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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이스트 포인트
작가 : 필스너
작품등록일 : 2019.9.3

* 美 육군사관학교인 '웨스트 포인트(West Point)'와 비교해도 생도들의 자질이나 국가에 대한 충성심에서 절대 뒤지지 않을 것이라는 자부심으로,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은 자신의 학교를 '이스트 포인트'라고 부르기도 하였음. 


<집필 의도>

 1653년, 무역선을 타고 네덜란드를 떠나 태평양을 거쳐 일본의 나가사키로 향하던 젊은 선원 하멜은, 뜻하지 않게 제주도 근처에서 거센 풍랑을 만나 배가 난파하여, 간신히 살아남은 선원들과 함께 강제로 조선에 억류됩니다.
이후 하멜은 조선에서 보낸 13년 동안의 행적을 꼼꼼하게 기록하였고, 극적으로 조선을 탈출하여 고국 네덜란드로 돌아간 뒤, 그 기록을 토대로 소위 ‘하멜 표류기’라는 책을 출간하는데, 마르코 폴로의 '동방 견문록' 이후 미지의 세계에 대한 유럽인의 호기심을 반영하듯, 당시 '하멜 표류기'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필자는 이 ‘하멜 표류기’를 모티브로, 동서양의 실제 인물과 역사를 소재로 삼아, ‘이스트 포인트’라는 사관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경쟁과 우정, 사랑과 배신의 이야기를 판타지 세상 안에서 그려 보았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스케치와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발명품이 포함된 '르네상스 시대'의 눈부신 발전과, 동방을 정복하겠다는 '대항해 시대'의 거친 야망이 서양의 소재라면, 명나라의 멸망과 청나라의 흥기, 병자호란의 발발과 이후 전개된 효종의 북벌준비가 동양의 소재입니다.
 인간 중심의 시각에서 자연을 정복하고 다스리겠다는 이기적인 생각보다는, 자연 그 자체를 존중하고 이에 동화되어 살았던 우리 조상들의 겸손한 자세도 중요한 주제로 잡았습니다. 조국을 위해 헌신하다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소현 세자와 세자빈의 높은 뜻도 기리고 싶었습니다.
 또한 조선 왕실의 정통성과 권위를 상징하는 그림인 ‘일월오봉도’에, 소설 ‘다빈치 코드’에서 나오는 ‘최후의 만찬’과 같은 어떤 수수께끼를 담아 독자들의 관심과 흥미를 이끌어내고자 했으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스케치에 나오는 비행기나 낙하산도 판타지 안에 넣었습니다.
 고구려의 웅대한 기상이 서려있는 만주 벌판까지 이야기의 무대를 넓혔으며, 우리 고유의 영토인 독도를 넘보려는 일본의 탐욕에도 일침을 가하고 싶었습니다.
소설의 마지막은 네덜란드의 왕자 하멜과 조선의 공주 하이란이 결혼을 하는 로맨스로 결말을 맺습니다.
 아무쪼록 대한민국과 네덜란드, 양국의 우정이 영원하기를 기원합니다.


 
<10화>
작성일 : 19-10-14 12:11     조회 : 214     추천 : 0     분량 : 21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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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훈련과 활동

      

  4월 말,

  날씨가 풀리고 계곡에 물이 넘치자 1학년 생도들의 유격 훈련이 실시되었다. 3학년 선배들이 숙달된 조교를 하면서 후배들의 훈련을 감독하고 평가를 하였다.

  조교들의 대장을 맡고 있는 샤키는 언제나 모범적이어서 동생인 샤니조차 훈련 중에 적당히 넘어가는 걸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다.

  생도들은 아침부터 모여 함께 기본체조를 시작했고, 그 다음도 계속 고된 훈련이 뒤따랐다. 자세가 흐트러지면 벌을 받아 앞뒤로 구르기를 수차례 반복하였다. 죽을 만큼 힘들었지만 생도들은 강한 정신력으로 그럭저럭 견디며 단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시간과의 싸움에서 점차 승리를 거두고 있었다.

    

  드디어 마지막 날,

  유격의 최종 관문은 절벽에서 계곡 아래로 늘어뜨려진 밧줄에 도르래를 걸고 내려가다가, 폭포수에 바른 자세로 입수를 하는 가장 어려운 훈련만이 남아있었다.

  절벽 위에는 커다란 교기와 학년기, 중대기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고, 굵은 밧줄 2개가 저 아래쪽으로 향하여 폭포 옆과 연못 위를 스쳐 큰 나무에 묶여 있었다. 하나는 도르래로 낙하하는 밧줄이고 아래에 있는 것은 보조 밧줄이었다.

  두 팔은 도르래의 손잡이를 잡고 두 다리는 앞으로 쭉 뻗어서 자세를 유지하다가, 폭포수에 떨어지기 직전에 도르래를 잡은 손을 놓아 엉덩이부터 수면에 닿아 신체의 충격을 최소화하면 되었지만, 만약 중간에 도르래를 놓치면 물이 아닌 바위에 떨어져 즉사할 수도 있는 위험한 훈련이었다.

  안전을 위한 그물은 애당초 설치하지도 않았다. 목숨을 걸지 않으면 결코 퓨그 제국에게 복수할 수 없다는 이런 신념 또한 이스트 포인트의 전통이었다.

      

  모든 주의사항을 꼼꼼히 말한 뒤 먼저 샤키가 멋진 시범을 보였다. 후배들은 감탄을 하면서 큰 박수를 보냈다.

  샤키의 뒤를 이어 1학년 생도들이 무리 없이 잘 내려갔다. 자세는 샤키만큼 세련되지 못했으나, 그래도 모두들 엉덩이부터 제대로 입수했다.

 

  다음은 에보크의 차례였다.

  조교가 다시 한 번 주의사항을 말했으나 에보크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아무리 후배라고 해도 에반 대장군의 아들이라 솔직히 3학년 선배들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는 못했다.

  에보크를 괴롭히면 이스트 포인트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을 하더라도, 그 이후의 진급은 포기하는 게 편할 것이라는 씁쓸한 농담이 사실 선배들 사이에서도 당연하게 돌고 있었다.

  오히려 매번 에보크를 두둔하면서 자신의 미래를 보장받으려는 선배도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자주 태도가 불량한 에보크였지만, 무엇을 하든 평가 등급은 다른 생도보다 늘 좋게 나오곤 했다.

      

  출발 신호도 무시한 채 에보크는 잘난 척을 하면서 도르래를 잡고 내려가다가 다리를 쭈욱 치켜들어 신발로 밧줄을 긁어버렸다. 훈련 중에는 학교에서 정식으로 보급받은 군화만을 신게 되어 있었지만, 에보크는 바닥에 뾰족한 징이 여러 개 달린 약간 다른 신발을 신고 있었다. 이 또한 다수의 조교들이 묵인해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 징이 일으킨 마찰 때문에 밧줄의 일부가 손상된 걸 알아차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에보크는 계곡물에 풍덩 빠져 시원하다며 즐겁게 헤엄을 쳤다. 밖에 있는 샤키가 다음 생도가 차례를 기다리고 있으니 빨리 나오라고 소리쳤지만 에보크는 시큰둥했다.

  

  잠시 후 젖은 머리와 옷을 털면서 나오는 에보크를 샤키가 불렀다.

  “에보크 생도, 지금 조교의 명령에 불응하는 건가?”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겨우 나왔는데 정말 너무하시네요.”

  “지금 생도가 허우적거린 건가? 그리고 조교의 지적에 대답하는 태도가 이게 뭐야! 생도는 자세불량으로 30점 감점이야, 감점!” 샤키가 목청을 높였다.

  “소리지르지 마십시오. 다 알아 듣습니다.” 에보크는 가소롭다는 듯 대답했다.

  “이 자식이, 건방지게?” 화가 치밀어 오른 샤키는 군화발로 에보크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에보크는 악~ 하고 비명을 지르며 다리를 움켜잡고 바닥에 쓰러졌다.

  그러자 다른 조교들이 화들짝 놀라서 즉시 달려와 일단 샤키를 말렸다 그리고 에보크를 부축해 나무 아래 그늘로 옮겼다. 잔뜩 찡그린 얼굴로 정신을 차린 에보크는, 계속 씩씩거리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에보크를 두둔하는 조교들은 안절부절 못했지만, 샤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래서 잠시 팽팽한 긴장이 훈련장을 감쌌다.

  

  이번엔 하이란의 차례였다.

  조심스럽게 출발한 하이란은 다른 생도보다 다리를 더 일자로 곧게 펴고 아래로 잘 내려갔다. 누가 보아도 늘씬한 그녀의 몸매를 있는 그대로 발산하는 환상적인 자세였다.

  하지만 신나게 내려가면서 폭포수가 가까워지자 하이란은 욕심이 생겼다.

  근질거리는 하이란의 몸은 남들과 똑같은 동작을 허락하지 않았다. 다리를 한 번 뒤로 젖혔다가 다시 앞으로 쳐올리면서 도르래에서 손을 놓고 위로 떠오르더니 공중에서 세 바퀴를 도는 묘기를 했다. 그리고는 두 팔을 머리 위로 쭉 뻗고 몸도 일자로 펴서 폭포수에 팔과 머리부터 입수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조교와 생도들은 멋지다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늘에서 쉬고 있던 에보크마저 하이란의 절묘한 실력에 놀라 벌떡 일어나 앞으로 나왔을 정도였다. 점수표를 들고 서 있던 샤키도 넋이 나간 듯했다.

  절벽 위에서 이를 지켜보던 하멜도 손뼉을 치고 휘파람을 불며 좋아했다. 하지만 옆에 있던 샤니는 다음이 자기 차례인 것이 부담되었는지 얼굴색이 차갑게 변했다.

  

  하이란이 폭포수에서 나오자 생도들이 환호했다.

  샤키도 하이란의 모습에 솔직히 반한 상태였지만, 훈련을 지도하는 조교로서 그런 내색을 할 수는 없었다. 공평함을 잃지 않으려 항상 자신부터 노력하는 샤키는 근엄하게 하이란을 불렀다.

  “하이란 생도, 조교가 엉덩이부터 입수하라고 교육을 했는데 생도는 지금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혹시 주의사항을 잊은 건가?” 나름대로 단호하게 말을 하려 했으나 어쩐지 샤키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아, 아닙니다. 교육받은 대로 하려고 했는데... 맑고 시원한 물을 보니 기분이 좋아져서 저도 모르게 그만... 앞으로 시정하겠습니다, 조교님!”

  

  “규칙은 규칙이다. 하이란 생도는 지시 불이행과 안전규정 위반으로... 80점 감점을 받는다.”

  “예? 80점 감점이오? 지금 와서 80점이면... 어휴... 휴우... 예... 알겠습니다.” 설마 했는데... 하이란은 고개를 푹 떨구었다.

  지금까지 종합 점수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던 하이란은 이번 한 번의 감점으로 에보크와 하멜에게 1등의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멋진 묘기를 보였지만 지시 위반이라며 칼같이 감점을 주는 샤키 선배가 순간 엄청나게 원망스러웠다.

  다른 1학년 생도들도 샤키 선배는 너무 매정하다며 투덜거렸고, 하이란이 자리로 돌아와 앉을 때는 진짜 멋졌다고 오히려 격려를 해주었다.

  

  이제는 샤니의 차례였다.

  하이란의 묘기에 생도들이 환호한 것이 무척 신경 쓰였는지, 샤니는 연거푸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하였다. 시간이 자꾸 지체되자 옆에 있던 조교는 빨리 하라고 점잖게 다그쳤다.

  샤니는 죄송하다고 말하면서도 몇 번 더 자세를 바로 잡느라 얼마간 시간을 보낸 뒤, 최대한 침착하려고 애를 쓰며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출발은 아주 좋았다.

  철모 사이로 삐쳐 나온 긴 생머리가 발랄하게 휘날리자, 하멜의 눈에도 샤니는 그토록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중간쯤 내려왔을 때 갑자기 밧줄이 휘청거렸다. 아까 에보크가 일으킨 마찰에 손상된 밧줄이, 하이란은 겨우 통과시켰으나 이번에는 샤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일부가 풀어진 것이었다.

  도르래가 밧줄에 걸려 급제동 당하자, 빠른 속도로 내려오던 샤니는 순식간에 도르래를 놓치고 말았고, 간신히 보조 밧줄에 매달려 비명을 질렀다. 아직 폭포수까지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만약 여기서 떨어진다면 살아남기 힘든 급박한 상황이었다!!

  모두들 어쩔 줄을 몰랐고 샤키와 조교들은 황급히 절벽 쪽으로 달려갔지만, 샤니가 얼마나 더 버틸지는 의문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팔과 다리는 힘이 점점 더 빠져갔고, 샤니는 살려달라며 계속 울부짖었다. 절벽 위에 있는 사람들도 어떻게든 손을 써보려고 했지만, 계곡의 중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샤니에게 접근할 방법은 전혀 없었다.

  생도들은 추락이 예상되는 지점에 함께 모여, 두 팔로 샤니를 받기라도 해야 한다고 소리를 질렀으나, 이미 아름드리 나무들이 하늘을 가로막고 있어 만약 샤니가 떨어진다면 나뭇가지에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져버릴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샤니는 절규했고, 샤키도 울먹이며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그저 조금만 더 참으라는 말뿐이었다.

  모두가 말은 안 했지만 지금은 다른 방도가 전혀 없기에, 잠시 후에 일어날 참혹한 결말을 다들 예상하면서도 그저 조금만 더 버티라는 함성만이 계곡에 울려퍼지고 있었다.   

  비통한 긴장의 시간이 그렇게 흐르고 있었다.

  

  그때였다!!

  절벽 위에서부터 큼지막하고 넓은 무언가가 햇빛을 잠시 가리더니, 서서히 계곡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얀스가 수업시간에 소개했던 것과 비슷한 물체가 어디선가 나타난 것이었다.

  자세히 보니 하멜이 가운데에 매달려 있었다. 지켜보던 조교와 생도들은 학처럼 크게 펼친 날개에 몸을 맡기고 자유자재로 조종을 하는 하멜을 보자 할 말을 잃어버렸다. 실제 글라이더가 나는 모습에 모두들 넋이 나가고야 말았다.

 

  하멜은 샤니가 매달린 곳으로 신속히 방향을 잡았다. 거의 탈진한 샤니가 밧줄에서 떨어지기 직전에, 하멜은 간신히 그녀의 팔을 잡아 끌어올렸다. 그리고 꼭 안았다.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지 샤니는 하멜의 품에서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런데 글라이더는 두 사람의 무게가 버거웠는지 점점 더 빨리 하강하기 시작했다. 하멜은 순간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폭포수 쪽으로 글라이더를 몰았다. 그러자 모두가 다시 폭포수로 달려갔다.

  

  드디어 폭포수의 경계 안으로 글라이더가 진입하자, 위기에서 벗어난 것을 확신한 생도들은 이내 환호성을 터뜨렸고, 그렇게 늠름하던 샤키도 안도의 눈물을 펑펑 쏟았다.

  결국 글라이더는 물속으로 풍덩 빠져버렸다.

  

  물벼락을 맞고서야 정신이 제대로 돌아온 샤니는, 하멜을 꼭 안고 그의 품속에 얼굴을 묻었다. 그런데 이 모습은 글라이더의 날개에 가려서 밖에서는 보이지가 않았다. 하멜은 물 밖으로 나가려고 출구를 찾으려했지만, 샤니가 자신을 놓아주지 않았다.

  어떤 생도는 "둘이서 무슨 사랑을 그리 오래 하냐?"며 놀려댔다.

  조금 전까지 자기가 받은 박수와 환희가 하멜과 샤니의 로맨스에 갔다고 생각했는지, 이를 지켜보던 하이란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동료들이 달려와 날개를 걷을 때쯤 샤니는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척을 했다.

  샤키가 다가와 샤니를 꼭 안았다. 그리고 하멜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반복하며 등을 두드렸다. 여러 명이 달려들어 글라이더를 물 밖으로 끌어내고 있을 때, 갑자기 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에보크의 날카로운 시비소리가 들렸다.

  “이건 또 뭐야? 감히 이스트 포인트의 교기와 중대기로 이런 것을 만들어? 샤키 조교님, 명예로운 우리 학교의 교기를 이렇게 함부로 다뤄도 되는 겁니까? 교기를 망가뜨린 이따위 행위에는 어떤 처벌을 내리는 겁니까?” 샤니의 젖은 머리를 닦아주고 있는 샤키에게, 글라이더를 지켜보던 에보크가 대뜸 따져 물었다.

  

  “에보크 생도, 생도는 목숨을 잃을 뻔한 동료의 생명을 살린 하멜 생도의 용감한 행동을 그렇게도 깎아내리고 싶은가?” 샤키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뭐가 용감한 건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고, 교기를 훼손하면 어떤 처벌을 받느냐 이걸 물었습니다. 분명 하멜은 교기를 가지고 저런 것을 만들지 않았습니까? 제가 뭐 없는 얘기를 꺼낸 건가요? 빨리 답변을 해주시죠!” 에보크는 눈을 말똥말똥 뜨고 다가와 샤키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흥분한 샤키가 주먹을 불끈 쥐자 하멜이 샤키의 팔을 잡더니 차분히 말을 꺼냈다.

  “교기를 훼손한 것이 잘못 되었다면 규정대로 저에게 감점을 주십시오.”

  이 말에 다른 조교와 생도들은 말없이 샤키만을 바라보았다.

    

  샤키는 잠시 모두를 둘러본 뒤, 크게 숨을 한 번 내쉬더니 차분히 말을 했다.

  “위험에 빠진 동료를 구해준 하멜 생도의 행동은 정말로 의로운 것이었다. 샤니의 오빠로서 하멜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고, 또 선배로서도 크게 칭찬을 하고 싶다. 전우애를 발휘하였으므로 가산점 50점을 주겠다... ... ... 하지만... 교기를 훼손한 것은 규정상 심각한 감점 사유에 해당되므로... 하멜 생도에게... 100점의 감점을 내린다.” 샤키는 마지못해 말을 꺼내면서도 하멜에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미안하다는 얘길 했다. 하멜은 괜찮다고 대답을 했고, 이런 하멜에게 샤니도 정말 고맙고 꼭 보답을 하겠다는 얘기를 했다.

  

  에보크의 주위를 늘 붙어다니는 생도 하나가 달려와, 총점을 계산해보니 유격훈련에서의 1등은 에보크라며 축하의 말을 건넸고, 다른 몇 명도 다가와 크게 웃고 떠들었다.

  이를 바라보던 대부분의 조교와 생도들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면서 훈련을 마무리했다.

  

  *            *            *

     

  그동안 도르반이 심혈을 기울여 밀어붙인 비밀 기지가 드디어 완성되었다. 군사 기지라고 하기 보다는 지하 도시가 더 어울릴 만큼 거대한 시설을 자랑하였다.

  외부에서는 쉽게 발견하기 어려운 입구를 통해 병력이 드나들게 만들었고, 동굴을 지나 한참을 더 내려가면 지상과는 다른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음침하기 이를 데 없었다. 도르반은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기지의 환경을 이런 느낌으로 가져갔다.

  

  불곰과 늑대들을 훈련시킬 원형 경기장도 갖추었는데, 이곳에서는 매일 잔인한 학살극이 벌어졌다. 죽이지 못하면 죽음을 당하는 동족상잔의 혈투였다. 관중석에서 이를 지켜보는 퓨그군에게는 돈내기하기 딱 좋은 최고의 눈요기였다.

  조련사는 더 거칠게 공격하라고 불곰에게 채찍을 휘둘렀고, 근처의 우리에서 이를 바라보는 늑대들은 침을 질질 흘렸다. 피투성이가 되어 더 이상 경기를 지속할 수 없는 불곰이 나오면 바로 철창문이 열렸고, 수십 마리의 늑대가 달려들어 순식간에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하지만 도르반은 강도를 더 높이라고 명령했고, 결투를 피하거나 조련사에게 반항하는 불곰들에겐 즉시 화살이 날아들었다.

      

  경기가 끝나고 부하들을 불러 모은 도르반은 오히려 호통을 쳤다. 불곰과 늑대가 이 정도밖에는 잔인하지 못하냐는 말이었다.

  악만 남은 수하들은 졸병들에게 화풀이를 했고, 졸병들은 또 분을 풀기위해 늑대들에게 매질을 해댔다.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잔혹한 행동만을 일삼는 이 지하 세계는 그야말로 무법천지요 아비규환이었다.

  그러나 도르반이 노린 건 바로 이런 상태였다. 물론 황제인 호크런의 냉혹한 지시를 그대로 실천에 옮기고 있는 것이었다.

  

  퓨그의 최정예병과 불곰, 늑대군단을 악마처럼 만들어, 매머드의 도움 없이도 또 겨울이 아니더라도, 코르의 본토로 진격해 전멸시키는 것이 바로 호크런의 목표였다.

  호렌의 다른 지방은 대부분을 빙하기로 만들어 쉽게 제압했지만, 유독 코르 본토에만 온풍이 계속 남아있어, 맨츠를 차지한 호크런도 여름에는 코르로 내려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장군 도르반은 부하들에게, 코르가 얌전히 있는 것 같지만 분명 우리들 모르게 움직이고 있을 것이라며, 조만간 고문단이 한 번 더 내려가 코르군의 동향을 샅샅이 뒤지겠다고 말했다.

 

  * * *​​

 

  5월 초,

  똑! ... 똑! ... 똑!

  느긋하게 휴일의 늦잠을 즐기던 하멜은, 갑자기 창문 쪽에서 들리는 소리에 억지로 귀찮게 눈을 떴다.

 

  ‘오늘 같은 날 누가 또 돌맹이로 장난을 치는 거야?’

  부시시한 머리를 툭툭 털면서 하마의 입보다 더 크게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켠 다음, 널빤지로 만든 창문을 확 열어젖혔다. 눈부신 햇살에 하멜은 잠시 얼굴을 찡그린 뒤, 고개를 내밀어 2층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저쯤에서 샤키와 샤니가 손을 가볍게 들어 반갑게 인사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 선배? 그리고 샤니? 이 시간에 여긴 웬일이에요?” 잠이 덜 깬 표정으로 하멜이 말을 꺼냈다.

  “늦잠을 방해한 건가?” 샤키가 웃으며 말했다.

  “아? 아니요, 선배. 안 그래도 막 일어나려던 참이었어요. 근데 갑자기 어쩐 일로... 그리고 거기 말들은 또 왜 데려왔어요?” 하멜은 하품을 한 번 더 하면서 웅얼거렸다.

 

  “빨리 옷 갈아입고 나와. 해가 벌써 저만큼 떴잖아. 하멜, 우리 말 타고 브로(Bro)강에 가자. 근사한 도시락도 먹고. 오빠랑 내가 다 준비했으니까, 너는 그냥 몸만 오면 돼. 사실은 저번에 네가 날 살려준 것에 대해 이렇게라도 꼭 보답을 하고 싶었어.” 어느 때보다 예쁘게 사복을 차려입은 샤니가 다정스럽게 말했다.

  “어, 그 그래. 근데 뭘 보답을 해. 난 그냥 동료로서 할 일을 한 것뿐인데... 하여간 알았으니 조금만 기다려.” 하멜은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 하멜이 밖으로 나오자, 세 마리 말의 갈기털을 번갈아 쓰다듬고 있던 샤키가 “오늘 특별한 약속이 있는 건 아니지?”라며 먼저 말했다.

  “아닙니다. 어차피 별 다른 계획도 없었어요. 그런데 이 말은 어디서 어떻게 빌리신 거예요? 그것도 세 마리 씩이나...” 하멜도 반갑게 말했다.

  “그건 나도 모르지. 샤니가 다 했으니까. 하여간 쟤는 이 나라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에반 대장군의 수하들보다, 정보도 더 빠르고 인맥도 더 넓다니까? 아무 곳에나 뭐든 부탁만 하면 척척인가봐.” 샤키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샤니는 “아이, 참. 오빠는?!”이라고 귀여운 잔소리를 했다.

 

  브로강까지 신나게 말을 한 번 달려보자고 샤키가 말하자, 하멜은 고개를 끄덕이다 잠시 머뭇거리더니 하이란도 부르자고 제안을 했다. 그러자 샤니는 말도 세 마리 뿐이고, 휴일이니까 그냥 자게 놔두자고 말하며 입을 삐죽거렸다.

  하지만 하멜은, 지난 유격 훈련에서 수석을 놓쳐서 기분도 우울할 테니 이왕이면 같이 데리고 가자고 고집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 위에 먹필로 뭐라고 쓰더니 그것을 다시 꼼꼼하게 접었다.

  “또 뭐를 접는구먼. 하이란에게 보내려고? 말이야 여자 둘이서 한 마리에 타도 되니까 가능하다면 하멜의 뜻대로 함께 가지 뭐.” 샤키는 하이란이 나오기를 은근히 기대하며 말했다. 그러자 샤니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 오빠를 확 째려보며 “됐어! 내가 하멜 뒤에 탈 거야!”라고 앙칼지게 말했다.

 

  하멜은 날렵한 모양으로 접은 종이학을 저 멀리 여학생 기숙사를 향해 몇 번 조준한 뒤에, 그것을 힘껏 날렸다. 그러자 종이학은 쉭~ 소리를 내며 떠올라 산들바람에 실려 곧장 그리로 날아갔다.

  “넌 뭐든지 하늘을 날아다니게 하는 데는 천재구나?!” 샤니는 도저히 하멜을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한참을 날아가던 종이학은 2층 하이란 방의 반쯤 열린 창문 틈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그렇지!" 하멜은 주먹을 불끈 쥐며 자신의 솜씨를 봤냐는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창문을 활짝 열어 본 하이란은 저 멀리서 손을 흔드는 하멜을 발견하고는 신이 나서 부랴부랴 몸단장을 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하이란도 밖으로 나왔다.

  말이 세 필 뿐이라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말은, 오늘 나들이의 손님인 하이란에게 양보를 하겠다고 샤니가 먼저 말했다. 하이란은 퉁명스럽게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말에 올랐고, 당연히 샤니는 그녀의 오빠랑 탈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샤니가 갑자기 하멜의 말로 냉큼 올라가버렸다.

  “자, 하멜, 출발하자고!” 샤니는 유쾌하게 말하며 말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찰싹 때렸다.

  그러자 하이란은 갑자기 얼굴색이 변했다. 하지만 그런 걸 내색하는 게 꽤 자존심이 상했는지, 하이란은 제일 앞서 말을 몰며 뒤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네 사람은 서로 경주를 하듯 힘차게 말을 달렸다. 더없이 맑고 푸른 하늘이 이들 앞에 펼쳐져 있었다. 시원한 강바람은 흐르는 땀을 시원하게 닦아주었고, 아름드리 버드나무는 가지를 길게 늘어뜨린 채 말발굽 소리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해군사령부가 있는 브로강의 항구 근처까지 달려온 네 사람은 강가에 좋은 자리를 잡고 앉아 휴일의 기분을 만끽하기 시작했다.

  

  “짜잔!” 샤니가 보자기를 풀어 놓으며 말했다.

  “이게 뭐야?” 하이란이 물었다.

  “하멜이 아니었으면 난 지금 저 세상 사람이나 마찬가지야. 고마운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음식을 좀 준비했어.” 샤니가 수줍게 말했다.

  “이거 다 네가 준비한 거야?” 하이란은 적잖이 놀라며 물었다.

  “응, 오늘 아침에 내가 손수 만든 거야. 여기 술도 많이 챙겨왔어. 한 번 마셔봐.”

  “아니 언제 어디서 이런 음식을 만들었대? 그리고 술은 또 어떻게 몰래 기숙사로 가지고 온 거야? 사감에게 들키면 어쩌려고?” 하이란은 심기가 불편해졌다.

  “내 동생이 뭔가 일을 하면, 감찰부보다 보안유지가 더 철저하다니깐? 하여간 쟤는 나도 못 말려, 하하” 샤키는 하이란의 속내도 모르고 그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네 사람은 술을 가득 채운 잔을 높이 들고 한 마디씩 했다.

  “하멜, 너 덕분에 난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어. 너도 코르에 있는 동안은 좋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멋진 인생을 살길 바랄게...” 샤니가 다정한 목소리로 먼저 말했다.

  “어 그, 그래... 뭐 별로 한 일도 없는데... 어쨌든 고맙다.” 하멜은 하이란의 눈치를 살피며 약간 말을 더듬었다.

 

  “대단한 일을 한 하멜, 축하해! ... ... 그리고 나한테 80점 감점을 주신 샤키 오빠! 오늘 우리 술 한잔하면서 서로 감정 좀 풀어야겠죠?” 하이란은 샤키에게 술잔을 들이대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이내 하멜도 째려보았다.

  “오빠? 웬 오빠? 너 언제부터 우리 오빠한테 오빠라고 그랬어?” 샤니가 뜻밖이라며 하이란에게 따져 물었다.

  “왜? 나보다 오빠니까 오빠지. 학교 안에서나 선배님이라고 불렀으면 됐지, 밖에 나와서까지 똑같이 불러야 되는 건 아니잖아? 안 그러니? 그쵸, 샤키 오빠?” 하이란이 샤키를 보면서 능청스럽게 말했다.

  “어? 그, 그래. 너 편한 대로 불러. 그리고 저번에 감점을 준 건 모두가 보고 있어서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어. 수석을 놓치게 해서 정말 미안하다. 그런데... 그래도 그때 넌 정말 최고로 멋졌어! 자, 다 같이 건배하자. 하멜, 동생을 구해줘서 정말 고맙고... 하이란과 샤니, 너희들은 어쨌든 이스트 포인트 최고의 보물이다. 이런 멋진 생도들과 함께 영원히, 우리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건배!” 샤키는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느라 서둘러 술잔을 들고 축배만 재촉했다.

  “하멜, 고마워. 영원히 너의 은혜를 잊지 않을게. 우리의 멋진 하멜을 위하여, 건배!” 샤니가 말했다.

  “호크런의 몰락과 코르의 독립을 위하여, 건배!” 하이란이 크고 거칠게 소리쳤다.

  “어, 그럼 나는... 진정한 자유를 위하여, 건배?” 하이란의 기세에 눌린 하멜은, 어디 끌려온 사람 표정으로 얌전히 말했다.

   네 사람은 두 팔을 쭉 뻗어 서로의 잔을 부딪히고 술을 들이켰다. 엄청 열받은 하이란이 제일 빨리 단숨에 꿀꺽 술을 다 마셔버렸다.

 

  사방에 복숭아 꽃잎이 흩날리고, 브로강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햇빛이 찬란하고, 네 사람의 맑은 눈동자에 넘치는 젊음이 아름답고, 이를 하늘에서 바라보는 학의 날갯짓이 고고한... 한즈의 5월 어느날 풍경이었다.

 

  *            *            *

 

  은근히 술이 올라온 네 사람은 천천히 강변을 산책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서로 냉랭했던 하이란과 샤니는 언제 그랬냐는 듯 소리내어 웃으며 신나게 수다를 떨고 있었다. 뒤에서 따라가는 샤키와 하멜은 두 여자의 변덕을 보면서 “역시 여자들은 못 말려...”라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조금을 더 가니 아이들이 저쯤에 모여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삼삼오오 손을 잡고 돌아다니며 개미를 잡고 놀고 있었다. 어떤 아이가 개미굴을 제대로 헤집어 놓았는지, 갑자기 아주 많은 개미가 땅바닥으로 나와 사방에 기어다니기 시작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개미의 수는 점점 더 많아졌다.

  이것을 본 하멜은 ‘이 조그만 땅밑에 개미가 저렇게나 많이 있었다니... 아니 그럼 저 넓은 들판의 땅속에는  개미가 얼마나 많이 있다는 거야?’ ... 그냥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때 저쪽에 있던 한 아이가 “여기 다친 새가 있다! 야, 이리 와 봐! 우리 함께 구워 먹자!”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이 모두 함성을 지르며 달려갔다. 호기심이 발동한 하이란과 샤니는 곧장 아이들의 뒤를 따라갔다.

 

  어린 학 한 마리가 풀 속에서 허둥대고 있었고, 아이들은 이리 몰고 저리 몰고 하면서 학이 지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날개를 많이 다쳤는지 그 학은 날지는 못하고, 겨우 도망을 치느라 누가 봐도 곧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그러자 샤니는 아이들에게 불쌍한 학을 괴롭히지 말라고 타이르며, 착한 어린이에게는 음식을 나누어주겠다고 크게 말했다. 아이들의 관심은 이내 샤니에게로 쏠렸고, 샤니는 남은 음식을 꺼내어 모두 주어버렸다.

  하이란은 다친 학을 냉큼 잡아 샤키와 하멜이 있는 곳으로 옮겨왔다.

 

  

  “어딜 많이 다쳤나 봐. 어른 학들 틈에서 날다가 향기섬(Balm island)까지 가지 못하고 여기에 떨어진 게 분명해, 어휴 불쌍해라.” 다친 학을 안으며 샤니가 말했다.

  "정말 그런 것 같네..." 하멜이 차분하게 말했다.

  “그야 뭐... 학들이 한꺼번에 이동을 하다 보면 약한 애들은 이렇게 낙오되는 경우도 있는 거지 뭐. 보아하니 오래는 못살겠는데? 어차피 죽을 거 그냥 내버려 두지 그래?” 샤키가 무관심하게 말했다.

  “오빠는 어떻게 말을 그렇게 해요! 얘가 불쌍하지도 않아요? 가끔 보면 매사에 너무 매정하다니깐! 오빠는 지금 100점 감점이에요, 감점!” 하이란은 혀꼬부라지는 소리로 샤키를 맹렬히 쏘아붙였다.

  “어? 아니 난 그냥... 오래 못 살 것 같아서 불쌍하다고...” 하이란의 잔소리에 샤키는 말을 대충 얼버무리고 서둘러 바구니를 가져왔다. 어쨌든 학을 여기에 담아 빨리 기숙사로 데려가자고 말하며, 하이란에게 깎인 점수를 되찾으려 애를 썼다.

 

  “잠깐, 그 학을 이리 좀 줘 봐요.” 갑자기 하멜이 심각하게 말했다.

  "왜 그래?" 샤니는 이유를 몰랐다.

  “이게 뭐지?” 하멜은 이리저리 뜯겨 망가진 학의 날개 사이에 박혀 있는 아주 작은 곤충의 잔해를 손으로 집어 올렸다. 그리고 망원경에서 돋보기를 꺼내 가까이 대고 관찰을 하며 말했다.

  “글쎄? 이건... 메뚜기잖아?” 자세히 들여다보던 샤키가 놀라서 말했다.

  “날개 사이에 메뚜기의 잔해가 이렇게나 많이 박혀 있어요? 학이 메뚜기랑 같은 고도에서 날 일도 없을 텐데, 왜 이런 일이 생긴 거죠?” 어리둥절한 하이란이 샤키에게 물었다.

  

  “음... 그러게... 그런데... 그냥 메뚜기 몇 마리 말고, 엄청 많은 수의 메뚜기떼를 본 적이 있어?” 샤키가 하멜과 하이란을 쳐다보며 물었다.

  “아니요?” 둘은 동시에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너희들은 진짜 메뚜기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를 걸? 샤니야, 우리 어려서 국경 근처에 살 때, 너 나랑 메뚜기떼를 피해서 도망다녔던 거 생각나지?” 샤키는 오랜 기억을 떠올리며 말했다.

  “응, 정말 무서웠었어. 일반적인 철새의 숫자와는 비교가 되질 않았지. 하늘이 온통 메뚜기떼로 검게 덮였었잖아...” 샤니도 몸서리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랬다. 

  일단 메뚜기떼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면, 마을 사람들은 공포에 휩싸여 당장 집안으로 숨어 들어갔다. 밭에 키운 곡물이 남아있기를 기대할 수도 없었다. 그저 목숨만은 살아야 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는 알지 못했다. 얼마에 한 번 일어날지 예상할 수도 없었다. 그저 하늘이 벌을 내린다고만 생각했다. 그런 재앙이 닥치고 나면, 많은 사람들이 배고픔에 허덕였다.

  그런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맨츠(Mantz) 벌판에서는 코르에서 일어나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메뚜기떼가 자주 나타난다고 하였다.

  “하늘이 검게 덮일 정도라...” 하멜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여기 이렇게 있지 말고 빨리 기숙사로 돌아가요. 가서 뭐 좀 먹이고 치료를 해주어야겠어요.” 하이란이 재촉하자 샤키가 학을 안고 다 같이 발걸음을 돌렸다.

 

  *            *            *

 

  기숙사로 돌아온 하이란은 다친 학을 방 한 구석에 숨겨놓고 밤낮으로 정성껏 보살펴 주었다. 학에 대한 비밀은 오직 네 사람만이 알고 있기로 했다.

 

  아침과 저녁의 점호 시간에는 이불장 안에 넣고 담요로 덮어 들키지 않게 했다. 학에게 좋을 것 같은 먹이는 닥치는 대로 구해다 주었다.

  그런 하이란의 간호 덕분에 학은 차츰 건강을 회복해갔고 체중도 빨리 늘었으며 날갯짓에도 조금씩 힘이 들어갔다. 이름도 훈트(Huunt)라고 지어줬다. 잘 보살피고 훈련시키면 틀림없이 나중에 훌륭한 학이 될 것이라는 뜻에서 그렇게 지었다. 

  하이란은 훈트와 서로 눈을 맞추면서 자기에게 충직한 벗으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            *            *

 

  얀스의 ‘콕센 세계의 과학과 무기들’이란 강의는 생도들 사이에서 날로 인기가 높아져갔다. 코르에서는 잘 몰랐던 부분에 대해 성실하게 강의에 임하는 얀스에게, 이제는 다른 교수들도 큰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파르코와는 만나는 것조차 싫어하던 에반의 측근들도, 얀스와는 조금씩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이스트 포인트의 유력한 교수로서 자리를 잡아가는 얀스의 약진은 눈이 부실 정도였다. 파르코가 코르 안에서 십여 년에 걸쳐 쌓아 놓은 대단한 명성을, 얀스는 훨씬 더 빠르게 얻어내고 있는 것이었다.

 

  교수회관으로 들어간 하멜은 복도를 한참 지나 ‘교수 얀스’라는 명패가 붙어 있는 방을 두드렸다. 얀스가 빼꼼히 문을 열어 주위를 살피더니, 서둘러 하멜을 방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방이 더 멋있어졌네요? 편지도 많이 와 있고... 이스트 포인트에서 최고로 유명한 교수가 되더니, 전국에서 문의가 들어오고 또 강연 초청을 의뢰하느라 난리가 났나 봐요.” 탁자 위에 가득한 서신을 대충 뒤져보면서 하멜이 말했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왕자님. 그저 형식적인 인사말 정도인데요, 뭘. 어떻게... 생도 생활은 할 만 하십니까? 어디 불편한 데는 없으시고요?” 얀스가 웃으면서 말했다.

  “불편한 건 없는데, 언제 탈출할지 모르니 답답하기만 하죠, 뭐.” 입술을 빼죽 내밀고 한숨을 쉬며 하멜이 말했다.

  “그거야 저라고 크게 다르겠습니까? 이럴수록 더 힘을 내서 계속 방법을 찾아봐야겠죠. 그건 그렇고... 하이란 생도, 샤니 생도와 많이 가까워 보이시던데요. 두 사람도 왕자님께 마음이 있어 보이고요.” 살짝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얀스가 말했다.

  “그렇게 보였어요? 글쎄, 아직은 나도 잘 모르겠어요. 어쨌든 여러 사람과 친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그나저나 무슨 얘기 들은 건 없어요?” 하멜이 진지하게 말했다.

 

  “사실 그것 때문에 오늘 왕자님을 제 방으로 오시게 한 겁니다. 제가 요즘 에반 쪽 사람들과도 좀 가깝지 않습니까? 파르코에게도 유성에 대해 다시 넌지시 물어보긴 했는데, 그 친구는 잘 모르는 건지 아니면 저를 경계해서 그러는 건지... 여전히 별 대답이 없더라고요. 그런데 어제 나리프, 토리크 장군과 저녁을 하면서 유성에 대한 운을 좀 띄웠더니, 나리프가 술김에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몇 년 전에 자기가 사신단으로 디퍼슨에 다녀온 적이 있는데, 거기서 어떤 대신이 19년 전 여름에 퓨그의 하늘을 낮게 날아간 예사롭지 않은 초록빛 큰 별이 있었다는 얘기를 하더라는 겁니다. 사실 자기는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제가 유성 얘기를 하니까 갑자기 그 생각이 났다고 하더군요.”

  “유성이 낮게 날아갔다고요? 그리고 그걸 디퍼슨에서도 보았고? 그럼 얀스의 예상대로 '사자의 심장'은 맨츠 벌판 어딘가에 떨어진 게 확실하네! 코르에서는 전혀 모르고 있으니 말이죠!”

  “그렇겠지요. 또한 신비한 유성을 차지하면 절대적인 힘을 얻을 것이라는 말이 코르나 퓨그에도 있는 듯싶었습니다. 전설에 나오는 ‘황제의 별’은 일반인이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라 지금의 왕이나 나중에 왕이 될 자격이 있는 사람만이 차지할 수 있는데, 그 유성이 황제의 별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호크런의 힘이 강성해진 이유나 '7일 전쟁'을 일으킨 이유도 분명 그것을 차지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나리프는 믿고 있었습니다. 뭐가 되었든 이미 엎지러진 물이라 어차피 자신은 이제 별 관심이 없다는 말도 했고요.”

 

  “그래요? 그럼 우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죠? ‘사자의 심장’이 맨츠에 떨어졌다고는 해도, 지금은 호크런이 자기의 성 안 어딘가에 잘 보관하고 있을 게 분명하잖아요.” 하멜이 심각하게 말했다.

  “음... 저는 파르코와는 거리를 좀 두려고 합니다. 코르를 탈출하는 데 그 친구는 별 도움이 되질 않을 것 같아서 말이죠. 모든 힘은 에반에게 집중되어 있으니까, 에반 측 사람들과 더 친해지는 것이 우리에게도 유리할 것 같습니다. 왕자님도 에보크 생도와 좀 가까워지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에보크? 우웩! 그 밥맛없는??”

  “네. 그리고 에반 쪽에서 하이란을 아주 안 좋게 보기 때문에, 왕자님도 하이란 생도와는 거리를 좀 두시는 게 어떨까 합니다. 무예가 뛰어난 생도임에는 틀림없지만 왕실이나 권력층 누구와도 관계가 없으니, 우리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나중에 불필요한 장애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무슨 뜻인지는 잘 알겠는데요, 잘 지내던 하이란과 갑자기 거리를 두는 건 더 이상할 것 같고, 에보크라... 에보크... 얀스가 시키는 일이니 그대로 따르는 게 나로서도 가장 현명한 방법이겠지만... 그게 참... 하여간 노력은 해보도록 할게요." 하멜은 억지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왕자님, 저의 스승인 레오 박사는 늘 이런 격언을 얘기해주셨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꼭 한 가지는 버려야 나머지 모든 것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요. 왕자님과 제가 '사자의 심장'을 차지하여 네론(Nehron)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우리도 꼭 한 가지는 버려야할 것입니다. 차지해야 할 모든 것은... 당연히 '사자의 심장'이자, 앵글 왕국 크롬 1세의 몰락이며, 왕자님께서 콕센(Coxen)을 통일하고 역사상 최초로 황제에 오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버려야 할 꼭 한 가지는... 현재로서는... 안타까우시겠지만... 제 생각엔... 분명 하이란이 될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확신합니다!” 얀스는 굳은 표정으로 거의 왕자를 노려보는 듯하며 말했다.

 

  하멜은 강렬한 얀스의 시선을 애써 피하느라 속이 영 불편해졌다.

  자기가 좀 느슨해진다 싶으면 망설이지 않고 다시 조여 주는 얀스의 충성심이 더 없이 고마운 건 변함이 없었다. 얀스의 판단에 대한 신뢰가 줄어든 것도 더더욱 아니었다. 

  하지만 하이란을 멀리 하고 에보크와 가까워지라는 얘기는 솔직히 듣기 거북했다.

  그래서 하멜은 더 혼란스러웠다. 지금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얀스에게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은근히 목걸이 반지가 다시 가슴을 조여오기 시작했다.

 

  *           *           *

 

  유격 훈련도 다 끝나고 5월 중순에 들어서자, 각종 동호회에서는 신입생들을 더 많이 유치하려 피 튀기는 쟁탈전을 벌였다. 4학년은 임관을 앞두고 전국 각지의 육군 사단이나 해군 함대를 돌면서 현장 체험을 하느라 학교 내에 거의 있지를 못했다. 사실상 모든 동호회는 3학년까지가 마지막 활동이었다.

 

  1학년 기숙사와 여학생 기숙사 앞에는 다양한 홍보 벽보가 곳곳에 붙어 있었고, 동분서주하며 자기 동호회의 자랑을 늘어놓는 2, 3학년 선배들의 수다 때문에, 1학년 생도들은 가히 머리에 지진이 날 지경이었다.

 

  다른 생도들은 자신에게 가장 어울릴 동호회를 고르느라 행복한 고민을 좀 하고 있었지만, 에보크는 망설임 없이 단번에 '팸므(Famm) 검도부'에 가입했다. 물론 에보크를 따르는 몇몇 생도도 함께 들어갔다.

  사실 이 부서는 파르코 장군이 작년에 직접 만든 동호회였다.

  생도들이 육군 교수의 방침에만 너무 쏠려 물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다고 판단한 파르코는, 물과 친해질 수 있게 하는 방법을 찾다가 코지(Cozee)섬의 여전사들이 바다에서 훈련하는 것에서 착안하여 그와 비슷한 검도 경기를 만들었다.

 

  먼저 계곡에 가까이 접한 이스트 포인트 교정의 구석진 공터에 새로 연못을 만들어 그 이름을 *팸므(Famm)천이라 하고 주위에는 관중석도 지었다. 계곡의 물을 끌어오느라 땅 속으로 수로도 만들어야 하는 대공사였지만, 파르코는 힘든 내색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 수고를 감내하며 작업을 감독했다. 

  그리고 연못이 완성되자 커다란 거북이 수십 마리를 집어넣은 다음, 거북이의 등 위에서 검술을 겨루도록 여러 규칙을 정하였다. 결국 마지막까지 물에 빠지지 않는 생도가 우승을 하는 무예가 바로 '팸므 검도'인 것이다.

 

  ‘팸므 검도부’는 요즘 생도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도 있고 회원 수도 빠르게 늘어가고 있는 부서 중 하나였다. 하지만 파르코는 자신이 만든 이 동호회의 지도 교수직은 한사코 사양했다. 오히려 자신은 팸므천을 관리하고 청소하는 이스트 포인트 경비대를 지휘하겠다고 자청하여 다른 교수들로부터 웃음거리가 되어버렸다.

  

  만약 파르코가 팸므 검도부의 지도 교수였다면 에보크는 애당초 가입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지도 교수는 아버지 에반의 최측근인 나리프 장군이 맡고 있으니 에보크는 망설일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하이란은 '궁술부'를 택할 생각이었다.

  단거리 장거리 할 것 없이 활솜씨를 겨루는 데는 궁술부만한 것이 없다고 판단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장 가입을 하지는 않고 일단은 좀 관망하고 있었다. 어느 부서에 들어갈 것이냐고 하멜에게 먼저 물어보지도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샤니의 폭포수 사건과 브로강 산책 이후로 하멜과의 관계가 좀 소원해진 게 사실이었다. 하멜이 왠지 자기를 좀 멀리한다는 느낌도 들었다.

  하멜과 샤니가 가깝다는 소리가 주위에서 들리는 것 또한 그녀의 마음을 편치 않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하멜에게 먼저 화해의 손짓을 내밀기에는, 하이란의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았다.

  

  지난번 유격 훈련 때 하멜이 보여준 글라이더는 생도들 사이에서 단연 화제였다. 글라이더의 무한한 가능성과 하멜의 탁월한 조종술을 샤키가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샤키는 자신을 따르는 생도들과 함께 팸므 검도부를 미련없이 나와 새로 글라이더부를 만들었다. 그리고 어떤 동호회에 가입할지 망설이고 있는 하멜을 설득하는데도 성공했다.

 

  하지만 이스트 포인트 교수진은 생도들이 임의로 만든 글라이더부에 정규 동호회로서의 자격을 주지는 않았다. 파르코와 얀스는 자격을 인정하자며 여러 교수를 설득하려고 노력했으나, 육군 출신이자 에반의 측근들이 대부분인 교수진은 이들의 제안에 동의하질 않았다.

  그래서 예산 지원도 없었고 회원들을 위한 별도의 공간도 마련하기 어려웠다. 아마도 에보크의 입김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결국 샤키와 동료들은 파르코 장군이 마련해 준 허름한 창고를 개조해 그곳에서 글라이더에 대한 연구와 제작에 빠져들었다.

 

  샤니도 오빠의 권유로 글라이더부에 가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하이란은 신경이 많이 날카로와졌다. 이미 궁술부에 마음을 두고 있었는데, 솔직히 하멜 때문이 아니라 샤니를 견제하려는 이유 때문에 글라이더부로 결심을 바꿔야만 한다면, 그녀의 자존심은 여지없이 구겨질 판이었다.

  하이란은 일단 모든 결정을 보류하고 당분간 지켜보기로 마음먹었다. 속도 많이 상했고 하멜도 많이 미웠지만, 아직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 실제로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의 영내에는, 생도들의 휴식을 위한 작은 연못인 '범무천(汎武泉)'이 있음.

  

  글라이더부는 오후에 활동을 하다가 대장군 에반과 가까운 교수들에게 지적을 받기 일쑤였다.

  정규 동호회도 아닌데 뭔가 대단한 걸 날리겠다는 심산으로, 큰 천을 잘라 어떤 기구를 만들어 이리저리 설치고 다니는 꼴이 보기 싫다는 에보크와 그 동료들의 건의가 빗발쳤기 때문이었다.

  할 수 없이 글라이더부 회원들은 오후에는 설계에 집중하고, 밤이 되어서야 창고에 모여 글라이더를 제작해야만 했다. 에보크의 훼방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거의 매일 모이다시피 했다.

  

  이미 종이 글라이더 날리기에 능통해 가장 이상적인 비행술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게 된 하멜 덕분에, 이들의 실험은 일취월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육군 교수들이 글라이더의 가능성에 대해 무관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의 글라이더로는 장거리를 비행하거나 고공정찰을 하기에 기술적으로 아주 많이 부족한 상태였다. 육군이 보유한 정찰용 송골매가 하는 역할에 비해 별다른 차이가 없으니, 육군 교수들을 설득하는데 한계가 있음을 얀스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멜은 가끔 하이란에게 다가가 함께 글라이더부에서 연구를 하지 않겠냐고 물어보았지만, 단단히 틀어진 하이란의 심사는 쉽게 풀리질 않았다. 지금 와서 낼름 좋다고 들어가기엔 하이란의 꼿꼿한 자존심이 절대 허락하질 않았다.

  

  비행술에 대해 차츰 지식이 쌓이면서 원형극장에서 하이란이 제기했던 적군의 첨단장비는 글라이더가 맞을 것이라는 확신이 샤키, 샤니, 하멜에게 들었지만... 문제는 속도였다.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데까지는 큰 무리가 없을 만큼 글라이더에 대한 기술의 진보를 이루었지만, 아무리 노력을 해봐도 그 그림자가 움직인 속도를 따라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토론 끝에 세 사람은, 퓨그의 글라이더에는 파르코 장군이 개발한 나사 회전체처럼 바람개비를 이용해 공기를 빨아들이고 그것을 다시 뒤로 내보내서 추진력을 높이는 어떤 동력장치가 달려 있었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최종적으로 그렇게 결론이 나자, 그 다음에는 어떤 동력장치를 어떻게 만들어 어디에 달아야 퓨그의 글라이더를 따라 잡을 수 있을까? 하는 숙제를 풀어야만 했다.

  

  우연한 기회에 샤키는 크란(Krann)산에 들러 반가운 귀인을 만났다가, 그분의 소개로 질이 아주 좋은 흑연을 얻었다. 그리고 그것을 고운 가루로 만들어 자기가 개발한 기구에 넣고 연료와 함께 연소시키는 실험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

  일반 석탄보다 탄화도가 높아 일정하게 연소하는 흑연 덕분에, 결국 샤키는 바람개비를 한쪽 방향으로만 돌려 강력한 추진력을 내뿜게 하는 장치를 만들 수가 있었다.

  중요한 문제는 얼마나 오랫동안 기복이 없는 상태로 그 동력을 계속 유지시키냐는 거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 세 사람은 거의 매일 밤을 새다시피 하며 연구에 매달렸다.

  평소에는 관심도 없던 송골매들이 가끔 이들의 연구실 주변을 배회하는 눈치가 보이기도 했다. 아마도 에반의 매 '빌로'가 분명하리라는 짐작도 들었다. 하지만 샤키는 빌로가 뭘 보든말든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이들의 작업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것은 다름 아닌 얀스였다.

  그는 이런 장치의 이름을 **‘엔진(engine)’이라고 불렀다. 콕센에서부터 스승인 레오가 이미 구상하고 있었던 계획 중의 하나였고, 얀스를 비롯한 레오 박사의 제자들이 스승의 그 천재적인 생각에 '엔진'이라는 단어를 헌정했기에, 얀스는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글라이더부에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생도들이 막상 본격적인 연구에 들어갔을 때, 장군 파르코는 계속 바쁘다는 이유를 들어 이들과 거의 함께 하지를 못했다.

 

  어쨌든 샤니는 연구실에서 하멜과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마냥 즐거웠다. 하지만 하멜의 일거수일투족을 여러 경로를 통해 알고 있던 하이란은 크게 상처를 받았다.

  반면에 하멜은, 두 여자를 사이에 두고 애정을 저울질할 틈이 없었다. 퓨그를 능가하는 글라이더를 만들지 못하면 코르를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샤키와 샤니의 목표는 전쟁의 승리였지만, 하멜의 목표는 디퍼슨으로 곧장 날아가는 것임을 얀스는 반복해서 왕자에게 환기시켰다. 또한 하멜이 연구에 몰두하느라 하이란과 자연스럽게 거리가 생기는 것을 매우 고무적으로 보고 있었다.

 

 

  ** engine의 어원은 ‘창의적이며 절묘한 장치’라는 뜻이며, 중세시대에는 투석기와 같은 공성무기를 뜻하는 ‘군사목적의 기계장치’란 의미였음. 또한, ‘천재’라는 뜻의 genius도 engine과는 그 어원이 사촌지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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