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날은 처음부터 날이 서지 않아요. 사냥꾼이 사냥을 시작할 때나 비로소 파랗게 반짝이죠. 죽음은 끝이고 그래서 두렵죠. 계속 되어야할 이야기가 있다면 우리가 찾을 건 공포에요. 내가 원하지 않음을 모르는 게 아닐 텐데요. 죽음은 바란다고 찾아오지 않죠. 바란다고 찾아오는 건 희망일 뿐인걸요. 그런데 그런 건 축복 속에나 있는 거고.
“강태완 팀장님. 이우열 용의자 프로파일링 어떻게 할까요?”
나는 유리창으로 뚫고 들어오는 햇빛을 좋아했어요. 그렇게 들어온 빛이 바닥에 그윽한 그림자를 남기는 것도 좋고.
“1956년에 제임스 A가 하지 못한 말이 뭐라고?”
나는 비스듬히 웃으며 물었어요. 그러자 뒤통수를 긁적이던 안경잡이 후배 일민이는 자세를 가다듬고 답하더라고요.
“모두가 악마를 알고 있다.”
맞습니다. 아는 것은 중요하죠. 그건 지식 문제가 아니에요. 상식의 문제죠. 상식적인 도덕은 배우지 않아도 느낄 수 있죠. 본능적인 문제이니까요.
그 날은, 프로파일러 팀에서 연쇄사건을 맡은 수사가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분위기라 거의 자축하는 날이었죠. 벽에 걸린 시계로 시간을 확인해보니, 화가로 성공을 이룬 수인이가 전시회를 막 끝내고 홀로 집에서 나를 기다릴 시간이었죠. 팀 내에서는 당장 회식을 주도하는 분위기였지만, 나는 성격답게 뒤로 발을 빼버렸죠. 사실, 오늘은 그 보다 더 좋은 날을 기념하는 날이었어요. 수인이와 만난 지 6년이 되는 날이었거든요. 그보다 프로파일러 팀 합숙소에서 지낸 열흘 동안 수인이의 얼굴을 보지도 못했어요. 목이 마른데 물을 먹지 못하고 음료수만 들이 킨 것과 같았죠. 기념일을 챙기는 것에 서투룬 수인이는 아마 잊었을 수도 있지만 나는 잊지 않죠. 내가 가장 사랑하는 여자니까요. 삼청동의 유명한 꽃집에서 흰 백합을 샀어요. 길고, 꽃은 화려해서 수인이를 닮았죠. 오전부터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한 비는 해가 저물고 점점 양이 많아지더라고요. 비가 오면 차를 몰지 않는 나의 버릇 때문에 택시를 타고 수인이가 기다리고 있는 나의 집으로 갔죠. 그 때 택시안의 라디오에서 바흐의 죄악과 싸우라는 피아노곡이 나오더라고요. 축축한 공기 때문에 소리에 집중이 잘 되었죠. 때는 바야흐로, 대학 때 교수님이 해준 악마 이야기가 생각났죠. “악마와 싸울 때, 자신도 악마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한다. 들어봤지? 여기서 어떤 모순이 있는지 아는 사람?” 답은 바로 나왔죠. “자신도 악마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한다 라는 말에 모순이 있습니다.” 교수님은 며칠이나 안감은 머리를 볼펜으로 긁적이면서 물었어요. “어떤 모순이지?” 나는 그냥 가만히 생각해본 겁니다. “인간은 악마가 될 수도 있고 천사가 될 수도 있다면, 악마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한다는 말은 모순이죠.” 교수님은 고개를 기울였습니다. “철학적인 이야기구나.” 나는 그 때 오히려 물음표를 두 눈에 그려 넣었어요. 맞는 말인지, 틀리다는 말인지 정확하지 않았거든요.
저녁시간이라, 밤에 골목은 으슥했어요. 빌라 촌이라서 그나마 가로등이 여러 개 놓여있는 게 마음에 들었죠. 택시에서 내린 나는 서둘러서 ‘하늘 빌라.’ 문판이 적힌 빌라로 들어섰죠. 열흘 만에 다시 보는 빌라는 그대로였습니다. 이 빌라로 들어올 때 문판이 마음에 들었어요. 나무 판에 글씨를 새긴 건 신의 한수이었죠. 나는 기분 좋은 얼굴로 2층 계단을 다 올라서고 빠르게 201호 문 앞으로 다가가 도어락에 번호를 눌렀어요. 네 자리 번호를 누르면서, 희미하게 집 안에서 들리는 클래식 음악 소리에 조금 의문을 가졌죠. 축축한 공기 때문에 소리가 잘 들렸던, 택시 안에서 들었던 바흐의 죄악과 싸우라는 피아노곡이었어요.
문득 소름이 끼쳤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