 더 심하게 축축 처지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딱 열한 개였다. 긍정적으로 살아야한다고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긍정적으로 생각해야한다고 하지만, 이 상황에서 ‘아직 열한 개나 남아있다’고 말하긴 힘들었다.

 

 어질어질.

 조금만 참자. 나중을 위해 아껴두자고 참고 참다가 그토록 심하게 꾸륵꾸륵 볼멘소리로 경련하던 배고픔에 내성이 생겼는지 모든 감각이 둔해져있을 때였다. 문득 위를 올려다보고 뜨거운 볕이 너무 눈부시다고 생각했는데—

 

 

 

 “안재은.”

 아주 희미하게 최다인이 멀리서 날 부르고 있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안재은.”

 어깨를 붙잡고 있는 무언가가 쥐고 흔들었고, 좀 더 가까워진 목소리. 날 붙잡고 흔드는 게 최다인인가.

 “안재은, 여기서 이러고 뭐해. 일어나.”

 

 눈을 뜨고 벌떡 몸을 일으켰을 땐, 한밤중이었다. 난 책상에 여기저기 무언가 어질러져있는 가운데서 엎어져 자고 있었다. 머리에 눌려있던 왼팔이 저렸고, 뒷목과 어깨가 말도 못하게 뻐근했다. 한차례 어깨를 돌리자 관절 꺾이는 소리가 유난히 크고 요란하게 들렸다.

 “뭐 하나 했더니, 설마 지금까지 계속 여기서 이러고 자고 있었어?”

 “아, 그런 것 같은데? 아무래도.”

 “근데 이 종이들은 뭐야?”

 최다인이 책상 위에 어지럽게 널려있는 종이들을 한데 모아 집어 들면서 물었다. 그런데 다인이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종이들은 나로선 정말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눈뜨니 눈앞에 널려있는 종이들일 따름이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는데. 난 그냥 잠만 잔 것 같은데 깨어나 보니까 이렇게 어질러져있네.”

 “혹시 몽유병 같은 거 있었어?”

 “무슨, 아니야.”

 

 원래 난 여기저기에 이것저것 어질러 놓아 내버려두는 걸 싫어하는 편이다. 뭘 놔두는 것도 싫어한다. 그래서 그 흔한 액자하나도 어디 놓아두거나 걸어놓지 않았다. 그래서 원래대로라면 책상용 전등에 불만 켜져 있고 기껏해야 잠들기 전 내가 하고 있었을 일거리만이 엎어진 몸 아래 깔려있어야 할 터였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잠들었다 눈 떠보니 책상에는 뭔지도 모를 종이들로 이렇게 잔뜩 어질러져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등 옆에는 내가 사지도 않았고 집안에서 본 적도 없는 액자 하나가 떡 하니 놓여있었다.

 액자 속은 어딘가 시골 너른 평원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풍경으로 소실점까지 쭉 뻗어나가는 도로를 중심으로 찍어놓은 풍경사진이었다. 이런 액자를 언제 갖다놓은 건지 어디서 가져다 놓아둔 건지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그런데 책상 위에 어지럽게 흩어져있는 종이들을 집어 들어 살펴보던 최다인이 말했다.

 “이거 네가 한 거야?”

 “뭔데 그래? 이리 줘봐.”난 종이를 건네받아 한 장씩 넘겨보았다. 종이 매 장마다 무언가 열심히 스케치하고는 그 옆으로 깨알처럼 작게 써놓았는데, 아마도 뭔가 설명을 휘갈겨 써놓은 것처럼 보였다. 좀 더 살펴보니, 누군가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전부 열한 장에 걸쳐서 그림을 그리고 설명을 써놓은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림이라면 평소 나와는 전혀 연관성이라곤 없는 분야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도 ‘그림’하면 떠오르는 기억이 한 가지 있긴 했다.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 미술시간에 보면 명암표현기법을 가르친답시고 학생들에게 둥근 구를 그려보게 하는 과정이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둥근 구를 그려보고 몇 단계에 걸쳐 명암을 표현하는 기법에 대해 가르치는 걸 배워야하는 과정이 끝나면, ‘구 그리기’로 학기말 성적에 합산 반영되는 수행평가까지 치러야하는 차례가 돌아왔다. 스스로도 그다지 그림에 소질이 없는데다 눈썰미도 부족하고 손재주도 없다고 여겨온 나였다. 그런 내가 ‘구 그리기’ 수행평가에서 낙제조차 될 수 없는 점수를 받으리라는 건 불 보듯 빤한 일이었다.

 최다인이 종이들을 넘기며 살펴보고 나서 나에게 이거 전부 네가 한 거냐고 물어보는 말은 그 자체로 당치않은 물음이었다.

 “이걸 내가 했다니, 말이 되는 소릴 해라.”

 “네가 한 게 아니라고? 진짜로?”

 “내 미술성적 어땠는지 몰라? 너 고1때 나랑 같은 반이었잖아. 나 그때 겨우 미술 8등급 턱걸이였어.”

 어이없다는 듯 말하는 걸 듣더니, 최다인은 손뼉을 치며 아— 기억을 더듬어보는 듯했다.

 “아, 그래. 기억나. 맞아. 그래서 그때 진짜 어이없어했었는데.”

 “아니 근데, 이런 게 왜 내 책상 위에 흩어져있는 거지? 누가 이래놓은 거야 대체.”

 “그러게.”

 “그건 그렇고, 근데 넌 왜 또 여기 있어? 언제 왔어?”

 “언제 왔냐고? 나 밖에 나간 적도 없는데? 사장님이 가게 쉰다고 특별휴일이라도 해서, 나 오늘은 어디 나갈 일 없다고 했잖아.”

 “그랬었나?”

 “뭐야.”

 

 정말 이상한 건, 아까 전부터 쭉 내 머릿속에 맴돌고 있는 책상 등 옆 액자였다. 계속해서 난 그 액자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러면서도 도통 이건 뭐냐고 물어보려 하지는 않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하루 쉬는 날이라며 늘어놓는 말을 들었을 때에야 난 내가 최다인과 한집에서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내가 다인에게 네가 왜 여기 있냐고 물은 건 정말로, 어째서 이 밤중에 네가 여기 이 집에 있는 거냐고 따지듯이 물어보려던 거였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지 최다인과 난 한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들은 말대로라면 최다인은 깜짝 선물처럼 얻게 된 하루 휴일을 온종일 하릴없이 집에서 보냈다고 했다.

 

 “이제 정신 좀 차리고, 밥 먹자.”

 “밥?”

 

 하도 깜깜하기에 자정이나 그 근처 어디쯤 된 줄 알았더니 이제 막 7시라고 했다. 그런데 저녁 먹으라는 말을 듣자 애써 무시하고 있던 배고픔이 확 올라왔다. 사실 좀 전부터 두 끼 정도는 거른 것처럼 배고픈 상태였다.

 “간만에 내가 준비 좀 했으니까, 우리 식기 전에 먹자.”

 그래. 일단 나가자. 진짜 배고프다. 약간 어이없어 하면서도 기분 좋게 웃는 최다인과 식탁으로 갔다. 뭔지도 모르면서 이미 입 안 가득 고여 드는 침을 꿀꺽 소리 나지 않게 삼켰다. 입 안까지 이렇게 아우성이었다. 그리고 내가 잘 알고 있는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아, 이거—

 “이거, 뭔지 알 것 같다.”

 

 

 일사병을 일으켰던 건지.

 “토마토!”

 깨어나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목이 마르지만 물이 있을 리 없었다. 남아있는 토마토 중 여덟 개로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 먹어치웠다. 이제 남은 건 세 개뿐이다.

 해가 지고 있으니 해 떠있을 때처럼 심하게 목마르는 일은 없을 것 같아 다행이었다. 하지만 자꾸 배고파지는 뱃속은 어떡해야 할까. 토마토를 여덟 개나 한꺼번에 먹어서 그런지 속이 든든하지만 이 역시 오래가지 않을 거라는 것을 만 하루도 안 되긴 했지만 이제껏 여기 도로를 걸어온 경험으로 충분히 알 수 있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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