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퍼런 물이 뚝뚝 떨어질 듯 짙은 가을. 끝없이 펼쳐진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수영이가 보는 하늘도 이렇게 맑았으면…….’
"야! 니 빨리 안 퍼오고 머하는데?"
지난 달 새로 만든 제2사육장에서 나온 병식이가 유충 병에 넣을 발효톱밥을 빨리 안 가져온다고 난리다. '니는 별로 할 일 없을끼다.' 라며 쇼핑몰만 관리하면 된다고 하더니 정작 쇼핑몰은 병식이 자신이 차지하고 앉아서 지린내 나고 흙 묻히는 일은 창정한테 다 시키고 있었다. 창정은 괜히 인터넷 하는 방법을 가르쳐 줬다며 식식거렸다.
"병식이 니 진짜 너무 하는 거 아이가? 이런 거 시킬려고 내 오라했나?"
창정은 발효톱밥이 가득 든 비료포대를 끌어 안은 채 항의했다.
"와? 하기 싫으면 그만 두든지. 일할 아들 꽈~악 찼다."
"아이고, 됐다 임마! 지독하네 지독해! 이 병 안에 넣으면 되나?"
"어어? 야! 유충병 밖에 칠칠 묻히면 받는 고객들이 기분 좋겄나? 그거 놔 두고 니는 고마 톱밥이나 더 퍼 온나."
"아따 그 새끼 거 진짜, 알았다!"
이래서 사람은 모든 카드를 보여주면 안 되는 것이다. 인터넷 뱅킹을 하면 해커들에게 정보가 노출되어 통장에 있는 돈을 모두 빼앗기고, 쇼핑몰을 잘못 건드리면 웹서버가 고장 나서 다시 구축하는데 수억이 든다고 뻥을 쳤어야 했다. 불쌍한 컴맹 친구 구제해 줬더니 어느 순간 원수가 되어 버렸다. 제품 배송, 사육장 관리, 유치원생 견학까지 할 일이 너무 많은데도 병식은 절대 사람을 더 쓰지 않는다. 사람하나 쓸 돈으로 조금 더 일하고 월급을 많이 받아가라고 했다. 반대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 서, 넛이 할 분량을 시키는 것 같았다.
"아나!"
창정은 병식이가 툭 던져주는 흰 봉투를 얼떨결에 받았다.
"이기 뭔데?"
"저번 분기에 수익이 마이 나서 따로 좀 넣었다. 마이 넣었응께 씰데 없는데 쓰지 말고 수영이 유학비 보태써라. 알겄나?"
"월급 받는데, 머할라꼬……."
"됐다 고마. 넣어 놔라."
"……."
"와?"
"고맙다 병식아!"
"머하고 섰냐? 빨리 톱밥 안 퍼오고!"
"아, 알았다."
"야! 오늘은 쿠팡이 대목이네. 니 말대로 MD한테 안부전화 한 통 한께 바로 표가 난다 표가나."
병식이 가끔 창정에게 이런 호의를 베푸는 날이면 창정은 꿈속에서 보았던 슈퍼비틀이 생각났다. 사육장의 사슴벌레들은 슈퍼비틀 처럼 크지도, 특별하지도 않았지만 창정과 그의 가족이 잃어버렸던 소소한 일상을 되찾아 주었다. 창정은 평범한 것들과 함께 하는 삶이 소중하다는 것을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발효톱밥을 비료포대에 담기 위해 열심을 삽질을 하던 중에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아빠! 나야 수영이!"
"어? 우리 백점토끼 웬일이야? 수업 시간 아냐?"
"점심시간인데요. 아빠! 나 이번 방학 때 프랑스 가두 돼?"
"프랑스?"
"응! 내 룸메이트 까미르 알지?"
"어! 까미, 까미가 왜?"
"걔가 이번 방학 때 자기 집에 초대한대. 까미르 엄마, 아빠가 프랑스에서 유명한 레스토랑 하는데, 거기 주방에서 같이 실습 하재요. 한국 요리도 배우고 싶다고 하고."
"와! 정말?"
"응! 비행기 값만 들고 오면 된대. 다른 건 걱정 말래요. 나, 가도 되지? 엄마는 오케이 했어요."
"그, 그럼. 당연하지! 나도 대 찬성이야."
"고마워 아빠! 우리 아빠 최고야!"
수영은 호주에서의 생활이 행복한 듯 email이나 전화를 할 때 항상 생기가 넘쳐났다. 친구들도 잘 사귀고 공부도 열심히 했다. 검정고시를 치고 유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일정을 관리하고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모습이 참 대견했는데 호주에 가서도 그 노력이 빛을 발휘하는 것 같았다. 수영이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서 창정은 자신이 소중한 것을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사장님!"
"어? 안녕하세요?"
"네, 잘 지내시죠? 저희 애들 데리고 산책 나왔어요."
인근에 새로 생긴 유치원에서 5세반을 맡고 있는 선생님이 아이들을 데리고 사육장을 방문했다.
"아! 잘 오셨어요. 사육장 보여드려요?"
"네! 사장님! 감사합니다."
선생님은 애교 넘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창정은 들고 있던 삽을 톱밥더미 속에 얼른 꽂아 넣고 옷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어! 선생님 오셨…어요?"
또 병식이가 새치기를 했다. 선생님이 마흔에 가까운 노처녀라는 걸 안 이후로 병식이는 속이 니글거리는 어색한 억양의 표준말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막걸리 병이 가득했던 작은 냉장고 자리에 1회용 커피자판기를 놓았다.
"이리로 오셔…요. 차 한잔 하시고… 아이들 사육장 구경은… 한부장님이 시켜드릴… 거여요."
병식이는 아이들이 있어서 표준말을 써야 한다는 핑계를 댔지만 참으로 듣기 부담스러운 표준말이었다. 선생님은 미안한 듯 창정에게 눈인사를 건네고는 종종걸음으로 제2사육장으로 들어갔다. 선생님을 제2사육장으로 데리고 들어간 병식이 갑자기 다시 나왔다.
"창정아! 아들이 사슴벌레 달리기 하는 거 좋아한다꼬 그거 마이 해주란다. 알았째? 욕바라이~."
창정은 병식이를 빨리 장가보내야 이런 꼴을 안 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선생님 정도면 병식에게 100점짜리 신부였다.
"얘들아! 사슴벌레 달리기 하러 갈까?"
"예~"
아이들은 가을하늘이 떠나가라 외쳤다.
"자, 출발!"
"와~"
창정은 강아지처럼 귀여운 아이들을 데리고 사슴벌레 경주장으로 힘차게 달려갔다. 사슴벌레 경주장 외벽에는 커다랗게 그려진 로보트 태권브이가 달려오는 아이들을 늠름하게 맞아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